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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행 4 - 소록도
2017년11월에 소록도(Sorokdo, 小鹿島)에 갔습니다. 소록도는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에
속하는 섬입니다. 섬의 이름은 그 형상이 작은(小) 사슴(鹿)과 같다고 하여 붙여졌습니다.
고흥 반도 끝의 녹동항에서 배로 불과 5분 거리에 있습니다. 2009년 3월 3일에는 소록대교가
개통하여 육로로도 오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록도 건너기전 다리에다 차를 세워놓고
소록도로 들어갔습니다.
한국에 온지 벌써 1년반이 됩니다. 한국 와 느끼는것은 한국사람들이 너무 잘사는데 비해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것을 봅니다. 이곳에 와보니 지금껏 살아온것도 감사한데 소록도에서의
한센병으로 고생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니까 감사함 마음이 솟구치면서 가슴속으로
눈물이 납니다.
소록도는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사는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기원은 구한말 개신교 선교사
들이 1910년 세운 시립나 요양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16년에는 주민들의 민원에 따라
조선총독부가 소록도 자혜병원으로 정식으로 개원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한센병
환자를 강제 분리·수용하기 위한 수용 시설로 사용되면서, 전국의 한센병 환자들이 강제 수용
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한센병 환자들은 4대 원장 스오 마사스에가 환자 처우에 불만을 품은 원생 이춘상
(李春相)에게 살해당할 정도로 가혹한 학대를 당하였으며, 강제 노동과 일본식 생활 강요,
불임 시술 등의 인권 침해와 불편을 당했습니다
소록도 안에는 일제 강점기 한센병 환자들의 수용 생활의 실상을 보여주는 소록도 검시실,
감금실과 한센병 자료관, 소록도 갱생원 신사 등 일제 강점기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역사적건물과 표지판 등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곳에는 수녀로서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았던 고흥 소록도 마리안느와 마가렛 사택이 있습니다.
마리안느 와 마가렛수녀의 헌신적인 봉사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누구나 꺼려하는 한센병
환자를 돌보았다는 그들의 마음은 천사입니다. 이 글을 보면서 마음속에 울고 있었습니다.
옛날 대한극장에서 본 벤허 영화가 생각납니다. 영화에서 벤허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병이
걸려 동굴에서 생활하는곳을 찾아간 벤허. 물론 소설을 영화를 만들었는데 작가 루이스
윌리스는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다 성경 창세기1장을 읽다가 그는 예수님이 구주라는
것을 알고 소설 벤허를 쓰기 시작하여 벤허는 10년 내에 3십 만부가 판매되었습니다.
아랍어와 중국어를 비롯한 수십 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영화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윌레스가 불후의 명작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진리 앞에 무릎을 꿇을 줄 아는 진실한 자세
때문입니다. 참된 지혜자는 진리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검시실은 사망한 한센병 환자를 검시하는 해부실로 사용됐습니다. 현재 건물 안 내부에는
당시 검시대로 사용했던 차가운 흰 돌테이블이 중앙에 놓여 있고, 벽쪽으로는 수납장이
그대로 세워져 있습니다. 사망한 모든 환자들은 자신과 가족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곳에
눕힌 채 꼼짝없이 해부당해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화장 후 납골당에 유골로 안치됐습니다. 이러한 일로 소록도 환자들은 '3번
죽는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첫 번째는 한센병을 얻은 것이요, 두 번째는 죽은 후
해부당하는 것이요, 세 번째는 장례 후 화장당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감금실은 1935년 제정된 조선나예방령 규정에 의해 설치됐으며, 일제강점기 인권탄압의
상징물이 되었다. 소록도 병원은 해방 후에도 한센병 환자의 격리 정책을 고수하여 환자
자녀들이 강제로 소록도 병원 밖의 학교에서 공부해야 하였으나, 이후 한센병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고, 환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개선되면서, 한센병 치료 및 연구, 요양
재생 등을 기본 사업으로 하는 요양 시설로 바뀌었습니다.
또한 1965년 부임한 한국인 원장으로부터 과일 농사, 가축 사육 등의 기술을 익혀 스스로의
힘으로 살 수 있도록 배려를 받았으며, 일부는 소록도 축구단을 결성하여 한센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완화하였습니다.
소록도는 섬의 전체가 국유지로 국립소록도병원으로 지정돼 있으며, 일반 주민은 거주하지
않으며 대부분 섬 주민은 국립 소록도 병원의 직원 및 이미 전염력을 상실한 음성 한센병
환자들입니다. 또한 환자의 대부분은 65세를 넘긴 고령자입니다.
환자들의 주거 구역은 외부인이 접근할 수 없도록 차단되어 있습니다. (병원의 직원 환자가 아닌 사람들이 거주 하는 관사지대(소록리 1번지)와 환자들이 거주하는 병사지대(소록리
2번지)로 나뉘며 병사지대는 외부인의 출입이 제한 되어 있습니다.)
삼림과 해변이 잘 보호되어 있어서 정취가 뛰어나며, 관광지는 아니지만, 걸어다니면서 섬
주변을 둘러볼 수 있게 길이 잘 닦여 있습니다. 우체국 도양읍 소록지소 등 관공서와
천주교회, 개신교회인 소록도교회, 원불교당 등의 종교 시설, 녹동초등학교 소록도분교 등
교육 시설도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당시 거주지 입니다.
2007년 9월 22일부터 5일간 고흥 반도와 소록도를 잇는 1,160m의 연륙교 소록대교가 임시
개통하여, 육상교통로가 열렸다. 2009년 3월 3일에 정식 개통하였습니다.
이곳을 모델로 한 소설로는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이 있습니다. 대략 일제 말에서
1970년대까지의 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당시 전라도 일대에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병원이나 시설을 많이 세웠습니다.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1909년 8월, 대한제국 칙령 제 75호에 의거, "자혜의원"이라는 이름의 요양병원을
전국 각지에 세우는 작업을 했는데, 특별히 한센병 치료를 위한 전문 요양소로 소록도의
자혜의원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세계적인 한센병 치료 트렌드(?)는 나요양소를 마련하여 한센병 환자들을 격리수용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당시 총독부의 위생고문이었던 야마네 마사츠구(山根正次)는 조선의
나환자도 격리 수용시켜야 한다고 건의했고, 당시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이를
수용, 소록도가 나요양소로 선택된 것이었습니다. 1916년 2월 24일, 조선총독부령 제 7호가
공포되어 "소록도 자혜의원"이 설립되어 본격적으로 한센인 병원이 운영되었습니다.
본래 소록도는 그 이름에 걸맞게 매우 아름답고 평화로운 섬이었습니다. 섬 일대에서는
해산물도 잘 잡혔고, 육지와 가까워서 쌀 등의 식량을 구하기도 쉬웠습니다. 어찌 보면,
이런 천혜의 자연조건이 소록도가 한센인들을 위한 섬으로 선택된 조건이 되기도 한
것입니다.
소록도에 병원을 세우는 과정에서 많은 소록도의 주민들은 육지로 쫓겨났고,
이런 이유에다 한센병 환자들을 향한 특유의 공포심이 한데 어우러져 지금도 고흥(특히
녹동항 주변) 주민들과 소록도 주민들의 사이는 그리 좋지 않다고 합니다.
한센병환자 김정균의 시입니다.
시인 이동의 시입니다.
소록도 병원 원장들 중에는 매우 선량한 사람도 있었지만, 매우 악랄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소록도 주민들에게 칭송을 받고, 심지어 "공덕비"까지 세워진 "하나이 젠기치
(花井善吉)" 원장이 전자에 해당하는 경우입니다. 당시 병원에서 강요하던 일본식 생활을
전면 폐지하고 자유로운 면회와 자유로운 교육의 기회 제공, 취미생활 장려와 종교생활(특히
개신교와 천주교 등의 전도활동) 허용 등 많은 혜택을 주려 노력했고, 치료에도 열심을 냈던
사람이 하나이 원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부임한 스오 마사히데(周防正季) 원장은 소록도를 자신의 탐욕을 실천할
도구로 삼아서 수많은 소록도 한센인들을 토목공사에 동원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동상을
만들어 매달 정기적인 참배를 강요하는 짓까지 벌였습니다. 결국 스오 원장은 살해되었고,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일제의 항복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한센인들의 고난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해방 직후, 병원 운영문제의
주도권을 두고 병원생(=한센인)들과 직원 사이의 갈등이 발생한 것입니다. 당시 병원에서는
운영권에 대한 투표를 실시했고, 운영권을 노렸던 의사 "석사학"은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당시 한센인 원생의 대표인 이종규에게 "운영권을 장악한 자들이 원생들이 먹을 식량과
의약품 등을 반출하려 한다"는 거짓 정보를 주었고, 결국 직원들과 원생들은 격렬하게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직원들은 실탄사격을, 병원생들은 직원 몇 명을 폭행
치사하는 등 험악한 상황이 벌어졌고, 결국 조선인 직원들은 원생들과의 협상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직원들은 결코 운영권을 한센인들에게 넘겨줄 생각이 없었고,
고흥 치안유지대에 몰래 선을 넣어 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8월 21일 아침, 원생들은 대표자 90명을 선발하여 협상장소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협상 테이블이 아니라 죽창과 총이었습니다. 무장한 직원들과, 이들이
동원한 치안유지대는 이들 90명을 포박하고 사격을 하거나 죽창으로 마구 찔러 이들을
죽여버린 것입니다. 이들 중에서 아직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으나, 직원들은
구덩이를 파고 이들의 시신과 생존자들을 전부 던져버리고 기름을 쏟아붓고 불을 질러
이들을 생화장을 시켜버린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숨진 한센인들은 84명에 이르고, 최근까지도 이 사건의 목격자와 생존자가
소록도 내에 거주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소록도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지금도 소록도에서 벌어진 최악의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2002년 8월 22일 11시
30분, 사건 현장이던 국립소록도병원 치료본관 앞에 이 사건을 기리는 "애한의 추모비"가
건립되어 있습니다. 방문객들은 추모비에 찾아가 묵념이라도 하고 돌아갈수 있는 자유로운
사진촬영이 가능한 장소입니다.
6.25 전쟁 와중에는 공산주의자와 섬 내 기독교인들 사이의 충돌(이라기보다는 북한군의
일방적인 학살)이 이어졌습니다. 섬을 점령한 북한군은 피난가지 않고 남아있던 섬의 10명의
직원과 1명의 목사를 총살했고, 북한군 부역자들은 기독교인들을 인민재판에 회부하여
그러나 기적적으로 미군기가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삐라를 뿌렸고 인민재판을
종용하던 사람은 돈을 가지고 빠져나가다가 돈 때문에 의심받고 그자리에서 총살당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이 삐라가 뿌려진 이후에 김정복 목사가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1960년 7월 1일에 국립 소록도 병원이 정식으로 건립되었고, 조창호 대령이 원장으로
부임했습니다. 조 원장은 당시 섬의 다수세력인 개신교 교회와 충돌을 빚기도 했습니다.
소록도의 7개 부락(리)에는 각 부락민들을 위한 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조 원장은
각 부락의 예배당이 병원 건물이니, 건물을 즉시 반환하고 한 곳에서만 예배하라는 강제
퇴거명령을 내리고 교회의 종탑을 철거하는 등의 강경 대책을 세웠습니다.
소록도에는 개신교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개신교인과 천주교인의 비율이 상당히
높은 편이어서 이러한 명령은 섬 주민들의 신앙과 부딪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1962년,
김두영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병원측과 교회의 갈등은 수습국면에 접어들게 됩니다.
소록도 내의 이러한 소란이 잦아들면서 조창호 원장은 주민들을 위한 원대한 계획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소록도 인근에는 "오마도"라는 무인도가 있는데, 이곳에 간척사업을 벌여서
한센인들이 거주하며 농사를 짓게 하자는 아이디어를 낸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한센인들은 크게 호응했고, 몸이 조금이라도 성한 사람들은 전부 간척지 개간
사업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고흥쪽 주민들에게서 나왔습니다. 고흥 주민들은
"문둥이들과 함께 살 수 없다!"면서 결사반대를 외쳤고, 이러한 간척사업은 곧 난항에
부딪치게 된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 사건은 개척이 90퍼센트 이상 완료된 상황에서 새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공화당
소속 모 의원이 정책을 뒤집어 간척사업의 주체를 전라남도로 돌려버리며 해결되었습니다.
조 원장은 곧 국립의료원 부원장으로 강제 보직이동 조치를 당해 소록도를 떠나게 되었고,
오마도 간척지는 1988년, 일반인들에게 불하하면서 소록도 주민들에게 아픔만 주고 끝나
버립니다. 이 사건을 각색하여 일반에 알린 사람이 바로 소설가 이청준 이고, 이 소설의
이름이 "당신들의 천국"입니다
한센인들을 차별하고 핍박하는 일들은 일제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계속
되었습니다. 2016년 7월,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소록도 한센인들을 향한 끔찍한 일들이
폭로되면서 소록도는 다시 한 번 일반인들의 기억 속에 아픔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소록도 주민들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은 이들이 몇 있습니다. 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부인인 육영수 여사는 이곳 주민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존재. 소록도에 처음으로 방문한
높으신 분들이 바로 육 여사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육영수 여사는 소록도 병원에 방문하여 한센인 환자들을 직접 만나 위로하며 봉사활동을
간단히 하고 떠났다고 하는데, 소외된 곳에 처음으로 온 그녀가 이곳 주민들에게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영향으로 소록도 내 투표소는
호남 지역 중 보수 계열 정당 득표율이 가장 높은 곳입니다.
가왕 조용필 역시 소록도 주민들에게는 특별한 추억을 선사한 사람입니다. 조용필은 2010년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소록도 우촌복지관에서 공연을 가졌습니다. 그 때 조용필은
프로그램 상 꿈, 친구여 등 두 곡만 불렀고,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고, 실제로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 뒤 2011년, 아예 자신의 팀들과 함께 소록도를 다시 찾아 환자들과
병원 직원들을 위하여 무료 공연을 개최했습니다. 이 공연은 더욱 파격적인데, 아예 자신이
프로그램을 짜서 오지 않고 즉석에서 신청곡도 받아 환자들과 어울렸다고 합니다.
당시 강당은 거대한 노래방이 따로 없었다고. 병원 직원의 증언에 따르면 여태껏 이 곳을
찾은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하고 오지 않았지만 조용필은 거의 유일하게
다시 온 사례였다고 합니다. 더욱 감동인 것은, 당시 조용필은 아예 객석 밑으로 내려가
한센인 어르신들과 일일이 악수도 하고 포옹도 하면서 마이크를 넘겨주고 함께 즐겁게
노래했다고 합니다. 역시 가왕의 풍모는 다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또한 특별한 손님입니다. 1984년에 방한한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
에서 가장 소외된 곳이 어디인가?"라고 질문한 후, 소록도에 방문하여 원생들을 위로했고,
그의 방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병원측은 그간 원생들과 일반인들이 따로 사용했던 선창과
배를 하나로 통합하여 이들에 대한 차별대우를 시정했습니다.
당시 교황은 " 마음으로 친애하는 여러분. 머나먼 길을 떠나 한국에 올 채비를 하면서,
이 소록도에 계신 여러분과의 만남을 특별히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서 아름다운
글을 받은 후로는, 더더욱 여러분을 보러 오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과 함께 하고,
여러분을 위로하고, 여러분에게 내 사랑을 전하고 싶어서였습니다." 라는 인사말을 직접
읽어주었습니다.
소록도중앙공원 내 천주교 부지에는 교황의 방안을 기념하는 자그마한 기념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참고로 이 천주교 부지는 과거 1940년대, 소록도의 건물을 짓기 위한 벽돌공장이
있던 자리였습니다. 한센인들의 애환을 신앙의 힘으로 치유하려는 뜻에서 공장을 없애고
작은 연못 위에 성모상을, 그 앞에 자그마한 제대를 만들어서 천주교인들의 야외 미사터를
만든 것.
소록도에서 40년간 헌신적으로 봉사하던 마리안느, 마거렛 두 분 수녀님은 지금도 소록도
원생들에게 큰 감동으로 남아있습니다. 오스트리아에서 오신 두 분은 한센인들을 위해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으나, 더 나이가 들어서 은퇴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소록도 주민들이 성대한 환송식을 준비하려 하자, 이들을 번거롭게 하기 싫다며 편지
한 장을 남긴 채 야반도주를 하듯 소록도를 떠났는데, 얼마 전에 다시 소록도를 방문하여
주민들과 눈물로 인사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마리안느 스퇴거(Marianne Stoeger·83)와 마가렛 피사렉(Margareth
Pissarek·82) 은 각각 1962년과 1966년에 가톨릭 교회의 재속회인 오스트리아 그리스도왕
시녀회 회원으로 처음 소록도 땅을 밟았습니다. 간호사로서 이들은 한센병 환자들 거주지인
소록도에서 구호활동에 매진합니다. 이후 공식적인 파견 기간이 끝난 뒤에도 자원봉사자로
남아, 반세기에 가까운 43년(39년) 동안 조건 없는 사랑으로 한센병 환자들과 그 자녀들을
보살폈습니다.
2005년 11월 23일, 소록도의 집집마다 편지 한 통이 도착합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보낸
마지막 편지였습니다. 죽어서도 소록도에 묻히길 원했던 두 사람은 건강 악화로 예전처럼
일을 할 수 없고, 오히려 소록도에 부담이 될까 염려하여 2005년 11월 편지 한 장만을 남기고
홀연히 섬을 떠났습니다.
두 사람이 소록도를 떠나 고국인 오스트리아로 돌아간 지도 10년이 지난 2016년은 소록도
병원 개원 100주년이 되는 해로 휴먼 다큐 <마리안느와 마가렛>(감독 윤세영·작가 양희·
내래이션 이해인수녀)은 두 사람의 아름다운 삶을 조명하는 의미에서 기획되었습니다.
소록도가 위치해 있는 전라남도 고흥군이 제작·지원하였습니다.
다큐멘터리는 소록도에서 자원봉사자로 40여년 동안간 오직 한센병 환자들을 사랑으로
보살펴 온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소록도 생활과 주변인들의 이야기, 그리고 현재의 생활
모습과 오스트리아 현지 가족들의 인터뷰로 구성됐습니다. 또 인위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아닌 주변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담담하게 두 분의 삶을 조명하는데
초점을 뒀습니다.
특히 이 작품은 소록도의 아름다운 영상미가 더해져 다큐멘터리로써의 품격을 한 단계 더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한센병환자하면 친구 김문국이가 생각납니다. 1970년도에 김문국이가 밀가루 설탕 계란
도매를 하였습니다. 큰 양계장은 그당시 한센병환자들이 운영하였는데 그곳을 거래하는
김문국이가 하루는 나에게 "풍원아 나 음성나환자랑 같이 술을 먹는데 술잔을 돌려먹으니까
그들이 너무 좋아하더라"말했습니다.
다른사람들은 음성나환자랑 같이 술먹는것을 꺼려할뿐만 아니라 술잔을 돌려먹는다는것도
상상조차 하지 않는데 김문국이가 술잔 돌려 술을 먹으니 그들이 감동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과 같이 같은 방에서 자고 왔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김문국이가 삼립빵에 계란을 납품하는데 삼립빵회사에서 결재가 미뤄지니 자금이
차질이 나서 고민하니 양계장하는 음성나환자(한센병환자)들이 그 소리를 듣고 도와주겠다고
하더니 삼립빵 경리부에 여러명이 몰려가서 그냥 의자에 앉아있으니 경리부책임자와
경리부여직원들이 기겁하며 얼른 결재해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과거에는 녹동항에서 배를 타고 이동해야 했으나, 2008년에 소록대교가 건설되어 현재는
27번 국도에 소록대교가 생겨서 자동차를 타고 이동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일반인이 들어
갈 수 있는 곳은 소록도공원과 소록도 해수욕장을 포함한 일부에 불과하며, 섬 안쪽은
양성판정을 받은 한센병 환자들이 거주하고 있으므로 봉사활동의 목적 외에는 일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는 한센병이 아직도 국가의 통제를 받는 전염병으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7번
국도의 종점이 이 섬 남쪽에 있는 거금도로, 거금대교로 소통이 가능합니다. 또, 금호고속
에서 운행하는 광주~소록도 시외직행버스를 이용해서도 갈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장소의 특성상 유적지가 많습니다. 물론, 어디나 다 가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소록도 내의 한센인들이 고령인 점을 감안한다면, 10~15년 뒤 소록도는 "한센인 거주지로서
의 소록도"가 아니라 "역사유적지"로 바뀔 가능성이 높습니다
국립소록도병원 한센병박물관 : 2016년 5월 17일, 소록도 자혜의원 개원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으며, 7월에 정식으로 개관한 박물관으로, 한센병 자체를 다루는 박물관으로는
전세계에서 유일한 곳입니다. 소록도의 역사와 자료들을 상당히 잘 모아둔 곳입니다.
소록도에 방문한다면 반드시 들려보아야 하는 곳. 특히 남도의 찌는 더위와 맞닥뜨릴 때,
딱히 쉴만한 장소가 없는 소록도 내에서는 안식처의 역할도 할 수 있도록 건물이 잘
설계되어 있습니다.
개관시간은 매일 09:30∼16:30까지이며, 매주 월요일과 공휴일은 휴관합니다
한센 의학자의 사진입니다.
독일이 유태인을 시험으로 인체실험을 많이 하여 의약품이 좋은것이 많이 나와서 그당시
의약품으로 양성 한센병을 치료하였다고 합니다.
소록도 자료관 : 과거 일제 강점기에 건립되었던 나환자 요양소와 부속건물들을 보존하고
관련 유물들을 전시한 곳으로, 소록도와 한센인들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곳입니다. 다만, 박물관의 개관으로 이제는 그 위상이 조금씩 줄어들
것으로 보입니다.
양지회 기념관 : 故 육영수 여사가 서거하기 한달 전 1974년 7월 15일 건립한 시설로 1973년
10월에 소록도 성실고등공민학교 학생 16명은 육영수 여사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하였고
이후에도 육 여사는 원생들의 노후생활을 염려하여 그들에게 편안한 안식처를 마련해 주고자
기부금을 희사하였는데, 이 기부금으로 양지회 기념관이 준공되었습니다. 양지회 기념관
앞에는 육 여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원생들의 순수한 모금액으로 공덕비가 세워져있습니다.
소록도중앙공원 : 1934년부터 환자 위안장으로 가꾸었던 산책지를 대유원지로 만들어 2년
뒤인 1936년 12월 1일 준공한 곳입니다. 그냥 방문하면 굉장히 아름다운 곳이지만, 공원
곳곳에 한센인들의 피와 눈물이 서린 곳이기에 가볍게 볼 수만은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에 한하운 시인의 시비(詩碑)가 있는데, 시비가 기록되어 있는 돌은 악명높은 스오 원장
당시 수간호사로 재직하며 한센인들을 혹독하게 괴롭힌 "사토" 간호사가 한센인들을 채찍
으로 때려가며 옮겨놓은 돌입니다.
이곳 어르신들은 이 바위를 "사토한테 맞아죽으나, 옮기다 깔려서, 혹은 지쳐서 죽으나
어쨌든 갖다 놓기는 해야겠으니 '죽어도 놓고 죽자"고 하던 의미에서 "죽어도 놓고" 바위라고
부릅니다. 이런 바위를 "한낯" 시비 "따위"로 썼기에 한센인 어르신들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 이런 역사적인 흔적이 공원 곳곳에 널려있습니다
소록도 해수욕장 : 소록도가 평범한 섬이었다면 상당히 인기를 끌었을 곳으로, 민간인에게
개방된 지 얼마 되지 않는 곳입니다. 진입로로부터 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길이 아름답고,
경치가 뛰어난데다 소나무 숲이 울팡하고 모래가 고와서 이국적인 느낌도 조금 드는
곳입니다. 사람이 많지 않아 썰렁하고 수심이 깊지 않아서 발 담그고 놀기에 좋습니다.
다만, 섬 안에서 숙박은 금지되어 있으므로 저녁 6시 이전에는 반드시 육지로 나올 것.
수탄장(愁嘆場) : 본래는 소록도 병원(당시 이름으로는 소록도 갱생원)의 직원지대와 한센인
들이 생활하는 병사(病舍)지대를 나누는 경계선이었고, 50~60년대에는 철조망이 쳐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자녀들의 감염을 우려하여 병사지대의 부모들은 아이를 키울 수 없었고,
감염되지 않은 가족과 이 선을 경계로 한 달에 한 번만 만나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슬픈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이 "근심(愁)과 탄식(嘆)의 장소(場)"라고 하여 붙인
이름이 수탄장입니다. 표지판 하나만 달랑 세워져 있어서 눈썰미가 좋지 않은 사람들은
그냥 휙 지나갈 수 있는 곳으로, 소록도 입구에 위치해 있습니다.
소록도 자혜의원 구 본관 : 1916년에 세워진 병원의 본관 건물인데, 본래는 T자형 건물
이었습니다.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습니다. 병원 앞에 하나이 원장 송덕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소록도 내부 깊숙이 위치해 있어서 일반인들은 가보기 쉽지 않고, 딱히 볼만한 것도 있지는
않으나 역사적 의의가 있어서 한 번은 가볼만한 곳입니다. 그런데... 진짜 건물 하나만 달랑 있고, 주변이 울창한 소나무로 가려져 있습니다.
순천교도소 소록지소 : 정확한 명칭은 고흥 순천교도소 구 소록도지소 여사동(高興順天矯導
所舊小鹿島支所女舍棟)으로, 소록도 지소에서 여성 한센인 수감자들을 가두던 곳이었습니다.
1935년에 세워졌고, 1998년 재소자 감소로 인해 63년만에 문을 닫았습니다. 일제 강점기
당시 한센인들의 인권유린 현장을 보여주는 유적입니다. 건물의 훼손은 심각한 상태.
2010년 8월 24일 등록문화재 제46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소록도는 작은 사슴모양의 섬이라는 뜻인데, 이름값이라도 하듯 실제로 사슴이 자주
출몰합니다. 소록도 주민의 말에 의하면 집 마당에서 마주친 적도 있다고... 게다가 운이
좋다면 백사슴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섬 안쪽은 일반인 출입제한구역이기 때문에 인프라 개발 등이 전무하다시피 했었습니다.
그래서 현재도 일제강점기 시대 소나무에서 송진을 채취한 흔적과 일본식 가옥, 건물,
신사 등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 동주를 촬영할 때 이곳에서 촬영했습니다.
호남 지역임에도 보수 성향이 강한 지역입니다. 전라도 출신이 아닌 외지에서 온 고령 환자들
이 많이 머물고 있다는 점, 육영수 여사 뿐만 아니라 그녀의 딸인 박근혜도 찾아 육영수의
향수가 남아있는 점 등이 그 원인입니다. 그래서 거주자들이 투표할 수 있는 도양읍 일부
투표소는 민주당계 정당보다 특이하게도 보수 계열 정당 득표율이 훨씬 더 높습니다.
실제로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민주정의당 노태우 표가 김대중의 표보다 훨씬
많이 나왔으며,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때 박근혜가 호남에서
문재인을 득표수로 제친 단 하나 뿐인 투표소가 바로 여기였습니다.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가 호남 전체에서 1위를 한 유일한 투표소가 소록도
병원에 설치된 도양읍 제6투표소였습니다.
당시 소록도는 강제수용소나 바를 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센인들은 이곳을 한국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라 불렸습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흐른 지금 소록도는 한센인
회복자의 천국이 되었습니다
증언에 따르면 일제시대 이곳에는 전국에서 수용된 6400여명의 나환자가 살았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현재는 570여명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가장 젊은 40대 중반이 남아
있으니 격세지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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