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과음하였다. 자타가 공인하는 애주가인지라 새삼스럽다 하시겠지만, 아무래도 내 몸이 영 시원찮은 것 같아, 스스로 조절해보기로 하고는 한달 동안 금주하기로 했는데, 나 자신과의 약속을 깼다. 아니 금주하기로 한 건 11월이었지만, 중간에 한 두번 술 마실 일이 생긴 바람에 날짜를 더 늘였더니.. 결과는 역시 도로아미타불이다. 헌데 어제는 꼭 마셔야 할 술이었다. 울 동네에 내가 자주 들리는 치킨집이 있다. 시인이 주인이다. 날 누님이라고 부르니 내 동생인 셈인데, 여기가 동네 문인들 사랑방 역할을 하는 곳이라, 주인 바쁜 줄 알면서도 마실 나갔다오는 길이면 들려서 생맥주 한잔 하고 오는데, 헌데 이 후배가 첫시집이 나왔단다.
낮에 택배로 받고는 정작 본인은 일하느라 제대로 살펴볼 시간도 없었다고 했다. 내가 시인의 시집을 첫 번째로 받았다. '고맙다.'
'누나가 잘 읽어보고 한편 골라 예쁘게 꾸며서 내 블로그에 올려줄게.'
이 친구 고향이 강원도 영월이다. 험한 산길을 그야말로 슬리퍼 신고 누비며 용돈 마련하느라 약초캐기도 하고, 청다람쥐도 잡고, 산을 마당처럼 걸어다녔단다. 생김새도 울퉁불퉁 감자바위처럼 생겼지만, 마음씨 하난 정말 비단결이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 3-4명을 번갈아 알바로 쓴다. 월급으로 주고, 여름이면 휴가도 일주일씩 준다. 일주일도 짧다고 열흘씩 유급휴가 보내고 온 아이들을 짜르지도 않고(못하고) 늦게 나와, 배달 오토바이로 사고쳐, 속상해하면서도 여전히 그 아이들이다. 주인 닮은 아이들.
고향 동네는 그 흔한 펜션 조차도 안들어서는 곳이란다. 빠른 말투에 억센 강원도 억양.. 첨엔 알아듣기도 힘이 들었는데..
작은 가게 한쪽 테이블엔 낮에 막 배달되어온 따끈한 시집이 쌓여있고, 주인은 갑자기 밀려온 주문에 닭 튀기며, 잠시 선 채로 한마디 던지고 또 배달 나간다.
그래서 기다렸다. 첫 시집을 냈는데, 그냥 못잘거다. 시집 한권 내려면 평균 400-500만원 정도가 든다. 출판사에서 그냥 내주는 경우는 몇몇의 잘 팔리는 시인 아니면 어림도 없다. 돈을 낸다해도 유명 출판사는 또 가려서 내주고, 이 친구는 경기문화재단지원금(300만원)을 받았다. 그 지원금으로 첫 시집을 낸거다. 같이 동석한 아직 시집을 못낸 또 한 후배시인은 문예진흥기금 결과 발표만을 기다리고 있다. 28일이란다.
'있잖아, 누나가 자칭 쪽집게도사(?)거든. 너 이번엔 꼭 그거 받게될거야.' 문예진흥창작지원금은 1200만원이라 거금이다. '받거든 책 내고, 한턱 내라.'
내년엔 나도 신청해 볼려고 한다. 될지 안될지는 모르겠다. 왜냐면 이게 꼭 필요한 사람에게 가야하는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한심한 예술의 정치성이여!
'받기만 한다면 내 누나 모시고 한달 동안 영화 보러 다닐께요. 맛있는 것도 사드리고, 술도 사고요.'
'?? 얘, 그거 누구 좋으라고 하는 말이야? 엥! 내가 너랑 왜 한달씩이나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냐!'
우왕좌왕 하고 농담을 하긴 했지만,
정작 첫 시집을 낸 시인의 마음이 어떤지 너무나 잘 안다.
'나 니 맘 잘 알아, 너 지금 정신 하나두 없지? 집에 들어가도 잠도 못 잘텐데.. 내 한 잔 살테니, 얼른 가게 정리하고 다른데 가서 술 한 잔 하자.'
이렇게 해서 그 가게 정리하는 것 돕고, (하긴 우리가 일을 할 줄 모르니 흉내만 내는거지만,)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조촐한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소주에 과메기 한접시(요건 얼렷님 약오르라고 밝힘!)
.....
'아버지가 보고싶어요. 아버지한테 내 시집 나왔다고 보여드리고 싶어요. 누나 지금 울 아부지 산소 갈래요?'
'참아, 너 내일도 가게 열어야하고, 우리들 다 술 마셨는데, 누가 운전하니?'
마음이야 거기까지 함께 가 주고 싶다. '참, 아드님이 열심히 살고, 정직한 시 써서 책냈습니다.' 칭찬도 해주고 싶지만, 현실은 엄하다.
시인은 과천서 가장 작은 7.5평 아파트에 세산다. 작년까지 세 식구가 그 단칸 집에 살았다. 그러다 아내와 딸을 필리핀으로 유학보냈다. 닭기름 냄새에 넌더리를 내면서도 필리핀에 보낸 아내와 어린 딸에게 학비, 생활비도 부쳐줘야하고, 어마한 가게 월세랑, 동생들도 도와줘야하고, 힘들텐데도 태안 반도로 자원봉사하러 간다는 친구에게 여비 10만원도 선뜻 내놓는다.
'지금 치킨 배달은 예전 돌솥밥 배달하던거에 비하면 일도 아니예요. 배달 다니다보니 팔 다리에 근육이 붙어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헬스장 열심히 다닌 줄 알아요.' 씩 웃으며 상처투성이인 팔 다리를 보여주는데, 난 콧등이 시려와 얼른 다른 이야기를 한다.
이 세상이 다 시인들 마음 같을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그랬으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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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랜만에 좋은글보내요 저는 외국에있어 그시집을 받아볼수없어 아쉽지만 축하의 박수를 마음으로 보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