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가 전파된 나라들의 사찰에 봉안된 부처는 금빛으로 되어 있다. 몸에 걸치고 있는 의복인 가사는 금색일 수 있지만, 피부색마저도 금빛인 것을 보면 누구나 부처님을 황인(黃人)으로 생각한다. 고타마 싯다르타(싯다르타 고타마)는 석가모니(석가족의 성자)의 어릴 때 이름이다. 싯다르타가 태어난 곳은 흔히 인도라고 생각하지만 네팔에서 태어난다. 부처가 태어난 룸비니 동산은 인도의 국경지역과 가까운 네팔의 땅이고, 부친 숫도다나왕(정반왕, 淨飯王)이 통치하던 나라 카필라국은 현재 네팔 땅에 있던 작은 나라였다.
카필라 성의 위치는 지금 네팔의 최남단에 있는 타라(Tarai) 지방으로 알려져 있다. 붓다가 입멸한 후, 1천1백여 년의 세월이 흘러 그곳을 찾은 중국의 현장(玄奘, 602~664)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제6권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카필라국의 둘레는 4천여 리이다. 비어 있는 성이 십여 개에 달하고 이미 심하게 황폐되었다. 왕성(王城)도 허물어져 그 둘레와 크기를 알 수가 없다. 그 안의 궁성(宮城)은 둘레가 십사오 리이고, 벽돌을 쌓아 만든 기단은 견고하다. 황폐된 지 오래되어 마을도 거의 없고 썰렁하다." - 현장(玄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제6권
그런 네팔에가면 인도의 아리안족과 다른 몽골로이드(유(類) 아시아계 인류집단인 몽고계 인종. )의 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은데 이 몽골로이드는 황색인종이다. 우리와 별반 차이가 없는 얼굴이라서 그곳에서 씻지 않고 지저분하게 있으면 구별하기 힘들 정도이다.
당시 네팔의 카필라국의 사람들은 노란 얼굴의 부처님과 관련이 있다. 그러면 정말 부처님도 황인이었을까? 하지만 부처님은 인도 내륙에서 이주한 아리안족으로 백인이었다.
불국사 석굴암 본존불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파르스럼한 색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데, 이는 부처님의 눈동자가 백인들에게서 보이는 푸른색이었다는 전승(傳承)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불화나 불상 중에는 눈썹이나 수염 또는 머리카락이 푸른색으로 처리된 것이 있는데, 이는 부처님의 파르스름한 머리와 체모를 가졌다는 기록에 따른 것이다. 불국사 석굴암 본존불의 모습은 늘씬한 체구의 서양인 모습에 가깝다. 이런 늘씬한 불쌍은 고대 불상에서 흔히 보인다. 그런데 불쌍은 왜 금색으로 표현되 있을까?
세상에는 금보다 더 귀한 금석이 많지만 귀금속을 대표하여 화폐가치의 절대적 위상을 가지는 금속은 없다. 금은 무르고 약한 금속이라 농구용이나 공구로 사용 할 수 없다. 하지만 자연적 금은 부식되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 전 시대에 걸쳐 인류에게 최상의 가치를 받도 있다. 오로지 금은 질산과 염산을 혼합한 왕수(王水 , 진한 염산과 질산을 3 대 1의 비율로 섞은 액체)에 의해서만 부식이 된다. 그런 부식되지 않는 금은 곧 영원과 불변을 상징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금으로 된 단약인 금단(金丹)을 신선이 되는 영생약(永生藥)으로 생각했다. 오늘날 귀한 약으로 중국인이 취급는 우황청심환이나 공진단의 표면에 금박을 씌우는 것과 일맥상통 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금박 환약=최고의 약'으로 통한다. 이런 사상은 영생불사의 비밀에 접근하려는 생각에서 기인한 것이다.
금은 변하지 않는 성질로 인해 절대적인 상징성을 표현하기에 적합하였고, 인류 문명은 최고의 존귀함과 관련된 표현에 금을 사용하였다.
하여 중국에서 황금빛은 성인인 부처님과 황제에게만 허용된 색이었다. 1987년에 만들어진 영화 <마지막 황제>라는 작품이 있다. 당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9개 부분이나 수상한 명작이었다. 지금도 간혹 명작 영화로 방영 되기도하는데, 이 영화의 장면 속에 어린 황제 푸이가 동생 푸제와 놀다가 푸제가 속옷에 황색 비단을 사용한 것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정색하며 뺨을 때리는 장면이 나온다. 황제에게만 허용된 색의 옷을 잎고 싶었던 동생의 철없는 행동과 신분 사회에서 허용되지 않는 대한한 처사가 표현된 장면이었다.
황제 아래의 제후국 임금들(군왕)은 붉은색 제후복 이상을 착용하지 못했다. 중국을 섬긴 우리나라 임금도 사실 중국의 제후국 취급을 당하여 붉은색 용포를 입었던 것이다. 중국 사신이 조선에 올때 황포(황제 옷)을 가지고와 조선의 궁궐 안쪽까지 말을 타고 들어오는(하마비 무시) 무례까지 법하며 방자했던 이유를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러니 중국에서 여기에도 예외는 있었다. 바로 그것은 성인(聖人)이다. 중국문화에서 성인은 군주 중에만 존재할 수 있다는 성인구주론(聖人君主論)이 있었다. 이로 인해 중국에서 말하는 성인은 요(堯). 순(舜). 탕(湯). 무(武). 문(文). 주공(周公) 등은 모두 군주이다.중국의 공자는 군주가 아니고 군자였다. 그런 공자와 ,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를 성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공자를 문선왕(文宣王)으로 관우를 관왕(關王)으로 만드는 헤프닝도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미 중국으로 불교가 전파되면서 성인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불상에는 지존의 상징인 황색이 사용되는 것이다. 이는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도 바뀌지 않는 뿌리 깊은 전통이었다.
조선의 이금이 제아무리 높다해도 부처님의 존엄에 미치지 못했다. 그것이 황금빛으로 나타났으며, 또 다른 황제의 상징인 쌍룡이 부처님 모신 전각을 장엄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다른 황제의 상징 용(龍)은 동아시아 설화에서 주로 뱀과 같은 몸에 새 같은 다리, 사슴의 뿔과 물고기의 비늘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상상의 동물이다.
우리말로는 '미르'라 하고 한자는 龍을 쓴다. 중국어의 간체자로는 『龙』이라 표기한다. 일본어에서는 竜과 龍이 확실한 기준 없이 혼용되어 쓰이는데, 주로 동아시아의 용은 『龍』으로, 서구의 드래곤은 『竜』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용은 고대인에게 중요한 상징이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모습으로 형상화가 되었는데,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자신들에게 친숙한 사물을 이용해 용을 표현하여 숭배대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작업은 지역적 차이가 나타났다. 황하나 장강 등에서는 악어의 형상을, 내몽골 초원지대에서는 말의 형상을 하였다. 홍산 문화의 옥룡은 말의 머리와 뱀의 몸을 하고 있다. 각 지역마다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던 용의 모습은 공통된 양식으로 통일되면서 원래의 형상을 간직하면서도, 원래와 다른 형상이 되었다.
전국시기까지 용과 호랑이는 특별히 강조되어 나타났고, 문헌과 고고학에도 둘이 세트로 짝을 지어 나타난다. 그 이유는 용과 호랑이는 춘분점과 추분점에 위치해 있었고, 추분점은 원시 역법상 한해의 시작을 나타내는 지표였으므로 중요한 별자리로 인식되었던 거다. 그러다 보니 용과 호랑이는 같이 나타난다.
이처럼 용은 단순히 농경문명의 시간계산을 위한 천문에서 나온 것인데, 그 중요도가 워낙 크기도 하다보니 용은 곧 왕권의 상징이 되었다는 가설이다.
불교가 전래되면서 불교의 나가/용왕 개념이 한중일에 전래되면서 민담에도 자주 나와 익숙한 사해용왕, 사대용왕 등의 개념이 등장한다. 그 이전까지 동북아시아에서 비의 신은 용만 있는 게 아니었는데, 불교의 영향으로 비의 신 하면 일단 용왕을 떠올리는 사고가 퍼졌다. 단군신화의 우사도 용은 아니다. 산해경에는 비를 내리는 신이 사람의 얼굴에 새 몸을 하고 있거나, 사람에 모습과 비슷하지만 몸 곳곳에 뱀을 치렁치러 걸고 있는 모습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단, 후자의 경우 뱀=용 설에 의하면 용신과 관련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적인 존재라곤 해도 불교에서는 용을 수준 높은 축생으로 취급하고 있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군주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황제를 표시하는 용은 발톱이 5개(오조룡) 왕이나 황태자는 4개다. 중국 드라마 황제의 딸에서 태자가 실수로 5조룡이 수놓아진 옷을 입고 황제 앞에 나타나려다 이를 알게된 눈치 빠른 여성이 발톱 하나를 뜯어 내어 위기를 모면하는 장면이 나온다. 황제 외에 5조룡 수 놓은 옷을 입었다는 것은 역모, 황제가 되겠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원칙이 동아시아에서 제대로 지켜진 것은 아니다. 조선, 일본, 베트남, 류큐 등에서는 3조룡부터 7조룡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첫댓글 서양의 중세 미학에, 신은 형상이 없으므로 신의 위대함,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방법을 찾아나셨고, 찾아 낸 것이 '빛'이라고 했습니다. 빛을 통해서 신의 위대함, 미적 표현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실제로는 고딕 성당의 스테인글라스로 ---
결국 인간이 사는 세상은 기호와 상징으로 뒤덮여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문화'라고 한다네요.
'문화'가 너무 어려운 말이라서, 내 말이 잘못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 집단이 만들어 낸 물질적·정신적 과정의 산물을 문화라고 한다고 하니 선생님 의견도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