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오백년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말고, 한오백년 살자는데 웬 성화요….
나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꺼억 목이 멘다. 쪽진 머리에 하얀 비녀를 꽂은, 단아하면서도 처연한 분위기의 할머니, 그러나 할머니는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지 오래다.
야광염주와 노래 <한오백년>이 수록된 테이프는 과거 할머니의 보물 1호였다. 야광염주는 88년 올림픽이 끝난 바로 그 이듬해, 할머니가 고국인 한국을 방문했을 때, 시누이 되는 계화 고모할머니가 준 것이라고 했다.
“이 염주 내 시누이 계화가 선물로 줬다. 6・25때 남편 죽고 청상과부로 살아온 계화가 이걸 주면서 얼마나 슬피 울던지…. 날 본 듯이 차고 가이소, 하면서 주는데, 그라고 또 <한오백년>이라는 노래는 얼마나 청승스럽게 잘 부르던지 몰라….”
할머니는 억억 복받쳐했다. 계화라는 분은 할아버지의 친여동생이니 할머니에겐 시누이가 되고 나한텐 고모할머니가 된다. 할머니 또래인 고모할머니는 경상북도 대구시 외곽의 어느 시골마을에 살고 있다고 들었다.
1940년 쯤 이팔청춘의 꽃다운 나이에 결혼한 할머니는 어린 아들(나의 아버지)을 등에 업고 중국 땅에 발을 디뎠다. 넓은 땅에 가서 농사를 지어 밥이라도 배불리 먹고 살자는 할아버지의 소박한 꿈에 이끌려온 것이다. 그러나 막상 도착했을 땐 이상한 냄새가 나고 밟히는 것이 똥인 지저분한 만주에서 도저히 살 수 없다며 돌이 갓 지난 어린 아들을 다시 둘러업고 고국으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싣기도 했단다. 현지에 대한 부적응에다가 중국어를 구사하지 못했기 때문에 할머니의 타향살이는 신산辛酸한 나날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언제나 정갈하고 기품이 있었다. 순한 눈매에는 맑고 순수한 연민이 깃들어 있었다. 넋을 놓고 멍하니 바깥을 응시하는 할머니의 눈빛은 먼 지평을 바라보는 듯 늘 막막하고 슬퍼보였다. 바느질을 하다가도 후유, 긴 한숨을 토해내었고, 핑 도는 눈물을 삼키느라 눈을 껌벅거리면서 애써 눈길을 피하시곤 했다. 가난한 시골농부의 아내로서, 온갖 잡일과 끼니 걱정으로 할머니의 일상은 늘 고달팠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고통스러웠던 것은 타향에서의 문화적 단절과 이로부터 오는 고향과 혈육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아니었나 싶다. 한국에 있을 때 찍은 흑백사진을 초점 잃은 눈으로 멍하니 바라보면서 할머니는 독백처럼 중얼거리곤 했다.
“야들이 아직 살아있나 모르겠네. 불쌍한 우리 계화 서방은 아마 6・25때 죽었던갑다. 원재는 또 얼매나 잘 생겼노. 야가 참 인정스러웠대이. 설마 6・25때 이북에 잽혀가진 않았겠지.”
할아버지, 할머니 뒤에 나란히 서있는 군복 차림의 앳된 군인 둘은 세월의 더께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액자 안에서, 모택동 주석의 초상화 옆에서 빛이 바래도록 미소를 짓고 있었다.
동란의 세월
할아버지의 애명은 ‘닻줄’이었다고 한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갓난아이가 종적을 감추는 바람에 증조부는 아이를 찾느라 밤을 샜고 동틀 무렵에야 겨우 목숨이 간당간당한 아이를 방고래의 검댕이 속에서 건져 올렸다고 한다. 아기의 콧물에는 한 달이 넘도록 검은 액체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그래도 질긴 목숨이 되어 죽지 않았고 결국 ‘닻줄’이라는 애명을 얻게 된 것이다(증조모는 우울증으로 짧게 살다 가셨다).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소를 먹이고 들일을 다녔다. 장성한 후 일본에서 할머니를 만났고 결혼해서 다시 고향으로 내려오게 된 것이다.
일찍 어머니를 여읜 할머니는 큰오빠 슬하에서 자랐다고 한다. 큰오빠를 따라 일본 나고야名古屋에서 얼마간 거주하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아담한 체구에 용모가 단정한, 마음씨가 비단결처럼 고운 분이셨다. ‘법 없이도 살 사람’하면 제일 먼저 할머니를 떠올릴 정도로, 할머니는 너무나도 선량한 분이셨다. 그 어려운 세월에 초등학교를 졸업해 동네에서는 그나마 배운 사람으로 존경받았고, 밤에는 야학당에서 수학과 천자문을 가르치기도 했다. 위트가 있어서 육두문자를 날려도 추호의 악의가 없었고 되레 웃기기만 하니 총각들까지도 할머니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할머니를 따르고 좋아했다. 할머니는 가축한테도 말을 건네면서 아이들 돌보듯이 사랑했다. 집에서 키우던 소나 돼지를 도살장에 보내야 하는 날이 오면, 당신은 멀리 동구 밖에 나가 해질녘까지 괴로운 표정으로 서성거렸고, 죄책감 때문인지 사흘 정도는 금식을 하셨으며, 내 집에서 키운 짐승의 육고기는 절대로 입에 대지 않으셨다.
중국의 동북삼성, 그 당시 만주벌판으로 통했던 넓디넓은 평원지대에서 우리의 백의동포들은 터를 잡고 화전을 일구고 벼를 심었다. 동북삼성의 주요 민족인 한족과 만주족은 벼농사를 지을 줄 몰랐고, ‘워워토우’라는 옥수수 빵을 주식主食으로 하던 그들에게 선보인 하얀 쌀밥은 매우 진기한 음식이었다. 동포들이 바둑판같은 논밭에 모를 심고 벼를 수확하자 동북삼성은 당장 먹을거리가 새로워졌다. 게다가 동포들은 대부분 부지런하고 깨끗했으며 흥과 재주가 있었기에 주로 만주족인 현지 토박이들은 동포들을 몹시 환영했다. 비록 서로 서로 언어는 잘 통하지 않았지만 반목하지 않고 그럭저럭 공존해왔던 것이다. 그 한 예를 들자면, 우리 민족이 좋아하는 깻잎을 중국인들은 음식으로 취급하지 않았고 들깨만 식용했다. 들깨는 잎이 무성하면 씨앗이 잘 여물지 않았으니 동포들이 깻잎을 따주면 들깨의 소출이 늘기 때문에 오히려 고마워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평온함도 잠시, 항일전쟁이 끝나자 뒤이어 동족상잔의 해방전쟁이 터졌다.
‘수다쟁이’로 통했던 나는 어릴 적 어른들을 졸라 이야기를 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너무 심심했던지 어른들에게 매달려 이야기를 해달라고 귀찮게 했던 모양이다. 교과서는 온통 영웅이나 계급투쟁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 교육환경에서 자란 나는 할아버지한테 영웅인물이 나오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영웅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지 배고팠던 얘기를 하셨고 약주를 한잔 하시고 나면 끄응, 무거운 침묵을 깨면서 과거로 돌아갔다.
“모택동이 장개석이하고 싸울 때였지, 아마. 사람이 죽으면 죽은 사람 옷 벗겨 지들이 입겠다고 싸우고 난리인기라. 추운 겨울에 시체는 발가벗겨진 채로 꽁꽁 얼어 있었고….”
“할배는 왜 거기 계셨어요?”
“동네 길목에 나뒹구는 시체들을 묻어줘야 했으니까.”
해방전쟁의 현장을 그토록 담담하게 묘사하는 할아버지는 그 누구의 편도 아닌 듯했다. 스스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농부라며 자조하는 할아버지에게, 어쩌면 당장의 배고픔과 영하 30도가 넘는 혹한, 이별의 슬픔이 만주벌판에서 겪은 전쟁의 비극보다 더 큰 고통이었는지도 모른다.
해방전쟁이 끝나자 중국과 구소련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구소련으로부터 오던 경제원조가 중단되었고, 몇몇 극좌파들이 발동한 대약진운동에 설상가상으로 자연재해까지 겹쳐 민생은 파탄이 났으며 2천만 명이 넘는 아사자가 발생했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은 인간을 로봇처럼 만들었다. 철을 대량 생산하라는 나라의 지시에 따라 삽과 쟁기, 심지어 가마솥과 숟가락도 용광로에 넣어 꺼먼 쇳떡을 만들어 나라에 바쳤다. 공동식당에서 밥을 먹고 성별 구분 안 되는 복장을 입었다. 도시의 젊은이들은 정신교육을 받기 위해 시골에서 노동을 하면서 집단생활을 했고 지식인들은 사회의 최하층 계급으로 추락해 ‘구린내 나는 아홉째殠老九’로 불리면서 놀림과 천대를 받았다. 틈만 생기면 모택동 어록을 외워야 했고, 개성을 허락하지 않는 지루한 일상과 문화적 폐허, 공동체를 표방한 울타리 속에 갇혀 살아야 했다. 궁핍한 삶, 정신적 황폐함 속에서 이데올로기 투쟁은 날로 첨예해졌고 홍위병들은 부르주아적 성향을 띤 지식인들은 심판·처단하고자 날뛰었다. 대학입시제도는 폐지되었고 학생들은 대부분 농장, 공장으로 출근하거나 출세가도를 달리기 위해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했다. 고등학교에서 물리를 가르치던 아버지도 학생들의 반란으로 교직을 그만두었고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몰라서 북한을 다녀온 청년들에게 몰래 부탁해 모아두었던 장서들을 죄다 불살랐다고 한다.
1979년, 내가 열 살 되던 해이다. 문화대혁명으로 피폐해진 중국은 등소평이 주요 정치 인물로 부상하면서부터 대전환의 국면을 맞았다. 등소평은 개혁개방改革開放과 정경분리政經分離노선을 선포했다. 계획경제와 평균주의 사상은 사회의 발전을 저애한다는 사설을 관영신문에 대거 게재했다. 일부 사람들이 자신의 노력으로 자본주의의 상징인 부를 갖는 것을 허용하고(흑묘백묘론), 계획경제가 아닌 시장경제가 곧 경제발전의 동력이라는, 그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자본주의 이론을 수용함으로써 중국은 해마다 두 자리 수의 성장을 거듭했다. 토지도급제를 실시하자 농민들의 소출은 배로 늘었고 농산품의 매매가 허락되자 농민들의 삶은 순식간에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그 해 우리 집 곳간에는 쌀과 간식거리가 넘쳤고 연말에는 어머니가 예쁜 설빔을 사다줬다. 무엇보다 달콤했던 기억은, 그 하얀 입쌀이 곧 간식과 바꿀 수 있는 돈이라는 것이었다. 할머니도 인근 동네의 만주족들과 손짓발짓으로 물물교환을 하기 시작했다. 된장 콩을 삶을 때는 장작으로 삶아야 제 맛이 난다면서 쌀로 장작을 바꾸거나 여름이면 쌀로 시원한 수박을 바꿔와 아이들의 권태와 허기를 달래주었다. 겨울이 되면 할머니는 하루 종일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피면서 감주(식혜), 엿, 탁주(막걸리)를 빚었다. 섭씨 영하 30도의 겨울이 나에게는 축제 같은, 손꼽아 기다려지는 행복한 계절이었다. 나에게 겨울은 하루도 일을 거르지 않는 할아버지마저 낮잠을 즐기며 쉬어가는, 포근하고 아늑한 계절이었다. 할아버지는 약주를 두어 잔 드시면 불콰한 얼굴로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토해내고 싶어 했다.
“세상 참 마이 좋아졌다…. 대약진운동 때는 너그 명순이고모, 그러니까 니 아버지하고 몇 살 터울의 여동생(지금은 죽고 없지만 명순이라는 고모가 있었다) 명순이가 여섯 살 때 곶감 먹고 안 죽었나. 집에 먹을 것이라고는 개떡뿐이었는데 그걸 먹고 어른이고 아이들이고 똥을 못 쌌능기라. 지지리 배고프던 시절이었지…. 어느 날 생산소대生産小隊에서 곶감을 배급했고 나도 대여섯 개를 얻어가지고 집에 왔는데 가시내가 그걸 먹고 속병을 얻었는지 배 아프다 그러고 배가 돌덩이처럼 딴딴했어. 주무르면 아프다고 울고, 시골에 병원도 없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지. 먹으면 토하고 먹으면 토하고… 그 불쌍한 것이… 끄응, 너그 할매 참 많이 울었다.”
할머니는 고통스러운 기억과 마주하고 싶지 않은 듯 몸을 비스듬히 옆으로 가누시면서 눈물을 훔쳤다. 명순이고모 외에도 할아버지 할머니는 대약진 때 아버지와 한두 살 터울의 아들(삼촌들) 셋을 더 잃었다고 한다. 왜 죽었는지, 묻고 싶었으나 할아버지의 신음소리며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얼굴이 너무 안쓰러워서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그러나 훗날 아버지를 통해서 죽은 동생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슬픔은 여러 번 우려낸 차처럼 많이 희석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여리고 눈물 많은 할머니를 의식했던지 슬픈 이야기를 희화화戱畵化하여 시니컬하게 말했다.
“허허허, 할매가 아들 셋에 딸 하나를 저 세상에 보내고 그 뒤로도 내 밑에 열두 살이나 적은 큰 고모로부터 시작해서 딸 여섯을 쪼르르 안 낳았나. 그때는 피임도 모르고 살던 시대였고, 어무이 아부지 금실도 참 좋았어, 허허허. 막내 고모 낳았을 때는 며느리인 너그 엄마 배가 남산만 했지. 할매가 며느리 보기 창피하다면서 막내 고모 그 갓난쟁이를 휙 던지는 걸 내가 용케 받았어. 어무이, 막내는 내가 키울라요, 하면서 말이야. 고모 여섯에 내 딸 셋, 집에 딸자식만 아홉 명이었으니까 딸부자로도 소문났지. 내가 그때 안 그캤으믄 막내고모는 아마 중국사람한테 양딸로 줬을기다. 할배가 진짜로 줄라캤다.”
망향가望鄕歌
티브이도 없던 시절인지라 사람들은 권태감에 몸을 비틀었다. 밤이 되면 아낙들은 동네 마실을 다녔다. 옛날 한 고향에 살았거나, 동본 동성인 사람들이 모여서 고향을 추억하며 회포를 푸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취미생활이었다. 마을 처녀들은 따뜻한 온돌방에 요를 덮고 여럿이 다리를 맞대고 앉아 깔깔대며 이야기를 주고받거나 움막에서 꺼내온 시원한 무의 달콤하고 서걱거리는 맛, 서로의 솜씨를 뽐내는 뜨개질로 권태를 달랬다. 남자들은 함께 모여 수제 화투놀이를 하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라디오를 들었다. 할아버지는 라디오 주파수를 어느 숫자에 맞춰놓으면 우리말로 된 ‘KBS한국방송’이 흘러나온다는 것을 알고 계셨고 하루의 노동이 아무리 고되어도 밤에는 꼭 한국방송을 듣다가 잠이 드셨다. 두런두런 두 분이 주고받는 이야기, 라디오를 통해 띄엄띄엄 들려오는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흥겨운 노랫가락, 그 속에 간간이 섞여 나오는 탄식 같은 한숨소리… 이 모든 것에는 나의 콧마루를 찡하게,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무엇이 있었고, 그러나 나는 그 정체를 알지 못했다. 라디오 방송이 종료되어 지지직거리는 잡음만 들릴 때까지 나는 함께 한국방송을 경청했다. 하루의 고단함을 이기기 위한 자장가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할아버지는 주무시기 전에 꼭 베개를 가슴팍에 고이고 소형 라디오로 KBS한국방송을 들으셨다.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나는 혼자만의 공간을 원했다. 겁도 없이 여름밤 홀로 쥐죽은 듯 고요한 뜰에 앉아 풀벌레 찌르륵대는 야밤의 정적에 귀를 기울이거나 커튼을 활짝 열어젖히고 맑고 시원한 시골의 밤공기에 가슴을 헹구며 짙푸른 하늘을 오래토록 응시하기도 했다. 나는 슬프도록 고요하고 적막한, 철저하게 외로운 그 느낌과 청아淸雅한 달빛을 좋아했다. 그건 나의 매우 비밀스런 취미이기도 했다.
나는 병약하고 내성적이며 정체성의 혼돈을 동반한 청소년기를 보낸 것 같다. 나는 아이답지 않게 슬픈 노래를 좋아했고 잠투정을 하는 아이처럼 서쪽 하늘에서 침몰하는 저녁 해를 보면서 울었다. 어른들은 청승맞다, 늑대 온다 하시면서 무서움을 주거나 혼을 냈다. 그러면 진짜 늑대가 올까봐 무서워서 늑대처럼 울었다. 원인을 알 수 없던 나의 비애는 어머니의 핀잔으로 증폭되었다. 나는 자주 편도가 붓고 고열에 시달렸으며 오가는 감기 다 받아서 시시콜콜 자주 앓았다. 아프면 할머니는 사이다나 과일 통조림을 사주셨다. 야가 며칠 아프더니 많이 축갔네, 공부가 힘들지? 안 춥더나? 키가 얼맨고? 기집아가 발은 도둑놈 발이네, 그래 갖고 시집가겠나? 많이 묵거래이…. 유년의 추억은 할머니의 사랑이 있었기에 지금도 포근히 나를 감싸 안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린 아이가 할머니와 애수哀愁라는 정서를 공유했다는 점이다. 나는 할머니의 시름과 슬픔을 이해했고, 할머니는 사춘기 소녀의 긴장·불안한 내면세계를 얼추 탐지해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별로 많지 않다. 찌푸린 미간, 근심걱정을 고집스레 붙잡고 있는 굳은 표정이 싫지만 아프게 기억 속에 떠오를 때가 있다. 어머니는 시어머니가 요량도 없이 자식만 많이 낳았다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할머니를 향해 자주 원망을 쏟아내었고 할머니는 본의는 아니지만 다산多産으로 무거운 책임을 며느리한테 지웠다는 죄책감에 눈물을 삼키면서 묵묵히 견뎌내셨다. 언제나 할머니 편인 나는 그럴 때마다 초조하고 불안했다. 어머니는 괴팍하고 예민하며 청개구리처럼 엇나가는 나를 이해할 수 없어했다.
70년대 중후반까지도 중국은 말과 행동이 그다지 자유롭지 않던 때였으므로, 혹여 ‘간첩’이나 ‘주자파(走資派, 자본주의 노선을 주장하는 사람)’이라는 누명을 쓸까봐 노심초사해야 했다. 중국은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북한과 혈맹관계를 맺었고 북한과 친선 우호적 유대관계를 죽 이어오면서 남조선은 미국의 식민지라는 북한의 입장을 지지했다. 70년대만 해도 한국의 대중가요를 중국에서는 마음껏 부를 수 없었다. 혹시 간부들이 적발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라디오방송은 이불속에 숨어서 들었다. <이별의 부산정거장>, <굳세여라 금순아>, <고향초>, <타향살이>…. 야밤에 전해오는 고국의 노래들은 북한의 주파수 교란으로 띄엄띄엄 간신히 귓가에 당도했다. 이 60년대의 노래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들의 망향가望鄕歌였고, 나에게는 고국에 대한 무한한 동경을 불러일으키는 노래였다.
80년대부터는 시장경제의 도입과 개혁개방 정책으로 생활이 윤택해지고 얼어붙었던 한중관계도 해빙기를 맞게 되었다. 라디오방송을 듣는 것과 한국 노래를 부르는 것이 비교적 자유로워졌다. <갑돌이와 갑순이>, <돌아와요 부산항에>라는 노래는 동네 사람들의 애창곡이었다. 노래는 여전히 끊겼다 이어졌다 애를 태웠지만 사람들은 신기하리만치 곧잘 따라 불렀다.
이산가족 상봉
80년대 중반쯤의 어느 날, 우리 집에 반가운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항공우편’봉투에 예쁜 한글 주소가 적힌 대한민국에서 날아 온 편지였다. 모든 해외 편지는 당국의 감시를 거친 결과였던지 항상 겉봉이 찢어진 상태로 도착했지만 우리는 감사한 나머지 그런 것쯤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고국의 소식으로 집안은 흥분의 도가니였다. 할머니는 세상에, 참으로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하시면서 “아이가, 아이가(세상에, 세상에)” 할머니 특유의 감탄사를 연발하셨다. 하마터면 중국 사람에게 줄 뻔했다던 그 막내고모가, 할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설마하면서 KBS방송국에 보냈던, 이산가족을 찾는다는 편지가 운 좋게 경남 마산의 고향에 전달되었고 큰할아버지의 막내아들인 정호 삼촌(지금은 오십대 중반이 넘었을 것이다)이 회신했다. 12쪽이 넘는 긴 편지였던 것 같다. 정호 삼촌이 예쁜 손 글씨로 쓴 편지였다. 편지에는 큰할아버지 슬하에 자녀 몇 명이며 결혼 여부, 그들이 하고 있는 사업, 증조부모들의 선영은 어디에 모시고 있다는 등등 내용이 소상히 적혀있었다. 그리고 편지에는 당시에 보기 힘들었던 컬러사진도 동봉되어 있었는데 화사한 가족사진 외에도 큰할아버지가 살고 계신다는 멋진 2층 단독주택을 볼 수 있었다. 정호 삼촌은 크지 않은 키에 단단하고 준수하게 생긴 총각이었다. 사진의 락 가수 같은 긴 머리에 나팔 청바지, 줄무늬 셔츠 차림의 삼촌은 멋졌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고, 아버지와 고모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동네방네 뛰어다니며 자랑했다, “우리 집도 한국에 친척 있어요!”하면서. 한편 나는 남조선(중국에서는 당시 ‘한국’과 수교하지 않아 북한의 호칭대로 ‘남조선’이라고 불렀음)이 북한보다 잘 산다는 편지 내용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북한의 도서나 영화를 통해 상상하고 있었던 남조선은, ‘여자들은 환락가에 몸을 팔고, 인민들은 자본가들의 착취와 만행에 신음하고 있다’는 식민지 자본주의 나라였기 때문이었다. 한국에 잘 사는 친척이 있어서 너무 좋았지만, 내가 과거에 알고 있었던 남조선과는 달라도 너무나도 다른 세상이라는 사실에 혼돈을 느꼈다.
우리 집과 한국 큰할아버지네 집과의 편지 거래가 수년 간 지속되는 사이, 중국 동포와의 이산가족 상봉이 드디어 물꼬를 텄다. 이산가족 상봉은 그때 당시 우리 집의 가장 큰 희망사항이었고 자랑거리였으며, 따분한 일상에 엄청난 활기를 부여하는 매우 큰 사건이었다. 친척의 초청으로 먼저 한국을 다녀온 동포들은 달러화를 벌어와 순식간에 졸부가 되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고국방문은 달러화에 있지 않았다. 큰할아버지가 간경화로 위독했기에 한시 급히 만나야 했다. 88올림픽이 끝난 그 이듬해 1월, 할아버지 할머니는 큰할아버지의 초청으로 각고의 노력 끝에 대한민국의 비자를 받았고 당시만 해도 한·중 수교 이전이라 홍콩과 일본을 경유하여 고국에 도착했다. 키가 훤칠한 큰할아버지는 강제징용에 동원되었었고, 또 6・25 참전을 하고도 생존한 동네의 몇 안 되는 큰 어르신이었다. 큰할아버지는 간경화 말기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음에도 성격이 워낙 낙천적이었던지 아니면 친동생을 만나서 반가웠던지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면서 그 와중에도 매일 술을 드셨다. 큰할아버지는 “정재야, 니 무덤자리까지 다 손봐놨으니 니도 고만 우리 집에서 살다가 고향땅에 뼈를 묻어라”고 했다. 고국을 방문한 할아버지 할머니는 한국에서 정확히 한 달 만에 귀국하셨다(큰할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떠날 때 간경화가 심해지면서 자주 각혈했고 1년 후 세상을 하직했다).
야광염주
할머니가 한국에서 가져온 김영임의 회심곡 중 <한오백년>은 들을 때마다 눈물샘을 자극한다. 그때 난 대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한국에 대한 동경으로 우리 말, 우리 노래, 한글에 대한 것들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던 때었다. 이 에너지는 문화적 결핍의 반대급부였다.
한오백년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 아무렴 그렇지 그렇구 말구, 한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한오백년 살자는데 웬 성화일꼬? 가사가 우짜면 이리도 내 맘을 훤히 알고 썼더노?”
나의 예민한 감성을 자극했던 노래 <한오백년>.
국악 명창 김영임의 허스키한 목소리를 통해 화산의 용암처럼 분출하는 한恨.
할머니는 이 노래를 가장 즐겨 들으셨고, 음치였던지 어떤 노래를 불러도 <한오백년>과 비슷한 곡조로 불렀다.
“춘아, 테이프 넣어봐라.”
한 서린 가사와 곡조는 우퍼 스피커를 통해 온몸을 전율케 하는 떨림을 방출했다.
1998년 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방안에 줄 끊어진, 옥빛 야광염주 알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공기 속을 부유하는 투명한 얼음덩어리들. 오싹하게 냉기가 서린 방은 텅 비어 있었고 창밖에서 할머니가 손을 흔들고 계셨는데 환하게 웃으시면서 극락세계로 간다, 잘 있거라 하신다. 나는 안 돼, 할매 가지 마, 하고 외치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꿈이었다. 하지만 나의 무의식은 그게 영원한 이별임을 눈치채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출근하자마자 집에 전화를 걸었다(당시 나는 졸업하고 베이징의 모 직장에 근무 중이었다. 당시 베이징-창춘은 기차로 열여섯 시간의 거리였다). 할머니가 지병인 당뇨로 고생하시다가 사흘 전에 저혈당으로 쓰러지셨는데 간밤에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천지가 온통 뿌옇던 그날, 할머니의 유골은 이향異鄕의 야산에 뿌려졌다. 죽으면 새가 되어 자유롭게 날고 싶었던지 유골은 산에 뿌려 새들의 밥이 되게 해달라고 유언을 남기셨단다. 언니의 말에 의하면 할머니의 유골에서는 돌보다도 더 딴딴한, 태워도 타지 않는 그 무엇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야광염주는 할머니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이다. 여동생이 잘 보관하고 있다가 내가 하도 눈독을 들이자 나한테 ‘소유권’을 이전하고야 말았다. 뀀줄은 삭아 끊어진 채로 할머니의 작은 함에 보관되어 있다. 할머니는 일흔넷에 돌아가셨는데, 야광염주와 <한오백년>은 할머니가 나에게 남겨준 가장 소중한 정신적 유산이 되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도 어언 15년이 지났다. 하지만 할머니의 모습은 유년의 애잔한 추억과 함께 선연鮮然하다.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젖어들 때면 나는 <한오백년>을 듣는다. 그리고 야광염주를 향해 나직이 할머니를 불러본다.
할·머·니·할·머·니….(2013년 겨울)
(2015 에세이스트 올해의 작품상 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