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챙김 명상의 무아적인 자기이해와 마음치료
불교수행의 위빠사나 명상수행을 기반으로 한 서양의 알아차림에 근거한 인지치료(Mindfulness Based Stress Reduction-MBSR)에 적용하여 우울증 예방과 스트레스감소에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무아의 이유는 『금강경』에 '통달(通達) 무아법자(無我法者) 진시보살(眞是菩薩)이라고 변하지 않는 실체가 없다는 무아에 깨우친 자가 진실한 보살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없다 하는 무아법에 통달하여야만 참다운 보살이라는 뜻이다. 우리 세속인과 성 불한 자와 차이도 또한 내가 있다는 것을 미처 못 여의는가에 있다. 인간을 세부적으로 나누면 무아로 수렴한다. 나눌수록 무아로 수렴한다. 뭉쳐 있으면 유아(有我)처럼 보이나, 분해하면 무아이다. 자아는 연기의 체(體)일 뿐이다.
무아(無我),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진아(眞我), 즉 참 나를 말한다. 『맛지마 니까야』 MN 35에서 붓다가 「쌋짜에게 말하신 작은 경」의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에 대하여 경전을 통해 살펴본다.
"악기웨싸나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형성은 영원합니까? 무상(無常)합니까?"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그러면, 무상한 것은 고통입니까?, 기쁨과 즐거움입니까?"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이 나이고 자아다.'라는 것은 옳은 것입니까?"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존과의 대화를 따라가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무상하다'라는 것은 자아에 집착하고 무아를 모르기 때문에 괴로운가? 중생은 너무나 다양한 망념 속에서 생활한다.
그 중 한 부류로 우리 생활 속에는 다양하고 복잡한 마음을 갖지 않고 생활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있다.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은 몸(形成)이 좋으면 즐겁고, 몸(形成)이 뜻과 다르면 아프면서 괴로움을 겪으며 살아간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은 '이 몸은 나의 것이고, 이 몸이 바로 자아다.'라는 등의 마음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 내 육신의 무상(無常)을 모르고 육체의 무상에 대한 앎과 자각하는 마음이 없다면 되는 대로 고락을 겪으며 생활해 가게 된다. 반면에 이런 중생이 인간의 육신에 대한 무상을 알면 그것은 번뇌와 고통의 원인과 근거의 뿌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내 몸의 형성이 생각대로 원하는 뜻대로 되기를 원지만, 육체라는 것은 나의 의지와 생각과는 관계없이 매 순간 법대로 변하기 때문에 제행이 무상(無相)하고 괴로운 것이다. 무상을 알면서 '이 몸이 나며, 내 것이고, 나의 자아'라는 마음을 동시에 집착하게 되면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고통스럽고 번뇌 망상에 괴로움이 따른다. 제행이 무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동시에 몸이 나라고 생각하고 육신에 대한 집착을 소멸시키지 못하면 무상을 알기 때문에 더욱 괴로움이 따른다.
무상(無常)을 안다면 '이것이 나의 몸이고 나다.'라는 마음이 욕심에 의해 발생한 것임을 알아차리고, 집착을 버리면 지혜를 얻을 수가 있다. 제행이 무상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 육신을 자아라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괴로움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것은 참으로 어렵고 쉽게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많은 명상수행이 의해 해결할 수가 있다. 이것을 끊임없이 관찰하며 알아차림을 하는 단계를 체험해가며 수행정진하는 과정이다. 무상하여 고통스럽고 변화하는 법에 대하여 '이것이 자아다'라는 것은 옳고 그른 문제라기보다는 어리석은 것과 현명함의 문제라고도 볼 수 있다.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모두 괴로운 것이다. 따라서 괴로운 몸의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두고 '나'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어리석은 것이다. 붓다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다. 제행이 무상하기 때문에 고통이 오며 고통 때문에 '자아(自我)'가 아니라고 봐야 바른관찰이라고 했다.
괴로움(苦)을 고찰해보면 고(苦)라는 것은 제행이 무상하다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항상하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6근(六根)이 괴로움인데 행복하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3독과 5욕에 집착하여 번뇌 망상이 일어난다.
무아(無我)는 6근이 '나'라면 항상 6근이 청정하여 병들고 죽지 말아야한다. 인간은 누구나 장생불사(長生不死)를 원하기 때문이다. 또한 몸이 아프면, 몸이 아프지 않기를 바라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내 몸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괴롭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몸은 '나'의 것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니다.
생각이 '나'라면 언제나 즐거움을 느끼고 행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고통 속에 괴로워하고 있으며, 이와 같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마음과 느낌은 '나'가 아니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괴롭다.'는 마음은 느낌과 나를 똑같이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마음이 '나'라면 행복한 일, 기쁜 일,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일만 와야 한다. 그러나 나쁜 일이나 불행한 일들이, 더 잘 떠오른다. 마음은 '나'가 아니고 '나는 생각한다.'는 것을 나와 동일하게 생각하는 것은 착각에서 오는 것이다. 어떠한 행위가 '나'라면 악행은 하지 말고 선행만을 하고 선(善)한 마음이 생겨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고통과 번뇌 망상이 더 잘 일어나고. 내 마음대로 안 된다. 이것은 '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탐욕심을 낸다.' '나는 성을 낸다.', '나는 선하다.' 이런 마음들은 어떠한 대상의 행위와 나를 같이 생각하는 착각이다. 내가 알고 모르는 것과 앎이 '나'라 면 기억하고 생각하고 싶은 것만 알고, 기억해야할 것이다. 이것은 앎과 나를 같이 보는 착각이다.
"고(苦)를 보면 무아를 본다."라는 말은 마하시 사야도의 위빠사나 게송을 보면 "관찰대상이 발생하는 즉시 마음 챙김을 하면 본 성품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본 성품을 바로 봐야 인간의 생로병사를 볼 수가 있으며 무상(無常)을 보면 고통을 알고, 고통의 아픔을 알면 무아의 경지를 보고, 무아의 경지를 보면 깨달음의 길을 성취한다. 열반의 해탈을 봐야 악행을 한 중생이 받는다고 하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의 고통세계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가 있다."
선수행과 명상수행의 마음치유의 공통점과 다른 점은 선(禪)수행은 심(心), 즉(卽), 불(佛)의 '본래 내마음속의 부처'를 찾아 해탈의 길로 가는 것이고, 명상수행의 마음 치유는 3독(三毒)에 '병든 나'를 찾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나'를 찾고 자아를 실현한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이런 견해에 대해 학자들의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선수행은 본래 나의 모습을 찾아 온갖 망상과 번뇌의 고통속에서 해탈하는 미래 지향적인 행위이고, 명상수행의 마음치유는 불안한 마음을 안정된 본래의 마음으로 되돌리는 수행이다. 현재의 고요와 평화를 찾는 것과 깨달음으로 나아가는길의 선수행은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마음치유면에서는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불교명상의 마음치유 효과에 관한 연구/ 이교헌 공주대학교 대학원 동양학과 동양학전공 석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