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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8 연중3주간 금 – 133위 043° 박래오 요한 사도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31).
133위 043° ‘하느님의 종’ 박래오 요한 사도
이름 : 박래오(朴來浩) 또는 박영래(朴永來) 요한 사도
출생 : 1812년, 황해도 신천(황해도 신천군)
순교 : 1866년 10월 22일, 군문효수, 양화진
박래호(朴來浩) 요한 사도는 황해도 신천(信川)의 향족(鄕族)으로, 문장과 글씨로 명성이 자자한 사람이었다.[1] ‘래호’는 그의 자(字)이다. 그는 이씨와 혼인하여 두 딸을 두었으며, 가난하여 약을 팔거나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생활하였다. 한때 그는 자신의 학식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의 과거 시험을 대신 치른 적도 있었다. 1866년 황해도 풍천(豊川)에서 순교한 이 베드로는 그의 장인이다.
박 요한 사도가 천주 교리를 접한 것은 1860년이었다. 그는 곧바로 천주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했으며, 이후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면서 이웃에 교리를 전하는 데도 노력하여 자신의 아내와 딸과 누이는 물론 장인 이 베드로와 많은 친구들을 입교시켰다. 그리고 1862년에 상경하여 베르뇌(S. Berneux, 장경일[張敬一] 시메온) 주교에게서 세례를 받았고, 이듬해에는 처음으로 고해성사를 받았다.[2](황해도천주교회 ☞ [2.1])
세례를 받은 뒤 박래호 요한 사도는 신앙생활에 더욱 충실하였고, 480리가 넘는 길을 걸어가서 고해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또 입교하기 전에 남의 재물을 함부로 썼던 행위를 뉘우치고 이를 보속하려고 자신의 재산을 팔아 돈을 모두 갚았으며, 더 많은 비신자들에게 교리를 전하고 입교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신천에서 박해가 일어나자 박래호 요한 사도는 가족들을 데리고 송화(松禾, 황해도 중서부에 위치한 郡)로 피신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베르뇌 주교를 영접하여 안봉옥(安鳳玉, 요한 사도) 등 교우들이 그의 집에서 성사를 받을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주교가 떠난 뒤 신자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자, 박래호 요한 사도는 가족을 데리고 다시 신천으로 돌아왔으며, 1865년 1~2월에는 그곳을 방문한 베르뇌 주교를 영접하였다. 베르뇌 주교가 그를 신천 회장으로 임명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박래호 요한 사도 회장은 1865년 12월 말에 상경하여 베르뇌 주교에게 성사를 받고 신천으로 돌아왔다.[3]
1866년 2월(음력) 무렵 병인박해가 발발했다는 소식을 들은 박래호 요한 사도 회장은 가족들을 데리고 서흥(瑞興, 황해도 중동부에 위치한 郡)으로 피신했다가 6월에는 다시 서울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교우 집과 공덕리(孔德里, 현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 등지를 전전하며 짚신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고, 박해 중임에도 이의송(李義松, 프란치스코)[3.1] 등 신자들과 교류하며 박해 상황을 알려 주었다. 그러던 중 병인양요(丙寅洋擾) 때문에 박해가 가열되면서 한 밀고자의 고발로 박래호 요한 사도 회장에게도 체포령이 내려졌으며, 그는 9월 6~7일(음력) 사이에 신발을 팔러 갔다가 포교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내 포도청으로 압송된 박래호 요한 사도 회장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한결같이 배교를 거부하고 신앙을 굳게 증언하였다. 그 결과 그는 사형 판결을 받고[3.2] 1866년 10월 22일(음력 9월 14일)[4]에 양화진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54세였다.[5][5.1][5.8]
[註]__________
[1] 1866년 10월 25일(음력 9월 17일) 양화진에서 김중은(金重殷, 베드로)과 함께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한 것으로 나오는 박영래(朴永來)가 박래호 요한 사도 회장일 가능성이 크다(『일성록』, 『승정원일기』, 1866년 9월 17일). 그러나 박영래의 순교일은 교회 기록에 나오는 요한 회장의 순교일과 다르다.
[2] 『치명일기』, 정리 번호 82번; 『병인치명사적』, 7권, 36-37면.
[2.1] 황해도천주교회(한국가톨릭대사전 12권, pp.9826-9833 참조)
1. 천주교의 전파와 전래
황해도 출신 신자가 처음 순교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이다. 당시 평산(平山) 출신 고광성(高光晟)은 서울에 올라와 지내던 1800년 겨울에 손인원(孫仁元)으로부터 권면을 받아 입교하였다가 포졸들에게 붙잡혀 평산으로 이송된 후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에 처형되었다. 봉산(鳳山) 출신 포수(砲手) 황씨는 군영(軍營)에 복귀하기 위하여 상경하였다가 천주교를 알게 되어 입교하였으며, 박해가 시작되자 곧 붙잡혀 봉산으로 이송된 후 순교하였다. 또한 1819년 서울에서 순교한 고 바르바라는 재령 출신이었고, 고광성의 딸인 고순이(高順伊, 바르바라) 성녀는 1839년에 순교하였다.
이처럼 황해도 지방에는 일찍부터 천주교가 알려졌지만, 본격적으로 신자 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1860년대 초 신천(信川) 출신 이덕보(李德甫, 마태오)의 선교 활동에 의해서였다. 그는 서울에서 교리를 배우고 1862년 경 베르뇌(S,F. Berneux, 張敬一)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고향에서 선교를 하여 수십 명을 영세시켰으며, 백천(白川) 출신 이의송(李義松. 프란치스코)과 함께 황해도를 순회하며 12개 마을에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시기에 수안 출신 김기호(金起浩, 요한)와 신천 출신 박래호(朴來浩, 사도 요한)도 주위의 많은 외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켰다. 이처럼 황해도의 선교 활동이 활발해지자, 1863년 9월 초 베르뇌 주교가 황해도를 직접 방문하여 그해 11월 말까지 사목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시작되면서 황해도 지방의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희생되었다. 즉 1866년 3월 새남터에서 순교한 서흥(瑞興) 출신의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 성인을 비롯하여 이의송과 부인 김이쁜(金於兺 마리아), 아들 이붕익(李鵬翼, 베드로), 박래호는 10월에 양화진(楊花鎭)에서 순교하였고, 해주에서는 백자정, 조 서방, 이성도(아우구스티노), 권 서방, 이 서방과 그의 동생, 정군칠, 정 토마스, 이 시몬, 안 서방, 이학대, 김 베드로, 김영백(시몬), 김택보(마르코), 이심여(요한), 이여도, 최윤학 등이 순교하였다. 그리고 황주(黃州)에서는 황주 아전의 아들과 그의 친구, 풍천(豊川)에서는 이 초시(初試), 곡산(谷山)에서는 고 첨지와 그의 아내, 수안에서는 이길준(요한), 서흥에서는 김여선 등이 순교하였다.
2. 황해도 천주교회의 발전과 시련
2.1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
1877년 9월 로베르(A.P. Robert, 金保祿) 신부와 두세(C.E. Doucet, 丁加彌) 신부 등이 입국하여 선교 활동을 전개하면서, 황해도 지방은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하였다. 로베르 신부는 당시 백천에 있던 김기호에게서 한국어와 관습을 배워 익히면서 선교 활동을 하였고, 두세 신부는 구월산(九月山) 등지에서 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풀었다. 이어 1880년 11월 조선에 입국한 리우빌(L.N.A. Liouville, 柳達榮) 신부는 극락리(極樂里)에 머물면서 풍천, 은율(殷栗), 백천 등지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이들 선교사들은 입국 과정에서 황해도에 잠시 머물러 선교 활동을 한 것일 뿐, 황해도 지방을 전담한 것은 아니었다.
1883년 마침내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의 사목을 전담하기 위해 푸아넬(V.L. Poisnel, 朴道行)신부가 부임하여, 수안의 진고개에 정착한 후 선교 활동에 진력하여 1884년에 성인 61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 후임으로 1885년 진고개에 부임한 쿠데르(V. Couderc, 具瑪瑟) 신부는 콜레라와 심한 기근으로 피폐해진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의 복구 작업에 참여하여 교세를 확장시켰고, 그의 선교로 1887년까지 장련의 금복이·창바위·중골 등지에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1877년 부임한 로(J.L. Rault, 盧若望) 신부는 장련 금복이에게 정착하여 구월산 주위에 5개의 공소를 세우고 40여 명의 예비자에게 영세를 주었으며, 1889년 수안으로 거처를 옮겨 100여 명의 어른에게 영세를 주었고, 마을마다 학교를 세워 한글과 교리를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892년 6월까지 황해도의 신자 수는 611명에 이르렀고, 황해도 서부 지역인 안악의 마렴, 장연의 두섭, 문화의 아현 등에 공소가 설치되었다.
1893년 4월에 6년 동안 황해도 지방에서 활발한 선교 활동을 벌여 나가던 로 신부가 원산으로 전임되자, 후임으로 르 장드르(L.G.A.A. Le Gendre, 崔昌根) 신부가 부임하였다. 수안 덕골에 거처를 정한 르 장드르 신부의 선교 활동으로 수안의 효자동에 또 하나의 공소가 설치되었고, 마렴 공소는 신자 수 99명의 황해도에서 가장 큰 공소로 성장하였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발생하자 르 장드르 신부는 잠시 서울로 피신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돌아와 동학 농민군으로부터 지방관과 주민들을 보호하였는데, 이러한 활동은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에서 개종 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특히 평안도 숙천(肅川)과 안주(安州)에서 천주교 개종 운동이 두드러지자, 르 장드르 신부는 이들 지역의 신자들을 좀 더 가까이에서 사목하기 위해 1895년 9월 거주지를 수안의 덕골에서 평양 외성(外城)으로 옮겼다. 그는 선교사 한 명이 두 도(道)를 담당하고 있고, 또 선교의 중심지인 선교사의 거처를 잘못 택하였기 때문에 다른 지방에 비해 이 지역의 발전이 뒤처져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에 그는 황해도 서부 지역의 10개 공소, 즉 안악의 마흘, 마렴, 상촌, 장련의 인덕동, 송화, 장연의 두섭, 은율, 문화, 신천의 신설도, 재령 등을 하나의 선교 지역으로 하고 나머지 평안도의 6개 공소와 황해도 동부 지역인 수안의 4개 공소를 합하여 또 하나의 선교 지역으로 할 것과 선교사의 거처도 안악과 평양으로 정할 것을 교구장에게 제의하였다. 선교 지역 구분 기준은 교통의 편의를 전제로 한 것으로, 황해도 동부 지역인 수안 지방이 평안도에 편입된 것은 이 지방이 평양으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며 황해도의 서부 지역을 하나로 묶는 동시에 안악을 선교 중심지로 삼으려 한 것은 마렴이 가장 크고 가장 활발한 공소였고 동료 선교사가 있는 평양에도 쉽게 왕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2 본당 설립
1895년 9월 르 장드르 신부가 평양 외성(外城)에 정착함으로써 황해도와 평안도가 분리되었으나, 황해도에 선교사가 파견된 것은 1년 후인 1896년이었다. 8월에 빌렘(N.J.M. Wilhelm, 洪錫九) 신부가 황해도 최초의 본당인 마렴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것이다. 마침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된 이유는 평양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고 교통이 편하며, 안악 지방 천주교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부임 첫해인 1896년 8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300여 명이 세례를 받았고 마렴본당 관할 공소의 신자는 800여 명으로 증가하였지만, 빌렘 신부는 보다 좋은 본당의 입지 조건을 찾아 1897년 여름에 마렴본당을 폐지하고 용문면 매화동(玫花洞)으로 본당을 이전하였다.
이듬해인 1898년에는 후임자인 우도(P. Oudot, 吳保祿) 신부에게 매화동본당을 맡기고, 빌렘 신부는 신천군 두라방 청계동(淸溪洞)으로 거처를 옮겨 청계동본당을 새로 설립하였다. 당시 이 지역의 세력지가 우국지사인 안태훈(安泰勳, 베드로)과 그 가족들을 중심으로 개종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1897년 7월에는 장연본당이 설립되어 초대 주임으로 파이야스(C.-C.-P. Philhasse, 河敬朝) 신부가 부임하였고, 1899년 5월에는 재령본당이 설립되어 초대 주임으로 르 각(C.J.A. Le Gac, 郭元良) 신부가 부임하였다. 이어 1902년 5월에는 은율본당이 설립되어 초대 주임으로 르 장드르 신부가, 같은 시기에 황주본당이 설립되어 주임 신부로 한기근(韓基根, 바오로) 신부가 부임하였다.
2.3 해서 교안(박해)
(교안敎案은 외교적 절충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교회와 정부, 교인과 비교인 사이의 분쟁 및 사건. 박해迫害는 개인이나 집단, 특히 국가공권력이 신앙을 억압 또는 말살하려는 강압이나 폭력)
황해도에서의 천주교 신자가 많이 증가함에 따라 지방관과 향반 토호층, 특권 상인층들은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교회 측과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896년 12월 해주 관찰부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단속하라는 훈령이 잇달아 내려오자, 포교 중심지였던 신천과 안악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97년 신천 군수가 천주교 신자를 잡아 다스리자, 안태훈이 신자들을 모아 군수 대신 향장(鄕長)을 잡아들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안태훈이 체포되었으나 빌렘 신부가 군수에게 항의하고 그를 석방 시켰다. 또한 1899년 안악군의 교졸(校卒)이 천주교 신자 4명에게 도적 혐의를 씌워 체포하자 이 역시 빌렘 신부가 강력하게 항의하고 사건에 개입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이러한 천주교회와 관·민간의 충돌은 1900년 이후 해주, 재령, 서흥, 장연, 신천, 송화 등 황해도의 각 지역에서 발생하였다. 게다가 천주교에 대해 적대적인 이용직(李容稙)이 1902년 6월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고 또한 천주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대립이 고조되면서, 해서 교안(海西敎案)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902년 6월에는 상무사(商務社) 두령(頭領)인 박정모(朴貞模)가 황주본당 한기근 신부의 사제관을 급습하여 신부와 신자들을 위협하였으며, 1902년 5월과 8월에는 재령에서 천주교 신자와 프로테스탄트 신자 간에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힌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 밖에 1903년 서흥에서 수세(收稅) 문제로 천주교회와 양반 토호층이 대립하였던 사건들과 이종국(李鍾國, 바오로) 신부가 관권(官權)을 능멸한 사건 등, 다양한 양태로 교안이 발생하였다.
교안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1903년 정부에서는 사핵사(査覈使)를 파견하였고, 교회 측에서는 두세 신부를, 이어서 프랑스 공사관에서는 서기관 테시에(S. Teissier, 秀乙郞)를 조정자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정 노력은 실패하고 사핵사는 해서 교안에 연루된 신자 다수를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하지만 1904년 프랑스 공사와 외부대신 사이에 선교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교안은 점차 진정되었고, 선교사들은 임지로 돌아가 다시 활동을 전개하였다.
해서 교안으로 황해도 지방의 천주교회는 큰 타격을 입어 신자들의 3분의 2가 배교하거나 냉담하였으며 특히 교안이 집중되었던 청계동본당, 재령본당, 황주본당 등의 신지수는 급속도로 격감하였다. 반면에 프로테스탄트는 재령을 중심으로 하여 교안 이후 급속한 성장을 거두었다. 하지만 교안이 진정되면서 다시 선교사들의 전교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천주교 교세는 다시 꾸준히 증가하였고, 그 결과 1912년 9월 해주본당, 1915년 9월 서흥본당, 1916년 6월 사리원본당, 1925년 5월 사창본당 등이 설립되었다.
2.4 교육을 통한 선교 활동의 전개
교육 사업의 중요성을 인식한 서양 선교사 및 한국인 신부들이 초등학교를 설립하고 뜻있는 평신도들 또한 자발적으로 교육 사업을 일으키고 후원하여, 본당뿐 아니라 산간벽지의 공소에까지 학교가 세워졌다. 황해도 지방 천주교회가 세운 최초의 학교는 1898∼1899년에 매화동본당 우도 신부가 종교 교육과 문맹 퇴치를 위해 개설한 봉삼학교(奉三學校)로, 설립 초기에는 신자 및 예비자 자녀들을 대상으로 교리와 한문을 가르치다가 1906년부터 신학문을 가르치는 초등 교육기관으로 탈바꿈하였다.
그 이후 경애학교(敬愛學校, 장연본당, 1907), 일신학교(日新學校, 신천군 노월면 마명동 공소, 1907), 월산학교(月山學校, 문화군 아현 공소, 1907), 명신학교(明新學校, 송화 공소, 1908), 봉양학교(鳳陽學校, 봉산 은파 공소, 1908), 숭희학교(崇熙學校, 수안 사창 공소, 1908), 해성학교(海星學校, 봉산 검수, 1909), 인성학교(仁成學校, 송화 풍천, 1909), 정심학교(靜心學校, 장원군 낙도면 도습동 공소, 1907∼1909), 장흥학교(長興學校, 장연군 장연면 장방동 공소, 1907∼1909?) 등이 설립되었으며, 봉삼학교, 경애학교, 명성학원 등은 여자부를 병설하여 여성들에게도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하지만 이들 학교 중에서 1945년 광복 때까지 유지되었던 학교는 봉삼학교, 경애학교, 해성학교(강습소), 명성학교 뿐이고, 나머지 학교들은 인가받지 못하거나 경영상의 어려움으로 모두 이전에 폐지되었다.
황해도 내 여러 본당에서는 일반 유지들의 권유와 지원을 받아 학교뿐만 아니라 유치원도 설립 운영하였다. 대부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서 운영을 맡았고, 교육도 수녀들과 유자격 보모들이 담당하였다. 1920년 3월 해주 공소에서 장연본당 김명제 신부의 후원과 주선으로 유치학교(幼稚學校)란 이름의 유치원을 설립하여 보통학교 전에 아동들에게 한글과 교리를 가르쳤고, 이 밖에 경애유치원(敬愛幼稚園, 장연본당, 1917∼1922년 사이에 설립), 봉삼유치원(奉三幼稚園, 매화동본당, 1926) 등이 설립되었다.
2.5 독립운동
1905년 을사늑약(乙巳保護條約) 체결 이후 일제는 토지 조사 사업 등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한국에 막대한 차관을 제공하였지만, 당시 한국의 재정으로는 국채 상환 능력이 없었다. 이에 1907년부터 외채를 상환하여 일제의 침략을 막고 국권을 회복하자는 모금 운동이 적극적으로 전개되었으며, 황해도 신자들도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봉산 검수, 서흥, 평산, 신천, 장연, 백천, 안악, 장련, 곡산 등지에서 경향신문사에 성금을 기탁하였다. 이처럼 국채 보상 운동을 비롯하여 다각적으로 국권 회복 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일제에 의한 한국 병합이 현실화하자 황해도 지방의 천주교 신자들은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안중근(安重根, 토마스)은 1906년 진남포(鎭南浦)에서 삼흥학교(三興學校)와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을 전개하였고, 1909년 10월 26일 초대 조산 통감을 역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하였다.
한편 한일합방 직후인 1910∼1911년에는 항이 민족 운동의 거점이었던 안악에서 항일 민족운동가들에 대한 대규모 검거가 있었는데, 이때 독립군 양성을 계획하고 자금을 모으던 안명근(安明根, 야고보)을 비롯하여 원행섭(元行燮, 타대오), 한순직(韓淳稙), 최익형(崔益馨) 등이 구속되었다. 그 외 황해도 지방 출신 독립운동가로는 장연 출신으로 교육자이자 교회 회장이었던 장규섭(張奎燮, 바오로), 신천 출신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른 김경두(金慶斗, 요한) 등이 있다. 장규섭은 1908년 장연군 사립 우신학교(又新學校)에서 교사로 재임할 당시 학생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치다가 일본인 교장과 언쟁을 벌이고 사임하는 등 학생들에게 애국정신을 심어 주는 데 힘썼고, 1921년경 상해 임시 정부 적십자사의 황해도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독립군 자금을 모금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투옥되기도 하였다. 김경두는 3·1운동이 일어나자 동지들과 함께 800여 명의 군중을 조직하여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출감한 이후에는 독립운동 단체인 의혈단(義血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처럼 주로 신자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지만, 청년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동료 신부들과 신자들에게 독립운동에 협력할 것을 권유하여 상해 임시 정부의 군자금을 모은 은율본당의 윤예원(尹禮源, 토마스) 신부처럼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성직자도 있었다.
3. 황해도감목구대리구의 설립과 폐지
3.1 감목대리구의 설립
서울 대목구장 뮈텔(G.C.M. Mutel, 閔德孝) 주교는 1928년 1월 21일 자 교서로 황해도를 서울 대목구에 속한 감목대리구(監牧代理區, Vicariatus Foraneus)로 설정하고, 초대 감목대리에 장연본당 주임 김명제 신부를 임명하였다. 감목대리구의 설정은 장차 한국인 주교를 탄생시켜 자치교구로 승격시키려는 교회의 토착화를 전제로 한 것으로, 한국천주교회 창설 140여 년 만에 최초로 시도된 제도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신자들은 감목대리구를 ‘준교구(準敎區)’로 칭하면서 후원을 아끼지 않았고, 황해도 내 본당들은 물론 서울 종현(명동)본당 등 여러 본당에서도 축하 미사를 봉헌하였다. 감목대리구 설정 당시 황해도 지방에는 본당이 7개(매화동, 장연, 재령, 은율, 사리원, 해주, 사창) 성직자는 8명(김명제, 이선용李善龍 바오로, 신성우申聖雨 마르코, 이보환李普煥 요셉, 백남희白南熙 바오로, 이수성李順成 안드레아, 박정렬朴貞烈 안드레아, 퀴를리에J.J.L. Curlier 南一良)이었으며 1928년도 보고서에 따르면 신자 수는 7,361명이었다.
3.2 감목 대리구의 발전
김명제 감목대리는 각 본당을 순방하며 신자들에게 감목대리구 설정의 의의를 설명하고, 장차 자치교구로의 승격에 대비한 신자들의 본분을 역설하였다. 그는 신자들에게 교회 자립정신을 고취시켰고 전교활동을 합리적이고 조직적으로 전개함으로써 자지교구 승격에 대비한 교회 공동체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하여, 1928년 3월 7일 ‘황해도 감목대리구 자치 기성회(自治期成會)’를 조직하고 3월 9일 자로 15세 이상의 신자는 의무적으로 입회할 것을 권유하는 권유서를 발표하였다. 이어 3월 27일에는 재령본당에서 제2차 황해도 각 본당 및 주요 공소 대표자 회의를 소집하여 자치 기성회 임원을 선출하는 한편 창립총회 때 제정한 회칙을 수정하였다. 임원은 총재에 감목대리구대리 김명제 신부, 회장에 임영익(林英益), 서무부장에 박정걸(朴挺傑), 재무부장에 서경순(徐敬淳), 서기에 홍영섭(洪永燮) 등이 되었으며, 각 본당 대표는 장연본당 최봉구(崔鳳九), 박예규(朴禮奎), 곡산본당 장위창(張渭昌), 수안본당 박승희(朴承熙) 사리원본당 김계선(金啓善), 재령본당 김찬호(金燦浩), 해주본당 최원희(崔遠熙) 안악본당 최익형(崔益馨) 등이다.
자치 기성회는 장연본당에 본부를 두고 각 본당과 공소에 분회를 설치하였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분회는 1928년 10월에 결성된 송화군 하리면 안농리 농암촌공소 분회(회장 장창호 안토니오였다). 1928년 4월 27일에 자치 기성회 각 지부장과 분회장들의 회의가 ‘신자 대회’라는 이름으로 사리원본당에서 개최되어, 앞서 감목대리가 각 지방을 방문할 때 제시한 교회 현안들을 토의하였다. 김명제 신부는 황해도에서만이 아니라 전에 사목하던 경상도 지방에까지 가서 자치 기성회 설립 취지를 계몽하고 회원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한편 감목대리구의 설립 이후 본당 설립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1928년 5월 곡산본당과 삼차동본당, 1930년 6월 신천본당, 1936년 5월 안악본당, 1938년 5월 연안본당, 1939년 5월 장련본당과 옹진본당, 같은 해 7워 송화본당과 송림본당 등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각 본당에서 교육 사업을 추진하여 1929년 은율본당에서는 가난한 아이들에게 초등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해성야학원(海星夜學院)을 개원하였고, 1933년 곡성본당에서 소화유치원(小花幼稚園), 1936년 신천본당에 미화유치원(薇花幼稚園), 1937년 사리원본당에서 봉화유치원(鳳和幼稚園) 등을 설립하였다. 재령본당에서는 1930년대 후반∼1940년대 초반 사이에 가정 형편에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 《중등강의록》으로 중학 과정을 가르치는 사설 학교를 개설하였다.
또한 순교자 현양 사업도 전개하여 1938년 은율본당에서는 순교자 이달회(李達晦, 베드로)의 후손들의 증언을 듣고 본당 관내인 송화군 천동면 대야리에 있는 이달회의 무덤을 참배하였으며 이어 1939년 6월에는 기해박해(己亥迫害) 100주년을 맞아 은율본당이 주축이 되어 구월산에서 순교자 현양 행사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윤의병(尹義炳, 바오로) 신부와 신자들이 은율군 서부면 장암리 후편 야산 중터에 있는 치명자 황 모의 묘소를 참배하고 묘비를 건립하였다.
이 밖에 1931년 10월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 경축 대회에 참석한 일본 주재 교황사절 무늬(E.P. Mooney, 1822∼1958) 주교가 감목대리구본당인 장연본당을 방문하였고, 1934년 5월 황해도에서는 처음으로 장연본당에서 성체거동 행사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1933년 2월에는 3년 만에 주임신부가 부임하여 재령본당이 그 기능을 회복하였고, 1935년 11월 삼차동본당이 정봉으로 이전되어 ‘정봉본당’으로 개칭되었으며, 1939년 사창본당이 폐쇄 11년 만에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1940년 9월 재령본당에서는 성심의원을 개원하여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운영을 맡겼고, 후일 성심의원을 무료 진료소로 개설하여 지역 주민들에게 의료 봉사를 실시하였다.
3.1감목 대리구의 폐지
감목대리 김명제 신부는 황해도를 자치 교구로 승격시키기 위하여 정상적인 성무집행 외에 본당 내에 평신도 단체를 결성하여 모든 신심운동을 일으키는 한편 교육·건축·개간 사업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에 옮겼다. 그는 특히 교육과 건축 사업에 역점을 두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장연 경애학교(敬愛學校)의 육성과 황해도 각 본당에 교회를 건축하는 사업이었다. 하지만 의욕적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업적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주요 사항들을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집행하는 등 몇 가지 문제점들이 있어 각 본당 신부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6년 5월 사리원본당에 부임한 김명제 신부는 황해도 독립교구로 승격될 것에 대비하여 주교좌성당으로 설계한 새 성당을 건축하였다.
그런던 중 1942년 1월 3일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가 서울 대목구장 및 평양·춘천 지목구장 서리로 임명되고, 1월 5일 라리보(A.J. Larribeau, 元亨根) 주교가 교구장직에서 사임하였다. 같은 해 1월 18일 노기남 주교와 윤형중(尹亨重, 마태오)·이복영(李福永, 요셉)·강주희(姜周熙, 방그라시오)·유영근(兪榮根, 요한) 신부 등이 참석한 교구참사회의에서 황해도 감목대리구 제도의 폐지가 결정되었고, 이에 김명제 신부는 감목대리직에서 자동 해임되었다. 서울 대목구에 한국인 주교가 임명되었으므로 본래 한국인 교구 설정을 목적으로 설정되었던 황해도 감목대리구가 그 의미를 상실하였고, 자치교구로 승격된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정세로 보아 일본인 주교가 임명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감목대리구가 폐지된 뒤에는 노기남 주교가 직접 황해도를 관리하였으나, 1945년 해방 후부터 교구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게 되자 사리원본당의 박우철(朴遇哲, 바오로) 신부가 교구장을 대리하여 황해도천주교회를 감독하였다. 그러나 1950년 한국 전쟁 이후, 과거 황해도감목대리구 소속이었던 대부분의 본당은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3] 「칼래 신부의 1866년 병인박해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 A-MEP. Vol. 579, f. 1225-15; 『좌포도청등록』, 무진(1868년) 9월 12일, 안봉옥; 『병인치명사적』, 7권, 37면; 9권, 4면.
[3.1] 이의송(李義松, 1821-1866) : 병인박해(丙寅迫害) 때의 순교자.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황해도 백천(白川) 출신으로 의업(醫業)에 종사했다. 1857년에 상경하여 차동(車洞)에 거주하며 정의배(鄭義培, 마르코)에게 교리를 배웠고, 1857년 베르뇌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교리책과 묵주, 십자패 등을 만들어 보급하였고, 이덕보(李德甫, 마태오)와 함께 황해도의 12개 마을에 복음을 전하기도 하였다. 1866년 10월 16일 박해를 피해 경기도 시흥 봉천(奉天, 현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으로 피신하였다가 아들 이붕익(李鵬翼, 바오로.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편찬,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pp.156-157에서는 이붕익(李鵬翼)의 세례명을 “베드로”로 하였다), 아내 김이쁜(金於兺) 마리아와 함께 체포되어 10월 22일 46세의 나이로 군문효수형을 받고 양화진(楊花津)에서 순교하였다.
[3.2]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9월 17일(양력 1866년 10월 25일)
사학죄인 김중은과 박영래를 효수하라고 명하다.
사학죄인 김중은(金重殷)과 박영래(朴永來, 朴來浩와 동일인)를 총융진(總戎陣, 대원군이 병인양요 직후에 양화진에 500여 군사로 설치한 야전 군영. 천주교 신자 처형을 담당)에 넘겨 효수(梟首)해서 사람들을 경계시키라고 명하였다. 포도청(捕盜廳)의 보고로 인해 묘당(廟堂)의 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4] 「칼래 신부의 1866년 병인박해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 f. 1225-15. 박래호 요한 사도 회장의 순교일은 10월 21일(음력 9월 13일) 또는 10월 23일, 음력 10월 등으로도 나온다(『병인치명사적』, 7권, 38면; 9권 5면; 10권, 23면; 24권, 63면; 『치명일기』, 정리 번호 82번). 또 관변 기록의 박영래 회장과 동일인으로 본다면 순교일은 1866년 10월 25일(음력 9월 17일)이 된다(『일성록』, 『승정원일기』, 1866년 9월 17일).
[5] 순교 당시의 박래호 요한 사도 회장의 나이는 40여 세 또는 약 40세로도 나온다(『병인치명사적』, 9권, 5면; 10권, 23면; 24권, 63면; 『치명일기』, 정리 번호 82번).
[5.1] ‘달레 교회사’ 下, pp.475-476.
다음 날 밤에 신자 뱃사공 6명이 우리 배로 왔습니다.[5.2] 그들의 말에 의하면 박해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맹렬하고 大院君은 여자와 어린아이들까지도 포함해서 모든 신자의 씨를 말리겠다고 공식적으로 단언했다고 합니다.[5.3] 9月 14日(10월말)에 黃海道의 양반 朴(永來) 요한[5.4]과 李(德甫) 마태오와 함께 북쪽 지방에 복음을 전했던 李(義松) 프란치스꼬의 아내(김이쁜金於兺 마리아)와 아들(이붕익李鵬翼 바오로)이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서울에서 처형되었다 합니다. 3일[5.5] 후에는 李(義松) 프란치스꼬 자신이 외교인인 형제에게 배반을 당해 다른 신자 1명과 같이 사형을 당했는데[5.6] 신자들이 그 신자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朴永來와 함께 處刑된 金重段 ☞[5.4]). 大院君은 나라의 관례를 엄청나게 위반해서 이 5명의 수형자의 刑場을 새로 택했다 합니다. 이들은 1개월 전에 佛船 2척이 서울 앞에 정박했던 바로 그 곳 강기슭에 있는 陽花津으로 끌려갔습니다. 조정의 佈告에는 “천주교인들 때문에 오랑캐들이 여기까지 왔다. 그들 때문에 우리의 강물이 서양배에 더럽혀졌다. 그들의 피는 이 더러움을 씻어내야 한다.”는 말이 있었답니다. 바로 陽花津에 군사 5백 명이 야영지를 만들고[5.7] 그들 중에 천주교인을 발견하면 거리낌 없이 죽여 버리라는 명령이 그들에게 내려졌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5.2] ①장치서(張致善), ②송운오(宋雲五), ③이성의(李聖宜), ④이성집(李聖集), ⑤박복여(朴福汝), ⑥김계쇠(金季釗) 등이었다. 「再昨年九月分矣身與金季釗, 宋雲五, 朴福汝등 發船於新昌龍塘里浦口 順流於永宗浦 則洋船六隻旣 有碇留於此 而其中李神父向我船曰 勿以恐懼急來上船云 故即爲登船 我國知面者三人己在丹中」 『右捕廳』戊辰 4월 18日 <張致善供>. 崔善一, 崔仁瑞. 沈順汝, 金榮伊 등 4人은 이미 乘船하고 있었다. 「右捕廳」戊辰 4月 6日, 29日 參照.
[5.3] 형조(刑曹), 한성부(漢城府), 양사(兩司), 양포청(兩捕廳), 팔도(八道), 사도(四都) 및 각 진영에 사류(邪類)를 최후의 1인까지 남김없이 진멸(殄滅)하라고 엄명한 사실을 지적하는 말일 것이다(『高宗』 丙寅 10月 15日).
[5.4] 박영래(朴永來)는 9월 14일이 아니라 9월 17일에 처형되었다. 「命邪學罪人金重段, 朴永來 並付憁戎陣梟警」 『日省錄』 丙寅 9月 17日. 「박 요왕 내호 회쟝은 신쳔 향죡이라 병인군난에 안해와 딸을 다리고 셔울노와 집신쟝사 하더니 유다스 니션의게 잡혀 양화진에서 치명하니...」(『치명일기』 N. 82.)
[5.5] 3日 후가 아니라 바로 같은날 즉 9月 14日 아내와 아들과 한가지로 양화진에서 순교하였다. 「議政府啓言 即見右捕廳所報 則邪學罪人李義松, 李鵬翼, 金女於等三名 到底窮覈染邪情節 箇箇納款矣 叫結匪類 沈惑邪術 斷案旣成 必誅無赦 請並出付摠娀陣 大會軍民 梟首警衆 允之」(『日省錄』丙寅 9月 14日).
[5.6] “矣身段 本居白川邑內 略知醫業 而九年前上京 寓接於居洞 七年前受學聖敎於 西小門外居丁義培處 領洗於張主敎 邪號方濟各 製給冊子及念珠十字牌等物 亦爲貿來動工是白遺 其間移接於矣兄家 而今八月分 所親朴來浩 暫見酬酢後 近聞騷說 避禍次今月初八日 率眷下去始與奉天村親査李永宅家是白如司 以至現捉是白乎旀...矣身多年動工 何司背敎”(『右捕廳』 丙寅 9月 13日 ‘이의송공’). 한편 『치명일기』(N.79)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이의송 방지거는 신쳔따희 죵가의원으로셔 셔울와서 입교하고 병인군난에 시흥 봉쳔동내에 피난하였더니 그 안해 김 마리아와 그 아들 바로 텬죠와 같이 잡혀 양화진에서 군문효수하니...」 이의송은 46세, 아들 붕익은 24세, 아내 김 마리아는 55세였다. 그러나 1867년 2월 18일(양력)字 깔래(Calais) 신부이 서한(APF XL, p. 71-72)에 의하면 이의송은 45세, 그의 아내는 49세, 아들은 22세였다.
[5.7] 깔래(Calais) 신부의 1867年 2月 18日(양력)字 서한(APF XL, p. 70-71). 양화진에 군사 5백 명을 배치한 사실에 관해서는 총융진(總戎津)의 수가 부족하다고 하여 금위영(禁衛營)에 징부(懲付)키로한 수원정초군(水原精抄軍) 5백 명을 양화진으로 즉속(即速) 증파케한 기록이 있다(『高宗』 丙寅 9月 15日).
[5.8] ‘한국가톨릭대사전’ 5권, p.3141.
박영래(朴永來, ?∼1866) :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의 순교자. 회장. 세례명은 사도 요한. 일명 래호(來浩). 황해도 신천(信川)의 양반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충실하게 교육받았기에 천주교 교리를 들을 후 얼마 안 되어 세례를 받았으며, 주위의 많은 교인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켰다. 교우들과 강당을 함께 마련한 후 성사를 받기 위해 사제를 영접하였으나, 이를 시기한 몇몇 외교인들이 관가에 알려 그 고을 수령(守令)에게 추방당하였다. 이 사실을 안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해주 감영(海州監營)에 소송을 일으키도록 지시하자 박영래는 교우 60∼70명을 모아 소송을 청하였으나, 판관으로부터 “이 일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니 모두 압송하여 다른 곳으로 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는 판결을 받았다. 이 무렵 박영래는 천주교 교리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중요한 내용들을 직접 설교하였는데, 그들은 모두가 교리 내용을 듣고는 “참으로 옳고 착한 도리이다”라고 하면서 입교하였다고 한다. ¶한편 그는 외교인이었을 때에 다른 사람의 재물을 빌려 쓰고 갚지 않은 일이 있었는데, 영세한 후 그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이를 보속하려는 마음에서 3,000냥 가량의 가산을 정리하여 돈을 갚고자 하였다. 그러나 예전에 그에게 돈을 빌려주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기 때문에 대신 그 자손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면서 “내가 전에 당신의 부형(父兄)들로부터 재물을 빌려 썼으나 미처 갚지 못하였다. 그런데 천주교를 믿고 난 후에 생각해 보니 그 일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달아 이제 그것을 갚으려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이후 그는 매우 가난한 처지가 되었지만, 오히려 그의 신앙심은 굳어졌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아내와 딸을 데리고 상경하여 짚신 장사를 하면서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비밀리에 전교 활동을 하다가 배교자 이선이(李先伊)의 밀고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아내와 딸, 사위와 함께 피신하던 중 체포되어 혹형을 받은 박영래는, 신자 어느 누구도 밀고하지 않은 채 꿋꿋한 신앙을 지켰으며, 1867년 10월 25일(음 9월 17일) 40여 세의 나이로, 양화진(楊花津)에서 김중은(金重殷)과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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