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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hwang@naver.com
100편의 시와 몇 편의 소설을 쓰다.
모두 습작이다.
어느 날 내 안에서 들리는 소리를 기록하기 시작한 것뿐이다.
2022년 『에세이스트』 106호로 등단하다.
무당 딸이라 미안합니다(1)
-발칙한 연애사를 까발리며
깊은밤 울려퍼진 엄마의 말투는 나직하고 다정하게 둔갑했다. 거칠고 부서지지 않는 돌덩이처럼 차갑고 무겁게 나를 옭아매었다. 이제 엄마는 무당이 돼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고 엄마 자리를 대신해 집안에 들어앉았다. 대학 3학년, 내 나이 스물세 살 때의 일이다.
갑작스러운 말처럼 엄마가 단 하루 만에 무당이 된 것은 아니었다. 무당이 되려는 조짐이 가정 내에 우후죽순처럼 삐져나왔을 테지만 알아차리기에 나는 너무 어렸다. 그러나 세월을 곰곰이 되돌아보면 부모가 그어려운 시절을 견디며 벌어들인 돈이 한순간에 사라졌고,아빠는 몇 년 새에 머리가 두 번이나 깨지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우리 가족은 제각기 해체의 길을 걸었다. 엄마는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혼이 빠진 듯 했을 테고 사 남매를 두고 떠날 결심까지 했을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엄마는 처녀 시절부터 수없이 꿈을 꾸었고 점쟁이들을 자주 찾아다녔다고 했다. 내가 스무 살이 넘도록 신(神)기를 누르고 눌러 살았을 엄마. 이제는 신내림 굿을 받고도 그만큼의 시간이 더 흘렀고, 이십대의 나는 오십을 바라보는 중년이 되었다.
무당 딸로서의 23년! K장녀 시절부터 부모 대신 정육점에 나가 고기를 썰어 팔았다. 칼질을 제법 하고 굉음이 나는 기계를 동작시켜 갈비를 척척 잘라냈다. 짝짝 소리로 맛나게 껌을 씹으며 손님들에게 너스레를 떨던 엄마. 스프레이로 한껏 앞머리를 추켜올리고 쫙 붙는 청바지에 무릎까지 오는 검은 부츠를 신던 멋쟁이 정육점 안주인이었던 엄마를, 나도 모르게 닮아 가는지도 몰랐다. 엄마가 무당이 되기 전부터 시작된 K장녀의 삶에서 무당 딸이 되기까지, 엄마의 아픔을 이해할 겨를도 없이 나는 묵직한 젊은 날의 상처를 먼저 파헤치려 한다.
갓 핀 꽃처럼 젊은 나에게는 같은 대학 선배인 남자친구가 있었다. 모든 처음을 함께 해준 사람, 나를 꽤 아껴주었고 의지할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엄마가 무당이 된 이후로 그는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물론 내가 달라졌기에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 모른다.
그의 집에 처음 인사를 간 날이었다. 하필이면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어색하고 냉랭한 가운데도 교양을 잃지는 않았다. ‘나를 만나기도 전에 무당의 딸이라고 말해버린 막내아들의 말이 진저리나게 싫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나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그만 헤어지면 안 되겠느냐고. 노량진의 빨간 벽돌집 계단을 내려서면서부터 나는 눈물바람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그가 옆에 있었지만 내게는 아무도 없는것과 같았다. 그로부터 일 년쯤 지났을까. 그와 나는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결별했다. 그날 터미널 너른 주차장은 깜깜한 혼돈의 물결이 바다처럼 출렁였다. 나는아무리 눈을 비비고 씻어내려도 눈 앞이 흐려와 걷
기조차 힘들었다.
고향에 가려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내 눈물은 눈치 없이 후두둑 후두둑 떨어져 내렸고 그는 창밖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고개를 떨군 나는 그가 달리는 버스 앞을 막아서길 빌고 또 빌었다. 그는 결코 나를 부르지도 잡지도 않았다. 나는 버스 안에서 하염없이 흔들리며 생애 첫 이별과 고독하게 조우했다. 이후 수 년 동안 그를 나쁜 새끼, 소 새끼라고 욕을 하며 길에서 툭하면 울고 다녔다. 그와의 이별을 떠올려도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을 무렵에야 나
는 그 이별이 선물임을 깨달았다. 서른이 넘어 동창회에서 만난 그를 보니 그렇게 미어지던 머리숱이 휑한 것이 아닌가. 모든 걸 차치하고라도 그건 아니 될 일, 나는 그날 그와의 모든 억하심정을 정리했다.
스물 일곱의 봄, S를만났다. 나의 두 번째 남자친구. 가난한 무당딸이 K대 수재를 만났다고 무당 엄마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사교댄스 동아리의 불타오르는 열기처럼 우리는 금방 사랑에 빠졌고 그와 나는 함께 유학길에 오를 희망으로 부풀었다. S의 엄마는무남독녀라했다. 말씨가 거칠고 툭하면 자살소동을 벌이는 이상한 여자라고 S로부터 들었다. 내가 엄마가 무당이 된 걸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S도 자기 어머니의 성품이나 행동거지를 이해
하지 못하는 것 같았고, 일정 부분 우리는 그 언저리 어디쯤에서 묘한 공감대가 형성되기도 했다. 일테면 엄마 흉보며 다정해진 커플이랄까.
어느 날 길을 걷다 S가 배를 움켜쥐고 웃으며 말했다.
“우리 김 여사 말이야. 내가 일 년에 한 번씩 약 털어놓고 자살소동 벌일 때부터 알아보긴 했지만 진짜 이상해. 글쎄, 너랑 나랑 궁합을봤는데 그 무당이 네가 과거에 애를 하나 낳았다고 그랬대. 허허허, 참나, 내가 하도 기가차고웃겨서 한참을 깔깔거리고 웃어버렸잖아. 김 여사 진짜 못 말린다니까.”
나는 그의 말에 더 이상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오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땅바닥으로 흘러내린 순간, 나는 땅을 치며 오열했다.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한참을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란히 굳어있는 그의 구둣발을 흘끔거리며 나는 통곡했다. 급기야 그가 나를 일으켜 세웠을 것이고 나는 뿌리치는 척하면서도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섰을 테지만, 사실이 대목이 가장 지우고 싶은 장면이다. 벌떡 일어나 그의 뺨을 후려쳤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을 오래도록 후회했다. 나는 S의 엄마를 용서할 수 없었고, 자기 엄마 얘기라며 웃어젖히던 그는 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 결국 S에게도 보기 좋게 차인 거다. 얼핏 보면 내가 그를 떠나보낸 것 같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시 홍수의 계절이 왔다. 첫 번째 이별보다 더 아프게 울며 나의 서른 살이 물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첫 번째도 눈물바다였지만 두 번째 이별 후엔 후유증이 심각했다. 꼭 이별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른 살의 나는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꽤 오랜시간을 우울해하고 슬퍼하면서도 또 그만큼의 시간을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살아내야 했다. 그렇게도 촌구석 고향을 떠나고 싶어 상경했는데 어찌 서울 하늘 아래 내 남자는 없단 말인가! 그로부터 5년을 싱글로, 아니 노처녀로 살았다. 간간이 소개팅이 있긴 했지만 나는 이미 전의를 상실한 군인처럼 기운이 빠져 있었다. 솔로 탈출을 위한 치열한 노력 따위는 없었다.
이상하게 ‘대머리’가 연이어 소개팅남으로 등장했다.처음 만난 사람은 모든 것이 괜찮았는데 대머리였고 가발을 쓰고 있었다. 가발은 마치 봉숭아 학당의 맹구가 저요, 저요! 라고 소리를 치는 것처럼 대번 눈에 번쩍 띄었다. 같이 살던 남편이 대머리가 되는 꼴은 봐도 처음 만난 상대가 대머리인 것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더욱 황당한 건 그 대머리 아저씨가 내게 애프터를 하지 않았다는 청천벽력같은 사실이었다. 불감당의 연속이었다. 다음번 타자는 대머리였지만 홍석천처럼 시원하게 머리를 밀고 다니는 남자였다. 머리가 반질반질 빤짝거리는 남자를 가까이에서 본 건 대머리가 된 아빠 말고는 처음이었다. 우리 아빠는 젊은 시절 알랭 들롱을 뺨치는 외모였는데
도 대머리가 된 후 정말 볼품없어질 정도로 대머리의 신체적 타격은 엄청났다. 대머리는 인류의 재앙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아예 싹 밀어버린 민머리는 대머리보다는 훨씬 봐 줄만 했다. 그 민머리를 홍석천이 아닌 꿍따리 샤바라 클론의 구준엽으로 상상하며 데이트를 즐겼다. 건물주라던 그를 만날 수 없게 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대머리가 아니라 그의 성격 때문이었다. 대표적 이혼 사유인 성격 차이. 인간도 동물이라서 그런 건지 나와는 어떤 인간적 교감도 나눌 수 없던 그는 나의 데이트 거절 한 방에 연락을 끊어버렸다.
그 후로도 소개팅은 이어졌다. 나를 좋다고 하는 남자들은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리도 매력이 없던지. 머피의 법칙처럼 내가 맘에 드는 남자들은 한사코 내게 또 만나자는 제의를 어찌나 하지 않던지. 솔로는 계속 솔로이려고 하는 관성의 법칙이라도 작용하는 건가. 나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몇 번 데이트를 즐겼던 항해사는(처음
친구가 소개해준다고 했을 때 ‘한의사’로 잘못 알아듣고 매우 기뻐했던 나는 그저 그런 속물임을 고백한다.) 나와의 두 번째 데이트에서 게임을 하자더니 벌칙으로 팔목 때리기를 제안했다. 난 재미로 응했는데 온몸의 힘을 실어 내 가녀린 팔목을 내리치던 그 항해사에게 하마터면 욕을 날릴 뻔했다. 거기까진 그렇다 쳐도, 그다음 내게 연봉이 얼마고 모아놓은 돈이 얼마냐고 묻는 게 아닌가. 순간 그의 얼굴에 침을 뱉지 않은 건 그래도 내가 고독한 시간을 보내며 내공을 쌓은 덕분이었다.
겁없이 매력적이지 않은 인간이 다가오면 내겐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엄마가 무당이라는것을 비롯해 쫄딱 망한콩가루 집안사를 들이밀면 대부분 나가떨어졌다. 무당과 가난 중 어떤 것이 그를 보내버렸는지 궁금했지만 꼭 알 필요는 없었다. 남자들은 딱 두 부류로 나뉘었다. 내가 무당 딸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즉시 깔끔하게 등을 돌리
는 부류와 그따위 무슨 상관이냐고 호기 부리며 시간 좀 끌다가 돌아서는 부류. 어쨌든 내게 관심을 보여준 남자들에게 무당 딸이라고 거들먹거린 것에 대해 갑자기 사과가 하고 싶어졌다.
“거참, 무당 딸이라 미안합니다.”
무당 딸이라 미안합니다(2)
-23년 차 무당 딸로서 사과해야 한다.
23년 차 무당 딸로서 사과를 해야 한다. 비로소 그것은 권장이 아닌 의무임을 알아차린다. 엄마가 신을 받고 처음에는 모든 것이 화가났다. 사과를 받는다면 그건 응당 내가 되어야한다고 주장한 날들이 있었다. 그러나 신을 받으러 나간 엄마의 처지를 (감히) 이해해야겠다고 울면서 글을 쓴 낮과 밤이 있었고, 부인이 하루아침에 무당이 되어버린 한 남자가 있었고, 나보다 어렸던 세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나는 이제야 타인의 삶을 조금은 들여다볼 줄 아는, 머리가 아닌 가슴이 생겼다. 고백하건대 사과는 받아야할 것이 아니라 건네주어야 할 일이 되었다.
엄마가 무당이 되었을 때, 사남매 중 맏딸이란 이유로 총대를 메야하는일들이 많았다.스물 셋의 나는 모든 것이 원통했고부끄럽고 게다가 바빴다. 나보다 어린 동생들의 마음을 돌볼 겨를 따위는 없었다. 귀하게 태어난 막내 남동생의 처지가 참 가련했다. 세월이 지나서야 그가 얼마나 외롭고 처절했을지 짐작해볼 뿐이다. 엄마가 신을 받으러 떠난 뒤, 나는 툭하면 늦잠이 들어 남동생의 손에 라면 값을쥐어 주어야 했다. 어떤 날은 없는 솜씨로 싼 다 식어 빠진 도시락을수줍게 내밀었다. 말없이 받아 들고 나가는 남동생의 뒷모습이 하루종일 머릿속에서 윙윙거렸다.
얼마 전 매형들과 술을 들이켜며 남동생이 그랬다.
“난 버림받았어요.”
동생의 목소리가 내 맘을 돌덩이처럼 묵직하게 눌렀다. 충분히 그럴만했다. 고등학생이었던 남동생을 두고 떠난 엄마와 자기 삶에 치여 툭하면 눈물을 찍어내던 아빠에게 동생은 버림받았음에 틀림없었다. 미처 그의 슬픔을 들춰보기도 전에 각자의 아픔으로 우리는 경주마처럼 앞만보고 달렸다.꽤 오랫동안 막내는 고독을 삼키며 담배를 태웠을 테다.
둘째와 셋째 여동생은 나와 마음을깊게 나눈 자매들이다. 어릴때 서로의 머리끄덩이를 잡기도 하고, 아침에는 눈을 뜨자마자 옷 쟁탈을 벌였었다. 지금은 사는 모양새가 달라도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은 지구 밑바닥에서부터 에베레스트 정상만큼 치켜 올라갈 태세다. 얼짱\사남매\단체카톡방에 일만 터졌다하면 각자 유능한 분야로 우리는 총출동한다. 그들이 없었다면 갑작스러운 엄마의 부재를, 우유부단하고 무능력한 아빠를 견뎌내긴 힘들었을 것이다.
나도 때로는 일탈하고 싶었다. 아빠가 사고로 머리가 깨진 날에도, 엄마가 신을 받으러 집을 나간 날에도, 난 시험공부를 했던 것으로기억한다. 징크스처럼 꼭 시험 기간에 사고가 터졌다. 아마 그러지 않았다면 난 서울대학교에 합격했을지도 모른다고 자위해본다. 동생들의 자잘한 일탈을 보고 부모처럼 꾸지람을 늘어놓았다. 머리를 맥주로 샛노랗게 염색하고 온 여동생의 머리를 후려갈겼고, 담배꽁초를 페트병에 산처럼 쌓으며 살아가는 남동생에게 폭언을 퍼붓기도 했다. 나의 야단 때문인지, 그들의 노력으로 인한 건지 몰라도 동생들은 시샘이 날 정도로 나보다 더 잘 살아가고 있다.
내가 하기 힘든 일 중 하나는 무당 엄마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는 일이었다. 여동생들은 수시로 점사 손님을 물어다 엄마에게 건네주는 제비들 같았다. 하지만 나는 차마 엄마가 무당이라고 홍보하지 못했다. 더구나 엄마에게 와서 점을 보라고 권하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창피한 마음이 앞섰고 점사의 결과에 대한 어떠한 책임
도 결코 지고 싶지 않았다. 말로는 편견을 갖지 말자 했다. 무당 엄마를 당당하게 여기자고 떠들어댔다. 하지만 난 다분히 위선적이었다. 17년간 일한 회사의 대표에게 엄마의 직업을 숨겼다. 기독교 신자인 그에게 굳이 엄마의 종교를 알려서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다. 회사의 자금까지 담당하는 내가 가난한 집의 무당딸이라는 것을 나서서 알릴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어쩌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궁색함은 온몸에서 퍼져나갔을 것이다. 나는 그저 모르쇠로 일관했을 뿐이었다.
우선 과거로 날아가, 굴욕감으로 물든 스물셋의 나를 살포시 안아본다. 누구에게도 터놓지 못했던 답답한 마음의 끈을 훅 당겨본다. 옷고름이 풀리듯, 스스로 당겨져 나온다. 마흔여섯의 내가 스물셋의 나에게 온기 가득한 손을 내민다. 참아내느라 애썼노라고 작은 어깨를 다독인다. 가식으로 똘똘 뭉쳤던 더 젊은 날의 머리칼을 용서로 빗어준다.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은 응당 내 가족이다. 나의 말뿐인 당당함에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행동하는 번듯함을 보여준 동생들을 존경한다. 필요한 이들에게 무당 엄마의 소중한 능력을 나눠 준 그들의 정정당당함에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나의 부모. 목숨처럼 사랑하면서도 밥 먹듯이 부모를 미워했다. 어떤 날은 이래서 다른 날은 저래서 원망스레 바라보았다. 끝까지 우리를 버리지 않고 세월의 풍파 속에서 모든 것을 견뎌낸 부모가 이제야 조금은 자랑스럽다. 그들도 인간이기에 헤매고 쓰러진 날이 다반사였다. 오뚝이처럼 일어나 사남매 곁에 건재함에 코끝이 찡해진다.
특히 무당엄마. 엄마가 무당이라서,라는만만한 삶의 도피처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힘겨울 때마다 나의 방패막이가 돼주던 무당이라는 화두는 결국 그 어떤 행위의 이유도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사남매 결혼의 서막에도 무당이라는 엄마의 존재는 일말의 영향도 끼치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아픈 손가락이 되어버린 둘째 여동생의 이혼에도 무당 엄마는 무관한 사람이었음을 밝힌다.
삶이 잘 안 풀리고 속상할 때마다 냉장고 위에 몰래 숨겨둔 초콜릿 과자처럼 꺼내먹은 것이 ‘무당’이라는 해결책이었다. 인생이 어떤식으로 흐트러지더라도 꽤 번듯한 명분이 되어주었다. 지금에서야 치기 어린 행동을 뉘우친다. 가족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전한다.
무당이 대물림하듯이 아빠의 유전자도 내게 대물림되었다. 그가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의 상흔이 고스란히 자식들에게 전해진다. 엄마의 박복한 팔자가 비슷한 밑그림을 그리며 다가온다. 내 인생 최대의 과업은 무당의 대물림을 거슬러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유전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통과 배려의 부재로 가득한 부모의 삶을 내 아이들에게 결코 대물림해서는 안 된다. 거세게 흔들리고 단단하지 못한 조상의 유전자를 도려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오히려 무당이 대물림되는 것보다 결핍이 가득한 삶이 대물림될까 두려워해야 한다.
무당이 그리는 무늬 따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 자체로 우뚝 설뿐, 누구에게도 강요된 것이 아니었다. 이제, 나는 기쁜 마음으로 고유의 인생 문양을 그려나갈 요량이다.
진혼굿
신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내가 신을 나 몰라라 하면 혹시 애들이
잘못될까, 그러면서 전전긍긍 살았어. 우리 큰아들이 네 살 그 어린 나
이에 허망하게 죽었는데 작은집 조카새끼가 스물다섯에 또 교통사고
로 저세상을 간 거야. 우리 아들의 원혼은 못 달래줬지만 조카새끼도
내 아들 아닌가. 그 녀석을 잘 달래서 보내주면, 지노귀굿을 해서 잘
보내주면, 다시는 우리 집안에 이런 비명횡사는 일어나지 않겠지, 그런
마음으로 굿을 했어. 코딱지만 한 어린 자식을 보내도 그리 아픈데, 다
키워 죽인 자식 정을 떼는 그 아픔은 또 얼마나 클 것이야.
―연화보살
그녀는 십 삼년 전 추석전날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모두가 깊이 잠든 밤, 연화보살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녀의 막내아들과 꼭 동갑인 작은집 아들이 오토바이 사고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는 비보였다. 얼마나 크게 소리쳐 울었는지 모른다. 어찌 양쪽 집안에서 자식을 교통사고로 똑같이 잃을 수가 있단 말인가.
전화를 받고 오열하는 그녀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창백한 사촌동생이 누워있던 새벽의 응급실에서도 멍하니 서 있을뿐이었다. 죽은 사촌동생이 화장터의 이글거리는 불 속에서 타들어갈 때도 다리에 말뚝이 박힌 듯 버티고만 있었다. 죽은 이를 보내는 행위 앞에 나는 빈틈없이 무기력한 인간이었다.
그녀는 녀석의 부모보다 더 비통하게 울어주었다. 부모가 어찌 스물 다섯 해나 키우며 쌓은 정을 단번에 끊어낼 수 있으랴, 자식을 잃어본 어미의 마음을 나 아니면 누가 알랴, 서럽게도 울었다.장례를 치르고 나서 그녀는 죽은 아들을 위한 것인 양 조카자식을 위한 진혼굿에 심혈을 기울였다. 가장 좋은 날을 잡고, 망자를 위한 상차림도 더할 나위 없이 거하게 차렸다. 통돼지 한 마리를 배를 갈라 속을 비워 준비했다. 큼직한 소갈비 한 짝도 주문해두었다. 도매시장에 나가서 갖가지 과일을 직접 골라왔다. 모둠전도 종일 쪼그려 앉아부치고 또 부쳐댔다. 삼색 나물을 관절이 시큰하도록 꼭짜서 무쳐두고 생선과 해물 등도 깔끔히 손질해두었다.
넉넉한 사람들이라면 굳이 억울하게 죽지 않아도 넋을 달래기 위한 굿을 한다. 모두가 사람의 혼을 이리 정성스레 보내주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은 경우가 많다. 그래도 젊은이가 사고로 죽거나 억울하게 생을 마감했다면 필시 원혼을 위해 굿을 해줘야 한다고 그녀는 늘 말해왔다.
스물다섯. 꽃이 피기도 전에 져버렸으니 망자는 얼마나 외롭고 힘들 것인가. 그녀는 자신의 큰아들과 똑같이 교통사고로 생을 달리한 조카자식이 하염없이 가엾었다. 집안에 드리운 비명횡사의 대물림을 꼭 끊어내고 싶었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녀의 할머니도 무당이었다. 그녀의 뿌리, 대물림의 시초였다. 할머니의 남편인 할아버지는 집 뒤편 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 아버지는 일본 노무대에 끌려갔다가 병을 얻어 돌아와 일찍 생을 마쳤다. 그녀의 큰오빠와 막내 남동생도 어린 나이에 병으로 모두 죽었다. 이 집안에 뿌리 깊게 틀어박힌 죽음의 고리를 무엇으로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빌고 또 빌어야만 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었노라 되뇌었다.
유독 집안의 남자들에게 불운이 반복되었다. 죽음의 신이 그녀의 조막만 했던 아들에게도, 조카자식에게도 내려앉았다. 그런 일이 다시는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진혼굿에 그녀는 온 마음과 몸을 담았다. 진혼굿이 벌어지던 날 밤에도 나는 그곳에 머물렀다. 우리는 무언가를 했지만 또 아무것도 하지 않음과 같았다. 떠나가는 사람을 위해서 하는 어떤 행동도 죽은 이와 소통이라는 생각은 없었다. 나는 홀로 완벽하게 외로웠다.
어스름한 저녁, 굿당으로 모두가 출발했다. 트렁크 가득 실린 갖가지 음식을 내려 너른 교자상 세 개를 쪼르르 붙여서 제단을 차렸다. 그녀의 법당에서 장구며, 징, 방울이 외출하는 날이다. 일하는 사람들은 필요한 물건을 신속히 가져다주며 분주했다. 그녀도 챙겨 입을옷을 가지런히 정리하며 머리를 한 번 더 단정히 빗었다. 방에 딸린 화장실에 들락거리며 네명의 무당이 굿판을 위한 시동을 걸었다. 망자를 위한 화려한 치장이었다. 선홍빛의 립스틱을 칠하고 분도 두텁게 두드려 발랐다. 횐 구절마다 갈아입을 옷의 색은 노랑, 빨강, 파랑, 초록으로 눈이 쨍하게 밝고 호화스러웠다.
굿 비용이 비싼 이유가 있다. 엄청난 노동의 대가이고 정갈한 마음으로 지극한 정성을 바쳐야하는 일이기때문이다.차려질 음식을 돈주고 사면 좋지만 그러면 정성은 반감된다. 하나하나 조심조심 지극하게 마음을 기울여 음식을 마련한다. 그녀는 수 일전부터 시장을 들락거리고 음식을 마련하느라 입술이 부르틀 지경이었다.
초여름의 산속은 한기가 돌았다. 나무들 사이로 구슬픈 풍악이 울려 퍼졌다. 굿당은 보통 깊은 산속에 위치한다. 망자를 위해 소리치고 울어도 전혀 방해받지 않을 만큼 세상과 동떨어져 있어야 한다.무당들 은자신이 맡은 부분에 최선을 다하며 악사의 가락에 몸을 맡겼다. 굿이 벌어진 방의 열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춤을 추며, 부채를 들었다가 칼을 휘두르는 무당의 입에서는 거친 숨소리가 연신 뿜어져 나왔다. 한바탕 쏟아내고 나면 얼굴은 땀으로 번질거렸고, 한복겨드랑이가 흥건히 젖어버렸다.
아들을 잃은 작은엄마 작은아빠는 벽에 붙어 서서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나는 동생들과 그 옆에 함께 서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작은 엄마는 눈물이 없었다. 사촌동생이 누워있던 응급실에서도 멍하니 서있기만 했었다. 머리가다 하얗게 세어버린 작은아빠는 고개를 뚝 떨군 채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연화보살, 나의 엄마는 목에 핏대가 서도록 악사의 피리에 맞춰 소리를 뽑아내었다. 당신의 잃어버린 아들을 위한 노래인지도 몰랐다. 서럽게 울며 작은엄마의 손을 잡았다가 작은아빠의 어깨를 쓰다듬기도 했다. 그들은 그제야 함께 눈물을 흘렸다. 아들의 온기라도 느껴지는 것일까.
그녀는 서글피노래를 하다가 갑자기 긁은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엄마, 내가 그날 오토바이를 타지 않는 건데 미안해. 엄마도 알지? 나 오토바이 한 번도 몰아본 적 없는 거. 아, 글쎄 그날따라 친구 녀석이 그렇게 같이 타고 가자고 나를 끌어대는 바람에 내가 어쩔 수없이 타게 된 거야. 너무 미안해. 엄마. 내가 엄마한테 마지막 인사도못 하고 이렇게 떠나서 미안해….”
작은엄마는 그저 그녀의 손을 잡고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오냐, 오냐. 안다. 알아….”
다리에 힘이 풀린 작은아빠는 주저앉으며 울기 시작했다. 굿판이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 방에 있는 숨 쉬는 존재들은 모두가 함께 울고 있었다. 무당은 춤사위로, 악사는 피리로, 나는 온몸으로 통곡했던 밤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내게 다가왔다. 뜨거운 손이 나를 감쌌지만 나는 차마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엄마인지 누군지 모를 존재가내게 말했다.
“누나, 나 이제 갈게.”
귀가멍멍하고 말문이 막혔다.나를 잘 따르던 사촌동생이 내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것인가. 지켜보며 눈물을 가까스로 삼켰던 나는 급기야 울음소리가 터졌다.
나는 신내림굿과 진혼굿을 자주보아온 무당의 딸이다. 엄마가 그속에 있지만 우리 엄마가 아닌 듯 늘 장면 장면은 생경하기만 했다. 상다리가 부러질 것만 같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도록 거하게 차려진 음식. 죽은 이를 보내는 과정은 이처럼 화려하고 돈이 많이 든다. 이렇듯 많은 노력과 정성에 금전까지 들여가며 굿을 하는 이유는뭘까?
나는 그 연유를 죽음의 하찮음, 헛헛함에서 찾았다. 사람이 죽는 장면이나 상황은 예고없이 일어나곤 한다. 특히 준비되지 못한 죽음앞에서 남은 이들의 선택은 강제된 무기력 뿐이다.
살아있는 사람은, 끔찍한 사고 앞에선 경직되고, 병들어 죽어가는 이 앞에선 눈물이나 떨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보낸 사람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만 맺힌 설움이라도 터져 나올 것이다. 마지막이라는 의미 앞에서 남은 사람들은 그동안 꺼내지 못했던 가슴 속 깊은 보석까지 꺼내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미 떠났지만, 지금이라도 그럴 수 있어서 다행이라면서.
어제까지도 곁에있었던 심드렁한 일상이 오늘은 너무 값진 소원이 되어버릴 것이다.매우 늦었지만, 그일상의 소중함을 잊은 대가로진 혼굿을 하는지 모른다. 나는 무당 엄마에게서, 사촌동생을 날려 보낸 작은엄마에게서 뒤늦은 후회를 엿보았다. 속절없이 보낸 죽음의 대물림이 제발 이번 대에서 끝났기를. 집안 여인들의 곡소리가 울렸던 깊은 밤, 산속의 굿당에서 나는 역시나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리고 아주 깊게 소리내어 울었다.
불안과 감각에 대하여
일요일 오후 열리는 요가수업에 가려고 바지런히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지금까지 수천 수만 번 열었을 차 문. 문을 여는 순간 차 문 위쪽 끄트머리에 왼쪽 눈 밑을 세차게 가격 당했다. 순간 얼굴에는 불꽃처럼 열감이 확 치고 올라왔고, 그것 못지않게 짜증도 함께 팍 솟구쳤다. 바보인가? 얼얼한 한쪽 얼굴을 비비며 속엣말을 중얼거렸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원인을 찾자면 나의 감각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한다. 나는 불안이 참 많은 사람이다. 17년간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며 손잡이 철봉을 잡고 툭하면 상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지하철이 전복되는 사고를, 누군가 불을 질러 아수라장이 된 지하철 안을, 전복되면 머리부터 부딪힐까 몸이 먼저 나뒹굴까를, 연기
를 마시면 바로 정신을 잃게 될까를 생각하다가 아, 입을 틀어막으려면 손수건이라도 챙겨야지 했다. 하여 한동안 핸드백에는 꼭 한 장의 손수건이 들어 있었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으로 정신적 피로는 친구인 양 손잡고 내 주위를 항상 맴돌았다.
남편은 이런 나를 보며 혀를 끌끌 찬다. 늘 양극단에서 널을 뛰는 내게 그럴 만도 하다. 결혼하고 12년. 지금까지도 나는 그의 손발톱을 깎아준다. 다정다감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나는 다만 자라난 손톱을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이고(심지어 남의 것이라도), 남편은 그런 일에 심각하리만큼(물론 내 기준에서) 무심하기 때문이다. 어느날 발톱을 자르다가 남편의 굳은살을 야무지게 손톱깎이로 잘라냈는데 금방 피가 배어나왔다. 어머, 소리를 지르며남편에게 사과했는데 그는 외마디 중저음으로 응했다.
“아….”
움찔하지조차 않았던 그의 무감각한 행동에 많이 놀랐다. 반대의 경우였다면 나는 그에게 손이 먼저 올라갔을 것이다.
불안과 감각의 개인적 차이는 꽤 클 것으로 예상된다. 나는 학자도아니고 관련 서적을 많이 읽어 보지도 않았으니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일 뿐이다. 내가 불안이 과하고 감각적으로 예민한 편에 속한다는걸 알게 된 것은 마흔 일곱 해를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온결과의 깨달음이다. 사는데 심각한 지장을 초래한 적은 없다. 하지만 시시때때로 남다르게 느꼈을 불편감이 내 인생에 어떤 작용을 한 건 확실하다. 그 불편감은 나뿐 아니라 주변인들에게도 영향을 끼친 적이 많았다. 나는 가족과 친구들을 종종 불편하게 만든 적이 있다고 확신한다.
그런데 이번 일은 이상했다. 내가 감각적으로 예민하다면 차 문에 그리 쉽게 얼굴을 내주어서는 안 되었다. 어찌 된 일일까? 최근 둘째아이의 행동문제로 상담받고 심리치료를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아직 뭐라 진단이 내려진 것은 아닌데, 난 선 치료, 후 진단을 택했다. 몇 달간의 고민이 있었다. 내가 태생적으로 불안과 예민한 감각을 타고났으니 더 불안하고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초기 상담을 여러 곳에서 받고, 소아정신의학과에서 진료를 본 결과 우리 아이의 기질은 아주 예민하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간 양가에서 쏟아지던 말. 쟤는 대체 누굴 닮은 거냐? 그 해답이 내게 있을 줄 몰랐다. 아이는 철저하게 나의 유전자를 받아 세상에 자신의 감각을 펼쳐내고 있었던 것. 콩 심은 데 콩 나고, 예민함 속에서 다시 ‘초’ 예민함이 꽃을 피운다.
기질적인 아이의 감각에 대해서 초기 상담만 받았을 뿐이지만, 나는 아이가 감각통합조절에 문제가 있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곧 치료를 시작할 예정이고, 그 기록을 아주 주관적으로 남겨볼 생각이다. 지금 불현듯 스치는 것은 어쩌면 나도 아이의 치료와 함께 일정 부분 치유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다. 아이의 감각은 너무 예민해서 혹은 너무 둔감해서 적절하게 기능하지 못한다고 했다. 예민한 사람은 감각적으로 예민할 것이라고만생각했는데, 의외로 둔감한 감각도 있다는 설명에서 나는 무릎을 탁쳤다.오로지 예민함으로 점철된 나의 행동 특성들 중에 지극히 둔감한 부분도 있을수있다는발견이었다. 나는심각한 길치이고, 방향치이며, 공간 감각에 매우 아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한번 간 길은 절대 다시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한번 본 사람의 얼굴은 귀신같이기억할 수있다. 심지어 그 사람이 어떤 색깔옷을 입었고, 머리 스타일은 어땠는지, 눈동자의 빛깔과 눈의 크기는 어떠했으며, 웃을 때 볼에 깊게 파인 보조개까지도 나는 기억할 수 있다. 그러나 가던 길에 어떤 상점이 있었고, 어디쯤에서 좌회전을 했으며, 랜드마크라고할만한 대형건물이 있었는지 조차 단번에 떠오른적이없다.
나는 숱하게 물체에 부딪힌다. 무릎을, 발목을, 팔뚝의 어딘가를, 허벅지를. 곳곳에 출처를 알 수 없는 멍자국이 선연하다. 길을 갈 때나, 집안에서 움직일 때 공간을 지각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차에 눈가를 가격당한 것도 같은 양상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라면 모든 감각이 다 예민하지도, 다 둔감하지도 않다. 사람은 개인차에 따라 특정 감각은 더욱 발달하고, 그에 비해 다른 감각은 다소 기능이 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타고난 감각을 좋고 나쁨이나 옳고 그름의 문제로 보기보다는 안정과 불편의 기준으로 보면 좋겠다는 의견이다. 어쨌거나 둘째아이는 여러 가지 감각들이 아주 예민한 상태이고, 반면 몇몇 감각 기능은 아주 둔감할 수 있다는 견해를 들었다. 아직은 어리기에 부족한 감각 조절 기능이 생활에 불편을 초래한다. 아이가 문제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성급하다는 작은 결론에 다다랐다. 그저 치료를 하며 발달해나가는 아이를 지켜보자고 나 자신과 잠정적인 합의를 보았다. 차차 성장하면서 아이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게 될 것이다. 불안과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살아온 지금의 엄마처럼. 곧 시작하게 될 치료와 평가를 통해 그 과정을 지켜볼 것이다.
앞으로 아이와의 감각통합치료가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궁금하다. ‘초’ 예민 감각자인 나에게도 분명 어떠한 메시지가 함께할 것이라 믿는다. 아릿한 눈가의 통증을 지그시 눌러본다. 아이와 함께 할 치료시간은 그 아픔처럼 단순명료하고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눈가를 차 문으로 강하게 맞은 것처럼 아이의 불안과 감각이 내게로 왔다. 동시에 아이의 것은 나의 것이기도 하다. 나는 오롯이 진통을 감내하며 아이와 그 길을 저벅저벅 걸어간다.
치료의 서막. 이제 시작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아득한 치료의 시간이 육아의 일부라면, 어쨌든 육아는 진정 내 취향이 아니다.
막걸리, 마음에 담다
둘째아이를 재우려고 누웠는데, 막걸리가 머릿속에서 아른아른거린다. 술주정뱅이, 고주망태처럼 술이 먹고 싶어서가 아니다. 오해하지 마시라! 아직은 조절 가능한 상태이니 안심하시라!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막걸리가 무엇일까 상상하다가 그 답을찾은 것 같아서 바로 노트북 앞에 앉았다.
내 돈 주고 사 먹는 밥보다는 남이 사준 밥이 조금 더 맛있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커피머신에 손수 내려먹는 커피보다는 카카오톡으로 누군가 쏴준 기프티콘으로 사 먹는 커피 한잔이 왠지 맛이 깊다. 골똘히 생각하다 보니 막걸리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남편이 허옇고 꺼먼 비닐봉지에 덜렁덜렁 사 들고 온 막걸리보다는, 같은 막걸리라도 남이 사준 것이 더 맛나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았다.
블로그에 1년간 매달렸다. 처음에는 집에서 아이를 돌보며 할 수 있는 부업거리를 찾고 싶었다. 결혼하고 10년 가까이 블로그를 묵혀두었다. 활성화되지 않는 블로그로 자꾸 돈벌라는 쪽지와 메일이왔다. 그것이 고작 다시 블로그를 시작하게 된 계기였다. 하지만 역시 사람의 발길은 늘 뜻하는 곳으로 가지 않는다. 나는 블로그로 그리 글 노동을 하는데 애드포스트는 하루에 고작 10원을 밑도는 금액이기 일쑤였다. 블로그 함께 하는 친구들끼리 모래사장에 가서 동전을 줍는 게 낫겠다는 결론에 도달하며 깔깔거렸다. 아이러니하게도 돈은 못벌었지만,나는블로그하며 사람을 벌었다.
결혼 후 친구도 제대로 한번 못 만나고 7년간 직장생활을 하며 첫애를 키웠다. 직장을 그만둔 이후로는 다시 사무실 책상에 앉아 일할 수 없다는 다짐같은 것을 했다.결코 다시 돌아 갈수도,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고나니스스로 집안에서고립을 자처했다.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어떤 사회 활동도 하지 않았다. 큰애 초등학교 1학년 때 1년간 매달려서 학부모 교육을 듣고 학교 도서관에서 봉사활동을 한 것이 세상과의 작은 접점일 뿐이었다.
블로그 세계는 달랐다. 수많은 이웃을 알게 되고 마음을 나눌 수있는 친구들이 하나 둘 늘어났다. 신기하게도 다시 꿈꾸는 인간으로 탈바꿈했다. 어느 날부터 나는 막걸리를 좋아하는 여자사람이 되었다. 알코올 중독자로 보일지라도 개인 취향을 표출하는데 거침없었다. 양은 막걸리잔에 따른 뽀얀 막걸리 사진을 서슴없이 올리고 오늘도 낮술 한잔 했노라 떠들어대기도 하였다. 누군가는 중독자로 쳤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상한 여자라 생각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래서 막걸리스트라는 블로그의 새 이름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어느 날 여자사람 B에게 연락이 왔다. 그녀는 경상도에 사는 여인이다.자신이사는 지역의 막걸리를 내게 보내주고싶다고 하였다.딱 한 번만 거절했을 뿐, 또다시 호의를 베푼다는 그녀의 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약간 뻔뻔한지도 몰랐다. 하얀색 스티로폼 박스에 일곱 병이나 되는 막걸리가 누워있었다. 경상도에서 서울까지 참 멀리도 온녀석들.어떤놈은뚱뚱하고 다른 놈은 호리호리하였다. 막걸리 특성상 세워서 보관해야 되는 막걸리가 대부분이다. 그녀는 비닐봉지와 노란 고무줄로 뚜껑을 하나하나 막아 살포시 박스에 뉘어놓았다. 뚜껑을 여니 미세하게 쏟아진 막걸리가 박스 안에서 냄새로 자신의 존재를 톡톡히 드러냈다.
막걸리 맛은 천차만별이다. 개인의 취향이 점점 각광받는 시대이니만큼 막걸리의 맛도 진화한다. 경상도 막걸리는 사실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미안해서 솔직히 말하지 못했다. 여린 손으로 비닐을 야무지게 씌웠을 그녀가 떠올랐다. 막걸리를 즐기지도 않는 그녀가 어떻게 막걸리를 골랐을까. 아마 동네에서 제일 큰 마트에 갔을 것이다. 막걸리가 즐비한 코너에 가서 눈으로 막걸리를 한번 쓸어 담고, 뚜껑을 톡톡 치며 어떤 놈이 맛있을까 고민했음에 틀림없다. 그때 그녀는 머리를 긁적였거나,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 깨물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를 상상해보니 경상도 막걸리 맛도 썩 괜찮았다. 그녀의 막걸리가 내 마음에 살포시 담겼기 때문일까. 막걸리를 고르던 그녀를 생각하며 막걸리를 한입 물고 굴려보았다. 캬, 맛이 죽인다.
여자사람 J가있다.센스 돋는 요즘젊은이인 그녀는 나와블로그를 하며참가까워졌다.세상에 믿을사람 없다지만,블로그에그런사람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모양이다. 만나는 인연마다 보통을 넘어선다. 그녀는 배려심이 깊고, 모든 질문에 어떤 이보다도 빠른 답을 내놓는 매력쟁이다. 어떤 초행길도 문제없이 씩씩하게 걸어 나가며, 늘
아이디어도 샘솟는 여자다. 그렇게 마음의 다리에 있는 돌을 한 칸씩 건너며 가까워졌다.
우리 집에 처음으로 블로그 친구들을 초대했다. 그녀도 함께였다. 처음엔 부끄러워 손을 떨던 그녀였다. 그러다 어찌나 우리 집이 편했던지 화장실에서 큰 볼일을 보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방귀 튼 사이를 건너뛰어 바로 똥 튼 사이가 되어 버렸다. 이보다 더 친근한 사이가 세상에 있을까. 가장 먼저 우리 집에 도착한 그녀의 손에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다. 보통 남의 집에 처음 방문할 때는 휴지나 세제를 선호하는 편인데 작은 비닐봉지 안에는 과연 무엇이 들은 것일까? 수줍게 떨리는 작은손으로 건넨 봉지에는 막걸리 두 병이 들어있었다. 그것도 내가 요즘
가장 즐겨 마시는 국순당 초록이 막걸리가 아닌가!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는한참을깔깔거리며 웃어버렸다. 이 귀여운여인을 어쩐다!
그녀는 블로그 이웃 최초 똥 튼 사이를 넘어 막걸리를 집 초대선물로 사 온 여인이 되었다. 그날, 그녀의 막걸리 두 병은 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 마음에 별이 되어 반짝였다.그녀들이 내게 건내 준 막걸리가 지금까지 먹어 본 막걸리 중 제일 맛난 막걸리임을 당당히 밝힌다. 그것은 단순히 남이 사준 막걸리가 아니다.오로지 나를 떠올리며집어들었을 막걸리.여인들의마음이오롯이 담겼다. 가만있지 않고 나도 내 맘속 깊은 곳으로 더 쑥쑥 눌러담는다.그녀들의 마음이 막걸리를 헤엄쳐 내게왔다.캬,맛에취한다.
이 글을 빌려 나의 여자사람들에게 깊고 애틋한 감사를 전하는 바이다.
<작가 노트>
엄마의 인생을 쓰겠다고 처음 결심했을 땐 호기롭고 꽤나 당당했다. 하지만 글을 쓰면 쓸수록 나는 알 수 없는 거부감과 자괴감에 시달려야 했다. 몇 달의 시간이 지나도 나는 그것의 근원을 찾아낼 수없었다. 깜빡거리는 한글 파일의 커서를 한참 동안 바라보며 한 문장을 적어 내려가기가 버거웠다.
사십대 중반을 훌쩍 넘겨서야 글을 쓰는 작가가 되겠다고 작정했다. 감사하게도 나는 비교적 많은 이야기를 곧잘 쏟아내었다. 나의 이야기를 쓰는데 있어서는 두려움도 없이,마치 아무도 보고있지 않는 것처럼, 자판을 두드렸던 낮과 밤들이 있었다.
주인공이 나에게서 엄마로 바뀌자 한동안 노트북 앞에 앉아있기 조차 힘들었다. 아무리 나 자신이 발가벗겨지는 일에 당당하다고 해도 엄마까지 그렇게 만들기 싫다는 무의식이 작용하는지도 몰랐다. 이미 엄마는 오래전부터 사람들 앞에 정신적 나체 상태로 살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한 ‘무당 엄마를 팔아서 글 쓰는 초보 작가’라는
오명을 들어도 어쩔 수 없었다.
엄마는 내게 항상 양가적이었다. 엄마가 내 눈 앞에서 사라진 날 은 사무치게 그리웠고, 다시 나타나면 어깨 위에 놓인 커다란 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 젊은 날, 눈물의 팔 할은 엄마에게서였다. 내가세상에 나와 첫 경험을
하게 되는 타인이며 또 가장 가까울 수밖에 없는 타인으로서의 엄마. 그를 철저히 외면하고 싶은 욕구와 동시에
이해해 보려는 치열한 탐구가 내 안에서 언제나 불화 중이었다. 그래서인지 나의 글은 서정보다는 극적 서사에 초점이 맞추어졌고, 긍정보다는 부정의 색깔이 진해졌다.
『에세이스트』 113호 김종완 발행인의 권두수필을 인상 깊게 읽었다. 아마 내 글이 어쩌면 인간의 보다 적극적이고 생의 진실에 다가가려는 노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를, 또 나의 글쓰기를 긍정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고백한다. 힘든 이십대와 삼십대를 보내며 바라본 세상은 회색빛이었고, 집안은 각종 사건 사고로 들끓곤 했었다. 문장은 인생의 변화와 개혁을 원하는 듯 백지 위에서 날뛰어 다녔다.
어쭙잖게 작년 한 해 동안 백여 편에 가까운 시를 습작했다. 이성복의『무한화서』에 의하면,시는‘언어로 표현할 수없는 것을 표현하려다 끝없이 실패하는 형식’이라 한다. 지금도 엄마의 이야기에 매몰되어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리고 줄곧 실패하는 것을 보면, 나의 행위는 다분히 ‘시(詩)’적이 아니던가. 시가 엄마이고, 또다시 엄마가 시였다. 가닿으려고 할 때마다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향해 돌진하는 연속성, 앞으로도 나는 끊임없이 실패하고 나뒹굴어질 것이다.
괜찮다. 어느날 누군가의 한마디가 이 혼란을 잠재워 주었다. 나는 어디로 가려는 것이 아니었다. 어디로 가려고 할 때 마다 도달하지못하고 실패했지만 그곳에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란다. 내가 또 다시 글을 써내려갈 수 있는 힘이다. 대물림이란 시를 썼다. 엄마가 그렇게 걱정하는 무당의 대물림을 내게 달라고 신(神)께 빌었다. 내게 신들린 글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가끔은 주변의 서사에 눈 돌릴 날도 있을 것이다. 어김없이 다른 날은 다시 그녀에게로 몰두할 것이다. 여전히 긍정보다는 부정과 전복이 함께 할 것이다. 김종완 발행인께서 에세이스트의 제2의 시대가 ‘부정의 정신’으로 열린다고 하였다. 감히 그 행렬에 동참함을 당당히 밝힌다.
‘당시에는 지긋지긋했지만 이제 그 기억은 내 마음이 뜯어먹기 좋아하는 풀밭이 되었다’는 조지 오웰의 말이 지금 이 순간, 나의 모든 것이다.
<황혜란 론>
신데렐라의환상을깨부수는‘꿈꾸는여자사람’
-김 지 예-
1. ‘집 밖’의 어머니
“무당 딸”(「무당 딸이라 미안합니다」)을 자처하는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무당인 어머니에 대한 작가의 발화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작품 속 작가의 어머니는 순종적이고 수용적인 ‘집 안’의 어머니 상과는 거리가 멀다.
그녀의 얼굴생김은 희고 동그란 얼굴에 광대가 우뚝 서있고 입은 돼
지처럼 야무지게 튀어나왔다. 이러한 생김새의 여자는 흔히 남편을 먹
여 살릴 팔자를 가졌다고들 한다. 이목구비는 오목조목 또렷하지만 시
쳇말로 팔자 드센 여자의 전형적인 얼굴이었다. 딱 들어맞는 예언처럼,
그녀는 여장부였고 아무것도 없던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
위 내용은 작가가 어머니에 대해 본격적 쓰기작업을 시행했던 「어느 가난한 무당 이야기」의 일부다. 아버지는 “사람만 좋고 허허 웃기만하는”, “세상급할것이없고가난한선비처럼살아가는”사람이었고, 첫 아이를 보내고 나서도 뒤돌아 앉아 눈물만 찍어내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돈벌이와는 영 상관없는 ‘무능한’ 남편을 대신해 집안을 먹여 살린 것은 어머니였다. 아이들을 들쳐업고 방석집으로 남편을‘잡으러’다니기도하면서,첫아들이죽었지만리어카를끌고 풀빵장사를 나섰던 강인한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장사수단은 실로 놀라워서 아버지의 수입을 늘 웃돌았고, 수입 쇠고기 정육점을 할 때는 “쓸어 모인” 돈이 3층 건물을 세웠을 정도였다.
여성의 외모를 두고 “팔자가드센”, 혹은, “남편을먹여살릴팔자”라는 판단을내리는기저에는유교 가부장제와 근대적 젠더 규범이 착종된 폭압적 시선이 존재한다.여성의‘좋은팔자’를,여성스스로의사회적 성취가 아닌 남편의 성공이나 직업에 잣대를 두며 ,여성이 남성보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더 우월할때 이는 여성의 ‘불행’하거나‘드센’
팔자로 전락해버리기도한다.그리고 여성 자신은‘집’이나 어머니의‘본질’에서 멀어졌다는 죄책감까지 떠안기도 하는 것이다.
집에 두고 온 내 새끼들, 아직 엄마 손이 필요한 애들을 넷이나 두
고 제가 이리 나왔습니다. 후회한다고 말하진 않겠습니다. 슬프다고
하지도 않겠습니다. 선택은 제가 한 줄로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신
령님을 믿고 따르기로 한 이상, 절대 한 눈 팔지 않고 신령님만 모시기
로 약속을 드리겠습니다. 결코 우리 신령님 배신하는 일은 제 평생 없
을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우리 자식들, 그 아이들만은 지켜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돈도 명예도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신령님만 모시
고 이 길을 가겠습니다. 제발, 신령님 그렇게만 해주시면 더는 바랄 것
이 없겠습니다.*
작가가 밝히고 있듯, 작가 역시 아이들을 두고 신을 받으러 떠난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부채감에 오래 괴로워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집을 ‘떠남’은, 지난한 시절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해 집안을 일으켜 세웠던 것과 동일한 의미로 읽혀야 한다. 어머니의 자리를 떠난 듯 보이지만, 어머니의 자리를 결코 벗어나지 못하고 어머니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인 회귀와도 같다. 당신의 할머니 역시 무당이었고, 당신의 고모도 무당이었다. “신령님이 한치의 미련도 없이 떠나는 날”이 올 것을 믿으며 나의 아이들에게 올지도 모를 신의 운명을 끊어내기 위함이었고, 그 사이 “머리가 두 번이나 깨진” 아이들 아버지의 죽음을 막기 위한 선택이었다. 나의 아이들을 지켜내기 위해 혹한의 날씨에 붕어빵 리어카를 끌고 “나가고”, 전국 각지로 트럭을 몰고 “나갔듯”, 결국 신을 받기 위해 집을 ‘나간’ 것이다. 여기에서 “보통의 엄마”가 아닌 “남다른 엄마”가 된 작가의 어머니를 읽을 수 있다. 전통적인 서사였다면 어땠을까. 대의를 위해 집을 떠나는 자는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로 재현되어 왔다**.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이상적인 아내의 역할은, 이제부터라도 마음을 잡고 가족을 먹여 살리라며 남편을 압박하고 집에 남아 아이를 보살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작가의 작품 속 ‘어머니’는 남편과 집과 아이들을 떠나 집을 나간다. 이러한 결단은 어쩌면 어머니의 자리를 버리는 비정한 행위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남편을 대신해 아이들을 살려야 하는, 집안을 일으키고 어떻게든 가혹한 운명을 끊어내야만 했던 가장이 된 어머니의 투사적 사랑이었다.
그녀는 순종적인 ‘집 안의 천사’가 되길 거부했을지는 몰라도, ‘집 밖의 투사’가 되어 직접 고통으로 뛰어들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작가는 이제 그러한 어머니의 모습을 절절히 읽어낸다.
* 황혜란, 「어느 가난한 무당 이야기」
** 서승희, 「포스트/식민 여성 성장소설의 젠더지리」, 여성문학연구, 2022, 169쪽
어떤재료도그녀의손에들어오면무장해제가되었다.어떤음식으
로변신을하던아이들의입맛을사로잡았다.아이들이맛있다며작은
입을 오물거릴 때면, 그녀는 진짜 본연의 엄마가 된 것 같아서 마음이
간질거렸다. (…). 그녀의 사랑은 고기에 한 움큼, 국에 한 사발 얹어져
아이들에게 연일 배달되었다. (…) 부모가 삶의 굴레에 시달릴 때, 우리
들은 각자 독립적으로 자신의 굴레에 맞서 살았다. 내가 나 자신과 동
생들을 자랑스러워하는 이유다*.
어머니가 어머니의 자리를 떠났을 때가 있었다. 어머니와 딸은, ‘물리적인 공간’에 함께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두 아들의 어머니가 된 작가는 이제, 어머니의 ‘떠남’이 어머니로서의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안다. 어머니의 몸은 떠나 있었지만 어디 있었든지 아이들을 지켜내는 어머니로서의 역할은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이해한다.
“우리들은 각자 독립적으로 자신의 굴레에 맞서 살았다.” 작가가 기록하듯, 그들은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굴레에 맞서 살았다. 누구도결코 운명에 순응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작가는 이제 “거참 무당딸이라 미안하다”며 웃을 수 있다. 무당 딸임을 부끄러워했던 때, 무당 딸이라서가 아니라 무당 딸인 자신을 인정하지 못했던 청춘의 어느 때, 실패로 끝났던 소소한 연애 일화를 유쾌하고 담담하게 풀어낸다. 작가의 글은, 무당이 된 어머니에 대한 이해와 사랑의 기록이며 당당하지 못했던 과거의 나와 조우하는 화해의 서사라 할 수 있다. 아픔을 통과해 온 희망의 기록이 유쾌한 문체 안에서도 강렬한 감동을 그려낸다.
2. 신데렐라의 환상을 깨부수기
작가의 글을 읽으며 가장 많이 떠올랐던 것은 신데렐라의 서사다. 신데렐라 서사는, (또 동양에서는 「콩쥐 팥쥐」와 같은) 많은 이들이 주지하듯 여성주의 문학 비평에서 비판적 텍스트로 흔히 차용된다. 신데렐라 서사의 ‘착한 여자’(온화하고 순종적이며 순결하고 천사와도 같은)와 ‘나쁜 여자’(폭력적이고 공격적이며 세속적인)의 상징이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와 얽혀 독자에게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질 때가 많으며, 아름답고 순종적인 여자가 자신을 원하는 남성이 ‘깨워줄 때’ 비로소 성적으로 각성되는 젊은 여성이야말로 가부장제가 바라는 올바른 여성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의 핵심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어떤 양상으로 곳곳에 만연해 있으며 우리의 인지나 동의 없이 어떻게 우리는 길들이는가를 인식하는 데 있다*.
사실 평자조차도 ‘나쁜 엄마’ ‘나쁜 아내’의 특성을 드러내는 문장은 쓰기가 망설여지는 것이 사실이다. 인간인 이상 신데렐라의 이복자매처럼 시시때때로 공격적인 감정이 올라올 만도 하고, ‘계모’처럼어머니로서의 헌신보다는 나의 욕망을 앞세우고 싶을 때가 분명히 있고 남편에게 그악스럽게 잔소리를 해댈 때도 있으나, 이러한 감정을 문장으로 옮기는 이상 나의 이미지가 ‘그러하게’ 고착되어버릴까 두려운 것이다. 온화하고 순종적이며 순결한 여자가 이상적인 어머니의 상으로, 공격적이며 세속적인 여자는 나쁜 여자이고 그릇된 어머니의 상으로 인식되는 것은 평자 역시도 사회가 바라는 ‘좋은 여성’의 전형적인 정체성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쯤에서 평자가 왜 작가의 작품을 읽으며 이상하게도(?) 신데렐라의 서사를 떠올렸는지 돌아와 보자. 작가가 신데렐라 같아서? 오히려 그 반대다. 작가는 신데렐라 서사가 말하는 ‘착한 여자’의 전형을 발칙하게 비웃는다. 그리고 스스로 ‘나쁜 여자’ 자처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작가는 신데렐라처럼 부모를 잃지는 않았지만, 아버지는 “삶에 치여 툭하면 눈물을 찍어내던”,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사람이었고,어머니는 “아이들이 혹시라도 잘못될까” 무당이 되기 위해 집을 떠났다.운명에 순복하는것이 아니라 직접맞서 아이들을 지키기로 한 것이다. 그런 어머니를 보며 자란 딸이 거침없고 당당한 어머니의 모습을 빼어 닮은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신을 받고 무당이되었지만 착한 그녀를 도와주는 ‘요정’은 나타나지 않는다. 주술의 도움으로 파티의 주인공이 될 수도 없다. 그녀가 “가장 예뻤던 시절”만났던“꽤괜찮았던”남자들과는오히려그녀가 무당의 딸이라는 핑계(!)로 더 이상 진전될 수 없었다.
내 눈물은 눈치 없이 후두둑 후두둑 떨어져 내렸고 그는 창밖에 우
두커니 서 있었다. 고개를 떨군 나는 그가 달리는 버스 앞을 막아서길
빌고또빌었다.그는결코나를부르지도잡지도않았다.나는버스안
에서 하염없이 흔들리며 생애 첫 이별과 고독하게 조우했다.
(…) 나는 S의 엄마를 용서할 수 없었고, 자기 엄마 얘기라며 웃어젖
히던 그는 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 결국 S에게도 보기 좋게 차인 거다.
얼핏 보면 내가 그를 떠나보낸 것 같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또 다시
홍수의 계절이 왔다. 첫 번째 이별보다 더 아프게 울며 나의 서른 살이
물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실연의 장면인데 이상하게 슬프지만은 않은 것은, 그녀가 그녀 자신을 동정하거나 불쌍하게 여기고 있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작가를 ‘차 버린’ 그를 “나쁜 새끼, 소 새끼라고 욕을 하”거나, “벌떡 일어나 그의 뺨을 후려쳤어야 했는데”라며 그녀의 애석한 마음이 ‘공격성’으로 둔갑한 것 또한 감추지 않는다. 이는 ‘착한 여자’의 전형에 길들여진
수동적인 독자들을 일깨워주고 통쾌한 감정을 선물한다.그뒤작가는 동창회에서 대머리가 된 남자를 다시 만나 고소해하기도 하고,한의사라는 말에 혹하기도 했던 속물적인 모습을 드러내기에도 거침이없다.이제작가는작가자신의실연의원인이라생각했던,어머니가 ‘무당’이라는 사실을,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를 쫓아낼 때 ‘비장의 무기’로 쓰기까지 한다.
겁 없이 매력적이지 않은 인간이 다가오면 내겐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엄마가 무당이라는 것을 비롯해 쫄딱 망한 콩가루 집안 이야기를
들이밀면대부분나가떨어졌다.무당과가난중어떤것이그를보내버
렸는지 궁금했지만 꼭 알 필요는 없었다*.
오랜 솔로로 고독한 시간을 보낸 작가는, 순종적인 모습으로 멋진 기사를 얌전히 기다리지 않는다. 남성의 외모에 대해 직접적인 비난도 감추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속물’임을 자처하며 때로는 적극적으로, 때로는 무당 딸임을 “거들먹거리기도”하면서 적극적으로 그녀의 ‘기사’를 찾아 나선다. 이제 독자는 ‘드레스’와 ‘유리 구두’를 내던
지고, 수동적인 남성들에 욕지기도 때로 거침없이 내뱉으며 자기의 모습 앞에 당당해진 작가의 등 뒤에서 그녀를 응원하게 된다. (작가 자신은 얼마 전까지도 무당 딸임을 부끄러워했다고 고백했지만, 평자는 한 번도 작가가 어머니를 부끄러워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작가 자신의 표현처럼 삶이 풀리지 않고 속상한 일이 있을 때마
다 “냉장고의 초콜릿처럼 꺼내 먹는”다고 느꼈다. 작가에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그녀가 힘들 때 찾게 되는 ‘초콜릿’이었고, ‘막걸리’였다.) 「막걸리, 마음에 담다」에서는 막걸리를 좋아하는 “여자사람”임을 밝히는 것도 거리낌이 없고, 「불안과 감각에 대하여」에서는 모성을 타고 나지 않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도 꺼리지 않는다.
그가 한 개인 SNS에서 연재하고 있는 글의 제목 또한 「육아는 내 취향이 아니라서」다. 보부아르는 “여성은 가부장제가 상정하는 것과는 달리 모성 본능을 타고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모성의 타고남'에 대한 타당성의 여부를 떠나 “육아는 내 취향이 아니”라며 웅변할 수 있는 젊은 어머니의 모습은 우리에게 당연히 받아 들여왔던 가치에 대한 전복적 시선을 여는 것에는 틀림이 없다. 그리고 또한, 보부아르는 가부장체제 하에서 여성의 사회적 위치의 불공정성을 대변하며 “하나의 단위로 조직할 수 있는 구체적인 수단이 부족하다**”고 강조한 바 있지만 작가는 그와 같은 여성의 ‘부족한’ 현실 속에서도 구체적인 ‘수단’을 찾아냈다. 집에서 아이를 돌보며 할 수 있는 부업거리인 “글 노동”이 그것이다. 함께 “글 노동”을 하며 “하루에 고작 10원을 밑도는 금액”을 벌어들임에도 글 노동은, 작가를 “꿈꾸는 인간”으로 탈바꿈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 “글 노동”에서 작가는 “무당의 딸”임을 수시로 “초콜릿처럼 꺼내 먹”고, 막걸리를 좋아하는 ‘여자 사람’임을 당당하게 자랑하며, “육아가 내 취향이 아님”을 고백한다. 특히 작가 자신이‘꿈꾸는 사람’이 되었음을 밝혔던 「막걸리, 마음에 담다」에서 그 자신과주변의여성들을 ‘여자사람’이라고 칭한 것은 작가의 자기인식에 대한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을 구원해 줄 ‘기사’를 기다리는 대신 직접 스스로를 깨우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작가는 작가가 직접 찾아낸 자기표현의 ‘수단’인 “글 노동”에서 가부장제가 상정하는 여자의 전형적인 상(象)을 때로는 부정하고, 특히 여성의 시선을 흔들어 깨운다.
여기에서 ‘수치의 쓰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일반의 사람, 특히 여성들이 ‘수치스럽다’, 혹은 ‘부끄럽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작가에게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작가에게 글쓰기는 대중에게 드러내기 위해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끓어오르는 감정을 그저 ‘토해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내면의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부분까지 드러내는 작업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측면이건, 직접적 정동(情動)으로 이끈다. 때로는 통쾌한 감정으로, 때로는 화로, 때로는 울분으로 전혀 보지 않던 것에 눈을 뜨게 한다. “육아가 내 취향이 아니”라는 작가의 말을 읽으며 육아가 취향이 되는 문제에 대해 숙고하며 ‘엄마’의 ‘취향’에 대해 새삼 관심을 갖게 되
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3. 다시, 여성의 몸
유독 집안의 남자들에게 드리운 불운이 반복되었다. 죽음의 신이
그녀의 아이에게 조카자식에게 내려앉았다. 그런 일이 다시는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진혼굿에 그녀의 온 마음과 몸을 담았다. 굿이 벌어
진 방의 열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중략…) 춤을 추며 부채를 들었
다가 칼을 휘두르는 무당의 입에서는 거친 숨소리가 연신 뿜어져 나왔
다. 한바탕 쏟아내고 나면 얼굴은 땀으로 번질거렸고, 한복 겨드랑이
는 흥건히 젖어 버렸다*.
작가는 ‘나쁜 여자’를 ‘착한 여자’의 우위에 두거나 여자와 남자의 대등함을 주장하지 않는다. 결국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성으로서의 고유한 특성 그 자체라는 것을, 작가의 작품 「진혼굿」에서 우리는 어렴풋이 읽을 수 있다. 작가의 작품 속 여성은 가부장제가 상정하는 여자의 전형적인 상(象)은 아니지만, 그러나 우리들의 어머
니였다. ‘나’와 나의 형제들을 당신의 뱃속에서 품으며 열 달 동안 불편함을 견뎠고 생명의 ‘첫’ 울음을 가장 먼저 들었던 근원적 존재였다. 이제 그 어머니가 망자의 ‘마지막’ 길을 위로하고, 죽음을 끊어내는 제의를 치른다. “화려한 치장”, “선홍빛의 립스틱”, “하나하나 정성으로 마련한 음식” 등 제의를 묘사하는 어휘 또한 다분히 여성적이다.
“엄마, 내가 그날 오토바이를 타지 않는 건데 미안해. 엄마도 알지?
나 오토바이 한 번도 몰아본 적 없는 거. 아 글쎄 그날따라 친구 녀석
이 그렇게 같이 타고 가자고 나를 끌어대는 바람에 내가 어쩔 수 없이
타게 된 거야. 너무 미안해. 엄마. 내가 엄마한테 마지막 인사도 못 하
고 이렇게 떠나서 미안해….”
작은엄마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엄마의 손을 잡고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오냐, 오냐. 안다. 알아….”
(…중략…)
마지막으로 엄마는 내게 다가왔다. 뜨거웠던 그 손이 나를 감쌌지
만 나는 차마 엄마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엄마인지 누군지 모를 존
재가 내게 말했다.
“누나, 나 이제 갈게.”*
망자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엄마’와 ‘누나’에게 마지막 인사를하고 떠나는 이 장면은, 작가의 작품에 있어 가장 상징적인 장면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여성의 몸은 병이나 거부 반응, 생체 조직의 죽음을 유발하지 않고 자기 안에 생명이 자라도록 관용하는 특수성을 지닌다.”* 고유한 여성의 감수성만이 지금의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미덕임을 강조했던 이리 가라이의 말이 떠오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작가 역시, 생명도 죽음도 여성의 손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사실 우리는 작가의 작품에서 ‘투사'가 된 여성이 아니면 할 수없는일들을 보았다.
아이넷을 내리낳고,첫 아이를 잃었으면서도 “껌을 짝짝 맛나게도 씹”으며 고기를 썰고, 전국 각지로 트럭을 몰고 다니며 무너져가던 집안에 활기를 불어넣은 것도 여성인 어머니였고, 대물림되는 집안의 불운을 끊어내고자“작두를 올라 탄” 것도 어머니였다. 또 이제 죽은 망자를 품고 위로하는 것도 여성으로서의 어머니이다. 망자가 된 아들은 가장 마지막 순간에여성(어머니,누나)을다시찾는다.여성의몸에서‘나온’남성이 여성을 다시 찾는 장면에서, 우리는 남성이 여성의 몸으로 회귀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모순적이지만, 작가는 순종적 여성이기를 저항하면서도 가장 고귀한 진리는 여성의 몸에 자리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다. 진혼굿의 묘사는 그래서 아름답다. 생의 아이러니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은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고했던가.죽음에닿아있으면서도생명을지향하는,처음을 열고 마지막을 위로하는 진혼굿을 지켜보며 우리는 여성의 몸이 남성을, 그리고 상처받은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숭고하고 강한 존재라는 진실을 상기하게 된다.
작가의 글쓰기는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환기자’다*. 우리가 여성으로서의 우리의 관심에 진실하도록,즉 어떤일이 왜 그리고 어떻게 관심사가 되는지에 대해 정직하도록 환기시킨다. 작가는 자신의 가장 수치스러운 고백까지도 세상에 내어 놓음으로써, 왜 여성은 때로 육아를 거부할 수 없는지 묻고 왜 여성은 낮술에 취하면 안 되느냐고
물으며, 또 여성은 왜 ‘집 안’에서만 머물러야 하냐고 항의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 작가가 마지막으로 세상에 가장 던지고 싶은 질문은,그럼에도 여성만이 가진 생명력에 관한 것이다.
김종완은 예술의 두가지 목표를 이야기한 바 있다. 첫번째 목표는 만족과 위로를 주기위한 것이라면 또 다른 하나는 자고 있는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충격으로서의 예술이 그것이다. 만족과 위로를 주는 전자의 예술은 ‘오락적 기능’을 위하여 매끄러워진다. 반면에 후자의 예술은 ‘더는 견딜 수 없어’ 현실을 부정하고 개혁을 추구한다.** ‘더
는 견딜 수 없어’ 집안을 나가, 무당이 되기를 택했던 어머니처럼, 작가는 육아와 가사에 매몰되어 있던 어느 날, 그 마음속의 들끓은 무엇을‘ 더는견딜수없어’,“글노동”을 시작했다.그의 글은 다만 매끄럽지 않다. 작가는 여성들에게 만족만 줄 의향이 전혀 없다. ‘좋아요’라는 말만 들을 의도도 전혀 없다.***
그는 어쩌면 여성 독자를 ‘타격’한다. 여성 독자의 눈을 뜨게 하기위해서,“한단계도약”을 위한 “부정”의 단계로,그의 거친 문체는 필연적인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무당 딸이라 미안하다는 작가의 말은 결코 미안하지 않다는 말이다. 작가스스로 그것에 전혀 개의치않고살아가겠다는 말이며 오히려 운명에 순복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여자로서의 운명도,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운명도 순종적이거나 순응하지 않고, 오히려 때로는 저항하는 사람, 그리고 들끓는 저항감을 감추거나 수치스러워하지 않
는 “꿈꾸는 여자 사람”으로서의 작가의 글은, 그래서 새롭다. 작가의 때로 지나친 비약이나 거친 표현, 어색한 비유 등은 좀 더 많은 대중에게 읽히기 위해서는 정제되어야 할 과제의 일부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여성 수필의 전혀 다른 시작이라 보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이러한 ‘매끄럽지 않음’이야말로, 바디우의 말대로, ‘진리의 절차’*이기
때문일 것이다.
김지예 jina_02@naver.com
2021년 『에세이스트』 104호 등단
현재 추계예술대학원 문화예술학과 석사과정(비평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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