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아브라함과 청교도, 창조적 공간의 주역들 (창 12:1-9)
추수감사절 설교문
작성: 김문정
들어가기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요구하시는 본문은 노아의 방주, 삼손과 들릴라, 다윗과 골리앗만큼이나 잘 알려진 이야기다. 아브라함이 고대 문명의 중심지 메소포타미아를 떠나 가나안으로 이주해간 이야기는 신학적 사유는 물론 인문학과 철학적 주제가 되기에도 충분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러고 보면 새 역사의 주역은 대개 아브라함처럼 기존의 뿌리를 끊고 진리의 힘이 주는 영적 직관을 따라 창조적 공간으로 이동하는 공통점이 있다. 대개 이들은 시조始祖가 된다. 믿음의 시조인 아브라함처럼 추수감사절의 기원인 청교도 역시 미국의 시조다.
청교도의 시작은 잉글랜드 왕 헨리 8세가 자기의 재혼을 위해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독립하고,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이 된 사건(수장령, 153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 카톨릭에서 독립하기는 했지만 순수한 개혁이 아니었다. 당시 유럽 대륙은 칼빈의 종교개혁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지만, 헨리 8세는 칼빈의 사상을 경계했고 국왕이 교회를 통치하고자 했다. 헨리로부터 4번째에 이어 국왕이 된 엘리자베스 1세 역시 교회와 국가 두 영역을 관장하려 했고 오늘까지 영국 국교회가 사용하는 39개 신조를 공표했다. 이때 국교회 속의 로마교회 잔재들을 청산하고 개혁을 요구하는 국교회 목회자들이 39개 신조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여 추방되는 일이 벌어졌다. 청교도는 교회국가인 로마 카톨릭도, 국가교회인 영국 성공회도 아닌 철저한 성경적 교회 모델과 종교개혁 신앙을 원했다. 이들의 완강한 태도를 비웃던 여왕 쪽 주교의 글에서 ‘깨끗한 사람들(puritans)’이라는 냉소적 표현으로 청교도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했다. 결국 이들은 비국교도라는 이름의 반사회주의자가 되어 재산을 잃고 추방되거나 처형되었다.
마침내 1620년, 이들은 네덜란드보다 더 자유로운 땅을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는 놀라운 역사의 획을 긋는다.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의 다신론적 세계에서 여호와의 말씀만 믿고 미지의 땅으로 갔듯, 청교도들도 오직 신앙적 자유를 위해 믿기 어려운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대체 무엇이 이들을 새 역사의 주역으로 밀어붙여 믿음과 자유의 시조가 되게 했을까. 본문을 통해 아브라함과 청교도의 공통점을 찾고, 하나님께서 이들을 통해 교회와 인류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아브라함과 청교도는 특수한 ‘하나님 경험’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님 경험은 개인의 특별한 인식 경험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12:1)의 히브리어 ‘아마르’는 ‘말한다’, 이야기한다’로 번역된다. 아브라함의 내면에 분명히 계시하여 인식될만한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하고 이야기했다. 청교도 역시 성경적 개혁을 위해 재산을 빼앗기고 추방 혹은 처형되는 상황에서도 철저한 신앙개혁을 추구한 것은 하나님 경험의 증거로 인정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 외에 다른 인간적 원인을 찾기 어려운 하나님 경외심이다. 여호와의 아마르를 경험하여 동행하는 사람만 1절에 나타난 두 동사, ‘떠나’ 와 ‘가라’에 순종하여 반응할 수 있다. 겉사람 혹은 옛 자아는 필연적으로 육체의 생존에 의존하기에 육체를 이롭게 하는 생존 방식에서 단절되는 두려움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영에 속한 믿음과 자유의 여정은 오직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가능하다. 모세 역시 가시떨기에 맹렬히 붙은 불꽃에서 권능과 자비에 가득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출애굽의 비전을 품을 수 있었다. 하늘로부터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는 음성을 들은 바울이 서양의 역사를 교회 역사로 만든 인물이 된 것 역시 그 때문이다. 하나님의 음성은 먼저 한 개인에게 주어지는 특수한 것이다. 그러나 이 특수한 개별적 경험은 진리로부터 왔기 때문에 반드시 보편적 지평으로 확장된다.
2절,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복의 근원이 된다는 말씀의 히브리어 ‘헤예 베라카’는 네가 복이 된다는 말이다. 우리말 성경이 복의 근원으로 번역한 것이 더 정확하다. 3절은‘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라고 했다. 복의 근원을 축복하면 축복받고, 복의 근원을 저주하면 저주받는 것이 진리이다. 특수성과 개별성에서 확장하여 보편성으로 옮겨지지 않으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역사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신앙의 자유를 구현할 땅으로 간 청교도가 실제로 복의 근원이 되었음을 증명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강조하는 3대 종교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있다. 영적인 복과 함께 물질적 복에서도 결코 부족하지 않다. 청교도가 세운 미국 역시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살지만 하나의 미국이라는 기치 아래 군사, 경제, 정치, 과학, 학문, 문화에서 여전히 1등 국가로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한 사람의 하나님 경험을 역사적이고 보편적 진리가 되게 만드는 것일까. 4절,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고.” 여호와의 말씀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다바르’는 ‘명령’의 성격이 담겨있다(27:19; 왕상12:2). 여호와는 권유하거나 유도하지 않고 명령하셨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특수한 하나님 경험을 주위의 다른 권위자나 지혜자에게 묻지 않고, 여호와의 명령이 자기 내면에 분명히 주어져 인식된 그대로 따랐다. 도저히 묵과할 수 없도록 내면을 뒤흔드는 음성이었는지 세미하게 시작하여 행동하는 과정에서 점점 강렬해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주의 음성을 ‘명령’으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전 인격이 명령으로 받들어 철저히 순종할 만큼 권위 있는 진리였다. 청교도들 역시 로마 카톨릭 체제와 영국 국교회 체제가 결코 진리가 아님을 확신했고,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명령하시는 대로 목숨을 걸고 따랐다. 복의 근원을 창조하시는 분은 이처럼 자기를 철저히 따라오는 모든 자들을 복의 근원으로 만드신다(거부할 때 렘 2:13). 이것이 진리의 특수성이 보편성이 되는 법칙이다.
둘째. 하나님을 뿌리로 삼은 아브라함과 청교도에게 공통적으로 새로운 영적 물리적 공간이 열린다. 저는 ‘공간’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공간이 있고 없음은 자유와 연관된다. 자유를 순우리말로 바꾸면 '숨 쉼’이다. 저는 숨과 쉼에 관해 긴 세월 묵상했다. 숨이 쉼이고 쉼이 숨이다. 공간은 숨과 쉼의 영역이다. 이태원 참사는 숨 쉴 공간이 없어 벌어진 일이다. 하나님이 흙으로 빚은 우리의 코에 자기의 생기를 불어넣어 우리가 산 영(창 2:7)이 되었다. 해서 우리는 숨 쉴 때마다 하나님의 숨(성령/루아흐)이 나의 쉼(안식/사밭)이라고 고백하는 셈이다. 아브라함과 청교도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완전히 다른 세계로 향했을 때 그들을 사로잡은 가장 큰 힘은 무엇이었을까. 저는 ‘자유의 느낌’이라고 확신한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롬 8:18)는 희망은 지금은 비록 숨이 가빠도 곧 하나님의 약속대로 숨 쉴 공간이 광활하게 열린다는 믿음이다. 다윗은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시118:5)라고 찬양한다. 다윗은 고난이 협착하고 가파른 공간에서 압박당하는 것임을 알았기에 주께서 넓은 곳, 숨이 탁 트이는 쉴 만한 물가(시23:2)로 인도하셨다고 고백한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가나안 이주를 마친 뒤에는 공간의 문제가 없었을까? 아니다. 그는 심적으로 큰 압박감을 겪었는데 자식이 생기지 않는 문제였다.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임했는데(창 15:1) 하나님의 초자연적이고 초월적인 음성이 나타나 압박감을 느끼는 아브라함에게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하신다. 본문 12장 2절에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라는 계시는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있을 것을 전제한 것이지만 현재 아브라함의 실존은 돌파구가 없다고 느낀다.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15:3) 아브라함뿐 아니라 우리도 좁은 공간에서 질식감을 느끼며 단 두 개의 선택지만 들고 불면의 밤을 지새곤 한다. 자식이 없는 채 살거나 종이 상속자가 되거나. 둘 다 원하는 답이 아니지만 감지덕지 하기로 결심한다. 주께서 씨를 아니 주셨으니 주시면 해결될 텐데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도 그의 능력을 의지하여 구하기보다는 혼자 중얼거린다. ‘씨를 안주시니 종을 상속자 삼는 수 밖에 없습니다.’ 미지의 땅으로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왔던 아브라함이 이렇게 위축된 것은 문제를 풀 공간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가 계속 공간이라는 키워드로 끌어가는 이유가 다음 구절에 나온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15:4,5)
놀라운 장면이다. 청교도들이 더는 국교회 체제의 압박에서 견딜 수 없어 눈을 대서양 너머로 돌리며 창세기 12장을 떠올렸을 때가 바로 이때가 아니었을까? 좁은 천막 안에서 질식감을 느끼는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데려가신 하나님은 이상 중에 그의 영혼을 하늘의 뭇별들 속으로 끌어올리신다. 아브라함이 가장 원하고 원하는 답을 주셨다. 네 몸에서 나온 자식이 상속자가 되리라, 뭇별들을 세어보아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한계에 갇혀 진심을 포기했지만 자기의 진심을 더는 억압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 인간의 숨쉼이 터져 나온다. 청교도들이 유럽의 뿌리를 끊고 대서양 너머 신앙과 자유의 새로운 국가를 꿈꿨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영적 공간력’인지 상상이 되는가? 청교도들이 뭇별 위로 떠오르는 아브라함의 체험이 없었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이 체험만이 질식하여 죽어가는 나의 소망을 살리고,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말씀하시는 하나님,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완전히 의지하게 한다.
여러분, 깊은 곳에 눌러둔 진실한 소망을 주께 털어놓아야 한다. 내 수준에서 대충 해답 몇 개 만들어가지고 필요할 때 그거 꺼내 보면서 옹색한 마음 자위하지 마라. 믿음 없이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부인하게 된다. 자기 한계를 탈피하여 하나님을 꿈꾸는 사람들을 시기 질투나 하면서 인생 낭비하지 말라. 폰 라트는 “아브라함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접착되었다”고 말한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15:6-7) 아브라함의 이 믿음은 바울이 나의 복음(롬 2:16; 16:25)이라고 부른 신약교회의 생명의 원리가 된다.
셋째. 아브라함과 청교도는 추수 감사 수준에 그쳐서는 알 수 없는 죽음과 부활의 신앙을 배웠다. 추수의 계절은 심판의 계절이다. 나무가 봄부터 가을까지 온 힘을 다해 키우고 결실한 열매를 이만 자기에게서 끊어 농부의 손에 쥐어주어야 할 때가 오면 그것이 나무의 입장에서는 죽음 같은 심판이다. 아브라함이 결실한 아들 이삭은 아브라함 평생의 역작이요, 하나님의 권능의 증거다. 그런 이삭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아들과의 평안한 일상을 보내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일반적인 감사 그 이상을 갑자기 요구하신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본문 12장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라고 하는 말씀은 형태를 바꾸어가면서 아브라함의 일생 전반에 걸쳐 세 번의 중요한 분리를 요구하고 있다. 1차는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새로운 땅 가나안으로 이동하라는 것이었고, 2차는 불임 사라의 몸에서 이삭이 태어나리라는 것이며 이스마엘을 내보내라는 것과 3차는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이다. 왜 이런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걸까. 아브라함의 체험으로 창조되는 이 공간은 시조 아브라함을 통해 장차 뭇별만큼 많아질 믿음의 세대가 하나님을 뿌리 삼아 살아갈 믿음의 틀거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 체험은 믿음의 의미와 능력을 온전히 드러내어 성취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예비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하셨다. 아브라함 평생의 열매인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이 순종했던 이유를 히브리서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돌려받을 줄 믿었다(히11:19)고 한다. 1620-1621년 겨울, 플리머스에 도착한 청교도들 102명 중 절반 이상이 세상을 떠났다. 특히 1-2월의 혹독한 겨울에는 하루에 2-3명씩 죽어나가 생존자는 50명뿐이었고, 그들 중 다수도 지치고 건강이 쇠약해져 질병으로 신음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먼저 교회를 짓고 학교를 세운 뒤 자기들의 집을 마련했다고 전해진다. 따스한 봄날이 찾아오자, 생존한 청교도들은 땅을 개간하고 씨를 뿌리고 가꾸어, 그해 가을 기대 이상의 추수를 하게 됐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눈물로 감사했다.“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시 126:6).”
청교도들은 엄동설한에 황무지에서 살아남은 것,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여 주신 것, 미 대륙 개척자들로 삼아주신 것 등을 하나님 앞에 감사드렸다. 북아메리카로 건너 온 다음 해인 1661년 가을, 하나님께 첫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리며 가장 최고의 것들을 골라 내놓은 그들은 “우리는 대서양을 건너와 여러 친구들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첫 열매를 드리나이다.”라고 기도했다. 죽음을 넘어 부활 신앙에 이른 아브라함의 제단(창 22:13)과 청교도들의 기도는 교회가 살아가는 공간이 결코 육신적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새 창조된 우리의 생존 공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할 때 열리는 영의 창조적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만 우리는 숨 쉰다.
나가기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곧 나의 하나님이다. 믿음의 시조가 걸어간 길이 곧 우리의 길이며 이후 세대 역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이 길에서 살아가며 이 공간에서 숨 쉬는 법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오늘 도저히 답이 없다고 생각되어 질식할 듯한 고통이 있다면 영적인 자리를 찾아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라. 우리가 생존할 공간은 믿음으로만 접속되는 뭇별이 가득한 영적 공간이기 때문에 육신적 생각으로는 결코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 하나님만 뿌리로 삼고자 떠나고 떠나며 순종한 아브라함과 청교도의 창조적 삶을 추수감사절에 깊이 묵상해보기를 소망한다.
2022.11.17. 주의검을보내사
첫댓글 주검보님의 변모된 무게감에 압사당할 지경입니다.
센스 넘치는 감상평에 활짝 웃어봅니다.
@주의검을보내사 견고한진을 파하는 강력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숨좀쉬자 한숨자자 숨을못쉰다 숨막힌다 숨통터져 한숨돌렸네 숨통 트네
와따메~~ 숨쉼이 많쿠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