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쇠말뚝 풍수침략'은 민족말살을 의도한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충남 천안군 독립기념관 제3전시실에 전시중이던 일제의 풍수침략 쇠말뚝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어떤 지식인들은 일제의 쇠말뚝을 풍수침략으로 보는 건 자기 비하요 근거없는 낭설에 불과하다고 비난한다. 과연 그런가. 전국에 산재한 쇠말뚝 현장을 취재해 보았더니….
김두규 전주 우석대 교수·풍수학 - 안영배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사회 지도층이나 학계의 원로일수록 더욱 그렇다고 한다. 이들의 발언은 일반인의 그것보다도 그 파급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이것은 8·15 광복 54주년을 맞아 요즘 입방아에 오르고 있는 재야 역사학자 이이화씨에게도 적용되는 듯하다. 역사에 관심 많은 이들로부터 일정 부분 인정과 사랑을 받고 있는 이이화씨는 자신의 최근 저서 ‘역사풍속 기행’ 중 첫머리인 ‘풍수설’에서 일제의 쇠말뚝이 풍수 침략이었다는 것은 근거가 없는 낭설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파문을 일으켰던 것.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제시기 일본사람들은 우리나라 산수의 기를 꺾어 인물의 배출을 막으려고 산마루 등 요지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말이 전해졌다. 그래서 이를 믿는 사람들이 쇠말뚝을 뽑아내는 일에 나섰다. 한데 이 말은 이여송(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군)의 경우처럼 근거가 없다. 일제 당국은 개항 이후 우리나라의 지도· 해도(海圖)를 작성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그들은 지도작성의 과정에서 산마루에 쇠말뚝을 박아 표지로 삼았던 것이다. 이는 어느 일본인 개인의 짓이거나 풍수쟁이들이 엉뚱한 소문을 퍼뜨린 것으로 보인다.”
그의 주장은 각 언론보도를 통해 확산됨으로써 적잖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우리민족사연구회의 유왕기 연구위원은 이씨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위치 표시용 쇠말뚝은 바위에 20~30cm 정도면 충분하며 (풍수침략용 쇠말뚝처럼) 1m 이상 박지는 않는다. 일본은 한국침략을 위해 역사 지리 풍수 등을 열심히 연구했다. 침략 후에는 모든 관사를 명당자리에 지었다”(‘동아일보’ 99년 6월7일자 기고문)고 반박했다.
또 10여년 전부터 일제가 박은 풍수침략용 쇠말뚝을 제거하는 일을 해오던 소윤하씨 (민족정기선양사업단)는 “현장 탐사를 해보지 않은 책방 서생의 일방적 편견”이라며 이씨를 강하게 비난했다. 소씨는 “일본인들이 측량용으로 표시한 것으로 의심되는 쇠말뚝도 없지 않겠지만, 대부분 일제가 풍수침략용으로 박아놓은 쇠말뚝임이 분명함은 현장이 증명한다”고 주장했다.
독립기념관에서 사라진 쇠말뚝 사실 이이화씨의 주장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김영삼 정부 시절 시사월간지 ‘월간조선’(95년 10월호)은 ‘김영삼 정부는 風水정권인가?’라는 제목으로 쇠말뚝의 존재 의미를 부정했다. ‘월간조선’은 95년 당시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쇠말뚝 제거사업과 일제가 개악한 고유지명 찾기 등 정부 주도로 벌이는 민족정기회복사업을 비난했다.
이 기사는 “주민들이 박은 측량용 대삼각점을 일제가 혈을 지르기 위해 박은 쇠말뚝으로 오해했다”고 밝히는 이봉득씨(95년 당시 78세·일제시대 일본인 측량기사를 따라다녔다고 함)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김영삼 정부가 풍수적 매카시즘으로 국민을 선동했다”고 주장했다. ‘월간조선’은 또 독립기념관 제3전시관(일제침략관)에 전시중이던 쇠말뚝(서울 북한산 백운대에서 발견)도 일제가 풍수침략의 목적으로 박았음을 입증할 만한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며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 주장 때문이었던지 독립기념관에 전시되던 쇠말뚝은 언제부터인가 사라져버렸고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지난 7월1일 독립기념관 관계자에게 이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특별한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더 이상 쇠말뚝을 전시할 계획 자체가 없다”고만 밝혔다.
일제의 풍수침략 상징으로 소개되던 쇠말뚝이 독립기념관에서 사라진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문제의 쇠말뚝은 서경대 서길수 교수(경제사)가 여러 사람과 힘을 합쳐 뽑은 것이다. 서교수는 “백운대 정수리 바위 위에 뚫려 있는 22개의 구멍을 관찰해보면 도저히 방향 표시나 측량용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정수리 바위에서 정동쪽인 계곡에도 쇠말뚝이 5개 박혀 있었는데 이곳은 삼각산의 명치 끝에 해당하는 곳으로 계곡 속에 감춰져 있는 쇠말뚝 역시 방향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라고 밝혔다. 말하자면 일제의 풍수침략용 쇠말뚝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일제시절 박은 쇠말뚝의 경우 ‘월간조선’의 주장처럼 ‘합리적 근거’에 의해 풍수침략용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측면도 분명히 존재한다. 풍수학이 조선시대와 달리 학문적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현재의 풍토에서, 풍수학적 용어를 동원해 쇠말뚝에 대해 설명한다 하더라도 그 역시 ‘비과학적’인 태도라고 매도당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측량용인가 풍수침략용인가그렇다 하더라도 이이화씨나 ‘월간조선’이 단정하듯이 모든 쇠말뚝이 측량 표지용이라고 하는 근거도 역시 찾아볼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오히려 일본인 학자들이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대표적인 이가 현재 일본 오사카 시립대학교 문학부의 노자키 미츠히코 교수(野崎充彦, 조선문학 전공). 일본인이 박았다는 쇠말뚝에 대한 연구 및 한국의 풍수지리에 대한 연구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의 풍수사들’이라는 저서(1994년)까지 낼 정도로 한국통인 그는 쇠말뚝에 대해 이씨처럼 그렇게 단정적이지 않았다.지난 6월28일 국제전화로 접촉(김두규:노자키)한 결과 노자키 교수는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박았다는 쇠말뚝에 대한 연구는 현재 ‘중단된 상태’이다”라고 밝혔다. 연구가 중단된 이유를 물었으나 그는 매우 조심스러워하며 뚜렷이 밝히지 않았다. 아마도 일본인들이 쇠말뚝을 박지 않았다는 결론 때문이 아니라 물증이 없기 때문인 듯 싶었다.
그러나 쇠말뚝이 일제의 풍수침략용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단서는 있다. 측량용 쇠말뚝과 풍수침략용 쇠말뚝은 그 생김새나 사용 방법이 다르다는 점이다. 토지측량이 전공인 전북대학교 토목환경공학부 조기성교수의 말.“지형 측정을 위해 삼각측량(대삼각지점)을 할 때 산 정상 근처에 조표(造表)를 만드는 과정에서 망루를 고정시키기 위해 큰 못이나 쇠말뚝을 박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도 쇠말뚝 끝에 고리가 있거나 표석(標石)을 중심으로 빙 둘러 말뚝을 박는다. 최근에 발견됐다고 신고되는 쇠말뚝과는 모양이 전혀 다르다.”
공무원(충북 단양군청 지적과) 신분으로 주위에는 향토사학자로 더 잘 알려진 윤수경씨(尹洙慶·51) 역시 측량용과는 거리가 먼 쇠말뚝이 너무나 많이 발견된다고 말한다. 그는 10여년 전부터 단양군 여기저기에 박혀 있다는 쇠말뚝 현장들을 찾아다녔다. 그 결과 일제 때 일본인들이 쇠말뚝을 박았다는 곳을 무려 81개소나 찾아냈다.
윤씨는 다른 지역보다 단양 지역에 유난히 쇠말뚝이 많이 박혀 있는 것은, 이곳이 예로부터 명승지로 알려진 곳이라 일본인들이 더욱더 지맥(地脈)을 차단하려 했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윤씨는 혹시 쇠말뚝이 박힌 장소들이 ‘측량 삼각점’은 아닌가 하여, 군청 지적과 직원들의 도움을 구해 측량 삼각점과 대조해 보았다. 그 결과 쇠말뚝의 위치가 측량 삼각점의 위치와는 전혀 맞지 않음을 밝혀냈던 것.
게다가 윤씨는 단양군수의 결재를 받아 작년 7월4일부터 9월2일까지 무려 55일 동안 현장답사한 결과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쇠말뚝이 박힌 지점들을 정밀지도에 꼼꼼히 표시하면서 그것을 풍수학에서 중요시 하는 지세도(地勢圖)에 비교해본 결과, 쇠말뚝이 박힌 지점들이 대개 풍수상의 중요 혈처(穴處)였다. 예컨대 마을이나 어떤 지역을 인체로 비유할 때 눈, 코, 목 등과 같은 중요 부위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풍수는 조선의 기층신앙그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단양군 영춘면 상1리에서 뽑은 세개의 쇠말뚝이다. 쇠말뚝은 ‘영구입수형(靈龜入水形:물로 들어가려는 신령스러운 거북)’이라는 뛰어난 명당터의 두 눈과 정수리에 꽂혀 있었다.
이런 사례는 쇠말뚝을 땅의 중요한 부분에 박아 지기(地氣)를 훼손함으로써 그 땅에 사는 사람 역시 힘을 못쓰게 한다는 논리가 개입돼 있다.풍수지리학에서는 땅을 살아 있는 유기체로 보며, 자연(땅)은 인간에 대해 1 대 1로 대응한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땅에 있는 석맥(石脈)은 인간의 뼈에, 샘과 하천은 핏줄에, 흙은 살과 피부에, 초목은 모발에 비유하는 식이다. 이렇게 자연을 신체에 비유하는 것은 동양의학인 한의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신체의 경락(經絡)은 대지 위에 흐르는 강과 하천에 해당하고, 신체 곳곳에 있는 혈(穴:침자리)은 자연의 특정 지점을 본딴 것이다.인간과 땅이 정확하게 1 대 1 대응한다는 관념은 동아시아의 오래된 사상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이러한 동아시아의 고유 사상 혹은 기층 신앙은 서구의 심리학자 칼 융(Jung)이 말하는 ‘집단무의식’ 형태로 다음 세대로 계속 전이돼 왔다. 그리하여 땅이 병들면 인간이 병들고, 지맥을 자르면 당연히 사람의 맥도 잘리게 돼 재앙이 따른다는 논리는 한국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민족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 자료제공 : 현) 해천동양학연구학회 회장 해천 유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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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 실용종합풍수지리, 유도상, 박영사, 2019.7.10일
구성학기초에서통변까지, 유도상, O.B.C.A. 202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