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은 눈이 먼 사람을 모두 시각장애자로 부르지만 한 때는 장님이라거나 맹인(盲人)이라거나 봉사니 소경이니 하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 소경(少卿)과 봉사(奉事)는 각기 고려와 이조 시대의 관직명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장님 중 점복하고 독경하는 일반 판수(判數)도 있다.
어떤 관계로 이들이 장님을 뜻하는지 내용을 알아보자
● 소경. 봉사 관직과 맹인 명칭
*‘사(寺)’는 관청을 나타낼 때는 ‘시‘로 읽는다.
○ 명통시(明通寺)
▲ 명통시(明通寺)란 고려 때부터 장님들을 한데 모아 독경(讀經- 경문을 읽음), 축수(祝壽- 오래살기를 빔), 점복(占卜- 운수. 길흉을 알고자 점을 침)을 가르치고, 점복 등 유사시 국가적 행사에 동원하기도 했으며, 임금이 능(陵- 임금과 왕후의 묘)을 참배하는 행사 때 열을 지어 배웅시키는 일을 맡게 하는 관서를 말한다.
여기에 주어진 명통시의 종4품 관직이 소경(少卿)으로 장님이 많아 장님의 보통명사로 전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 그리고 봉사(奉事)는 조선왕조 때 군기시(軍器寺), 내의원(內醫院) 관서인 종 8품의 벼슬로 이 역시 명통시의 장님에게 준 벼슬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며, 벼슬이 있기에 '장님' 하는 높인 말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 한국인의 장애인 호칭 속에 나타난 장애인관은 차별적이고, 멸시적이지만 시각 장애인에 대한 장님만은 예외였다.
○ 관현맹인(官鉉盲人)
▲관현맹인(官鉉盲人)이란 궁중의 내연(內宴- ≒내진연內進宴- 조선 시대에, 내빈內賓을 모아서 베풀던 궁중 잔치)에서 관현합주나 가무반주를 하던 맹인 음악인을 가리킨다.
내연에는 남자 악공을 쓸 수 없고 창기들이 관현합주를 하기 힘들므로 궁중 행사를 위해서 관현맹인을 두었다.
▲세종 때는 18명이었고, 그 후는 4~5명까지 두는 등 그 수는 다양했다. 이들은 장악원으로부터 1년에 4차례 이조에 추천서를 올려 사령서를 받아 임용되었다. 세종 이후 계속되던 관현맹인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15년간 정지되었다가 효종 2년에 부활되어 이조 말까지 계속되었다.
▲경국대전에는 관현맹인은 재직기간 400일이면 품계를 높이되 천인이면 종 6품에 그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이 사용한 악기는 거문고, 당비파, 북, 장고, 해금, 대평소 한 쌍의 피리 등이 있다.
○ 소경(少卿)
조선 초기 태종 때 봉상시(奉常寺)에는 소경(少卿) 벼슬이 정4품 관직이고. 전중시(殿中寺). 사복시(司僕寺). 사농시(司農寺). 내부시(內府寺) 등은 종4품 관직이었다. 고려 때는 태상시(太尙寺), 전중성(殿中省), 위위시(衛尉寺), 대복시(大僕寺) 등에 두었던 종4품 벼슬이다. (이희승, 1986 ).
여말(麗末)에는 맹인들이 국가로부터 검교직(檢校職)을 받았는데, 그 중 하나가 강안전시위호군으로 종4품 '소경'에 해당하고, 태종 13년에 맹인 지화가 한성소윤이란 검교직을 받았는데, 이 소윤 역시 종4품 '소경'에 해당된다.
▲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많은 맹인들이 소경 벼슬을 받았으므로 주위 사람들이 이들에게 '소경님' 하고 불렀으므로, 다른 사람들도 맹인을 소경님하고 부르다가 맹인의 호칭으로 전칭되었을 것이다.
대한 맹인 역리학회 지중현씨는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조선시대 어느 임금이 맹인과 여러 대신들이 앉아 있는 곳에서 왕이 '경(卿)은' 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면
다른 신하들은 전하의 눈길이 어느 신하에게 향하고 있는가를 알고 '예, 전하' 하고 대답하는데 맹인은 그것을 몰라 당황하므로 왕이 맹인에게는 '소경'(小卿)하고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 그러나 일반적으로 맹인들이 벼슬을 함으로써 소경 벼슬을 하게 되었고, 이에서 맹인의 호칭으로 유래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방에 따라 방언으로 '세겡이, 쇠게이, 쇠경, 쇠공, 쇠굉'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최학근, 1978).
○ 봉사(奉仕)
봉사란 우리나라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맹인을 '봉사'라고 하고, 경기도, 황해도, 평남에서는 맹인을 '참봉(參奉)'이라고도 한다. 봉사나 참봉의 명칭은 모두 조선시대 종8품과 종9품의 관직명이다.
▲ '봉사'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관상감의 음양과에 속하여 음양, 길흉, 점복의 명과학(命課學)을 담당하는 맹인으로, 중인의 자손 중에서 초시에 4명, 복시에 2명을 취재(取才)하는데,
1등 합격자는 종8품 봉사,
2등 합격자는 정9품 부봉사, 훈도,
3등 합격자는 종9품 참봉 벼슬을 주었다.
이러한 맹인들을 '봉사님'이라고 부르던 것이 맹인의 일반적 명칭으로 변화된 것이다.
▲ 조선 초기에는 맹인들이 점복업(占卜業)을 할 경우 천인의 신분을 갖게 되었다.
비록 음양학(陰陽學- 천문天文, 역수曆數, 풍수지리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 또는 명과학(命課學- 운명 ·길흉 등에 관한 학문)이 관학(官學)이기는 하였으나 잡학(雜學)이었기 때문에 양반들이 받는 벼슬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잡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별도의 벼슬을 주었는데 그 중 종5품 관직명이 봉사교위(奉仕校尉)였다.
▲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에는 양반가의 맹인들이 점복업에 진출하면서 양반과 천인 출신의 맹인이 구별되어 벼슬을 받았다. 봉사가 맹인의 일반적 호칭이 된 이후 효녀 심청과 심 봉사의 이야기를 통하여 봉사란 명칭을 널리 보급했고, 그로 인하여 봉사란 명칭이 저속한 명칭으로 바뀌게 되었다.
▲ 그 외에도 외관상 눈이 멀쩡하면서도 보지 못하는 봉사를 당달봉사(청맹과니와 같음), 여자 봉사를 암봉사라고 한다(손진태 , 1978).
(글쓴이- 임안수)
○ 판수(判數)
판수(判數)란 맹인 점복자(占卜者)를 일컫는 말로 이에 대하여는 여러 학자들의 주장이 서로 다르다.
▲ 우리나라에서 점을 치는 무(巫)를 무당, 박수, 판수, 일관, 지관으로 분류하고, 이 중에서 무당과 박수는 샤만(Shaman)과 직결되지만, 판수와 일관, 지관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발생한 것이다.
▲ Hulbert(1903)는 "판수를 판단하다의 '판(判)'과 운수의 '수(數)'가 합성된 것으로, 점복자(fortunetell
er)와 유사한 말이다". 라고 했다.
▲ 이에 대하여 추엽강(秋葉降. 1950)씨는 판수란 후세에 합리적인 한자화(漢字化)에 지나지 않으며, 본래 박수의 와전이라고 주장하였다.
▲ 판수라는 조선어는 우랄알타이 민족들이 남무(男巫)의 호칭으로 널리 쓰이고 있는 여진어의 bahsi,
만주어의 faksi, Goldi어의 Paksi, Orochen어의 paktjine, Tungus어의 baksi, 몽고어의 baksi 혹은 bolsi 그리고 Turkic어의 baksi 등과 같은 계열이라고 생각한다.
▲ 우리나라에서는 박수(拍手)와 판수(判數)는 그 형태나 기능이 분명히 구별되고 있다. 즉 판수는 점복, 독경하는 맹인을 가리키는데 반하여, 박수는 강신새신(降神賽神- 신이 내리도록하고 굿이나 푸닥거리를 하는 일)하는 남무(男巫- 남자무당)를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충청도 지역에서는 독경자(讀經者- 경문을 읽거나 외우는 사람)까지도 박수라 부르며, 특히 충청북도 음성 지방에서는 맹인이 아닌 독경자를 '박수'라 하고, 맹인인 독경자를 '반수'라 하여 구별하고 있다. (김영진, 1983, 재인용).
○ 장님
장님은 맹인의 명칭으로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점친다는 뜻의 장님이라고 하였다.
▲ 조선 중기 이후 맹인들은 맹청을 설립하고 단체 활동을 했다. 이 맹청에서 맹인들 사이에 여러 가지 명칭이 사용되었다. 그 중형으로 보기에는 연령이 높고, 아저씨로 보기에는 연령이 낮은 손위 맹인을 '긴 장(長)'에 높임말인 '님' 을 써서 '장님'이라 불렀다 한다. 따라서 장님은 맹청 내에서 존칭으로 사용되었다.(대한 맹인 역리 학회 안성균 이사).
그러나 놀림 말, 저주하는 말 또는 무당의 장님 타령으로 인해 경멸하는 호칭으로 전칭되었다.
▲ 그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50~60년 전 만해도 서울, 경기지방에서 맹인이 지나가면 동네 아이들이 놀다가 모여들어 맹인을 보고
'장님, 장님' 하면서 놀렸으므로, 장님이란 명칭은 오랫동안 놀림말로 인식되었다.
▲ 장님과 관계된 부정적 영향을 주는 말로는 '장님 보면 재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에는 맹인들이 명과학(命課學)을 전담하면서 합법적으로 점복과 독경을 업으로 삼았다. 그러나 무당은 교육을 받지 않고 푸닥거리로 생업을 유지 해왔는데 치병과 지성을 드리는 것이 맹인 점복업자와 그 기능이 같아 항상 경쟁 관계에 있었다. 나라에서 무당들의 영업 행위를 억제했기 때문에 무당들은 성내에 살지 못하고 성 밖에 나가 살았다. 무당들은 정월 초가 되면 서울 성내로 들어와 새해 신수를 보고, 고사를 지내도록 하기 위하여 아는 집을 찾아가는데, 그때 맹인이 그 집에서 나오는 것을 보면 맹인에게 이미 선수를 뺏겼으므로 돈을 벌 수 없게 된 것을 알고, '장님 보면 재수 없다'고 하였고 땅에 사금팔이로 금을 긋고 침을 탁 뱉곤 했다고 한다.
(대한 맹인 역리 학회 지중현씨와의 면담).
'장님 보면 재수 없다.' 는 말이 퍼져나가 사람들이 맹인을 보면 재수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고, 특히 '아침에 장님을 보면 재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당주(堂主)
'당주'는 나라의 기도를 맡아보던 소경 무당을 말한다.(이희승, 1986). 당주는 맹인의 벼슬 명칭으로 그에 관한 기록은 여러 문헌에 남아 전한다. 한중록에는 맹인 복자 김명기 당주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고(김인걸, 1979), 대원군과 민비의 암투 사이에 희생된 맹인 이유인 당주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김영곤,1983).
글 - (임안수)
○ 조선왕조실록 태종편 소경(少卿)
△봉상시(奉常寺)는 종묘(宗廟)· 제향(祭享) 등의 일을 관장하는데, 판사(判事) 2명 정3품이고, 경(卿) 2명 종3품이고, 소경(少卿) 2명 정4품이고, 승(丞) 1명 종5품이고, 박사(博士) 2명 정6품이고, 협률랑(協律郞) 2명 정7품이고, 대축(大祝) 2명 정7품이고, 녹사(錄事) 2명 정9품이고, 영사(令事) 2명 9품인데, 거관(去官- 임기가 차서 그 벼슬자리를 떠남)하게 된다.
△전중시(殿中寺)는 친속(親屬- 임금 친족親族) 보첩(譜牒)과 전내(殿內- 전각이나 궁전 안)의 급사(給事) 등의 일을 관장하는데, 판사(判事) 2명 정3품이고, 경(卿) 2명 종3품이고, 소경(少卿) 2명 종4품이고, 승(丞) 1명 종5품이고, 직장(直長) 2명 종7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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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사(給事)- 고려·조선 초기에 둔, 내시부의 정9품 벼슬. 또는 그 벼슬아치. 조선 전기에, 임금의 시중을 맡아보던 서반 잡직의 하나. 품계는 정9품이다.
△사복시(司僕寺)는 여마(輿馬)·구목(廐牧) 등의 일을 관장하는데, 판사(判事) 2명 정3품이고, 경(卿) 2명 종3품이고, 소경(少卿) 2명 종4품이고, 주부(注簿) 1명, 겸주부(兼注簿) 1명 종6품이고, 직장(直長) 2명 종7품이다.
△사농시(司農寺)는 적전(籍田)의 경작(耕作)과 전곡(錢穀) 및 사제(祠祭)의 주례(酒醴)와 희생(犧牲)을 진설(陳設)하는 등의 일을 관장하는데, 판사(判事) 2명 정3품이고, 경(卿) 2명 종3품이고, 소경(少卿) 2명 종4품이고, 승(丞) 1명, 겸승(兼丞) 1명 종5품이고, 주부(注簿) 2명, 겸주부(兼注簿) 1명 종6품이고, 직장(直長) 2명 종7품이다.
△내부시(內府寺)는 부고(府庫)에 재화(財貨)를 저장하고, 복식(服飾)을 출납(出納)하고, 등촉(燈燭)을 포진(鋪陳)시키는 등의 일을 관장하는데, 판사(判事) 2명 정3품이고, 경(卿) 2명 종3품이고, 소경(少卿) 2명 종4품이고, 주부(注簿) 1명, 겸주부(兼注簿) 1명 종6품이고, 직장(直長) 2명 종7품이다.
△예빈시(禮賓寺)는 빈객(賓客)과 연향(宴享- 국빈을 대접하는 잔치) 등의 일을 관장하는데, 판사(判事) 2명 정3품이고, 경(卿) 2명 종3품이고, 소경(少卿) 2명 종4품이고, 승(丞) 1명, 겸승(兼丞) 1명 종5품이고, 주부(注簿) 2명, 겸주부(兼注簿) 1명 종6품이고, 직장(直長) 2명 종7품이고, 녹사(錄事) 2명 정8품이다.
[출처]
소경. 봉사 관직과 맹인 명칭 (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