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사(顯忠祠) 유적관리소(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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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155호 『아산 이충무공 유허(牙山 李忠武公 遺墟)』는 이곳 현충사(顯忠祠)를 말하며 현충사는 이순신(李舜臣)장군의 영정(影幀)을 모신 사당(祠堂)이다.
이충무공은 소년시절 아산 백암리 방화산(芳華山) 기슭으로 옮겨 성장하고 무과에 급제할 때까지 살았고 그 종가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종가의 앞뜰에 위치한 우물 충무정(忠武井), 활터 등 생전의 자취들이 여기저기 잘 보존되어 있다.
임진왜란때 큰 공을 세운 그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공이 1598년 노량해전에서 순국한지 108년이 지난 조선조 숙종 32년(1706)에 사당(祠堂)을 세웠으며 1707년에는 숙종임금이 친히『顯忠祠(현충사)』라 이름 지었다.
그 뒤 이곳은 200여년간 공을 추모하는 향불이 끊이지 않았으나 한동안 일제의 탄압으로 퇴락하였고 더욱이 그의 묘소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갈 위험에 처하자 민족지사들이 이충무공 위업선양을 통해서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이충무공 유적보존회" 를 조직하고 온 국민의 성금을 모아 1932년에 사당을 중건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매년 4월 28일(양력)에 충무공 탄신제전(誕辰祭典)을 올려 공을 추모하여 왔다.
일생을 충의에 살고 나라를 구하신 공의 높은 덕과 충성을 기려 이곳을 성역화하고 영역을 확장하여 1966년부터 1974년 까지 본전, 유물전시관, 고택 등의 건조물을 중건하는 한편, 종합적인 조경공사를 실시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주요시설로는 이순신의 영정을 모셔놓은 본전을 비롯하여 이순신이 자란 옛집, 활을 쏘며 무예를 연습하던 활터, 임금이 하사한 편액을 걸어둔 정려(旌閭), 셋째 아들 이면()의 묘소가 있으며 유물전시관에는 거북선 모형 및 난중일기, 장검을 비롯한 많은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1962년 3월 14일 대전일보 1면에 ‘이충무공 기념사업 성금운동’이라는 조그만 사고(社告)가 실렸다. 417회 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신일을 앞두고 유물전시관 건립과 고택(古宅) 보수, 주변 환경 정비 등을 위해 모금운동을 벌인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 방치돼 퇴락했던 현충사에 대한 국민적 관심 고조와, 대대적인 정비 및 성역화 사업의 시작을 알리는 기사였다.
대전일보는 캠페인을 시작하며 “충무공은 우리 고장이 낳은 명장이요 우리나라의 빛으로서 그 분을 모신 현충사에 있으나, 보수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여, 허술한 모습으로 보기가 민망할 정도”라고 적었다. 1706년 건립된 현충사는 1868년 서원 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었고, 일제 때 유적보전회가 조직돼 1932년 현충사를 중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허나 일제 식민지 지배하 현충사는 버려지다시피 방치됐고, 해방 이후에도 이런 현상은 마찬가지였다.
충무공 기념사업은 지역 현안 사업이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 덕분에 큰 성공을 거둔 사건이다. 충청권에서 시작하여 온 국민이 참여하는 범국민운동으로 확산됐고, 훗날 아산 현충사가 본격적으로 정비돼 민족정신의 성소(聖所)로 자리 잡는 계기를 제공했다.
대전일보는 현충사 정비 및 보수를 위해 충남도와 긴밀한 협조체계를 구축했다. 14일자 3면에는 유물전시관 건립과 환경 조성 및 식수, 도로 보수, 충무공 고택 보수 등의 사업계획을 소개했다. 첫날 윤태호 충남지사가 1착으로 1만환을 기탁하고 이어 대전일보, 도청 공무원, 시장·군수 등의 기부 행렬이 잇따랐다. 특히 대전·충남 초중고생과 교직원들의 참여는 놀라울 정도였다. 변호사, 농협직원, 동장, 은행원, 극장, 기업들도 힘을 보탰다. 경남지사와 제주지사, 삼척경찰서장과 서울 배화여고 교장 등 전국에서 성금이 답지했다.
4월 24일에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50만환을 기탁했다. 충무공을 기리기 위한 사업이 범국민운동으로 확산되는 것에 감동하여 성금을 보낸 것이다. 박정희 의장의 참여를 계기로 모금 운동을 더욱 활기를 띤다. 동아주물, 한전 충남지점, 금호중, 부여중, 천안농협, 서울 광화문우체국, 서산군, 공주여중고 등 충남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성금이 답지했다. 윤태호 충남지사와 배무남 대전시장이 잇따라 각계의 동참을 호소했다.
대전일보는 4월 25일까지 5백만환이 모금됐지만 목표액 1천만환을 달성하기 기간을 1달 더 연기한다. 현충사 보수 및 정비에는 국비 1천만환 도비 5백만환 외에 1천만환이 더 필요했다.
대전일보는 지역민과 국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높이기 위해 현충사 공사 진행상황을 취재해 실었다. 박필교 기자가 현장을 답사하여 온양역 광장의 비각 보수, 현충사 입구 참배도로 보수와 교량가설, 유물전시관 건립, 주변 석축 설치와 휴게실 및 주차장 조성 현황 등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4월 25일 경남 충무시에서 열린 한산대첩기념제를 취재, 보도하기도 했다.
4월 29일 열린 충무공 탄신 417주년 기념행사도 집중보도했다. 본사에서 이성영, 이은창 취재 기자 2명과 정헌태 사진부장을 온양 현지에 ‘특파’하여 박정희 의장의 움직임과 행사실황, 현충사 정비 모습 등을 입체 취재했다.
1면 톱기사에 ‘충무정신 받들어 민족중흥의 길로’라는 컷 아래 이순신 장군 탄생 417주년 경축제전 실황을 자세히 담았다. 박정희 국개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축사에서 “공(公)의 위대한 공덕과 유훈을 추모하며 제전을 베풀게 된 것을 근래 보기 드문 민족적 쾌거”라며 “충무공 정신을 우리나라 사회에 다시 재현시켜 전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국가재건에 총력을 경주하자.”고 밝혔다. 박 의장은 제전을 마친 뒤 봉찬연예(奉讚演藝)를 관람하고 신축 유물전시관 테이프 커팅, 기념 식수, 시궁, 충무공 묘소 참배 일정을 소화했다.
대전일보는 4월 29일자부터 ‘이충무공 유적답사기’를 연재했다. 이은창 기자가 현지를 발로 뛰면서 4회에 걸쳐 고택과 현충사, 각종 유물 등을 1면에 상세하게 소개했다. 성금모금 운동은 5월말까지 계속 전개돼 마감일까지 총 1140만8485환이 답지했다.
‘이충무공 기념사업 성금운동’은 대전일보가 전개한 캠페인 중 가장 성공한 사업의 하나였다. 현충사 정비에 필요한 자금 3천만환 중 중앙정부 보조금 1천만환보다 많은 액수를 충남도민과 전 국민의 성금으로 모아 대준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윤보선 대통령의 하야로 최고 권력자로 부상한 박정희 의장이 성금을 내고 격려한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박 의장은 충무공 탄신행사에 참석함으로써 이 행사에 무게를 실어줬다. 그후 박정희는 대통령에 오른 뒤 1966년 4월부터 현충사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와 성역화사업을 추진하고 매년 제전에 참석하는 등 충무공을 정신적 사표로 추앙했다. 박 대통령의 지속적인 관심 덕분에 충무공의 공적과 삶이 재조명되고 국민적 민족적 위인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퇴락한 충무공 유적을 정비하자는 대전일보와 충남도의 소박하고 순수한 캠페인이 국가적 사업과 행사로 발돋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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