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 적(許 積:1610~1680)-아들 때문에 패망한 강직한 정승
부인: 광산이씨,
현종12년(1671) 5월 영의정에 오른 허 적은, 본관이 양천, 부사 허한(許한)의 아들로 오늘날의 충북 중원 엄정면 괴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인조 15년(1637)년 28세로 문과에 올라 검열·부수찬 등을 지내고 의주부윤으로 나가, 평안도 관내의 군량을 관리하는 관향사(館餉使)를 겸하였다. 통상 평안감사가 맡는 관례를 깨고 허적이 의주부윤으로 관향사를 맡았었다. 이어 경상도관찰사로 승진하였는데, 1647년 일본사신 다이라(平成幸)를 맞았다가, 외국 사신 접대 규정을 위배하였다는 사소한 물의로 그만 파직 당하고 말았다. 인조의 뒤를 이어 효종이 등극하자 허 적은, 호조참판으로 기용되고 이어 곧 호조판서에 올랐다가, 형조판서에 이르렀고, 현종3년(1662) 7월 영의정 정태화가 진주사로 청나라에 깔 때 부사로 동행 한 뒤, 1664년 우의정에 오르고, 1666년 9월 사은사 겸 진주사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 좌의정이 되었다. 현종8년(1667)년 3월 좌의정 직을 사임한 허 적은, 이듬해 3월 다시 복직하였다가 현종12년 62세 나이로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그 이듬해 당파를 달리하는 우의정 송시열의 논척을 받아 영중추부사로 밀려났는데, 현종15년(1674) 2월 효종비 인선(仁宣)왕후가 죽어, 복상(服喪) 문제가 불거지자, 허 적은 기년설(朞年說)로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한 서인들을 눌러, 다시 영의정이 되어 남인정권을 회복하였다. 현종이 승하하고 새 왕으로 숙종이 등극한 초기였던 1676년, 허 적은 사신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5도체찰사가 되고, 재정의 고갈에 대비하여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통용 할 것을 주장, 경제개혁을 단행하였다. 숙종의 총애를 받은 허 적은 나이 70에 이르러 기로소에 들고 궤장을 하사 받는 등 일신에 영화가 넘쳤다. 그러나 이를 슬기롭게 수용 할 줄 몰라 그만 흠을 찍고 말았다. 숙종6년(1680) 청백리였던 그의 조부 허 잠(許潛)에게 시호가 내려지니, 이는 가문의 영광이라, 허 적은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궁중의 집기 몇 개를 내와 쓴 과오를 저질러 그만 말썽이 번지니, 허 적은 처벌을 피 할 수없게 되고 말았다. 거기다 마침 그의 측실 아들 허견(許堅)의 모역사건까지 덮치니, 그는 역도의 아비라는 고리를 벗을 수 없어, 사약을 받아 허망하게 죽고 말았다.
숙종6년(1680) 5월의 일이니, 허 적의 나이 71세, 뒤에 숙종은 허 적의 허망한 죽음을 애매하게 여겨, 그들 일가를 헐뜯어 고변한 어영대장 김익훈(金益勳), 병조판서 이사명(李師命)을 죽여 버리고, 허적의 관작을 복구해 주기는 하였으나, 이미 쑥대밭으로 변한 가문과 저승 식구가 돼버린 허적에게는 부질없는 일이었다. 김익훈 등은 허적 등의 남인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인조의 손자인 복선군(福善君)이 허견과 내통, 반역을 기도한다고 고변, 이른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는 엄청난 정변을 일으켜 정적들을 하룻밤 새에 쓸어버린 간교한 인물들이다. 허적 부자의 처형과 함께, 허 적의 친아우 질(秩), 서(庶)아우 능(稜)·집·뇌·노(櫓)·제(梯) 등 6형제와, 허견의 아우 허 후와 조카 허약, 이들이 모두 거제도에 위리 안치되니, 가문이 일시에 통째로 망가진 셈이다. 허 적은 적자가 없어 허견이 적실 아들 노릇을 하며, 관직이 경서를 인쇄 보급하는 관청인 교서관의 정자(正字)였는데, 행실이 엉망이었다. 그는 왕이 신임하는 아버지의 세력을 믿고, 황해도에서 수천그루의 나무를 베어 날라 호화주택을 짓고, 유부녀를 잡아 욕보이는 등 건방을 떠니, 천심이 가만있질 않았다. 잘 나갈 때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지혜가 모자라 얻은 업보였다. 거기다가 허견의 처 홍씨는 사가로 따져 숙종에게는 서 이모(庶 姨母)였는데, 남편을 본받았던지 허견의 외사촌 아우 유철(柳澈)이라는 사내와 붙어, 세상을 발칵 뒤집고는 목 졸려 죽었다. 이런 행태들이 무고한 고변의 좋은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허적 자신은 강직한 신하로 조야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일찍이 사헌부에 있을 때, 이경석 이조·이시백 병조 두 판서를 문무의 인사행정을 어지럽힌다며 사형에 처할 것을 주청, 임금이 뒤로 나자빠질 듯 놀라기도 했다. 그가 전라감사였을 때는 후궁 조씨가 보낸 궁노가 감영에 찾아와 봉물을 바치기를 요구하며 목에 힘까지 주니, 허 적은 궁노를 그 자리에서 때려죽이고 중얼거렸다. “더럽지 않으면 파리 떼가 붙지 않는 법이다” 허 적은 식견이 넓고 총명 강직하여 그를 신임했던 현종이 34세로 임종할 때, 14세 나이로 등극하는 새 왕을 잘 보살펴 달라는 부탁을 했었기에, 숙종에게 충성을 다하다가 자신의 작은 허물, 아들의 방자함, 정적의 무고가 삼위일체가 되어, 패가망신 당한 꼴이 되고 말았다. 숙종15년(1689) 완전히 신원(伸寃)된 허 적의 묘소는, 충청북도 중원 소태면 오량에 있고, 그와 그의 아버지 허한을 받드는 사우(祠宇)도 세워졌다.
[출처] 허 적(許積:1610~1680)-아들 때문에 패망한 강직한 정승(하동짱)
허 적 선생 영정
허적(광해군1610∼숙종1680)은 조선 숙종 때의 인물로 자는 여차(車), 호는 묵재(默齋)·휴옹(休翁)이며, 본관은 양천(陽川)으로 부사(府使) 허한의 아들로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에서 태어났다.
평안감사를 거쳐 현종 8년(1667)에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숙종 4년(1678) 재정고갈(財政枯渴)을 막기 위하여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사용케 하였다. 식견이 넓고 총명했으며, 남인(南人)으로서 서인(西人)인 송시열 등과도 가까이 지냈다.
허적의 영정은 의자에 앉아 옆면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호랑이를 밟고 있는 모습이다.
영정의 크기는 길이 162㎝, 폭83.5㎝(표구상태 236×97㎝)이다. 허적의 영정은 아버지인 허한의 영정 좌측에 봉안되어 있으나 다소 퇴락하였다. 허적의 묘소는 소태면 오량리에 자리하고 있다. [출처] 허 적(許 積:1610~1680)-아들 때문에 패망한 강직한 정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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