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2 주일설교
행운의 아이콘이 되어라
사도행전 20:7~12
오늘 본문은 유두고라는 청년이 죽었다가 살아난 사건과 그 사건의 의미를 말해줍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난 사건은 특별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그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이 사건이 2023년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는지 살펴봅시다.
에베소에서 데메드리오의 폭동 사건이 있고 난 뒤에 바울은 마케도니아와 아카야 지역의 교회를 찾아가서 말씀으로 격려하고 배를 타고 드로아로 돌아왔습니다. 드로아에서 7일간 머문 후 바울은 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갈 계획이었습니다.
바울이 드로아를 떠나기 전날은 주일이었는데 그 밤에 성찬식과 애찬을 위해 모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밤늦게까지 설교를 계속했습니다. 그 밤중에 바울이 그렇게 할 말이 많았던 이유는 내일이면 드로아를 떠나고 다시 올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은 영원히 멸망할 사람을 살리는 유일한 처방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그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행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러므로 바울은 아무리 밤이 늦어도, 피곤하고 졸리더라도 전할 말은 꼭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모인 곳은 다락방이었는데 당시에 다락방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는 곳입니다. 성경 시대 사람들은 다락방을 방문객 숙소로도 사용했고 여기서 모임도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한 장소, 120명이 모여 기도하다가 성령이 임한 장소도 모두 다락방이었습니다.
8절, 다락방에 등불을 많이 켰다는 말은 그 방이 넓었다는 의미와 사람이 많이 모였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많고 등불을 많이 켜면 산소가 부족해지고 온도는 올라갑니다. 그러면 졸리기 좋은 환경이 됩니다.
그 다락방에 모인 교인 중에 유두고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유두고의 유(ευ)는 헬라어에서 좋다는 의미입니다. 복음, 즉 좋은 소식은 헬라어로 유앙겔리온(ευαγγελιον)입니다. 그러니까 유두고(Εὔτυχος)는 운이 좋다 행운아라는 뜻입니다.
유두고(행운아)라는 이름이 그의 본명인지 그가 죽었다 살아난 후에 생겨난 별명인지 모릅니다 .하여간 유두고는 그날 이후에 드로아 교회에 행운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행운의 아이콘이 되기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행운의 아이콘이 될 수 있을까요? 유두고가 처음부터 순교자가 되거나 죽었다 깨어나려고 계획한 적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예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유두고는 다만 졸려 죽을 지경이지만 끝까지 말씀을 들으려고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행운의 아이콘이 되기 위해 순교 각오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주님을 위해 말씀을 듣는 일과 말씀에 순종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상황이 어렵더라도 힘에 겹도록 헌신할 때 행운아가 될 수 있습니다.
사실 그 밤에 유두고는 설교를 들을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노예 가운데 유두고라는 이름이 많았다는데 유두고도 노예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가 꼭 노예가 아니었어도 그는 창에 걸터앉아서 깊이 졸다가 떨어질 정도도 몸은 피곤했고 밤도 깊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설교 시간에 조는 것을 비난하는 것은 곤란하다. 반대로 설교 시간에 졸아도 상관이 없다고 두둔하는 것도 곤란합니다. 당시 다락방에는 사람도 많고 등불도 많이 켜서 졸리기 좋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유두고는 졸지 않기 위해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는 창에 앉았습니다. 하지만 졸지 않으려는 노력에 비해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설교를 듣기가 그렇게 힘들어도 한 말씀이라도 들으려고 애쓰는 모습, 졸지 않으려는 노력은 우리도 본받을 만하다. 여러분에게 창에 걸터앉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만일 피곤해서 졸릴 것 같으면 미리 커피를 마시거나 냉수나 사탕을 준비하고 그래도 졸리면 서서 설교 듣는 방법도 권장합니다.
예수님 다음으로 가장 위대한 설교자인 바울의 설교 시간에 교인이 떨어져 죽는 전무후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새파란 청년 유두고의 죽음으로 자신은 물론이고 교회도 끝장날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유두고를 살리셨습니다. 바울은 당황하지 않고 유두고의 시신에 엎드렸는데 이것은 옛날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릴 때 한 행동이었습니다.
유두고를 살린 바울은 다시 다락으로 올라가서 빵을 떼어 먹고 날이 샐 때까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빵을 뗐다는 말은 성찬식과 애찬을 의미합니다. 길게 설교하느라 지체되고 유두고 사건 때문에 지체된 성찬식을 그제야 했던 것입니다.
성찬식 후에는 애찬을 나누었습니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으니 모두 흥분하며 감사의 파티를 한 것이죠. 우리가 밤을 새우면서 함께 야식을 먹으면 인간관계가 아주 깊어집니다.
원래 바울은 새벽까지 설교할 계획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유두고가 떨어져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사건이 발생하자 전 교인들이 잠이 싹 달아났습니다. 살아난 유두고와 드로아교회 교인들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지 모르지만 한 명도 잠을 자거나 집에 돌아갈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유두고가 살아난 것을 두고 어떤 이는 죽지 않고 기절했다가 깨어난 것은 아닐지 의심합니다. 하지만 이 기록은 의사인 누가의 기록입니다. 의사는 사람의 사망을 확인하여 선고할 권위자입니다. 그러므로 누가가 죽었다고 말한 것을 부정할 어떤 이유나 근거는 없습니다.
사고로 사람이 죽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큰일입니다. 설교듣다가 사람이 죽었으니 이는 온 교회가 놀라고 슬퍼할 사건이죠. 그런데 죽었던 청년이 되살아난 사건은 사람이 죽는 것과 비교되지 않게 흥분하고 난리가 날 사건입니다. 죽는 일은 늘 있지만 죽은 사람이 다시 사는 일은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떠난 후에도 드로아 교회는 다시 살아난 그 청년 유두고 덕분에 어마어마한 위로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적지 않게”는 원문에서 “평범하지 않게”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은 것은 유두고가 살아난 이유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유두고가 살아날 때 자기들도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일까요? 그날 유두고는 그 자리에서 설교를 듣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유두고 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모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몸도 피곤하고 삶이 힘든 사람들이었습니다.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기에는 더 어려웠습니다. 그랬던 사람들이 유두고 사건을 경험하면서 큰 위로를 받은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그들이 위로받은 첫째 이유는 유두고가 다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우선 유두고 자신과 가족들이 가장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또 당시에는 많은 사람이 서로 친척이었기에 서로서로 위로를 받았습니다. 또 친척이 아닌 교인들도 큰 슬픔에서 벗어났고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유두고 사건으로 위로받은 둘째 이유는 하나님을 섬기다가 죽더라도 하나님이 다시 살릴 수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 땅에서 죽은 모든 성도를 다 유두고처럼 살려주지는 않습니다. 사고사이든, 노환으로 인한 자연사이든, 혹은 박해를 받아서 순교한 것이든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은 유두고처럼 살려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면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았기에 그들은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저는 기도해서 응답받은 것도 많지만 아직 응답받지 못한 기도도 많습니다. 하지만 죽은 사람도 살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면 저의 모든 기도를 들어줄 수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가 몸과 영혼이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잘 믿으려면 손해를 넘어 망할 것 같고 죽을 것 같은 염려는 옛날도 있었고 지금도 언제나 있습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어떤 실패와 손해, 사업 부도, 시험 낙방, 질병 등 모든 것을 해결하고 회복할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회복시켜주지 않으신다면 무능해서가 아니라 더 좋은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예수님을 믿다가 어떤 실패와 아픔을 당하더라도 위로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유두고 사건을 통해 위로받은 세 번째 이유는 이 땅의 생명이 끝나면 영원한 천국을 주신다는 약속을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눈앞에서 죽은 사람을 바울을 통해서 살리시는 하나님이라면 바울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다 믿을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 땅에서 아무리 건강하고 형통하고 성공하고 출세하더라도 모두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원하는 만큼 성공하고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이루고 나면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이 더 많이 보여서 여전히 아쉽고 만족하지 못합니다. 소유와 성취는 행복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부자가 되어 편리하다고 곧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요즘 우리집에서 매일 이사야를 읽으며 가정예배를 드리는데 이사야는 심판을 경고하면서도 계속해서 회복을 선포합니다. 그런데 그 회복이 표면적으로는 유다 나라의 회복이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메시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그 나라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의 글에서 자주 요한계시록의 표현을 발견합니다.
평소에는 사람들에게 천국의 영생과 복락이 멀게 느껴집니다. 그러다가 큰 문제가 해결되거나 간절히 원하던 것이 이루어질 때 천국의 약속을 떠올립니다. 그런 체험이 쌓여가면서 우리 믿음은 더욱 견고해집니다. 그런 체험이 많은 신자는 응답 되지 않은 기도가 있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천국 소망도 더 커집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의 체험이 아닌 옆 사람의 체험을 통해서도 위로를 받으며 믿음이 커집니다. 2000년 전 드로아교회의 이야기, 유두고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도 위로를 받습니다. 만일 지금 우리 교회에 다니는 성도가 이런 체험을 한다면 온 교회 모든 신자가 큰 위로를 받습니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은 행운의 아이콘이 되시기 바랍니다.
행운의 아이콘이 되기 위해서 창틀에서 떨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는 바울이 없으니 떨어지면 안 됩니다. 유두고도 떨어질 계획이 없었습니다. 유두고는 성찬식 예배에 참석했을 뿐인데 바울이 설교를 너무 길게 했습니다. 장소는 좁은데 사람은 많고 등을 많이 켜서 실내 온도는 높고 공기도 탁하고 몸은 피곤해서 졸려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중간에 도망가거나 벽에 기대서 잠을 자지 않고 졸지 않으려고 창틀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피곤했으면 창틀에서 깊이 잠들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이 행운의 아이콘이 되기 위해서는 그냥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하고 헌신하시면 됩니다. 말씀을 읽고 듣기 위해 없는 시간을 쪼개고 힘들어도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듣고 배운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려고 애써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죽지는 않더라도 힘들고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죽은 유두고를 살려주신 하나님이 여러분이 예수님 믿느라 손해 본 모든 것을 회복하시고 더 넘치도록 복을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전에 회사 관리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업을 하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이 심부름을 위해 노회 회의에 갔다가 노회 관리를 위해 노트북컴퓨터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청년은 그 자리에서 노트북을 살 돈 150만 원을 헌금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거래처를 방문했다가 1500만 원짜리 관리 프로그램을 계약했습니다. 프로그램이라는 것이 사람의 노력만 필요하지 재료비가 안 들어가기에 1500만 원이 고스란히 자기 회사 수입이 됩니다.
그 청년이 하나님께 헌신했을 때 150만 원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하나님은 그 청년의 150만 원을 10배로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을 섬기면서 다시 살아나는 체험을 하시고 행운의 아이콘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