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양반인가?
(뼈대를 살피다)
미루어 오던 일에 용기를 내었다. 아내에게 묻는다. 창녕 시조 묘제에 함께 갈 수
있는지를. 여성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일이다. 묘사라면 주로 남성들의 몫이어서
끄집어내기를 망설인다.
의외의 반응을 보인다. 가겠단다. 고맙다. 이걸 제안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작년에 처음 참석해 보니 전국 각지에서 모인 일가들이 인산인해이다. 예상 외로
여성들도 많았다. 말로만 하던 '뼈대 있는 집안' 을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
요즘 같이 바쁜 세상에 조상 생각할 겨를이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뿌리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면 좀 더 겸허해 질 수 있다. 굵은 뼈대를 발견했는지 아내의
표정이 무척 밝아 보였다.
(의관을 정제하다)
나도 이제부터 진짜 어른 반열에 오르나 보다. 예전 내가 보아온 어른들의 모습을
서서히 닮아가고 있다. 현직에서 은퇴하여 종중 일에 눈 돌리기 시작하자 중책들이
내게로 몰린다.
재산 관리에서부터 선대 묘제에도 참석한다. 이런 곳에서는 양복이 어울리지 않는다.
몇 차례 입어봤지만 영 품세가 나지 않았다. 달리 생각해 보면 조상에 대한 예의
범절에서도 어긋나 보여 맘을 바꿔 먹었다.
아내와 서문시장에 들러 도포와 유건을 샀다. 입어보니 대단한 위세를 자랑한다.
이렇게 라도 의관을 정제해야 조상님이 알아줄 게 아닌가. 이제부턴 완전한 어른의
반열에 오르는 것 같다. 조상님도 내 모습을 무척 반겨 주리라 믿는다.
(양반 가문은 뭔가 다르다)
누구나 위급한 순간 경험이 있을 것이다. 길가다 생리적인 상황을 당해도 난처하다.
법원 가는 길이다. 공영 주차장은 이미 만원이 되어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 급히
주택가로 올라갔지만 주차가 마땅찮다.
재판 시간은 다가오고 도리가 없어 어느 식당 앞에 세웠다. 명함은 남겼지만 무척
불안하다. 나중에 당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재판이란 게 쉽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진행하다 보면 몇 시간은 보통이다.
휴대폰이 계속 떨고 있다. 틀림없는 식당이다. 중간에 나갈 수도 없다. 끝난 후
달려갔더니 주인이 기다린다. 겁먹은 내게 의외의 말을 한다. "일가라서 봐 줍니다"
창녕 성씨 가문은 뭔가 달라도 다른가 보다.
첫댓글 옛 조상님 얼을 잇는 모습이
자랑스럽습니다. 특히 사모님이 훌륭합니다
나이들면서 조상 숭배는 의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러주신 산과 전답 관리도 우리의 책임이니까요.
여기에 아내가 힘을 보태주면 더욱 고마운 일이지요.
최 교수님도 종사 많이 돌보고 계시지요?
조상 숭배에 대한 애착과 마음가짐 그리고 남다른 실천에 존경을 표합니다. 저도 처음이 5살이라는 걸 기억하는데, 가친의 두루마기를 잡고 안동의 진산인 학가산과 봉정사가 위치한 천등산 줄기의 시조묘소에 추향제를 다니고 있습니다.안동의 삼태사, 파조묘, 그리고 저의 문중이 단종의 외갓집이다보니 문종의 장인이신 저의 조상께도 가친을 따라 참배하고 있습니다. 부끄럽게도 가친이 돌아가신 이후로 어느 묘소는 예전같지 않은 것도 솔직한 고백입니다. 훌륭한 성병조 수필가님, 문중과 후손에게 존경의 대상입니다.
선조님께서 많은 재산을 물려 주셨지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젊은이들은 종사에 참여하기를 꺼립니다. 그러다 보니 전답이 뿔뿔이
흩어져 소유권조차 희미해 지고 있습니다. 누구도 관심 갖지 않으면
주인 없는 땅처럼 버려질 수 밖에 없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외면하기 힘들어 참여하다 보니 자꾸 깊숙히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가 이처럼 사는 데는 나의 노력도 있지만 선조들께서 근검절약한
덕분이기도 하지요. 권 선생님은 저보다도 더 기여를 많이 하실 겁니다.
조상님을 잘 모시니
그런 배려도 받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