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하나 되는 감리교회와 제8대 김종필 감독
류형기 감독의 재선에 불만을 품고 또 하나의 감리교회를 만든 일명 호헌파로 인해 감리교회는 총리원 측과 호헌 측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호헌 운동이 본격화 되자 총리원 측은 호헌 측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연회별로 호헌 측에 관련 목회자들을 교직의 정지처분, 제명처분을 내렸다. 이로써 양측의 싸움은 본격적으로 상대를 비방하였고 교회 재산권 다툼으로 일반 법정에서 소송을 제기하였다. 목사와 목사, 교인과 교인들의 물리적인 충돌이 야기되어 일간신문에 보도되어 사회적인 지탄을 받았다. 이렇듯 해방 후 제2차 감리교회의 분열은 상호 간에 깊은 상처만 남길 뿐이었다. 또다시 발생한 이 명분 없는 싸움은 도움이 되지 못하니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소리가 나왔다.
1958년 10월 1일에 기독교 대한감리회 제8회 총회가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되었다. 감리교의 분열의 원인이 되었던 류형기 감독이 임기를 마치고 물러났으니 감독을 뽑아야 했다. 호헌파로 인해 감리교회는 자연스럽게 각 계파별로 정치 서클이 만들어져 계파별로 감독 후보를 내고 자기 계파 후보의 당선을 위하여 치열한 선거전에 돌입하였다. 그 계파가 호헌파, 정동파, 성화파다. 호헌파는 이남을 기반으로 한 정치 모임으로 총리원 측의 반대편의 위치에 있었다. 성화파는 지역적으로 이북에 속한 인물들이 중심되어 평양의 성화신학교 출신들로 구성되었고 해방 후에는 총리원 운영의 주역이 된 정치 서클이다. 정동파는 주로 경기도를 중심으로 모여진 정치 서클로 그 중심인물은 김광우 목사였으며 그가 정동제일교회 담임목사였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10월 1일에 감독선거를 실시했다. 오후 3시에 회장인 류형기 감독이 장정 168단을 낭독한 후 기도하고 감독선거에 들어갔다. 총회원수가 106명 총투표수는 105명으로 회원의 2/3인 70표를 얻어야 감독에 당선될 수 있었다. 개표결과 이환신 26표, 변홍규 21표, 조신일 20표, 김광우 14표, 박찬현 13표, 장석영 4표, 홍현설 2표, 송정률 2표, 김창호 1표, 전희철 1표, 기권 1표로 집계되었다. 어느 후보든지 2/3의 득표에 실패했다. 세 개의 계파들이 첨예하게 대립된 상황에서 치른 선거에 그런 득표율을 얻기는 불가능했다. 결국 선거는 2일 동안 30차례를 투표하였으나 각 후보들은 거의 동일한 표를 얻을 뿐이었다. 각 계파들의 일보 양보가 없는 상황에서는 투표 결과는 달라질 게 없었다. 그래서 31차 투표에는 각 계파 간에 이해관계가 없는 김종필 목사가 후보에 참여하여 투표한 결과 김종필 후보가 50표를 얻었지만 당선표인 66표에 미치지 못하여 역시 당선자를 내지 못하였다. 이때 조경우, 박창현, 이호운, 조신일 후보는 감독 후보를 사퇴하였다. 김종필 목사가 다득점 한가운데 제32차 투표에 들어갔다. 규칙해석 위원장인 전희철 목사가 감독 후보 투표를 받은 김종필 후보의 자격이 장정 108단 제15조 1항에 저촉되는지를 밝히고자 요구하여 이를 규칙해석 위원에게 해석을 의뢰했다. 이에 규칙해석 위원회가 김종필 목사의 감독 후보 자격에 아무 문제 될 것이 없다 해서 김종필 후보가 받은 표를 유효하다고 선언했다. 이에 개표하여 보니 김종필 83표를 얻어 2/3인 66표를 훌쩍 넘겨 김종필 목사가 기독교 대한감리회 제8대 감독으로 피선되었다.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얻어낸 결과였다. 그 이튿날 김종필 감독 취임식을 거행함으로써 본격적으로 감독의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김종필(金鍾弼) 감독은 1896년 5월 20일에 경기도 시흥군 안산읍에서 농부인 김용배의 넷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1922년 개성 공립간이상업학교와 1925년 개성 송도보통학교를 마치고 1928년 3월 일본 고베 간사이(關西) 학원 신학부를 졸업했다. 귀국 후 평양 남산현교회 부담임으로 파송받았다. 1930년 9월 28일 제13회 남감리회 조선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934년까지 평양중앙교회를 담임하였다. 1935년에는 개성 북부교회, 1942년에는 평양 남산현교회를 담임했다. 그 후 일제의 탄압으로 북경으로 망명했다가 1946년 5월에 교포 700여 명을 인솔하여 귀국하였고 목포에서 문태중학교 교장으로 잠시 일하였다. 1947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및 교목으로 재직하던 중 1955년에 오하이오 주 북 대학을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도 이화여자대학교 재직하다가 1958년 10월 4일 감독으로 피선된 것이다.
김종필 감독이 선임될 때의 감리교회는 호헌 측과 총리원 측과 갈등의 골이 깊어진 상태였기에 이제 감리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김종필 감독은 하나 되는 감리교회를 만드는 일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 1959년 3월 교회 통합의 결실을 이루어 분열된 감리교회가 다시 정비되는 쾌거를 이룩하여 1962년까지 임기를 마쳤다. 김종필 감독은 임기를 마치고 이듬해 1963년 3월에 내리교회에 부임하였다. 그해 내리교회 예배당이 화재사고가 발생하여 그는 불타버린 예배당을 다시 건축하고 하나님께 봉헌하였다. 김종필 감독은 계속해서 내리교회에서 목회하다가 1967년 4월 8일 제18회 중부연회에서 은퇴하였다.
은퇴 후에도 매월 마지막 주일에는 내리교회 강단에서 고전적이고 감동 깊은 메시지를 전하였다. 1977년 10월 3일 주일에도 여느 때처럼 누가복음 10:25~37절의 성경 말씀으로 “무관심”이란 제하로 설교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말이 끊기고 주저앉듯이 쓰려졌다. 뇌일혈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그 이후 김종필 감독은 병석에 누워 7개월 동안 말 한마디 못한 상태에서 투병생활을 이어가다가 1978년 5월 17일 향년 83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다. 분열되어 혼란의 시기에 다시 감리교회를 하나로 만들어 어려운 시기의 감리교회를 이끌어간 김종필 감독은 재임 중에 다음과 같이 총회와 연회를 이끌었다.
김종필 감독은 특별총회(1962년 7월 3일), 제9회 총회(1962년 7월 4일~9일, 정동제일교회), 제10회 중부연회 (1959년 3월 17일~22일, 정동제일교회 개최), 제11회 중부연회(1960년 3월 8일~12일, 정동제일교회 개최), 제12회 중부연회(1962년 4월 26일~30일, 정동제일교회 개최)를 주재하였다. 또한 제10회 동부연회(1959년 3월 17일~22일, 정동제일교회 개최), 제11회 동부연회(1959년 3월 1일~6일, 정동제일교회 개최), 제12회 동부연회(1961년 3월 12일~19일, 원주제일교회 개최), 제13회 동부연회(1962년 4월 5일~9일, 동대문교회 개최)를 주재하였고 제5회 남부연회(1959년 3월 17일~22일, 정동제일교회 개최), 제6회 남부연회 (1959년 3월 1일~6일, 정동제일교회 개최), 제7회 남부연회(1961년 2월 19일, 대전제일교회 개최), 제8회 남부연회(1962년 4월 11, 대전제일교회 개최)를 주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