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만회정(晩悔亭)
울산시 중구 태화동 665-3
만회정은 중구 태화동 오산(鰲山) 일원에 바닥 면적 31㎡ 규모로 2011년 8월 착공, 그해 12월에 완공됐다. 만회정은 당초 정면 3칸, 측면 2칸 전면툇마루, 중당협실형, 팔작지붕 등으로 고증됐으나 고증과 동일한 규모의 형식이지만 관리와 편의를 위해 통 칸으로 건립됐다.
만회정 현판은 박계숙(朴繼叔)·박취문(朴就文) 부자가 작성한 부북일기(赴北日記·울산시 유형문화재 제14호)에서 집자(集子)해 작성됐다. 만회정은 박취문이 낙향 후 1600년대 말에 내오산(內鰲山)에 건립한 정자로, 1800년대까지 이어지다 조선말기에 소실된 것으로 전해진다.
울산 최초 읍지인 학성지(鶴城誌, 1749)는 "내오산은 태화진의 서쪽 수리(數里) 쯤에 있다. 작은 언덕이 강에 닿아 있고 경치가 그윽하며 묘하다. 만회정이 있는데 부사 박취문(朴就文)이 지은 것이다. 정자의 앞에는 가늘고 긴 대숲이 몇 무(畝)가 있고 아래에는 낚시터가 있으며, 관어대(觀魚臺)라는 3글자를 새겨 놓았다"고 만회정의 조성 연혁을 전한다.
만회정
그 후 서장성(徐章聲)의 소유가 되었으며, 서장성은 정자 위쪽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만회정 아래 바위에 새겨진 서장성 어른의 시 한수로 보다 명확하게 전해지고 있다. 시는 뒤에서 감상 해본다.
부북일기(赴北日記)
: 울산시 유형문화재 제14호
부북일기는 울산 출신 박계숙, 박취문 부자가 약 40년의 시차를 두고 각기 변방지역에 1년간 부방하였을 때를 당하여 써놓은 일기이다. 박계숙의 일기는 선조 38년(1605) 10월 15일 울산에서 출발한 때부터 1년간 함경도 회령(會寧) 보을하진(甫乙下鎭)에서의 부방생활을 마치고 집에 도착한 선조 40년 1월 1일까지의 일기이다. 그리고 박취문의 일기는 인조 22년(1644) 12월 9일 울산에서 출발한 때부터 1년간 함경도 회령부(會寧府)와 경성(鏡城)의 병영(兵營)에서 부방생활을 마치고 집에 도착한 인조 24년 4월 4일까지의 일기이다.
☞부방(赴防) : 조선시대의 국경인 압록강과 두만강 연변지역의 진과 보에 파견되어 방위업무를 수행하는 것
부북일기(소장 : 울산박물관)
박계숙과 취문 부자의 이력은 다음과 같다.
본관은 울산으로 라말여초 울산지역의 유력한 토호였던 박윤웅(朴允雄)의 후예였다. 그 후 별 뚜렷한 현조가 없이 내려오던 그의 가문이 향인의 주목을 받는 것은 아버지 홍춘(弘春)에 이르러서였다고 보여 지는데, 그는 무과에 급제한 후 임진왜란 때는 언양 기장 현감으로 있으면서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책록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박계숙도 아버지와 더불어 선무원종공신에 책록 되었다. 이 사실은 그의 가문이 울산지역에서 유력 가문으로 발 돋음하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박계숙(朴繼叔,1569년∼1646년)이 무과에 급제한 것은 선조 27년으로 임진왜란 중이던 26세 때였고, 일당백장사에 선발되어 부방길에 오른 것은 10여년 후인 선조 38년 37세 때의 일이었다. 그 후 그는 선전관 훈련원 부정(宣傳官 訓練院 副正)의 관직을 거쳤다.
박취문(朴就文,1617∼1690)은 인조 22년 그의 나이 28세에 무과에 급제한 후, 그 해 겨울 신출신(新出身) 자격으로 부방하였다. 그 후 그는 선전관을 거쳐 경상좌도 병영과 수영의 우후(虞侯), 훈련원 부정을 지냈으며, 지방관으로 인동 갑산 김해 등지의 수령도 역임하였다. 결국 이들 가계는 홍춘, 계숙, 취문 3대에 걸쳐 내리 무과에 급제함으로써 무반으로서의 기반을 굳혔다고 하겠다.
부북일기의 사료적인 가치로는, 먼저 경상도 울산에서 함경도 회령에 이르는 역정(歷程)이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교통 실태 등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변경지역의 부방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의 일기라는 점에서 변방지역의 군무(軍務) 실상과 변방에서의 출신군관들의 생활상을 잘 전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무신들이 남긴 자료가 많지 않은 상황임을 감안할 때 출신 내지 무관들의 생활상을 살펴보는 데 도움을 준다는 점이다. 부북일기가 궁술사에서 중요한 것은 일기문에 있는 당시 군관들의 활쏘기 실력에 관한 기록 때문이다. 당시의 기록을 보자면 박취문은 하루 30순을 쏘아서 150발 모두를 맞추었다는 엄청난 궁술 실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또한 대부분의 군관들도 50발중 40발 이상의 명중률을 갖추고 있었다.
박계숙으 함경도 가는길
자라와 관어대(觀魚臺)
정자 아래에는 연대가 불분명한 자라 그림이 있고, 그 앞에 관어대(觀魚臺)라는 글자가 바위에 암각되어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자라 그림 외에도 반구대 암각화와 같은 연대로 추정되는 용, 물고기 그림 등이 바위면마다 전했으나 1980년대 유실됐다고 한다.
관어대 글씨와 자라 그림
아래에서 본 만회정
서장성(徐章聲, 1880∼1952)의 시
오산 명정천가 돌에는 서장성(徐章聲)이라고 큼직하게 쓴 글자 좌우에 작은 글씨로 '生長禾末亭 老終鰲山 淸江十里 綠竹千竿 佳城一畝 精舍數間 歲月雖遠 口碑尙傳)'이라는 글자가 함께 새겨져있었다. 새겨진 글은 본인이 생전에 새겼을 가능성보다 사후에 누군가 시를 지어 새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재 정자 아래 시를 새겼다는 바위는 찾을 수 없다.
生長末亭(생장말정)
老終鰲山(노종오산)
淸江十里(청강십리)
綠竹千竿(녹죽천간)
佳城一畝(가성일무)
精舍數間(정사수간)
歲月雖遠(세월수원)
口碑尙傳(구비상전)
말정(禾末亭)에서 나고 자랐으며
늙어 오산에서 생을 마감했네
맑은 강은 십리로 흐르고
푸른 대나무는 빽빽하네
산소 가까운 볼록한 이랑에는 몇 칸으로된 정사가 있네
세월이 비록 멀어졌다해도 입으로 항상 전해지리라
[출처] 울산 태화강 국가정원 십리대숲 만회정 이야기|작성자 낭만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