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구 시 기도시간에 일어난 일/ 사도행전 3:1-10
(설교자: 마경훈목사)
https://youtu.be/MbVpouikLmQ?si=l3RZkpqqtQhdkWdv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지난 1년간 우리를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심으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영적인 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의 선물을 주셔서 예수님을 믿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이 거듭나게 하셨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영원한 천국 시민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감사와 영광을 삼위일체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을 썼습니다.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여 기도할 때에 성령께서 갑자기 바람처럼, 불처럼 임하셨습니다. 그들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때에 오순절을 맞이하여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는데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였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일어서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설교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수가 놀랍게도 3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시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행 2:43입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성령님께서 사도들을 통해서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본문은 사도들을 통해서 나타난 기사와 표적 중에 하나입니다.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기 위하여 성전에 올라가다가 일어난 사건입니다. 사람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못 걷는 한 사람을 구걸을 위하여 메고 와서 성전 미문에 두었습니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구걸했습니다. “한 푼만 주세요.” 베드로가 그에게 “우리를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러자 그가 일어나서 걷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도들과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그는 늘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겼습니다.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았습니다. 그 일로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솔로몬 행각에 모였습니다. 그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믿은 자가 남자만 약 5천이나 되었습니다.
오늘 설교는 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장애인이 걷게 된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겠습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누구도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자기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늘을 날려면 비행기를 타든지 아니면 다른 어떤 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아무런 도구도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늘을 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 큰 아들이 군대 가기 전에 추억 만들기를 해주면서 우리 가족은 하늘을 날았습니다. 우리는 유명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때 우리 가족들이 산꼭대기에서 산 아래로 그냥 몸을 날렸을까요? 아닙니다. 그랬다면 우리는 죽거나 크게 다쳤을 것입니다. 우리 가족은 패러글라이딩을 통해서 하늘을 날았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늘을 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가는 것도 우리의 힘이나 인격이나 재물 그리고 우리의 지혜와 선행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 되는 것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우리의 공로는 제로입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받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협력을 통해서 됩니다. 골 1:29입니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했습니다만 스스로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따라서 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자기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따라서 힘을 다하여 수고하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일은 항상 하나님의 역사와 사람들의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패역한 세대를 홍수로 쓸어버리고 경건한 가족을 남기기 원하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방주를 사용하셨는데, 그 방주는 하나님이 설계는 하셨지만 노아와 노아의 가족들이 만들었습니다. 성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의 설계도를 자세하게 보여주셨고 모세와 백성들과 기술자들이 협력하여 성막을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가장 큰 일은 출애굽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실 때 모세를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80년간 모세를 준비시키셨고 모세가 준비되자 그를 애굽에 보내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사람을 준비시키십니다. 그 기간은 마치 광야를 걷는 것처럼 힘든 시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사람을 단련하십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를 들어서 사용하시십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때 사용하신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의 제자로 3년간 단련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난 후에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간 단련 받았습니다. 세례요한은 이스라엘에 나타나는 날까지 광야에서 단련 받았습니다. 모세는 80년 간 단련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단련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동역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역 중이며 동시에 앞으로도 하나님과 동역하기 위하여 단련 중에 있습니다. 신앙의 단련에는 반드시 고난이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나를 귀하게 사용하시기 위하여 단련하신 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즐거워하며 인내해야 합니다.
2. 기도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이 기도할 때에 성령님께서 임하신 것처럼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임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임하실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본문 1절입니다.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본문에서의 기적은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기 위하여 성전에 올라갈 때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그들을 통해서 기적을 일으키셨던 것입니다.
기도할 때 기적이 일어나는 이유는 주님께서 기도응답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마 7:7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라 그리하면 주신다. 기도응답의 약속입니다. 요 14:14을 보겠습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응답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하면 주님은 무엇이든지 응답해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십니다. 아기에게 문제가 생기면 아기는 “으앙~”하고 웁니다. 그건 엄마에게 “엄마! 도와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엄마는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으면 즉시 달려가서 도와줍니다. 배가 고프면 젖을 물려주고, 똥을 쌌으면 귀저기를 갈아줍니다. “으앙~”하는 아기의 소리에 엄마가 신속히 응답하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소리에 응답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의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특권을 잘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고 잘못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의 특권을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기도의 특권을 잘 사용했던 분이 있습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입니다. 그는 열여덟 살에 왕이 되었습니다. 고등학생 나이에 왕이 되었으니 나라를 어떻게 다스리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왕이 된 후 실수하지 않았고 구설수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론에 흔들리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판단한 대로 하면 일이 형통해서 만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64년간 나라를 통치할 때 영국이 황금시대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찬송을 부르면서 쉽게 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빅토리아 여왕이 64년간 그렇게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형통했던 비결이 무엇일까요? 기도였습니다. 그는 늘 하나님과 기도로 교통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빅토리아 여왕에게 물었습니다. “여왕 폐하, 폐하께서는 하루에 기도를 몇 번 하십니까?”, “한 번 합니다.”, “신앙 깊은 폐하께서 하루에 한 번밖에 기도를 안 하시다니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면서부터 저녁에 잠들 때까지 계속 기도합니다.”
신 4:7을 읽겠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까이 해주셨습니다. 하나님과 가깝게 지내야 합니다. 그러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하시며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3.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사용합시다.
6절에 보면 베드로가 앉은뱅이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명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힘을 얻어서 일어나 걸었습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여 일어난 놀라운 일들이 많습니다.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이었고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울 때 여호와의 이름으로 싸웠습니다. 다윗의 말입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점을 치는 여종에게 역사하는 귀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쫓아냈습니다. 바울은 귀신에게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그러자 귀신이 즉시 그 여종에게서 나갔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하거나 명령하는 일을 개척교회 때 배웠습니다. 제가 꿀벌 전도학교에서 전도훈련을 배울 때 강사였던 이건희 목사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분이 섬기던 교회 앞에 큰 가로수가 있었습니다. 그 가로수 때문에 교회가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눅 17:6을 읽고 은혜를 받으셨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목사님은 이 말씀이 믿어졌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가로수에게 명하셨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가로수야 사라져라” 놀라운 것은 그 다음 날 구청에서 와서 그 가로수를 베어버렸습니다. 저는 그 간증을 듣고부터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기 시작하여 많은 체험을 하였습니다.
들어서 아시는 분들이 많지만 모르는 분들을 위하여 간증합니다. 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여 체험한 기적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간증입니다. 오금동에서 교회를 시작할 때 강단 뒤에 방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방을 만들었지만 살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내와 저는 성령의 감동을 받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했습니다. 세탁기 있을 자리에서 명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한다. 이 자리에 공기방울 세탁기가 들어올지어다.” 냉장고 있을 자리에서 명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한다. 이 자리에 탱크 냉장고가 들어올지어다.” TV있을 자리를 보면서는 명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한다. 이 자리에 개벽 X5가 들어올지어다.” 놀랍게도 제가 명한 그 자리에 제가 명한 그 제품의 세탁기와 냉장고와 TV가 들어왔습니다.
제가 지난 금요일에 기도회를 인도하면서 우리가 그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는 특권을 소극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왕 같은 제사장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권이 있습니다. 그 축복권은 축복할 때 누리는 것입니다. 민 6:27을 보겠습니다.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축복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축복권은 왕 같은 제사장인 저와 여러분에게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축복권을 담대하게 사용합시다. 믿음을 가지고 자기를 축복하세요. 자기의 육체도 축복하시고 자기의 정신적인 부분을 축복하시고 자기의 영적인 부분도 축복하세요. 재정적인 분야와 자기가 하는 일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세요.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할 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가족들도 축복하시고 교우들도 축복하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은 도시도 축복하고 나라도 축복하고 열방도 축복해야 합니다. 잠 11:11입니다.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복으로 인하여 진흥하고...”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복으로 진흥합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성령으로 함께 하십니다. 믿음으로 담대하게 축복하기를 바랍니다.
4.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치유하십니다.
6절에 보면 베드로가 주님의 이름으로 명했지만 치료는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나면서부터 걸어 본 적이 없는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에는 치료의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가난입니다. 예수님은 부요하신 분인데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그 이유를 고후 8:9에서 밝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가난하게 되신 것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요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②채찍에 맞으심입니다. 예수님은 채찍에 맞으시며 고통당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벧전 2:24에서 이렇게 밝힙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건강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③십자가에 달리심입니다. 역시 벧전 2:24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몸으로 담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당하신 이 세 가지 고난의 의미를 알아야 하고 누려야 합니다. 여기서는 이 세 가지 중에 치료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하나님은 치료의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광야를 횡단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이 부족했습니다. 마라에서 물을 만났지만 그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었습니다. 그때 모세는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셨습니다. 모세가 그 나무를 물에 던지니 쓴물이 단물로 변했습니다. 거기서 보여주는 핵심적인 진리는 ‘여호와 라파’입니다. 출 15:26입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하나님은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마실 수 없는 물을 고치신 것처럼 병든 우리의 마음과 육체와 환경과 관계와 가정과 사회를 고치시는 분입니다.
전에는 우리 교회에서 수많은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치유가 잘 나타나지 않으면서 제가 이 부분에 소극적이 된 것 같습니다. 제가 치유 설교를 잘하지 않으니 여러분의 치유에 대한 믿음도 약해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것처럼 지금도 동일한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 전에 한동안 우리교회에 나오셨던 어르신이 계십니다. 그분이 몸이 불편하셔서 말도 못하셨습니다. 그런데 저희 교회에 오신지 몇 주 만에 말씀을 듣다가 치유를 경험하셨습니다. 예배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그분 마음에 ‘내가 목사님의 말씀대로 믿기만 하면 치료가 되겠다’라는 믿음이 생기더랍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몸이 좋아지기 시작했고 입이 열려서 말씀도 하셨습니다. 믿음의 역사였습니다.
막 16:17,18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따르는 표적이 있습니다. 다섯까지 표적이 나오는데 마지막 표적은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낫는 표적입니다. 그런데 이런 표적이 누구에게 나타납니까? 믿는 자들에게 나타납니다. 목사에게 나타나는 표적이 아닙니다. 40일 금식을 해야 나타나는 표적도 아닙니다. 믿으면 나타나는 표적입니다.
우리는 치유의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은 치료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셨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병든 자에게 손을 얹으면 낫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손을 얹을 때 치유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자기의 병든 몸에 믿음으로 손을 얹을 때 치유가 일어납니다.
5. 체험을 넘어서 변화된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기적을 체험한 이 사람에게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①구걸을 위하여 성전에 오던 사람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의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던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성전 미문에 둔 이유는 구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사도들과 함께 걷고 뛰면서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②성전 미문에 있던 사람이 성전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미문은 the Beautiful Gate입니다. 이 문이 외관상으로 장엄하고 화려하기 때문에 붙여진 듯합니다. 미문이 예루살렘 성전의 어느 문인지는 학자들간에 의견이 분분한데, 이방인의 뜰에서 여인의 뜰로 통하는 니가노르 문이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이 문은 성전의 바깥문에 불과합니다. 이 사람은 날마다 성전을 찾기는 했지만 늘 성전 바깥문에 앉아있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그가 베드로를 통해서 주님을 만나고는 성전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에스겔 47장에 보면 성전 동문에서 생수가 나옵니다. 그 물이 흘러 강을 이룹니다. 그 강이 흐르는 곳마다 사는 역사가 있고 풍성함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이 강물은 믿는 자 속에 흐르는 성령의 역사를 보여줍니다(요 7:38).
천사가 에스겔에게 그 강을 건너게 했습니다. 여기서 천사는 겔 40:3에 보면 놋같이 빛난 사람인데 아마도 제2위이신 예수 그리스도 같습니다. 그가 천 척을 측량하고 에스겔에게 물을 건너게 하니 발목에 오르고, 다시 천 척을 척량하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천 척을 측량하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천 척을 측량하니 물이 에스겔이 건너지 못할 강이 되었습니다. 그 물은 헤엄칠 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었습니다. 여기서 강의 깊이는 신앙의 깊이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신앙은 발목신앙에서 시작됩니다. 교회를 다니는 정도입니다. 교회를 다니다보면 무릎신앙으로 발전합니다. 기도하는 신앙이고 하나님께 굴복하는 신앙입니다. 더 깊어지면 허리 신앙입니다. 허리는 힘을 상징하며 허리 신앙은 힘써 주님을 섬겨 헌신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더 깊은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단계는 헤엄칠 정도의 깊은 단계입니다. 깊은 물에서 헤엄칠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물의 깊이와 상관없이 성령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체험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구걸이 목적이었던 사람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이 되고, 미문에만 앉아있던 사람이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던 것처럼 우리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더 깊어져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과 3장에 보면 사람을 세 종류로 나눕니다. ①육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들입니다. 이들에게는 믿음도 없고 구원도 없고 천국도 없습니다. ②육신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거듭나기는 하였지만 성령충만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영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따라 삽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만 죽은 행실로 살고 하나님과 원수 된 삶을 삽니다. ③신령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성령충만한 사람들이며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영을 따라서 삽니다. 거듭난 우리는 영적인 어린 아이 수준에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청년의 수준으로 자라야 하고 아비나 어미의 수준으로 자라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체험을 넘어서 변화를 경험하고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야 합니다.
6. 체험은 복음 전파로 귀결 되어야 합니다.
본문의 이 사건은 성전을 소동시키고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 때문에 사람들은 모여들었습니다. 11절 이하에 보면 베드로는 모여든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개인의 권능으로 그 사람이 나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음으로 이렇게 된 것이라고 말하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때 복음을 듣고 믿은 사람이 남자의 수가 약 5천이나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기적을 일으키고 끝낸 것이 아니고 그 일을 계기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의 체험이나 우리가 경험한 기적들 그리고 기도응답은 복음 전파로 귀결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체험, 우리가 가진 것, 우리가 얻는 영광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복음을 전하는 도구입니다. 그것들은 복음을 전하는 매개체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개인적인 독특한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명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성공 여부는 사명으로 판단합니다. 사명을 위하여 사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아무리 성공했어도 사명을 잃어버린 사람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세상적으로 좀 부족해도 사명을 따라 산다면 성공적인 인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목숨을 걸만한 사명을 발견하고 하루를 살아도 사명대로 살아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사명이 있습니다.
①예배입니다. 우리는 예배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배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예배의 성공자가 인생의 성공자입니다. 예배에 실패하면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배를 드리지 않을 때 이 말씀이 생각나기를 바랍니다. 예배는 사명입니다. 예배에 성공해야 인생에 성공합니다.
②섬김입니다. 주님께서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려고 오신 것처럼 우리도 섬김의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다윗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던 것은 그가 일생 예배자로 살았고 또 섬기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③전도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전도자입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고전 9:16에서 사도 바울은 무서운 말을 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부득불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어쩔 수 없이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자기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자기에게 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부득불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에 저와 교회를 돌아보니 하나님 앞에서 죄송하고 부끄럽습니다. 지난 한 해 우리는 기회가 되는대로 복음을 전했지만 열매가 부실합니다. 열매는 하나님께 달린 것이지만 시편기자는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울며 씨를 뿌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죄송하고 부끄럽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며 사도행전적인 삶입니다.
오늘은 나면서 걸어 본적이 없는 사람의 치료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2. 기도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3. 예수님의 이름에 권세를 사용합시다.
4.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치유하십니다.
5. 체험을 넘어서 변화된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6. 체험은 복음 전파로 귀결 되어야 합니다.
첫댓글 아멘 목사님 감사합니다. 은혜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