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성에서 외 4편
비둘기가 앉는 순간
창문이라는 거주가 시작되었다
배워본 적 없는 오토바이는
퀵서비스의 속도로 멀어지는 행성이어서
가스와 먼지로 둘러싸이고
포장된 우리는 흔들리고
황급히 달리며 인사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기상관측소에서 파도가 밀려온다는
경고문을 행성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주꾸미 먹물같이 관측이 불가능했던 일상들
비탈은 취향의 문제이므로
풍경을 자르면 취향이 사라졌다
옥탑방은 구글지도에 없는 풍경이어서
굴러 떨어진 적이 있다
방지 턱을 보지 못해
굴러 떨어진 뼈를 주우며
우리는 이동하는 행성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스키드 마크가 희미해지기 전에
전파망원경 밖으로 멀어지기 전에
행성이라는 포장에서 나를 꺼내야 했다
기념일
해변에 있는 소돌 슈퍼는 애니가 좋아하는 가게다 밀가루와 설탕을 할인해 주기도 하고 방울토마토에서 방울 소리가 나면 구름 위의 장미를 주기도 하는데 반값에 세일 하는 주걱을 사던 날 그날을 기념일이라고 불렀지 애니는 반년마다 기념일을 챙겼지 기념일엔 유통기한 지난 통조림을 뜯었고 애정과 분노가 가득한 드라마를 보며 녹슨 통조림을 먹었지
경멸의 자세는 낭만적이야
일종의 식욕이니까
애니는 주걱을 애인이라 번역했지 요리를 배우기 위해 기차를 타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늘 향하는 곳은 버스정류장, 해변의 방파제는 계단처럼 보이고 파도가 치면 허물어지고 계단에 올라탄 애니의 출항이 시작되었지 정착이란 물로 뛰어드는 것이어서 모래찜질하거나 고깃배를 타거나 달아오른 숨소리도 다 해변의 일이었지 봉돌은 무거운 것으로 애기*는 화려한 색으로 미끼가 돼지비계면 낚시의 확률은 높아졌지 문어들이 걸려들었어
우리는 두 마리 문어였고
애니는 다음 기념일을 세고 있었지
빨판이 달라붙은 유리창으로 해변의 소돌 슈퍼 간판이 보였지
* 애기 : 봉돌과 함께 매달아 물고기를 유인하는 장치
떨기나무
아이는 끊임없이 울고 있었다
비행기 통로를 서성거리며
입양아를 부둥켜안고 어쩔 줄 몰라 하던
은발 남자의 눈은 회색이어서 머리는 새털 같고 덤불 같았다
제가 잠시 안아볼까요?
그는 웃으며 정중히 사양했다
제 아이입니다.
딱 한 번 가 보았던 할머니 집으로 엄마를 찾으러 간 적 있다
엄마는 반기지도 안아주지도 않았다
엄마의 어깨 위에는 새집 같은 덤불이 얹혀 있었다
한 번도 새가 깃든 적 없는
담벼락 떨기나무는 덤불에 가려져 있었다
바람이 불면 총 맞은 것처럼
비둘기나 도요새 무늬 같은 덤불이 펄펄 날렸고
새를 더럽힌다며
엄마는 떨기나무를 자르기 시작했다
덤불에 스며든 빛은 아름다운 스테인리스 무늬처럼 보였다
틈새로 나를 찌르던 빛을 시간이라고 불렀다
혼잣말이 익숙해서 뱉지
못한 말이
입안에 가득했을 때
엄마는 집으로 돌아왔다
가끔 떨기나무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여름 필름
호밀들이 필름처럼 흔들린 시간
장화를 벗어 놓고 새가 오길 기다린다
커피를 끓이거나 구운 통밀을 빻을 때
앉거나 서는 것을 냄새로 알아채는 새의 발가락
머리와 이마의 경계가 모호한 새는
장화였구나
나는 불쑥 태어나서 키가 작았다
발꿈치를 들거나 턱을 뒤로 젖히는 에어풍선
태양을 가리는 일은 손목의 일이어서
서 있어도 키 작은 호밀밭은 바빴다
호밀밭 사이로 듬성듬성 포도나무를 심는다
그늘이 필요하거나
어린 포도송이에서 비린내가 날 때
웃자란 호밀은 베지 말고 눕혀줘
구겨져 있는 나를 일으킬 알람이 필요해
반 바퀴를 지나 시소처럼 움직이는 괘종시계
포도껍질을 뱉으면 알람은 풍선이 되어 날아갔다
장화를 반으로 자르고 흰 페인트를 칠한다
저걸 보렴, 방주가 호밀밭 위를 가르며 떠가는구나
호밀은 물속에서 흔들려, 흔들려, 흔들리고
새와 포도나무의 경계가 모호해져서
나는 키가 커 보이려고 일어선다
평면과 큐브
모래밭에 엎드린 자세로 볼거야
바닷바람은 멀리서 보면 오징어 같았어
희극적이었고
해변이라는 큐브를 맞추고 말 거야
(배가 올 거야)
4x4x4 퍼즐에서
5x5x5 퍼즐로 바꾸었을 때
SNS에 거짓을 연습하던 여자와
토끼이빨 조각을 맞추던 남자의
독백을 받아 주던 물거품
해변은 창백한 목덜미 같아
목덜미를 내어주며 맹세했었지
맹세할수록
심장이 모래 같았지
타 오르거라!
타 오르거라!
개머리 능선을 밟고
모래밭에 엎드린 자세로 타오르거라
사슴 똥을 주우며 타 오르거라
너는 여전히 엎드린 자세로 큐브를 돌리고
(배가 올 거야)
모래 위에 시간을 적고
평면을 만져 볼 수 있을까
해변이라는
비극은 아니니까
모래라는 큐브니까
김춘리(金春里) 시인
춘천출생, 2011《국제신문》신춘문예에 시 부문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모자 속의 말』 『평면과 큐브』 공동시집 『언어의
시, 시와 언어』를 냈다. 2012년 천강문학상을 수상했고, 2013년 경기문화재단 문예지
원금, 2017년 경기문화재단 전문예술창작지원사업, 201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
나눔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