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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프로야구 역사에서 데뷔 첫 해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따낸 선수는 3명. 1985년 선동열(1.70 / 리그 평균 3.48)과 2006년 류현진(2.23 / 3.58) 그리고 1992년 염종석이다(2.33 / 4.32). 1985년부터 1993년까지 9년간,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따낸 선수 명단에서 선동열이 아닌 이름은 단 하나. 바로 1992년 염종석이다.
1992년 염종석은 부산고를 졸업하고 계약금 1500만원, 연봉 1000만원에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었다. 191cm 91kg의 거구와 295mm의 왕발을 가진 그는, 또한 롯데 에이스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두꺼운 안경을 끼고 있었다.
OB를 상대한 데뷔전에서 2⅔이닝 4실점(2자책)에 그친 염종석은 2번째 경기 LG전에서 1실점 완투승을 따냈다. 1991년 김원형(쌍방울)과 김태형(롯데)에 이어 역대 3번째로 어린 나이에 따낸 완투승이었다. 1실점은 수비진의 실책으로 인한 비자책점으로, 실책만 아니었다면 역대 최연소 완봉승이었다.
6번째 경기에서 염종석은 완봉승을 만들어냈다. 19세1개월11일의 나이에 거둔 것으로, 김원형의 최연소 기록인 19세1개월9일에는 불과 이틀이 모자랐다.
최고 구속 145km의 패스트볼과 134km에 이르는 고속 슬라이더, 고졸 신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배짱과 선동열이 감탄한 코너워크를 앞세운 염종석은 역시 신인 돌풍을 일으킨 정민철(14승4패 7세이브 2.48)을 제치고 평균자책점 1위(2.33)에 올랐다. 1992년의 리그 평균자책점은 4.32로 1999~2001년을 제외하고는 가장 높았던, 역대 4위에 해당되는 타고투저 시즌이었다(지난해 4.11).
또한 16승까지 이강철과 공동 선두를 지켰던 염종석은 결국 17승(선발 15승, 구원 2승)으로 시즌을 마감, 김영덕 감독의 기록 관리를 받은 송진우(19승8패 17세이브 3.25)와 이강철(18승9패 3.44)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17승은 1983년 김시진의 데뷔 첫 해 기록과 같은 것으로, 1986년 김건우가 세운 18승 신인 최고기록에는 1승이 모자랐다(2006년 류현진이 18승 타이에 성공).
데뷔 후 첫 9승을 모두 완투승으로 따내며 대파란을 일으킨 염종석은 1992년 선발 22경기에서 무려 13번을 완투했다. 그리고 완투한 경기에서 13전 전승을 기록했다(선발 15승 중 13승이 완투승). 또한 완투의 내용 역시 대단히 좋아 13경기 전경기에서 2자책 이하를 기록했다(121이닝 15자책 1.12).
그 해 롯데는 승패 차 +16을 만들어내고 정규시즌에서 3위를 차지했는데, 염종석이 나선 경기에서 만들어낸 승패 차가 +13, 나머지가 +3이었다. '고독한 황태자' 윤학길도 17승(12패 3.25)을 따내고 14번의 완투를 하긴 했지만, 그 해 롯데를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킨 일등공신은 '막내' 염종석이었다.
35경기 204⅔이닝, 22선발 13완투(2완봉), 17승9패 6세이브 2.33 / .229
하지만 염종석의 첫 시즌은 충격적인 혹사의 시즌이었다. 그 해 염종석은 선발등판당 115구를 던졌는데, 데뷔전 3회 강판을 제외하면 118구였다. 120구 이상을 5번, 130구 이상을 3번 던졌으며 140구 이상과 150구 이상도 1차례씩 됐다.
5월 중순 6일간 3차례 구원 등판에 나선 염종석은 다시 하루를 쉬고 나와 149구 완투승을 따냈다. 다음 등판에서는 155구 13회 완투승, 그 다음 등판에서는 135구 완투승. 그 다음 경기까지 4경기 연속 완투승을 질주한 염종석은 다시 '마무리 모드'로 변신, 3일 휴식 후 4일간 3경기에 나서 각각 2이닝, 2이닝, 2⅔이닝 세이브를 따냈다. 그리고 이틀 휴식 후 또 선발 등판에 나섰다.
다시 3일 휴식 후 구원 등판에 나선 염종석은 불과 하루를 쉬고 선발로 나섰다. 심지어 구원 등판 바로 다음날 선발로 나선 것도 2번이나 됐다.
1986년 신인 김건우는 229⅓이닝을 던졌다. 2년차 선동열도 262⅔이닝을 던졌다. 둘은 만 23세였다. 하지만 염종석은 그들보다 4살이 어린 만 19세 시즌이었다. 염종석이 더 문제됐던 것은 그의 슬라이더 비중이 대단히 높았다는 것이다. 염종석은 중요한 경기에서 패스트볼 대 슬라이더 비중이 6대4에 달할 정도로 슬라이더에 의존했다. 심지어 완투한 경기에서 '5회까지 직구 위구로 가다 이후로는 7할을 슬라이더로 던졌다'는 인터뷰도 있었다.
염종석에게 더 치명적이었던 것은 포스트시즌이었다(포스트시즌을 포함하면 235⅓이닝으로 김건우를 추월한다). 염종석은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 깜짝 등판, 완봉승을 따냈다. 포스트시즌 최연소 완봉승이었다.
해태와의 플레이오프 1차전. 롯데는 4-3으로 앞선 7회 선발 윤학길에 이어 염종석을 올렸다. 이틀 밖에 쉬지 못한 염종석은 박정태의 실책으로 동점을 허용했지만 3이닝을 비자책 1실점으로 버티고 구원승을 따냈다.
2,3차전을 모두 패하고 1승2패에 몰린 롯데는 4차전에 염종석을 선발로 냈다. 3일을 쉰 염종석은 완봉승으로 팀을 벼랑 끝에서 구해냈다. 그리고 하루를 쉬고 나선 5차전에서 3이닝 무실점 세이브를 따내 포스트시즌 24이닝 무자책점을 질주했다. '포스트시즌의 왕자' 해태는 1986년부터 1993년까지 9번의 포스트시즌 시리즈에서 단 2번을 패했는데, 그 중 한 번은 염종석에게 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염종석의 몸은 점점 망가지고 있었다.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완봉승을 따낸 후 염종석의 오른손 검지 끝과 손톱 사이는 보기 흉할 만큼 해져 있었다. 그리고 플레이오프 최종 5차전. 염종석은 8회 투구 도중 팔꿈치에 통증을 느꼈다. 선동열 이후 최고의 우완 정통파 투수라던 염종석은 그렇게 산화했다.
1992년 염종석이 태운 불꽃은 너무도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결코 태워서는 안 되는 슬픈 불꽃이었다.
첫댓글 생각보다 더 심했네요..ㅠ 구원 등판해서 실점하고 다음날 선발로 2실점 완투했었던거 같은데.. 그 경기가 젤루 기억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