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불교의 대화
1. 데카르트에게서 대법(對法)을 배우다
근대철학의 출발점
몸이 허약한 학생이 있었다. 밤 11시에 잠이 들면, 아침에도 꼭 11시까지 침대에 누워있어야 했다. 다행히도 학교는 부모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오전 수업을 면제받은 것이다.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기숙사 방의 침대에 누워 한없이 공상에 잠길 수 있는 특권! 그는 머리가 좋은 학생이었고, 특히 수학에 관심이 많았다.
방에는 환해진 아침 햇살이 가득했다. 이미 잠에서 깨어나, 사지를 이리저리 뻗으며 맘껏 기지개를 켰다. 실컷 자고 나서 몸은 이완될 데로 이완된 상태. 밖에서는 한창 수업 중인 친구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의식이 완전히 돌아오고 눈이 말똥말똥해지자, 며칠 전 수업 시간에 들은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우리 시대 수학의 최대 과제는 대수학과 기하학을 어떻게 통합시키는가 하는 문제이다. 즉 수학의 가장 중요한 두 요소인 숫자와 도형을 서로 연결시키는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모두 골몰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파리 한 마리가 천장에서 기어가고 있었다. 명료한 의식은 자연스럽게 천장에 붙은 파리의 기하학적 위치를 대수학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까 하고 물었다. 순간 직관의 불꽃이 튀었다. 천장의 두 변을 x축과 y축으로 삼고, 각 변에서 떨어진 거리를 재면 파리의 위치를 수식으로 표현할 수 있겠구나! 그는 ‘좌표’를 발견한 것이다. 이로써 대수학과 기하학이 융합된 대수기하학이 탄생하게 된다. 방정식을 좌표상의 그래프로 그려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천장에 파리가 기어간 그 기숙사는 예수회에서 운영하던 라 플레슈 중고등학교였고, 그 학생은 프랑스 출신의 철학자 데카르트(1596~1650)이다. 그는 커서 수학에서 좌표를 발견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일을 철학에서 이룩하게 된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패러다임 축의 이동을 실현하는 것. 과거 천 년 이상 서구인을 지배하던 신 중심의 세계관을 마감하고, 인간 이성 중심의 세계관을 시작하게 되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다. 이 세계관은 그 후 서구를 벗어나 전 지구적으로 확장되어 왔고, 앞으로도 당분간 유효한 관점으로 지속될 것이다.
데카르트 이전의 서구인들은 교회가 보는 방식대로 세상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세상을 과학적으로 바라보는 방식을 제안했다. 중세인들은 천장에 파리가 기어가는 것은 신의 의도에 의한 것이라고 이해했다. 근대인들은 그것을 과학적으로 이해한다. 이런 의미에서 데카르트는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우리도 세상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으므로, 데카르트의 후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우리의 사고방식은 퇴계보다 데카르트에 더 가깝다. 그만큼 서구화된 교육을 받고 자란 것이다.
시대정신은 자신을 표현해줄 인물을 찾기 마련이다. 17세기 정신은 데카르트를 통해 자신을 드러냈다.
특정한 철학자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의 ‘문제의식’을 파악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것은 한 철학자의 다양한 상념의 구슬을 꿰는 실이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를 알아내면, 나머지는 쉽게 풀린다.
데카르트의 문제의식은 ‘어떻게 하면 동시대인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우상을 파괴하는가?’였다. 여기서의 우상은 물론 천 년 이상 이어온 신중심주의이다. 그는 인간이 교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찾고자 했다. 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의식의 눈’을 바꿀 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중심을 바꾸면, 세상은 바뀐다. 그는 세상의 중심에서 신을 밀어내고, 인간 이성을 자리 잡게 했다.
이를 위해 그는 합리적이고도 자명한 존재의 기본 원리를 찾았다. 그가 강력하고 명증한 회의주의를 발동하여 기존의 학문을 의심해 나가자, 중세의 스콜라철학과 기타 전통적 철학적 방법론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존재 해석이 모두 무너진 뒤에야 비로소 새로운 원리가 드러났다. 존재의 근거를 신에 의지하지 않고, 인간 스스로의 힘에 의지하는 것. 그는 《방법서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곧, 이런 방식으로 모든 것이 거짓이라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동안 이를 생각하고 있는 나는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너무나 틀림없고 확실하여 어떤 엉뚱한 가정으로도 흔들어 놓을 수 없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진리를 깨달으면서, 나는 그것을 내가 찾고 있던 철학의 제1원리로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성찰》에서도 이렇게 말했다. “결국 모든 것을 심사숙고하고 주의 깊게 고려했을 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명제는 내가 그것을 표현하거나 정신 속에서 생각할 때 반드시 진실인 것이다.”
천성적으로 부드러운 성격의 데카르트는 완고한 교회와 맞서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생각하는 힘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해냄으로써 자신의 철학이 기독교 진리를 옹호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결과적으로 과학이성의 철학은 신중심의 중세적 세계관을 무너트리고 말았다. 그는 근대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것이다.
근대의 출발점은 데카르트적인 ‘생각하는 나’이다. 즉 존재의 가장 확실한 근거는 신이 아니라, ‘나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신마저도 ‘나의 생각’이 그 존재를 증명하기에, 비로소 존재한다고 했다. 그 다음 만물의 존재도 마찬가지로 ‘나의 생각’이 증명해준다. 따라서 모든 존재의 기본 근거는 ‘나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철학의 제1원리라고 불렀다.
선(禪)의 눈으로 데카르트를 보면
이상이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교과서적인 설명을 요약한 것이다. 두말할 여지없이 데카르트는 근대문명의 토대를 구축한 위대한 사상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데카르트 이후 400여년의 세월이 흐른 이제 돌이켜보면, 근대문명은 그 찬란한 빛만큼 짙은 어둠도 드리우고 있다. 서구의 지성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깊은 사색을 통해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고 있고, 이 글도 그런 고민의 연장선상에 있는 만큼, 이제 데카르트의 사상을 해체적인 입장에서 검토해보기로 하자. 데카르트는 철학과 불교의 대화를 모색하는 우리의 논의를 진행하기 위해 매우 적절한 출발점이다. 그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볼 때, 배울 것이 무척 많다.
확실히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원리는 근대 철학의 출발점으로서 손색이 없다. 근대 철학은 의식의 철학이며, 모든 의식의 철학은 이 원리 위에서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데카르트의 철학원리에 숨은 뜻을 살펴보자.
의식이 성립하려면 반드시 주관과 객관이 있어야 한다. 의식의 주체인 주관이 없으면, 의식은 생기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의식의 객체인 객관이 없어도, 의식은 생기지 않는다. 따라서 주체인 ‘나’가 존재하려면 의식으로 생각을 해야 한다. 그리고 생각은 반드시 객관인 대상을 필요로 한다. 이렇게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한, 주체는 존재하게 된다. 이때 당연히 주체가 생각의 중심을 차지하고, 객체는 중심 주체를 둘러싼 원주를 형성하게 된다. 따라서 의식의 철학은 주체의 철학이 될 수밖에 없다. 의식의 철학인 근대철학은 주체의 확립을 향해 달려왔다.
또한 의식의 철학에서는 의식을 매개로 주관과 객관이 대립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주관은 객관을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주관은 객관을 하나의 대상으로 놓고 파악하여 지배하고, 결국 이용한다. 이용하려고 하는 한, 주관은 객관을 늘 대립적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의식의 근대철학은 주관이 객관을 지배해온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 점은,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주관과 객관이 대립하지 않고 서로 보완적인 관계로 파악되는 음양론 등과는 사뭇 다른 사고방식이다.
프로이트에 의해 무의식(subconsciousness, 잠재의식)이 발견된 뒤로, 데카르트의 한계가 선명히 드러나게 된다. 데카르트가 확립한 철학의 제1원리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의 명제는 의식 안에서만 성립하지, 무의식의 세계에선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의식에는 의식이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의식을 매개로 성립되는 주관과 객관의 대립도 성립되지 않는다.
만일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나의 존재를 보장할 수 없다. 잠이 푹 들었을 때를 생각해보면 된다. 나도 없고, 의식도 없고, 세상도 없다. 그러나 무의식은 여전히 있다. 그래서 꿈을 꾸게 되는 것이다. 빙산의 일각 같은 의식이 잠을 자도, 그 밑에는 거대한 무의식이 살아있다. 다만 의식으로는 무의식을 볼 수 없을 뿐이다.
여기서 데카르트는 인간의 실상을 모두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데카르트는 무의식을 고려하지 않았다. 아마도 시대의 한계라고 해야 하리라. 인간 이성의 밝은 빛에 고무된 나머지, 그 시대 사람들은 인간 속에 도사리고 있는 깊은 심연의 무의식 세계를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 19세기 말에 와서야 서구인들은 인간이 의식뿐만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큰 무의식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학문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물론 프로이트와 융의 공이 크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중세 암흑기로부터 벗어나게 해준 데카르트를 비롯해 무의식을 알게 해준 프로이트와 그 제자들 등 각 시대의 많은 선각자들에게 크게 감사해야 하리라.
한편 의식은 무의식을 알 수 없기에, 의식과 무의식을 합친 인간의 실상을 알기 위해서는 생각만으로는 안 되고, 오히려 생각을 넘어서는 것이 요구된다. 그것은 무엇일까? 의식만으로는 인간의 실상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과연 어떤 방법으로 인간의 진면목을 알 수 있을까?
불교는 바로 이 대목을 지적한다. 불교는 존재의 실상, 인간의 진면목을 알고자 하기 때문에, 의식 너머를 처음부터 인지하고 추구해왔다.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의식의 한계를 알고, 그 너머를 줄기차게 지향해온데 있다. 무려 2천5백 년 전부터 이런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해온 것은 놀랍다. 의식은 생각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자의식으로 발전될 수밖에 없고, 자의식에 사로잡히는 한에는 무의식을 포함한 나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석존은 처음부터 자각했던 것이다. 불교가 ‘깨달음’을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깨달음이란 다름 아닌 의식 너머에 대해 눈뜨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의식 내의 작용이다. 의식 내에서만 살아온 일상의 사람에게 불교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색즉시공’ 같은 말을 상식과 논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불교가 가끔 비현실적인 허무주의가 아닌가 하고 오해받는 이유도 무의식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식의 상식적인 눈으로 볼 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의식에게 무의식은 어렵다. 접근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가 어렵게 보이는 것도 이것 때문이다. 불교는, 더도 덜도 말고,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기를 원한다. 그리고 존재는 의식이 파악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 당장 “내 마음 나도 몰라.”는 말처럼, 우리 안에는 거대한 심연이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특히 선(禪)은 더욱 생각 너머를 지향한다. 그러기 이해서는 생각을 멈추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선은 생각을 멈추는 방법을 찾아왔다. 그 과정에서 선은 생각이 작동하는 원리를 터득하게 되었다. 선에서 보는 생각의 작동 원리는 이렇다.
선에서 보는 생각의 작동원리
생각은 반드시 주관과 객관의 양변이 있어야 한다. 대개 주관은 하나이지만, 객관은 다수가 된다. 주객이 나누어지면, 주관은 반드시 다수인 객관을 판단한다. 판(判)의 한자가 어원적으로 ‘반(半) + 칼(刀)’이 합쳐져 이루어진 것처럼, 그리고 단(斷)도 ‘자르다’는 의미인 것처럼, 주관은 객관을 판단하여 반으로 자르게 된다. 그래야 컨셉(개념)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의 개념을 잡으려면 그것을 다른 것으로부터 떼어내어야 한다. 그리고 다른 것과 비교해야 비로소 개념이 그려지는 것이다.
이때 판단의 자르는 행위는 가치의 기준에 따른다. 그러면 객관은 선/악, 애/증, 피/차, 이상/현실 등 가치를 기준으로 나뉘게 된다. 이렇게 객관이 나누어지면, 주관은 좋고 싫음에 따라 어느 한쪽을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선택한 뒤에는 취사를 하게 된다. 즉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린다. 즉 주객 분리 → 객관 판단 → 선택 → 취사의 과정을 밟게 된다. 이것을 넓은 의미로 ‘이분법적 사고’라고 한다.
의식의 철학은 이 과정을 충실히 밟는다. 특히 객관을 이상과 현실로 나누게 되면, 그 중에서 이상을 취하고 현실을 무시하는 성향을 띠게 된다. 이렇게 해서 플라톤은 객관을 원본인 이데아와 사본인 카피로 나눈 다음에 가치를 전자에 두고 후자를 폄하했다. 서구 전통종교에서는 세상을 창조주과 피조물로 나눈 다음에, 다시 피조물을 분류하여 가치의 서열을 매겼다. 최고 가치는 당연히 창조주에게 있다.
이 단계에서 ‘현존의 형이상학’이 성립하게 된다. 형이상학이란 말은 형이하의 현실과 대비하여 그 위에 있는 어떤 이상을 지향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현존의 형이상학’이란, 주체(나)가 인식을 통하여 현재의 존재감 속에서 이상과 일치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즉 이상과 현실을 나누고, 그 중에서 이상인 신이나 이데아 혹은 도덕원리와 내가 일치하고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일치를 통하여 싫어하는 악이나 카피나 부도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의식 철학의 이상이다.
서구는 사실 플라톤 이후 2천 5백 년 동안 의식의 철학을 통하여 주체를 이상화된 가치와 동일시하고, 그것을 통하여 타자를 지배해왔다. 인간중심주의(humanism)의 이름으로 자연을 파괴해왔고, 신이나 이념의 이름으로 타 민족을 정복해왔다. 자아가 신이나 이데아 혹은 이성 속으로 용해되어 일치하고자 하는 심정의 밑바닥에는 그것의 이름으로 타자들을 정복하려는 자아의 욕심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자아는 이상적 가치의 이름으로 스스로의 행위를 합리화하지만, 그 밑에는 타자를 지배하려는 주체의 사리사욕이 도사리고 있다. 이것이 그동안 모든 도덕주의적, 혁명적 이상사회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의식이 있는 한 주체의 개입을 피할 수 없는데, 그런 주체의 사욕은 결코 항구적으로 실현될 수 없다. 24시간 생각을 지속할 수는 없고, 생각이 없을 때 몸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의식의 이상은 24시간 지속될 수가 없다. 시간을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 시간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의 편이다. 주관이 이상화된 객관과 일치하고자 하는 현존의 형이상학은 겉으로는 거창한 가치의 실현을 목적으로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어디까지나 주체의 사욕을 채우려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이상적 이념의 본 얼굴은 사리사욕의 합리화일 뿐이라는 것을 그동안 역사가 증명해왔다.
많은 불교인들도 이 함정에 빠진다. 자기도 모르게 ‘불법(佛法)’을 이상화시키는 것이다. 그리고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이상화된 객관’인 불법과 하나가 되고자 애쓴다. 불교는 무아(無我)를 기본으로 하는데, 여기서는 결과적으로 이상화된 자아를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역설적으로 자아의 아상(我相)이 더 강화된다. 따라서 불법을 많이 알면 알수록, 불법에 집착하게 된다. 이것을 법집(法執)이라 한다. 자기도 모르게 이 병에 걸려있는 불교인들이 많다. 무아가 되려면, 자기가 알고 있는 불법에 집착해서는 안 되는데, 그것을 보물처럼 여기고 세퍼트처럼 지키는 것을 신앙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특히 선방에서는 자기가 아는 불법으로 허공의 탑을 쌓아놓고는, 그것을 지키는 것을 선수행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많다. 물론 본인들은 꿈에도 이런 사실을 모른다. 그리고 자기가 알고 있는 불법을 지키기 위해 신경이 곤두서있고, 기회만 있으면 그것을 가르치려고 든다. 아상의 포로가 되어 있는 것이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신이 아니라 우상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 어떤 신도 내가 주체가 되어 믿으면, 우상으로 변질된다. 그 믿는 주체는 자신도 모르게 사리사욕에 물들고, 따라서 객체도 오염되기 때문이다. 신을 신이라고 고집하면 우상으로 전락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고지선을 고집하는 많은 도덕주의자들은 결국 독선(獨善)에 빠지게 되어 있다. 독선은 비선(非善) 못지않은 해악을 끼친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가 그 뚜렷한 예다.
의식의 대법(對法)
선에서는 이 사리사욕의 함정을 잘 안다. 그래서 제일 금기시 하는 것이 알음알이를 내는 일이다. 알음알이는 의식을 매개로 하여 자아에 대한 집착과 지식에 대한 집착이 결합하여 생긴 것이다. 선은 세상의 있는 그대로 여여(如如)한 실상(實相)을 보고자 한다. 따라서 의식의 개입을 꺼린다. 의식의 시선에는 반드시 주체의 아집이 개입되고,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실상이 가려지게 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실상은 무의식까지 포함된 것이고, 의식은 무의식에 대해서는 깜깜하다. 선은 ‘생각할 때만 존재하는 자아(ego)’가 아상(我相)이라는 것을 잘 안다. 오히려 그 아상이 시야를 가리기 때문에 진면목을 볼 수 없어서, 생각을 내려놓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상이 무너지고 생각이 끊어졌을 때, 내면에서 비춰 나오는 것을 반야 지혜라고 한다. 선에서는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생각인 반야 지혜를 위하여 사리사욕에 의한 잘못된 생각을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아상이 사라지면, 진면목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아상을 사라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여기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데카르트에게 배워야 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이것은 엄연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다만 그 ‘생각하는 나’가 아상이라는 점을 데카르트는 몰랐던 것이다. 그의 말대로, 아상은 생각할 때만 나타나므로, 아상을 사라지게 하려면, 생각을 멈추면 된다. 주관과 객관은 의식을 매개로 존재하므로, 그 의식의 끈이 끊기면 주관과 객관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주관은 당연히 아상이고, 객관은 주관이 만들어낸 환상으로서의 객관이다. 의식이 없다고 해서 밖의 사물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주관이 만들어낸 가상 이미지로서의 객관이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생각과 함께 주관과 객관이 사라질 때,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사물이 드러난다.
선은 데카르트와는 반대로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고로 아상은 존재하지 않는다.(no cogito ergo ego no sum)’를 강조한다. 아상이 없으면 무아가 되고, 무아가 되면 실상을 볼 수 있게 된다. 선에서 항상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을 보라’고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생각이 없으면 아상이 사라지고, 아상이 사라지면 저절로 진면목이 드러난다는 것은 (불교의 입장에서) 석가모니 이후 수많은 조사들이 증명해왔다. 생각이 일어나면 이미 아상이 생긴다. 아상이 생기면 진면목은 가려진다. 따라서 생각을 멈추고, 생각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선가(禪家)의 3대 조사인 승찬대사가 자신의 깨달음의 경험을 노래한 《신심명(信心銘)》의 첫머리에서 말한 것을 이 글의 문맥에 맞춰 의역해보면 이렇다. “실상을 바로 보는 것은 어렵지 않나니, 오직 의식의 이분법적인 작용만 꺼리면 된다. 예컨대 상대를 미워하거나 사랑하지만 않으면 실상을 명백히 볼 수 있으리라. (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 이것이 깨달음의 내용이다. 즉 생각하지 않으면 무아가 되고, 무아가 되면 우리의 진면목인 본성에서 반야 지혜가 나와서 실상을 분명히 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실상을 바로 볼 수 있는 핵심은 모든 이분법적 사고의 원인인 생각을 멈추는 데 있다. 생각을 멈추려면 그 작동 원리를 알아야 한다. 의식에 의해 나누어진 양쪽을 선에서는 양변(兩邊)이라고 부른다. 넓은 의미에서 양변은 곧 이분법적 사고를 가리킨다. 생각은 반드시 양변을 매개로 하여 움직인다. 곧 앞에서 본대로 의식을 매개로 주관과 객관이 나누어지고, 주관은 다시 객관을 가치판단에 따라 나누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 어떤 경우라도 주관인 에고의 욕심에 따라 세상을 보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양변이 있음은 나누는 주체가 있기 때문이며, 양변에 대한 간택에는 주체의 의도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이런 양변으로 나누어진 이분법적인 사고를 발견하고 지적하여 그 뒤에 숨어있는 에고의 욕심을 들춰내서 사라지게 하는 것이 선수행의 핵심이다.
선에서는 그것을 대법(對法) 혹은 대대법(對對法, 待對法)이라고 부른다. 대법에 의해 에고의 구름을 걷히게 해서 태양인 실상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대법은 에고의 사리사욕을 귀신같이 잡아낸다. 인간 자신의 실상을 선에서는 본성(本性)이라고 부른다. 에고가 무너지면, 인간의 자연(nature)인 본성이 드러난다. 이런 의미에서 에고는 가상(假相)의 나인 것이다. 석가모니는 에고가 무너진 자리에서 드러나는 본성을 불성(佛性)이라 불렀다. 그리고 누구나 본래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 최대의 비밀이자, 석존이 발견한 인간존재 실상의 핵심이다.
선종(禪宗)의 실질적인 설립자인 6조 혜능은 《육조단경》에서 말했다. “내가 그대들에게 법을 설하는 것을 가르쳐서, 근본 종지를 잃지 않게 하리라. (…) 만약 법을 묻는 사람이 있을 때에는 말을 다 쌍으로 해서, 모두 대법(對法)을 취할지니라. 오는 것과 가는 것은 서로 원인이 되어 발생하니, 끝내는 상대를 다 없애서, 다시는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할지니라.”
즉 아무리 좋은 가치라도 그것을 고집하면, 주장하는 주체가 개입되어 치우친 견해(邊見)로 떨어진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렇게 대법을 취하면, 결국 그 어떤 가치도 독선적으로 성립하지 못한다. 객관의 가치가 성립하지 못하면, 주관인 자아도 함께 발을 붙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주객이 함께 무너진 자리에서, 비로소 참나인 불성이 찬연히 드러난다. 선종은 이것을 종지로 삼는다는 말이다.
이 대법은 매우 중요한 세상읽기 방법이며, 특히 데리다는 ‘해체적 독법’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후에 ‘데리다와 선’의 장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자.
대법이란 그 어떠한 고귀한 가치라도, 뒤에는 에고가 도사리고 있음을 밝혀내는 작업이다. 즉 가치를 쌍으로 대해서, 그 주장하는 주체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모든 가치의 뒤에는 에고가 숨어있고, 결국 그것이 주체의 합리화임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렇게 양변을 드러내면, 양변이 함께 무너진다. 그 텅 빈 자리에 비로소 사심 없는 반야 지혜가 비쳐서 나와 세상의 실상이 환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렇게 자아가 무너져서 본성이 환히 비치고 나아가 상항에 맞게 작용하게 되는 것을 중도(中道)라고 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검토는 나중에 ‘하이데거와 중도’의 장에서 다루도록 하자.
이제 우리는 숭산 선사가 미국에서 지식인들을 상대로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앞의 ‘나’는 에고이며, 뒤의 ‘나’는 본성이다.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가짜 자아가 사라질 때, 비로소 진짜 참나가 드러난다는 뜻이다. 우리가 대법에 익숙하게 되면, 선문답에 숨은 의미를 환하게 읽어낼 수가 있다. 데카르트는 우리의 반면교사이자, 불교식으로 말하면, 고마운 역행(逆行) 보살이다.
무의식의 대법
의식의 차원에서 대법은 가치의 뒤에 숨은 에고를 잡아내는 역할을 했다. 이제 에고가 소멸된 중도의 차원에서 대법은 자연의 무의식적 존재방식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분법적 택일을 강요하는 의식의 철학은 인간이 자연에서 벗어나 탈자연적 문명을 건설하는 것이 진보요 지선(至善)이라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 사고방식이 인간중심주의의 욕심을 합리화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런 시각이 그동안 얼마나 자연 환경을 파괴해왔던가. 제국주의가 되어 얼마나 많은 비서구인들을 수탈하고 괴롭혀왔던가. 주관과 객관을 대립적인 것으로 몰고 가는 의식의 철학은 서구 철학 내에서도 이제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자연의 무의식적 존재방식에 의하면, 만물은 상호의존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서로서로 상대 ‘덕분으로’ 생성해가는 것이다. 특히 동양에서는 만물이 서로 밀접하게 얽혀있는 상즉상입(相卽相入)의 존재방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음양이 조화를 이루는 태극무늬(☯), 불교의 만(卍) 자 등이 그 대표적인 상징이다.
나아가 ‘중천에 달이 뜨니 강물마다 달도장이 찍힌다.’는 월인천강(月印千江)이나 혹은 ‘달빛이 바다 위 가득한 잔물결 위에 반사된다.’는 해인(海印) 등으로 표현되는 화엄의 세계가 모두 이러한 대법의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그 세계는 마치 달빛이 모든 이슬 속에 비치고, 동시에 커다란 달이 작은 이슬 속에 머금어지는 것과 같다. 인도에서는 이것을 ‘인드라망’으로 표현하는데, 샹들리에 같은 그 그물의 코는 수정으로 되어 있어서, 하나하나의 수정에는 전체 수정이 모두 투영된다는 것이다. 너무나 눈부신 이미지다.
아르헨티나의 작가 보르헤스도 〈알레프〉에서 우주경(宇宙鏡) 같은 이 세계를 본 경험을 묘사하고 있다. “그때 나는 알레프를 보았다. (…) 그 거대한 순간에 나는 수백만 가지의 황홀하거나 잔혹한 장면들을 보았다. 정말 놀라운 일은, 그 많은 장면들이 한 점에서 한순간에 보았는데도, 서로 겹치지도 않았고, 투명한 실루엣으로 보이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내가 본 것은 한 번에 보았는데, 글로 쓰자니 이렇게 하나하나 나열할 수밖에 없다. (…) 알레프의 직경은 2~3 센티미터밖에 안 되지만, 우주 전 공간이 축소되지 않고 거기 있었다. 각각의 사물의 개수는 무한했는데, 왜냐하면 (거울에 비친 달이 복수가 되는 것처럼) 나는 우주의 모든 지점에서 그것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긍정적 상호 대법의 세계관을 표현하는 하이라이트는 《화엄경》의 〈입법계품〉에 나오는 이야기일 것이다. 놀랍게도 화엄경의 묘사는 보르헤스의 그것과 흡사하다. 주인공 선재동자는 여러 스승들을 찾아 배움을 청한다. 마침내 미륵보살은 동자에게 찬란한 대법의 세계를 보여준다. 깊은 삼매에 들어 바라보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실상이 이렇게 생겼다는 것이다.
“미륵보살이 누각 앞에서 손가락을 퉁겨 소리를 내니 문이 곧 열렸다. 선재가 기뻐하며 들어가니 문은 곧 닫혔다. 선재가 누각 안을 살펴보니, 넓고 크기가 무한하여 허공과 같았다. 한없는 보배로 땅이 되고, 한없는 궁전과 한없는 문과 한없는 창호, 한없는 섬돌, 한없는 난간, 한없는 길이 모두 칠보로 되어 있었다. 또 그 가운데 한량없는 누각이 있었는데, 크고 넓고 화려하기가 허공과 같아서 서로 장애되지도 않고 어지럽게 섞이지도 않았다. 선재가 한 곳에서 모든 곳을 보듯이, 모든 곳에서도 다 이와 같았다. 선재동자는 누각이 이처럼 가지가지로 헤아릴 수 없이 자유자재한 경계를 보고 아주 기뻐했으며 몸과 마음이 유연해져서 모든 의혹이 사라졌다. (…) 잠깐 머리를 숙이자 미륵보살의 힘으로 인해 자신의 몸이 누각마다 두루 하여 있음을 보았고, 갖가지 불가사의한 자유로운 경계를 보았다. (…) 선재동자는 이때 손가락 퉁기는 소리를 듣고 삼매에서 깨어났다.”
이 이야기는 인간이 의식을 내려놓음으로써 깊은 삼매에 들어 시공간을 뚫고 나가면, 이렇게 장엄한 법계가 펼쳐진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선재동자가 본 세상의 참모습은 ‘하나 속에 일체가 있고, 모든 것 속에 하나가 있는(一中一切多中一)’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아름다운 누각이라는 것이다.
결국 의식 차원의 대법은 에고를 잘라내는 부정의 칼날이지만, 무의식 차원의 대법은 만물을 길러내는 자연의 존재방식을 가리키는 대긍정의 자비로운 손길이다. 말하자면 불법의 핵심인 연기(緣起)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 정도로 접고, 자세한 논의는 뒤로 미루도록 하자. ‘연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데리다의 ‘차연(差延, différance)'과의 비교를 통해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주객이 대립되는 의식의 대법’에서 ‘상대가 서로 보완되는 무의식의 대법’으로 넘어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의식의 대법에서 양변에 해당하는 주관과 객관 중에서, 내 힘으로 객관을 바꿀 수는 없다.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주관뿐이다. 그렇다면 의식의 대법을 해소하려면, ‘내’가 바뀌는 수밖에 없다. 객관을 대립적으로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내려놓으면, 주관과 함께 객관도 무너지며 무심이 된다. 그때 의식의 대법은 무의식의 대법으로 전환된다.
무의식의 대법을 드러내는 최고의 표현은 동서양이 공통으로 ‘황금률’이라고 부른다. “네가 받기 원하는 대로 상대방을 대하라.” 혹은 “네가 싫은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지혜로운 말도 있다. “지는 게 이기는 거다.”
참, 데카르트는 스웨덴의 지적이며 혈기왕성한 크리스티나 여왕에게 새벽 5시마다 철학을 가르치다 감기가 들어 폐렴으로 사망했다. 아무리 여왕의 개인교사라고 하지만, 아침 11시까지 침대에서 어기적대던 사람을 꼭두새벽에 깨워 불러냈으니, 북구의 찬 공기에 못 견딜 수밖에. 근대 의식철학의 아버지가 자기 몸이라는 자연을 거스르다 죽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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