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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성거산 순교성지
도로주소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위례산길 394
경기도와 충청북도 경계선에 자리 잡고 있는 성거산 성지는 천안시 북면 납안리 46-1번지로 되어 있다. 한국의 성지 중에서 보기 드물게 해발 500m의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이 성지는 차령산맥 줄기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특히 봄, 가을에는 꽃들과 단풍으로 찾아 온 순례자들의 감탄을 자아내고 있다.
성거산이란 명칭은 고려 태조 왕건이 수행원들과 함께 성환 지역에 머무르면서 잠시 쉬는 동안 오색구름이 맴돌며 신령한 기운이 감도는 모습을 보고 ‘거룩할 성(聖)'자에 '거할 거(居)'자로 이름을 지어준 다음 이 산에서 제사를 지낸 데서 유래한다. 또한 태조 이성계와 세종대왕도 온양 온천에 목욕을 하러 올 때마다 이곳 성거산에 들려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이곳 성거산 성지 주변은 박해 때 신앙의 선조들과 순교자들이 피신하여 신앙생활을 영위했던 삶의 터전인 교우촌 7개가 산재되어 있어 선조들의 신앙의 향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860년대부터 1920년 사이에 세워진 교우촌을 보면 서덕골(서들골), 먹방이, 소학골, 사리목, 매일골, 석천리, 도촌 등이 있었으며, 이 교우촌 중 목천 서덕골 교우촌은 뮈텔 주교가 배티 삼박골 교우촌까지 사목 방문을 할 때 거쳐 가는 경로였다. 또한 서덕골 교우촌은 한국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백부 최영렬이 이주해 살던 곳으로, 1839년 기해박해 이후 최양업 신부의 둘째 아우인 최선정 안드레아가 맡겨져 성장한 곳이며 최양업 신부도 종종 드나들었던 곳이다.
특히 소학골 교우촌은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칼레(Calais, 姜) 신부와 페롱(Feron, 權) 신부가 박해를 피해 머물다 중국으로 탈출한 곳이고, 박해가 끝난 뒤에도 뮈텔(Mutel, 閔德孝) 주교, 두세(Doucet, 丁) 신부, 베르모렐(Vermorel, 張) 신부가 거처하거나 순방하던 곳이다. 칼레 신부와 페롱 신부는 병인 박해 때 동료 선교사들이 곳곳에서 체포되자 전교 여행을 중단하고 한실(현 경북 문경군 마성면 성내리) 교우촌에서 숨어 지냈다. 그러다가 포졸들에게 쫒기면서 연풍을 지나 괴산과 진천을 거쳐 배티 삼박골 교우촌에 머무르다가 마지막으로 소학골에 와서 페롱 신부와 함께 잠시 은신하다가 조선을 떠난 유서 깊은 교우촌이다.
또한 소학골 교우촌에는 병인박해시 10명의 순교자가 탄생했는데, 5명은 공주 감영에서 참수형을 당했고 나머지 5명은 서울 포도청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공주 감영에서 참수당한 최천여 베드로, 최종여 라자로, 배문호 베드로, 고 요셉, 채서방 며느리는 성거산 성지 제1줄무덤에 안치되어 있다. 현재 제1줄무덤에 총 38기, 제2줄무덤에 총 36기의 묘봉이 있는데, 시신(屍身)들이 겹쳐 묻혀 있어 실제 이곳에 안장된 순교자의 수는 훨씬 더 많다고 한다. 1959년 미군의 공군기지가 성거산 정상에 주둔하면서 도로를 개설할 때 도로 상에 있었던 묘봉 수가 총 107기였다고 이장(移葬) 작업에 참여한 6명의 증언이 있었다. 따라서 이곳은 병인박해 때 내포지방에 살다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 때문에 순교를 당한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안식처이다.
2011년 5월 봉헌식을 가졌고, 성당 아래층은 수산나 피정의 집으로 사용하고 있다.하느님과 진리를 위해, 사랑은 죽음보다 강함을 생명을 바쳐 증거한 순교자들의 신앙은 오늘날 한국 교회를 탄생시킨 원동력이 되고 못자리가 되었다. 그동안 오고가는 사람도 없이 벌 · 나비 · 짐승들만이 함께 했던 성거산 성지의 무명 순교자들은 침묵의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었다.
성지 현황을 보면 제1줄무덤에서 제2줄무덤까지의 거리가 약 530m 정도로, 가는 동안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칠 수 있도록 14처가 설치되어 있고, 넓은 성모광장에는 야외제대와 신자석이 마련되어 있어 야외미사를 봉헌하기에 불편함이 없다. 또한 순례자들이 식사를 하고 쉴 수 있는 쉼터도 마련되어 있다. 제2줄무덤부터 시작하는 2.1km 거리의 '순교자의 길'에는 순교자와 관련된 많은 조각품과 한국의 103위 성인과 성거산(소학골) 출신 순교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55개의 대형 호롱등이 설치되어 있어 전구하며 조용히 묵상할 수 있다. 2011년 5월 7일에는 성거산 아래 성지 초입에 건립한 성당과 수산나 피정의 집에 대한 봉헌식을 가졌다.
한편 교우촌 중에서 가장 오래된 소학골 교우촌에는 박해 때 교우들이 살던 집터와 태풍에 의해 쓰러진 돌배나무가 남아 있어 오랜 역사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성거산 성지는 깊은 산골에 위치해 소음이 없으며 공기가 맑고 전망이 아름다워 한 번 순례를 온 이들은 꼭 다시 오고 싶어 하는 곳이다. 특히 계절마다 무명 순교자를 상징하는 각종 야생화가 피어 군락을 이루며 주변 환경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2008년 12월 22일 성거산 성지는 '천안 성거산 천주교 교우촌터'라는 명칭으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175호로 등록되었다. [출처 : 대전교구 홈페이지, 내용 일부 수정(최종수정 2013년 9월 22일)]
박해 시대의 사목 중심지 소학골
새로 찾은 교회 사적지 중 하나는 목천의 '소학골'(일명 씨아골 도는 쇠약골)이다. 현재의 행정 구역은 충남 천안시 북면 납안리. 독립 기념관 뒤편의 흑성산 가까이 있는 성거산(579m)의 동쪽 계곡이다. 지금 이곳을 가려면 북면 도촌리를 거쳐 도보로 가거나 천안에서 성거읍을 거쳐 입장으로 가다가 오른쪽으로 나 있는 성거산 통신 도로(입장면 시장리)를 타고 가면 된다. 차량을 이용하려면 두 번째 노정을 택해야 한다.
이제 소학골은 폐동이 되었고 그 아래 '사리목'에 세 집이 남아 있는데, 그마저도 농한기에는 두 집만이 남게 된다. 그러나 1910년 무렵만 해도 소학골과 사리목에서 모두 공소가 치러졌으며, 성거산 남쪽에 있는 옛 교우촌인 목천의 서덜골(일명 서덕골)과 매일골, 먹방이(현 충남 천안시 목천면 송전리)에도 많은 신자들이 살고 있었다. 이후 1930년대까지 신자들이 계속해서 이주하면서 공소는 그 아래쪽의 마을로 이전되었고, 지금은 목천의 송전 공소만이 유지되고 있다.
성거산 자락의 깊은 산중에 신자들이 정착하여 신앙 공동체를 일구기 시작한 것은 교회사에서 전이형(轉移形) 공동체가 사라지고 정주형(定住形) 공동체가 형성되는 1830년대였다.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백부인 최영렬도 이 무렵에 '서덜골' 교우촌으로 이주하였으며, 기해 박해 이후에는 최 신부의 둘째 아우인 최선정(안드레아)이 이곳에서 성장하였다.
박해가 계속되면서 서덜골 이웃의 소학골에도 신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 척박한 골짜기에서 움막을 짓고 생활하거나 화전을 일구어 얻은 오죽잖은 식량으로 끼니를 해결하면서도 신앙만은 잃지 않았다. 실제로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이 깊고 높은 산중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다고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서덜골과 소학골 교우촌은 산자락과 골짜기로 이어지는 진천 백곡의 배티, 삼박골 교우촌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1864년 칼래(Calais, 姜) 신부는 자신의 거처를 경기도 손골(현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동천리)에서 소학골로 옮겼다. 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사목 관할 구역을 조정하면서 경상도 서부에서 충청도 · 경기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비교적 건강이 좋은 칼래 신부에게 위임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소학골은 칼래 신부의 여름 휴식처요 사목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소학골은 독수리 둥지처럼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호랑이가 득실거리고, 숲이 우거진 산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찾아가기 어려운 곳입니다. 그러나 조용히 숨어 살기에는 아주 좋은 피신처입니다. 마치 들짐승처럼 사방에서 쫓기는 선교사가 평화로운 이곳에서만은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어느 누구에게 들킬 염려가 없이 초가집에서 나와 눈앞에 펼쳐진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도 있고,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을 감상할 수도 있습니다(칼래 신부가 파리의 신학교 교장 신부에게 보낸 1867년 2월 13일자 서한).
칼래 신부는 때때로 백곡의 삼박골로 가서도 휴식을 취하였다. 이처럼 소학골 · 삼박골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칼래 신부는 경상도 지역을 순방하던 도중에 1866년의 병인박해를 당하게 되었다. 신부는 그때부터 포졸들에게 쫓기면서 문경 인근의 교우촌과 동굴을 오가며 은신하였으나, 발각될 위험이 커지자 여름 휴식처가 있는 소학골 교우촌에 가서 머물기로 작정하였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000년 5월호]
순교자들의 본당 소학골
1866년 5월 10일 한실(현 경북 문경군 마성면 성내리) 교우촌을 출발한 칼래 신부는 이틀에 200리를 걸어서 연풍, 괴산, 진천을 거쳐 배티의 삼박골에 도착하였다. 신부는 삼박골의 거처에서 신자들에게 보호를 받으며 5월 말까지 보름 남짓 머물면서 상황을 살피다가 목천 소학골로 거처를 이전하였다. 한편 그의 동료 페롱(Feron, 權) 신부도 7월에는 소학골로 와서 칼래 신부와 함께 생활하였으며, 10월 초에는 둘이 함께 소학골을 떠나 중국으로 탈출하였다.
소학골에 박해의 풍파가 몰아친 것은 이로부터 얼마 안 되어서였다. 이때 포졸들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신자들이 풍비박산하여 도망하였으나, 최천여(베드로)와 최종여(라자로) 형제, 칼래 신부의 복사를 한 배문호(베드로), 고 요셉, 채 서방 며느리 등은 교우촌에 남아 있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포졸들은 즉시 이들을 공주로 압송하였고, 4명 모두 공주 영문의 옥중에서 교수형을 받아 1866년 12월 14일(음력 11월 8일)에 순교하였다. 순교 후 이들의 시신은 한 신자에게 거두어져 소학골에 안장되었다. 그 후에도 소학골에서는 다시 몇몇 신자가 체포되어 서울 포도청에서 순교하였다.
순교자 배문호의 무덤은 현재 사리목에서 소학골로 가는 길목에 안장되어 있다. 그러나 나머지 순교자들의 무덤은 찾을 길이 없다. 후손들 대부분이 오랫동안 타지로 떠돌다가 신앙의 자유 이후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탓에 선조들의 무덤에 대해 전혀 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박해가 끝난 뒤 선교사들은 다시 성거산 골짜기에 흩어져 살고 있는 신자들을 찾았다. 특히 두세(Doucet, 丁) 신부는 서덜골에 여름 휴식처를 두었으며, 베르모렐(Vermorel, 張) 신부도 한때 이곳에 거처하였다. 1900년 1월 8일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는 이 지역을 순방하고 이러한 내용을 자신의 일기에 자세히 기록하였다. 이곳 순교자의 무덤과 교우촌 신자들의 줄무덤이 사적지로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였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000년 5월호]
성거산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의 교우촌 설립 현황
1) 서덕골 교우촌(1884년, 두세 신부) : 목천면 송출리
2) 먹방이 교우촌(1884년, 두세 신부) 공소 신자수 128명 : 목천면 석천리
3) 소학골 교우촌(1888년, 두세 신부) 공소 신자수 114명 : 북면 납안리
4) 매일골 교우촌(1895년, 퀴를리에 신부) : 목천면 송출리
5) 사리목 교우촌(1901년, 드비즈 신부)
6) 석천리 교우촌(1913년, 공 베드로 신부) 112명 : 목천면 석천리
7) 도 촌 교우촌(1919년, 공 베드로 신부) 110명 : 북면 납안리
8) 납안리 교우촌(1920년, 공 베드로 신부) 51명 [출처 : 성거산 성지 홈페이지]
성거산 성지의 순교자들
소학골에 박해의 풍파가 몰아 친 것은 서양 선교사들(리델, 페롱, 칼레 신부)이 중국으로 출국한 후 얼마 안 되어서였다. 포졸들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신자들은 풍비박산하여 도망하였으나, 최천여(베드로), 최종여(라자로) 형제와 칼레 신부의 복사를 한 배문호(베드로), 고 요셉, 채 서방 며느리 등은 교우촌에 남아 있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포졸들은 즉시 이들을 공주로 압송하였고, 5명 모두 공주 영문(營門)의 옥중에서 교수형을 받아 1866년 12월 14일(음력 11월 8일)에 순교하였다. 이 5명의 순교자들은 절두산 성당에 보관중인 병인박해 치명자 명단 509-513호에 나오는 분들이다. 순교 후 이들의 시신은 청주 절골에 사는 신자 강치운 씨에 의해 거두어져 소학골에 안장되었다. 그 후에도 소학골에서는 다시 몇몇 신자가 체포되어 서울 포도청에서 순교하였다.
절두산 성당에 소장되어 있는 병인박해 <치명일기>에 기록된 순교자 5분의 신앙생활과 옥중생활을 보면 다음과 같다.
최천여(베드로)
충정도 목천 소학골에 살면서 열심히 묵상기도와 염경기도를 하며 늘 치명의 뜻을 가지고 살았다. 병인년 10월 10일 갑자기 들이닥친 포졸들에게 잡혀 관청에 끌려 들어가 천주학을 배반하도록 권유를 당하였다. 그러나 말을 듣지 않자, 다시 투옥 옥중에 들어가 갖은 고문과 박해를 당하였다. 그러면서도 심한 고문에 못 이겨 배교한 교우들을 찾아다니면서 '금세는 잠깐이요 후 세의 세계는 영원하니 어찌 잠시 살기 위해 배반하느냐.'며 눈물을 흘리며 설득시키다가 당시 나이 52세로 병인년 음력 11월 8일 치명하였다.
최종여(라자로)
최 베드로(천여)의 아우로 목천 소학골에서 그 형과 함께 열심히 수계생활을 하다가 병인년 10월 10일에 목천 포교에게 잡혔다. 혹독한 역병으로 거의 사경에 이르러 스스로 걸어가지 못하니 포교들이 목을 매어 끌고 본관으로 가 며칠 갇혔다가 공주 진영으로 가서 형 베드로와 같이 11월 초파일에 나이 42세로 치명하였다.
배문호(베드로)와 고 요셉
이 분들은 충청도 목천 소학골에 살았고, 열심히 수계 생활하며 부모에게 배우고 믿음을 다졌다. 하옥된 후 옥에서 계명을 풀어 읽으니, 이것을 누구한테 배웠으며 믿음은 얼마나 되느냐 대답하며 저는 죽어도 천주학은 배반하지 못하겠다 하며 관가에 들어갔다. 치명하기를 원한 배문호는 아내와 의논하고 뜻을 지키며 강 신부가 주신 철사 띠를 주야로 항상 띠고 다녔으며, 강 신부로부터 고신극기를 배우고 따라다니며 강 신부의 복사생활 하였다. 병인년 10월 초파일에 목천 포교에게 고 요셉과 함께 잡혀 관가에 들어가 배주배교(背主背敎 :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종교를 배반하는 것)하라 하였다. 만만코 죽사와도 절대 배반하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또한 십계명을 풀어 이야기하니 '그것을 누구에게 배웠으며, 믿음은 얼마나 되느냐.'고 물으니 믿음은 '부모에게 배우고 믿음은 아직도 다하지 못 했나이다.'고 말하니 즉시 하옥 2차, 3차 물고문에 형벌이 이루 말할 것도 없었다. 계속 천주를 배반하라 명하자 조금도 굴하지 않고 조만과를 서로 통경하니 경문히 자신만만하였다. 순상(順喪 : 늙은 사람이 젊은 사람보다 먼저 죽는 일) 분부에 공주로 보내 11월 초파일에 끌려가면서도 경문(經文 : 기도할 때 외는 글)을 소리 높여 읽었다. 창교배(인솔자)도 즐겨 듣고, 배교한 사람도 이 모습을 보고 즉시 통회하고 따라 합세하여 공주 진영(鎭營)에 들어가 갖은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도무지 굴하지 않자 즉시 옥에 하옥 병인년 11월 초파일에 치명하니 배문호 24세였고 고 요셉 나이는 알지 못 하였다.
이때 모친에게 3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어머님도 뒤를 따라 오소서. '동곳'(머리를 감아 상투 꽂는데 필요한 기구)을 보시며 저를 생각해 주소서. 나와 고 요셉은 이곳 감영에서 너무 목말라 오줌으로 푸나이다." 하였다.
채씨 며느리
위의 네 분과 함께 공주에서 같은 날 순교하였지만 치명일기에는 이름만 나와 있다. 채씨 며느리는 순교자 최천여의 며느리로 보고 있다. 이 5분의 시신은 당시 청주 절골에 사는 순교자 최천여의 사돈뻘 되는 강치운이 이곳 소학골에 묻었다고 한다.
<치명일기>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병인박해 치명자사적> <우포도청 등록>의 자료로부터 병인박해 때 순교한 소학골 출신 신자들이 서울 포도청에서 순교한 분들은 다음과 같다(한국 교회사 연구소 차기진 씨의 ‘한국 교회사 사적지 재발견’에서)
1. 배 (바오로) : 배 안드레아의 부친, 목천 소학골 거주, 서울에서 치명, 62세(또는 61세) 1868년 6월 23일(또는 1867. 6. 19).
2. 배 (안드레아) : 배 바오로의 아들, 서울에서 치명, 35세 1878년 4월 10일.
3. 배화첨(베드로) : 배문호 조부, 면천 사람, 목천 소학골 거주, 서울에서 교수형, 56세 1868년 5월 17일.
4. 배명중(바오로) : <우포도청등록>의 배원성, 배화첨의 차남, 목천 소학골 거주, 공주 질울로 이주, 서울 좌포도청에서 치명(致首), 54세(또는 50세) 1878년 5월 23일(또는 1878. 4. 10).
5. 배문모(요한) : <우포도청등록>의 배일용, 배명주의 아들, 좌포도청에서 치명(致首), 19세 1878년 5월 23일.
3명의 성직자들을 중국으로 탈출시킨 11명의 교우들이 순교
병인박해 때 한국 천주교회는 12명의 성직자 중 9명의 성직자가 체포되어 순교하고, 3명(페롱, 칼레, 리델) 신부가 난을 피해 신창군 용당포에서 배를 이용하여 중국으로 탈출하게 되었다.
첫 번째 탈출은 리델 신부였다.
11명의 용감한 교우들이 배를 마련하여 병인년 6월 29일 베드로 바오로 대축일에 신창 용당포를 출항하여 7월 7일 중국 해안에 도착 천진으로 가서 프랑스 함대를 만나 함장 로즈(Rose) 제독에게 한국의 박해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두 번째 탈출은 칼레, 페롱 신부였다.
프랑스 함대가 조선 해안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교우들의 협조로 배를 마련하여 프랑스 함대가 와 있다는 곳을 찾아 떠났다. 그러나 함대를 찾지 못하고 중국으로 탈출하였다. 이때 신부들을 배로 탈출시키고 돌아온 교우들이 체포되어 순교하였는데 이들이 순교 후 성거산에 모셔졌다고 한다.
[출처 : 성거산 성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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