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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찻집(자유게시판) 스크랩 남창 우민사 Ⅳ- 우리나라 구산(九山) 성립에 미친 영향 ②
눌인 양도영 추천 0 조회 58 11.05.24 20:29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남창 우민사 Ⅳ- 우리나라 구산(九山) 성립에 미친 영향 ②

 

 

한국에서 선(禪)의 수용

중국의 선(禪) 수용은 보리달마(菩提達摩)가 중국에 건너와서 시작되었다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구법승들이 중국으로 직접 가서 배워온 것이다. 이들은 주로 신라시대에 당나라로 건너가 불법을 얻어왔는데 구법(求法)을 위하여 당(唐) 나라에 간 수많은 신라의 승려들을 나열해 보았다.

 

 

당(唐)에 간 신라의 승려

 

의상(義湘), 자장(慈藏), 원측(圓測), 도증(道證), 명랑(明朗), 혜통(惠通), 혜초(慧超), 법랑(法朗), 신행(神行), 도의(道義), 체징(體澄), 혜조(慧照), 혜철(惠哲), 무염(無染), 현욱(玄昱), 도윤(道允), 홍척(弘陟), 범일(梵日), 이엄(利嚴), 충담(忠湛), 경보(慶甫), 찬유(璨幽) 등이 그들이다. 중국에서 계속 머문 분도 있지만 대부분 귀국하였고, 귀국 시 다량의 불경(佛經)을 가지고 돌아왔다. 귀국 후 계속 불교경론 연구와 선사상(禪思想) 전파에 힘썼다. 또 귀국 후 명산에 절을 세우고 불교 종파를 형성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사진은 남창 우민사(佑民寺)에 세워진 대한불교조계종조도의조사비 전면 

 

 

이들은 불교경전과 선사상 뿐 아니라 의학(醫學), 산학(算學), 역학(易學), 율학(律學), 문학(文學), 건축(建築), 미술(美術), 공예(工藝) 등 각 방면의 기술을 보고 익힌 후 귀국하여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당의 건축술을 배워 신라 예술의 극치라고 자랑할 수 있는 토함산(吐含山) 석굴암(石窟庵)과 불국사(佛國寺)의 다보탑(多寶塔)과 석가탑(釋迦塔) 등을 남겼다. 그들이 남긴 승탑(僧塔)들은 훌륭한 문화유산으로 남아있으며, 그들의 탑비(塔碑)는 당시의 사회생활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 세계적으로도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든 고려불화(高麗佛畵) 등 회화(繪畵) 작품을 남겼다.

 

 

오교구산(五敎九山)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전기까지 형성된 불교 종파의 총칭을 오교구산(五敎九山)이라 한다. 중국의 교종법통(敎宗法統)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5교는 교학을 바탕으로 한 교종의 5종파이다. 즉 열반종(涅槃宗), 계율종(戒律宗), 법성종(法性宗), 화엄종(華嚴宗), 법상종(法相宗)를 통칭한다. 이 중 계율종은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慈藏)통도사를 중심으로, 법상종은 신라 경덕왕 때의 진표(眞表)금산사를 중심으로 창종했다고 알려져 있다. 열반종은 신라 무열왕 때의 보덕(普德)경복사를 중심으로, 성종(性宗)이라고도 하는 법성종은 신라 문무왕 때 원효(元曉)분황사를 중심으로, 화엄종은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당나라에 가서 화엄교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부석사를 중심으로 창종했다.

 

 

구산선문(九山禪門)

9산은 선종(禪宗)에 속하는 9개의 사찰을 의미한다. 보통 신라시대 초기선을 <구산선문(九山禪門)>이라 하지만, 구산선문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선문도 있고 고려시대에 개산되었던 선문(禪門)도 있으므로, 구산선이라는 용어는 고려 중기에 살아남은 산문선(山門禪)이다. 신라시대의 선을 산문선(山門禪)이라고 하는 이유는 중국 초기의 선과는 달리 한국 초기의 선은 다양한 산문이 각각 독자적으로 개산입종(開山立宗)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라시대의 선문은 구산(九山) 이상의 산문이 있었으나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라 말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선법은 고려에 들어와서 구산문으로 선파(禪派)를 형성하였다. 즉 신라 말에 전래된 남종선이 실상산문(實相山門), 가지산문(迦智山門), 동리산문(桐裡山門), 사자산문(師子山門), 사굴산문(??山門), 봉림산문(鳳林山門), 성주산문(聖住山門) 등 7대 선문이 일어났다. 고려대에 와서 진철대사(眞澈大師) 이엄(利嚴)이 수미산문(須彌山門)을 열고, 정진대사(靜眞大師) 긍양(兢讓)이 희양산문(曦陽山門)을 이룩함으로써, 비로소 구산선문(九山禪門)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모두 승려들이 중국에 가서 달마선법을 받아와 9개 산문(山門)을 중심으로 종풍(宗風)을 일으킨 곳이다. 이곳들에는 우리나라 미술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인 부도(浮屠;승탑)들이 많이 남아있다. 구산선문(九山禪門)이 우민사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또 그들이 남긴 물질문화는 어떤 것이 있는지를 살펴보자.

 

 

(1)가지산문(迦智山門)

전남 장흥 보림사에 있는 보조선사탑비(普照禪師塔碑)에는‘달마는 당나라의 제1조가 되었고 우리나라는 곧 도의대사(道義大師)를 제1조, 염거선사(廉居禪師)를 제2조로 삼고 우리 스님(普照國師 體澄)을 제3조로 한다.’라 하고 있다. 개산조 도의의 법호는 명적(明寂), 시호는 원적(元寂)이다. 신라 37대 선덕왕 5년(784) 당으로 건너가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 서당지장(西堂智藏)에게서 법을 얻고 도의라 호를 고쳤다고 한다. 헌덕왕 13년(821)에 귀국하여 선법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당시 신라에서는 선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설(魔說)이라 비방하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도의는 설악산(雪岳山) 진전사(陳田寺)에 칩거하며 그 법을 제자 염거(廉居)에게 전하였다. 지금은 절터만 남아있는 진전사지(陳田寺址)에는 보물 제439호로 지정된 부도가 하나 있다. 도의선사의 묘탑으로 추정되기에 그 명칭도 <양양 진전사지 도의선사탑(襄陽 陳田寺址 道義禪師塔)>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석탑을 보고 있는 듯한 기단의 구조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도의선사의 묘탑으로 단정한다면 우리나라 석조 승탑의 첫 출발점이 된다.

남창 우민사(佑民寺)에 세워진 대한불교조계종조도의조사비

 양양 진전사지 도의선사탑(襄陽 陳田寺址 道義禪師塔;보물 제439호) - 사진출처:문화재청

 

도의에게 법을 이어받아 가지산파(迦智山派)의 2대 조사(祖師)가 된 염거(廉居;?~844)는 주로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머무르면서 선법의 홍포에 주력하였고, 사교(邪敎)를 배척하였다. 항상 일심(一心)을 닦고 밝혀서 삼계(三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야 함을 강조하였다. 선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었던 시대에 오직 일념무주(一念無住)만을 의지하고 지내다가, 체징(體澄)에게 법맥을 전하여 가지산파를 대성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뒤 입적하였다. 그의 탑은 원래 원주군 지정면 안창리 법흥사지(法興寺址)에 있었으나 현재 국보 제104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전흥법사염거화상탑(傳興法寺廉居和尙塔)>이라는 명칭의 이 부도가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부도 중 제작 연대가 가장 오랜 탑지(塔誌)가 발견되었다는 데 있다. 이전 때 발견된 탑지(塔誌)는 동판에 새긴 것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이를 통하여 통일신라 문성왕 때인 844년 염거화상이 죽은 후 마련됐음이 분명하게 밝혀졌다. 그래서 우리나라 승탑의 전형인 팔각원당형이 이 탑에서 완성되었음도 알 수 있다.

 

전흥법사염거화상탑(傳興法寺廉居和尙塔;국보 제104호) - 사진출처:문화재청

 

 

염거의 제자 중 보조체징(普照體澄:804~880)은 가지산파(迦智山派)의 제3조(祖)로 가지산파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성은 김씨(金氏)로 웅진(熊津: 公州) 출신이다. 어려서 출가, 화산(花山) 권법사(勸法師) 밑에서 불경을 공부하였으며, 827년(흥덕왕 2) 가량협산(加良峽山) 보원사(普願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 뒤 설산(雪山) 억성사(億聖寺)에 있는 염거(廉居)로부터 법인(法印)을 받았다. 837년(희강왕 2) 정육(貞育)·허회(虛懷) 등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전국의 선지식(善知識)을 만났으나, 그의 조사(祖師)인 도의(道義)가 물려 준 것 이외의 법(法)은 더 구할 것이 없음을 깨닫고 840년(문성왕 1) 귀국하였다. 무주(武州: 光州)의 황학난야(黃壑蘭若)에 머무르다가 859년(헌안왕 3) 가지산(迦智山)에 보림사(寶林寺)를 창건하고 도의(道義)의 종풍(宗風)을 부흥시켰다.

가지산(迦智山)에 보림사(寶林寺).- 2004년 촬영

 

860년 당대 명필 김언경(金彦卿)이 재가제자(在家弟子)가 되어 입문하고 비로자나불을 주조 안치하였다. 880년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입적하였는데, 시호는 보조선사(普照禪師), 탑호(塔號)는 창성(彰聖)이다. 김영(金穎)이 지은 탑비(塔碑)가 국보 제158호로 지정되어 전라남도 장흥군 보림사터에 남아 있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一然:1206~1298)도 이 산문의 승려이다. 가지산파(迦智山派)에 속하는 사찰로는 청도운문사(淸道雲門寺)·군위인각사(軍威麟角寺)·언양석남사(彦陽石南寺)등이 있다.

국보 제117호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長興 寶林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불상 왼팔 뒷면에 신라 헌안왕 2년(858) 무주장사(지금의 광주와 장흥)의 부관 김수종이 시주하여 불상을 만들었다는 글이 적혀 있다. 김언경은 김수종(金遂宗, 邃宗)과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도 있다.- 2004년 촬영

 

보물 제157호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 - 2004년 촬영

보물 제158호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 2004년 촬영

 

 

(2)실상산문(實相山門)

실상산문(實相山門)의 개산조(開山祖)인 홍척(洪陟)의 호는 홍직(洪直). 실상화상(實相和尙)·남한조사(南韓祖師)·증각대사(證覺大師)·남악조사(南岳祖師)라고도 한다. 생몰년 미상. 헌덕왕 때 입당하여 가지산문의 종조인 도의와 마찬가지로 서당 지장(西堂 智藏)의 문하에서 법을 얻어 돌아왔다. 흥덕왕 원년(826)에 돌아온 홍척은 남악(南岳) 즉 지리산에 머무르면서 불법을 폈다. 828년 실상사(實相寺)를 창건하였으며, 이곳에서 선법을 일으켜 많은 제자와 신도들이 귀의했다. 후에 흥덕왕과 태자 선강(宣康)이 홍척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산문(山門)의 터전을 가장 먼저 닦아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제일 먼저 개산(開山)한 선맥(禪脈)으로 꼽히고 있다. 도의선사와 더불어 <북산의·남악척北山義南岳陟>, 즉 설악산의 도의, 지리산의 홍척으로 불린다는 것은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경상북도 문경 봉암사(鳳巖寺) 지증대사탑(智證大師塔)의 비문에 나타나 있다. 시호는 증각(證覺), 탑명은 응료(凝寥)이다. 문하에 수철(秀澈)이 있어 실상산문을 크게 일으켰다.

 

 

지금 실상사에는 홍척의 탑이 보물 제38호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南原 實相寺 證覺大師塔)으로, 그의 탑비가 보물 제39호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비(南原 實相寺 證覺大師塔碑)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또 그의 제자 수철(秀澈, 817-893)의 탑과 비가 보물 제33호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南原 實相寺 秀澈和尙塔)과 보물 제34호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南原 實相寺 秀澈和尙塔碑)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비문에는 실상사에서 스승 홍척에게 법을 얻었으나 심원사(深源寺)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고 되어 있다. 또 제자였던 편운(片雲)의 부도에는 그가 홍척의 제자라고 되어 있다.

나의 블로거 전북의 명찰 구산선문 최초의 가람 남원실상사에 상세히 소개해 두었다.

보물 제38호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南原 實相寺 證覺大師塔) - 2007년 5월 촬영

보물 제39호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비(南原 實相寺 證覺大師塔碑)- 2007년 5월 촬영

보물 제33호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南原 實相寺 秀澈和尙塔)- 2007년 5월 촬영

보물 제34호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南原 實相寺 秀澈和尙塔碑) - 사진 문화재청

 

(3)동리산문(桐裡山門)

개산조 혜철(惠哲) 785년(원성왕 1)∼861년(경문왕 1)의 성은 박씨(朴氏)이고 경주 출신이다. 자는 체공(體空), 호는 혜철(慧徹). 혜철(惠哲)은 법명이며, 동리화상(桐裏和尙)이라고도 한다. 어려서 출가하여 영주 부석사에서 화엄학을 익히고 22세 때 비구계를 받았다. 선법이 전해지기 전인 814년(헌덕왕 6)에 당나라로 가서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 서당 지장(西堂 智藏)의 문하에서 수선하였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제9권에 의하면, 지장(地藏)의 법통을 전수받은 자 넷 가운데 셋이 신라인으로서 계림의 도의선사(道義禪師), 신라국의 홍직선사(洪直禪師)와 혜선사(慧禪師)라고 적고 있다. ‘혜’자는 그의 법호인 혜철(慧徹)의 기록으로 전한다.

 

 

그의 탑비에는 그가 지장을 만나서 한 말이 남아있다.“외국인으로 중국 땅을 멀다 않고 와서 법화(法化)를 청하였다. 뒷날 설하는 바 없이 설하고(無說之說), 법이 없는 중에 있는 법(無法之法)이 해동에 전해지면 더할 수 없는 다행이겠다.”

 

지장이 입적하자 공공산(?公山)을 떠나 중국의 명산대찰(名山大刹)을 두루 순례하다가 839년(문성왕 1)에 귀국하였다. 당시 만백성과 군왕이 그의 귀국을 반기는 상황을 태안사(太安寺) 비문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산중에 사람이 없더니 오늘에야 돌아오도다. 나라가 보물을 얻음이라. 불타의 지혜와 달마의 선법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

 

귀국 후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인 무주(武州) 동리산(桐裏山) 태안사(太安寺: 지금의 泰安寺)에 머무르면서 교화를 폈다. 이때 문성왕은 때때로 사신을 보내어 설법과 정치의 정도를 청하여 물었다. 861년에 입적하자 왕이 적인(寂忍)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탑명은 조륜청정(照輪淸淨)으로서 872년에 세워졌으며, 현재 곡성군 죽곡면의 태안사에 국보 제421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 숙종 때 왕사(王師)이며 풍수도참설로 유명한 도선(道詵:827~898), 여선사(如禪師)와 함께 동리산문의 3조로 일컬어진다. 문도(門徒)로는 광자대사(廣慈大師) 등 수백인이 있어 가풍을 크게 일으켜 선문 9산 중의 동리산문을 형성, 개창조가 된 것이다.

 

지금 태안사에는 적인선사 혜철(惠哲)의 탑이 보물 제273호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탑(谷城 大安寺 寂忍禪師塔)이 남아 있다. 이와 함께 태안사를 중창해 크게 빛낸 광자대사(廣慈大師) 윤다(允多)의 부도가 보물 제274호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谷城 大安寺 廣慈大師塔)으로, 그의 탑비가 보물 제275호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谷城 大安寺 廣慈大師塔碑)으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보물 제273호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탑(谷城 大安寺 寂忍禪師塔) - 2011년 4월 6일 촬영

보물 제274호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谷城 大安寺 廣慈大師塔) - 2011년 4월 6일 촬영 

 보물 제275호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谷城 大安寺 廣慈大師塔碑) - 2011년 4월 6일 촬영

 

(4)봉림산문(鳳林山門)

개산조 현욱(玄昱;788∼869)는 병부시랑(兵部侍郞) 김염균(金廉均)의 아들이다. 어렸을 때 출가, 808년(애장왕 9) 구족계(具足戒)를 받았고, 824년(헌덕왕 16) 입당(入唐)하여 마조(馬祖)의 문인(門人) 장경(章敬) 회휘(懷暉)에게 법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장경은 818년에 입적하였기 때문에 장경으로부터 법(法)을 전하여 받았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볼 때 신빙성이 없다. 그러나 『조당집(祖堂集)』에는 분명히 장경의 법을 이은 사법제자(嗣法弟子)임을 명기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입당 연대는 마땅히 헌강왕대 초기, 즉 장경이 입적하기 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현욱은 희강왕 2년(837)에 왕자 김의종(金義宗)을 따라 귀국하였고, 남악(南岳) 실상사(實相寺)에 들어갔다. 840년(문성왕 2) 혜목산(慧目山) 고달사(高達寺)로 거처를 옮겼는데, 그 산 이름을 따서 혜목산화상(慧目山和尙)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하였다. 신라 후기인 764년(신라 경덕왕 23년)에 창건된 고달사는 신라 선종 구산의 하나인 봉림산파의 선찰(禪刹)로서 고달선원으로도 불렸다. 이곳에는 국보 제4호로 지정된 여주 고달사지 승탑(驪州 高達寺址 僧塔)을 비롯하여 보물 제6호인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驪州 高達寺址 元宗大師塔碑), 보물 제7호인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驪州 高達寺址 元宗大師塔) 그리고 보물 제8호인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驪州 高達寺址 石造臺座) 등 훌륭한 석조유물들이 많이 남아있다.

국보 제4호 여주 고달사지 승탑(驪州 高達寺址 僧塔) - 2010년 11월 21일 촬영

국보 제4호 여주 고달사지 승탑(驪州 高達寺址 僧塔) - 2010년 11월 21일 촬영

보물 제7호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驪州 高達寺址 元宗大師塔) - 2010년 11월 21일 촬영

  보물 제6호인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驪州 高達寺址 元宗大師塔碑)- 2010년 11월 21일 촬영

 보물 제8호인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驪州 高達寺址 石造臺座)- 2010년 11월 21일 촬영

 

현욱의 제자 중에는 경남 창원에서 봉림사(鳳林寺)를 세우고 선풍을 드높인 진경 심희(眞鏡 審希;855∼923)가 있다. 성이 김씨(金氏)인 심희(審希)는 9세에 출가하여 혜목산(惠目山) 현욱(玄昱)의 제자가 되었다. 873년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명산을 순방하다가 888년(진성여왕 2)부터 송계산(松溪山)에 머물면서 좌선에 몰두하였다. 그 뒤 설악산으로 옮겼다가, 강릉에 있는 탁산사(託山寺)로, 얼마 뒤 경상남도 창원으로 옮겼는데, 이곳에 선우(禪宇)를 창건하고 봉림사(鳳林寺)라 하였다. 봉림산문은 이때부터 그 선풍이 크게 선양되었다. 현욱의 선과 그 문하를 봉림산파(鳳林山派)라고 부르게 된 것은 그때의 일이었다. 그의 법맥을 이은 자적(慈寂)은 이 산문을 더욱 융성하게 하였다.

 

심희는 68세, 법랍 50세로 입적하였다. 시호는 진경대사(眞鏡大師), 탑호(塔號)는 보월능공(寶月凌空)이며, 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鳳林寺眞鏡大師寶月凌空塔: 보물 제363호)과 탑비(보물 제363호)가 현재 경복궁에 있다.

 

 

지금 봉림사(鳳林寺)는 없어지고 그 터만 경상남도 기념물 제127호 <봉림사지(鳳林寺址)>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는 건물터, 연못, 탑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상북초등학교내의 삼층석탑이 여기에서 반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보물 제362호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昌原 鳳林寺址 眞鏡大師塔) - 사진출처:문화재청

보물 제363호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昌原 鳳林寺址 眞鏡大師塔碑) - 사진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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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05.25 09:38

    첫댓글 한국불교를 제대로 알려면 중국불교를 알아야 하고, 중국불교의 격의와 교상판석을 넘어서야 한다고 누가 말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눌인님의 아카데믹한 기록에 경탄하면서 잘 읽었습니다.

  • 작성자 11.05.25 09:09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 계속 공부하고플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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