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진은영 시집, 문학과지성사, 2022.
청혼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
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그날 이후
아빠 미안
2킬로그램 조금 넘게, 너무 조그맣게 태어나서 미안
스무 살도 못 되게, 너무 조금 곁에 머물러서 미안
엄마 미안
밤에 학원 갈 때 휴대폰 충전 안 해놓고 걱정시켜 미안
이번에 배에서 돌아올 때도 일주일이나 연락 못 해서 미안
할머니, 지나간 세월의 눈물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눈
물을 흘리게 해서 미안
할머니랑 함께 부침개를 부치며
나의 삶이 노릇노릇 따듯하게 익어가는 걸 보여주지
못해서 미안
아빠 엄마 미안
아빠의 지친 머리 위로 비가 눈물처럼 내리게 해서
미안
아빠, 자꾸만 바람이 서글픈 속삭임으로 불게 해서
미안
엄마, 가을의 모든 빛깔이 어울리는 엄마에게 검은 셔
츠만 입게 해서 미안
엄마, 여기에도 아빠의 넓은 등처럼 나를 업어주는 뭉
게구름이 있어
여기에도 친구들이 달아준 리본처럼 구름 사이에 햇빛
이 따듯하게 펄럭이고
여기에도 똑같이 주홍빛 해가 저물어
엄마 아빠가 기억의 기둥들 사이에 매달아놓은 해먹이
있어
그 해먹에 누워 한숨 자고 나면
여전히 나는 볼이 통통하고, 얌전한 귀 뒤로 긴 머리카
락을 쓸어 넘기는 아이
슬픔의 대가족들 사이에서도 힘을 내는 씩씩한 엄마
아빠의 아이
아빠, 여기에는 친구들도 있어
이렇게 말해주는 국어 선생님도 있어
“쌍꺼풀 없이 고요하게 둥그레지는 눈매가 넌 참 예
뻐”
“너는 어쩌면 그리 목소리가 곱니,
생머리가 물 위의 별빛처럼 그리 빛나니”
엄마! 아빠! 벚꽃 지는 벤치에서 내가 친구들과 부르
던 노래 기억나?
나는 기타 치는 소년과 노래 부르는 소녀들 사이에
있어
음악을 만지는 것처럼 부드러운 털을 가진 고양이들과
있어
내가 좋아하는 엄마의 밤길 마중과 분홍색 손거울과
함께 있어
거울에 담긴 열일곱 살, 맑은 내 얼굴과 함께, 여기 사
이좋게 있어
아빠, 내가 애들과 노느라 꿈에 자주 못 가도 슬퍼하
지 마
아빠, 새벽 세 시에 안 자고 일어나 내 사진 자꾸 보
지 마
아빠, 내가 친구들이 더 좋아져도 삐치지 마
엄마, 아빠 삐치면 나 대신 꼭 안아줘
하은 언니, 엄마 슬퍼하면 나 대신 꼭 안아줘
성은아, 언니 슬퍼하면 네가 좋아하는 레모네이드를
타줘
지은아, 성은이가 슬퍼하면 나 대신 노래 불러줘
아빠, 지은이가 슬퍼하면 나 대신 두둥실 업어줘
이모, 엄마 아빠의 지친 어깨를 꼭 감싸줘
친구들아, 우리 가족의 눈물을 닦아줘
나의 쌍둥이, 하은 언니 고마워
나와 손잡고 세상에 와줘서 정말 고마워
나는 여기서, 언니는 거기서 엄마 아빠 동생들을 지
키자
나는 언니가 행복한 시간만큼 똑같이 행복하고
나는 언니가 사랑받는 시간만큼 똑같이 사랑받을 거야
그니까 언니, 알지?
아빠 아빠
나는 슬픔의 큰 홍수 뒤에 뜨는 무지개 같은 아이
하늘에서 제일 멋진 이름을 가진 아이로 만들어줘 고
마워
엄마 엄마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들 중 가장 맑은 노래
진실을 밝히는 노래를 함께 불러줘 고마워
엄마 아빠, 그날 이후에도 더 많이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 아빠, 아프게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 아빠, 나를 위해 걷고, 나를 위해 굶고, 나를 위해
외치고 싸우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고 정직한 엄마 아빠로 살
려는 두 사람의 아이 예은이야
나는 그날 이후에도 영원히 사랑받는 아이, 우리 모두의 예은이
오늘은 나의 생일이야
*유예은은 2014년의 4·16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안산 단원
고 2학년 3반 학생입니다. 10월 15일, 안산의 치유공간 ‘이
웃‘에 예은이 부모님과 하은, 성은, 지은 세 자매, 그리고
친구들이 모여 아이의 열일곱번째 생일 모임을 했습니다.
그날은 쌍둥이 언니 하은이의 생일이기도 했습니다. 생일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예은이를 대신하여 시인 진은영이
예은이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시인 만세
스스로 놀란다
지난해 최고의 낙담은 청약 당첨에서 두 번이나 떨어
진 것
중대재해법 반쪽 통과도
세월호 관련자 무죄 판결도 아니었다는 점에
꿈의 집도−
현실의 집도− 가질 수 없다
나선으로 날아오르는 시의 천사를 봤다는 사람
그의 뒤를 쫓는다
추격의 날개짓이 전진과 후진의 끝나지 않는 시소게임
을 닮았다
노란 나방과 아이에게서 배운 부질없이 허약한
어리석었다
유년의 낙원을 즐겁게 떠나왔다
학기가 끝나면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
기숙사 아이들처럼
시의 자명종,
세계사의 푹신한 침대 위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그런 아침이 올까
이런 질문을 마지막으로 한 것이 언제였을까
조간신문의 양 날개를 펼치며−
홍조 띤 얼굴을 가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