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와 자비의 긴장의 해소
2)공성과 자비의 결합
대승의 자비적 측면이 공성의 지혜로부터 '필연적으로' 또는 '자동적으로' 도출되는 논리적인 귀결이 아니라면, 게다가 대승의 보살도에서 자비가 최우선적으로 요청된다면, 공성의 지혜와 자비는 어떤 연관을 지니고 있는가? 뿌센은 자비 없는 공성의 지혜는 자리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성자가 될 뿐이고, 지혜 없는 자비는 천박한 것으로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단적으로 말한다. 슈미트하우젠은 딴뜨라 불교를 정립한 스승으로 알려진 사라하(Saraha)의 Dohākośa로부터 다음의 것을 소개한다.
"자비를 거부하고 공성에만 집착하는 것, 그것은 최상의 도(道, 즉 불성으로 나아가는 도)에 도달할 수 없다. 반대로 다만 자비만을 행하는 것은 수천의 생을 거듭하더라도 해탈을 이룰 수 없다. 그러나 양자를 결합하는 방법을 안다면, 생존에도 열반에도 묶이지 않는다."
자비 없는 지혜와 지혜 없는 자비는 불성과 해탈로 나아가는 최상의 도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비록 위의 인용문이 지혜와 자비의 통일성 혹은 일치를 강조한 밀교 계통의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승의 보살도의 측면에서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슈미트하우젠은 계속해서 Dohākośa와 유사한 내용이 기술된 까마라쉴라의 『수습차제』도 소개한다. 즉 지혜만을 닦을 때, 보살은 성문이 구하는 열반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반대로 방편만을 실천한다면, 그는 보통의 사람들과 같이 윤회에 얽매이게 될 것이다. 슈미트하우젠에 따르면, 까마라쉴라는 공성의 지혜와 자비를 상보성(komplementarität)의 관계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지혜와 자비의 관계와 관련하여 콘즈는 대승불교가 도달하고자 노력하는 이상적 인간상인 보살은 세상은 버리되 그 속에 살고 있는 유정들은 버리지 않는 자비의 화신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대승의 이상적인 인간상인 보살의 등장과 함께 지금까지 지혜의 부차적인 덕으로 가르쳐졌던 자비가 비로소 지혜와 동등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짠드라끼르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앞서 인용한 『입중론』의 자주(自註)와 게송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보살의 세 가지 요인 가운데 대비가 보리심과 불이의 지혜의 근본(mūla)이라고 분명하게 밝힌다. 그는 대비를 최우선으로 두고, 그 대비를 전제로 하여 나머지 두 요인이 의미를 지닌다고 해석하고 있다. 뛰어난 사람(勝者), 즉 깨달음을 획득한 붓다가 되기 위해서는 종자와 같고 물과 같고 성숙과 유사한 대비를 근본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岸根敏幸은 짠드라끼르띠의 경우에는 대비가 없다면 보살의 실천은 있을 수 없다고 단적으로 말하고, 다얄은 후기 대승불교의 경우에는 오히려 자비가 지혜보다 더욱 중요시되어 지혜의 인격화인 문수(Mañjuśrī)보살보다 자비의 인격화인 관세음(Avalokiteśvara)보살의 우위성이 강조되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입중론』에서 인용된 『보행왕정론』에서는 대비와 보리심, 그리고 지혜가 보살의 근본이라고 나열되어 있을 뿐, 그들 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다만 『보행왕정론』에는 "대승에는 대비에 기초한 모든 행이 지혜에 의하여 무구하다는 것을 설한다."라는 기술이 있지만, 이것은 지혜와 자비의 상호관계에 대한 언급으로는 불명확하다. 따라서 나가르주나의 기술로부터 세 가지 개념에 대하여 상호 관계를 상정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따른다.
샨띠데바 역시 Śs의 두 게송에서 지혜와 자비에 대해 나란히 기술하고 있지만, 그들 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성과 자비의 결합에 의한 행위로부터 공덕의 정화가 있다."
"공성과 자비의 결합에 의한 보시로부터 재물의 증대가 있다."
'공성과 자비의 결합'(śūnyatā-karuņā-garbha)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이들 게송에 대한 설명에서 샨띠데바는 지혜와 자비의 관계에 있어서 공성의 중요성을 피력한다. 그는 6바라밀 하나하나를 언급하면서 공성의 지혜에 의거한 공덕의 정화를 강조한다. 우선 보시와 관련하여 그는『허공장경』(Gaganagañja-sūtra)을 인용하여 말한다. 즉 보살은 보시를 실천할 때, 먼저 '나라는 의식'(ahaṃkāra)과 '나의 것이라는 의식'(mamakāra)을 정화하고, 보시의 동기나 종류, 그리고 과보에 대한 기대를 정화해야 한다. 이렇게 정화된 보시는 마치 허공(gagana)과 같아서 무한하고 모든 곳으로 펼쳐지며, 물질적이지 않고 어떠한 감정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샨띠데바는 계속해서 Akṣayamati-sūtra를 인용하여, 정화된 보시는 어떠한 유정도 해치지 않고 부족함도 없으며 자랑하지도 않고 유정들에게 어떤 모욕을 주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지계와 관련하여, 샨띠데바는 『허공장경』을 다시 인용하여 말한다. 즉 생각을 정화하여 보리심을 포기하지 말 것이며, 통용되는 믿음(prāmāņika)의 정화를 통해 성문과 독각의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정화된 지계는 마치 허공과 같아 깨끗하고 고요하며 자랑하지 않고 평화롭다. 계속해서 인욕에 대하여 샨띠데바는 말한다. 즉 허공이 어떠한 방해(pratihata)도 받지 않듯이, 어떠한 유정에게도 악의를 품지 않는 것이 인욕의 정화이다. 허공이 평등하게 펼쳐지듯이 모든 유정에게 평등한 마음을 품는 것이 인욕의 정화이다.
샨띠데바는 Ratnacūḍa-sūtra를 인용하여 정진과 선정, 그리고 반야에 대하여 말한다. 즉 정진은 몸이 환상의 영상(pratibhāsa-pratibimba)이라는 것을 알고, 말이 표현할 수 없는 것(anabhilāpya)이라는 것을 알고, 생각이 완전하게 적정(寂靜)하다는 것(upaśama)을 아는 것, 다시 말해 신(身)·어(語)·의(意)가 공임을 아는 것이다. 그런 다음, 자애라는 갑옷으로 무장하여 대비의 결심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대비의 결심으로 모든 것이 공이라는 일체종성취(sarvākāra-vara-upeta)의 선정에 들어가고, 이것에 의해 반야의 정화가 생김을 알아야 한다.
샨띠데바가 6바라밀을 언급하면서 설명한 공덕의 정화를 타무라(田村)는 공성의 지혜에 의거한 자비행 또는 보살행의 실천이라고 한마디로 정리한다. 예컨대 정화된 보시는 허공과 같은 공성에 기초한 보시이며, 정화된 지계 역시 공성에 기초한 지계인 것이다. 공성은 6바라밀 전체의 기반이 되어 그것들을 지탱하고, 6바라밀은 공성에 의지하여 비로소 자비행의 공덕이라 불린다. 그리고 공성에 의해 정화된 6바라밀의 공덕은
『8천송반야경』에 따르면 보리를 증득하기 위한 '보리 회향'이 된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그대는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약에 보시가 일체지성(一切知性, sarvajñātā)으로 회향되지 않는다면 이를 보시바라밀이라 부를 수 있겠느냐?" 아난다 장로가 대답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일체지성으로] 회향되지 않는 지계, 회향되지 않는 인욕, 회향되지 않는 정진, 회향되지 않는 선정에 대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난다여, 일체지성을 향해 회향되지 않는 반야바라밀을 반야바라밀이라고 이름 부를 수 있겠느냐? 그대는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난다가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그대는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많은 선근을 일체지성의 회향으로 돌리는 그런 반야바라밀은 불가사의한 것이더냐?" 아난다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실로 그렇습니다."
일체지성은 불성 또는 깨달음(bodhi)을 가리킨다. 『8천송반야경』은 불성 또는 깨달음을 위하여 회향되는 바라밀만이 바라밀이라고 불릴 수 있다고 그 조건을 명시한다. 그렇다면 세간적인 목적을 위해 공성의 지혜에 기반을 두지 않은 채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보시와 같은 자비행은 바라밀이라고 불릴 수 없는 것이다. 샨띠데바가 BCA 9장을 시작하면서 첫 게송으로 기술한 내용도 이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붓다는 이 모든 보조수단을 반야를 목적으로 설하셨다. 그러므로 고통의 소멸을 원한다면, 반야를 일으켜야만 한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이 게송에 나오는 보조수단은 반야바라밀을 제외한 다섯 가지 바라밀을 가리킨다. 쁘라즈냐까라마띠는 이 게송을 주석하면서 반야를 6바라밀 가운데 수장이라고 명시하고, 반야라는 눈이 없으면 나머지 바라밀은 눈 먼 소경과 같다고 비유한 『8천송반야경』을 인용한다. 물론 모든 대승 경전들이 6바라밀 가운데 반야바라밀의 중요성을 기술한 것은 아니지만, 다섯 바라밀의 '안내자'요 '지도자', 그리고 뿌리를 내리는 '대지(大地)'로서의 반야의 중요성은 『8천송반야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따라서 자비의 실천은 공성의 지혜의 도움으로 비로소 일체지성으로 향해 나아갈 수 있고 붓다의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짠드라끼르띠가 대비를 보리심과 불이의 지혜의 근본이라고 밝힘으로써 '공성에 대한 자비의 기능'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샨띠데바와 쁘라즈냐까라마띠는 '자비에 대한 공성의 기능'을 언급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즉 자비가 공성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은 아니지만, 공성 없이는 자비가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Śs 게송21에 기술된 '공성과 자비의 결합'(śūnyatā-karuņā-garbha)은 '공성의 지혜를 갖춘 자비', 즉 대비 또는 보리심의 의미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입보리행론』의 보리심론 연구/ 이영석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