20세기 중반 세계는 자유화 공산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대립 충돌하고 있었다. 그 당시 월남은 17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단, 남쪽의 월남공화국은 자유진영의 일원이었다. 북쪽의 공산세력에 의하여 월남공화국이 존립위기에 처하자 1964년 5월9일 미국의 존슨대통령은 한국을 포함한 25개 자유우방국에 대하여 월남공화국을 지원해 줄 것을 호소하였고 동년 7월15일 월남정부가 우리정부에 정식으로 지원요청을 했다. 그리하여 태권도 교관단을 포함한 국군 제1 이동외과병원이 월남으로 이동, 의료봉사활동권도를 보급했다. 이어서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에 의해 월남의 지역건설을 적극 지원하는 건설지원부대가 파견되었고 전쟁이 확대 되면서 미국의 강력한 요청으로 전투부대가 이동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배경에는 한국군전투부대가 참전하지 않을 경우 주한미군이 월남으로 이동한다는 설이 대두되고 있었으면 이 같이 된다면 제2의 6.25전쟁이 일어날 것이란 불안감도 있었지만 당시의 국제 역학상 한반도의 전쟁방지, 그리고 세계평화와 자유수호에 기여한다는 우리국군의 월남전 참전은 필연적이었다. 월남전에서 우리 국군은 독립적인 작전지휘권을 확보하고 중대기지전술로 책임지역을 평정하는 한편 지역건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월남정서에 맞는 양민구호사업을 꾸준히 실시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국군은 월남에서 최상의 군대로 역할과 소임을 완수했다. 1975년 4월30일 공산세력에 의하여 자유진영의 일원국이었던 월남공화국은 사라졌다. 미군을 위시한 연합군의 지대한 노력과 지원이 있었음에도 공산세력과 맞서는 전략전술 부재와 끊임없는 책동과 분열, 그리고 연합군이 철수하고 미국의 지원이 삭감되자 전투의지가 나약해져 결국 붕괴되고 만 것이다. 특히 우리정부는 사회주의월남과 경제협력 외에도 양국간 군사협력을 합의 했는데 이와 같은 현실에서 파월국군의 명예회복이 쉽지않은 터에 미국의 용병설까지 겹치고 있다. 시대가 달라졌다 해도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여 참전후유증의 최소화와 파월국군의 명예는 회복되어야 한다. 이것은 국민의 안보관 정립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 월남전 파병 1964년 한국정부가 한국의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는 월남정부의 서한을 수락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정부의 월남파병 결정은 국회 제44,47,52,55회 국회본회의에서 해외파병 동의안이 가결됨에 따라 비전투 부대인 제1이동외과병원과 비둘기부대의 월남파병을 시작으로 주월한국군 사령부 창설과 맹호부대, 백마부대, 청룡부대, 십자성부대, 백구부대, 은마부대 등 한국군 전투부대의 월남전파병은 1964년 7월 18일 파리평화협정에 따른 1973년 3월 23일 철수 시까지 8년 8개월에 걸쳐 연인원 312,853명이 참전하였다. 그 기간 중 국군은 사살 41,462명, 포로 4,633명, 귀순 2,483명 등의 전과를 올렸으나 국군도 사망 5,077명(전사:4,597, 순직:277, 기타 사망:293) 전상자 10,962명의 인명손실을 입었다
*비전투부대 파병 미국은 1964년 5월에 한국을 포함한 25개 자유우방 국가들에게 월남지원을 요청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의 요청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것을 지시 하였고 정부는 월남사태는 한국안보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자유우방의 지원으로 공산침략을 물리친바 있는 한국이 공산세력의 도전을 받고 있는 월남을 도운다는 것은 도의적 의무라는 명분을 들어 우선 1개 이동외과병원 요원 130명과 태권도교관단 요원 10명 등 비전투병력 140명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1) 제1 이동외과병원/태권도 교관단(1차 파병) 제1차 파월병력 140명은 국회의 동의를 얻은 후 1964년 9월11일 우리해군 LST편으로 부산항을 출항하여 22일 월남의 수도 사이공 항에 도착하였으며, 제1이동외과병원은 붕타우에 있는 월남 육군정양병원에 주둔하게 되었고, 태권도 교관단은 3개조로 나뉘어 육군사관학교, 해군사관학교, 육군보병학교에서 월남군을 지도하였다. (2) 군사원조단:비둘기 부대(2차파병) 1964년 8월 2~4일에 발생한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월남에 대한 군사지원을 증가시키면서 압력수단으로 월맹을 폭격하였고, 이에 맞선 월맹은 미군장교숙소와 미공군기지를 공격하는 등 월맹군의 도발이 격화되자 미국은 월남에 대하여 종래의 소극적 지원에서 적극적인 대응조치를 강구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미국 (1964년 12월18일)은 우리정부에 국군의 추가 파병을 요청하였고, 월남정부 또한 1965년 1월 2일 국군의 2차 지원에 관한 공한을 우리정부에 보내왔다. 정부와 국방부는 미국과 월남의 2차 파병 요청에 따른 협의를 거쳐, 국군의 해외 추가 파병에 대한 동의안이 1965년 1월 26일 제47회 임시국회 제7차 본회의에서 가결(찬성106, 반대 11, 기권 8)되자, 국방부는 1월 29일 국방부 일반 명령 제5호로 강원도 현리에 위치한 제6사단에서 주월한국군사원조단 본부를 창설하여 평화를 상징하는 뜻의 '비둘기 부대'로 명명하고, 단장에 조문환 준장(육사7기)을 임명하였다. 2월5일 김성은 국방부장관을 비롯한 군수뇌부가 참석한 가운데 한국군사 원조단 결단식이 거행되었으면, 2월 9일에는 서울운동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3부요인이 참석한 가운데 환송식이 베풀어 졌다. 한국군사원조단은 1965년 2월 13일 장교 9명이 선발대로 오산에서 항공편으로 출국하였고, 본대 1,283명은 3월 10일 인천항을 출발하여 16일 사이공에 도착하였다. 비전투요원 2,000여명으로 편성되어 후방지원과 건설지원 임무를 띤 건설지원단은 사이공 동북방 22Km의 디안(DiAn)에 주둔했다. 주월 한국군사원조단은 1965년 9월 25일 주월한국군사사령부가 창설됨에 따라 동일부로 해군수송대를 배속 해제함과 수도사단/해병 제2여단(3차파병) (※ 참고 : 브라운 각서) 통킹만 사건 이래 월맹측이 계속해서 비엔호아 미공군기지, 탄손누트 공항, 사이공 미군숙소와 중부 고원지대 풀레이크 미공군기지를 공격함으로써 미군측은 항공기를 포함한 많은 인명피해를 입었다. 이에 존슨 미국 대통령은 북폭을 재개토록 명령하였고 이에 따라 월남전은 점차 가열되어 갔다. 미국은 월맹에 북푹을 계속하면 그들이 베트공에 대한 지원과 남부 침투를 중지하고 협상테이블로 나올 것을 기대하였으나, 월맹은 미국의 협상을 거부하고 병력을 부대단위로 침투시켜 월남군 진지를 하나씩 유린시키는 등 월남전이 확전 되어가자 미국은 가일픙 복푹을 강화하는 한편 지상에서도 확전을 단행하였다. 이에 미국은 월남이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많은 병력을 월남으로 이동시키면서 1965년 초 존슨 미대통령 특사인 로지(Henry C.Loge)는 박대통령을 방문 한국군 1개 전투사단의 파병을 요청하였다. 당시 미국은 본토의 예비부대와 해외주둔부대를 월남전에 투입하였으므로 주한 미군 2개사단도 언제 월남으로 이동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박대통령은 국가안보가 최우선이라는 확고한 신념속에 미국의 전투부대 파병요청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차에 이동원 외무부장관이 전투부대 파병문제로 브라운 주한미대사와 협상에서 ;파월병력의 상한선은 5만명 이내로 할 것등 브라운 미 대사에게 ①한국군 현대화를 지원할 것 ②북한군 침공시 미군이 즉시 출병할 수 있도록 한,미방위조약을 개정 할 것 ③한국군 파월에 따른 일체의 경비를 미국이 부담할 것 ④월남에서 사용할 군수품 공급 등 한국의 월남시장 진출을 보장 할 것 등의 4개 선행조건을 제시하였다. 한편, 1965년 5월 16일 미국 방문길에 오른 박대통령은 17일과 18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국측은 1개 전투사단 파월을 전제로 ①북한군 재침 시 미국의 즉각 개입 및 주한미군 계속주둔 ②한국군 장비현대화 ③군원이관 중단 ④한,일협정 체결 ⑤결제개발 5개년 계획을 위한 장기개발 차관 ⑥한,일 국교정상화 등 한국측 요구사항 대부분을 수용하였다. 전투부대 파병에 관하여 미국과 합의한 한국정부는 부대편성과 대미협상 등 본격적인 준비를 하면서 7월 2일 국무회의를 열어 1개 전투사단의 파견을 결정하였고, 이에 대한 동의안이 1965년 7월 12일 국회에 상정되었다. 국회는 8월13일 야당의원들이 의원직 사퇴서 제출로 불참한 가운데 여당과 무소속 의원만으로 표결에 붙여 찬성 101, 반대 1, 기권 2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월남 증파안을 통과시켰다. 국방부와 육군본부는 몇 차례의 회의를 거듭한 끝에 파월부대로 제1야전군사령부가 선정해 보고한 제27사단 대신 전투서열 1위인 수도사단(맹호부대)으로 결정하고, 사단장에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채명신 소장(육사 5기)을 임명하였다. 한편 해병대 사령부는 한국전쟁 당시 혁혁한 전과를 기록한 해병 제1사단 2연대를 파월부대로 선정하였다. 그런데 연락단 (단장 이세호 합참 전략정보국장)이 사전에 주월미군 및 월남군측과 교섭한 결과 육군은 퀴논(Qui Nhon) 지역에, 해병은 캄란(Cam Ranh) 지역에서 임무를 수행할 것이라고 보고함에 따라 해병대의 규모를 연대에서 독립작전이 가능한 여단규모로 증편조정하고 여단장에는 해병대 사령부 관리국장 이봉출 준장(해병 특교대2기)을 임명하였다. 수도사단과 해병 제2여단 등 전투부대에 대한 파병이 결정되자 이들 부대에 대한 군수지원을 위한 수도사단 예속으로 군수사령부를 창설(1965.9.1), 사령관에 이범준 준장(육사8기)이 임명되었다. 수도사단과 해병 제2여단의 파월로 주월한국군은 군사원조단을 포함하여 25,000여 명에 달하게 되어 이들 부대들을 통한지휘 할 사령부의 편성이 불가피하였다. 이에 국방부일반명령 제16호로 1965년 9월25일 주월한국군사령부를 창설, 사령관은 채명신 수도사단장이 겸무하도록 하였다. 제3차 파병부대인 수도사단과 제2해병여단은 1개월 정도의 교육훈련이 끝나자 3개 제대로 나뉘어 월남으로 출발을 하였다. 1965년 9월 16일 육군 283명과 해병 95명으로 편성된 선발대가 미 수송기 편으로 출국한데 이어 제1제대인 해병 제2여단은 9월 20일 포항에서 박대통령과 내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결단식을 가진 후 10월 3일 부산항을 출항하여 9일 캄란에 도착하였고, 10월 12일에는 여의도기지(K-16)에서 박대통령 임석하에 수도사단에 대한 환송식이 거행되었으면 수도사단 제1연대가 주축이 된 제2제대는 10월 16일 부산항을 출발하여 22일 퀴논에 도착하였으면, 기갑연대가 주축이된 제3제대는 26일 부산항을 출발하여 11월 1일 퀴논에 도착함으로써 제1차 전투부대의 파월이 완료되었다. (2) 수도사단 제26연대/제9사단(4차파병) 전장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려면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린 미국은 한국군이 월남전 수행을 위해서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하였으며 1965년 12월 러스크 미 국무장관은 제20차 유엔총회 참석차 방미중이 이동원 외무부장관에 제4차 파병을 요청하였다. 정부는 미국이 제3차 파병시까지의 한,미 합의사항을 성실히 이행하고 있지 않은 이유는 대미협상과정에서 합의사항이 구두약속이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1966년 2월 25일 한,미 양국은 이동원 외무부장관과 브라운 주한 미대사 간에 14개 조항으로 된 합의의사기록에 서명하였다. 이번에는 문서화하려는 의도 하에 합의의사록을 작성 제의하였다. 미국측과 협의가 끝난 직후 1개 전투사단과 1개 전투연대로 구성된 제4차 파병안은 1966년 2월 28일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3월2일 국회에 제출되었으며, 국방위원회에서 12일동안 열띤 논쟁끝에 3월 18일 표결처리 되었고, 제55회 국회 214차 본회의에 상정되어 밤을 꼬박 지새우는 난항끝에 3월20일 오전 재석125명 중 찬성 95명, 반대 27, 기권 3명으로 통과되었다. 이에 앞서 국무회의에서 국군 증파를 결정하자 미국은 일방적으로 합의록 내용을 수정하고 형식도 합의의사록에서 '브라운각서'로 바꿔 3월 7일 우리 정부에 전달했다. 브라운각서'는 군사협조 10개조항과 경제협조 6개 조항 16개 항으로 되어있다. 전투부대 증파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수도사단 제26연대는 곧 부산항을 출발하여 6일만인 4월 15일 퀴논에 도착하여 남쪽지역에 전개하였는데 이로써 수도사단은 3개연대로 완전 편성된 전투사단으로서 보다 적극적이고 광범위한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파월부대로 지명된 제9사단은 한국전쟁 당시 백마고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려 '백마부대'라고 명명된 전통있는 사단(사단장 이소동, 육사2기)이었다. 제9사단은 수도사단의 경험을 토대로 인원선발 장비교체를 실시한 후, 약 2개월간의 강도 높은 교육훈련을 끝내고 3진으로 나뉘어 월남으로 출발하였다. 8월27일 중앙청에서 환송대회가 끝난 후 8월30일 부산항을 출발하여 9월25일 나트랑(NhaTrang)에 상륙하여 해병 제2여단이 주둔했던 투이호아(TuyHoa)의 작전지역을 인수하였고, 2진인 사단사령부와 제29연대는 9월20일 부산항을 출발하여 9월15일 나트랑에 상륙, 북쪽의 닌호아에 전개하였다. 제3진인 제30연대는 10월3일 부산을 출발하여, 8일에 캄란에 도착, 청룡부대가 담당하고 있는 판랑 비행장 경계임무와 제28연대가 담당했던 지역을 1960년대 후반에 들어와 TV와 신문 등 언론들이 계속해서 월남전의 비참한 전투장면을 보도함으로써 미국내에서는 반전여론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1968년 11월 미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닉슨은 1969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한 후 월남에서 단계적인 철군을 발표하였고, 7월부터 병력을 철수시키면서 월남화 정책(미국이 월남전을 월남인에게 맡기고 미군을 순차적으로 철수시키기로 한 감축계획)을 추진하였다. 미국이 병력 철수를 개시하자 전투부대를 파월한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및 태국 등 연합국도 이에 동조 병력을 철수하기 시작하였으며, 1972년 초에는 각각 100명 이내 상징적 병력만 잔류 시키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주월 한국군의 제1단계 철군이 개시된 1971년 말 주월 외국군의 현황은 미군을 제외한 자유우방군 가운데 주월한국군 만이 파월 당시 병력 수준인 47,860명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미국측에서 제시한 브라운 각서 대한민국 서울 1966. 3. 4. 이동원 외무부 장관 각하 각하께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월남 공화국으로 부터 월남 공화국에 대한 한국 전투부대 증파에 관한 요청을 접수 하였다고 본인에게 통지를 하였습니다 각하께서는 또한 귀국정부가 대한민국의 헌법절차에 의거하여 국회의 승인을 받는 대로 1개연대 전투단을 4월에 도착 시키고 1개 사단병력을 7월에 도착시키기 시작하는 내용으로 요청받은 원조를 월남 공화국 정부에 제공 하기로 결정 하였다고 진술 하였습니다 본인은 대한민국 정부가 월남전선을 한국의 안전과 직결된 대한민국의 제2전선이라고 간주 하기때문에 그와같은 대한민국의 결정이 취하여진 것이라는 귀하의 설명에 유의하였습니다 본인의 정부는 월남에서 싸우고 있는 자유세계의 군대에 대하여 이미 고도로 효가적인 기여를 증강 하려는 귀국 정부에 결정을 충심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본인은 대한민국의 안전과 발전에 있어서의 우리의 공동 이익에 비추어 합중국은 한국 방위의 안전이 유지되고 강화되어 또한 한국의 경제적 발전이 더욱 증진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다는것을 말씀드릴 권항을 부여 받았습니다 가. 군수 협조 1) 한국에 있는 대한민국 국군의 현대화 계획을 위하여 앞으로 수년 동안에 상당량의 장비를 제공한다 2) 월남 공화국에 파견되는 추가병력에 필요한 장비를 제공하며 또한 파월 추가병력에 따르는 일체의 추가적 원화경비를 부담한다 3) 월남공화국에 파견되는 추가병력을 완전 대치하는 보충병력을 정비하고 훈련하며 수효 재정을 부담한다 4) 대한민국의 대간첩 활동 능력을 지원하기 위하여 한.미합동 연구 결과에 따라 양국 정부에 의하여 필요하다고 결정되는 요구를 충족 시키는 데 기여한다 5) 대한민국에서 탄약생산을 증가하기 위하여 병기창 확장 시설을 제공한다 6) 대한민국측 전용 통신시설을 제공할 것이며 그 성격은 서울과 사이공에 있는 합중국및 대한민국의 관계관에 의하여 합의될 것이다 본 시설은 월남 공화국 주둔 대한민국 부대와의 통신을 위한 요구를 충족할 것이다 7) 파월 대한민국 부대를 지원하기 위하여 대한민국 공군에 C-54 항공기 4대를 제공한다 8) 막사및 독신장교 숙사와 취사 식당 위생및 오락 시설 등 부대 복지를 위한 제 관련된 시설을 개선 하는데 필요한 재원을 군사원조 계획 잉여물자의 매각 대금에서 제공한다 9) 파월 한국군 전원에 대하여 1966년 3월 4일 비치 장군및 김성은 국방부 장관간에 합의된 율에 따라 해외 근무수당을 부담 한다 10) 월남에서 발생하는 전사상자에 대해서는 최근 한. 미합동 군사위원회서 합의된 액수의 2배 비율로 보상금을 지불한다 나. 경제 협조 1) 이러한 추가병력이 월남 국내에서 1개 예비사단 1개 예비 예비여단 및 지원 부대를 동원 유지함에 소요되는 순 추가비용의 전액과 동액 의 추가 원화를 한국 예산을 위하여 방출한다 2) 상당수의 대한민국 병력 즉 최소한 2개 사단병력이 월남 공화국에 주둔하고 있는 동안에는 군수이관을 중지하며 동시에 1967년 미 회계년도에는 1966년 미 회계년도에 중지된 품목과 아울러 1967년 미 회계년도 계획표에 있는 품목을 한국에서 조달한다 3) (가) 파월 대한민국 부대에 소요되는 보급물자 용역 및 장비를 실행 할수있는 한도까지 대한민국에서 구매하며 파월 미군과 월남 군을 한 물자 중 결정된 구매품목을 한국에서 발주한다 그 경우는 다음과 같다 1) 한국에 생산 능력이 있는 경우 2) 한국이 규격과 납품예정 지원을 맞출 수 있을 경우 3) 한국의 물품가격이 극동의 기타 공급 가능지 가격과 비등 하다 는 것을 합리적으로 인정 할수있을 경우 4) 기타 점에있어서 구매가 합중국 국방성의 규정과 절차에 부합할 경우 (나) 합중국의 공급 업자들과 경쟁하는 원칙하에 AID가 월남 공화국에서 농촌 건설사업 선무. 구호. 보급 등의 사업을 위한 계획 사업에 용할 목적으로 구매하는 물자의 상당한 양을 한국이 적시 및 적가로 공급할수 있는 최대한 까지 한국에서 구매한다 (다) 월남 공화국에 의하여 허가되는 범위내에서 한국 청부업자들이 합중국 정부 및 미국 청부업자들이 월남 공화국에 있어서의 한국 인 민간 기술자 고용을 포함하여 기타 용역을 제공할수 있는 기회를 확대 한다 4) 수출진흥의 전반부분에 있어서 대한민국에 대한 기술 협조를 강화 한다 5) 1965년 5월에 대한민국에 대하여 이미 약속 한 바 있는 1억 5천 만불 차관에 기추하여 합중국 정부는 적절한 사업이 개발됨에따 라 1억 5천만불 약속에 적용되는 동일한 정신을 위하여 대한민국 의 경제발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추가 차관을 제공 한다 6) 1966년도 재정 안정 계획의 시행 결과에 따라 적당한 경우 월남 공 화국에 대한 수출의 지원 및 기타 개발 목적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1천 5백만불의 프로그램톤을 1966년 중에 제공한다 각하에게 본인의 최대의 경의를 표 합니다 대한민국 주재 미국 대사 원드롯 지 브라운 |
월남인들이 사는 부락 월남인들의 모를 심는 광경 평화스런 마을 월남의저녁노을 주월초대사령관 채명신 신고 작전에 투입되는 병사들 작전에 임하는 병사들 정찰비행 적을 향해 응사 수송기 하늘에서의 공격 퀴논가는길 작전에 임하는 헬기 가공할 무기를 투하하는 공군력 착륙유도 이륙장면 적의 포로 베트콩 작전에 임하는 시누크 미사일을 발사하는 광경 미함대 베트콩 마크 미사일 발사 B-52 하늘에서 네이팜을 투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