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서부지역 작전 (옹진반도-개성-문산-봉일천전투)
제1절 : 작전 개요
1. 전쟁의 서곡
1950년 6월 25일 04:00시에 38선 서부전선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농번기라는 이유로 많은 병력이 외박 외출을 나가고, 나가지 않은 병력은 부대별로 체육대회 등을 하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전 전선에 천둥이 치고 굉음소리가 지축을 흔들어 댔다. 북한군의 기습남침이 개시된 것이다. 그동안 많은 전방에서의 남침예보가 상부로 올라갔음에도 전혀 그럴리 없다는 판단(아니 일부러 넘어오라고 그랬는지도 모른다)아래 주어진 경계태세 해제와 1/3에 이르는많은 병력의 외박 외출과 차량과 기관총 등 일부 전투장비의 정비 입고를 모르는체 전쟁이 터졌다.
북한군은 전 전선에 공격준비 사격으로, 서쪽의 웅진반도로부터 개성.동두천.포천.춘천.주문진에 이르는 38도선 전역에서 야포와 박격포 사격을 실시하였다. 동시에 동해안 강릉 남쪽 정동진과 임원진에 육전대와 유격대를 상륙 시켰다.
서울을 목표로 하는 북한군의 주공 제1군단은 연천과 운천에서 의정부에 이르는 축선과 개성에서 문산으로 이어지는 접근로에 전투력을 집중하였다. 춘천 강릉을 목표로 하는 적 제2군단은 화천 춘천 접근로에 중점을 두고 계획된 축선을 따라 소련제 탱크 T-34를 앞세우고 일거에 국군의 38도선을 돌파하여 남진을 시작했다
전쟁이 일어나던 날, 육군본부 상황실에는 밤새 적의 공격을 에고하는 징후의 첩보가 간헐적으로 올라 오더니 새벽에는 전방 사단으로부터 접적을 알리는 보고가 있따라 올라 왔다.
'50.6.25일 01:00시경 옹진반도 제17연대로부터 "국사봉 북쪽에서 수 미상의 북한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 왔다. 03:00시에는 문산 북방 제1사단에서 적이 구화리에서 도하용으로 보이는 주정을 전방으로 이동시키고 있다는 전문이 날아 들었다. 03:30분경에는 포천 북방 제7사단으로부터 양문리 북쪽 만세교 부근에 전차 굉음이 들린다고 보고 되고 있었다.
이어서 전 전선에서 북한군이 강력한 공격준비사격에 이어서 병력이 38선을 넘어오고 있다고 전화기에 불이 나게 상황보고가 들어왔다.
2. 서부 지역
가. 옹진지역
서부지역은 국군 제17연대가 옹진반도에서 적과 지연전을 펼치며 해상 철수를 하게 되고, 문산 전방에서는 국군 제1사단이 북한군 제1,6사단의 공격을 받아 임진강을 연하는 주저항선 과 봉일천 일대의 최후저항선으로 후퇴하며 미군이 참전할 시간적 공간을 확보하게 된다.
옹진의 제17연대는 북한군 제3경비여단과 제6사단의 제1연대를 배속하여 국군 제17연대 정면을 공격하였다. 당시 제17연대는 2개 대대를 45km의 38선상에 배치하고 1개 대대는 예비로 옹진에 배치하였다. 하지만 당일 13:00시 경에 전방 대대의 전투지경선을 따라 적 제1연대가 진출함에 따라 방어지대가 양분되고 말았다.
철수 명령에 따라 연대본부와 포병부대를 포함한 우측 제3대대는 보포항으로 집결하여 26일 14:00시에 해군에서 지원한 LST편으로 인천으로 철수하였다. 좌측 제1, 제2 양대대는 적이 중간지구를 돌파하여 진출해 옴으로서 사곶항을로 철수하여 민간 선박으로 철수하게 된다.
나. 개성-문산-고랑포 지역
이곳은 국군 제1사단 정면으로 북한군 제1군단은 제6사단(-), 제1사단, 제203전차연대로 공격하여 왔다. 국군 제1사단은 94km 정면에 제12, 제13연대를 배치하였고 예비인 제11연대는 수색에서 교육훈련 중이었다.
이중 제12연대는 측방경계부대로서 연백지구-개성에 두고 배수진을 치고 있었다. 25일 04:00시에 북한군 제6사단이 개성과 고랑포 사이에 30분간 공격준비사격을 실시 하고 진출하게 되자, 개성방면의 제12연대는 김포반도로 도하 철수를 하게 되고, 고랑포 방면의 제13연대는 임진강 도하 가능지점에 병력을 배비하고, 예비인 제11연대가 문산 돌출부로 진출하게 된다.
제11연대가 26일 정오 역습으로 일시적 주진지를 회복하게 되지만 우측 제13연대가 가여울 지역으로 전차와 함께 진출한 적으로부터 돌파될 위기에 처하게 되면서 최후방어선인 봉일천으로 철수하게 된다.
27일 사단은 제13연대와 전방으로 추진된 제15연대(-)을 전방에 제11연대를 예비로 하여 일시적 역습을 감행한다. 하지만 28일 오전부터 적의 기마대가 방어선 자측에 출현하여 아군의 후방을 위혖하는 한편, 27일부터 출격하기 시작한 미 공군은 전선을 판별하지 못하여 대지공격을 감행함으로서 사단은 봉일천으로 아어서 행주와 이산포 2개 지점의 도선장으로 나누어 한강을 도하하게 된다.
이와같이 보일천 지역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 한강 하구인 강화, 김포지구에 적 6사단(-)이 김포-영등포 방면으로 서울을 측면에서 위협하고 있었다.
이에 육군본부는 김포지구사령부를 편성하고, 그곳으로 도하한 12연대 제2대대를 포함하여 남산학교와 보병학교 후보생, 공병학교 학생, 보국대대, 그리고 기갑연대 일부를 통합 편성하여 적을 저지토록 하였다.
김포지구사가 26일 16:00부터 시작된 적의 도하정찰을 저지했으나, 27일 미명에 적의 본격적인 도하가 시작되면서 한강변으로부터 운유산-73고지선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그러나 28일 적이 공격을 재개하자 2.36'' 로켓포와 장갑차의 37mm 직사포로 대항 했으나 결국 김포로 무러나 적을 계속 방어하게 된다.
제 2 절 피아의 상황
1. 북한군 상황
가. 북한군 전투편성
북한군 제1군단은 서울을 점령하기 위해 주공부대인 제3사단과 제4사단을 제105전차여단(-)의 지원 하에 서울 북쪽 의정부 축선으로 공격하고, 제6사단(-)을 금천-개성축선으로 제1사단을 제203전차연대(-)의 지원하에 구하리-고랑포-문산 축선으로 투입하여 서울을 서측에서 각각 공격하도록 하고, 제6사단 제1연대와 38경비 제3여단으로 옹진반도를 공격토록 하였다.
따라서 옹진반도의 국군 제17연대의 정면에 북한군 전투력은 1개 경비여단 및 1개 보병연대에 1개 자주포중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국군 제1사단의 정면에는 북한군 전력은 제6사단(-) 및 제1사단에 제203전차연대(-)가 있었다.
화력으로는 옹진과 연안 방면에 122mm 곡사포 4문, 76mm 견인포 32문, 76mm 자주포 5문, 대전차포 45문 등 197문을 보유하고 있었고, 개성방면에는 122mm평사포 8문, 122mm곡사포 12문, 76mm 견인포 28문,76mm 자주포 11문, 45mm 대전차포 36문 등 161문을 보유하였다.
서부지역 북한군 지휘관계는 제1군단장에 조선의용군 출신 김웅 중장, 제3경비여단장에는 제88여단 출신 최현 소장, 제6사단장에는 조선의용군 출신 방호산 소장, 제1사단장은 소련군 출신 최광 소장, 제203전차연대 연대장은 소련거주 한인2세로서 전차병으로 독소전쟁에 참전한 최율석 대좌였다.
나. 공격준비태세
그들은 1950년 6월 10일부터 동 23일 사이에 훈련을 가장하여 전개함으로서 남침준비를 완료하였다.
(1) 북한군 제3경비여단(옹진-연안 방면)
먼저 옹진지구 북한군 제3경비여단은 제6사단에서 제1연대 및 치안대대를 배속받아 전투력을 증강하게 된다. 여단은 공격개시 당일 옹진-연안반도를 각개돌파 진출하면 이때 제6-1연대가 강령으로 진출하여 국군 제17연대의 진지를 양분하여 옹진반도-연안반도를 점령하도록 했다.
여단은 최초 예하 7개 대대와 제1연대가 병진공격하여 최근임무계선은 웅진북쪽 4km, 연안 북쪽 5km 점령하고 차후 임무계선은 옹진.가령.청단.연안.배천을 점령하는 것이였다.
(2) 북한군 제6사단(-)(개성방면)
개성-김포방면의 제6사단(-)은 전면의 아군을 격파하고 개성반도를 장악하고,이어 김포-영등포선으로 진출하여 국군의 주력 퇴로를 차단하며 공격당일에 개성반도를 장악하고, 2일차에 영등포로 진출하는 것으로 계획했다.
이를 위해 최초 2개 연대 병진으로 제15연대와 제13연대(-)가 공격하고, 제13연대 3대대와 사단 교육대대를 예비로 하여 최근임무계선은 개성 남쪽 8km, 강리-고두산리 점령하는 것이고, 차후임무계선은 개성 남쪽 14km 고척리-대룡리 선으로, 1일차에 개성반도를 장악하고 일부는 한강을 도하하며, 2일차에는 통진-백석현-영등포 진출이었다.
(3) 북한군 제1사단(고랑포-문산 방면)
고랑포-문산 방면의 북한군 제1사단은 공격개시 당일 고랑포-장단-문산 축선을 돌파허고, 제203전차연대와 협조하여 문산에서 서울 서측방면으로 진출하여 국군주력의 퇴로를 차단한다느 것이었다.
이를 위해 사단은 최초 2개 연대 병진 공격하되 제3연대를 주공으로, 제2연대를 조공으로 공격하고 제14연대를 에비로 하였다. 사단의 최근임무는 38선 남쪽 5~8km 어룡리-장단선으로 진출하고 , 차후임무는 문산 남쪽 10km 성동리-신산리까지 진출하며 공격 2일차에는 한강변을 따라 공격하되 서울 서북부를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4) 북한군 제203전차연대(-) (문산방면)
고속기동부대로서 군단장의 직접 통제하는 부대였다. 연대는 제6사단(-)이 개성반도를 장악하면 1번도로를 다라 문산 방면으로 이동하고, 문산에서 북한군 제1사단과의 협조하에 고속으로 종심기동하여 서을 측면을 장악하함으로서 국군 주력의 퇴ㅐ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연대의 1개 대대는 동두천 방면의 제4사단에 배속하고 연대 주력은 기동로를 고려 개성북쪽에 배치하되 공격당일개성반도를 장악하면 신속히 문산 방면으로 이동하여 공격개시 2일차부터 작전에 투입하는 것으로 했다.
2. 국군 상황
가. 국군 제17연대 부대현황
옹진반도 정면 45km를 방어하고 있으면서, 이는 통상적인 사단 방어정면 10km에 비하면 4.5배에 달하는 광정면을 방어하고 있었다. 옹진반도는 38도선 중심으로 북쪽에는 국사봉(527m)dmf 비롯하여 계명산(279m), 은파산(283m)이 위치하고, 그 남쪽에 두락산, 471고지, 충무고지, 녹달산, 까치산(350m)이 있었다.
연대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경계지대, 주저항선, 최후방어선과 같은 종심 방어책을 할 수 없어서 연대는 38선 남쪽의 두락산-512고지-충무고지-녹달산-까치산-초동을 연결하는 선이 주저항선이자 최후저항선이었다.
옹진반도는 38도선으로 말미암아 육지와 차단되어 교통을 해로에만 의존하고 있었다. 제17연대는 2개 대대를 전방에, 1개대대를 예비로 옹진반도 중앙부인 웅진광산에 배치하였다.
당시 제17연대의 전투력은 병력은ㄴ 2,719명(96%), 제7포병대대의 526명(100%), 대전차포중대 129명(100%)이었으며 105mm 15문, 57mm대전차포 6문, 81mm박격포 12문, 60mm박격포 18문, 2.36''' 로켓포 60문, 기관총 25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여기서 육본이 6월 23일 24:00시부로 경계태세를 해제하고 장병들ㅇ에게 휴가나 외박 외출 등이 허락되었을 때 백인엽 연대장은 제17연대는 비상태세를 유지했다.
그런데 이 무렵 UN한국위원단 요원 5명이 연대를 방문, 아군의 중화기가 전방에 추진된 것을 보고 38도선이 이렇게 평온한데 무슨 긴장감을 조성하느냐고 지적하고 서울로 돌아가자 불가피하게 전방에 배치한 부대를 제외하고는 비상조치를 헤제하기에 이르렀다.
나. 국군 제1사단 상황
제1사단은 전쟁 발발 2개월 전인 4월 20일 사단장으로 백선엽 대령이 부임하였다. 사단의 방어정면은 청단-연안-개성-적성에 이르는 94km 광정면 이었다.
따라서 청단.배천.연안 부근에는 경계부대 정도를 배치하여 적정을 수집하고, 적의 공격시에는 백석포로 철수하여해군 함정으로 문산부근으로 철수시킨다는계획이었다.
개성방면은 상황에 의하여 예성강 철교를 파괴하는 동시에 남하하는 적을 최대한 저지시키고, 장단 예비방어선에서 제12연대는 예성강 남쪽에서 철수하여온 경계부대를 합류시켜 지연전을 하고, 상황이 긴박하면 진봉산에서 영정포로 이동하여 선박편으로 문산부근에 상륙하여 우일선 제13연대 주력과 사단 주저항선인 문산-적성간의 임진강 남안을 확보하도록 하였다.
제13연대는 고랑포 일대의 진지에서 적을 저지하고, 임진강 남쪽의 좌일선 부대의 철수를 엄호하고 사단 에비대 및 증원부대의 지원을받아 주저항선에서 적을 섬멸한다는 계획이었다. 사단의 우측방은 제7사단 제1연대가 적성 동족에서 제13연대와 경계를 이루며 감악산(675m)-마차산(587m) 등의 고지군을 이용하여 경계하고 있었다.
최경록 대령이 지휘하는 예비연대인 제11연대는 수색의 사단 사령부 지역에서 정비 및 교육훈련에 임하고 있었으며, 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당시에 시흥 보병학교에 고급지휘관과정에 입교명령을 받아 선임연대장인 최경록 대령이 부재간 직무를 대행하고 있었다. 제12연대장은 전성호 대령이고 6.26일부로 연대장이 전사하여 김점곤 중령이 보직되었다. 제13연대장은 김익렬 대령이고 제6포병 대대장이 노재현 소령이었다.당시에 포병부대는 대대본부와 2개 포대를 수색의 사단사령부 부근으로 이동시키고, 제3포대만 계속 문산에서 위치하여 화력을 제공할 수 있도록 계획하였다.
'50.6.24일 사단은 1/3병력이 영외로 나갔으며, 육군회관 낙성식에 사단장과 직무대리인 최대령도 참석하게 되었고, 제13연대장 김익렬도 외출중에 있었다. 사단의 병력은 1만 100명 내외였고, 105mm 곡사포 15문, 57mm대전차포 18문, 81mm 박격포 36문, 60mm박격포 54문, 2.36'' 로켓포와 각종 기관총 43정을 보유했다. 다만 제11연대는 상부지시로 공용화기의 30%를 후방기지창으로 후송하여 정비에 들어가 있었다.
제 3 절 작전 경과
1. 옹진반도 전투
북한군은 제3경비여단에 제6사단 제1연대를 증원하여 국군 제17연대 정면을 25일 04:00시에 공격하였다. 하지만 전투 당일 적이 전투지경선인 취야-양원, 취야-강령 국도를 통하여 제1연대를 투입해 옴으로서 아군의 방어지역은 이날 13:00시에 동서로 양분되었다. 따라서 연대본부와 포병부대를 포함한 우측 제3대대는 적을 저지하면서 26일 14:00시에 부포항에서 해군이 보낸 LST를 이용 인천으로 해상철수 하여, 영등포 방적공장 창고를 집결지로 정하였다.
좌측 제1.2대대는 적이 옹진읍-부포항의 중간지구를 돌파하여사곶을 목표로 철수하여 민간선박으로 이동하였으며 ,29일 이후부터는 개별적으로 철수한 병력을 수습하여 대전에서 재편성 하게 된다.
북6-1연대
북 3경비여단 해주
취야
국사봉 초동
38선------------------------------------------------------------------------은파산---------------------------------------------------------------------------38선
두락산 까치산 우현
충무고지
녹달산
경찰 = 17연 사동 1대대=3대대
치마산
천장산 백운봉 분당산
웅진 강령
사곳 부포
용호도
해상철수시 105mm포와 대전차포는 모두 분해하여 바다 속으로 버리게 하였다. 하지만 연대장이 마지막 남은 대포의 처리로 배의 승선이 늦어지게 되자, 연대장은 배를 먼저 떠나라고 명령하여 병력둘이 먼저 부포항을 떠나고, 백인엽 연대장은 차후에 포병 대대장 박정호 소령이 연안에 더돌고 있던 조각배를 헤엄으로 끌고와서 이걸 타고 26일 19:00시에 어선의 구조로 연평도에 도착헤 된다.
여기서 다시 해군 함정으로 사병 4명과 27일 02:00시에 연평도를 떠나 08:00시에 인천에 상륙하여 채병덕 총참모장과 국방장관에게 철수 결과를 보고 했다. 이때 다시 제17연대로서 대전에 피난중인 정부 경호업무를 수행하라는 지시를 받고, 16:00싱[ 영등포 방적공장에서 먼저 온 팀과 합류하여 대전 선화초등학교로 이동 하게 된다.
[백인엽은 마지막까지 사수했을까?]
여기서 한가지 어필하고 넘어가고자 하는 것이 있다. 정말 백인엽이 마지막까지 남아서 대포 등을 분해하여 처리하고 조각배를 이용하여 연평도도 빠져 나왔느냐는 사실 관계다.
그러나 이건 정말 이라고 본다. 내가 연평도를 거의 5회 이상 탐사 및 탐문을 하는 과정에 동네 어른들이 백인엽을 목격한 생생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작은 체구에 권총을 차고 있었다고 하며 일부 군인들과 함께 해안으로 상륙하였다고 한다. 이대 이미 해군 함정이 먼 바다에 와 있었고 바로 배로 떠났는데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제2대대(대대장 송호림 소령)는 당일 14:30분에 철수명령으로 강령으로 가려고 했으나 이미 적이 길을 봉쇄하고 있어 사곶으로 철수헤게 된다. 사곶항에는 1,300여명의 군인과 경찰.민간인 등 2,000여명이 몰려들어 있었다. 용호도에 있던 지서용 경비정과 민간선박을 이용하게 되며, 26일 07:00시에 마지막 인원이 올라타 27일 07:00시에 연평도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간단한 요기와 정비를 마치고 당일 20:00시에 3개 선단으로 나누어 연평도를 떠나 2개 선단은 28일 06:00시에 인천항에 들어오게 된다.
제3선단이 기다려도 오질않아 그날 20:00시에 항해를 시작하여 덕적도 근해에서 정부가 대전에 있음을 알고 배를 군산항으로 돌려 29일 07:00시에 군산항에 상륙하였다. 여기서 열차편으로 대전의 선화초등학교로 가서 합류한다.
하지만 마지막 제3선단은 29일 01:00시에 인천항에 상륙하여 일부는 경찰이 주선한 차량으로 수원을 경유하여 대전으로, 일부는 선박편으로 당진에 상륙하여 6월 30일 선화초등학교에 합세함으로서 6일간의 철수작전을 끝났다.
2. 개성-문산-봉일천 전투
가. 전투개요
북한군 제1사단이 25일 국군 제13연대 정면에 , 북한군 제6사단(-)이 좌측 연백지구의 제12연대 정면을 공격해 왔다. 사단은 에비인 제11연대를 수색에서 문산지구로 진출시켜ㅑ 당일 11:00시가지 임진교를 중심으로 한 문산돌출부 일대에 배치하였다.
적은 26일 소수의 병력으로 임진교 동북쪽 4km 지점에서 급속도하를 시도하여 문산돌출부 일대에 주력을 투입하고, 이를 국군 제1사단은 제11연대로 하여금 반격학게 하여 26일 오후에 진지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적의 주력이 우측 제13연대 정면에 압력을 가하며 고랑포-적성간의 도하지점으로 기갑부대를 도하하게 하여 문산으로 공격하고, 일부는 연대후방까지 침투하게 된다. 26일 야간 이후 북한군 제1사단이 다시 문산돌출부를 공격하고 전차부대가 경의 가도와 제13연대 지역의 파평산(498m) 남다느로 공격하여 사단은 주력을 봉일천 최후저항선으로 이동시켰다.
27일의 봉일천 배치는 제13연대와 증원된 제15연대를 전방에 제11연대를 예비로 문산-서울간의 국도를 중심으로 종심 배치하였다. 사단은 28일 조기에 주짅지 회복을 위한 반격작전을 계획하였으나, 이날 아침에 적이 미아리에서 서울 시내로 진출하고 있다는 급보와 28일 오전부터 적의 기마대가 봉일천 동쪽에 출현하여 후방을 위협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여기에 27일부터 출격하기 시작한 미 공군이 전선을 판별하지 못한 채 대지공격을 감행하여 일부 피해를 입고 이날 야간에 행주와 이산포 2개 지점의 도선장에서 한강을 도하 철수한다.
나. 전투 경과
(1) 38도선 경계진지 전투
(가)청단 -연백 전투
국군 제1사단의 좌일선 제2대대는 예성강에서 청단 서쪽의 해안가지 총 50km의 대대 방어정면에 백천-연안-청단 등 3개 읍에 1개 중대씩 주둔하여 청단 서쪽의 11km지역은 경비상 공백지대였다.
화양리 적3여-1대대
적3여-3대대
적 친안대대 치악산
38선-------------------------------------------------------------------------------------------------------------------------------------------------------------------
231고지 배천 11중대
1개소대 9중대 문화동 중대 소대
청단 대흥리 예성교
9-10 10-11 3=2
예성강 개성
교동도
용매도 석모도 강화도
제3대대는 우일선 중대가 예성강교의 파괴없이 차량으로 석포를 거쳐 강화도로 철수하게 된다. 중앙 중대도 속포로해서 강화도로 철수하고, 우측 중대는 남쪽 해변에서 대형 목선으로 교동도로 철수하고 일부는 용매도를 거쳐 인천으로 철수하게 된다.
(나) 개성전투
개성서쪽 지역에 대한 38도선 경비임무를 수행중인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전성호 대령:중국군 출신, 해방과 더불어 귀국하여 53세 고령으로 소령으로 임관한 닫음 18연대 부연대장을 거쳐 12연대장이 됨))는 63km에 달하는 경계구역을 2개 대대로 전담하고 1개 대대는 예비로 개성 남족 깅릉동에 연대본부와 같이 있도록 했다. 즉 제3대대를 예성강 서쪽에, 제2대대를 개성북쪽에 배치했다.
적6-15연 적6사=적1사
적1-14연집결지
여원 적6-13연 적1-3연 전차중대
전차중대
38선-------------------------------------------------------------488고지-------------------------------------------------------------------------------------------
송악산 대원리
자남산 대덕산236m 중대본부
5-6 12연=13연
명륜동
예성강 3=2 개성
토성
2=3
강릉동 장단
2대대, 연대본부, 제12-1대대 위치
임진강 철교
거곡리
김포 임진강
제12-2-5중대 지역에는 6월 23일 조만식 선생의 신병인수를 위해 1개소대가 선발되어 경비업무를 위해 여현역 철로 양변의 구릉에 진지를 구축하고 6.20일부터 대기 중에 있었다.
전쟁 당일 적의 기습 공격으로 전방의 모든 유무선이 단절되고 주요도로도 적에게 유린되고 말았다. 대대 중앙의 전방 488(송학산)고지 일대의 제6중대도 공격을 받아 중대장이 쓰러지고 말았다. 대대 우일선 제7중대는 개성에서 시변리에 이르는 국도 좌우측에 병력을 배치하고 있었다.
[서울행 열차에 피난민이 가득찬채로 적의 기간총 사격을 받다]
이 당시 중대장 김영선 중위는 적의 공격개시보다 1시간 앞서서 03:00시에 비둘기고지의 소대로부터 적과 총격전이 벌어졌다고 보고를 받았다. 07:00시경 이미 적이 전선을 돌파하여 중대장은 생존자 30여 명을 거느리고 자남산근처로 내려왔으너 적이 계속 밀려들어 다시 남으로 각개약진(?)해야 했다. 이때 개성역에는 서울행 열차가 출발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군 장갑차로 오인한 헌병 적 전차에 깔려 죽다]
이 시간 개성 서쪽 4KM,지점의 명륜동 삼거리 헌병초소에서는 적 전차 3대가 금천으로부너 남하하는 것을 보고 우리 장갑차로 오인했다. 그러나 적전차는 곧바로 헌병 초소를 깔아웅갬으로써 헌병 수명이 압사 당해서 죽었다. 이 전차는 기관차 통행을 막고 있었다. 그러나 예비인 제1대대는 병력이 외박 외출로 병력이 거의 비어 있었다.
이 당시 미고문관인 다리고 대위는 개성동북 성균관내 숙소에 머물고 있다 요란한 포탄소리에 잠을 깨어 개성에 들어갔다가 적의 총성이 들려오고 있음으로 문산으로 철수하였다.
제2대대장은 병력을 수습하여 일시적 개성을 공격했으나 중과부족으로 밀려나면서 강릉을 거쳐 영정포로 해서 어선을 얻어 19:00시에 김포로 도강하였다. 연대본부와 제1대대 잔류병력은 차량으로 임진강교를 거쳐 문산으로 철수하였다.
(다) 고랑포 전투
고랑포에서 대둰리간의 38도선 경비업무를 맡은 제13연대 제3대대(유재성 소령)의 좌일선 제11중대, 우일선 10중대로 경계진지 전투를 하게 된다.
적6사-적 1사 적1사-적4사
적1-2연 적1-14연 집결지 전차중대 적1-3연 전차중대 전차중대
-38선------------------------------------------------------------------------------------------------------------------------------------------------------------------------------------------
대덕산 236m 128m 112m고지
대원리 고랑포 가여울
12연-13연 11-10 3연-국7-1연
2=3 자하리 적성
아곡동 장파리
장단 금파리 덕천리
파평산496m
노상리 마정리 일월봉
임진강철교 화석동 금곡리
문산
좌일선 진지는 당일 04:30분 경에 진지에 포탄이 떨어지면서 적 3개 소대 규모가 종대대형으로 두매동-장단 도로를 따라 접근하여 일시적 격멸하였으나 적이 벌써 대덕산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다라서 이날 오후에 목선으로 임진강을 건넜다.
우일선 제10중대도 당일 04:30분경에 진지에 포탄이 떨어지며 112고지에 중대장이 접근하려 할 때는 적이 벌서 임진강 대안상 구릉진지에 이르러 남쪽으로 사격을 가하고, 06:00시경에는 임진강을 도하하여 자하리쪽으로 남하하고 있었다. 동 시간대에 적 전차 7대가 굉음을 일으키며 접근하고 있었다.
한편 장단에서 고랑포쪽으로 장단경찰서 소속 3/4톤 트럭 1대가 무장경찰 21명을 태우고 이동중 적 전차 직사포에 맞아 15명이 전사하고, 6명만이 부상자로 아군에 구출되었다. 이를 제9중대 장두철 중위 등 8며의 특공대가 육탄공격중 모두 전사하였다.
이에 대대는 이날 17:00시에 일월봉에 병력을 배치하였다가 저녁 무렵 나룻ㅂ배를 이용하여 강을 건너 22:30분경 금곡리부근에 집결하였다.
(2) 사단의 주요조치
(가)사단장의 조치
6.25전쟁 당일 제1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시흥 보병학교 피교육중이었다. 이날 07:00시에 작전참모 김덕준 소령으로부터 전화로 상황을 보고받고, 용산의 육군본부로 들어가 상황파악을 한 후에 미 고문관 로크월 중령과 사단장 직무대리인 제11연대장 최경록 대령을 대동하고 수색의 사단 사령부에 들어갔다. 여기서 사단 병력의 1/3이 휴가와 외출 중임을 알았다고 한다.
딸라서 사단장은 사단 전방 지휘소를 문산초등학교에 설치하였고 정오경 파주로 옮겼다. 14:00시경에는 좌전방 전성호 대려이 얼굴에 차량사고로 안면에 부상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병력이 적의 기습으로 와해되어 수습이 어려웠다고 보고를 하게 된다. 이에 사단장은 연대장의 후송조치와 증원부대 요청을 육본에 하게 된다.
(나) 증원부대의 도착 및 운용
전쟁 당일 저녁 보병학교(김병화 소령)와 육군사관학교의 병력(김응용 소령)으로 혼합편성된 서울특별연대가 사단에 도착한다. 따라서 육사교도 대대를 우일선 제13연대에, 보병학교 교도대대를 좌일선 제11연대에 배속되었다. 이보다 늦게 제15연대 제3대대(제5사단(이응준 소장) 소속으로 사단은 광주에 제15연대는 전주에 있었으며 3대대가 선발대로 들어옴, 당시에 연대장 최영희는 시흥 보병학교에서 교육중으로 서울의 숙소에 있었다.)가 도착하여 금촌 북쪽 고지군을 점령하여 종심을 유지하였다.
이 당시에 제3대대는 용산역에서 열차로 이동 중에 능곡역 부근에서 북한군 YAK로 부터 공격을 받아 여기서 하차하여 도보로 금촌 북쪽까지 이동후 연대장의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광주에 있는 제20연대(박기병 대령)는 마침 백운산지역 공비토벌을 위해 이날 아침에 열차로 순천으로 출발한 제3대대를 다시 송정리로 회차시켜 서울로 출발시킴으로써 25일 훕2ㅏㄴ야에 송정리를 출발하여 다음날 문산에 도착하게 된다.
한편 이날 14:00시경 수도사 대전차포 1개 중대와 장갑차 1개 소대가 서울을 출발하여 16:30분경에 도착하여, 대전차포 중대는 문산에 장갑차 소대는 사단의 정찰 임무를 부여한다.
(다) 임진강 철교의 폭파는 실패했다?
당시 대대장(장치은 소령)이 보이지 않는 중대장을 대신하여 본인이 직접 폭파조를 데리고 가서 폭파준비를 완료했으나 사단에서 폭파 명령이 내려오질 않았다. 원래 제12연대 병력이 빠지고 나면 폭파하게 되어 있었기에 병력이 빠지는 순간 남족 교량을 폭파하고 북쪽 교량을 폭파하게 된다. 원래 교량은 남쪽은 철도이고, 북쪽은 인도교인데 사실 제대로 폭파되지 않아서 적이 이날 밤에 이 교량을 이용하여 차안상으로 들어오게 된다.
(3) 주저항선 전투 : 임진강 방어선
(가) 문산 돌출부 공방전
1) 제11연대 출동과 배치상황
'50. 6. 25일 수색에 위치한 제11연대(최경록 대령)는 비상발령 후 2시간이 지난 08:30분에 비상소집된 영외거주 장병과 일부 복귀한 외출병력을 점검하고 있었다. 이때 채병덕 소장이 예고없이 연병장에 나타나 연대장을 찾았다. 하지만 연대장이 아직 들어오질 않아서 만나지 못하고 인사주임 김정열 대위에게 "제11연대는 송악산전투 때와 같이 용감하게 싸우라"는 말을 남기도 갔다.
제11연대는 복귀하는 병력을 모아서 1차로 488명, 2차에 131명, 3차에 361명을 임시 열차편으로 수색역에서 총을 지급하며 문산역으로 이동했다. 제2대대에서 1개 중대를 임진강변으로 진출시켜 후퇴하는 제12연대 병력을 엄호하도록 했으나 적의 기마대에 이어 대규모 부대가 접근하여 옴에 따라서 본진으로 복귀하게 된다.
2) 주요전투
문산돌출부에 준비된 진지를 점령하고 있을 때에 개전 당일 자정이 지나면서 임진강 철교로 5대의 전차를 동반하고 적이 밀려들어 대전차포를 사격했으나 전차는 멈춤이 없이 아군 진지를 유린하기 시작하여 다음날 새벽에는 문산 외곾까지 밀려난다.
(나) 파평산 일대 공방전
당시 제13연대장 김익렬은 외출중으로 08:00시경 돌아오고, 부연대장 김진권 중령은 보병학교에서 피교육중이었다.
1)제1대대 상황
제13-1대대는 대대기동흔련 중에 있어서 문산초등학교의 자하리 분교 부근에서 24일 야영중에 있었다. 대대는 25일 새벽 04:30분경에 고랑포 방면에서 요란한 포성소리에 상황을 파악하려 했으나 연대와의 유무선 두절되었다. 조식 후에 준비명령을 내리고 전방감시하니 벌써 적이 목격되어 전투준비를 명하게 되었는데 10:30분경부터 적과 교전이 시작되었다. 이때 금곡리에 포진한 제6포병대대(노재현 소령) 예하 제3포대와 81mm 박격포가 집중되며 적은 덕현리 쪽으로 밀려났다.
한편 제2대대는 병력이 축차로 투입되면서 10:40분경에 적의 기마대가 장파리에 나타나고 일부 도보부대가 나타나 57mm포로서 사격을 하여 적은 여기서도 뒤로 밀려났다.
-38선------------------------------------------------------------------------------------------------------------------------------------------------------------------
적1사
적1-14연 적1-3연대 고랑포 임진강
적1개 대대/전차 적1개대대/전차 적1개대대/전차
가여울 임진강
적1-2연대(-)
장단 아곡동 장파리 적성 1사=7사
임진강
일월봉 파평산 제13-1대대 육교대대
적 대대/전차 임진교 제11-1.2대대 제13-2대대
문산 화석동 금곡리 제13-2대대집결지
제13연 지휘소
보교대대 제11연지휘소
굴촌리
적전리
제1사지휘소
그러나 제1대대 전방 덕현리 앞 노상에 적전차 5대가 나타났다. 대대장 김진위 소령은 각 중대에서 특공대를 모집하여 적전차를 공격하여 무력화 시켰다. 그런데 우전방 357고지 일대는 가용병력이 없어서 공백지대였다. 더구나 우인접 제7사단의 제1연대(함준호 대령)이 감악산을 비어둔 채로 동두천-의정부쪽으로 이동해 갔다.
따라서 대대는 81mm와 105mm포병사격으로 적의 진입을 차단하여 일시적으로 적을 뒤로 밀려나게 하지만 결국은 중과부족으로 후퇴하게 된다.
2) 제2대대 상황
연대 좌일선 제2대대(윤천봉소령)는 이날 정오 무렵에 대대장이 외출에서 귀대하였다. 정오가 지나 적이 장파리로부터 도로를 따라 남하하여 화력으로 제압하였다. 해가 넘어 가면서 대대규모 적이 적전차를 선도로 공격하여 박석고개가지 진출함에 따라 병력이 대오를 이탈하는 상화에 금곡리에 집결중인 제3대대로 역습을 감행하도록 명령한다.
그런데 전날 연대에 배속된 서울특별연대 예하의 육사교도대(김응용소령)가 문산으로부터 행군으로 파평산 우측으로 진출하였다. 다시 357고지를 탈취하려 진출 중에 벌써 적이 점령하여 진출이 불가능함에 따라 무명 230고지를 점령하였다. 그러다 적이 우회하여 공격해 옴에 따라 2문의 105mm를 유기한 채로 봉일천으로 철수하게 된다. 이 당시에 포를 잃은 포대장 전남식 중위는 자결해 버렸고, 교도대장 김응용 소령은 실종된 상태였다.
(다) 최후 저항선으로 철수
사단은 우일선 제13연대 2대대가 우단에 형성딘 돌파구 확장 저지에 치중하는 동안 적 전차가 1번도로를 따라 남하하고 있음으로해서 우일선이 퇴로마저 차단될 위험에 처하게 되자 야간 철수로 최후 방어선인 봉일천선으로 철수를 하게 된다. 사단 지휘소는 봉일천초등학교에 위치했으며 27일 여명을 기해 제13-1대대가 파평산에서 철수를 개시하였다.
봉일천 일대는 증원부대로 올라온 제5-15-3대대와 제5-20-3대대가 진지공사를 하고 있었고, 26일 문산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제12연대장 전성호 대령(또 다른 자료에는 전대령이 개성에서 부상을 당하여 헛소리를 하는 등 상태가 나빠서 교대되고, 차후에 9월에 있는 인천상륙작전 양동작전으로 포항 장사지구에 학도병이 상륙하게 되는데 이 작전을 수행했다는 설도 있음) 후임으로 정보국의 김점곤 중령이 부임해 왔다.
(4) 최후 저항선 전투 : 봉일천 전투
문산 적1사, 적105전차여단-203연대
적전리
파주
적1-2연대 /적 전차중대 적1-3연대
봉암리 적 전차중대
아15-3대대 문산천
위전리 151m 아 13-3대대 아 13-1대대
아20-3대대
도내리
아15-10중대
둔전동 동거리 아13-2대대
아20-3대대
두문동 15연=13연
금촌 아18-2대대
봉일천
'50.6.26일 야간 임진강선에서 철수를 개시하여 27일 아침 봉일천 전방에 방어선을 점령하였다. 하지만 철수간 제11연대와 보병교 교도대대는 철수명령이 너무 늦게 전달되어 말단까지 전달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따라서 건재가 무너지고 병력이 분산되어 부대를 재정비 해야할 상황이 발생했다.
반면 우일선 제13연대는 북한군이 퇴로를 차다하기 전에 교대진지에의한 지연전을 하며 손실이 비교적 적은 가운데 도내리 우측의 최후저항선을 점령했다.
한펀 의정부지구 전투에서는 제7사단과 이를 증원하기 위해서 투입된 제2사단이 이미 철수하여 수도 서울이 실함위기에 빠지는 위급한 상황이 전개되는데 당시 통신망이 두절되어 사단은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문산리-법원리 일대가지 남하한 북한군 제6사단(-)과 제1사단은 1번도로와 307 도로로 보전포 협동작전을 전개하여 공격태세를 완료하고 공격을 위한 정찰 활동을 실시하고 있었다.
이날 27일 10:00시에 좌일선 제15연대가 문산으로부터 남하하는 적 6사단 예하의 2개 대대와 격돌하는 것을 시초로 봉일천 선에서 피아의격전이 전개되었다.
(가) 위전리 일대의 공방전
1) 제15연대 방어전투
사단의 좌일선 제15연대의 1개 대대와 제20연대의 제3대대를 제11연대 전방에 추진시켜 사전에 진지를 접령하게 함을로서 2중방어선을 편성하였다.
6.27일 10:00시경부터 시작된 적의 공격은 12:00시경에는 적 전차 18대가 100여필의 기마대를 선두로 1번도로를 따라 남하하고, 이에 아군은 대전차 로켓포로 일제히 사격을 하였으나 적 전차는 그대로 길옆 로켓포 진지를 깔아 뭉개며 전진하였다. 이에 아군은 수류탄으로 육틴공격을 감행하여 중대장이 전사하는 등의 용맹함으로 적전차 6대를 무력화 시켰다.
하지만 아 15연대는 탄약이 바닥나고 적이 계속하여 밀고 내려오자 봉일천선으로 철수하게 되는데 우일선 제20연대 3대대가 철수한 뒤를 따라 적이 우회 침투하여 야간혼전이 일어나게 된다.
2) 대전차 특공대의 활약
한편 26일 사단이 주저항선에서 최후저항선으로 철수를 할 때, 사단장의 지시로 공병대대장 장치은 소령이 대대의 부대대장 김영석소령을 특공대대장으로 하는 3개 분대의 특공대를 조직하여 봉암리 방향으로 진출하여 1번도로 서죽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야간에 우회하는 적의 정찰대를 식별하여 일망타진하였으나 적 전차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김소령은 경과보고를 하려 대대본부와 연락을 시도했으나 두절되고 아침 식사가 문제되어 27일 09:00시에 일단 철수하였다.
3) 문산천 일대 공방전
아 1-13연대는 임진강방어선에서 봉일천으로 철수하여 151고지 우측에 제1대대, 좌측에 제3대대를 배치하였다. 그러나 연대의 우측 제7사단과의 전투지경선에는 아무도 없는 무수공산이었다.
좌측의 제15연대가 적과 교전하는 동안 우측 제13연대 전방은 소강상태를 유지하다 19:00시경에 적 전차를 앞세우고 진전을 동서로 흐르는 문산천 북쪽에 나타나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지근거리에서의 적 전차 궤도 공격과 포사격으로 적을 물리쳤다.
이 무렵 제18연대 제2대대(장춘권 소령)이 연대의 동측방으로부터 철수하여 연대지역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앞서 덕정리 부근으로 출동하여 도락산 부근에 배치되었다가 동두천을 침공한 적이 3번 도로를 따라 의정부를 공격함으로서 철수시기를 놓쳐 적지에 고립되었다가 봉일천 족으로 퇴로를 찾은 것이다. 이들은 28일 아침 의정붕에서 고양으로 철수한 제18연대장 임충식 중령과 극적으로 상봉하여 본대에 합류하게 된다.
하지만 야간에 적의 기습으로 동축방이 노출되어 연대 예비가 있는 동거리까지 침투하게 됨으로서 동거리 남족으로 철수하여 저지진지를 편성하게 된다.
4) 사단의 조치
전방 연대의 적극적인 방어에 시간을 획득한 제11-제2대대를 우일선으로 봉일천 뒤산에, 좌일선으로 금촌 동측방 107고지에 1대대를 배치시켰다. 여기에 김병화 소령이 지휘하는 보병교 교도대대 2개 중대는 철수 중에 수습된 인원으로 봉일천 남족 신선동에 집결하게 하고, 여기에 제13연대에 배속되었던 육사 교도대대 병력도 여기에 합류토록 하였다.
27일 저녁 물렵에 보병교 교도대대 2개 중대는 오산리(동거리 서남족 2km,) 서축방 무명고지를 점령하여 그 전방의 제20-3대대와 13-3대대간의 간격을 메우게 했다.
27일 밤 야간에 15연대의 야간철수를 보고 받은 사단장은 가용병력으로 금촌 북쪽의 주진지를 회복하기 위해 반격 명령을 하달 하였다. 그러나 우익의 제13연대가 밤새 적의 공격으로 주진지를 상실하고 동거리 남쪽의 저지진지를 편성하게 되었다.
또 제2선에 배치된 제11연대는 진전에서 적의 공격을 받게 되지만 화력을 집중하여 적의 진출을 둔화시켰다. 이에 사단은 29일 08:00시에 2개 대대 병진으로 공격하여 위전리-도내리 선까지 진출하여 주저항선을 회복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우익의 제13연대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계속하였다.
이에 사단은 서울특별연대와 제20-3대대를 투입하여 제11연대 우측방에 형성된 돌파구 확장을 저지하도록 명령하여 이날 11:00시를 기하여 좌우가 연결되는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사단장은 이날 정오무렵 수도 서울의 함락 소식을 듣게 되고 사단이 고립된 상화하에서 여하히 행동하느냐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5) 한강이남으로의 철수
사단장은 28일 정오 무렵 불확실하나마 서울이 실함되고 한강상의 교량들이 파괴되었다는 첩보를 입수하였다. 긴급 작전회의에서 사단은 부대별로 이산포와 행주나루를 통해 도하 철수를 개시하며 6월 30일까지 시흥에서 집결한다고 결정하였다.
하지만 작전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전방 전투부대들(서울특별연대)과 제20-3대대, 제5사단에서 증원된 부대들은 이 지역 지도도 없어 철수간에 혼란을 초래하게 되었다.
[도하는 도하작전이 아니라 각자 알아서 떠나라는 비극이었다]
또한 각 도하지점에는 소속을 달리하는 여러부대가 먼저 도하를 하려는 문제점이 노출된 가운데, 많은 부대가 헤쳐 모이식 이별아닌 이별를 하고 각자도생의 길을 택해야 했다. 사단장은 행주나루를 통하여 건너갔다. 이 당시에 이미 좌일선 제12연대 2대대를 추격중아던 북한군 제6사단 일부가 벌써 김포 비행장과 개화산 일원을 점령하고 사격을 가하여 비록 도강을 했더라도 김포평야를 무방비로 가로질러 가야하는 병력들의 피해는 엄청나고, 도하장소에는 미처 배가 없어 떠나지 못한 많은 인원이 적의 표적이 되어 전사하게 되었다. 사실 도하는 도하가 아니라 알아서 떠나는 비극이었다.
3. 강화-김포 전투
가. 개 요
서울북쪽 봉일천과 의정부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한강 하구 김포에는 또 다른 적이 서울을 측면에서 위협하고 나타났다. 북한군 제6사단(-)이 개성을 점령한 뒤 25일 저녁 국군을 추격하여 영정포에 집결하였다. 이들은 강화도와 김포반도로 도하하려 도하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적의 도하준비를 보고받은 육군본부는 남산학교장 계인주 대령을 김포사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그곳으로 도하한 아 제1-12-2대대를 포함한 남산학교,보병학교 후보생, 공병학교 학생, 보국대대 병력과 그곳으로 투입된 독립기갑연대 일부 부대를 통합 편성하여 적의 도하를 대비토록 조치하였다.
'50.6.26일 16:00시경 적의 도하정찰이 두드러졌으며 27일 적은 대안에서 지원사격과 더줄어 본격적인 도하를 개시하였다. 그러나 보국대대의 돌파로 퇴로가 차단되었음을 알고부터 방어선이 붕괴되기시작한다.
이에 김포사는 김포방어의 마지막 선인 운유산-73고지선에 방어진지를 편성하지만 28일 새벽 적이 전차를 선두로 대대적인 공격을 재개하여 물러나기 시작한다.
나. 육군본부 조치
(1) 김포 일대 국군 부대의 초기 대응
적 제6사단(-)은 전쟁 당일 강화도와 김포반도를 돌파하여 김포비행장을 확보한 다음, 시흥-영등포 방면으로 우회하여 경부국도에서 아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배후를 기습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26일 오후가 되어서야 강안에 나탄기 시작했다.
당시 육군은 영정포-김포반도 북단 사이의 한강하구의 지형적인 여건을 고려하여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으며 여기에 대비한 계획도 사실 없었다.
25일, 개성부근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있던 아1-12-2대대는 적의 공격을맞아 일부는 문산방면으로 철수하는 가운데 주력은 한가으로 남향하여 정관리(개성 동남쪽 10.5km) 일대의 포구에서 선박 10여 척을 얻어 대대장 등 150여 명이 한강을 도하하였다. 대대가 도하하여 김포반도의 시암리(통진 동북쪽 10km) 부근에 상륙한 시간이 19:00시 전후였다.
대대는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식사를 하고 강변을 경게하면서 밤을 지새게 되는데 저녁무렵 제3대대의 부대대장 박광윤 대위, 제11중대장 백문 중위등 일부가 합세하여 병력이 700여 명으로 불어났다.
개성
영정포 적6-15연 적6사(-)
적6-13연
적6-포뵹연 석유포 강
임
하조강리
염
강녕포 진
아12-5중
조강리
아12-7중 아12-8중 아12-6중
하
문수산 기금리
아기갑-연
고막리
수 아-기갑7중
포내리 통진
로 아-보국대대 보교집결지
용수리 아13-2대대 지휘소 마송리
기갑중대 지휘소
(2) 김포지구사령부의 편성
(가) 육군본부의 조치
전날 철수한 제12-2대대를 시암리 부근에, 그리고 서울에서 출동한 기갑연대와 장갑소대는 그 반대쪽의 하안에서 임무수행을 하게 된다. 당시 육본은 한강이란 지형적 잇점으로 적이 도하를 하지않으리라 보고 별다른 대책을 수립하지 않았다.
그러나 계인주 대령을 사령관으로 남산학교 기간요원과 공병학교 요원보병학교 학생연대 후보생 등을 조합하여 편성하다보니 상호 연락대책도 없는 미봉책이었다.
(나) 제12-2대대 방어 편성
제2대대는 시암리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대대장 한순화소령이 26일 02:00시에 연대본부를 찾아 봉일천초등학교에 당도했다. 그러나 제1대대 병력 일부가 집결되어 있어 대대장은 08:00시에 다시 파주의 사단본부로 가서 백선엽으로부터 병력을 이끌고 봉일천의 본대와 합류하라는 명려을 받았다.
그러나 대대장이 다시 11:00시에 김포읍으로 돌아왔을 때는 대대병력은 김포사의 지휘를 받고 있어, 할 수 없이 김포사의 명령으로 문수산을 중심으로 강안에 병력을 배치하게 된다.
(다) 기갑연대의 투입
한남동에 위치한 기갑연대(유흥수 대령)는 전쟁 당일 귀대하는 병력을 수습하여 출동준비를 갖추었다. 독립연대로서 수도사(이종찬 대령)와는 별도로 육본으로부터 작명을 받아 지역별로 장갑차를 전방에 분할 배속하에 된다. 이유는 장갑차에는 장거리 무선이 가능한 무전기(SCR-506)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강릉과 춘천의 제8, 6사에 1개 중대식 배속하고 1개 소대를 김포반도에 파견하게 되었다.
(라) 보국대대와 보교대대의 출동
밀양지구에서 공비선무공작을 벌이다 영등포로 복귀한 보국대대(방원철 소령)는 귀순장병 174명으로 편성된 부대였다. 대대는 3개 중대로 편성하여 2개 중대를 제6,7 양사단에 정찰대로 파견하고 1개 중대만 본부에 대기 중에 대대장이 판단하여 김포반동듸 공백을 메우는 역활을 맡게 되어 통진 남쪽 180고지군에 배치된다.
한편 시흥의 보병교(민기식 대령)는 육본 명으로 후보생 대대를 편성하여 김포로 출동하게 되었다. 당시 보교에는 금년 2월에 입교하여 8월에 임관에정인 갑종간부후보생 1기는 전부 문산으로 출동하였으며, 이날 명령을 받ㅇ든 후보생 대대의 구성은 갑간부 후보생 2기(149명, 4.21 입교), 동 3기(150명, 6.2일 입교), 포병사관후보생 제1기(70명, 5.15입교), 병기사관후보생 제4기(124명, 4.3입교), 일반공병 제5기(52명, 4.10입교) 등이었다. 보교 대대는 4개 중대로 편성하여 통진으로 나아가 보국대대 동쪽에 배치 된다.
(3) 도하 저지작전
26일 야간, 통진을중심으로한 김포반도 서북단에는 3개 대대가 있었으나 부대간의 협조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보국대대 진지가 먼저 무너지고, 27일 날이 밝자 포병의 엄호하에 선박들을 이용한 적의 도하가 본격화 되었다. 적은 보국대대 진지를 돌파한 이후에 북쪽 한강에서도 야음을 이용하여 강녕포 동남쪽의 강안일대에 상륙하였다.
다. 장림-운유산-김포 전투
(가) 장림-운유산 부근 전투
25일 밤 통진 동남쪽에 진지를 마련한 보병학교 의 후보생대대는 26일 08:00시에 적의 정찰대 1개 소대가 대대의 좌일선에 출현하면서 격전이 시작되어 이미 적이 먼저 침투하고 있어 11:00시경 제12-제2대대와 합세하여 장림선을 방어하게 된다.
이때 적은 1개 대대로서 문주산을 석권하고 곧 통진-김포가도를 따라 공격하게 된다. 하지만 13:00시경 장림선이 무너지고 후보생 대대는 운유산 북쪽에, 으로, 제12-2대대는 양곡부근에 진지를 편성하게 된다. 기갑연대 혼성병력과 남산학교는 김포읍에 집결하고 보국대대는 영등포의 본대로 복귀하게 된다.
이곳 장림 운유산 축차 진지상에서 후보생 대대장 장영문 소령이 전사하고, 일부 부대원들이 시흥이나 부평으로 철수한 병력이 적지 않았다.
한편 25일 아침 대구의 제3사단(유승렬 대령)의 제22연대(-)가 육본의 명으로 제1사단을 증원하고 제3대대가 김포사를 지원하기 위해 운유산 동쪽의 73고지를 점령하여 , 그 좌측의 후보생 대대와 저녁에 다시 증원된 수도사-제8연대-3대대와 더불어 김포읍에 대한 최후저지선을 구축하였다. 이날 낮에 김포읍에 집결한 기병 제7중대는 한강변의 63고지에 배치되어 제22-3대대 전방에서 적의 한강으로의 우회 침투에 대비하였다.
이날 부평지구의 잔류병력도 김포전선에 동원되었다. 제1공병단(윤태일 중령) 산하 일부는 부평-김포읍 사이 계양산(395M,) 동쪽으로 추진되고, 병기학교는 장교특전대를 편성하여 한강변의 전호부근에 배치하게 되었다.
(나) 김포 부근 전투
6월 28일 날이 밝자, 북한군 제6사단의 공격이 재개되었다. 06:00시에 어선으로 김포반도 동쪽 한강을 역류하여 접근한 적의 일부가 선상에 82mm 박격포를 장치하고 사격을 가하면서 63고지 동북쪽 강안에 상륙함으로서 첫 교전의 신호가 울렸다. 이에 따라 기병 7중대는 철수해야만 했다.
이때 운유산쪽에서 적 연대규모가 포병화력의 지원하에 08:00시에 적전차 2대가 개활지를 횡단하여 후보생 대대의 진전으로 접근하였다.
이날 밤에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면서 김포사는 부평지구로 철수하게 된다. 당시 육본은 노량진-영등포 방어에 중점을 둔 나머지 김포쪽에는 손쓸 여력이 없었다.
28일 늦은 오후부터 문산지구의 아 제1사단이 행주와 이산포로 도하하여 일부는 영등포를 경유하여 시흥으로 향ㄴ하고, 일부는 비행장으로 모여 들게 된다.
반면 적 제6사단(-)이 김포를 유린한 다음 일몰 무렵 비행장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날 저녁에 김포사는 소사읍사무소에 지휘소를 개설하고 김포-부평도로를 차단하도록 하고, 증원된 제3-제22연대와 제12연대 병력으로 비행장 남쪽 구릉지대의 107고지 일대에 배치하여 적이 소사로의 남진을 저지하도록 조치하였다. 이때 제8-3대대는 비행장에서 영등포쪽으로 이동하였다.
이 당시에 적 제6사단은 정찰대를 비행장과 계양산 쪽으로 내보내어 야간에 비행장을 확보하려 하면서 부평 기지를 무력화하는 동시에 영등포로붙너 한강선 서측방에 압력을 가하려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다만 적이 행주 대안의 한강변에서 아군의 도하를 방해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들 김포의 북한군 제6사단은 제1군사령부와 연락이 원활치 않아 독자적인 상황판단에 다른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날, 28일 밤까지 그들은 국군 제1사단의 도하철수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날 밤 김포지구사는 사령관이 실종되고, 소사로 집결하자 시흥지구사는 현지늬 제3사단 참모장 우병옥 중령을 사령관으로 임명한 다음 김포비행장을 탈환하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건재 부대가 지휘관계가 복잡하고 잔류병력이 전투력 발휘에 문제가 많은 점이 있었으나 6. 29일 여명을 기해 김포사는 김포비행장을 탈환하기 위해 06:00시 공격을 가했으며, 비록 성공을 하지는 못했지만 7월 3일까지 소사-영등포 부근에서 적과 수차례에 걸쳐 일대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제 4 절 6.25전쟁 북침설의 진상규명
이상의 내용으로 서부지역에서의 초기전투에 대해 약술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 중에 바로 북침설에 관한 내용이다. 흔히 커밍스의 브랜드처럼 마치 북침설이 당연한 것처럼 일부 좌파관련 쪽에서 우호적인 발언을 하고 잇는바 여기에 그 관련 내용을 심층있게 열거해 보고자 한다.
사실 옹진이나 개성은 지금 북한지역이므로 탐사나 탐문은 불가하다. 이곳은 전쟁전부터 북한군의 도발이 잦은 지역으로, 이곳에서의 쌍방간의 교전은 누가 먼저 전쟁을 시작했느지의 중요한 헤게모니가 이곳에 있다. 물론 이곳 말고도 포천이나 춘천, 강릉 지역에서도 있었고 우리도 여기에 맞대응하여 월경하여 흔히 말하는 보복 작전을 하기도 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왜 북한이 북침이라고 했는지의 내용과 당시 육군 수뇌부의 초기전투에 관한 좌충우동식 대응에 대한 증언들을 알아보고 유해발굴에 관한 내용은 후술하도록 하겠다.
1. 북침설의 배경이 된 전쟁전 전투상황이다
북한군은 이미 47년 7월에 38경비대를 편성한 후 소련군과 교대하여 38도선 경비를 인수히고 유리한 거점을 선점하였다. 반면 우리는 49년 초부터 미군으로부터 인수받아 방어진지 편성과 진지공사를하게 되는데 이를 방해하려 수시로 월경하여 도발을 자행하여 왔다.
이들이 자행한 불법사격 및 공격횟수가 무려 총 847회에 달한다. 이는 해방이후를 고려하면 3일에 한번 골이고, 북한정권이 수립된 이후를 고려하면 매일 1회 이상 되며 이때마다 이들은 그 책임을 우리 국군에 전가하며 선전공세를 벌였다. 여기서는 그 대표적인 사례만 요약 기록한다
가. 옹진 - 개성지구 전투
6.25전쟁 전부터 옹진반도와 개성지역은 쉼이 없이 송악산 전투 등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져 언제 전쟁이 날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에 있었다.
먼저 옹진은 제17연대가 방어하며 전쟁이 발발 하지만 그 이전에 18연대도 있었고 2연대도 있었던 지역으로 '49. 5월 4일의 송악산 전투를 비롯하여 은파산 전투 등 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이 지역에 부임한 연대장이 파직되는 등 우여 곡절이 많았다.
반면에 개성에서 고랑포에 이르는 구간은 제1사단이 방어하는 지역으로 서울의 관문으로써 적이 기계화부대를 이용하여 접근시 불과 1시간이면 도달하는 40여km 거리에 있는 38도선 지역이다.
옹진반도는 서울에서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해주를 거쳐 개성을 지나야 하는데 서쪽으로 끝인데 1개 연대와 경찰 일부가 부여 받은 책임구역이 45km나 되었다고 하니 무척 광정면이다.
옹진지구는 전쟁 당시에는 제17연대가 있었지만 그 이전에 제2연대, 국군 제1사단 예하 12,13연대도 들어 왔고 경찰대도 있었다. 이어서 18연대가 들어 왔다가 전쟁 발발 직전에 백인엽 대령이 지휘하는 제17연대가 들어왔다.이곳은 항시 적의 침투가 잦았던 곳이다.
북한이 주장하는 북침설의 주요 배경이 되는 곳이 이곳이며, 사실 이들은 이곳을 이용하여 보.포 기동훈련을 마무리하고 전차는 은밀하게 숨기는 연막 작전을 폈다.
또한 개성에서 고랑포구 간은 서울에 이르는 최단거리 접근로로써 전쟁 전부터 이곳을 이용하여 남북교역활동(남북간에 주로 군에서 물물 교환을 해 왔음, 고랑포에 서울 화신백화점 분점이 있었다)이 빈번히 이루어진 결과로 그들은 지형 숙지를 하고 민심을 교란하는 선무 공작을 자주했던 곳이다.
여기서 주요한 키포인트가 있다. 전쟁전 옹진-개성지구의 전투 사례를 알아봐야 잊을만 하면 터지는 북침설의 실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기에 전쟁전 주요전투 사실을 먼저 알아보고 이어서 그날의 전투를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먼저 우리가 너무나 낯익은 송악산 전투가 벌어지고 육탄 10용사의 신화가 만들어진 개성지역을 알아보고 가장 서쪽의 반도인 옹진지구의 전투사례를 열거하도록 하겠다.
(1) 개성지구 전투('49.5.4~'50.6.24)
개성하면 고려의 4백년 도읍지로써 우리가 잘 아는 송악산(488)이 있고 박연폭포가 있고 UN고지, 비둘기고지 등 낯익은 이름들이 있다. 하지만 사실은 이 고지들은 6.25전쟁 전에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제1사단 제11연대가 방어를 하던 그 시절에 전방지역에 전투진지 공사를 하라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송악산은 북한군 경계지역인데 바로 우리가 그 진전에 진지를 구축하자 '49.5.4일 우측 능선 292고지일대와 유엔고지 비둘기 고지를 그 놈들이 공격하여 빼앗아가 버렸다. 따라서 사단의 명령에 따라 제11연대는 특공대를 편성하여 피탈당한 지역을 회복하게 되는데 이 당시에 제2대대장, 하사관굥육대장, 육탄용사 10명 등 39명이 전사한다.
송악산 전투 이후에도 북한군은 49년 5월 17일에 1개 대대 규모로 월경하여 배천을 공격하였으나 아군이 격퇴하였다. 송악산을 점령한 북한군은 49년 7월 25일 개성시에 박격포 사격을 가하여, 제1사단장 김석원 장군은 제11-1대대로 송악산을 점령토록 하여 8월 3일까지 공방이 계속되었다.
"육탄10용사의 비밀을 간직한 송악산전투"
북한군은 우리의 고지를 빼앗자마자 특화점으로 만들어 우리의 역습에 대비하게 된다. 이에 1사단은 하사관 교육대 인원까지 동원하여 수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정규전보다 더한 치열한 공방끝에 육탄공격으로 특화점을 날리면서 동 고지를 일시적 확보하게 된다.
지금 서울 동작동 현충원 현충문 우측에 육탄 10용사 충혼비가 서있다. 그런데 이 육탄용사의 신화가 조작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한신.김익렬의 증언]
당시 좌측 옹진지구에 가 있었던 제18연대 한신(당시 1대대장, 예비역 대장)대대장의 증언은 만들어진 신화라 하고 당시 인접 13연대장 이었던 김익렬중령도 만들어진 신화라 한다.
[내가 직접 김석원 장군으로부터 들은 이야기]
하지만 내가 직접 김석원 장군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물론 그중에 일부가 살아서 북한에 생존하여 대남방송도 했다고 하지만 그 인원은 비겁자로 그들에게 포로가 된 것이고 사실 워낙 사단장의 지시(특화점을 파괴해야만 공격이 진행되기 때문)로 육탄 공격조를 선발한 것이 사실이고 이 특공대를 지원하기 위해 별도의 지원조가 편성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 공격을 은폐하기 위해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을 해 진격을 하는 가운데 특공조가 진출하다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모두가 또 실패했구나 하는 순간 갑짜기 적 특화점에서 꽝꽝 하며 천둥이 치고 놀란 북한군은 뒤로 물러나고 쉽게 점령을 하게 되었다.
10명의 특공조가 아무도 보이지 않아 당연히 그 인원들이 임무를 완수한 것으로 판단되어 연대장의 건의에 의해 사단장이 상부에 보고함으로써 장병 사기 진작을 위한 신화가 만들어 졌다.('74년도에 직접 들음)
같은 시기에 육군의 2개 대대가 대대장이 대원을 이끌고 월북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져 대내외로부터 엄청난 질타를 받아 군의 사기가 땅에 떨어진 싯점이었다. 그런데 송악산 전투마저 패했다고 하면 불난 집에 휘발유 붓는 격이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유야 어떻게 되었던 적의 특화점은 폭파되었고 승리했다.
[내가 서부덕이다, 전사한 서부덕이 살아서 북에 나타났다?]
그런데 얼마 지나서 "내가 서부덕이다"하고 당시 산화하여 소위로 특진 추서된 팀장이 북한지역에 나타났다고 한다. 하지만 그 후 전쟁 종료 후에 일부 인원(한신, 김익렬 등)이 그건 만들어진 것이라고 증언을 하게 되지만 사실 규명이 어려워 그대로 지났다.
요즘 다시 친일파 업적 지우기 등 일부 인원들의 주장에 편승하여 다시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 문제는 나중에 내가 하늘에 올라가면 최경록 당시 연대장과 김장군님을 만나뵙고 사실을 남기리라 다짐한다.
물론 이 이전에 북한이 개방되어 어느 정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자료가 객관적 평가가 가능한 것이라면 그것을 이용하여 재평가 해도 된다고 본다.
[육탄 십용사의 진상에 대해 증언내용을('64.5.4) 요약]
이 내용은 아직 그 진실이 무엇인지 정답이 없는 가운데 당시 6.25전쟁 전에 북한군이 송악산을 점령하고 있는 가운데 제1사단장 김석원 장군이 제11연대장 초경록에게 공격하여 점령하라 하였으며 제13연대는 예비로 대기 상태로 있게 된다
.
제11연대장은 일선 부대에 박격포탄을 보급하기 위해 공병소대장(박모)으로 하여금 10명을 공동 지휘하여 박격포탄을 짊어지고 송악산으로 출발하게 된다. 그러나 지형숙지를 잘못하여 적에게 조우되고 박소위 혼자 탈출하고 10명은 모조리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되었다.
이 사실이 사단장에게 보고 되어 박소위를 총살하라고 하니 그 박소위와 친구지간인 최중령이 정식 보고를 하는데 있어서 그 10명이 모조리 포탄을 안고 적진에서 자폭한 것으로 정정 보고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채병덕 총장은 김석원 장군과 남북교역 문제로 감정대립이 악화되어 있던 때라 장례식 하루전까지도 행사를 승인하지 않고 있다가 이종찬, 이용문 대령등이 국군의 사기진작에도 좋으니 하자고 해서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자폭했다는육탄10용사는 포로가 되어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살아 있다는 방송도 하고 가족들에게 편지도 보냈다고 한다.
김익렬 장군이 평양(제6사단 제19연대장으로)에 입성하였을 때 육탄 10용사가 꽃다발을 받고 있는 사진을 보고 놀랬다고 하면서 이는 순전히 최경록 중령의 조작에 의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김석원 장군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직접 최경록씨는 아무말이 없고 김석원장군 또한 아무 말이 없고 북한도 그 이후에 아무런 말이 없었다는 것은 그 당시에는 이런 사건을 이용하여 남한은 사기진작에, 북한은 과대 포장하여 본인들의 체제 우수성 선전에 악용한 사례들이 많았다.
따라서 이 김익렬 장군의 증언 또한 그가 당대 육군의 3대 대포 중에 대포였다는 이야기에서, 더구나 제1사단 제13연대장으로 초기전투에서 그의 행적 또한 많은 의문점을 낳는다는 사실에서 북한의 개방에 따른 사실 관계를 가지고 차후에 우리의 전쟁사는 다시 쓰여져야만 한다.
(2) 옹진지구 전투('49.5.21~11.22)
옹진지구는 제12연대 1개 중대와 경기도 경찰기동대 3개 중대가 38선 경비를 담당하고 있었으며, 38도선상의 국사봉, 두락산(257), 충무고지, 국수봉(527), 은파산(223), 까치산(152) 등에서 벌어지게 된다.
먼저 '49.5.21일에 옹진 북방 국수봉선상의 고지군으로 북한군이 대대급 이상의 공격을 감행하여 국수봉과 두락산을 탈취하고 무려 5km나 38도선 남방으로 내려오게 된다.
이에 육군본부는 '49. 6. 5일에 옹진지구전투사령부(옹진사)를 설치하여 사령관에 김백일 대령, 참모장에 12연대장 강영훈 대령(전 국무총리)이 보임되고 12연대와 13연대뿐만 아니라 독립1대대, 제18연대 1대대(한신소령)를 배속 시켰다. 동시에 그 보복작전으로 38도선 북쪽의 10km에 있는 태탄을 공격하도록 하여 독립1대대가 들어갔으나 22명 전사에 50여명의 부상자를 내고 철수하게 된다.
이에 옹진사는 6.10까지 두락산을 제외한 전 지역을 탈환하지만 두락산과 국사봉 탈환에는 제1사단 제12,13연대의 병력이 계속 실패하고 제18연대가 단독으로 주요 감제고지들을 확보하여 일단락 되는듯 하고 유엔 한국위원단도 전선에서의 우위를 확인하고 돌아간다.
그러나 북한군은 다시 '49년 7월 하순부터 공격을 해와 송악산과 292고지등을 일시적으로 피탈당하고 8월초까지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벌어진다.
이어 옹진지구에서도 '49. 8. 4일에 북한군 2개 대대가 공격을 해와 제18연대 2개중대 병력이 전멸하고 은파산을 피탈당하면서 연대장 최석 대령이 파직 되었다.
이에 따라 국민들의 내부 불안을 덜기 위해 8월 5일에 제주도에 들어가 있던 제2연대장 함병선에게 지역을 회복토록 함으로써 8일에 반격작전으로 원 진지를 회복하지만 많은 피해가 발생한다.
그후 계속적으로 전투가 벌어져 10. 14일부터 공방전을하다 11월 22일 드디어 옹진지구 주요고지를 적에게 피탈 당하고 그런 상황에서 해가 바뀌고 전쟁이 발발 하게 된다.
[제1사단 제13연대 소속 권대식('67.5.5일 증언, 군편소)님의 증언 ]
"사체는 그냥 두었습니다. 총하고 사체를 가지고 올 수가 없어서 사체를 두고 나왔습니다."
옹진의 은파산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부상으로 군문을 떠났던 제1사단 제13연대 소속 권대식('67.5.5일 증언, 군편소)님의 증언에 의하면 13연대는 온양에서 '49년 1월쯤에 서울로 올라와 국군 제1사단이 되고 '49. 5.31일 날에 인천항을 떠나 옹진으로 들어가 바로 6. 4일날 은파산 전투를 했다.
"거기에 있는 사체는 어떻게 했습니까?"
"사체는 그냥 두었습니다."
"그것이 언제였지요?"
"그때가 6.18일경쯤 될 겁니다. 하여튼 네 번을 들어갔다가 도저히 공격을 못했습니다. 그러다 김석원 장군이 특공대를 조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올라 갔는데 개들은 기관총에다 사수를 묶어 놓았습니다. 하도 기뻐서 만세를 부르다 적의 포화에 2명이 부상을 하고 그때 들어온 18연대에 인수를 했습니다. 그리고 옮겨 방어 임무를 하다 적 1개 중대에 포위되어 적의 실탄에 손에 부상을 당했습니다. 하여튼 13발인가 맞았는데 한 발만 손을 맞고 옷만 뚫었어요."
[한신장군 증언, 당시 옹진지구 임시 대대장보임]
"옹진전투의 의의가 어디에 있느냐?"
"적이 옹진에서 6.25전쟁 전에 보전포 훈련을 실제훈련을 했다. 이것이 의의다."
한신장군의 예리한 통찰력에 고개를 끄덕이지만 왜 우린 그 당시에 그런 판단이나 대비를 못했을까하는 뼈저린 아쉬움이 남지만 지금이라도 그 잘못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과연 전쟁의 서곡이 없이 6.25전쟁이 발발하겠는가의 질문은 아직도 그 의문투성이의 꼬리를 떼지 못하고 있다. 단지 경계태세를 해제해서 났다고도 하고, 군 내부에 프락치가 세포조직으로 들어와 전방에서 올라오는 각종 정보자료의 심각성을 판단하는데 흐리게 했다든지 다 추측이다.
그런데 전쟁 종료후 10여년이 지난 후 군편소에서 전사 기록을 위해 당시 대대장으로 옹진지구 전투에 참여했던 당시 제6군단장 한신과의 주고 받은 내용에 의미 있는 구절이 살아 있다.
"제18연대 병력이 서북청년단 출신이 많습니까?"
"많았지. 그러나 그렇지 않았어. 맨 처음에 창설할 때에 서청 애들 많았지만 제1,2대대가 서청 애들이 많았고 제3대대가 대구, 경북, 충청... .
지금 18연대 창설자는 최석 장군이 연대장이지만 실제 창설자는 나야. 내가 연대 S-3, 그 다음에 1대대장을 하는데 내가 그 이전에 군기사령부의 행정관을 했지. 그러다가 여순반란사건이 났다 말이야. 그때에 올라 갈 때에 이것 안되겠다. 무엇이 있어야겠다. 그 다음에 반공의식이 강한 놈을 가지고 부대를 만들자. 그래서 창설 문제가 나오고 서청애들을 모집해서 제1,2대대는 순전히 서청 애들이, 제3대대가 경북, 충청도 이렇게 일부 만들었다.
그런데 옹진전투가 나기전에 대구 제6연대의 폭동사건이 있었다. 포항의 1개중대가 그 사건이 나고 했기 때문에 대구가 상당히 좋지 않았다. 제6연대에 공비가 침투하고 해서 내가 명령을 받았어요. 그때 이응준 장군이 참모장인가 될거야.제18연대...... 내가 1개 대대를 지휘해서 대구 내려가서 있으라. 솔직히 애기해서 제6연대를 감시하라는 것이었다."
"그때 제18연대는 서울에 있었습니까?"
"온양...... 1개 대대를 가지고 내려갔다. 대구에 내려가 있다가 그 제1대대를 제6연대에 주었다. 다시 말해 혼합해야 되겠다 그렇게 되었다. 그래 가지고 6연대의 2대대를 18연대에 주었다. 그리고 나는 원대복귀했다. 그러다 옹진전투가 일어나고 내가 1개 대대를 데리고 가게 되었다. 나는 대대장이 아니지만..... 그래서 부대를 편성했지. 각 연대에서 1개 대대를 편성해서 데리고 갔다. 그러니까 순전히 1대대는 서청애들이 아니야 경기도 애들도 있고. 다만 서청애들이 많았다."
"김종갑 장군이 솔직히 북한군 전투력이 세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세었다. 화력도 세고 병력도 세고 왜냐하면 당연한 이치란 말이야...... 왜냐하면 그쪽에서는 해주까지 사리원에서 육로 아닌가? 얼마든지 그쪽에서는 병력이 나올 수 있지만 이쪽에서는 배로 밖에 수송 못한다. 병력을 인천에서...... 보급문제 곤란하고 병력 투입문제 곤란하다. 또 일단 유사시 병력 철수 문제 곤란하다.
적은 8.15날도 놀지않고 전투준비를 했다. 옹진전투의 의의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적이 옹진에서 6.25전쟁 전에 보전포 훈련을 실제 훈련을 했다. 그것이 의의다."
"그러면 적이 전차를 동원했어요?"
"보포의 협동작전을 완전히 실제훈련을 우리 국군을 상대로 해가지고 실제훈련을 6.25전쟁 전에 했다는 것은 커다란 의의가 있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 빨리 북한군이 기도비닉을 유지하여 병력을 전방으로 추진하고 주요 지휘관이 연회를 하는 시기를 이용하여 남침을 했느냐에 의구심이 많다. 프락치가 유도한 남침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저버릴 수 없는 상황인데 이런 증언 내용을 보면 그들은 치밀하게 계산된 전쟁 준비를 했다느 것을 알 수 있다.
누구는 말한다.
6.25전쟁은 기습 남침이 아니고 준비된 부대가 준비된 시간과 장소에서 준비된대로 내려왔다.
우리는 약정된 상대처럼 옹진반도와 제6사단이 방어한 춘천-홍천 북방에서만 방어력을 발휘했다.
나머지 지역은 각본대로 미리 병력도 빼주고 장비도 빼주고 차포가 없는 장기판에 무슨 기습이냐며 기습 남침이 아니라고 한다.(?)
나. 포천지구 전투
웅진-개성지구에서의 도발리 계속 실패하자 북한군은 49년 6월 12일 약 200명의 병력으로 사직리를 공격하였으나 이러한 첩보를 입수한 국군 제1연대가 사전에 2개 중대를 매복시켰다가 섬멸한다
다. 춘천지구 전투
49년 8월 6일에 북한군 38경비 제1여단 소속 1개 대대가 국군 제7연대 지역 인제 관대리로 남하하여 박격포를 쏘며 소양강을 도하하여 38도선 남쪽의 682고지와 704고지 및 600고지를 공격해 왔다. 이에 춘천에 주둔한 국군 제7연대는 홍천의 제1대대를 출동시켜 반격을 개시, 682고지와 704고지는 탈환했으나 그 동쪽 600고지는 7차례의 공격에도 싪패하여 원주의 제8연대까지 투입하여 합동작전으로 탈환한다.
라. 강릉지역
이 지역도 북한군의 도발이 빈번한 곳이다.적의 38경비 제1여단 예하부대가 수시로 38선을 월경하여 주민의 납치.약탈.방화행위를 하고 국군의 진징에도 공격이 계속 되었다.
49년 2월에는 국군 제10연대가 서림 방면과 기토문리에서 잔교리 지역으로 침투한 적의 공격을 물리친 후 보복 공격으로 기토문리의 적 해군 파견대를 105mm 포로 사격을 하였다. 이어서 인민 유격대가 남파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 7월에는 제10연대가 양양의 북한군 유격대 훈련소를 공격한 후 철수하였다.
2. 북침설 거짓의 결정적 요인? (문헌적 근거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박명림 저, 요약))
가. 북한이 제시한 북침 근거 문서
첫번재 : "미제의 조선침략 정책의 전쟁와 내란 도발자의 진상을 폭로함"이다.
이 문건은 미국군정 방첩대 고문관이자 이승만 정치고문으로 알려진 문학봉이 1950년 6월에 저술하여 1950년 9월에 평양에서 출판된 책자이다. 이 책자에서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같다.
"1945년 9월 진주시부터 미군은 제3차세계대전을 음모했었고, 그 일한으로 이승만괴뢰를 이용하여 북벌을 감행했다는 것이다.
내란도발음모의 구체적인 시작은 트루만에 의한 6월 17일 지시부터인데 6월 17일 트루만은 동경의 군사거두들에게 지시하여 내란도발사태에 대한 군사문제를 토의하여 즉시적인 군사행동을 취할 것을 준비케 하고, 국무성에는 덜레스를 남한에 급파하여 이승만에게 내란도발의 지령을 발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 책자에 따르면 덜레스는 이 협의 과정에서 전쟁을 일으킨 후 이승만의 동경망명을 권고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전쟁이 발발한 후 인민군의 예상치 못한 반격을 받자 이승만은 6월 26일 오후 무초의 권고에 다라 그대로 일본으로 도망가고 말았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맞는 것은 6월 17일 덜레스가 방한한 것 뿐이다.
두번째: 북한 첩보조직이 남한에서 비밀리에 입수하여 분석한 내부자료인 "이승만의 대북 정보.정치.군사공작의 계획안"이다.
이문건에는 남한과 주한미군의 방대한 대북 정보. 첩보조작의 기구와 활동이 자세히 나와 있다. 여기에도 북침의 근거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세번째 : 50년 6월 이후, 북한군이 남한에 진주한 뒤 입수한 미국과 남한의 다른 증거 문서들이다. 이 중 일부는 유엔에 북침의 증거문서로 제출되었다. 먼저 이승만이 그의 미국내 정치고문 올리버에게 1949년 9월 30일에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는 1950년 전쟁이 발발후 북한측이 서울 대통령 관저에서 입수하여 유엔에서 소련의 몰로토프가 제시한 북침 증거물이 되었다.
편지의 내용에 "우리는 김일성 부하들을 산악지대로 몰아내서 그곳에서 그자들을 서서히 굶겨 항복시키게 될 것이요. 그때에 우리의 국방선은 두만강 압록가이 될 것이요. ......, 우리 국민들은 북진을 부르짖고 있소. 한국사람들이 죽기를 맹세하고 기거이 일어나 그자들을 소탕하는 때가 바로 심리적으로 알맞은 지금이란 말이오. 우리가 이 일을 결행하도록 허용되기만 하면 당연히 단시일 안에 이 문제를 깨끗이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확신하오......
나. 남한의 고위관료가 월북 또는 린치되어 발표한 내용이다.
(1) 김효석('50.2월까지 남한의 내무장관 역임, 만주시대 악명 높은 일본군 장교 출신)
'50.7.5일 서울 중앙방송국에 나와 이승만의 북벌음모와 개시를 상세하게 폭로하였다. 자신의 반동적 과오를 뉘우친 뒤 그는 이승만은 49년 7월을 기하여 소위 북벌을 개시하려 하였다고 폭로한다. 자신이 직접 이 북벌음모에 가담했으며 "김석원에게 옹진방면으로 북항하여 평양을 점령할 것과 채병덕에게 본부전선을 지휘하라는 명령을 주었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김석원과 채병덕 관계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북어사건으로 동시 사퇴도 하고 김석원은 전쟁 발발시 예비역 상태였다.
(2) 조소앙(국회의원)
'50.7.12일에 평양에 도착하여 평양의 조선중앙방송국을 통하여 연설을 하였다. 그는 "미제국주의자들은 주구 이승만 살인마로 하여금 조선에 내란을 도발케 한 후 그들의 육해공군을 동원하여 직접 우리조국에 대한 침략전쟁을 개시하고 있다"고 공격하였다.
(3) 송호성(전 조선 경비대 총사령관)
역시 상기 내용과 비슷한 어조로 미국의 지도로 남한이 먼저 북침했다는 식으로 성명을, 북이 시키는대로 발표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납북된 인원이나 기타 자진 월북자들이 앞다퉈 나서서 북침성을 강조하게 된다.
다. 북침설의 결정적 요인
(1) KBS 방송
중앙방송국이 국방부의 요청에 따라 6.25전쟁 당일 07:00시에 북한이 남침하였음을 알리면서 "10만 국군이 건재하니 전국민은 염려하지 말라" 는 낙관적 문구를 넣어 방송하였다.
(2) 북한 평양 방송
50.6.25일 11:00시경에 그들의 남침 기습이 성공했음이 확실해지자 " 북한 인민군은 자위조치로써 반격을 가하여 정의의 전쟁을 시작하였다"라고 선전포고를 한다.
그후 13:35분 방송에서 김일성은 "남한이 북핝의 모든 평화통일 제의를 거절하고 이날 아침 옹진반도에서 해주로 북한을 공격하였으며, 이는 북한의 반격이라는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라고 남침을 은폐하기 위한 방송을 한다.
(3) 옹진의 제17연대가 해주로 돌입했다는 오보 방송
한편 이날 10:00시경 적기가 김포와 여의도 기지를 정찰한 후 정오경 북한군 YAK기 4대가 서울 상공에 출현하여 서울공작창.통신소등에 기총소사를 가하고 폭탄을 투하하여 서욹 시민이 불안은 더해갔다.
이때 옹진에있던 연합통신 최기덕 기자가 옹진에서 돌아와 정훈국에 들러 "내가 옹진을 떠나 올 무렵 제17연대 장병들의 사기는 해주를 공격하고도 남음이 있다"라는 요지의 이야기가 와전되어 북침설의 구실로 악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라. 이사의 내용을 [미국의 브룩스 커밍스]가 짜집기하여 마치 자신이 38도선 선상에 있었던 학자처럼 퍼트려 북침설의 근거로 북한이 지금도 이용하고 있다.
라. 해주북침설, 또는 그와 관련된 남한의 침략유도설
전쟁의 발발을 둘러싼 시각의 대립은 전쟁의 시작과 함께 시작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그날로 세계의 보도는 두 가지로 나뉘었다. 먼저 북한의 신문과 방송들은 전부 남한의 북침을 보도하였다. 프라우다는 6월 26일자에서 타스통신이 받은 북한 내무서의 보도를 그대로 전재해서 전쟁은 남한이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중국의 인민일보는 6월 27일자에 북한의 노동신문의 6월 26일자 사설을 인용하여 남한의 북침을 보도했다. 하지만 위의 보도들은 모두 한국전쟁 결정에 깊이 개입한 소련과 중공의 입김하에 있는 것이니 논할 필요조차 없다.
미국의 북침입장을 즉각 보도한 신문은 좌파신문 데일리 워커가 있다. 이 신문은 6월 26일자에서 평양의 방송을 인용하여 "남한의 공격이 격퇴되었다"고 일면 머릿기사로 보도 하였다. 또한 사설에서는 "덜레스가 도착한 후 곧바로 전쟁이 발발했으며 이승만정권은 인민에 맞서 제국주의 세력을 끌어 들이려 하고 있다"고 공격하였다. 하지만 이 내용은 모두 북한 내무성의 보도자료이다.
서울의 신문들 역시 처음에는 북한과 마찬가지로 일사불란한 보도를 보여주었다. 최초로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25일 국방부에서 발표되자 서울의 신문들은 즉각적으로 호외로서 남침사실을 알렸다. 내용은 "25일 조기 5시부터 8시 사이에 38선 전역에 걸쳐 이북괴뢰집단은 대거하여 불법남침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의 25일 12시의 담화에 근거하여 일제히 남침사실을 보도한 것이었다.
그것은 초기 이승만정부의 대응처럼 두 가지의 뚜렷한 특성을 보여주고있다. 하나는 혼란과 뒤죽박죽이고, 다른 하나는 넘치는 북진 의욕이었다. 남침소식에 두려워 하면서도 어떤 신문의 논조는 마치 "때가 왔다, 통일의 기회는 바로 이때다"하는 식이었다.
남한의 공보처는 25일 두 시의 국무회의 결과를 발표하면서 "괴뢰의 최후의 발악이니 국민들은 조금도 동요치 말라고 발표한다.동시에 헌병 사령관과 서울 시경국장은 공동 포고문을 통하여 군경을 신뢰하라고 포고하였다.
그러나 다음날인 6월 26일에는 서울의 신문들은 완전히 논조를 바꾸어 일제히 북진을 보도 하였다. 그리고는 서울은 물론 세계가 혼란에 바지기 시작한 것이다. 동아일보는 "국군 정예 북상 총반격전 전개"라고 커다랗게 타이ㅐ틀을 봅고는 "해주는 완전점령"했다고 보도 했다. 이보도는 국방부 보도과의 김현수 대령의 발표를 보도한 것이다. 경향신문 역시 아군용전에 괴뢰군 전선서 패주중이라고 보도 했다.조선일보 역시 국군 일부 해주돌입을 발표한다. 서울신문은 국군사기 충천, 생업에 매진하자는 톱기사를 실었다.
여기에 미국의 언론들은 처음 6월 25일자는 뉴욕타임스,워싱턴 포스트 등 모두 북한이 선전 포고를 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사실 북한은 선전포고를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6월 26일 갑자기 남한 신문들과 마찬가지로 남한군이 반격과 해주돌입을 보도함으로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여기에 6월 26일 미 해군성 정보국장 존슨의 정보각서에 "북한군이 6월 25일 옹진반도를 비롯한 38선 몇 개 지점에서 남한군을 공격하였다....... 경계선을 넘은 남한군의 반격은 북한 도시 해주의 점령으로 귀결되었으나 임진강 서쪽의 모든 영토는 주기에 점령당했다는 주장이 나온다. 곧 최초의 공격은 북한에 의해서 되었으나 해주가 남한군의 반격에 점령당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내용은 6월 25일 동경에서 점령군 장교 한 명과 얘기를 나누고 있던 중 전화를 받고 오해였다. 기습성공을 거둔 북한군의 공격에 대한 오해였다.
다음은 북침설의 학문적 주장을 강력하게 펼친 몇 명의 내용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먼저 스톤의 주장 : 무대는 마치 달인적 조심성을 갖고 준빋된 것처럼 보였다. 침략은 정치적으로는 침묵에 의해 고무되었고 군사적으로는 방어적 형태에 의해 유도되엇고 최종적으로는 모든 것이 완ㄴ료되었을 대 분계선을 넘어선 몇 차례의 소규보 공격에 의해 촉발된 것이라는 가정은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다음은 콘테의 주장이다 : 5월 선거에서의 이승만의 패배와 38선을 따라 이루어진 남한군의 대규모적인 증강을 고려해 보 대 50년 6월에 몇몇 지역에서 이승만이 도발적인 대규모 공격을 감행함으로서 북한측으로 하여금 강력한 반격의 포문을 열게 하였다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음은 굽타의 주장이다 : 굽타의 주장 또한 상기 두 교수의 내용과 비슷한 것들이다.
그렇다면 과연 옹진에 주둔하고 있던 남한군대가 해주로 진격했다는 요지의 6월 26일 오전 9시의 서울로부터의 방송된 공식발표는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기에는 옹진으로부터 해주로의 공격은 6월 25일 새벽 4시 이전에 이루어졌고, 이 공격에는 기습적인 요소가 있음에 틀리없다는 가정을 배제할 수 없다. 간단히 말하면 해주가 점령을 당했다고 한다면 해주공격은 북한의 옹진반도 공격과 동시이거나 혹은 더 일찍 일어났던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다음은 이 분야의 치밀한 연구가로 알려진 부르스 커밍스의 주장을 분석해 본다
먼저 해주 침공설이다
해주 침공설이 나오게 된 가장 큰 배경은 북한측의 위장과 함께 남한의 오보 때문이다. 당시 유일한 방송국인 KBS는 전쟁이 나자 6월 26일부터 국방부 정훈국 보도과의 관장하에 있었다. 초기 현황을 밢표한 사람은 육군본부의 김현수 대령이다. 국군 해주 돌입 사실을 처음 발설한 종군기자 최기덕이 전하는 바에 다르면 보도 경위는 다음과 같다. 그는 6월 24일 옹진에 나갔다. 25일 그는 옹진에서 전쟁의 발발을 만났다. 그가 오전 8시 30분에 연대본부로 가서 제17연대장 백인엽 대령을 만나자 그는 "전면 전쟁같다"면서 "해주로 돌입하겠다"고 말했다. 백인엽의 말 속에는 남한군 지도자들이 늘 그래왔듯 강렬한 북진의사를 읽을 수 있다. 최기적은 25일 오후에 서울에 돌아왔다. 육본에서는 옹진의 제17연대에 이미 후퇴명ㄴ령을 내려놓은 뒤엿다. 서울에 돌아온 그가 저녁 구방부 정훈국에 들러 볻고과장 김현수 대령을 만났을 때 옹진의 전황을 묻자 ㅊ최기적은 "백인엽 연대장의 사기는 해주로 진격할 정도였다"고 대답했다. 김현수는 이것을 그대로 KBS를 통하여 보도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백인엽 자신은 그러한 말조차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긴급한 상황에서 최기자와 장황하게 얘기할 여유도 없었으려니와 해주진공이라는 말은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알고 말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그 진위를 밝혀줄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추측을 근거로 보도되었을 가능성과, 김현수 대령 독자적으로나 고위지도부와 협의를 거쳐 남한군과 국민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고의로 북진하고 있다고 보도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논쟁의 끝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김일성과 북한 자신들이 해답을 던져 주고 있다. 북한은 해주침공설이 나오자 즉각 이를 남조선 괴뢰도당의 허위선전이라고 공격하였다. 오늘의 북한 공식 기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전쟁 시작 이틀 만인 6월 27일의 한 연설에서 "지금 리승만괴뢰도당은 방송을 통하여 저들이 해주를 점령한다고 허위선전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이미 이 당시에 해방일보는 남한의 해주북침보도를 거짓에 찬 날조라고 공격하였다.
이와같은 내용에 커밍스의 기록이다 : 북한의 이러한 반박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러한 비난은 아마도 상승의 군대라는 북한 인민군의 전형적인 허장성세 때문이었을 수 있으며, 한편으로는 해주를 점령당했다는 실수로 인해서 북한의 어떤 사령관이 난처해질 것이기 때문에 나왔을 수도 있다. 남한측도 마찬가지로 패배를 시인한 적은 거의 없다.
이 표현을 보면 마치 북한이 패배하였으나 이를 고의로 인정치 않았던 듯 한 기술이다. 그러나 북침을 주장한 그들로서는 남한군이 실제로 진격했다면 왜 최초에는 38선 전전선에서 1~2KM 침공하였다고 보도한 그들이 이 기막힌 호재를 남조선괴뢰 군대 북침 계속이라고 공격하지 않고 "허위선전이요 날조"라고 공격하였을가?"
이곳을 담당한 북한 지휘관은 인민군 제6사단장 방호산과 제3경비여단장 최현이었다.
잘 알려진대로 최현은 식민시대부터 김일성의 오랜 전우이자 김책.최용건과 함께 만주게릴라 그룹의 4인방 핵심이다. 1933년 9월 항일게릴라 시절에 김일성과 첫 만남이래 1982년 4월 죽을 때가지 그는 김일성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이자 친구였다. 인민무력부장과 정치국 정치위원 등 모든 고위직을 다 역임한 실세중의 실세였다.
방호산은 한국전쟁에관한 최고의 장군이며 그들은 전설적 영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제5군단장에 '51.1월에 오르는등 비록 중국의 연안파에 속하지만 탁월한 전공때문에 살아남은 장본인이다.
최현도 전쟁 초기에 성공으로 6월 30일 인민군 제2사단장에 오른다(춘천지구 패인에 따른 이청송을 대신하여 영전). 9월 8일에는 무정에 이어 제2군단장에 오른다. 그런 그들이 초전에 결코 패배한 적이 없다.
또한 여기서 커밍스는 제17연대의 해주 침공설, 남한군이 옹진반도에서 해주를 거쳐 서울로 귀환하였다는 가능성을 제기한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단 한줄도 북한은 언급한 적이 없다. 오히려 6월 27일자 투자신문에 실린 북한 총사령부의 보도가 있다.
['50. 6.27일자 북한 투자신문 보도 내용]
"공화국 인민군대와 경비대들은 이미 6월 25일 15시 현재로 전체 전선에 걸쳐 38선 이남 10~15킬로미터 지점에 도달하였다. 이 진공전투들에서 공화국 인민군대와 경비부대들은 연안-백천-청단 등 도시들을 비롯한 남연백전군을 해방시켰으며 개성 장단 등 도시들과 그 부근 지대들을 완전히 해방시켰다. 옹진. 강령. 리항 등을 점령하고 옹진반도를 완전히 해방시켰다."
해주 국사봉
-38선---------------------------------------------------------------------------------------------------------------------------------------------------------
옹진
강령 연안 개성 장단
문산
강화 금촌 의정부
인천 서울
만약에 남한군이 옹진에서 해주를 거쳐 서울로 가고 있었다면 북한의 이러한 보도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리고 북한이 북침 주장에 너무나도 좋은 이러한 사실을 숨겼을 리가 없다. 가장 강력한 북침의 증거로서 말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박명림 교수는 개전 당시에 개성 송악산에서 공격을 담당했던 제657부대(제6-13연대) 정치보위부 장교 최태환(귀순자)을 면담했다. 이 과정에서 최태환은 "대대급 부대는 고사하고 해주방면에서 오는 남한군의 그림자 하나도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한다. 우리 제17연대 소속 장병들이나 전투상보 어디에도 이러한 전투사실 기록이 없다. 만약 정말 해주를 공격하여 탈환햇다면 영웅적 심리에서도 기록에 남겼을 것이다.
비록 남한으로부터의 49년 여름과 같은 소규모의 포격이 있었다 하더라도, 아니 국사봉이나 송악산 전투에서 우리가 일시적 38선을 월경할 수는 있겠지만 전면전 발발의 빌미는 제공하지 않았다는것이 정설이다.
해주북침설은 남침의 의도를 숨기고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위장전술이고, 우리는 군의 사기를 진작하려는 허장성세의 말장난 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하지만 현실은 이념적 편향과 정치적 목적을 위해 왜곡된 진실이 마치 진실인양 보여지는 것은 사라져야 한다.
제 5절 유해 발굴 위한 탐문및 탐색 결과(참전용사 증언 포함)
38도선을 연하여 많은 전투가 초기에 있었다. 하지만 서부지역은 대부분 전쟁 당시의 38선이 북한쪽으로 들어가 우리가 조사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일부지역이라도 우리는 유해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현행법상 DMZ 안은 유엔사의 승인과 북측과의 협조가 우선 이라 많은 문제가 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화살머리고지나 백마고지 지역은 북측과 유엔사 및 북측과 사전 협조하에 발굴 작전이 일정 기간에 일정 인원만 들어가 현재 진행 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전쟁 발발 전의 우리 군 수뇌부의 허송세월을 알아보고 초기전투시 서부전선의 지휘지들은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알아보면서 제한적이지만 유해발굴위한 탐사 및 타문활동 결과와 유해발굴 현황을 기록하고자 한다.
1. 전쟁전 프락치로 얼룩진 군 수뇌부의 허송세월
그러면 과연 우리 군의 높은 분들과 정보분야에서는 어떻게 판단하고 조치했는가?
먼저 답부터 보여드리겠다. "적이 훈련하고 있는데 쓸데없이 과잉반응으로 빌미를 주지말라?"
1950년 접어들어 "북한은 공격준비가 완료되었고 남침은 시간문제만 남겨 두고 있다."라는 취지의 발표가 반복되고 맥아더 장군도 3월 10일 워싱턴으로 보낸 비밀 정보보고서에 "최근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북한이 6월에 남한을 침략할 것이라 한다."고 지적하였다. 이에 군은 세 번에 걸친 경계강화 조치를 취하게 된다.
첫번째는 4월21일 노동절 5월1일 노동절을 전후한 남침과 공비들의 폭동에 대비하여 내렸다.
두번째는 5월 8일에 5.30선거의 혼란기를 이용한 남침과 폭동을 대비하여 경게태세를 강화 하였다.
세번째는 6월11일부터, 적이 6.7 남북한 선거제의, 6.10일 요인 교환제의 등 평화공세가 남침흉계를 호도하는 것으로 하달하였으나 아무런 징후를 포착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6월 23일 24:00에 비상려을 해제하게 되고 외박 외출과 휴가를 전군에 실시토록하여 1/3의 병력이 진지를 이탈하는 우를 범하게 되었다. 어디 그뿐이라 공용화기를 정비를 목적으로 수도권 부대는 후방으로 입고 시키고 차량을 정비한답시고 입고 시키는 지시를 하게 된다.
하지만 실제 발표된 내용과는 달리 전방에서는 계속하여 북한군의 병력과 탱크등 주요장비가 추진되고 있음을 보고하게 되는데 군 수뇌부는 묵살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에 인민군은 공격대기지점으로 병력을 배치완료하게 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6월 17일에 미국 국무성 고문 덜레스가 전방을 방문하고 나서 "미국은 한국이 어떤 외부에서의 침략을 받을 때는 물심양면으로 원조하겠다."고 하고 간다.
또한 38도선에서 위기가 고조되자 유엔에서 파견된 유엔한국위원단이 6월9일부터 24일까지 강릉에서 옹진까지 38도선 전역을 순시하고 안전보장이사회로 보고서를 작성하는데 "남한군은 전적으로 방어를 위하여 편성되어 있고 북한군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할 상태에 있지않다."고 기술하고
38도선 이북의 사태에 관하여 "최근 민간인이 38도선에서 북으로4~8km 이동한 바 있다. 옹진북쪽 취약지역의 군사활동이 증대하고 있다."는 보고 외에 인민군의 비정상적인 활동, 즉 침공의 징후를 포착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공식적인 유엔 공식 보고서이다.
"남침 하루전에도 남침징후를 수뇌부에 보고했다.
이 시간에 전방에서는 계속하여 남침징후에 대한 정보 보고가 들어왔고 이를 공화당 시절 유정회 사무총장까지 지낸 이영근(육 8기, 당시 중위로 정보국 근무. 그 동생이 대구통합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어 면식이 있음)의원이 말하는 것은 24일에도 주요 내용을 얼마전 작고한 김종필 (육사 8기, 중위)전 총리와 주요 수뇌부에 브리핑까지 했지만 전방부대 교대 수순이라며 묵살해 버리고 육군회관 장교구락부 준공 파티에 모두 참석하게 된다.
그리고 북한군은 '50.6.25일 04:00에 점면적인 남침을 개시하게 된다.
이시간 채병덕 참모총장(평양출신)은 술에 취해서 오전 8시(누구는 7시라 함)경에 보고를 받고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일요일에는 전화를 받지않아서 09:20분경에 받고 대통령은 창경원(지금은 창경궁)에 있는 비원 낚시터에서 10:30분경에 보고를 받는다.
한신장군의 증언에 의하면 채총장은 술에 취하여 짚차에 타고 의정부, 미아리고개 정신없이 왔다갔다했다고 할 정도니 그 전날 밤에 얼마나 마셨는지 짐작이 된다.
그러면 여기서 당시 육본의 정보, 작전, 인사국장들의 실제 증언을 전후에 주요 요직에 있으면서, 아니면 예편 후에 군편소의 요청에 응한 증언내용을 요약형으로 알아보면 전쟁 발발 시기의 어수선한 실마리를 어느정도 추수릴 수 있는 감이 올 수도 있어 실어본다.
정보국장 장도영 대령의 증언내용이다(중장예편. 참모총장 역임 .'68.2.6.평북선천출신)
"혹시 6.25전쟁이 나기전 우리가 이북의 남침에 대비하기 위하여 전전계획을 수립하게 되는데 이북에서 쓴 전사를 보면 이북을 공격하기 위해서 어던 작전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이남에서?"
"예. 일부 병력은 육로로해서 들어가고 일부는 항로를 따라서 평양에 상륙할 것이다.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허무맹랑한 것이다."
"육군에서 발행한 전사에 보면 우리가 1안, 2안에 나오는 작전계획이 사실 있었는지요?"
장군은 정보국장으로 오기전에 영평천 지금의 양문 전방에서 제9연대장을 했고 그 당시도 정보참모가 총에 맞아 죽는 일도 있었다.
그 당시는 쌍방간에 인간정보를 많이 활용했는데 우리도 많았다고 한다.
탱크부대 훈련 등 그런 정보를 취합하여 분명 공격태세라는 것을 알았지만 25일 이라는 것은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경무대에 가서 직접 보고도 했는데 다른 기관에서 믿어주지 않았고 오히려 우리가 공세를 취하려하는 역정보를 주는 꼴이 되어 입장이 난처 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경무대에 보고 후에 대통령의 지시로 전세계 신문기자에게 남침의도에 대한 브리핑을 했는데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유엔 한국 위원단에서 설명을 해 달라고 해서 가서 했더니 인도 대표가 앉아서 하는 말이 어디서 들어온 정보냐고 묻길래 그것은 밝히기 곤란하다고 하니 자기가 듣기에는 남한에서 공격준비를 한다고 하는데 다른 이야기가 아니냐고 빈정대는 투의 이야기로 당시 임충식 장군이 화를 내면서 "당신들은 우리를 승인도 하지않고 무슨 깊은 관심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 " 대들었다 한다.
그때는 남한에 북에서 들어온 첩자가 우글우글 했었다 한다.
당시 신성모국방장관이 욕을 많이 먹게 되는데 이것은 외신기자에게 브리핑이 있은 후에 국민들을 안심시키는 차원에서 장관이 "우리는 적이 그렇게 했어도 우리는 그것을 막아낼 자신이 있다."이렇게 했다는 것이다.
"6.25전쟁 났을 때에 경무대 보고가 많았습니까?"
"그것은 채병덕 장군이나 김백일 장군이 담당했다. 그리고 전사를 쓸 적에 그 때의 사회상을 한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남로당의 활동은 말할 수 없었고......"
"첩자 중에 대표적인 사람의 이름은?"
"그것은 전사에 쓸 필요가 없다. 10여명 댈 수 있다."
작전국장이던 장창국 대령의 증언내용이다('64.8.26.1군사령관실/'77.1.18, 자택. 합참의장역임.)
"6.25전쟁이 발발 하기전에 고등군사반에서 고급장교들을 모아놓고 대비책을 연구시킨 적은?"
"내가 그 당시에 참모학교 부교장을 했는데 보병학교에서 2주인가 하고 참모학교에서 4주인가 교육했다. 미 고문단장 로버트 준장도 직접 교관을 하고, 우리는 교관들이 북진을 가르치는데 이 사람들은 소위 철수작전을 가르쳤다.
나중에 보니 이미 이렇게 알고 가르치지 않았느냐 하는 정도로 방어선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우리는 상당히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6월24일 비상을 해제하고 전방 지휘관들을 육본에 초대하여 파티를 하지않았습니까?"
"그건 내가 문서상으로 전달한 기억은 하나도 없는데 우리가 알기로는 농번기라 해서 휴가를 많이 보냈었다.
그 당시의 체계가 뭐냐하면 어느 참모계통으로 해서 전부 전달된 것이 없었다.
대개 총장 예하에 그 당시에 행정참모장이 하나 있고 작전참모장이 있어서 거기서 이루어져 나가니까 밑에서 참모부로 해서 문서계통으로 올라간 것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그당시에 고급지휘관을 부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그 당시도 역시 고급지휘관반이 그대로 와 있었다."
"6월10일자로 사단장급의 인사이동을 기억할 수 있습니까? 그때 많이 있었죠?"
"글쎄. 몇몇 있는 줄 압니다.
"교훈이 될만한 큰 것 몇 개만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별안간에 말은 못하겠지만 첫째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보고를 정확하게 하고 허위보고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초기에 그것 때문에 군신을 위해서 많이 고생한 것이지요?"
"그렇죠, 그래서 결국은 제각기 보고를 넣고 동시에 상부에서 판단할 시간적 여유도 없는대도 불구하고 혼란상태에 정보가 들어오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부대를 적절히 배치한다는 문제. 이러한 문제가 상당히 곤란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어느 후방의 사단을 전방으로 끌어오는데 전체 1개 사단이 오기전에 1개 대대가 올라오면 오는 대로 쪼개서 그저 집어 넣었다는것(의정부전투시를 말하는 것 같음:나의 주장). 예하 지휘관한테서 들은 것을 가져다 위의 지휘관 밑에 있는 참모 모르게 마구 명령해 버리는것. 이런 것들이 결과적으로 종합적으로 볼 때 전력을 크게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특히 한강다리를 끊는 문제가 아닙니까? "
참모설치하에 의해서 그것이 최종까지 이루어졌으면 그런 문제가 일어날 수 없는 문제지요?"
"물론 지휘관이 결심했으면 그것도 충분히 참모에게 알려야 했지만 위사람은 윗사람끼리 애기해 버리고 또 나중에 변경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그저 직통으로 직결해서 연락해 버리니까 여기서 결국 혼란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등등을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Appleman이 쓴 전사를 보면 한강다리 끊는 문제에 대해 일반적으로는 당시 총장께서 명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루머가 돌았다.
그런데 김백일 장군께서 말씀하신 것에 의하면 "국방차관께서 끊으라고 그랬다'하는 식으로 말을 애매하게 해 놓았는데요. 그 당시에 참모회의도 관여하고 계셨으니 진상을 알 수 있겠죠?"
"내가 말한 것이 그것이다. 그 당시에 모든 상황이 결국은 그러한데서 나오는데 그런 고위층 회의 때는 우리 참모가 개입을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말했지만 육군의 작전국장도 모르는 결과가 위에서 이루어져 내려 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알고 있기에는 참모부 회의에서 일단 논의 했었다고 하는데 참모회의에서 논의 안되고 고급 참모들 몇 분만 논의하신 모양이군요? 그런데 어떻습니까? 미국사람들은 한 6시간 후에 끊어도 된다고 하는데 잘못해서 못끊으면 적의 진격 속도가 더 빨리 했을 것이 아니냐?
물론 국민들을 내 버린 것 같이 되긴 했지만 임진강 다리를 못 끊어서 그 쓰라린 경험을 당한 적이 있는데 전술적으로 생각한다면 사실은 잘 한 것이다. 어떻게 보십니까?"
"나도 전적으로 동감이 간다. 앞으로도 실체적인 평가가 나오리라 보지만 적이 금방 넘어오지 않았으니 다행이도, 만약 못 끊었다면 임진강 다리 못 끊어서 대거 내려오는 그 결과 밖에 안됐다고 생각한다. 그때는 정부나 군에서 책임을 지는 것은 서울시민에게 철수하라는 말을 안했었기 때문에 그 남은 사람의 원한이 있는 것이지......"
"그 당시 채총장님에 대해서 어떤 분이 총장이 인도교를 지나고 3분만에 끊겼다. 그 끊어진 시간이 그 분이 인도교를 지나시고 나서 3분만에 끊었다는 얘기입니다.
"그것은 저와는 다릅니다. 어떻게 됐느냐 하면 그 다리가 끊기 전날 오후 3시인가 4시인가 모르겠습니다만 여하튼 오후에 끊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일단 일부는 전부 한강을 넘어갔고 넘어가는 도중에 맥아더 사령부가 서울로 온다해서 그것을 다시 끓어들이는 바람에 혼란이 생겨 문제가 되었는데 채장군이 서울을 나가게 된 것은 당시의 인사국장 강영훈장군과 나, 그리고 그리고 장병 두어 명이 있었는데 육본 정문에서 이남으로 안나가겠다는 것을 가까스로 짚차에 태워서 우리가 보냈다.
그것이 나의 기억으로는 아마 밤 11시정도라고 생각된다.
나라가 망한 것도 아닌데 여하튼 책임자가 내려가서 전쟁을 지도해야지 여기 남으면 곤란하지 않느냐였다.
그리고 헤어졌는데 그 후 한 시간 이상 경과했다고 생각하는데 작전참모장실에 불려 올라갔더니 이응준 장군이 전방 제1사단에 같이 계시다가 나오셔서 김백일 장군보고 "다리를 언제 끊는냐"하니까 "몇 시쯤 되면 끊게 되어 있다" 그분들의 생각은 벌써 대개 시간을 알고 있었다.
그러자 이응준 장군이 아직 막대한 군장비와 군인이 있으니까 그래서는 안된다고 말했는데 그곳에는 장도영 정보국장도 함께 있었다.
김백일 장군이 돌아다 보더니 날 지적하면서 나가서 다리를 끊지 말라고 하셨다.
보따리를 사서 삼각지 정문 앞에 나가니까 길이 빽빽이 말할 수 없이 메워있었는데 거기서부터 한강인도교 밑의 파출소까지 가는데는 짚차로 상당히 시간이 걸렸다.
도착해 보니까 벌써 많이 깔려 있었다.(죽은 인원과 차량등)
"7백명 내지는 8백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아마 그정도가 됐을지 모르지. 그러나 그 숫자도 더 많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밀려서 다리에 못가고 차에서 내려 한 몇 발자국 가니까 "부웅"했다. 지금 기억에는 몇 초내에 뜨거운 화기가 불어왔다.
여기저기서 차를 돌리는 사람, 걸어가는 사람이 엉켜 엉망인데 채장군이 넘어간지 3분만에 끊겼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그래서 자갈 파는 곳으로 걸어가니 자갈배가 있어 그걸 타고 강을 건너 관악산을 넘었다. 그리고 수원에 도착하니까 오후 한 두시쯤 된 것 같았다. 도착해보니까 벌써 김백일 장군이 나와 있었다.
그런 걸로 봐서 다리 끊는 시간이 상당히 있었다고 생각한다.
('77.1.18. 자택): 남침 증언
"6월24일 15:00시에 정보부장 장도영 대령이 군수국장 양국진 대령과 나를 불러서 북한의 이상 징후에 대한 대책을 논의 하는데 인사국장 강영훈 대령이 있었다.(원래는 신임 신상철 대령인데 아직 오질 않음) 그래서 24일 오후에 '북한에 이상한 움직임이 있다'는 정도로 알려졌고 정보국에서 별도 조치가 있을 것으로 알고 헤어졌다.
6월25일 당시 나의 집은 육군관사로부터 서대문근처로 이사하여 전화기 가설되지 않아 이날 09:00시경 헌병들이 확성기로 외치는 비상소집이라는 가두방송을 듣고 뛰쳐 나가게 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통신수단이 발달하지않고 유일한 것이 유선인데 적포화와 아군 차량기동으로 절단도어 전방사단을 제대로 파악도 못했고 10:00시경에야 전면 남침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전쟁 초기의 작전지도와 당시 상황을 정리해 보면 한 마디로 말해서 작전지도 혹은 작전지도 체계가 서 있지 않았다고 본다."
다음은 당시 인사국장 대령 강영훈('81.1.28 중장예편. 국무총리, 출생지 평북)증언이다.
강대령은 전쟁 발발전 제1사단 12연대장('49.5.14일 부임)을 하다 인사국장으로 전쟁을 맞이 했다.
"한국전쟁 발발전 사단장급의 대폭적인 인사이동 배경은?"
"1차는 정기인사이동이고 2차는 이북의 징조가 심상치 않아서 거기에 대비해 전열을 정비해야 되겠다는 그러한 각도에서 취해진 인사이다.
일부에서 망치기 위해서 인사이동을 했다고 하는데 누가 6.25전쟁이 터질줄을 알았는가!
심상치 않으니까 인사를 정비해서 대비해야 되겠다고 대폭적인 인사이동을 단행한 것으로 안다.
(채병독 총장 재취임 12일 만에 3개 사단장 인사이동('50.4.22. 이응준소장, 백선엽, 유승열등), 그리고 전쟁 직전 '50.6.10일경 김홍일 소장외 9명의 인사이동)
"북한군 남침으로 서울 지역 철수시 채총장을 수행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채총장께서 한강폭파에 따른 명령 과정, 폭파시간 및 행동과 조치 사항등은 "
"운전사와 전속부관 장대위(장영호대위(병참장교) 주소지확인 결과 불명), 채총장, 나 이렇게 타고 수행하였다. 그 당시 용산에서 한강가는 길에 차가 홍수처럼 보였는데 우리들 차량은 가운데 껴서 내려갔어요. 한강다리 건너가기 전에 채총장에게 대한민국이 망해가는데 서울에서최후까지 싸우다 죽으면 이 다음에도 군인들이 용감하다고 할텐데 도망가다 잡혀죽으면 국민들이 비겁한 놈들, 그러니까 남하했지. 그럴거 아닙니까? 건의하였더니 전속부관이 쓸데없는 말을 한다고 나에게 기압을 넣어요.
'될 수 있는대로 우리 일선장병들을 도강시키고 김백일 장군(함북)이 명령을 해서 그 다리를 끊으라'이것이 채총장이 육본을 떠날 때 김백일 장군에게 준 지시입니다(출발시간:'50.6.28일 새벽, 시간미정).
그러고 보니 한강에 진짜 다이나마이트를 장치하고 우리 공병들이 준비하고 있었어요.(작전계획)
그때 본인은 마음이 안되어 '참모총장님 각하 결심을 중지하시기 바랍니다.'하고 건의하였더니 중간쯤가서 채총장이 운전사보고 '야! 차를 돌려라!서울에서 싸우다가 죽자'하고 말씀하였다.
이때 운전사는 '차를 돌릴 수 없습니다'(차량,인파때문에).
또 다시 장대위가 나에게 기압을 넣으면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다고 나무랬어요.
이때 우리들 일행의 차량은 한강 남쪽을 지나서(여기도 다이나마이트 장치준비됨) 영등포 로타리를 도는데 꽝 터지는 소리가 났다.(한강인도교 폭파시간 '50.6.28일 새벽 시간미정, 한국동란 1년지 03:00, 한국전쟁사 1권 02:30분, 김석원 장군 증언 03:00시, 재판기록 02:30분)
그 당시 재판기록인가 신문지상을 보면 채총장이 차를 세우고 최창식공병감(대령)과 악수하고 '수고한다. 내가 건너가고 한강다리를 끊으라!'하고 보도된 모양인데 그게 아닙니다. 작전계획대로 진행이 되는 것이고 채총장이 끊으라 하고 악수한 일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 당시 채총장께서 육본을 떠날때 김백일 장군에게 한강 폭파명령을 내린 것 이외에는 없는 것인지요?"
"없습니다. 이것은 기록이니까 확실히 해 두어야지요."
"그 당시 이응준장군께서는 한강을 도강하려는데 다리가 끊겨 뚝섬까지 갔다가 다시 올라와서 미군 보트가 와서 그 배로 강을 건너 수원가서 채총장을 만났다고 하던데 육본출발 시간이나 한강 도강시간 수원도착시간은 어느 때입니까?"
"영등포를 거쳐 시흥에서 육본과 연락하려니 전화가 안되었다. 그래서 그때 수원에 어떤 미군장군(처치)이 일본 동경에서 오기로 되어 있는데 수원 가니깐('50.6.28. 05:00시경) 어디 있는지 몰라 당시 김정열 장군(공군)에게 물었더니 농사시험장에 있다하여 그 곳에서 만났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증언을 듣게 되며 이 기록은 최창식 공병감이 죽기전에는 인용 보도되지 않은 내용이었다.
이상의 내용에서 나는 당시 육군의 주요 국장들의 전후 증언을 통해 명백히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래와 같이 열거할 수 있으며 이것 또한 나의 분석이니 오해는 말아주기 바린다.
첫째 : 프락치가 너무 많았다. 그중에는 고위층도 상당수 있었다.
둘째 : 전방에서 실제 공격 징후를 판단해서 보고한 것이 사실이고 정보국은 할 일을 했다.
셋째 : 병력이동등 부대이동에 관한 작전국의 지시없이 상부 몇 몇이 알아서 하고 중간은 몰랐다.
넷째 : 장군인사등 주요 문제에 대해 의문점이 풀리지 않는다.(강국장 답변 의구심. 본인도 뭐 시키는대로 했으니 뭐 알겠는가 . 본인이 평북 사람이고 등등)
다섯째 : 육군회관 낙성식에 참여가 지시가 아니라 참모과정에 들어온 교육생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이라는 증언은 서로가 본인들의 참석을 합리화 하는 것이고 서울 경기뿐만 아니라 일부 인원들이 광주나 대전에서도 참석했다.
여섯째 : 한강교 폭파와 관련하여 임진강 다리를 제대로 폭파 못하여 병력이 밀려들어 오는데 지연이 안되었다는 증언과 1사단의 백선엽(평남) 장군이 잘 대처했다는 증언은 상호 맞지 않는다. 실제 개성지역 12연대 병력은 많은 인원들이 김포반도로 유입되고 제11연대도 휴가를 다 보내 1개대대 규모가 겨우 되는 마당에 무슨 축차지연 방어가 되었겠는가.
일곱째 : 유엔 한국위원단의 무책임한 전방 순찰이 결국 우리를 멍들게 한 일조를 하게 되고 그 인도측 담당관처럼 혹시 적국의 스파이는 없었는지?
여덟째 : 채총장의 전속부관의 실체를 알아보면 그 당시에 썩었고 군내에 침투한 세력의 인과관계가 들어날 수도 있을 것인데......, 분명 그때도 지금처럼 지역별, 출신별 알력이 있었으리라 본다.
이승만 시대 장군인사를 잠깐 했던 고 이종록 선배의 증언에서 이 문제가 언급 되었다. 이용사님은 그 부관이 지금 장교명부에 실체가 없으며 아마 북쪽의 주요프락치라고 말이다.
아홉째 : 한강교 폭파는 어느정도 강국장의 증언이 일리가 있다고 사료된다.
여기 여덟, 아홉번째의 의문에 대한 추가 증언이 고 육군 대장 이형근(공주)의 회고록에 의하면 전면전이 벌어져 난리통에 총장을 찾으니 부관이 주무시는 총장을 깨울 수 없다고 시간을 지연시키고 당시에 국방차관인 장경근(평북용천출신, 내무차관에서 국방차관 전보.일제시대부터 판사, 해방후에도 법원장, 나중에 국회의원도지냄)이 김백일 장군(함북출신)에게 01:30분에 폭파하라고 했다는 설이 있었다고 증언하며 실제 군내부 주요직위자의 프락치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최창식대령(서울출신), 공병감이 안고 '50.9.21일 부산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난후에 '62년도에 재십이 이루어져 무죄로 되었다.
열째 : 근본적으로 당시에 군 수뇌부가 북한과 물물 교환이나 엉터리 장사를 하는가하면 군대가 배가 고파서 주말이면 많은 병력을 내보내 그 남는 것을 가지고 배불리 먹었다니 군을 잘 먹여야 한다.
이어서 각군 총참모장등 전쟁초기의 주요인사의 증언과 수도경비사령부의 인원 몇 몇의 추가 증언을 확인해 보기로 하겠다.
해군 총참모장 손원일('77.2.28 자택. 평남출신) : '49년 6월에 함정 건조기금을 60,000불 이상을 모금하여 미국에 가서 배를 구입하고 하와이에 잠시 기항하였더니 교포들이 환영해 주었고 마침 미 참모대학을 마친 정일권 장군이 와 있었고 파티가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전쟁이 터졌다.
공군 총참모장 김정렬('77.2.10, 3.2 정우개발, 서울출신) : 전쟁 초기 지휘권 문제인데 당시는 국방부와 육군본부가 한 건물에 있었고 각군 대표가 나와 있었다.
전쟁이 나니까 대통령-국방부장관으로 군정책임자이고 다음이 각군 총참모장인데 실제 군령권을 행사하는 사람이 있어야 되겠다는 필요성에 따라서 아무 조치없이 6월 26일에 앉은 자리에서 "형님이 육.해.공군 총사령관이요"라고 채병덕 총장에게 말함으로서 그가 육.해.공군 총사령관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다 그 후에 채병덕 소장이 물러나고 정일권 소장(함북)이 임명되면서 육.해.공군 총사령관이라는 것이 뚜렷이 부각 되었고 이것이 육군총참모장직보다 더욱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육군 중령 함병선('60.11.23 중장으로 국방연구 위원장, '61.7예편) : 평양출신으로 제2연대장으로 대전에서 '48.2.29일 제주도로 이동하여 6개월간 사태를 진압하였다. 전쟁이 나고 .50.10월에 준장이 되어 11월부터는 제2사단장을 역임하고 '52년 5월에 소장으로 진급하여 7월부터 교육총감 및 전남지구위수사령관을 하게 되는 장군이다.
"군사영어학교는 거치지 않았군요?"
"제가 원래 일본에서 돌아와서 치안을 담당하는 총사령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이응준장군(평남)을 비롯하여 군의 원로들가 일군, 만군, 혹은 중국에 계시는 분들도 포함하여 치안대총사령부라 했는데 미군정의 하지가 들어와서 독립되지않은 나라에서 군사단체는 인정할 수 없다고 해서 해체시켰습니다.
치안대총사령부에서 한 일은 일본군 무장해제시키는 일인데 하지가 해방시키면서 경찰에 들어오라고 했는데 경찰에 관계돤 사람은 그때 들어간 것입니다.
경찰에 않들어가고 있으니까 미군들 지시에 원용덕장군(서울)이 군사영어학교를 창설하지요.
경찰은 국립경찰로서 되는데 그때에 국방경비대가 창설이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제1연대에 들어갔습니다. 군사영어학교는 조금 늦게 들어가 '46.1.15일자로 임관이 되어 제1연대에 있게 되었는데 처음 받은 보직이 식사관이었습니다.
그때 저희들이 역시 고통스럽게 된 것은 말이에요. 각군 출신들이 있잖아요. 일군출신도 있고 만군출신도 있고 하는데 제일 저희들이 어렵다고 보는 것이 요원들의 "사상문제"예요.
저는 해방후에 치안대사령부가 해체됨으로써 평양에 들어가 김일성의 적위대하고도 로스케들 하고도 격투한 사실이 있는데 그래서 탈출해 나왔는데 동연대 애들이 와서 행패를 하는것을 저희들이 목격했고 공산주의라는 것이 얼마만큼 무섭다는 것을 체험했는데 처음 경비대에 들어온 사람은 불평불만이다라고 해서 사상문제가 그렇게 중요시 되지 않았어요. 저로서는 가장 근심스러운 것이 그러한 문제였습니다.
미군측에서 보급문제를 도와주어 괜찮았는데 수송차량 부족하여 애로가 많았고 그 고문관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어 일본제 신발이나 칼을 차고 다니는것을 아주 싫아했습니다.
서울시내 나오려면 트럭 한 대로서 채병덕이 앞에 타고 모두 뒤에 적재함에 타고 나오는데 시트하나 똑 바른 것이 없어서 장작개비를 놓고 가마니를 하나 놓고 타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시내 나오면 경찰이 무척 못되게 굴었습니다. 국방경비대에 대해서 잘 인식이 안가고 콘스타뷰럴리라고 해서 경찰보조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국립경찰에 보조를 하는 한 개의 단체다 이런 인식을 가졌습니다. 이럴 적마다 마음 아프게 되었고 그때 경찰이 잘못하고도 잘한 것으로 되고 경비대는 못한 것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여수10.19사건때 벌교전투에서 전사하신 유대선씨란 분이 있는데 애국심이 강하고 군인정신이 왕성한 군인이었습니다. 한번은 유대선씨가 주번사령을 한 일이 있는데 그때에 연대내에 장교숙소가 있었습니다.
그 숙소에다가 미국 하사관들이 우리 부녀자를 갔다놓고 행패를 하는것을 한번 발견을 해서 유대선씨 하고 이래서야 되겠느냐 해서 위병을 불러서 그곳을 포위해서 유대선씨가 들어가서 여자들을 어떻게 데려 왔느냐 하니까 지니네들이 사왔다 이것입니다. 몇 시간 사 왔느냐고 하니 2시간 샀다, 3시간 샀다.....
영내에서 부녀자를 조롱하고 민족감정이라는 것이 대단했어요.
이것을 젊은 혈기로서 용납할 수 없었고 그래서 차에 실고 도망치려는 그들중 한명을 붙잡아 끌고 들어갔는데 나중에 통의부장 고문이라는 미군 프라이스 대령이 우리를 파면을 시키라고 그런다 말이에요. 그래서 그만둔다고 했던이 얼마후에 채병덕씨가 찾아와 나오라해서 나갔습니다.
통의부장이 불러서 가서 사실 이야기를 했더니 당신네들이 군대를 그만두면 어떻게 되느냐고 해서 다시 군데에 계속 있게 되었지요. 대우는 그때만 하더라도 수수밥과 콩도 섞어 먹고 이렇게 하면서 군의 모체가 된다는 이 신념으로 창군을 해 나가게 됩니다.
참모학교장 김홍일(평북 용천출신, 제 1군단장, 시흥지구사령관, 신민당 당수역임) 증언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육본에 자주 들려 피아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갔게 되었다. 당시 정보국에서 북한의 남침 가능성에 대한 처보를 자주 수집 보고하였으나 미 군사고문단측에서는 "포와 전차등이 전방에 추진되었다는 정보국의 보고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항공기로 정찰을 해 보았으나 그러한 징후가 전혀 없고 또 전차는 논과 밭같은 야지를 횡단할 수 없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소용이 없다하여 옳바르게 판단을 하지 않았다.
전쟁이 터지자 나는 당시 육군병참학교장에게 학교를 인계하고 채총장의 권고에 따라 문산지구에 있는 제1사단의 작전지도를 위해서 떠났다. 그 뒤에 내가 시흥에 도착한 것은 28일 07:00시경이다.
시흥에는 참모부장 김백일, 강문봉 대령과 육군참모학교 고문관이 와 있었는데 고문관 이야기가 한강선에서 3일만 적을 지연시키면 미군이 참전하여 공세이전할 수 있다라고 나에게 말해줌으로써 희망과 용기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박창암(함남 북청출신, 보국대대 중대장 준장예편, '77.4.6)의 보국대대관련 증언내용이다.
여순10.19사건('48)사건이 일어난 시기에 대하여 우리에게는 그것이 다행한 일이었고 북한측으로 보아서는 큰 실수가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대체로 1949년 여름 이전까지 북한군이 집단적으로 혹은 개별적으로 월남 귀순했던 일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을 한 곳에 집결시켜서 그때 김성록 중위(팔로군 소좌)등의 조언을 받아서 보국대대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이 보국대대 발족에 대한 한쪽에서 이걸 믿을 수 없다느니 있다느니 하며 왈가왈부하다가 "그렇다면 공비와 직접 맞세워 보면 될 게 아니냐?"해서 첫단계로 지방 순회강연을 시작했던 것이다.
제 1차로 시작한 대구 형편을 보면 대구를 이른바 한국의 모스크바라고 해서 15~16세쯤 되는 중학생이면 북한의 적기가를 못 부르는 학생이 없을 정도로 공산주의가 침투한 곳인데 우리 대원(여자대원도 몇 명 있음)들이 북한실정을 폭로하니까그 반응이 매우 좋게 나왔다.
경북중학교에서 강연할 때는 대구 농림학교 4학년 재학중(월북전 대구에서 공산당 핵심분자) 월북하여 밀봉교육까지 받았던 권달변이란 대원이 "여러분, 나 잘 알지요."하며 열변을 토하니 장내가 깊은 감명에 빠지는 것이었다.
제2단계로 공비토벌에 나서는데 그때 대구에 있던 제3사단장 김백일 사단장 지휘하에 별동대를 편성하여 밀양, 청도, 운문산을 중심으로 공비토벌을 실시했다.이렇게 공비토벌을 시켜보니까 보국대대를 믿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전방에 투입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전쟁전에 1개중대는 제6사단에 1개중대는 나는 제7사단에 파견되어 수색정찰 및 적 후방에 대한 기습교란작전 임무를 수행하게 되고 대대(-)는 계속해서 귀순에 오는 사람들을 수용하여 교육을 실시하게 된다.
그런데 하루는 귀순자가 장암리에 대부대가 집결하고 있다고 하여 사령부를 출발, 포천 제9연대(윤춘근 중령)에서 하룻밤을 자고 25일 들어가려 했는데 북한이 전면 남침하여 들어가지 못하고 사단장(유재흥준장)이 불러 가보니 천보산에 나가 수색정찰을 하라해서 그곳에 올랐다가 북한군이 서울쪽으로 남하하고 있어 덕정리로 나와 보니 제7사단 하사관 교육대가 맨주먹으로 북한군과 싸우다 전멸된 것을 보았는데......
의정부로 들어가니 철로는 엿가락 처럼 휘어져 있고 사단은 없어서 의정부 북쪽 앵무봉을 넘어서 서울 구파발-미아리고개로 가니 여기에 사단장등이 다 있었다. 27일밤 이곳의 방어작전은 기억할만한 것이 없고 지휘관 및 참모들이 개별행동으로 한강을 넘어갔기 때문에 연희동쪽으로 도강하여 시흥으로 가서 시흥지구전투사령부 김홍일 소장의 지휘를 받았다. 그러다 군단창설과 동시에 군단정찰대로 변경되어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해방병단 송대후('66.12.10), 해군 및 해병대 창설 관련 증언이다.
사실 해군도 내가 만들다시피 했어요. 해방된 다음 해에 들어와서 해방병단(광복직후에 해군창설을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 미군정청의 허가로 '46년 1월에 국방사령부에 편입되고 국방사령부가 국방부로 개칭되고 '46년 6월에 통위부로 개편되면서 조선해안 경비대로 명칭이 바뀜)에 손원일씨가 단장으로 있었고 나는 중대장인데 미군들이 해방병창의 물건들을 해먹고 있어서 진성서를 만들어 손원일을 단병실에 가두웠는데 통위부로 창설되고 이응준이 감찰부장인데 손원일이 어떻게 미군하고 비행기를 타고 올라와 있었다.
그때는 공산당도 많이 있으니까 그사람들이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을 잡았다.
해방된 이듬해 3월쯤 될 것이다. 제1연대가 창설되고 그 당시는 1기생들이 들어갔을 때이다. 해안경비대 간부로 그곳에 가 있으면서 적발했는데 그때 일본놈 소총이니, 권총, 수류탄을 잔뜩 싣고 넘어온 것을 잡았다. 이북에서 넘어온 거야. 여기에 있는 좌익계열에게 공급하려고 가지고 온 것이었다.
수경사령부 공병보좌관 중위 박인규('67.3.22. 한국지질연구소장)의 증언이다.
수도경비사령부 공병대대에 있을 대에 6.25전쟁이 났습니다.
중위로 있었는데 그때 부대는 영등포 쪽에 있었어요. 그래서 서울지구 일원에 대전차 장애물을 만드는 폭발물같은 장치같은 것은 다 내손으로 계획했습니다. 수색쪽, 의정부쪽에 도로 폭파하는 것도 장약은 다 내가 하고 광나루, 한강교 귾는 것도 다 내손으로 장약을 설치 했습니다. 스위치는 다른 사람이 눌렀지만 . 나는 한강 폭파 20~30분 전에 건넜어요. 그것은 공병학교에서 맡아서 했습니다.
그 당시에 최창식 대령을 미쳤다고 했지요. 그렇지만 나는 미친 사람으로 보지 않아요. 머리가 기가 막히게 좋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은 10분의 1도 따라오지 못합니다. 그러니가 미친 사람으로 보이는 겁니다.
수경사령부 제8연대 제8중대장 정승화('64.8.28. 제7사단장실. 경북금릉 출신, 전 대장)증언이다.
"전투하신 것을 순서대로 말씀해 주시면....."
"전쟁전 6월22일 나는 제6여단 제8연대 제2대대 화기중대장을 했다. 대전 제2연대와 교대를 하고 서울에 도착하는 것이 6월23일이다. 24일 부대정리를 하고 25일 일요일에 장충단에 가서 참배하러 가게 되어서 25일 아침 일찍 부대에 들어오는데 서울시내 사방에서 라디오 방송을 하고 야단이었다.
국군은 빨리 지기부대로 들어오라고 해서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38선에서 근무할 때 그러한 경험이 있어 또 그런 충돌이 있나보다 하고 들어가니 장교는 통 안들어 왔다.
"연대장은 누구 입니까?"
"서종철 장군(제3군단장, 양산출신)이었다. 그 낮에 출동 명령을 받고 가평쪽으로 출동을 했다. 1대대는 강.표사건으로 해체하다시피 되어 신병만 받아 가지고 교육을 하고 있었고 제3대대는 먼저 들어와 참배를 마치고 휴가를 다 보냈다. 그러니 우리 2대대만 가평으로 출동을 했다. 가평에 도착한 것이 26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시 한강 남쪽을 방어해야 한다고 하여 버스를 동원하여서울에 들어와 한강 인도교 바로 남쪽 흑석동 일대가 방어지역이다."
"그것이 어느 날 입니까?"
"그것이 26일 저녁때 아니면 27일 아침일 것이다."
"중앙대학 자리도 들어갔습니까?"
"거기까지는 안가고 한강변에 배치했다.
그러다 유엔군이 올라온다며 한강 북쪽에서 한강에 도달하지 않도록만 막는다는 이야기가 들리며 우리는 다시 철수를 해서 청량리에 현재 상과대학교인데 그 북쪽에 배치를 했다. 사관학교를 내다 볼 수 있는 곳에 배치를 했다. 그때는 지시를 유선이나 무선 통신망이 아닌 연락장교가 경비사령부을 왔다갔다 했다.
우리는 적에게 돌파를 안 당하고 상당한 우리 패잔병을 받아주었는데 우리 패잔병 가운데 적이 섞여 들어왔다. 적이 우리 복장을 하고 우리 뒤에서 지금 생각하니까 청량국민학교 이쪽인데 청량리 일대에서 거꾸로 우리에게 사격을 가했다. 28일 오후에 적이 서을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 한강교 끊는 소리도 못들었어요?"
"못 들었다. 그때는 꽝꽝하는 소리가 사방에 나고 B29인가 폭격기들이 한강가에 날고 있었다. 그래서 대대장과 상의하여 광나루쪽으로 내려와 한강나루에 가보니 다리가 끊겼고 많은 피난민들이 '국군은 무엇 하느냐, 적군이서울에 다 들어왔다'고 하여 비참함을 느꼈다. 민간인들에게 사정하여 배를 양보해 받아서 몇 개의 배로 강을 건넜다."
제1사단 제13연대 연대장 대령 김익열(제주도 제9연대장역임,'69년 중장예편.경남 남해출신)
먼저 '92년도에 나온 유고록에서 최대의 비극이라는 제주도 4.3사건의 실체를 조금 이해하고자 한다. 이 내용은 요약형이지만 김익렬장군의 참뜻은 전혀 왜곡없이 반영하었고 차후 제주도 4.3사건에 관련된 내용은 별도로 상세히 언급하도록 하겠다.
장군은 '47년 9월에 제9연대 부연대장으로 제주 부임한 후에 '48년 2월에 중령으로 진급하여 연대장에 보임되었다.
'48.5.1, 휴전 4일째 되는 노동기념일에 제주읍 중산간 오라리에 정체불명의 일단이 습격하여 부락민을 죽이고 방화하는 난동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경찰은 공산폭도들이, 폭도들은 경찰이서북청년단을 시켜 만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을 두고 군정장관과 나는 경찰의 소행이라고 심증을 굳혔다.
경찰은 폭도들이 시간을 벌기 위해 위장 평화 공세로 귀순하고 있다고 역 소문을 퍼트리고 또한 귀순하면 군인들이 몰살하려 한다는 낭설을 퍼트리고 있었고 맨스필드 대령은 경찰의 방해공작이 시작되었으니 나에게 조심하라 하였다.
그 이유는 수일내에 폭도들이 귀순하여 폭도진압이 끝나면 경찰과 경무부장 조병옥의 위신이 땅에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약 1개월전 호언장담하고 제주도 폭동 진압 사령부를 설치하고 공안국장 김정호가 진두지휘하여 토벌했으나 막대한 피해만 입고 육지에서 파견온 대부분의 경찰이 무기를 버리고 흩어져서 제주도 각지 항구에서 밀선을 타고 고향으로 달아나 버려 경찰은 2선으로 경비대가 책임을 지게 된 것이다. 이런 사실이 서울 정계에 알려지고 미군정청에 알려지면 입장이 난처해 지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더구나 폭동진압 불과 열흘도 안되어 28세의 백면 청년(김익렬)이 전투도 하지않고 단신 적지에 들어가 회담으로 귀순공작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니 조병옥은 제주도 현지경찰의 허위 보고만 듣다가 대세의 판단을 그르쳤고 이로인해 폭동발생 원인이 밝혀지고 초토작전의 진상이 탄로나면 그 자신이 죄인의 입장에 처해진다는 것을 모를리 없었다.
그러니 화평 귀순공작을 무력화시키려 방해공작을 하게 되었으며 이를 맨스필드 대령과 드루스 대위는 경찰의 비 애국적인 처사에 대단히 분개하면서 경찰의 방해공작을 철저히 경계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심지어 연대장을 암살 할 수도 있다고 경고를주었다.
드디어 5월3일 오라리 부락근처에서 귀순폭도 2백~3백명이 비행장근처 수용소로 귀순한다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연대고문 드루스 대위와 미군병사 2명, 9연대 7명이 인솔하여 하산하는데 난데없이 완전 무장한 경찰 약 50명이 92식 일본군 경기관총과 카빈총으로 기습 난사를 하였다.
드루스 대위는 제2차세게대전의 영웅답게 2명의 미군병사로 m-1총으로 중기관총 사수를 저격하고 일제히 경찰에 사격하여 5명이 죽고 경찰이 도망가고 폭도들중 생존자들은 다시 산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그 자리에 쓰러진 경찰 한명을 데려다 치료하고 심문한 결과 상부의 지시에 의해 폭도와 미군과 경비대 장병을 사살하여 폭도들의 귀순공작을 방해하는 임무를 띤 특공대라 자백하였다.
그러나 김정호 경찰토벌대장은 뻔뻔스럽게 공산폭도들이 공격이라 중상 모략하려고 그들이 저지른 짓이라 격언을 한다.
그러면서 중상을 입고 잡혀온 자도 경찰에 들어왔던 제주도 지역 공산주의자로 중기관총을 갔고 산으로 도주하였으며 어제 심문을 받던중 스스로 자살했다고 은폐하게 되었다.
그후에 경찰은 그들의 죄상과 과오를 덥기 위해 폭동을 조장하고 확대하려 하고 폭도를 가장하여 민가에 방화하고 귀순자들을 무자비하게 죽임으로써 반대로 보복을 불러일으켜 난장판을 만들어 갔다.
이렇게 되자 폭도들도 산에서 내려와 지서를 방화하고 중지 되었던 전투가 다시 개시 되었다.
이렇게 되자 폭도들은 약속 위반이라고 나를 죽이겠다 하고 경찰들은 폭도들이 자신들의 배반자를 죽여놓고 경찰에게 뒤집어 씌운다고 서로 비방과 악선전으로 주민들은 더 불안해지거 치안이 마비되니 군정장관이 대로하고 경찰은 나에게 이용 당했다고 악전선이 계속 되었다.
당황한 미군정은 군정청장 딘소장이 직접 제주도에 내려와 현지에서대책을 수립하겠다 한다.
5월5일 제주중학교에서 있는 회의에 제주도 군정장간 맨스필드 대령, 제주도지사 유해진, 제9연대장 김익렬,민정장관 안재홍(평택출신, 납북되어 사망), 경비대총사령관 송호성준장(함남출신, 6.25전쟁때 납북. 북에서 사망), 경무부장 조병옥, 제주도 경찰감찰청장 최천, 딘소장 통역관김씨(목사출신)이렇게 9명이 참석하였다.
먼저 경찰은 폭동은 국제공산주의자들에의해 사전 조직되어 훈련된 폭동으로 군.경을 투입하여 철저하게 토벌하자는 내용이었다.
다음은 송호성장군인데 나보고 하라하여 이 사건은 제주도민의 전통적인 배타성을 이용한 공산주의자. 불평불만자.밀무역자 등이 일으킨 도민 폭동으로 본다. 직접적인 도화선은 밀무역자와 경찰간의 마찰이다. 실제 인원이 3백명인데 경찰이 초동의 대책과 작전에 실패에 기인한다. 이작전의방해 요소는 경찰의 기강 문란이며 이것이 폭도 증가의 원인이 되고 있다. 경찰 지휘권을 나에게 달라.
그리고 사진첩을 딘소장에게 건네주었는데 얼굴이 상기 되면서 '닥터 조 어떻게 된거요?'하니 조병옥이 벌건 얼굴로 단상의 뛰어 올라가 조씨는 연대장의 설명과 사진첩은 전부 허위로 조작된 것이고 경찰에 대한 중상모략이며 난데 없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저기 공산주의 청년 한사람이 앉아 있소. 우리 조사에 의하면 저 청년의 아버지가 국제공산주의자이며 지금 북한에서 활동하고 있소"라고 유창한 영어로 깔아뭉개고 있다. 이미 내 아버지는 5살에 죽었는데 말이다.
내가 단장에 올라가 '닥쳐라" 조씨를 붙잡고 한판 실갱이가 벌어지고 무고한 나를 공산주의자로 모느냐며 죽여버리겠다고 외쳤다.
여기에 송호성장군이 참고 앉으라고 하는데 이걸 통역관을 딘소장이 불러 뭐라고 지금 하느냐고 하니까 "너는 공산주의자이고 나쁜놈이다"라고 하여 발길로 입을 찬다는것이 음부 그곳를 차버렸다.
너무 비참한 일이다. 안재홍은 너무비참한 일이다며 눈물을 흘리고'민족의 비극이오"울먹였다.
이렇게 해서 연대장이 박진경(김익렬의 고향친구)중령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조씨를 구타한 것이지만 극비적인 문제는 제주도를 조기에 안정시키기 위해 빨리 무력으로 진압하라는 지시가 내려갔다고 본다.
그는 취임하면서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30만을 희생하더라도 무방하다며 초토화 작전을 감행할 것을 다짐하였다.
박중령과의 마찰로 원래 고문역활을 하도록 되었던 것을 단 1시간만에 결렬하고 비행기를타고 서울로 올라와 버렸다.
하지만 서울의 경비대 장교들은 한결같이 나를 반겨주고 이해하였으며 이로 인해 다른 처분을 내리지 못했다. 3~4일간 쉬다가 여수에 제14연대장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박진경이 대령으로 진급하면서 축하 파티를하고 나서 암살 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자 조씨가 바로 배후에는 김익렬이 있다고 무고하여 나는 서울로 소환되고 14연대의 여순반란 사건의 책임을 모면하게 되고 오동기 중령이 후임으로 갔다가 책임을 물어 15년 형을 받고 복역중에 사망하게 된다.
박진경이 죽자 딘소장은 자기 심복이 죽으니 CIC를 동원하여 배후를 밝히도록 강요하게 되고 나는 이틀만에 소환되어 지금의 명동 천주교 성당과 성모병원 길건너 어느 일본식 안가에 붙잡혀 1달 이상 편하게(?)지냈다.
딘소장과 조씨에게 공을 세우려는 군인, 경찰, 민간인등 친일파였던 민족반역자들이 나에게 접근하고 회유했지만 나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8월초에 제13연대장으로 온양에 내려갔다.그후에 전방으로 추진하여 제1사단의 우측지역을 담당하게 된다.
박진경을 살해한 문상길 중위등 3명은 최후 진술에서 본인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며 다른정치적 목적도 없었고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는 군인으로써 국가와 민족을 해치는 민족반역자를 총살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그것이 군인의 임무라 하였다.
그리고 나에게는 본의 아니게 사고를 저질러 미안하다고 사과하였다. 그들은 모두 수색에서 총살로 끝났다.
제1사단 제11연대 1대대 4중대 소대장 중위 홍정표('80.11.26)증언 내용이다.
"임관후 '49.7월 38선 경비중에 송악전투에 대하여?"
"당시 피아진지를 구축하면서 상호 방해작전으로 불법사격과 선제공격을 실시하는 등 경비부대 상호간 충돌이 빈발하였다.
북한군이 주봉이 488고지에 아군은 200m거리의 475고지에 대치하고 있는데 먼저 적이 '49.7.20일에 비둘기 고지에 사격을 가하고 정찰대에 사격을 가해 장교와 하사관이 전사하여 김석원 장군이 7월 25일 488고지에 대해 제1대대에 공격을 명하였다.
일진일퇴의 공방전 속에 8월3일 아군이 488고지를 내주고 밑에 비둘기 고지와 등대고지를 확보한채 소강상태로 되었다."
"작전이 끝난 뒤에 '50년 3월초에 제12연대와 교대하여 수색으로 이동하였다.
"1950년 6월 공용화기 반납지시 계통 및 반납이유?"
"6월초 지휘계통에 의해 정식 하달 되었다. 제4중대 박격포, 기관총의 반 상당의 장비가 후방 병기창에 정비 이유로 반납 되었다. 당시 보유장비는 사용 가능상태였다."
"6.25전쟁 전야 전방부대의 경계상태는?"
"인원의 1/3이 부대에 잔류하고 평시와 같이 외박, 외출 하였다. 본인도 용산 집에서 있다 용산경찰서 앞에 대기한 트럭에 탑승하여 수색역에 도착하니 최경록 연대장이 나와 부대 복귀 장병을 직접 지휘하고 있었다.
기차로 문산역에 오니 사단장 백선엽이 직접 지휘하고 있는데 시간이 대략 08:00시경이다.
제1대대장이 병력배치 시간으로 보아 임진강변에서 한번 북한군을 저지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그대로 문산까지 철수했다. 뒤에 대대장의 사상 문제가 부대원간에 논의 되었다.
08:30분경에 처음으로 북한군 야-크기 2대가 나타나 소대원 3명, 제3중대 7~8명이 전사했다.
09:00부터 민간인 도강이 시작되면서 문산지역에 적이 시한포탄을 포함한 포사격으로 북한군이 살육하고 아군후속부대가 철수하는 혼란속에 피아 구분하기가 힘들 정도의 혼란상태였다.
6월 26일 14:00에 금촌에서 북한군과 접전하였다.
6월27일 오후에는 임진강변까지 전진하여 접전하였는데 이때 동측 의정부방면에서 이미 서울 근교에 적이 접근 했을 때인데도 이런 상황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6월27일 일산리에서 적이 녹번리로 침투했다는 정보로 6월 27일 23:00, 행주나루에 소대원 18명을 인솔하여 도강, 적이 이미 침투한 김포를 피하여 인천에 개인별로 분산 후퇴하였다.
인천 방위사에서 민간인 복장에서 군복을 바꿔입고(차후 증언은 시흥보병학교에서 받았다 함) 시흥보병학교로 가 여기서 제11연대장을 만나 연대 병력을 재편하는데 1/3에도 미달하였다.
제7사단 제1연대 부연대장 중령 이희권(창군원로, '64.12.17 예)장군)증언이다.:여수순천 사건 증언
"여수10.19사건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제14연대에서 직접 겪은 이야기는 할 수 있습니다.
깊은 배후 관계는 확실히 모르지만 부연대장이었기에 아는 데까지만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때 여수에 있던 부대란 것이 급히 편성된 연대입니다.
그때 육군본부에서 각 지휘관에게 연대 편성에 경쟁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지원병을 모집해야 되는데 사상적인 문제라든지 그러한 진상을 고려하지 않고 모집을 했습니다.
내가 처음으로 부연대장으로 갈때는 김익렬씨가 연대장이고 그 다음 바꿔서 오동기 중령이 왔다가 어떤 혐의가 있어서가고 박승훈 중령이 왔습니다.
그런데 박승훈씨가 와서 한 10일 되었는가 해서 여수에 사건이 나는데 그 이전에 제주도에 사건이 터져서 제14연대에서 1개대대를 편성하여 토벌작전에 투입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육본에서 작전참모 강문봉 장군이 내려와 1개 대대를 편성해 준비하라 명령을 했습니다.
그때 연대장하고 나하고는 제주도 토벌이 중요하기 때문에 현지에서 편성되는 대대가 아닌 우수한 일제강점기 때라던가 전투경험이 있는 인원을 선발하여 대대를 선발 하였습니다.
육본에서 10월19일 밤 10시에 lst로 여수항을 출발해서 제주도로 가라는 명령이 왔는데 그 작명이 일반우편으로 통해서 전보로 왔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상식에 벗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연대장과 협의하여 기밀이 누설되지 않도록하고 2시간을 늦춰 12시에 출동하기로 하고 아침부터 Lst에 보급품등 적재를 하고 있는데 그때가 7시쯤 되었는데 연대장이 Lst에 왔습니다.
그리고 한 2~30분 있으니까 그때 수송장교가 중위인데 직접 운전을 하고 와서 출동할 부대가 탄약를 습격하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처음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연대장은 우선 Lst에 남도록 하고 내가 가보겠다고 해서 숙소에 가서 권총을 찾아 정보주임하고 짚차를 타고 연대에 들어갔습니다.
전문을 통과하여 들어가니 여기저기 총소리가 나고 걸어가는데 누가 '누구냐'고 수하를 하여 부연대장이다 하니 총을 쏘아 정보주임이 전사하게 됩니다.
어떻게 연대본부에 가서 스피커를 통해서 불순분자에 속지말고 선량한 군대는 연대 앞으로 집합하라 하니 몇명 나왔는데 장교는 벌써 다 죽었습니다.
그러다 연대장이 들어왔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다시 나가 여수에서 2개중대가 나가 있는 순천에 민간전화로 연결하니 홍중위라고 있었는데 안되겠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보니 좌익(홍지회중위)이었습니다.
반란군이 시내에 들어와 헌병대를 습격하고 경찰서를 습격하고 여수시청 경찰서 다 불지르고 그날밤에 인민 군기가 올라갔습니다.
나, 헌병대장, 3대대장등이 같이 있다 민가에 은거하고 있는데 대대장은 발견되어 총살되었습니다, 그때 순천에 송호성 장군의 전투단이 참가하여 여수에 들어왔습니다......
사실 연대를 급조하다 보니까 광주에서 영암사건('47.6.2일에 전남 영암에서 조선경비대 4대대와 경찰사이에 교전이 벌어진 사건.)에 관련된 사병 130명이 여수연대로 편입되었습니다.
그 130명이 좌익이 이고 그래서 재훈련을 시키려 했는데 그 계획을 가지고 있는 김지회가 작전회의를 했습니다.
원래 출동할 때 식당에서 회식을 했는데 그때 전장교를 몰살시키려 했다고 합니다.
그때 장교가 한 20명인데 7~8명 살아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이지역 공무원등 거의 죽고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군인도 약 2800여명의 희생이 발생하고 민간인은 약 400여명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하나 더 피해가 심했다고 한다.
그후 반란군 잔당이 지리산에 숨어들고 이듬해에 전쟁이 터진 것이다.
"다음에 겪은 사건은 없습니까?"
"6.25전쟁때에 제1연대에 부연대장을 했습니다. 연대장은 함준호 대령인데 창동지구에서 전사햇습니다.
"6.25전날이 토요일인데 얼마나 외출과 외박을 내보냈습니까?"
"전력의 3분의 1을 보냈을 겁니다. 주로 예비부대에서 많이 나갑니다."
이상의 주요인원의 증언 내용을 보았다.
분명한 것은 군내부에 프락치가 너무 많았고 파벌이 심했으며 군과 경찰이 융화하지 못했다.
서로 공과를 과시 또는 은폐하려 모함을 끊이지 않았다.
군 고위층이 썩어서 북측과 밀거래나 하고 이미 전쟁전에도 군정관으로 들어온 미군은 로스케들이 북한에서 하는 것처럼 우리 아녀자를 잡아다 놀이문화를 즐겼다. 적이 온다는데도 술을 실컷 마시고 총장이 술에 취애 정상적인 보고도 못받고 횡설수설 차를 타고 의정부로 미아리로 돌아다니고 장관은 일요일이란 이유로 전화도 안 받고 대통령은 낚시터에 앉아 오전 10시나 되어서 보고를 받는 이게 무슨 군대이며 국가인가.
진실은 묻히고 분명 분별력을 흐리게 한 내부에 고위 직위자나 계급의 프락치가 존재함에도 역사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심증은 가는데 딱 너라고 말하기가 곤란한 역사가 이제 70년이 되어간다.
그리고 해방 전후에 잘못된 공산주의 사상이 들어와 굶주리고 헐벗은 국민들을 현혹을 시키고 위정자들은 자기 편을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대낮에도 전차가 들어오고 포가 들어오고 대부대가 들어와 진을 치는데도 훈련수준이라 넘기어 그 비극을 자초한 우리들이다.
군의 정치적 중립과 독립이어야 한다
작금에도 청와대 6급 공무원이 육군의 총수를 삼각지로 휴일에 불러내어 만나는 웃지못할 촌극이 벌어져도 어깨에 별들은 반짝이기만 한다. 창피할줄 모르는 권력의 아첨쟁이들이 또 늘어난다.
명령하면 아마도 총을 내려놓고 무장해제하고 걸어 나올 절대 명령에 복종하는 자들 많으리라~~~
며칠이면 삼일절 100주년이다. 그 어린 여성의 나이로 죽음을 두려워 하지않은 유관순누나에게 면목이 없다. 우리 역사는 남자들이 망하고 여성을 몸종으로 보내는 아주 나쁜 근성이 있다. 이제 그런 피해의식을 불식하고 역사를 뛰어넘어 내로남불의 잘못된 배반의식을 버리자.
2. 봉일천 부근의 전투관련 증언 /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당시 전투 참가자들의 증언
먼저 제13연대 제3대대 기관총 사수 황대형의 증언이다.
"선배님, 전사에는 철수하면서 축차적으로 전투를 했다고 하는데 전투를 하면서 철수 했습니까?"
"전쟁사에는 26일 밤부터 27일까지 제3대대의 행적을 보면 27일 밤에 봉일천-행주 방향으로 철수하던 부대가 광탄 서쪽 150고지를 점령해 남하하는 적을 저지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기억에는 26일 밤 이율곡 사당에서 철수를 시작한 이후부터 28일 아침까지 비를 맞아가며 철수를 계속했던 기억밖에는 없다."
누누히 밝히고 있지만 황선배는 '99년 10월부터 '18년 작고 하실 때까지 어느 누구보다도 나와 함께한 시간이 많았다.
서울에 올라오셔도 만나고 내가 광주에 내려가서 만나기도 하고 다부동에서 만나기도 하고 년에 10회 이상을 만나 다부동뿐만 아니라 고랑포 지역, 도내리, 행주대교, 무극리, 베티고지 앞등 주요전투 지역은 다 함께 다녔다.
나는 다른 용사님은 몰라도 이분의 증언은 사실 그대로라고 믿는다.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 증언이기에 그렇다. 대부분 이제 모두가 본인의 잘못은 잊어버리고 잘한 것으로 보이는 것만 말하기 쉽다.
살아 있는 용사님이 없으니 누가 알리도 없다. 본인이 답이 전부인양 되기 쉽다.
"혹시 과거에 대대장이 총살시킨 오소령 이야기 다시한번 해 주시죠?"
"28일 아침 봉일천 부근에서 일어났다. 본인의 동기생이며 사단의 작전참모를 역임했던 오소령을 쏘아 사살한 사건이다.
"그 이유가 처음 저에게 말씀하실 때는 오소령이 북한의 프락치라 그렇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철수한는데 병력을 데리고 밤새 걸어서 아침 나절에 보니 다시 그자리로 와서 병력을 적의 손아기에 넣어준 꼴이되어 그랬다고 하셨는데."
"그렇다. 사실 관계는 그 당시 연대장이던 김익렬 대령의 증언에 나오듯 "우리 고손자 대나 나올 문제다"라는 증언에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사실 당시에는 대대장과 두 분이 동기생으로 애매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오소령(오혜택)이 사단 참모에서 시흥 보병학교 고등군사반에 입교했다가 전쟁으로 복귀하여 대대로 내려온 것이다. 물론 당시 대대장은 본인이 대대장이고 오소령은 단지 자신의 부하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27일 밤에 철수를 하게 되는데 두 분의 의견이 갈리였는데 많은 사람이 오소령의 제안을 딸르게 되어 결국 그 안으로 밤새 행군을 한 것이 28일 날 아침에 다시 그 자리였던 것이다.
그러자 대대장이 "이 총알은 나와 전 대대원들이 주는 것이니 원망하지 말라"라고 소리치고 방아쇠를 당겨 뚝방으로 굴러 떨어지는 그에게 계속 발사하여 죽게 되었다.
그리고 대대장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전 대대원을 집결시켰다. "내가 대대장이다. 지금부터 내가 지휘한다." 그리고 서울 시가전을 위해 전투편성을 하여 오후 2시경 고양시 일대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게 웬인인가, 회의에 갔다온 제12중대장 한인성 대위가 전 중대원을 집합시켜 놓고 통곡을 하며 말했다.
"이 시간부로 부대를 해산한다. 각자 알아서 갈 길을 찾아 간다. 한강 이북에 집이 있는 사람은 집으로 가라. 한강 이북에 갈 곳이 없는 사람은 각 자 한강을 건너 시흥 보병학교에 집결하라. 가급적이면 시흥보병학교에서 집결하여 다시 만나자. 이상 끝."
그래서 한 순간 수군거리기도 했지만 모두 우리에 갇혀있던 닭들이 자유를 얻어 흩어지듯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한강을 어떻게 넘었습니까?"
"우리 기관총반은 살기 위해 뿔뿔이 헤어지기로 했다. 그래서 기관포를 군복을 벗어 포장하여 땅속에 묻고 무작정 한강으로 향했다. 지금의 행주대교 근처다.
그런데 29일부터는 적으로부터 공격을 두려워한 배들이 반대편에서 되돌아오지 않아 강변을 서성이는 병력이 많았다. 한강의 얕은 곳을 찾으러 서성거리던 나는 한 초가집에서 옷을 얻어입고 널판지를 한 장을 얻어 개헤엄 반 잠수 반으로 소리를 죽이며 수영으로 도하하여 개화산 기슭에 도달하여 보이는 민가에 무작정 들어가니 몇이 더 있었다."
"그래서 바로 시흥으로 무사히 내려갔습니까?"
"그랬으면 얼마 좋겠어요. 집에서 조금 쉬고 밖으로 나와 보니 동산이 하나 있는데 인민군이 나타나 조준을 하고 있는거야. 그래서 뛰어들면서 적군이다라고 외쳤더니 먼저 그놈들이 "저기! 저 새끼들 국방군이다"며 달려들어 우리는 꼼짝없이 포로가 되었는데 어떻게 해, 두 손을 번쩍들었지. 그래서 손을 들고 끌려 가는데 민간복장을 한 여러명이 대기하고 있는데 갑짜기 언덕에서 국군 복장을 하고 총을 든 한 무리가 도망치니 북한군이 그들을 쫒는 틈을 이용하여 무조건 달렸지. 논 밑으로 굴러 벼 포기속으로 숨으며 도망치니 쫒아오지 않아요.
그래서 농수로가 있어서 살짝 그 위로 올라갔을 때 소름끼치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지 뭐요!"
"혹시 사람을 빨가벗겨 가죽을 벗기는 장면 입니까?"
"북한군 몇명이 국군으로 보이는 군복차림의 20여 명과 사복차람의 10여 명을 도로 아래 둑으로 밀어 붙이고 사살하고 있는 장면을 직접 보았어요."
"그래서 살아나 시흥 보병학교에 갔나요?"
"6월 30일 밤에 이곳에 도착하여 다시 군복을 받고 밤이 되어 불침번을 편성한 후에 잠에 들었는데 마지막 불침번이라 총을 들고 불침번 근무를 하는데 총알은 없었다.
그래서 불현듯 제13연대를 찾아야한다는생각이 들어 M1소총을 들고 그대로 밖으로 나와 요행히도 제13연대를 찾아 갔는데 제3대대는 1개 중대가 채 되지 않게 모였다.
어쨋든 총을 들고 나타난 군인은 나 밖에 없었다. 우리는 풍덕천으로 이동하였다가 다시 수원으로 왔는데 아군기의 오폭으로 연대장 김익렬 대령이 부상 당하고 부연대장 김진권 중령은 전사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계속 철수하여 평택에 도착하여 기차를 타고 조치원으로 가서 그곳으로부터 걸어서 청주를 거쳐 증평에 도착했다.증평에서 제5사단의 예하 연대를 흡수하여 제15연대장인 최영희 대령이 제13연대장으로 오고 나는 제1대대 제3중대 소총수로 전환되었다.
재편성 후에도 별다른 전투 없이 철수를 계속하여 음성을 거쳐 괴산에 도착하였으며 7월31일 함창에 도달했다."
참전용사 이경수 사단 의무대 운전병의 증언이다('00년 7월개화산에서)
"선배님은 어떻게 행주나루를 도하했습니까?"
"뭐 어떻게 해. 차를 버리고 민간배를 얻어타고 건너는데 사단장도 주요 참모들도 다 행주나루에서 건넜는데 공병들이 바람들어 있는 무슨 큰 보트같은 것을 이용하여 짚차도 실고 건넜지."
"그 당시에 피난민이나 도하하려는 군인들이 아우성치는데 어떻게 잘 건너갔습니다?"
"할 말이 많지만 할 수가 없어요. 그걸 다 말하면 세상이 뒤집어져. 높은 놈들이 다 나쁜 놈들이야."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못하지만 한가지 예를 들어주면 안되겠습니까?"
"뭐 이런거지. 이미 서울이 적에게 들어가 어디로도 갈 수 없는데 그러면 아무리 병사들이라도 상황을 알려 주어야 할 거 아냐. 그런데 아무 말없이 자기들끼리 차를 이용하여 쏙 달아나 벌이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는 식이니 어떻게 되겠어. 서로 배 타려고 총질도 하고 아군끼리도 많이 죽었어요. 아비귀환인데 아무도 통제하는 놈이 없어. 목소리 크고 총들고 있는 놈이면 다야."
"사단장은 조직적으로 철수를 했다고 하는데... .?"
" 뭐 조직적. 그만 하자구. 너무 불쌍한 군인들 많아요. 총 다 버리고 발가벗고 널판지 이용하여 넘어오기도 하고 쪽배에 혁띠를 매달고 넘어오지않나. 그러면 뭐해 이쪽에 먼저 인민군이 와서 올라오는대로 "이리 오라우 국방부 동무"하고 붙잡아 총살 시키는데. 여기 개화산에서도 적군이 먼저 저 위에 올라와 앉아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그러니 올라오는 족족 다 죽는 거지."
"하지만 우리가 듣기로는 몇백명이 전사했다고 하는데 지금 흔적을 찾기가 힘들고 여기 살아온 사람들 이야기로는 산보다 저 앞에 벌판에서 많이 죽었다고 하는데?"
"그야 나도 모르지. 얼마가 정확하게 죽었는지 기록에 없잖아요. 더구나 공산치하에서 다 치워버렸는데 누가 부역 열심히 했다고 손들고 나오겠어요. 모른다고 하지. 아니 연대가 흩어져 강을 건너 시흥에 갔는데 대대병력도 채 안되니 도망쳐 집으로 갔던지 아니면 북한군에 포로가 되었던지 아니면 행주나루나 저 위에 이산포라고 있는데 그 곳에서 건너다 물속에 다 들어갔던지 죽었으니 안 모였겠지. 그때 병력은 충성심이 강해요."
"수도경비 사령부 제18연대 제2대대 전기풍 용사님 증언이다.('07년부터 10여회)
"한강 어디로 도하 하였습니까?"
"우리는 의정부쪽으로 출동하였다가 철수하면서 적이 의정부를 차단하여 옆으로 이동하여 27일 해뜰 무렵에 도착한 곳이 금곡리였다. 여기서 배가 고파 동네에서 강제로 밥을 구해 먹고 다시 걸어서 구파발로 걸어서 행주나루에 인접한 곳에서 도하했다."
"도하할 때에 배로 했습니까, 아니면 다른 수단을 강구했는지요?"
"그 당시에 행주나루에 오니 아우성인데 1사단이 독차지 하고 있으니 어떻게 해. 우리는 그보다 약간 밑에서 민간 배를 몇 척 징발하여 무기들은 버리고 겨우 도하했다. 함께 했던 전우들 중에는 배를 타지 못하고 개별적으로 살아남아 나중에 보니 시흥에서 만나기도 했는데 만나보니 바지만 걸친 놈, 런링구만 입고 있는 놈, 그래도 총을 메고있는 놈등 정말 꼴이 꼴이 아니더라."
"혹시 도하 하면서 적이 먼저 와서 포로가 된 인원은 없습니까?"
"아 그렇지. 나도 건너오는데 저기 먼 곳에 적들이 있는 모습이 보여. 그래서 그 당시는 갈대숲이 우거져 있어서 잘 안보이거든. 그 물줄기를 따라 몇몇이 은밀하게 이동했는데 갈대가 월마나 큰지 위장이 잘 되어 우리팀은 한명도 안 걸려 들었고 다른 조에서는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그 놈들이 기관총인지 설치하여 마구 쏘아대는거야. 놀라서 돌아가 항복 하라고 말이지. 그런데 거기에 누죽이 들어 아마 많은 인원이 도하를 포기하고 죽기도 많이 했다고 알고 있어요. 그 많은 인원을 어떻게 하겠어. 그놈들도 통제하기 곤란한데. 비극이야. 다 죽고 다 버리고... ."
나머지 증언 내용은 문산-봉일천 관련 내용을 보면 제13연대등 주로 제1사단과 지원부대장들의 증언이 나와 있다. 참고하기 바란다
나. 지역탐사 및 탐문결과
이미 개성-문산-봉일천간의 전투분석에 내용은 다 들어 있기 때문에 특별히 분석할 내용은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앞에서도 언급 되었듯이 정말 전사와같이 제1사단의 봉일천전투가 벌어졌느냐의 신뢰성 문제다. 전투실시 여부의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것은 그 피해정도로 가늠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린 이 지역의 전사자를 찾으러 봉일천과 행주대교, 이산포 일대를 몇번에 걸쳐 확인 탐문 및 탐사를 했다.
봉일천 지역은 우전리, 도내리 그리고 공릉천 제방,1번국도를 좌우로 연하는 낮은 고지군을 샅샅이 살피고 몇군데는 지역주민 간담회를 실시하여 그 진실성을 알아보여 많은 노력을 했다.
사단의 최후 저항선인 월롱이 이전리-도내리-창만리에 이르는 곳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개인호나 교통로가 없다는 것은 현장에 가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 알 수 있다.
월롱의 노인정이나 덕은리에 가서 탐문을 해 본 결과로 '51.1.4후퇴이후 재 진격간 문산천에서 봉서산-문산으로 진출괴정에 우리는 덕은리일대에서 동측방으로 공격을 한다는 것은 전사놔 일치하게 그 전투흔적이 명확히 남아 있다.
하지만 우전리나 도내리의 내화산 광탄의 만장산에서 그런 흔적은 거의 없고 주민들 또한 초초 전투는 월롱의 다락고개 일대에서 가장 크게 했고 만장산 56번 도로상으로 병력이 지나 가고 그 좁은 길로 북한군이 추격하는 과정에 길거리에 몇이 전사하여 모퉁이에 묻혀지고 차후에 길을 넓히는 과정에 모두 훼손 되어 흔적도 없다고 증언한다.
광탄 신산리에 금식 기도원 뒷산에 올라서면 200여개의 개인호가 존재한다.
나는 눈 내리는 '18년 1월에 이곳에 올라가 실태를 분석하고 등원리의 마을 회관을 찾아 할아버지들의 증언을 들어보았다. 이곳은 이미 '10년에 신기동지역에 제보가 있어 현장을 확인하는 과정에 1차로 찾아갔고 그후로도 3번정도는 찾아가 서로 다른 증언에 대한 진위를 파악하려 노력했었다.
그 진위란 '08년도에 지역부대에서 제보를 받았다고 연락이 와서, 집단 가묘가 있다는 곳을 찾아가는 과정에 노인정에 들러 관련 이야기를 들어 본 결과 민간인 피해자로 의중이 되어 발굴을 중지시킨 적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천연적으로 방어하기에 유리한 횡적 하천이 문산천 앞에 갈곡천이 있고 밑에는 고산천이 그리고 공릉천이 봉일천에 남에서 흘로 북으로 와서 서쪽으로 빠지는 곳인데 이 공릉천과 고산천이 만나는 곳이 조이음 뇌조리 지역이다.
그러니 지리족 조건이 1번국도와 경의선이 남북으로 이어 달리고 종횡으로 33번도로, 56번도로, 76/78번도로, 367번도로 등이 그물망처럼 얽혀 있었으니 그당시에는 길의 폭이 좁아서 겨우 우마차나 다니는 정도니 기계화부대는 결국 1번도로상에 집중 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내가 탐사 및 탐문을 하며 내린 나만의 판단은 이곳은 그렇게 전쟁이 심하지 않았고 1번도로상에 집중 되는 병력 배치와 하천선을 이용한 일시적 거부작전 정도가 있었다고 보며 다행히도 용감한 중대장이나 특공대의 활약으로 적의 전차가 파괴 또는 돈좌 되는 상황에 서울에 이르는 시간이 지연 되었다고 본다.
특히 뇌조리 야산에서 시작하여 봉일천 고교 뒷산으로 해서 장곡리의 구릉성 야산일대, 내유동의 명봉산일원, 관산동의 심리산과 공릉천의 사리현동에서 지영동, 그리고 대원리에 이르는 강변을 탐사하고 대원리 마을 회관이나 내유동 관산동의 마을 회관에서 노인들을 만나 본 결과 초기 전투때는 전쟁이 언제 터졋는지도 모르고 북한군이 들어닥쳤고 이곳 일대의 전투는 주로 그 이듬해 국군이 진격하면서 중공군이 방어를 하면서 파 놓은 개인호가 대부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금식기도원 뒷산일대에 구축된 개인호는 언제 누가 굴토하였는가?
다시 도내리 마을 회관을 찾아 증언을 들어보니 이곳은 국군이 판 것이 반이고 중공군이 판 것이 반이라 한다.
그러면서 뜻밖에도 전쟁 당시에 북한군이 남한의 포로나 유력인사를 납치하여 끌고 올라갈 때에 사용한 길이 1번 국도가 아니고 길 안쪽으로 들어가 미군의 비행기 공습으로부터 보호받으며 이동하는데 이 곳이 그런 곳이란다.
그러니 능원리나 뇌조리, 내유동이 다 그런 길목 역활을 하고 있었고 이러다 보니 알게 모르게 끌려가는 과정에 탈출하다 죽기도 했지만 반대로 북한군의 부역자 역활을 한 사람들이 또한 많아서 국군이 진격시 경찰이나 군인으로부터 아니면 태극단이라는 자치대에 죽어간 민간인이 많았다 한다.
그 가족들은 대부분 북한군을 따라서 북으로 가버려 죽어간 사람들은 누가 가져다 묻어주지도 않아 동네에서 나중에 우리 경찰들 통제로 여기저기 가매장하였다고 한다.
탐사중에 나는 봉일천고교 뒤산에서 한 나이드신 신사를 만났다.
그는 공무원으로 정년 퇴임하여 지역에 사는 사람으로 매일 이곳 일대를 산책하는 일과다.
그런데 하루는 나를 만나게 된 것이다.
"어이 군인 양반, 뭐하러 산속으로 다니는 거요, 간첩 수색작전인가요?"
"안녕 하세요. 저는 유발굴 탐사반입니다. 이곳이 전쟁터라 해서 지금 그 흔적을 찾고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눈으로 뭘 어떻게 찾습니까? 무슨 장비라도 있어야 하지 않나요?"
"맞습니다. 장비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들고 다니는 수호신 측량하는데 사용되는 봉대를 보여 주었다.
"아니 측량하는데 쓰이는 도구가 무슨 역활을 한다고? 요즘도 그렇게 군이 주먹구구식으로 시간때우기식 탐사를 하는 모양입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험하게 하십니까. 공직 생활을 40년씩이나 하셨다는 분이 말씀이 너무 거칠게 들립니다."
나는 아주 불쾌한 모습으로 퉁명스럽게 아저씨를 바라 보았다.
언젠가 군이나 경찰로부터 되게 혼이 난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생면부지에 감히 너무 심하게 폄하하는 말이 무척 귀에 거슬려 따져 물었다.
"아저씨는 공직자 생활을 주먹구구식으로 하시고 세월을 보내 연금을 받게 되었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받으시면 뭐라고 답변하시겠습니까. 저도 한 30년 공직자 생활을 했는데 이런 식의 냉대는 처음입니다."
정말 싸움이라도 벌어질 모양이었다. 흔한 말로 싸가지하고는 ... .
그랬더니 한 발 물러서며 조금전의 말은 실수였다고 오해를 풀라고 하신다.
"선생님, 적어도 이 스틱은 영혼을 구제하는 지팡이 역활을 합니다. 이것으로 눈에 보이는 개인호를 찔러보면 깊이를 가늠하여 적어도 이게 언제쯤 굴토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산악지형을 이동간 멧돼지나 낭터떠지등 위험요소로부터 방어를 할 수 있습니다. 누군 무거운데 뭐하러 들고 다니겠습니까."
"그렇습니까. 잘몰라서 그랬으니 오해를 풀기 바랍니다. 아 그러니까 이것으 ㄹ호에 깊게 찔러보면 몇cm 정도 들어가는 가를 쉽게 판단하여 호인지 아닌지도 알게 되고 호의 간격을 가늠하게도 되고 필요시는 호신용으로도 사용되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저를 힘들게 하셨으니 정보하나는 주고 가셔야 합니다."
"네, 무슨 정보 입니까?"
"이 동네에서 60년을 살았다고 했으니 적어도 이 봉일천이 유명한 전쟁터인데 그 흔적이나 혹시라도 유해가 매장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면 그걸 알려주시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해를 완전히 지우는 겁니다?"
"아니지요. 선생님 지금 대답이 크신 것을 보니 뭔가 알고 계신 곳이 있는 것 같은데 6.25전쟁당시의 정보가 아니면 저는 오해를 갔고 살아갈 겁니다."
"와, 이과장 무서운 분이네. 알겠습니다. 날 따라 와 보세요."
"찾아간 곳에 많은 가봉분이 있고 처절한 가족들의 편지가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나는 생면부지의 한 전직 공무원을 따라 봉일천중고 뒤 야산으로 갔다.
뇌조리라 고산천 넘어 등원리에 과거 민간인 피해자들의 가봉분이 있다는 것은 등원리 노인정에서 이미 들어온 이야기가 있다.
더구나 이곳 가가운 고양의 금정굴에는 6.25전쟁 당시에 태극단이라는 반공단체와 고양 경찰에 의해서 집단으로 학살된 미간인 유해가 수십구 그대로 지금도 굴안에 방치되고 있는 곳이다.
물론 학살된 이유는 3개월 공산치하에서 그들에게 협조하고 우익인사나 경찰 군인의 가족들을 고자질하여 많은 인명피해를 가져온 결과에 대한 보복성 학살로 보도연맹하고는 성격을 달리 한다.
그러니 이곳의 성격을 나는 머리속에서 복잡하게 그려보며 따라서 현장에 도착하니 야산 계곡에 봉분들이 있고 나무마다 비닐로 코팅한 편지들이 붙어 있었다.
그중의 하나를 소개하면 눈물이 난다.
["아버지, 저 000입니다. 어디에 계십니까?
저는 아버지 얼굴을 모릅니다. 어머니로부터 아버지 자식이라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도 이제 한맺힌 세월을 접고 하늘 나라에 가셨는데 혹시라도 상봉하셨는지요. 대답을 좀 해 주십시요.
아버지는 저를 낳았다는 것은 알고 계시리라 봅니다.
하지만 산고의 고통을 받고 있던 그 날밤에 아버지는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돌아오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정말 경찰인지 군인인지 아니면 다른 무장집단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생전에 어머니 말씀은 경찰이라 했습니다.
잘 살지도 못했고 대학나온 이유로 동네 일을 맡아서 한 것 밖에는 없는데 무슨 영문으로 끌려갔는지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합니다.
잘못이 있다하더라도 이렇게 사람을 죽여 계곡에 버려 여우나 동네 미친개들의 밥이 되로록 하는 이곳이 국가가 해야 할 일인지 비통스럽습니다.
누군가가 아버지가 이곳에 묻혀져 있다하여 매일 한번씩 찾아오지만 찾아오는 사람의 숫자도 이제 줄어들고 저도 60이 넘었습니다.
살아 있는 한 아버지를 찾으러 올 것입니다. 부디 안녕히 계십시요.
이제 세상도 많이 밝아져서 이러한 곳도 발굴하고 감식으로 유족을 찾을 수 있다고 하니 희망을 갔고 기다리겠습니다. 아버지를 보고 싶은 자식 000 올림."]
나무마다 매달려 있는 편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다. 부끄럽기도 하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땅을 바라보고 흔들리는 편지들의 사연을 읽어 보고 있었다.
어느 유가족이 나를 욕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발굴해 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이 묻혀있는 분들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주변을 다 돌아본 나는 선생님을 불러 묵념을 올리자고 제안했다.
"묵념~~~!"
이곳은 시기는 6.25전쟁 당시가 맞지만 우리가 발굴하는 대상은 아직 아니다.
우리의 대상은 군인이나 경찰 . 학도병, 그리고 노무자들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전사한 분들을 찾는 것이다.
함께 서 있는 분이 물었다. "이분들은 발굴하면 벌 받습니까?"
"벌 받는게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뒷처리가 아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누가 유가족을 찾아서 감식을 해야 할 것이며 그 예산을 누가 줄 것이고 그분들의 명예 고양은 어떻게 하고 등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현실 입니다."
"그러니 이나라가 좌우익으로 갈려 쌈질이나 하고 민생은 그만이고 당리당략으로 한 자리하려고만 혈안이 되어 잇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심하게 비판하시면 되는 건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누가 죄인인지 불분명한, 역사적 심판이나 양심적으로 잘못을 인정한 사례도 없습니다. 같은 국민으로써 가슴이 짖어지는 것은 같습니다. 그러나 그거와 심판은 다릅니다. 엄현히 그 행위의 대상이 지금도 북에는 무력통일을 내세우고 있는 김씨일가의 꼭두각시부대들이 존재하고 우리 사회에도 일부지만 거기에 동조하거나 실제 무력으로 나라를 다시 전복하려는 세력이 없지않아 존재한다는 사실에 우린 경계심을 늦추어서는 안된디고 봅니다."
"아이고 이 양반도 골수고만. 나도 그렇게 공직자 생활을 했어요. 이과장은 당연한 모습입니다. 믿음직스럽습니다."
"믿음직스럽다니 조금 어색합니다. 저도 공적인 장소에서 해야 할 말을 구분해야만 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나의 명함을 달라는 요청에 있지만 드리지 못했다. 이유는 묻지 말기 바란다.
대신 그 선생님의 전화번호와 나의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금정굴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까?"(진격 작전간 설명 하겠다.)
"네, 제가 최초 발굴 사업시 책임 지도교수가 그 발굴 담당자로써 직접 현장에 몇번 가 보았습니다. 이곳만이 아니고 파주 두포리에도 민간인 관련 양민학살 지역이 있고 용미리에 있는서울 시립 공원묘지 위 계곡에도 유사한 민간인 피해지역이 있다는 것을 지역주민의 탐문활동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 대단하시네요. 사명감이 남달리보이네요."
"그렇지않습니다. 제가 해야할 일이 명확합니다. 법의 테두리를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요. 국가 공무원인데 그 마음 저도 이해 합니다. 오늘 많은 것 배웠습니다."
"제가 무례한 행동을 한 것같아 죄송합니다.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일대의 개인호는 초기 전투에 굴토한 것은 별로 없다.
대부분 1.4후퇴 이후에 다시 국군이 진격하는 과정에 중공군이 파거나 일시적으로 진출한 국군이 파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우리는 공격이고 중공군은 방어다. 그러니 호의 위치가 어디에 있겠는가?
대부분 남쪽에 굴토되어 있고 고지 후사면(남에서 바라보고)에는 집중적으로 굴토하여 거점방어 형식으로 거의 전지역이 동일하게 형성 되어 있다.
북으로 진격하는데 우리가 남쪽에 호를 구축한다는 것은 기본 상식에 어긋난다.
물론 지휘자의 호인 경우나 아니면 주요 거점인 경우는 우리도 팔방으로 호를 구축도 하고 교통호도 파서 연결되게 하기도 했지만 이런 경우는 '51년도 중공군 5월공세가 끝나고 재진격하는 과정에 고지쟁탈전이나 고지를 사수하기 위해서이지 '그 이전에 공비토벌 작전지역이 아니고는 우리는 북으로 호를 파게 된다.
다음은 마을회관이나 노인정 탐문결과다.
먼저 문산읍의 능산리 마을회관에는 할머니들이 많이 모인다. 할아버지는 어디가셨느냐는 질문에 깨팔려 갔다하여 한참을 망설였다.
낙하리가 가가운 거리에 있어 혹시 우리가 유익한 정보가 있을까 여러질문을 던지고 할머니들의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
하지만 모두가 큰 전투가 이곳에서는 없었다고 한다. 낙하리에 그들이 배위에 짚단을 올려 위장한 것이나 중공군이 낮에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않고 밤에는 집에 들어와 집 사람들과 함께 잠을 잔다는 공통된 이야기는 많다.
모두가 1.후퇴 이후의 이야기들이다. 처음 전쟁때는 알지도 못했다고 한다.
검산리 마을을 탐문하는 과정에 한 어른이 금촌까지 우릴 대동하고 가셨다.
이유는 초등학교 동창회를 하는데 피난을 가지않고 계속하여 이곳에 살아온 친구들이 몇 있다고 해서 함께 갔다.
어른이 동네에 살던 이야기는 월롱산 좌측에 기간봉이란 238고지가 있다. 실제로 본인이 그곳에 올라가 탄피를 주워 돈으로 받거나 엿과 바꿔 먹곤 했는데 시신을 몇구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중공군관련 이야기이고 동네에 빨갱이 집이 있었는데 '50년 10월에 북한군이 퇴각할 때에 그 가족 모두가 다 짐보따리 메고 북한군따라 가버려서 그 집이 지금도 패가로 남아 있었다.
법흥리는 동네 이름에 걸맞게 아예 전투가 없었고 중공군이 들어와 함께 살았는데 주민들에게 잘해주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오히려 미군이 들어와 이집 저집 다니며 '색시' 색시' 하고 다녀 킥킥 웃음도 나왔고 여자들은 다 숨어서 보이지않게 했다는 일상적 이야기다.
갈현리에서는 특이한 어른을 만났다.
동네입구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자건거를 타고 오는 아주 깨끗한 한복차람의 할아버지가 우리 앞을 지나가시는데 '할아버지'하고 내가 목소리를 크게 했더니 놀라시며 "나요?"하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연세가 85세로 중학교 1학년때 전쟁이 났는데 피난갈 겨를도 없이북한군이 들어와 할아버지 집이 지휘소였다고 한다.
그러니 꼼짝 못하고 있는데 먹는 것은 잘 먹고 살아 큰 불편없이 지냈는데 어느날 인민군이 북으로 함께 가자고 아버지를 설득하여 온 집안이 난리가 났단다.
못가겠다고 하자니 무슨 요절이 날지 모르고 가겠다고 하니 이건 온 집안을 욕먹이는 꼴이 되고 흔한 말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끙끙 앓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이 떠난다는 날이 내일인데 갑작스레 하루 전날에 아침 새벽에 보니 아무도 없이 다 사라지고 갑작스레 국군이 들이 닥쳤다.
대위가 대장인 부대원들이 들어와 집을 샅샅이 뒤지고 나서 아버지를 불러 세우더니 다짜고짜 어디에 숨겼느냐고 따져 물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아버지와 우리들은 벌벌 떨면서 그동안의 그들 행적을 아는대로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니 그 대위가 한발 늦었구나하면서 급히 차를 몰고 낙하리 방향으로 달려가고 몇이 남아서 집에 서성거리며 동네를 수색하기도 했다.
얼마후에 다시 대위일행이 들어오더니 할아버지집을 다시 본인들이 사용한다며 협조를 구했다.
아니 공산군이 들어와 있던 집인데 안된다고 하면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싫어도 그 기색없이 그렇게 하라고 대답해야 한다.
얼마를 머무르냐고 물으니 알 수 없다고 한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눈 내리는 겨울이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국군이 갑작스레 떠나가며 함께 남으로 내려가자고 한다.
중공군이 남침하여 곧 이곳으로 온다는 이야기와 무지막지한 놈들이라 다 죽인다고 하여 결국 아버지와 어머니는 남고 우리는 국군을 따라 한강 이남으로 내려왔다.
졸지에 가장 역활을 해야만 하는 할아버지는 평택근처에서 어느 집에 골방을 얻어 누이 한명과 남동생을 데리고 한겨울을 보내야 했다.
먹을 것은 미군부대에 가서 노무자로 일을 하여 먹을 것을 구하고 인근에 문산인근에서 내려온 분들이 많이 있어 서로 정보를 교환하며 겨울을 보내고 나니 다시 국군이 진격한다고 꿈에 부풀어 있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래서 아는 사람들 몇이 평택을 떠나 한강을 건너서 동네근처에 와보니 이미 국군이 점령하고 있는데 일반사람들이 못 들어가게 통제하고 있었다.
금촌 북방으로는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다.
"운명처럼 만난 국군 대위와 그 일행들"
그런데 옆에 지나가는 군인들이 무장을 하고 바삐 걷고 있다.
바로 이때 앞에서 걷고 있는 군인이 지난 10월에 집에 묵었던 그 대위다.
"대위님, 길근입니다."
"뭐, 길근이라고. 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
"평택에 누나와 동생이 있고 제가 집에 남아 있는 부모님이 어떻게 도셨는지 알아보러 왔는데 들어가지 못한다 하여 이곳에서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졸지에 개선장군처럼 국군을 따라 집으로 갔다.
집에는 부모님이 아무 탈없이 잘 계셨다.
이번에도 국군이 집에 본부를 두고 밤이면 나가고 새벽이면 들어오고 어떤 경우는 2~3일 안들어 오다가 들어오고 도대체 무슨 부대인지 낮엔 주로 잠을 자고 있다.
이렇게 하여 할아버지 가족은 전쟁기간에 아무도 피해를 입지않고 다 살아났다.
하지만 같은 동네라도 바로 뒷집은 운명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 집 아버지가 당시에 면서기였는데 누가 뭐라고 고자질을 했는지 동네에서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몰매맞아 죽었고 두집 건너서는 북한군에 부역을 했다하여 자치 치안대와 경찰에 끌려갔는데 어떻게 소식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할아버지 집은 공산군이 들어와서 중공군이 들어와서도 본부로 사용한 집인데 아무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잘 살지도 안했고 그렇다고 굶고 살지도 안했는데 집안이 고려때부터 이곳 일대에 살아오면서 높은 관직없이 그저그렇게 살아왔다고 한다.
"어르신 집안이 좋은 일을 많이 하시고 남에게 배풀어왔으니 그렇겠지요?"
"아니요, 난 잘 몰라요. 못되게 굴진 않았다고봐요."
전쟁은 끝이 없이 계속 되었다.
연일 강건너로 비행기들이 별처럼 많이 떠서 하늘을 가르는데 얼마 있으면 검은 연기가 하늘에 치솟아 오른다. 개성역이 폭파되었다는 소문도 들려온다.
"북으로 침투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폭격을 유도하는 유격대원들"
전쟁은 오래 되었다.
'53년 7월 말가지 계속되고 부분적으로 마을 사람들이 피난에서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대부분 불타버린 집이지만 할아버지 집은 멀쩡하게 살아있어 남들의 부러움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할아버지를 다라 집으로 들어갔을 때의 집은 주택개량을 하여 옛날 집은 아니였다.
"할아버지, 그 대위일행은 뭐하는 군인이었어요. 모르세요?"
"아~, 나중에 내가 한번은 그들을 따라 가본적이 있어요. 오금리가 어딘지 아시나요?"
"네, 낙하리 가기전에 북한에서 흐러나오는 사천강이 임진강과 만나는 곳 아닌가요?"
"잘 아시네. 맞아요. 그곳까지 따라갔는데 보니까 배를 타고 임진강을 건너가요."
"그때는 강건너는 북한군 지역일텐데 그곳으로 들어가는 군인들이 있었다니요?"
"전쟁이 끝나고도 한참동안 그 분들이 우리 집에 머물며 북한지역을 넘나들며 특수임무를 수행했어요. 나는 잘 모르지만 오래 머물다 보니 어느날에는 모르는 사람이 함께 와 있기도 했는데 아마 북에서 데려온 동조자나 아니면 지금 생각하니 납치해온 사람들이었다고 봅니다."
우린 오두산뿐만 아니라 보현산 그리고 월롱산에 이르는 크고 작은 산들을 다 올라가 보았다.
특히 월롱산은 지역에서 서쪽에 229고지로 기간봉 238고지와 쌍봉을 이루며 가장 저명한 지형지물이고 1번도로 우측에는 216m 봉서산이 있는데 이곳은 다 최초 전투지역으 ㄴ아니라느 ㄴ것을 탐문결과로 알았다.
360번도로 상 월롱면 용상골에서 월롱산 우측 어깨를 관통하여 덕은리 덕고개로 이어지는 비포장 도로가 있는데, 지금 이곳에 포병훈련장이있는 곳인데 복차 통행이 현재는 가능한 곳인데 이곳에 엄청난 인원이 죽어서 좌우측으로 가매장 했다는 참전용사의 증언에 따라 우리는 10여명을 투입하여 1주간을 정밀 탐사했지만 돌무덤같은 몇군데를 찾았지만 확인이 불가 했고 한곳은 가능성이 높은 곳인데 공장이 들어서버려 전체적인 지역이 훼손되어 버렸다.
물론 이곳도 초기전투가 아니고 1.4후퇴시에 해당하는 이야기였고 월롱 면소재지의 다락고개일대가 가장 그래도 가능성이 높고 전투가 실제 있었다고 증언하는 분들도 있으나 1번국도가 4차선으로 확장되고 주변에 기간시설들이 들어서 원형을 찾기란 불가능했다.
초기전투와 관련된 유해발굴은 사실 지금까지 유해발굴 결과 명확한 숫자는 말하기 어렵다.
다만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는 현황은 다음과 같다. 임진강 너머 노상리일대에서 19구, 진동면 일대에서 3구, 문산읍 당동에서 1구, 파주 덕은리에서 19구. 금촌에서 4구, 봉일천에서 7구, 고양에서 12구의 유해 발굴 되다."
그렇다면 이 일대에서 초기유해발굴은 없는 것인가?
노상리는 사실 우리가 초기에 제1사단 제12연대가 철수하면서 전투를 했다면 가능한 숫자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 통일촌에 들어가 직접 제보자의 안내를 받아가며 현장을 확인한 나로서는 우리가 피아판단을 정확히 할 수 없어서 그렇지 '51년도 4월이후 미군이 진격하는 과정에 미군의 폭격으로 죽은 적군이라는 의중을 버릴 수 없다.
진동면의 3구는 초기전투시 제1사단의 전투지역으로 어느정도 인정할 수 있는 숫자라고 본다.
우리가 받은 제보중에서 가장 큰 숫자가 장단지서에서 출발하여 고랑포로 가다 적전차에 맞아 전사한 경찰 20여명인데 현장을 직접 목격한 당시 장단면에 근무하던 분을 장파리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어 대동하고 실제 그 위치에 가서 탐사를 했으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문산 당동은 현재 포병부대 울타리선에서 지역주민의 제보로 십여구의 유해가 있다고 해서 발굴 했으나 1구와 다수의 모시나칸트탄탄과 M1탄피등이 혼재되어 나왔다.
파주 덕은리는 마을 사람들이 직접 목격한 분이 없이 우리가 전사사실을 가지고 현장을 탐사간 군차량호 작업현장에서 노출된 유해를 직접 내가 발견하여 시작되었으며 접근하게 된 배경은 제1사단이 '51년도 4월부터 캔사스선으로 재진격간 문산천전투에서 전투기록이 나온다. 그러니 초기전투라 하기는 곤란하다.
금촌지역은 도내리 뒷산과 영태리 신기동일원에서 각 1구씩 발굴 되었고 대부분 제보자의 제보에 의해서 발굴되고 봉일천은 장곡리 일대에서 3구 봉일천 초교 바로 우측 길옆에서 2구 그리고 공릉천 제방에서 2구가 발굴 되었다. 이곳도 모두 제보 지역으로 초기전투라고 확실시 되는 것은 봉일천 초교 옆우로 이곳은 바로 옆집에 사는 분을 탐문하며 직접 집으로 들어가 증언을 청취하여 발굴한 곳인데 사실 개인 집 바로 옆이라 본인이 증언을 고사하여 무척이나 애를 먹었던 기억이 생생 하다.
고양에서의 12구는 여러가지로 해석이 분분하게 된다.
먼저 선유동에서 11구의 유해를 무명 206고지에서 개인호 700여개를 굴토하여 발굴하게 되는데 사실 이곳은 1.4후퇴 당시에 영국군과 중공군이 일전을 치뤄 영국군 전차 10여대가 파괴되고 엄청난 인명 피해를 가져오며 미 제1군단의 서울 철수를 엄호한 매우 중요한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유명한데 이곳은 초기 전투는 아니고 사실 피아판단에도 약간의 개연성이 있는 곳이다.
또한 덕양구 현천동의 밤나무골일대에서 1구의 유해를 발굴 하는데 이곳은 제보자의 증언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제보자 황정호는 발굴 당시 '11년도에 나이 70으로 전쟁 당시는 9살 이었으며 본인 증조부 묘소 옆에 국군 유해 1구를 직접 매장했다 하여 발굴 하였다.
이 분은 이곳에서 계속 살아왔기에 동네 어른들로부터 들었고 어린 나이에 직접 목격한 것들이 많아 여기저기 많은 제보를 하였다.
한 곳은 지금 항공대 바로 맞은편으로 이곳도 모두 밤나무골에 속하는 곳으로 지금은 도로가 개설되어 있어 포크레인 까지 동원하여 본인이 직접 14구의 유해를 매장하는 것을 목격했다니 열심히 발굴 했으나 전투화 밑창등 소수의 유품만 발견 되었다.
다른 한곳은 망월산에 '53년도 8월경에 와삼촌과 나무하러 갔다가 국군 30여명을 발견하여 직접 묻어주고 제례도 올렸다고 한다. 사실 이곳은 중공군의 '51년도 4월공세시 28~30일어간에 인민군 제8사단이 골든선(서울 방어선)을 방어중인 국군 제1사단을 공격하게 된다.
하지만 행주나루지역으로 침투한 적 1개연대 규모는 사단 수색대에 발견되어 인천 외항에 대기중인 순양함 폴레도호의 8인치 함포사격을 받고 많은 시체를 유기한체 퇴각한 후에 10여차례의 무모한 공격을 감행 했으나 국군 제1산단 제11연대의 분전으로 900여구의 시체를 남기고 물러나게 된다.
우전방에서도 제15연대가 일시적으로 중공군의 양동작전에 휘말려 앵봉을 피탈 당했으나 바로 보전 협동작전으로 중공군을 격퇴하게 되는데 중공군도 많은 시체를 유기한체 주력부대는 금촌-앵무봉선으로 철수하게 된다.
이상의 내용에서 보면 이 일대의 발굴된 유해는 사실 아군이 공세적 방어를 했던 곳이라 우리는 유해를 수습하여 처리가 가능했지만적은 미군의 강력한 화력전투에 속수무책으로 당했기 때문에 시신을 유기한체 뒤로 물로나야만 했던 곳이며 상황이었다.
3. 강화-김포지역 전투관련 증언 /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당시 전투 참여자들의 증언
먼저 보국대대장 방원철의 증언이다('77. 4. 20)
보국대대란 북한군에서 귀순한 장병 300여명으로써 정훈계통에서 창설한 부대로 육군 게급장을 달고는 있었으나 군번도 없는 포로수용소나 다름없는 실태였다.
'49년 12월 28일에 내가 부임하면서 본격적인 선무공작대로 전신하여 '50년 2월에는 밀양지구 공비귀순공작을 벌였고 3월에 다시 올라와 문래동 방적공장에 대대본부를 두었다.
5월20일쯤 2개 중대를 제6사단과 제7사단에 각 1개 중대식 파견하였다.
6월25일 옥인동 집에 있다가 가두방송을 듣고 영등포 본대로 들어와 출동태세를 갖추고 대기하다 이튿날 육본에 들어가 무엇을 하느냐고 묻고 통진으로 출동하였으나 그날 밤 적의 측방 기습에 27일 김포로 낮에 철수하였다.
다시 수습돤 병력 30여명을 본대로 복귀시키고 육본에 들어가 미아리보다 김포쪽이 먼저 들이닥칠 것 같다고 전하고 부대로 돌아와 몇몇은 사복을 입혀 주변에 남도록 하고 한강 다리가 끊어진 다음 수원으로 내려가 29일 오후에 전방에 보낸 1개 중대병력을 만났다.
7월 12일에 대전에서 부대 장교 52명이 정식으로 군번을 받아 현역으로 편입되고 병력은 제1군단사령부와 제8사단에 분할 배속 하였다.
남산학교 병기관 조 한춘의 증언이다.('66. 4.22, '77.5.24)
여기서 남산학교가 무언지 모르는 독자를 위해 잠간 설명부터 하고자 한다.
남산학교는 쉽게 말해 정보학교를 말하는 것으로 '49.5.20일에 수색에 창설하여 초대 교장은 백선엽 대령(당시 육본 정보국장)이였으며 같은 해 6. 29일에 서울 남산동(전 kbs 방송국 자리)으로 이전하고 7월 10일에 남산학교로 개칭하고 지금의 정보학교 역활을 수행하게 된다.
"부교장인 최복수 중령이 실제로 교장 임무를 대행하고 있었고 6월 24일에 적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날은 토요일이자 월급날로 외출을 하고 있는데 25일 아침에 전쟁 소식을 듣고 학교에 들어가 26일 아침에 김포지구에 들어가 그 지역일대 잡동사니 부대들을 통합지휘하여 28일까지 김포읍선을 지켰다.
그 날 아침에 한강교가 폭파되었다는 소식에 퇴로 차단을 우려하여 19:00쯤 소사로 이동 하였다.
29일아침에 최복수 중령이 공격대장이 되어 장갑차를 앞세우고 비행장 탈환공격에 투입되어 안영직 대위등과 전사하고 사병 몇 명만 돌아 왔다. 그리고 지휘소를 소래-수원으로 옮기며 나중에 제1군단 수색요원이 되었다."
기갑연대 기병대대 제7중대장 김촌성의 증언이다.('77.5.19)
나는 대학재학시인 '48년 런던 올림픽에 길전식등과 승마선수로 선발 되었다가 출전치 못하고 이용문 당시 기갑연대장의 권유로 대학선수 9명과 수의 5명이 육사 8기로 특채되었다.
당시 기병대대는 말이 300여필 되었고 화기 소대에는 60mm 박격포 4문과 경기관총 8정까지 말에 싣고 다녔는데 6.25전쟁 당시가지는 마필이 확보 되지 않아서 제5,6중대 2개중대만 편성되었다.
보병학교에 입교하여 교육중 전쟁이 터져 대부분 일선부대 중대장으로 나갔지만 기병대대로 배속 되어 27일인가 기갑연대로 갔더니 기병대 주력은 이미 퇴계원쪽으로 출동한 뒤였고 남아 있는 병력으로 임시 제7중대를 편성하여 중대장으로 장갑대대에 들어가 김포로 출동하였으나 강안에 배치되었을 때에 말이 놀라서 이리저리 뛰게 되어 보병전투마저 여의치 않았다.
보병학교 후보생 곽해용의 증언이다.('66. 4.2)
나는 갑종간부 제2기로 시흥 보병학교에 입교를 해서 3개월 교육을 마치고 후반기 교육이 끝나는 일요일에 전쟁이 났다.
25일 저녁에 보병학교에 들어가니 먼저 들어온 사람들은 문산으로 가고 우리들은 제2차로 교도대 인원들과 김포를 지나 강화도 조금 못미처인 곳에 갔습니다.
28일날 새벽에 진지편성을 하는데 앞에서 따발총 소리가 나고 철수하는 병력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데 우리 진지 뒤에도 포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81mm 부사수인데 철수하는데 그만 포를 놓고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포열을 들고 나가는데 김포읍으로 가는 도로가 보이는데 그쪽으로 병력이 집결하는데 VT신관이 터지고 하는데 시오리까지 철수를 하여 트럭이 있어 트럭에 싣고 나오다 보니 제일 늦었습니다.
김포에 가서 저녁을 먹고 잤는데 김포비행장 들어가는 소로가 있는데 그곳에 배치되어 있다가 비행장을 공격한다하여 갔는데 못하고 철수하였습니다.
소사국민학교에서 하룻밤을 자고 김포비행장이 보이는 고지를 점령했는데 인민군이 우리를 공격해 오는데 한 2개중대는 되었습니다.
아무리 사격해도 맞지도 않고 김포비행장쪽으로 빠져 나오는데 앞산에 화이바를 쓴 것 같은 서너 명이 오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알고보니 인민군이고 그곳을 탈출해 소사에서 집결해 가지고 수원으로 갔습니다.
제22연대 제3대대장 손영을의 증언이다.('67.2.23, '77.5.13)
6.25전쟁이 나서는 연대편성을 해서 서울로 왔습니다.
수도경비사령부에서 집결후 1개 연대가 분산되었습니다. 제2대대는 문산 방면으로 내가 가진 제3대대는 김포로 나갔습니다.
김포쪽으로 강화도 방면에서 적 3개 사단이 상륙을 하는데 제12연대에 일부 병력, 제22연대 일부 병력, 우리 대대와 그 다음에 편성중에 있는 공군의 후방부대 그런데 공군 김포지구사령관이 최용덕 장군인데 그 분하고 작전을 한다고 했습니다.
27일쯤 될 겁니다. 인접부대와 연결은 없고 공격을 했는데 27,28일을 견디어 내다가 대대를 부평을 경유해서 소사로 나왔어요.소사에서 재편성을 했는데 그 당시에 육군 정보학교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3사단 참모장 우중령이 있고 제18연대장 임충식 장군도 있었습니다.
적은 이미 김포비행장을 점령했는데 제18연대 일부병력과 정보학교의 적은 병력으로 공격을 하다가 정보학교장이 전사했습니다.
나는 1개 대대의 3분의 2 병력을 가지고 정면을 공격해 들어갔는데 다음 지휘관이 제3사단 참모장 우중령이 왔는데 역시 실패하였습니다.
저쪽은 많은 병력이고 안되니까 우중령은 그곳에서 자살을 했어요. 자기 권총으로 했어요. 그 다음 지휘관이 임충식 중령이었습니다.
이때 상황이 보급이고 뭐고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본부와 연락도 전혀 안되고 이 어수선한 상황에서 혼전을 하다가 부대별로 수원으로 후퇴를 했습니다.
당시의 제3사단(장. 유승렬 대령)은 대구의 제22연대(강태민 중령)와 부산의 제23연대(자. 김종원 중령)뿐인데 6월25일 육본 명령에 따라 제22연대가 서울로 집결하게 되었다.
그런데 연대도 제1대대는 포항의 경비대대로 나가 있어 제2,3 양 개 대대만이 상경하게 되었고 그때 사단장도 부재중이라 참모장 우병옥 중령이 연대와 함께 행동 하였다.
그날 오전에 장비와 차량을 모두 열차에 시고 11:00시경 대구역을 출발하여 저녁에 용산역에 도착하였다. 수경사의 작전구역을 인계받으라 해서 제8연대(현 육본)에 들어가 갔는데 제8연대는 출동했는지 막사가 비어 있었다.
그래서 제2대대는 먼저 문산으로 출동해 가고 우리 대대는 그냥 그곳에서 하루정도 더 있다가 김포로 출동하라해서 우리가 가지고 온 차량편(트럭 20여대)으로 김포로 가니 김포사령부가 있었고 계인주 대령과 김용주 중령 및 공군의 최용덕 준장 등이 보였다.
밤에 진지를 편성하고 있다가 이튿날 새벽부터 접전이 시작되어 일부는 부평-소사로, 일부는 비행장쪽으로 철수 하였다.
그 다음날 김포 비행장을 탈환하려 공격했는데 그때 최복수 중령이 차를 몰고 돌진하다가 전사하고 그 뒤에 우병록 중령이 자기 권총으로 자살 하였다. 작전 실패에 대한 책임감이다. 그는 평소에 책임감이 강하고 아주 성실한 사람이었다.
나. 관련된 증언분석
김포 오류동 전사는 사실 그렇게 각광을 받지못했던 전사내용이다.
하지만 시간이 경과하면서 그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는 전사인데 춘천대첩만큼이나 중요한 전사로 많은 분석이 요구 된다고 본다.
"춘천에서 국군 6사의 소양강방어와, 동쪽 제8사단의 7번도로 사용이 적절치 못했던 북한군, 그리고 중서부 전선의 서파에 전차를 투입하여 없는 도로에 병력이 집결 되고 다시 포천으로 우회해야 했던 북한군의 의정부-포천공격의 실수, 여기에 김포지구의 깜짝 임시방어부대의 분전으로 한강선 방어의 시간을 갖게 되어 우리는 살았다. 미군의 한반도 투입 시간을 보장해 준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개전 당일 오전 9시에 개성이 하락되고 국군 제1사단은 임진강선으로 철수하게 된다. 이로 인해 방어부대가 없었던 한강 하류와 김포반도는 무주공산과도 같았다.
그러나 도하장비를 갖추지않은 북한군 제6사단의 천만다행한 실수(?)로 그들이 도하를 위해 시간을 지체하는 사이에 임시지만 정보학교나 보병학교 교도대대, 제3사단의 제22연대 1개 대대, 기갑연대 일부 병력 등이 편성되어 북한군의 측방진입을 차단 또는 지연시키는 엄청난 큰 작전을 수행했다고 봐야 한다.
만약 그들이 도하장비를 갖추고 빨리 한강을 도하하여 김포반도로 유입되고 영등포로 진입해 왔다면 우리는 방어부대가 없는 상황에서 어찌 되었겠는가! 따라서 여기서 나오는 대부분의 증언은 지휘관의 전사와 자살에 관한 이야기다.
첫째 :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다.
초기 전투에 어디에도 고급장교가 나서서 전투를 했다는 기록은 찾기 힘들다.
하지만 최복수 중령이 차량을 몰고 김포공항으로 돌진해 들어가는 모습이나 다음에 우중령이 작전에 실패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화는 정말 값진 전사인데도 우린 그동안 공상적인 전투성과를 나열한 제1사단등에 미쳐서 제대로된 전사를 알지 못했다.
이러한 전사의 숨은 공적을 이제라도 우린 밖으로 토해내야 하는 것이 임무다.
잘 알고 있듯이 서울을 양익 포위 하려던 북한군은 국군의 춘천지역에서의 결사항전에 그만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국군 제6사단이 말고개에서의 적 자주포나 전차를 육탄공격으로 무력화 시키고 춘천소양강 일대에서도 심일 소위의 대전차특공조가 옥산포 일대에서 적 전차를 파괴하여 사기를 진작시키고 시민 학생, 국군이 혼연일체가 되고 적의 진출을 저지함으로써 북한군은 우리 제6사단을 '춘천바위'라 부르며 치를 떨었다 한다. 그래서 그 책임을 물어 제2군단장이던 김광협과 제2사단장 이청송이 해임되고 제12사단장 최충국은 전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전사는 마치 국군 제1사단이 수도서울을 사수하는데 기여한 것처럼 그리고 제7사단이나 제2사단이 의정부-미아리축선에서 실패하여 무너진 것처럼 쓰고 있지만 그래도 적 전차를 동반한 주공에 맞서 당시로서는 잘 싸운 전투였다고 봐야 한다.
둘째 : 역시나 지휘공백이다.
분명히 단일 지휘관으로써 가장 높은 제18연대장도 있고 아직 수도 서울이 실함된 것도 아닌데 임시 급조된 부대를 지휘통제할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각 단의 부대별로 싸우다 결국 무기력하게 물러나게 되었다.
비행장이 갔는 군사통제면의 효율성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하지만 행주나루에서 건너오는 그 많은 부대들도 사단장도 있고 연대장이 몇 명씩이 되어도 본인이나 지기 부대원을 데리고 사병처럼 움직인 그 당시의 행태는 분명히 비판 받아야함에도 그 계급의 위상에 밀려나 누구도 범하지 못하고 영웅담으로 신성시하는 전사가 되었다.
셋째 : 전사 내용의 옳바른 기록이다.
여기서 나오는 내용중에는 강령포일대에서 적의 도하를 기습적으로 강타하고 화물선을 발견하고 장갑 소대에서 37밀리 포로 격침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본인이 이곳 일대의 주민을 만나서 알아본 결과로는 누구하나 이런 모습을 보질 못했다고 한다. 다만 그들이 도하준비가 안되어 어선등을 이용하여 소수 규모로 도하하려다 보니 일부 아군과의 교전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국군이 한강선에 집중적인 방어태세를 갖추지않고 각개 부대별로 활동하다 옆 집이 뚫리다 싶으면 그냥 통제없이 알아서 빠져 버리는 그런 전투였다고 하면 않될까?
온유산-73고지선에도 방어선만 있지 사실은 병력이 제대로 배치되지않은 것이 사실이라고 본다.
아니 지역주민이 국군을 보지못했다고 하는데 전사의 기록에는 있다면 뭔가 하나는 잘못된 것이다.
반면에 강상에서의 전투는 미미한 것이라도 운유산-73고지 선을 연하는 통진읍 일대의 역습 상황이 좀더 언급 되어야 한다.
소련군 군사고문단장이 긁어모은 부대의 역습으로 진출에 지장을 가져왔다고 하는데 우린 지휘관(최복수 중령)의 전사나 우중령의 자살 내용으로 끝을 봐서는 안된다고 본다.
증언록에도 이곳 관련 내용은 상당히 제한적으로 기록이 남아 있다.
혹시라도 라주바예프가 북한군 제6사단의 기동이 본인과 무슨 연관이 있어(도하장비 미확보등) 책임을 회피하는 차원에서 우리 국군의 용맹성을 부각시킨 것이지도 모른다.
그럴만한 이유는 도하장비를 갖추지 못해 부대들이 일사분란하게 도하하지 못하고 각 부대별로 도하하다 보니 협동작전을 위해서는 제대들이 기다려야 하고 그 당시시에 이미 미군의 항공폭격은 진행되고 있었기에 그저 오면 문이 열려 무혈입성하리라 보았던 계획이 그래도 몇몇 부대들이 나타나 역습도 해 오고 물러나지 않는 지휘관들의 사생결단 노력에 그만 멈칫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런 이유는 동네에 다니면서 주민들의 제보나 증언을 받는 과정에 그렇게 큰 전투를 목격하지 못했다 하는데 소련고문관의 기록은 대작으로 되어 있기에 생각해 본 것이다.
기록 어디에도 수송선이 격침되었다는 내용은 없으며 도하하여 교두보를 확보하는 부대는 별 장애없이 도하하였다는 것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고 이것은 지역 주민들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넷째 : 병력 통제의 부재다.
올라오는 부대들이 이미 의정부전투나 미아리-창동전투 때도 언급된 것이지만 올라오는대로 그저 이리저리 가라하고 아무런 통제대책도 없이 지휘관들이 알아서 했던 ㅡ 당시의 모습은 어떻게 보면 매우 용맹스런 임무형 지휘체계가 갖추어진 부대같다.
하지만 이건 기우에 불고하고 정신이 없으니 그저 올라온 부대가 왔다고 하면 '어, 그래 너는 청량리로 가고 너는 미아리로가' 이런식의 병력 통제였다.
그러니 통합된 전투력 발휘나 보급체계등 아무 것도 행할 수 없는 통제 불능의 부대로써 그저 그 부대와 그 구성원 몇이서 잘 싸운 군대가 초전의 우리 모습이다면 안될까?
다. 지역 탐사 및 탐문결과
나는 사실 서해안의 특히 NLL이남의 왠만한 섬까지 탐사와 탐문을 다녔다.
교동도의 말탄포-율두산-고구리-동산리나 서도면의 말도, 석모도,강하의 인하리-철산리-월곳, 김포의 보구곶-조강리-시암리-월곶-애기봉전망대-오리정-온운류산-대촌 등 모든 곳을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드려 탐사와 탐문을 했고 발굴도 기회발굴을 많이도 났다.
그러나 교동과 강화는 주로 유격군의 활동 무대였고 김포의 가장 두드러진 전선인 운유-73고지선의 방어선도 찾아 나섰지만 실제 운유산에 일부 개인호가 있을 뿐이었다.
"쇄암리에서 초기전투 당시 기갑부대 장병 1명을 발굴하다."
대촌이나 월곶 조강포가 가서 그곳 사람들의 영웅담을 듣는 것이 사실 더 흥미로운 사실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월곶의 쇄암리에서 초기 전투 때에 들어온 군인이 적군의 위장전술인 소총에 태극기를 달고 나나타는 북한군에게 속아서 같은 국군인줄 알고 마주을 한답시고 진지 밖으로 나갔다가 전사한 인원을 묻어놓은 곳을 제보하여 실제 발굴 결과 제보 내용대로 한구를 찾았으 ㄹ때가 가장 보람있는 순간이다.
하지만 보구곶리 마을회관 앞에서 만난 깡패 기질의 할아버지로부터 봉변(?)도 당했다.
할아버비 18살에 전쟁이 나고 당시에 갑곶리 어ㅣ가집에 갔던 할아버지는 북한군이 처 내려온다하여 강을 건너와야 하는데 이미 배도 없고 모두가 도망쳐버린 상황에 혼자 헤엄으로 건너왔던 바다 사나이였다.
"아니 북한군이 총으로 쫒아오는데 어떻게 강으로 도망쳐 왔어요?"
"여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도망치다니. 난 도망친게 아니고 북한군이 온다고 알리려 목숨을 걸고 강물에 뛰어든거야. 그놈들이 뒤에서 총질을 하는데 내가 맞겠어. 문수산 도사님인데."
"죄송 합니다. 우린 잘 모르니까 말 실수를 햇습니다."
"당신들 말야. 군인도 아냐. 여기에 몇이서 와 가지고는 서성거리더니 저 겅건너에 북한군이 보이니까 다 사라져버렸어. 뭐 군인이그래."
"우리는 혹시나 이곳에 전쟁중에 전사한 인원의 유해가 발굴도지 못하고 있다면 조사해서 발굴하려고 탐문중에 있습니다."
"저 물속에 들어가 용왕님께 물어보슈. 얼마가 지났는데 이제와서 뭘 발굴한다고 00이야. 난 좋은 말은 못해요. 날 보고 싶으면 용강리로 오쇼."
참 많은 곳을 다녔지만 이런 할아버지도 처음이다.
그렇다고 물러나면 내가 바보가 된다. 그래서 떠나는 오토바이를 바로 따라 갔다.
"할아버지 집에 들어가 할아버지의 6.25전쟁사를 경청했다."
"할아버지는 소속이 어디였습니까?"
"소속이 뭐요? 난 이곳 문수산을 주름잡고 인민군을 일망타진하며 서부전선을 지켰소."
"아니 무기는 어디서 받고 누구와 함께 작전을 했습니까?"
"무기는 인민군한테 빼앗아 사용했고 지금은 모두 귀신이 되었지만 서북청년단원 3~4명이 동료요."
"그럼 이 동네는 공산치하에 프락치도 있고 내무서원도 있었을 것인데 어떻게 하셨습니까?"
"내가 18살에 저 강을 헤엄쳐서 북한놈이 쏘는 총알을 피하며 살아났는데 뭐가 무섭겠소. 우린 문수산에 은거지를 만들어 놓고 수시로 내무서도 기습하여 보급품을 획득하고 붙잡혀온 사람들을 탈출도 시켜주고 그러다 유격군이 되어 탄포나 영정리 흥정포로 침투하여 백마산에서 전투도 했오."
"동네 프락치는 그당시에 없었던 모양입니다?"
"왜 없겠소. 하지만 이곳에는 해방 당시에 황해도 개풍에서 잠시 내려온 사람들이 여기저기 많았는데 북한군이 와서 대부분 잡아가 버렸고 그러다 보니 사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어촌도 아니고 농촌도 아닌 동네에 뭐 먹을 것도 없고 잘사는 사람도 잘난 사람도 없으니 그놈들이 잇엉봐야 할 일이 없잖아. 하지만 통진만 내려가도 꽤나 많았어요."
"그럼 군번도 없고 정식 군대도 안가고. 참전용사는 유격군 했다는 것으로 되었습니까?"
"무슨 참전용사? 나는 참전용사도 아냐. 그때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는데 인민군도 10명도 더 사살하고 많은 양민들을 구출도 했지. 그러다 유격군이 되었다가 해체되고 전쟁이 끝나고 군에 다시 갔다 왔지. 그런데 참전용사되면 무슨 참전비 준다고 난리가 나서 서로 참여했다고 하는데 다 가짜가 태반이야. 난 창피해서 신청안해요.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죽지않고 산것만도 다행이지. 뭘 더 바래요. 내 총에 죽은 그놈들 명복이아 빌어주고 있다 오라하면 가야지."
"그래도 동네에서는 어르신이 진짜 참전용사님이라고 하던데 이거 좀 이상합니다."
"여보, 똑똑히 들어. 저놈들 믿으면 안돼요. 이쪽에서 싸운 아군 별로 없어요. 싸우지도 않고 차 타고 왔다가 슬며시 저 강가에 북한군 나타나니 도망친 것들이 무슨---"
"하지만 전사에 조강포에서 전투가 있었고 배도 격침시켰다고 하는데... ."
"가서 애기봉밑인데 김00이라는 할아버지 살고 있어요. 할머니들도 꽤나 있어. 그곳은 배가 드나들어 사람이 그래도 있었거든. 가서 물어봐요. 한둠명 죽은 것 밖에는 없어요. 무슨 전투야 총질 몇번 하고 다 사라졌다고 하는데... ."
나는 인사를 드리고 조강리로 갔다
10여 채의 가옥이 있고 그래도 인기척이 있는 곳이였다.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나 사실 이야기를 하니 바로 본인이였다.
"혹시 전사한 사람이 어디에 묻혀있습니까?"
"참 거시기 하고만. 죽은 사람이 맞긴 맞은데 국군인지 공산군이지 민간인인지 잘 몰라요. 내가 15살에 전쟁이 나고 이곳으로 북한군이 수없이 넘어오고 넘어가고 하긴 했어요.
전쟁도 비가 내리는데 갑짜기 꽝꽝거려 나와보니 벌써 북한군이 마을 저 저산에 올라가 있고 국군은 어디있는지 보질 못했어요.
"그럼 저기 죽어서 묻혔다는 사람은 누가 묻었습니까?"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동네 어른들이 한 것이야. 워낙 냄새가 진동하니까 이곳 일대 미친개들은 다 모여. 여우들이 그때는 많았어요. 그러니 보기 싫으니 바로 옆엗 따을 파고 묻었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지. 직접 보질 못했어요."
"그럼 대략적인 위치라도 아시면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는 할아버지 안내를 받아 그 위치를 파악하고 다른 동네사람 몇 분을 더 만나 사실관계를 파악했다. 그러나 이곳은 인민군이 넘나드는 포구였고 국군은 잠시 왔다가 다 밀려나갔다고 한다.
그러면서 중요한 정보를 하나 얻었다.
통진에 가서 오리정에 가면 지금 외국어고교가 있는 근처에 국군이 앉아서 쉬다가 북한군에게 전부 전사했다는 곳이 있다고 알려 주었다.
우리는 지탐기로 위치를 탐사하고 탐지음이 나는 몇군데를 체크하여 기록에 남겼다.
해병대와 협조하여 기초굴토를 해 봐야 한다.
동네사람들 이야기는 이곳이 북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들, 그리고 전쟁이후에도 북한에서 아니면 우리쪽에서 넘나들던 사람들이 얼마동안 잇었다가 강안 철책이 드리워지며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한다.
"그러니 생과부도 생기고 북으로 못 넘어가 부랑아 아닌 부랑아도 생기고... ."
그래서 이곳 일대에 민간인도 흔한 말로 월북을 기도하다 총맞고 죽은 사람도 있고 유격군이 북으로 넘어가 교전을 하다 전사하여 이곳에 시신이 흘러와 묻혀지기도 했다고 하니 조사하기가 정말 어려운 문제다. 어쨌든 전투는 별로 없었다.
실제 얼마 뒤에 몇곳을 발굴하여 봤지만 흔적은 발굴 되지 않았다.
나는 오리정으로 달렸다.
이곳에 오니 그래도 전쟁한 지역같은 분위기였다.
강화도나 김포반도 북단에서 철수하는 제12연대 병력이나 김포지구사에 배속되어 들어오는 병력이 만나는 지점이 여기라 한다.
동네 사람들은 많은 군인들을 구경했다. 그리고 죽어가는 모습도 보고 도망치는 모습도 보았다.
이곳 일대는 200M미만의 낮은 산에 둘러 쌓여 있는 분지형으로 월곶면소재지와 통진읍이 교차한느 곳으로 김포외국어고교가 들어서 있는 야산 일대다.
지금은 김포 한누리병원까지 들어서 이제 그 형체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어버렸지만 '00년도에는 밤나무 숲 능선에 개인호가 완벽하게 살아 있었다.
이곳이 그 당시에는 교통의 중심지로 모든 길이 오리정으로 통하고 있었는데 ㅈㄴ방에서 후퇴하는 병력이 행군으로 오리정으로 들어와 길 옆에 군장을 풀어놓고 자미 휴식을 취하는 사이에 적의 기습을 받아 많은 인원이 전사하여 군장이며 장비를 놓고 일시적으로 마송방향으로 후퇴하였다.
그러나 이때 아군의 부대들이 진출해 들어오면서 적의 기습부대는 사라지고 국군이 다시 점령하였으며 야산 능선으로 부대를 배치하여 오후 늦게부터 개인호를 구축하고 적군을 기다리는데 적이 앞에서 온 것이 아니라 뒤에서 나타나 전투도 못하고 모두 철수해 나갔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이곳에 사람들이 지금도 많이 살고 있지만 꽤나 많이 살고 있었는데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니 자연스레 프락치도 많아 국군이 점령해 들어올 때는 이로인해 민간인도 희생이 많았지만 그때는 주로 길따라 시신들이즐비하게 널려있었는데 모두 길 확장이나 포장공사로 그 흔적조차 없다는 것이다.
"야속하게 무너져버린 오리정의 국군 전투흔적들"
나는 동네 어른들그리고 한누리휴게소, 팬택산업단지 조성사업에 관여하는 분들께 전쟁지역임을 알려드리고 공사를 하게 되면 알려달라고 명함까지 주고 받으며 신신 당부하고 떠났다.
그리고 2~3년이 지나 다시 찾아가 보니 물류창고를 짓는다고 반이나 다 밀어버렸고 밤나무숲속에 남겨진 흔적은 점점 생명력을 잃어버렸다.
물론 이곳에서 죽자사자 전투를 한 것은 아니고 점령하고 있다 떠나간 자리지만 김포지구사의 역사며 흔적인데 아무런 통제없이 역사는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오리정 길가에서 전사한 제12연대 인원들은 어디에 매장 되었을까?
전쟁으로부터 3개월의 공산치하에서 지역주민들이 부역으로 끌려가 시신들을 치웠으며 북한군도 다수 있었다는 증언은 살아 있다.
하지만 어디에 매장되었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아니 그 당시에 관여한 분들은 지금 살아있지 않다.
그러니 이곳 일대의 개발사업에서는 그러한 면을 고려하여 사전에 건설업체와 협약을 하여 공사에 피해를 주지않으면서 호국용사의 유해를 찾는 노력이 요구되는데 처음에는 그럴싸하게 출발 했지만 지금은 아무런 통제없이 공사는 진행되고 흔적은 사라지고 있다.
이어서 나는 온유산-73고지선을 따라 김포사의 주방어선을 탐사하였다.
"숟가락이 나와 들통난 무지한 현장 결과"
온유산자락에는 해병대부대가 울타리선을 확보하여 지키고 있지만 그 꼭대기에 올라서면 무슨 카페시설이 들어와 있고 대공감시초소도 구축되어 있다.
이러한 시설들은 '00년도에는 없었던 시설이고 그 당시에는 개인호가 선명하게 남아 있고 탐지기를가동하면 윙윙 소리가 나서 저쟁터란 기분이 들었던 곳이다.
운유산의 북쪽이 바로 대촌으로 북한군 제6사단이 상륙한 곳이다. 48번도로가 가로질러 강화에 이르는 곳으로 지금 김포 한강 신도시 개발이한창 지냉중인 장기-양촌지구다.
어느날 이곳 개발지역을 찾아가 함부로 땅을 밀면 안된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곳이 전쟁지역으로 아군 수백명이 묻혀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 꼭 우리에게 밀기전에 통보하여 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많은 원혼들이 들고 일어나 큰 사고가 날겁니다?"
"아 그렇습니다. 우리 토목업자들도 그런 것은 잘 지킵니다. 꼭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건설업자가 아닌 어느 개인이 제보를 하였다.
"내 증조부 산소를 이장하는데 옆에서 탄알이 나오고 탄창이 나오고 군화가 나오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출동하겠습니다."
그러고 달려가 보니 평탄한 지면인데 유품류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물론 6.25전쟁 당시 것인지 그 후에 군부대가 일시적으로 점령하여 매장한 폐기물인지는 모르지만 군인 유품류는 맞았다.
우리는 현장 조살르 마치고 제보자가 이장을 완료하여 떠난 후에 주변을 정밀 탐사하는 가운데 놋숟가락이 나와 있어 이상하다 싶어 사진을 찍고 분석을 의뢰했는데 조선후기 숟가락이라 하였다.
우린 이러한 사진과 앞에서의 유품사잔을 근거로 토지공사에 공문을 보내 공사진행에 앞서 우리가 선행 조사를 하겠다고 했는데 그 토지공사의 공문 접수자가 이걸 문화재청에 보냄으로써 문화재청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 숟가락을 반환하라는 것이다.
"졸지에 문화재 도굴범이 될 뻔하다.
그야 바로 사진에 나와 잇는 것을 보내주고 말았지만 기분이 좋지않았다.
물론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렇려면 뭐하러 사진에 포함하여 통보하겠는가. 그러나 전허ㅏ를 주고받는 문화재청 공무원의 입소리가 무척이나 귀에 거슬렸다. 법이 어떻고... .
우리도 문화재청에 매년 발굴 계획을 통보하고 도한 문허ㅘ재청에서 발주하는 전국의 주요 문화재 매장지에서의 군관련 유품이 나오면 통보해 달라고 하지만 지금까지 한번도 통보해 온 적이 없다.
그렇다면 없어서 그러면 말도 안한다.
"임진강상 고구려 유적지 발굴현장, 한강변 아차산 발굴현장, 용인 할미산 발굴현장 등이 수 많은 6.25전쟁 격전지이고 실제 발굴사업간 많은 군 관련 유품이 나왔으나 한번도 알려주지않고 은폐(?)하엿다고 보면 된다.
그러한 사실은 그곳에 투입딘 사업단의 인원들이 우리 발굴팀이나 감식팀에 들어오는대학생들이 있고 실제 우리가 탐사간 현장에서 일부 인원으로부터 제보를 받았고 확인도 했다.
같은 국가의 동력끼리 밥그릇 싸움이지만 어쨌든 우린 찜찜한 기분속에 이 일대의 세밀한 조사를 통하여 전쟁사를 구술하려 노력 했다.
"조국의 운명을 건진 김포사의 용맹스런 전투의 역사를 기록하라"
이미 앞에서 조금 강조는 했지만 우린 나라를 구한 것은 제1사단이요 제6사단인 것처럼 전사가 쓰여있지만 사실은 김포사나 제8사단의 방어도 많은 기여를 했다.
최근 공개된 소련측 당시 소련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전쟁 보고서에 의하면 우리 전쟁사가 얼마나 많은 허구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김포지구의 전쟁사를 알아보려면 북한군 제6사단의 작전을 알아야 하는데 여기에 우리 독립 제17연대와 제1사단 제12연대의 철수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제17연대가 고인이 된 백인엽 연대장의 혹독한 지휘로 싸우면 이기는 부대인 것처럼 인식되어왔다.
그런데 보고서에 의하면 옹진반도쪽에 북한군은 구들의 제3여단과 제6사단의 1개 연대를 투입하여 공격을 개시하였고 우리의 제17연대와 제1사단 제12연대의 2개 대대가 북한군 포병의 공격준비 사격과 보병의 공격에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연안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고 저녁 7시 40분 경에 옹진을 점령했다고 한다.
"'50. 6. 25일부터 26일까지의 야간에 제17연대 참모부와 1개 대대 등 총 400여 명의잔여병력이 소함정과 거룻배를 이용하여 옹진반도에서 대연평도로 철수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북한군은 무려 2000여 명의 병사 및 장교를 포로로 잡고, 전투장비를 모두 노획하였다고 한다."
과연 제17연대의 병력이 얼마며 제12연대 2개 대대 병력이 얼마였는데 이런 치욕적인 피해를 가져왔는지 우리측에서는 별로 비교할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어 답답하기만 하다.
"잔여병력은 민간인 의복으로 갈아입고 예성강을 도하하여 철수하였으며 일부는 지역 주민들 속으로 숨어버렸다"고 한다. 이래서 '50. 6. 26일 오전 10시 30분 물렵에 옹진반도와 연안반도는 함락 되어 버리고 북한군 제6사단의 일부는 개성을 공격하여 개전 당일 7시 30분 무렵에 점령하게 된다.
북한군 제6사단의 임무와 한강도하 작전의 진실이 이 기록에 있다.
북한군은 첫날 개성에 진출하면 조강리에서 한강을 도하하고 둘째 날 아침에 통진-백석현고개=마곡리선을 따라 강의 남쪽 강변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서울의 병력이 서남쪽으로 후퇴하는 것을 차단하면서 한강 남쪽 강변을 따라 영등포로 공격할 계획이었으며 일부 병력이 인천을 점령하는 것이다.
그래서 6.25일 당일 7ㅛㅣ 30분에 개성을 점령한 그들은 첫날 한강 변에 진출하여 영정리와 방책동 전방에서 도하에 착수하였다.
그래서 26일 아침 6시 30분 경에 보병 2개 대대와 교육 대대 및 76mm 야포 2문만이 도하 하였다.
그러나 국군의 김포사 일부 부대가 수시로 역습을 개시 하고 항공 폭격 등으로 인해 6월 28일 되어서야 도하를 완료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차와 자주포는 도하하지 못했다.
6월 27일 부터 28일까지 사단내 보병과 포병들 그리고 76mm자주포 대대, 전차중대 등이 완전히 도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보병과 전차가 협동작전으로 김포방향으로 공격하며 6월 30일 오후 8시에 오류동을 점령하였다고 한다.
특히 7월 1일부터 2일까지 하루에 4~5회에 걸쳐 아군의 역습과 항공공격으로 전투를 벌여 7월 3일 새벽 5시에 영등포를 점령하게 되는데 그들은 이 기간중 아군을 장교 및 사병 3,040명 희생시켰고 3,296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인천은 7월 4일에 아침 7시 40분에 별 다른저항 없이 점령하게 되었다 한다.
"한강교 폭파시간도 없이 우린 완전히 포위되어 끝났다."
그거면 여기서 미아리 고개를 넘어 서울로 적 전차가 들어오고 한강대교가 폭파되는 싯점과 비교하면 얼마나 위급한 시간이고 작전지역인지 알 수가 있다.
적이 미아리를 넘어선 시간이 28일 새벽 01:00경이고 한강교가 폭파된 시간이 대략 02:30분경이라 한다. 김포가 그들의 계획대로 떨어졌다고 가정하면 정부의 대전천도도 어렵고 한강이북에서 전쟁은 끝났다.(?)
이렇게 중요하고 그 당시에 지휘자들의살신성인 정신이 깃들여 있는 전투사를 우린 그동안 너무 간과 했고 지금도 그 흔적마저 개발이라는 붐에 밀려 흔적조차 살아지고 있는데도 누구하나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유해발굴은 단지 전사한 인원의 유해를 찾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옳바른 전쟁사를 재조명하여 후세에 바른 전쟁사를 물려주는 것도 사명이다."
이르 위해서는 실증적 근거로 유해발굴 현황과 개인호등 전투 흔적에 대한 명확한 분석, 그리고 우리의 영웅담이 가득한 전사와 더불어 중공군 기록, 소련군 기록, 미국이나 일본군 기록, 나아가 북한군의 자료를 확보하여 언젠가는 6.25전쟁사의 대대적인 진실편이 쓰여져야 한다.
유해매장과 관련한 제보 또한 제한적이었다.
주로 유격군의 행태에 관한 제보와 유격군 출신들이 동료를 매장하였다는 제보는 많았다.
하지만 정규작전간 전사한 인원의 매장 사실을 제보한 인원도 이곳에는 없으며 제한적이다. 그런데 소련군 기록에 3000여 명이 전사했다고 하는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전사에 기록에도 김포공항 탈환작전에서도 참여한 부대들의 인원이 대부분 전사했다고 하는데 그 처리과정에 대한 제보나 증언이 없다.
그렇다고 북한군이 가져갔을리는 없지않은가... .
"공항 활주로 밖에 논이 있는데 논골에 시신이 널려 있어 마을마다 강제로 부역에 참여하여 그 시체들을 다 논골이나 응덩이 같은 곳에 묻어버렸다. 지금 그곳이 활주로가 추가 된 곳이다."
현재 평창 방아다리골에 살고 있는 전쟁 미망인 한 분이 나를 찾아왔다. '07년 6월 6일이다.
현충일 행사가 끝나가고 잠시 행사장 정리를 하고 있는데 할머니 한 분이 찾아왔다고 한다. 그래서 안내를 하여 무슨 사연인지 알아 봤더니 전쟁 미망인으로써 남편 분이 수도사인데 평창-대관령 지구에서 전사했다는 것이다.
"내 남편의 이름은 이춘풍, 어떻게 뼈 한조각이라도 찾아주실 수 없나요?
"죄송 합니다. 확답을 드리지 못해서. 하지만 우린 열심히 찾을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니 내 남편이 정말로 어디서 전사했는지 무슨 기록이 없나요?'
"전사망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집으로 보내드린 자료와 같습니다. '51년 겨울전투에서 전사하였고 당시에 시신은 찾지못해 실종처리 되었다가 전사처리 되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 지금 할아버지 묘비가 현충원에 있잖아요. 어떻게 묘비가 세워지게 되었지요?"
"국군묘지가 만들어질 때는 유품만이라도 있으면 묘비를 세울 수 있게 해 주었어요."
기막힌 사연이 숨어 있다.
이 이야기는 차후 수도사단의 대관령지역 진출 작전간에 말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할머니의 또 기막힌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려 한다.
"내가 직접 괭이 들고 남정네들과 시체치우는데 나가서 공산군은 끌어서 아무렇게나 논골이나 웅덩이에 집어 넣어버리고 국군은 정결하게 가지런히 묻도록 했어요."
"어디서 그런 부역을 하게 되었어요?"
"나도 몇십구 묻었어요. 비행장 안에."
"외발산동, 그러니까 지금 공수부대있는 자리와 비행장이 당시에는 활주로가 2개인데 지금은 4개잔하아요. 3/4번 활주로 자리가 논이였는데 그곳에 그렇게 많이 군인들이 죽어서 있었어요. 현재 강서구 구청일대 야산에도 많았어요. 그래서 동네마다 당시 내무서원들이 나서고 치안대가 설쳐대며 남녀노소 가리지않고 인원이 참여하여 너무 냄새가 심하게 나니 다 인접에 가매장 하게 했어요. 나도 괭이 들고 가서 몇 십구 묻었어요."
"아 그러세요. 정말 고생하셨네요. 혹시나 지금 비행장에 가시면 알겠어요?"
"얼마전에 가보니 할주로가 생겼고 논이 많았는데 잘 안보여요. 화곡동 그 구청 앞산에도 등산로가 생겼던데 그곳에 묘지들이 많이 있는데 몇군데는 아마 죽은 군인들 무덤일거예요."
할머니는 나를 따라 화곡동으로 와서 우장산일대의 현상을 기억을 더듬어 알려주고 다시 공항으로이동하여 공항뒤편 오정동 마을회관에 가서 동네분들과 이곳 사정에 대해 이야기를 교환하였다.
하지만 공항은 완전히 과거 논자리는 사라져버렸다.
동네에 아는 사람도 없다. 이야기만 흘러다니는 메아리로 남았다. 원혼들이 얼마나 안타깝겠는지 나라도 원한을 갔고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춘의산, 우장산 등 주변 산들을 찾아 다녔다.
그리고 외발산동의 공수부대 안의 야산들도 해당이 되고 구로구 궁동 뒷산에서 능고개로 올라가 고강동 뒷산까지 연결되는 능선을 타면 공항이 보이고 이곳이 전투지역의 일부다.
서쪽으로는 원미산과 춘의산이 있고 동쪽으로는 오류동에 과거 무의도에서 북한에 침투하는 특수부대를 양성하는 교육을 시키고 관장하던 공군 특수이무 부대가 있던 산이 잇는데 지금은 제일 평강교회에서 모든지역을 불하 받아 사용중인데 '실미도 사건'의 주체가 있었던 산도 전쟁터다.
이곳일대가 공항탈환작전을 위한 병력 집결과 기동로로써 이곳 전투에서 후퇴하여 대부분 부대들이 수원으로 가서 재편성하게 된다.
"초기 전투시 공항 탈환조 대원을 발굴하다."
우선 우린 궁동야산에 국군울 매장하는 것을 보았다는 민간인이 현장에서 만나기를 원하여 원각사로 가서 제보하신 분을 만났다. 이분이 나이 10살에 전쟁이 났다고 하는데 오류동에 살고 있으면서 피난을 집안이 떠나지 못하고 그대로 있으면서 북한치하 3개월을 경험했다고 한다.
전쟁이라지만 별로 싸우는 것 같지도 않고 탱크소리나고 포탄 몇발이 떨어지면 국군은 뒤로 물러나는데 이곳 원각사 뒷산은 공항을 공격하던 부대가 퇴각하면서 산 능선을 타고 가는데 부상당하여ㅕ 멀리 가지못하고 산에서 전사한 국군이란다.
"그럼 혹시나 누가 묻어주었는지 아시는지요?"
"무슨 소리야, 그때 누가 묻어. 그러다가 어떤 놈이 고자질하면 바로 대창으로 찔려서 죽는 마당에 이곳에 한참그대로 있었고 나는 무섭지도 않고 재미있어서 공항전투도 하는 것 다 보았고 군인들이 지금 부천 종합운동장 일원이 논인데 그 논바닥에 얼마나 죽어 있는지 대 낮에도 미친개들이 주둥이가 뻘겋게 되어 시신을 물어뜯고 다니고 여우들도 사람을 무서워 하지도 않고 힐끔힐끔 보면서 시신을 건드려요. 그러니 그 비참한 모습은 말로 표현 못하지."
"그러시면 이곳 일대라고 하는 것은 언제까지의 모습인지요?"
"전쟁이 끝나고 가보니 그 자리에 조그만 봉분이 있더라고. 그런데 지금까지 그 자리야. 이곳이 산악 쓰레기를 버리는 곳인데 누군가가 묻었다고 느낌이 와서 제보한거요."
우린 이곳에서 어ㅏㄴ전한 한구의 유해를 발굴 했다. 그것도 쓰레기 더미를 치우고 말이다.
살아서도 대우받지 못하고 죽어서는 쓰레기 더미밑에 깔려 계시다 이제야 햇빛을 보게되신 용사님께 정말 죄송하다고 경례를 올리고 하지만 용서해 달라고도 애원했다.
얼마 있어 이번에는 제61사단에서 연대장 한 분이 나를 좀 보자고 한다.
부천 작동의 마을회관에 가니 많은 마을사람들이 모여 있다.
이곳은 초기전투시 국군이 개활지를 횡단하여 후퇴해 나가고 북한군이 뒤따라 오는 곳이다. 따라서 큰 전투라기보다는 분대단위의 전투나 개인이 살아남기 위해서 피신해 가는 장소로 동네에서는 전쟁 자체에 대한 공포심이 정부가 계속ㅎ하여 북으로 진출하여 곧 평양 가고 신의주 간다는 식의 정부차원의 발표에 모두들 기다리다 갑작스레 북한군이 들어와 피난도 가지 못하고 있었다 한다.
그런데 군인들이 들이닥쳐 갑작스레 난리가 났지만 어린 아이들은 신기하여 부모님들의 만류에도 밖으로 나가 어떻게 전투하는지 구경하는 것이더 재미있었다 한다.
"민간인 복장으로 총을 들고 나타난 국군이 방안에 숨었다."
노인회장님이 본인이 본 전쟁상황을 재미있게 이야기하고다른 인원들이 보충하여 설명하는 식인데 어떻게 국군인지는 알았느냐는 질문에 총이 있는데 북한군이 민간인복장을 할리가 없을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럼 그 당시에는 북한군인지 아군인지 아니면 다른 민간인이거나 프락치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그 당시에 15에서 17살까지가 주로인데 더 많은 분들은 그 당시에 군에 갔거나 대부분 사망하였고 동네에는 아무도 없다. 특히 여기는 농업이었고 당시가 7월이라 그렇게 바쁘지는 않아서 어른들이 집에서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이 일대의 사람들은 다 알고 있으니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 분이 집에 들어와 숨겨달라 하여 아버지가 창고에 있으라 했는데 이미 군인들 본대는 다 더나가 버리고 북한군이 판을 치고 다니고 집집마다 조사하러 다니고 있었다.
하루를 머물렀는데 아침 새벽에 혼자 출발하여 어둠속에서 사라져 갔는데 얼마 있어 뒤따르는 군인들 소리가 들리고 총소리가 났다. 그래서 가 보니 이미 죽어서 지금 가보면 알겠지만 야산 소나무 사이에 죽어있더라. 그래서 집에와 이야기 했더니 동네 사람들이 언제 인지는 모르지만 묻었다고 한다. 그 장소에 가보니 조그만 봉분같은 곳이 있었는데 지금은 민밑해져서 분간하기가 쉽지않다."
"그러시면 한 번 가보시죠."
우리는 동네 몇몇 분과 현장으로 연대장을 대동하여 함께 갔다.
간단한 제례를 올리고 기초굴토를 해보는데 탐지기에서 계속하여 발신음이 잡혀 분명 뭐가 있긴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게 한다.
"국군인지 적군이지 아니면 다른 신원이라면 어떻게 처리하나요?" 연대장의 질문이다.
"아군인지 적군이지는 발굴 되는 유품을 보고 대략적인 판단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민간인 복장이었다 하나 매우 민감합니다. 원래는 이런 경우에 우리가 직접 발굴하는 것보다 해당지역 경찰에 신고하여 우리에게 협조가 오게하는 것이 정식계통인데 현재는 그 과정을 생략하여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등록된 묘지가 아니고 명확하게 지역주민들이 참전용사의 무덤이라 보증을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지금 보니 뭔가 군관련 유품이 나올 것 같은데 아무것도 없다면 그래도 증언에 의해서 무명용사님으로 처리하시는지요?"
"그렇습니다. 일단 발굴해 보면 어느정도 '남녀노소'에 대하여서는 바로 식별이 가능합니다.만약에 그럴리는 없겠지만 노인이나 여성, 아니면 어린이로 판별이 되면 해당 경찰에 신고하거나 이곳에 정중히 다시 매장해 드려야 합니다. 사건과 관련이 없는 상황이어야 하는데 기다려 봐야겠습니다."
드디어 유해의 모습이 나타난다. 소나무뿌리가 교묘하게도 유해를 비껴서 자리를 잡아 발굴하는데는 어렵지않았다. 발굴 되는 모습이 달려가다 넘어진 모습 그대로였다. 별로 유품이 나오진 않았는데 전투화 잔해와 칼빈 탄피와 수저가 나왔다.
우린 일단 무명요사로 분류하여 정밀감식을 의뢰하기로 하고 현장에서는 약식제례를 올렸다. 해당 연대장이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 발굴기간중 계속 현장에 지켜있으면서 관심을 표했다. 나중에 보니 장군에 진급하고 외발산동에 있는 제1공수여단장까지 역임하고 퇴역하였다.
우린 김포공항 탈환작전에 관련된 전투지역과 오정동 마을회관 및 외발산동 마을 회관과 노인정을 샅샅이 찾아 다니며 해당 제보를 얻으려 했다.
김포비행장도 실제 들어가 현장을 확인했으며 김포평야와 개화산에는 거의 10여차례 조사했다.
제 6 절 민간인 피해현황 : 수도 서울 방어작전과 함락편에서 경기. 서울지역 통합하여 정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