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사형 터에 세운 순교자 기념관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사형터에 세운 순교자 기념관이다. 관덕정에서는 을해박해(1815년), 정해박해(1827년),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 등 박해 때마다 수많은 교우들이 온갖 참혹한 방법으로 처형되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관덕정과 옥에서 순교한 신자 수는 44명에 이른다.
아미산 줄기에 위치한 이곳 관덕정은 본래 대구읍성의 남문 밖으로, 조선 후기에는 군관과 별무사를 선발하던 넓은 연병장이 있었고, 그 한쪽은 이전부터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다가 영조 때인 1749년 관찰사 민백상이 이곳에 시험장인 도시청(都試廳)을 건립하고 관덕당이라 이름하였다.
관덕정이 천주교와 깊은 연관을 맺기 시작한 것은 바로 연병장 가장자리인 아미산 등마루, 속칭 ‘관덕정 말랭이’로 일컬어지는 현재의 적십자 병원 남쪽 언덕배기 처형장에서부터이다. 이곳은 원래 국사범을 공개 처형하는 곳이었으며, 1864년 3월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崔濟愚, 호 水雲, 1824~1864)가 처형된 곳이다.
천주교인들은 박해 때마다 이곳에서 온갖 참혹한 방법으로 처형되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관덕정에서 순교한 이들은 을해박해 때 7명, 정해년에 잡혀 사형 언도를 받고도 집행이 안 되어 감옥에 갇혀 있다가 기해년에 참수 치명한 3명, 병인박해 때 4명 등 14명이며, 감옥에서 옥사한 순교자는 을해박해 때 26명, 정해박해 때 3명, 병인박해 때 1명 등 30명이다. 그리하여 대구 감영 옥과 관덕정에서 순교한 신자 수는 44명에 이른다.
이곳 순교자들 가운데서 1867년 군문효수형을 받은 이윤일(일명 제헌, 1823~1867, 요한)은 훗날 성인품에 올랐다. 지하 경당에는 이윤일 요한 성인의 유해를 모신 중앙제대와 감실 십자고상, 그리고 이윤일 요한 성인의 초상화가 있다.
지하 경당 안 오른쪽에 위치한 성인 유해실에 모신 제대는 1902년 대구 본당(현 계산 주교좌 본당) 신자들이 고딕식 성당을 짓고 봉헌한 첫 제대인데, 이 제대는 관덕정으로 옮겨졌다. 이 제대에는 성인과 복자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대부분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 의해 우리나라에 모셔진 유해들이다.
지하 경당에 있는 성인 유해실 제대에는 18명 성인의 유해와 18명 복자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18명 성인 유해는 우리나라 첫 사제인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신부, 그리스도교를 탄압하다가 다마스커스에서 회심하여 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도 바오로 등이며, 18명 복자의 유해로는 동남아에서 순교한 파리 외방전교회원 복자들이다.
대구 관덕정 순교 기념관은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제2 주보인 이윤일 요한 성인과 18명 성인의 유해, 18명 복자의 유해까지 총 37명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거룩한 순교 성지다.
◆ 순교 기념관
1991년 1월 20일 관덕정 경당 축복 및 이윤일 성인 유해 이전 봉안식이 있었고, 5월 31일 개관을 하였다. 하느님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으시다가 마침내 순교로써 하느님을 증거하신 이윤일(요한) 성인을 찬미하고 기념하고자 건립된 것이 대구 관덕정 순교 기념관이다.
이 기념관 건립사업은 대구대교구에서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맞이하여 성지개발의 첫 사업으로 시행된 것이다. 건물 모양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단청 무늬 색체로 된 누각이며 건물벽은 근세 우리나라에서 외국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하여 축조된 보루와 같이 네모로 된 구멍이 있고 건물 바깥벽에는 순교자를 상징하는 돋음새김이 있다.
기념관 내부에는 지하층에 경당이 있고 경당을 향하여 오른편에 이윤일(요한) 성인의 유해를 모신 돌제대와 영정이 모셔진 유해실이 있다. 경당 맞은편엔 제1전시장 있는데, 여기엔 대구대교구의 발전모습을 담은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지상 1층 로비에 있는 스테인드글래스의 그림은 순교자를 상징하며 바닥에는 조선조 말기 대원군의 쇄국정치를 입증하는 척화비와 조선조 형구인 황새바위가 놓여 있다.
지상 2층에는 제2전시장이 있다. 지상 3층은 제3전시장과 누각이 있다. 이 전시장에는 이윤일(요한) 성인의 일대기와 대구대교구 발전사를 스테인드 글래스에 잘 묘사하고 있으며 드망즈 주교와 서정길 주교의 유품이 있고, 한역서학서를 비롯하여 각종 공과책이 있다.
▒ 죽음 씻어 따스히 나누면서 (대구 관덕정에서) <김영수> ▒
생생히 죽어 생생히 산다는 것
나는 사랑의 그 비밀 들여다 보며
멀리 해 뜰 때의 음향 듣습니다
나는 삶도 죽음도 아닌 부끄럼으로
그늘 부드러운 성당에 들러
멀리에서 굽어돌고 있는
푸른 약속 바라봅니다
추울수록 뜨거워지는 겨울 뿌리들의 침묵
가난한 사람끼리 만나
죽음 씻어 따스히 나누면서
맑은 눈물 글썽이는 일은
진정 삶에 이르는 향연입니다
오직 죽는 소망으로 창을 닦으면
나의 여윈 초원에도
밤 내내 이슬들 흥건히 모여들어
목숨에 닿는 빛으로
사랑 푸르게 차오르는 것입니까
■ 순교자
◆ 성 이윤일 요한 (1823∼1867)
‘제헌’으로도 불렸던 이윤일은 충청도 홍주(洪州) 출신의 태중 교우로, 경상도 문경의 여우목골에 살며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의 여파가 경상도에 이르자 그 해 11월 가족, 마을 교우 3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문경 관아에서 사흘 동안 혹형과 고문을 받은 뒤 배교하지 않은 교우들과 함께 상주로 이송되었고, 상주에서 한 달에 세 번씩 석 달 동안 혹형과 고문을 받고 나서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대구 감영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여유롭고 기쁜 마음으로 기도하며 지내다가, 1867년 1월 21일 대구 남문 밖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아 4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성 이윤일 요한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이윤일 요한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우들이 어떠한 어려움도 잘 이겨내도록 빌어 주소서.
◆ 고성대 베드로 ( ? ∼1816년) <하느님의 종 125위>
고성대 베드로는 충청도 덕산의 별암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부모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성격이 매우 포악하여 사람들이 가까이하기를 꺼렸지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뒤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이후 베드로는 고산 저구리(현 전북 완주군 운주면 적오리)로 이주하여 생활하다가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목숨을 보전하려는 유혹에 넘어가 석방되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온 고성대 베드로는 즉시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 1815년 베드로와 요셉 형제는 교우들과 함께 부활 대축일을 지내다가 밀고자를 앞세운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다. 17개월이 넘게 괴로운 옥중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에 아우와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 고성운 요셉 ( ? ∼1816년) <하느님의 종 125위>
고성운 요셉은 충청도 덕산의 별암(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는 본래 성격이 착하며 신앙생활도 아주 열심히 하였다.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고, 형제끼리 언제나 합심하여 성서를 읽고 다른 사람들을 권면하는 데 열심이었다.
그는 형과 함께 경상도의 청송 노래산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1815년 2월 22일경 교우들과 함께 부활 대축일을 지내다가 경주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을해박해의 시작이었다. 경주로 압송되었다가 그들 형제와 함께 배교를 거부하는 다른 교우들을 모두 감사가 주재하는 대구로 이송하였다. 17개월이 넘게 괴로운 옥중 생활을 하고,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에 형과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 구성열 바르바라 ( ? ∼1816년) <하느님의 종 125위>
충청도 홍주의 한내장벌(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대천리) 출신인 구성열 바르바라는 본래 성격이 온화하고 덕행이 남달라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첫 남편을 잃고 서석봉(안드레아)에게 개가하였는데,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녀를 ‘서 과부’라고 불렀다. 그 후 바르바라 부부는 사위인 최봉한(프란치스코) 부부와 함께 청송의 노래산(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동)을 찾아가 그곳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1815년의 부활 대축일에 노래산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아 배교할 마음이 있어 보이자 그녀의 사위인 프란치스코의 권면 덕택에 바르바라는 다시 신앙을 다잡았다. 17개월이 넘게 옥중 생활을 하였고, 그 동안 남편과 사위는 형벌로 인해 옥사하고 말았다.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다른 동료들과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약 40세였다.
◆ 김사건 안드레아 (1794∼1839년) <하느님의 종 125위>
충청도 서산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김사건 안드레아는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교리를 배웠다. 1815년에 유배형을 받은 김창귀(타대오)는 그의 아버지였고, 그 해 강원도 원주에서 옥사한 김강이(시몬)는 그의 큰아버지였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상주로 끌려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그는 다리뼈가 허옇게 드러났지만, 기쁜 마음으로 이를 참아냈다. 대구로 압송되어 12년 동안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만 하였다.
당시까지 대구 옥에 갇혀 있던 신자는 김사건 안드레아와 박사의(안드레아), 이재행(안드레아) 등이었다. 그들은 임금이 사형 집행을 윤허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매우 기뻐하면서 자신들이 쓰던 물건과 옷을 다른 죄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안드레아는 마침내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 박사의 안드레아 (1792∼1839년) <하느님의 종 125위>
박사의 안드레아는 1827년 대구에서 순교한 박경화(바오로)의 아들로, 충청도 홍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이미 그의 아버지는 천주교에 입교해 있었다. 가족들과 충청도 단양의 가마기로 이주하여 살다가 1827년의 정해박해 소식을 듣고 경상도 상주의 멍에목으로 이주하였다. 교우들과 함께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내다가 체포되어 대구 감영에서 형벌을 받아 신앙의 힘으로 참아냈다.
반면에 노령인 아버지를 보살펴드릴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고 요청하자 관장은 효성에 감동하여 그들 부자를 함께 신문하였고, 옥에서도 함께 있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12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8세였다.
◆ 이재행 안드레아 (1776∼1839년) <하느님의 종 125위>
이재행 안드레아는, 충청도 홍주 출신으로 20세가 넘어서야 천주교 교리를 듣고 입교하였다. 본래 성격이 꼿꼿하고 관대하여 존경을 받았던 그는 신앙을 받아들이자마자 성실하게 교리를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고향에서는 자유롭게 신앙 생활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산골로 은거해 살았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안드레아는 가족들을 모아놓고 주님의 뜻에 따라 순교할 수 있도록 준비를 시키면서 격려하였다.
경상도 순흥의 곰직이(현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에서 살고 있을 때 체포되어 안동으로 끌려가 신앙을 증거하였다. 대구로 이송되었다. 당시까지 대구 옥에 갇혀 있던 신자는 이재행(안드레아)과 김사건(안드레아), 박사의(안드레아) 등이었다.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안드레아는 동료들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때 이를 바라보는 죄수와 옥졸들이 모두 슬픔을 감추지 못하였는데, 이는 오랫동안 그들이 보여준 모범 때문이었다. 순교 당시 이재행 안드레아의 나이는 64세였다.
◆ 김화춘 야고보 ( ? ∼1816년) <하느님의 종 125위>
김화춘 야고보는 충청도 청양의 수단이(현 충남 청양군 사양면 신왕리)에서 태어나 보령의 청라동으로 이주해 살았다. 1839년 전주에서 순교한 김대권(베드로)은 그의 형이다. 본성이 온순하고 참을성이 있던 그는 기도 생활과 성서 읽기에 부지런하여 교우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경상도 청송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나 청송 일대의 신자들을 수색할 때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고, 고성대(베드로) 형제, 구성열(바르바라) 등과 함께 대구로 압송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야고보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동료들과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이었다.
◆ 이시임 안나 (1782∼1816년) <하느님의 종 125위>
충청도 덕산의 높은 뫼(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몽곡리)에 있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이시임 안나는, 나이가 들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 고향을 떠나 가난한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1827년의 정해박해 때 체포되어 8년 뒤 전주 옥에서 사망한 이성지(요한)는 그녀의 오빠였다. 안나는 재색을 겸비한 처녀로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동정녀 공동체로 가서 그들과 함께 살기로 작정하였다.
그 공동체까지 데려다 주기로 약속한 뱃사공은 강제로 그녀와 혼인을 하였고, 둘 사이에서 종악이가 태어나기에 이르렀다. 몇 해 안되어 남편이 사망하였고, 어린 종악이를 데리고 진보 머루산(현 경북 영양군 석포면 포산동) 교우촌으로 가서 살았다. 1815년에 을해박해 때 체포되어 안동에서 대구로 이송되어 형벌을 받고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어야만 하였다. 그 동안 그녀는 아들 종악이가 자신의 품에서 죽는 괴로움 속에서도, 신앙심을 잃지 않았다. 약 1년 6개월이 지난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35세였다.
◆ 김종한 안드레아 ( ? ∼1816년) <하느님의 종 125위>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는 충청도 면천의 솔뫼에서 태어났다. 족보에는 그의 이름이 ‘한현’(漢鉉)으로 나온다. 1814년에 순교한 김진후(비오)의 아들로, 성 김 데레사의 아버지가 되며, 성 김대건 신부의 작은 할아버지가 된다. 맏형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의 부친 김진후가 1814년에 해미에서 옥사로 순교하고 그는 가족과 함께 홍주를 거쳐 경상도 영양의 우련밭(현 경북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으로 가서 오랫동안 숨어 살았다.
1815년의 을해박해가 일어난 뒤, 영양에서 체포되어 안동으로 끌려가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대구로 이송되었다. 그가 대구 감영 앞에 이르렀을 때, 마침 김윤덕(아가타 막달레나)이 일시 마음이 약해져 석방되어 나갈 때 그녀를 열성적으로 권면하였고, 이에 감화되어 그녀는 다시 관장 앞으로 나아가 신앙을 증거하게 되었다. 그가 옥에 갇혀 있은 지 1년 6개월 정도가 지난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이었다. 순교 후 그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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