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론회석-41
<원문>
如此經敎는 頓示圓乘이시니 上上乘人의 所應堪受며 設不堪受者라도 當須樂修하야 究境歸流하야 畢居此海니라 是故로 餘敎는 先因後果일새 不同此敎의 因果同時니 爲法性智海中엔 因果不可得故로 爲不可得中엔 因果同時라 無有障碍也어니와 可得因果면 卽有前後니 有所得者는 皆是無常이요 非究境說也니라
<해석>
이와 같은 경교(經敎)는 원승(圓乘)을 단박에 보이시니, 최상승사람들이 능히 감당하여 받을 바며, 설령 감당하여 받지 못할지라도 마땅히 모름지기 좋아하고 닦아서 구경에 돌아가 흘러서, 필경에 이 바다에 있게 된다. 그러므로 다른 교는 인(因)을 먼저하고, 과(果)를 뒤에 했기 때문에 이 교의 인과 동시와는 같지 않음이니, 법성지혜 바다 가운데엔 인과를 가히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가히 얻을 수가 없는 가운데에 인과가 동시라서 장애가 없다. 가히 인과를 얻게 되면 곧 전후가 있음이니, 얻을 바가 있는 것은 다 이 무상이요, 구경의 말은 아니다.
<강의>
이와 같은 경교는 <화엄경>이다.
원승은 원만한 법. 1승(乘).
<화엄경>은 원만한 법을 돈설(頓說)하였다. 점차적으로 보인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깨달은 진리를 한꺼번에 보였다.
상승(上乘)은 대승(大乘)이지만 상상승(上上乘)은 최상승(最上乘)이다. <화엄경>의 1승법을 감당함이 못 된다 해도 즐겨 닦아서 결국에는 <화엄경>의 법바다에 흘러 돌아간다는 말이다. 거(居)는 있다는 뜻.
다른 경의 가르침은 인(因)이 먼저 나오고 과(果)가 뒤에 나와 <화엄경>의 인과동시(因果同時)와 같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엄경>은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다. 처음 발심할 때 바로 부처의 자리를 깨닫는 것이다. 견성할 때 성불하는 것이다. 연꽃이 필 때 열매가 동시에 맺히는 것처럼 그것이 <화엄경>에서 말하는 인과동시이다.
여경(餘經)은 인과이시(因果異時, 先因後果)
<화엄경>은 인과동시(初發心時便成佛果)
<화엄경>은 동시인데, 다른 경은 먼저 인(因)을 쌓고서 다음 다음 오랜 시간을 거쳐서 닦아야 성불한다는 내용으로 되었기에 인과의 때가 다르다는 것이다. 인(因)은 처음 발심할 때. 과(果)는 성불할 때를 말하는데, 발심할 때 바로 성불하는 도리를 말한 것은 <화엄경>이라는 것이다.
원래 인과가 없다. 인공(因空), 과공(果空)이다. 그래서 불가득(不可得)이라 한다. <화엄경>은 얻을 수 없는 그 가운데 인과가 동시로써 장애가 없다는 것이다. <화엄경>의 우위성을 말하는 것이다.
구경(究境)은 가장 최종적인 원만한 것이다. <화엄경>은 구경설이지만 다른 경은 인과가 있거나 소득이 있기 때문에 무상(無常)이지, 요의설(了義說)이 아니라는 것이다.
<원문>
若先因後果者인댄 因亦不成故로 果亦壞也니 緣生之法은 不相續故며 卽斷滅故며 自他不成故니라 如數一錢에 不數後錢이면 無後二者하야 一亦不成이니 爲刹那不相續이라 刹那因不成에 果亦壞요 多劫不相續이면 多劫因果壞니 要待數後錢時하야사 前一始成인달하야 因果도 亦爾하야 要待一時中無間者라사 因果始成이니라
<해석>
만약에 인(因)을 먼저하고 과(果)를 뒤에 할진댄, 인(因) 또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과(果) 또한 무너지니, 인연으로 생기는 법은 서로가 계속되지 않기 때문이며, 곧 끊어져 없어지기 때문이며, 자타가 이루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치 돈 1전(錢)을 셀 경우에 뒤에 돈을 세지 못하면 뒤에 돈이 없는 것과 같아서 1전도 이루어지지 못함이니, 찰나가 서로 계속 되지 않음이라. 찰나의 인(因)이 이루어지지 않음에 과(果) 또한 무너짐이요, 다겁동안에 상속을 하지 아니하면 다겁에 인과가 무너짐이니, 후전(後錢)을 셀 때를 기다려야 앞에 1전이 성립되는 것과 같아서 인과도 또한 그러하다. 종요로이 한때 가운데 간단이 없는 것을 기다려야만 인과가 비로소 이루어진다.
<강의>
무후2자(無後二者)는 10전(錢)이 있다면 처음에 1전을 셀 때 그 다음 2전, 3전을 세어야 뒤에 둘이 있다. 만약에 뒤에 돈이 없다면 2전, 3전도 없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원문>
若爾者인댄 如數兩錢同數에 無錢無後어니 誰爲一二며 如竪二指에 誰爲因果리오 如二指等이 隨心數處爲人하고 後數로 爲果하야 若如是有前有後인댄 卽有中間者하야 還有刹那間斷이니 有間斷者는 不成因果요 若同時者인댄 如竪二指에 無前無後어니 誰爲因果리오 亦皆不成이어니와
<해석>
만약에 그렇다면 두 돈을 함께 세면 앞엣 것도 없고 뒤엣 것도 없거니, 어느 것이 1전과 2전이 되며, 두 손가락을 세움에 어느 것이 인과가 되리오. 두 손가락 따위가 마음으로 세는 곳을 따라서 원인이 되고 뒤에 세는 것은 결과가 되어서, 만약에 이와 같이 앞이 있고 뒤가 있다면 곧 중간이 있어서 찰나의 간단이 있거니, 간단이 있는 것은 인과가 될 수 없다. 만약에 동시일진댄 두 손가락을 세울 때에 전후가 없거니, 어느 것이 인과가 되겠는가. 또한 모두 이루어지지 않거니와,
<강의>
수(數)는 셀 수.
여수(如竪) = 지(指)
수위인과(誰爲因果)는 원인과 결과는 따로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앞이 있고 뒤가 있다는 것(有前有後)은 원인이 있고, 뒤에 결과가 있는 것과 같다.
찰나(刹那)는 순간적으로 지극히 빠른 시간으로 찰나 찰나의 간격이 있다는 것이다. 즉 간단(間斷)이 있으면 인과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원문>
如此華嚴經因果同時者는 俱無如是前後因果라 及同時情量繫着妄想과 有無俱不俱와 常無常等의 繫着因果니 但了法體언정 非所施設이라 非因果繫일새 名爲因果니 非情所立同時前後之妄想也라 如是者인댄 何異楞伽漸敎之說이리오 此卽不然하니 前說敎主別과 問答主別等하야 卽明文殊普賢佛等三德體用主伴無碍故니라
<해석>
이 <화엄경>의 인과 동시라는 것은 함께 그와 같은 전후 인과가 없음이라. 및 동시의 정량(情量) 계착(繫着)의 망상과 유무와 함께 함과 함께 하지 아니함과 항상함과 무상한 따위들이 인과에 다 계착할지니, 다만 법체를 알면 시설할 바가 아니다. 인과에 매이지를 아니하기 때문에 인과가 된다고 말함이니, 감정으로 세운 바 동시 전후의 망상이 아니다. 그와 같을진댄 어찌 <능가경>의 점교의 말과 다르겠는가. 이것인 즉은 그렇지 않다. 앞에서 말한 교주가 다른 것과 문답주가 다른 것을 말하며, 곧 문수와 보현과 부처님등 3덕의 체용 주반(主伴)이 걸림이 없는 것을 밝혔기 때문이다.
<강의>
<화엄경>의 동시인과는 망상이 끊어진 차원에서 한 말이다,
<화엄경>은 인과의 계박이 아니라는 것이다.
<원문>
楞伽經中엔 化佛及大慧菩薩이 問答破相하사 但敎顯理無繫着故로 不論緣起어니와 如緣起法界者는 法界가 不成不破니 但知了法如是故니라
<해석>
<능가경> 가운데는 화불(化佛) 및 대혜보살이 문답으로 상(相)을 파해서 다만 진리에 계착이 없는 것만을 가리켜서 밝혔기 때문에 연기법만을 논하지 아니했거니와, 연기법계라 하는 것은 법계가 이루어지지도 않고, 파괴되지도 않음이니, 다만 법이 그와 같음을 알기 때문이다.
<강의>
<화엄경>은 법계연기이다.
<원문>
是故로 楞伽經에 云先示相似物하고 後當與眞實이라하시며 又云得相者는 是識이요 不得相者는 是智라하시니 卽時明成壞也어니와 如此經中意者는 卽眞無有假法하야 諸法總眞이며 純眞無假하야 更無相似存眞存假니 經에 云衆生界가 卽佛界也라하시니라
<해석>
그러므로 <능가경>에 말하기를 「먼저는 비슷한 물건을 보이고 뒤에 마땅히 진실한 것을 주는 것이라.」고 했으니, 그것이 곧 이 이루어지고 무너지는 것을 밝혔거니와, 이 경 가운데 뜻은 참으로 가법(假法)이 없어서 모든 법이 다 진(眞)이며, 순진(純眞)하여 가(假)가 없어서 다시 비슷한 진(眞)을 두고 가(假)를 둠이 없나니, 경에 말씀하시기를 중생계가 곧 불계(佛界)라고 하시니라.
<강의>
<능가경>에서 먼저는 가짜를 주고 그 다음 진실한 것을 주었다는 내용이다. 처음에 무아(無我)를 말한 것이 가짜이다.
상(相)을 얻는 것은 명상(名相) 분별(分別)이다. 명과 상의 분별이 있는 것이다.
무소득(無所得)이 아니고 얻는 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의식분별이고, 부득상(不得相)은 공(空)한 것이다. 상은 얻을 수가 없는 것으로 본래 한 물건도 없는 명, 상 분별을 떠난 자리를 지혜라고 했다.
<능가경>은 가법(假法), 진법(眞法) 두 가지 상으로 제시해서 설법을 했지만 <화엄경>은 진(眞)뿐이지 가법은 없다는 것이다.
<화엄경>에 중생계를 불계라고 했으니까 만약에 중생계를 가(假)라고 본다면 가(假)가 곧 진(眞)이라는 것이다. <화엄경>은 중생계를 가(假)로 본 것도 아니다. 중생계를 진불계(眞佛界)라 본다. 중생계를 가짜라 보고 불계를 진짜라고 본다면 그것도 진가(眞假)가 있다. 그러나 <화엄경>은 중생계를 가(假)로 보는 것이 아니라 중생계가 바로 불계라고 한다. 중생계가 바로 진(眞)이라는 것이다. 중생계도 진이고 불계도 진이라고 본다. 다른 경과는 개념이 다르다.
<원문>
如此經中엔 文殊가 以理會行하고 普賢이 以行會理하사 二人이 體用相徹하야 以成一眞法界하야 前後相收일새 四十品經이 互相該括하야 前後相徹하고 文義相收하야 一法門中에 具多法也라 是故로 經에 云於多法中에 爲一法이요 於一法中에 爲多法이라하시니 於漸敎中엔 說有少分義同이라도 多分不相似故니라
<해석>
이 경 가운데는 문수가 이(理)로써 행(行)을 회통하고 보현이 행(行)으로써 이(理)를 회통하여, 두 사람이 체와 용이 서로 사무쳐서 일진법계를 이루어 전후를 서로 거둘 새, 40품경이 서로 서로 포함하고 포괄하여 앞뒤로 서로 사무치고, 논(論)과 뜻이 서로 거두어서 하나의 법문 가운데 많은 법문을 갖췄음이라. 그러므로 경에 말하길 많은 법 가운데서 하나의 법이 되었고, 하나의 법 가운데서 많은 법이 되었다. 점교(漸敎) 가운데는 설령 약간의 의미가 같은 것이 있을 지라도 많은 부분은 비슷하지 않다.
<강의>
<화엄경>은 문수 보현이 이(理)와 행(行)을 회통한 진리와 행(行)이다.
이(理) - 체(體) / 체용상철(體用相徹)
행(行) - 용(用) /
문수, 보현이 하나이다. 그것이 비로자나이다.
일진법계는 비로자나이다.
둘로 나누면 이법계(理), 사법계(行)이다.
어다법중(於多法中)에 위일법(爲一法)이요, 어일법중(於一法中)에 위다법(爲多法)은 일즉일체 다즉일(一卽一切 多卽一)과 같다. 일체 속에 개체가 생겼고, 개체 속에 전체가 들어 있다.
「소분(小分)은 같은 것이 있을지라도 다분(多分)은 비슷하지 않다.」는 것은 <화엄경>이 특수하다는 것을 말한다. 누누이 이 말을 자주 한다. 회석 전편이 다 그렇다. 그 전에 한 것만 해도 통현장자의 <화엄경> 회석은 다 된 것이다. 그것을 중국말로 하면 사과반의(思過半矣)라 한다. 다 된 것이라는 뜻이다. 다 된 것을 또 하고 또 하는 것이다.
<원문>
如覺首等十首菩薩이 各說一法하야 以成十信하시며 於十信中에 共成一信하사 爲十箇信位하야 互體相成에 不獨施設하야 以十信로 成一信하고 以一信으로 成十信하시니 有解者는 不可偏取一門이니
<해석>
각수등(覺首等) 10수(首)보살들이 각각 하나의 법을 말하여서 10신(信)을 이루었으며, 10신 가운데 함께 하나의 신(信)을 이루어서 10개의 신위(信位)가 되어서 상호간에 이룸에, 홀로 시설한 것이 아니어서 10신으로써 하나의 신(信)을 이루고, 하나의 신(信)으로써 10신을 이루시니, 앎이 있는 자는 가히 하나의 문만을 치우쳐 처하지 아니 할 것이다.
<강의>
<화엄경>에 각수보살, 문수보살등 10분들이 하나의 법을 말하며 10신을 이루었다.
호체(互體)는 상호간. 이 보살이 말한 것이 저 보살이 말한 것에 통하고, 저 보살이 말한 것이 이 보살에 통하는 것이다.
10보살이 각각 10신의 법을 말하여 10신이 되었으니까 서로 서로 원융무애하게 상통한다. 여기선 10신만 말했으니까 모가 난다. 이 1010(十十) 가운데도 10주, 10행과 10회향과 10지와 등각이 있다는 말을 했어야 되는데 그런 말이 빠졌다.
아까 「일법(一法)에 다법(多法)이 있고, 다법에 일법이 있다 중생계가 바로 불계요, 인과가 동시라.」고 한다면 10신 속에서도 10신, 10행, 10회향, 10지, 등각의 법이 다 들어 있다는 설명이 나와야 하는데 그 말은 빠졌다.
<원문>
十慧菩薩과 十林菩薩과 十幢菩薩과 十藏菩薩이며 又說十定十通十忍하사 如是一一位次法門에 皆悉如是하야 互相成就호미 如帝釋網이 互相徹入하야 一中無量이며 無量中一이라
<해석>
10혜(慧)보살과 10림(林)보살, 10당(幢)보살과 10장(藏)보살이며 또 10정품(定品), 10통품(通品), 10인품(忍品)을 말하사, 이와 같은 낱낱 위차(位次)의 법문에 모두 다 그와 같아서 서로서로 성취하되, 제석의 그물과 같아서 서로 서로 사무쳐 들어가서 하나 가운데 무량이며 무량 가운데 하나이라.
<강의>
10혜보살은 10주법을 말할 때 나오고, 10림보살은 10행법, 10당보살은 10회향법, 10장보살은 10지법을 말했는데 10분의 돌림자가 각각 혜(慧), 림(林), 당(幢), 장(藏)자 등의 보살이다.
불(佛)의 법신 지체상(智體上)
10신법 - 10수보살 -- -------
10주법 - 10혜보살 | |
10행법 - 10림보살 | 5위 | 8위법
10회향법 – 10당보살 | |
10지법 - 10장보살 -- |
10정(定) ------- |
10통(通) | 11지(등각) --
10인(忍) ------- 문수, 보현
12지 부처
제석천왕의 그물망은 이 쪽 것이 저 쪽에 비취고, 저 쪽 것이 이 쪽에 비춰서 서로 서로 통한다. 세계망도 통한다. 한국이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영국, 미국, 일본으로 다 통할 수 있듯 제석의 그물과 같이 서로 서로 사무쳐 들어가서 하나 가운데 무량이고, 무량 가운데 하나가 된다.
<원문>
諸佛菩薩이 體用相成하고 因果相入하야 同時無二하니 如經中說하야 法慧菩薩이 入定에 卽十方世界의 同名法惠佛이 來하시며 功德林菩薩이 入定에 十方世界의 同名功德林佛이 來하시며 金剛幢菩薩이 入定에 卽十方世界의 同名金剛幢佛이 來하시며 金剛藏菩薩이 入定에 卽十方世界의 同名金剛藏佛이 來하시며 來摩頂하사 如是位位之內와 地地之中에 佛與菩薩이 因果相成하며 體用相徹하시니 所來諸佛은 卽明是果요 入定菩薩은 卽明是因이라 明因果無二故로 於佛法身智體上에 安立十住十行十廻向十地十一地等行相의 引凡接俗化生之門이시니 諸位卽佛이며 佛卽諸位니라
<해석>
부처님과 보살이 체와 용을 서로 이루고, 인과가 서로 들어가 동시어서 둘이 없으니, 경가운데 말한 바와 같아 법혜보살이 인(忍)에 들어감에 곧 시방세계의 이름이 같은 법혜부처님이 오셨으며, 공덕림 보살이 정에 들어감에 시방세계의 이름이 같은 법혜부처님이 오셨으며, 공덕림보살이 정에 들어감에 시방세계의 이름이 같은 공덕림부처님이 오셨으며, 금강당보살이 정에 들어감에 금강당부처님이 오셔서 이마를 만져서 그 감이 위위(位位)의 안과지지(地地)의 안에 부처님과 보살이 인과가 서로 이루어서 체용이 서로 사무쳤으니, 오는 바 여러 부처님은 곧 이 과(果)임을 밝힘이요, 정에 들어간 보살은 곧 이 인(因)임을 밝힘이라. 인과가 둘이 없음을 밝히기 때문에 부처님의 법신의 지체상(智體上)에서 10주와 10행과 10회향과 10지등 행상의 범부를 이끌어서 세속을 접하여 주고, 중생을 교화하는 문을 내세웠으니, 모든 위(位)가 바로 부처이며, 부처님이 바로 모든 위(位)다.
<강의>
부처님은 과(果)가 되고 보살은 인(因)이 된다.
10정(定), 10통(通), 10인(忍)이 11지(地)이다.
보현, 문수같은 분이다. 11지는 등각(等覺)이다. 부처님 후보자이다.
통현장자는 11지를 쓴다. 그렇다면 12지는 안 나오지만 12지는 부처 아니겠는가.
10신, 10주, 10행, 10회향, 10지, 11지(10정, 10통, 10인)가 부처님의 법신 지체상에서 시설했다. [제보살주처품], [광명수호품], [아승지품] 등이 다 10지 등각에 해당되는 법문이다.
<화엄경>은 10신, 10주, 10행, 10회향, 10지, 등각 밖에 없다. 문수보살로부터 시작한 10신(信)이 제일 처음이고, 그 다음 10주, 10행, 10회향, 10지, 11지(10정, 10통, 10인)이다. 이것들을 8위로 본다면 8위가 모두 부처님 법신자리고, 부처님에서 8위법을 분류해서 설명하고 세운 것이다. 법에 들어 갈 때 믿음으로부터 들어간다. 그래서 경전에도 여시아문(如是我聞)이 처음 나온다. 이것이 믿음의 표시이다. 모든 종교가 믿음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유교에서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五常, 吳德)이다. 순서를 잘못 정했다.
원칙은
智(北. 冬)
義(西. 秋) 信(土) 仁(東. 春. 木)
禮(南. 夏. 火)
이렇게 순서를 정하더라도 꼬리가 바로 처음과 연결되듯이 겨울은 1년 마지막 꼬리이면서 시작도 된다. 겨울이 끝나면 봄이 시작된다. 주나라 때는 겨울을 자월과 축월로 세수(歲首)를 정했다. 동짓달을 설로 세웠고, 은나라는 섣달을 설로 세웠다. 한나라대에 와서 정월(正月)로 설을 세웠다.
유교에서는 인의예지신으로 되어 있다. 불교에서처럼 신(信)을 첫머리에 놓는 것만큼 명백하지 못하다. 순서를 잘못 정했다. 차라리 신인의예지(信仁義禮智)로 해야 한다. 믿는 데서부터 도에 들어간다. 그래서 선종의 <신심명>이 좋은 법문이다.
<원문>
若上上根人이 於此經中에 起信行者인댄 還依此法하야 創首十住初心에 正證如來佛果智法코사 方行一切菩薩萬行이니 爲初證之首에 爲知法體智性故로 設同凡事하야 經過多劫行이라도 而於自見엔 本不移時니 於初發心時에 與三世佛로 同成正覺하야 無前後際故라 法如是故로 應如是知니
<해석>
만약에 상상근인이 이 교 가운데 신행(信行)을 일으킬진댄, 또 이 법에 의지하여 제일 처음 10주 초심에서 바로 여래의 불가지법을 증득하사 비로소 일체 보살의 만행을 행함이니, 처음 증득하는 첫머리에 법체의 지성을 아는 것이 되기 때문에 설령 범사와 함께 하여 다겁을 경과하여 행하더라도 자의 견해에서는 본래 근본적으로 때를 옮기지 않으니, 처음 발심할 때 3세의 부처와 더불어 같이 정각을 이루어 전후제가 없기 때문이라. 법이 그와 같기 때문에 응당 그와 같이 알아야 할 것이다.
<강의>
맨 첫머리가 신(信)이고, 그 다음은 다 행(行)이다.
십주, 10행, 10회향, 10지가 다 행(行)이다.
앞엣 것만 신(信)이고, 그 밖에 것은 행(行)으로 보아도 된다.
여래의 증득이 불과지법(不果智法)이다.
견성한 후에 정각을 이루는 것이다. 견성하고서 보살행을 닦다.
선재동자도 초발심할 때 돈오성불(頓悟成佛)하고, 보살도를 닦았다.
그러니까 <화엄경>을 도표로 그린다면
初
果(佛果) <--- 因(十信)
後
因(菩薩道) <-- 果(佛智)
초발심에 정각을 이루고 정각을 이룬 그 자리에서 보살도를 닦다. 인과가 없는 가운데서 인과를 형성하게 되는데, 다른 경과 체제가 다른 것은 처음 견성하고서 보임을 한다. 그리고 또 보살도를 닦아 재차 성불한다. 돈오점수(頓悟漸修)이다.
법체는 법신지체(法身智體)이다.
법신지체를 알았기 때문에(頓悟) 범부들과 똑같이 6도 만행을 닦는다는 것이다.
본불이시(本不移時)는 항상 그 자리에 있으면서 한다.
시간이 끊어진 데서 시간이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다. 시간이 끊어진 도리를 체득했기 때문에 시간을 두고 닦아서 보살도를 성취한다 해도 그 시간이 흘러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꿈을 꿀 때 짧은 시간에 수만 년 사는 꿈을 꾸지만 깨고 보면 일찰나이다. 수만 년이란 시간이 옮겨진 것이 아니라 일찰나 속에서 수만 년 꿈꾸고 살아가는 것이 나타났을 뿐이다.
전후제는 과거, 현재, 미래 시간을 말한다.
먼저와 뒤라고 정했지만 정한 것이 부당하다.
<원문>
不同權敎에 經三僧祇코사 方成佛果라 是故로 今言與諸三乘으로 得果가 別故니라 又於此經엔 乘如來一切智乘하야 得佛果故로 無二乘人의 得四沙門果며 亦無權敎菩薩의 諸地行相에 因前果後也니라
<해석>
권교에서 3승지겁을 지낸 다음에야 비로소 불과를 이룬 것과는 같지 않음이라. 그러므로 지금에 모든 3승과 더불어 과를 얻는 것이 다름을 말하기 때문이다. 또 이 경에는 여래의 일체지승을 타고서 불과를 얻기 때문에 2승들이 4사문과(沙門)果를 얻는 것은 없다. 또한 권교보살들의 지위행상(地位行相)에서 인(因)은 먼저가 되고 과(果)가 뒤가 됨도 없다.
<강의>
타경(他經)은 점오(점교) / 점수점오(漸修漸悟)
점오점수(漸悟漸修)
화엄경은 돈오 / 돈오돈수(頓悟頓修)(근기가 수승한 사람)
(頓敎, 圓敎) 돈오점수(頓悟漸修)(근기가 낮은 사람)
3아승지겁을 닦는다는 것이 점수를 하여 점오를 하는 것이다. 3승교에서 성불하는 것은 부처가 되어도 자격이 낮다. <화엄경> 1승교에서 성불하는 부처님은 굉장히 위대한다. 대만에서 대통령하는 것보다 중국에서 대통령하는 것이 같은 대통령이라도 격이 다르듯이 부처의 자리도 그렇다. <화엄경> 부처님이라야 위대하고, 다른 경 부처님은 그 보다 못한다. 32상하고 92대인상(大人相)과도 차이가 나고, 법신, 보신의 부처와 화신(석가)부처와 격이 다르다.
다른 경에는 성문, 연각이 수다원, 사다함, 아라한, 아나함과를 얻는 것을 최고로 말하지만 <화엄경>에서는 취급도 안 한다. <화엄경>만 들어 왔다면 인과동시요, 일초(一超)에 직입여래지(直入如來地)이다. 3아승지겁을 닦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여기까지 4번째 소시인원과만(所示因圓果滿)이 끝났다.
<화엄론회석/ 이통현장자 저/ 원조각성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