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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에 씌운 치아가 아파서 치과의원을 갔다.
내가 지금 다니고 있는 치과는 30 여 년 전부터 줄곧 다니던 곳이다. 그 옛날 보광동 살 때부터, 결혼 이후 인천 연안부두를 거쳐 지금 사는 잠실에 이르기까지 치아가 문제가 생기면 늘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마장동에 위치한 치과의원을 찾아 갔었다.
나는 이미 20 년 전에 왼쪽 어금니 두개가 위, 아래 모두 썩었기에 금이 아닌 은색으로 씌웠다.
이렇게까지 치아가 많이 썩을 이유는 없었는데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짐작되는 게 있기는 하였다. 초등학교 때 소풍갈 때면 늘 빠지지 않게 있었으니 김밥과 사이다이었다. 한때는 친구들 앞에서 호기를 부리느라고 어금니로 사이다 뚜껑을 따지를 않았던가? 주변에서 잘한다 잘한다 하기에 꽤 여러 번을 그리하였고, 언제부터인가는 이상이 느껴지기는 했었다.
손상된 치아를 어느 치과에서는 치료가 덜 된 상태에서 덮어 씌었기에 속으로 더욱 썩어 들어가서 아예 크게 손상되게 되었다. 이를 지금 다니는 치과 선생님이 전혀 남을 탓하시지 않고 몇 번인가를 확인하고 다시 치료하고 니켈로 씌워 주셨다. 물론 가격도 크게 저렴한 것이 분명하였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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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는 치과를 가면 대기 손님으로 늘 붐비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대하면 짜증이 날 법도 한데, 행색이 누추한 분에게도, 어린아이에게도, 젊은 간호사에게도 꼭 존댓말로 대화하며 정성스럽게 치료해주셨다. 할머니들이 일일이 물어보고 하신 말씀 또 하고 해도 전혀 싫은 표정 없이 자세히 설명하며 위로해주시고 말이다.
대부분은 기본 진료비만 받았고, 설령 큰 치료를 요한다고 해도 분명 다른 치과의원에 비해 매우 싸게 받는다는 걸 말면서 감동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큰 공사일거라고 예감하고 치과를 갔었다. 분명 이제는 치아를 빼야 할텐데, 행여 임플란트라도 하면 목돈이 깨질텐데 각오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선생님은 함부로 치아를 빼는 건 아니라면서 다른 방법이 없고 그저 4개월에 한번 씩 들러 이렇게 하면 된다고 하셨다. 아말감을 만들어 두껍게 발라 주셨으면서도 5,000원을 내니 그래도 1,500원을 거슬러 주셨다.
흔히들 치과를 갈려면 부담스럽다고 한다. 대수롭지 않게 판단하고 갔는데, 몇 십만원 들여 무엇을 하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고 한다. 또한 공부 잘하는 자식들을 의대로, 그보다도 수입이 좋다기에 치대를 더 선호하지 않던가!
감사한 마음에 “선생님, 이렇게 싸게 받으셔도 돼요?”하니 선생님은 예의 부드러운 웃음으로 “그래도 충분합니다.”하신다. 이게 어디 봉사 차원이지, 수입을 주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닐텐데 하는 생각에 이르자 ‘아차, 내가 경망스러웠구나.‘ 하고 후회했다.
3
돌이켜 보면 의사였던 아버지는 늘 ‘돈 버는 게 의사가 아니다’‘ 라고 하시면서 늘 환자들 치료에 우선하셨다.
의사 집에서 월세를 내고 살면서 때로는 식량이 떨어져서 죽을 쑤어 먹은 적이 있다고 하면 과연 믿을런지 모르겠다. 막내였던 나는 외상 달고 봉지에 담은 쌀을 사오거나, 두 개씩 새끼줄에 맨 연탄 네 개를 양쪽 손에 들고 오는 심부름을 하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타마이."
치료 받은 환자들이 하소연하면 그냥 가라고 하시면서, 돈이 없다는데 어떻게 할꺼냐고 하시는 아버지 특유의 표현이다. 그러다 보니 줄줄이 딸린 7남매의 생활비와 학비로 인해 어머니는 늘 원망하시던 걸 이제는 이해한다.
그래도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좋아 나도 ‘슈바이처’ 같은 의사가 되기를 꿈꾸었지만, 여러 면에서 부족하기에 일찌감치 포기해야 했다. "아버지가 베푸신 덕에 우리 형제들이 이만큼 먹고 사는 게 아니겠니?" 언젠가 가족 모잉에서 지나가는 말로 하던 누님과의 대화에도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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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나는 치과를 간다. 치과를 가는 날은 왠지 가슴이 설렌다. 배우고 따를 어른이 주변에 있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치과의원을 가면서 단순히 아픈 치아를 치료만 하는 게 아니라 선생님의 모습을 뵈면서 분명 나의 삶에서도 많은 것을 배우고 깨우치며 세상을 보는 각도가 수정되는 되었다는 것도 숨길 수 없다.
치과의원은 이사하지도, 확장하지도 않고 30년이 넘게 한 장소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 규모가 크지도 않고 결코 화려하지도 않지만 깨끗하고 단정하다. 빳빳하게 다린 권위적인 흰색 가운이 아니라 약간 색이 바랜 선생님의 가운이 훨씬 인간적이어서 좋다.
세월이 세월인지라 선생님도 전에 비해 많이 나이가 드셨다. 아마도 칠순 가까이 되셨으리라. 그동안 베풀어 주셨던 은혜에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 선생님 의원이 오랫동안 남아 있는 것은 그 동네 주민들에게는 분명 축복이다. 부디 건강하시고 인술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첫댓글 아버님께서 슈바이처같은 삶을 사셨기에 이런 의사선생님을 만나 보응을 받으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댓가없이 베푸는 사랑이 우리 주변에 있음이 행복합니다.
(정치적으로 好, 不好와 전혀 관련 없이)
안철수 교수의 부친은 의사입니다. 평범한 동네인 부산 범천동에서 50년 가까이 의원을 열었다고 하더군요. 관련 기사를 보면서 그 분에게서 제 아버지의 모습을 뵈었습니다........댓글 주셔서 참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