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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호치민> - 한대수
발사체 추천 2 조회 267 14.09.22 02:29 댓글 5
게시글 본문내용

 <호치민> - 한대수

 

 


호치민에 대해서 말하자면 참 재미있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학자의 집안이고
불란서 점령 당시에 왜 서양세력이 자기 나라를
이렇게 장기간 동안 점령하느냐

거기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또 워낙 문학가 집안이니까
여러 책을 보면서 연구를 하게 되죠

호치민 호치민 호치민

그래서 적을, 적을 이기려면 적을 알아라 라는
요런 명언이 있으니까
불어를 열심히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아 그래요)

그런데 불란서를 가야 되겠는데 유람선의 요리사
조수로 취직하게 됩니다

불란서에서 불란서 공산주의자들과
접촉이 이루어지고
또 거기에서 맑시즘을 배웠고
드디어 어떠한 계기에서 모스크바를 방문합니다
(아 그래요)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 대학교에 입학해서
과연, 제국주의, 자본주의 요런데 대해서 공부를 하게 됩니다

거기다가 러시아의 힘을 얻고 중국에 또 이사를 갑니다
여러가지 민중의 고통, 민중의 핍박, 또 프롤레타리아
거기에 대해서 배우고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옵니다

미국이 이젠 등장하는데
그 부패된 고딘디엠 정부를 지원하면서
반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아주 지속된 전쟁의 끝없는 폭격
약 3200일의 끝없는 폭격을 밤낮으로 당하면서
미국의 강력한 군사력을 이겨낸 유일한 사람입니다 (아 그래요)

호치민 호치민 호치민

you are a nguyen ai quoc(구엔아이콱),
you are a phan chu trinn(판추치린)
you are a nguyen sinn cung(구엔싱쿵),
you are a nguyen tat tranh(구엔타트랑)
you're not a chung ryang lee(청량리),
you're not a chang kai shek(장개석)
you're not a jung tae choon(정태춘),
you're not a zhou en lai(주은래)
you are a van tien dung(반티엔둥),
you are a hoang quang binn(황광빈)
you're not a sun yat sun(손문),
you're not a park jung hee(박정희)
you're not a shin bal dae(신발대),
you're not a pal dae gi(팔대기)
you are a nguyen ai quoc(구엔아이콱),

you are a phan chu trinn(판추치린)

    

 


* 한대수 '고민' 앨범 커버

 

* "젊은이들은 인터넷으로 히피 운동중"  
  - <'최후의 히피' 인터뷰> '행복의 나라'의 가수 한대수  

  

 

한대수(55)는 한국가요계에서 그 누구보다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인물이다.
  

 


1968년에 ‘행복의 나라’를 시작으로 포크를 기초로 한 저항(민중)가요를 한국에서 처음 탄생시켰고 미국으로 홀연히 유학을 떠났다가 갑자기 돌아와 해군으로 복무했으며 언론인으로 신문사에서 기자생활을 하기도 했다.
  

 


  * 미국에서는 인디밴드로 활동
  


  한씨는 기자생활 중에도 사진작가로 국전에서 수상하고 작곡상을 받는 등 창작활동을 계속 하다가 신문사에서 뉴욕지사로 발령을 내자 그곳에서 인디밴드 ‘징기스칸’의 리더로 밴드활동도 했고 사진스튜디오의 매니저로 미국 동부와 서부를 오가며 살기도 했다.
  

 


  국내 음악계와 연락을 끊고 살던 한씨는 90년대 들어 일련의 실험적인 음반으로 연이어 발표하며 가요계에 복귀한 후 97년 일본의 한 락 콘서트에 게스트로 출연해 하드록을 연주하며 자신의 음악적 건제를 과시하기 시작했다. 이후 오십이 넘은 나이에 발표한 최근 앨범에서도 ‘공산주의자’ 호치민(호지명)을 찬양하는 노래 ‘호치민’을 헤비메틀 기타반주에 랩으로 불러 본인 표현을 빌면‘문제아동’다운 행동을 하기도 했다.
  

 

 


  한씨는 ‘호치민’ 같은 곡을 쓴 이유에 대해서는 “지금도 이라크전은 융단폭격으로 3주만에 나라 하나를 쓸어버리고 끝났다. 하지만 호치민은 대나무 막대기만 들고 무려 3천일을 폭격당하고도 미국을 이겼다. 그 안에서 우리가 분명 배울 것이 뭔가 있다”고 곡을 쓴 이유를 밝혔다. 그는 그를 '최후의 히피'라 부르는 세간의 평가에 대해서도 “인류 최후의 히피라는 존 레논이 뉴욕에서 총에 맞고 살해를 당해 저 세상으로 갔으니 맞는 말”이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요즘 우리 젊은이들에 대해서는 "우리 젊은이들은 인터넷으로 새롭게 히피운동을 하고 있다"고 높게 평가하며 큰 기대를 나타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미국에 대해서는 “전쟁하는 거 봐라. 저 놈들은 자기만 안다”며 독설을 퍼붓기도 했다.
  

 


  음악을 하는 후배들에게는 “절대 음악하지 마라!”고 경고(?)했고 실험성이 강한 자신의 최근 음반에 대해 묻자 “내가 부른 노래들이 30년 후 어떤 평가를 받는지 한번 보자”고 여유 있게 응수하기도 했다.
  

 

 


  다음은 오는 25~26일 대학로에서 ‘눈물’이라는 제목으로 공연을 갖는 한씨와의 인터뷰 전문이다.
  

 


  * '최후의 히피' 한대수 인터뷰
  
  프레시안 : 한 인터넷 사이트에 ‘한대수는 최초의 히피이자 최후의 히피다’라는 말이 있다.
  한대수 : 내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히피였고 인류최후의 히피라는 존 레논(비틀즈 멤버)이 뉴욕에서 총에 맞고 살해를 당해 저 세상으로 갔으니 맞는 말이다.(웃음)
  

 


  프레시안 : 그럼 ‘히피’가 보는 전쟁의 문제는 무엇인가? (한씨는 인터뷰 전 CNN이 중계하는 미군의 바그다드 함락 후일담을 근심어린 표정으로 시청하고 있었다.)


  한대수 : 전쟁은 인간의 창조성을 파괴한다. 인류를 발전시킨 것은 평화와 사랑 그리고 창조력인데 전쟁은 파괴를 통해 창조력과 평화를 소모시키고 없앤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면 모든 것이 두 가지 부정적인 요소에 의해 좌우된다. 하나는 폭력이라는 물리적인 힘이고 또 하나는 언론이 단순한 프로파간다로 변해 버린다는 점이다.
  

 


  만약 우리가 어쩌다가 힘이 세져서 ‘국제전’을 한다고 치자. 전쟁 중엔 ‘프레시안’이나 ‘조선일보’가 과연 차이가 있을까? 모두들 ‘우리가 이기고 있다’는 말만 할 거다. 전쟁터에서 우리 애들이 죽고 있는데 어떻게 공정하게 보도가 될 수 있나. 비교적 공정했다는 CNN도 요새 전쟁보도를 (TV를 가리키며) 저렇게 하고 있다.
  

 

 


  프레시안 : 지난 앨범에 ‘호치민’ 같은 곡을 만든 이유는?


  한대수 : 그 곡은 우리가 바로 ‘지금’ 공부해야 할 인물에 대한 곡이다. 지금도 이라크전이 폭격으로 3주 만에 나라 하나를 쓸어버리고 끝났다. 호치민은 대나무 막대기만 들고 무려 3천일을 폭격당하고도 미국을 이겼다. 그 안에서 우리가 분명 배울 것이 뭔가 있다. 그런데 그것을 강의로 해선 젊은이들이 졸고 안 들으니 노래로 만든 것이다.
  

 


  참고로 그런 노래 만들었다고 내가 공산주의자는 아니다. 내 가사는 그때그때 나의 생각을 담는데 가요가 사랑노래가 넘쳐나니 내가 의식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물론 나는 자본주의자도 아니다.
  

 


  * 양호하게 살아야 한다
  


  프레시안 : 그럼 한대수의 생각은 뭔가?


  한대수 : 레닌하고 공산주의자들은 ‘짜르’를 치더니 지들이 ‘짜르’가 됐다. 자본주의는 최소투자로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데 한마디로 정리해서 노동자를 ‘착취’한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제 광고로 소비와 욕구까지 조작하는 단계로 갔다는 점이다. 나는 인간이 하루 두, 세끼 밥 먹고 서로 사랑하고 평화롭게 살자는 것이다.
  

 


  많은 화폐나(한씨는 인터뷰 내내 돈을 ‘화폐’라고 표현 했다) 우리가 소비하는 과도한 물질이 행복을 주진 않는다. 자연만 망친다. 경쟁이나 전쟁이 아니라 평화롭고 창조적인 일에 에너지를 쓰며 양호하게 살아야 한다.
  

 


  프레시안 : 밖에서 오랜 시간 지켜보고 돌아와서 본 우리의 특징이 있다면?


  한대수 : 우리는 사랑과 평화를 소중히 여기는 ‘히피 무브먼트’를 거치지 않고 ‘인터넷혁명’으로 바로 간 나라다. 나는 우리 젊은이들이 지금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한다고 본다. 미국이나 영국을 지금 다스리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유나 평화에 대한 ‘이해’는 있다. 영국 총리 블레어가 젊은 날에 찍은 사진을 보면 내 머리는 장난이다. (웃음)
  


  미국 대통령 부시마저 젊은 시절엔 ‘서든 락’ 같은 거칠고 빠른 음악에 심취한 인물이다. 클린턴과 고어는 마리화나까지 했던 사람이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과 회담하고 교섭하러 가는 우리나라 관료들은 전혀 그런 마인드가 없고 이해도 안한다는 것이다. 착실한 ‘모범생’ 들이라 마음도 전혀 오픈이 되어 있질 않다. 하지만 이제 젊은이들이 세계로 나가면 달라질 것이다.
  

 


*  미국인에게 한국은 아무 의미도 없다
  

 


  프레시안 : 이라크전쟁이 끝나고 있는데 다음은 북한이란 말도 있다. 미국인에게 한국은 어떤 의미인가?


  한대수 : 솔직히 말해 미국인에게 한국은 아무 의미도 없다. 이미지도 없다. 무관심 그 자체다. 오히려 반미시위가 우리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렸다. ‘저들이 뭔가 있다’는 걸 보여 준 것이다. 지도층이나 경제계만 이권이나 우리 경제규모 때문에 좀 신경 쓰는 정도다. 미국에서 길가는 사람을 세워놓고 생각을 물어보면 이럴 거다. ‘중국과 러시아는 경쟁상대’, ‘일본은 예쁜 디자인의 제품을 만드는 좋은 나라’다. 한국은 굳이 말하자면 ‘너 남에서 왔냐? 북에서 왔냐?’고 묻는 것이 끝이다.
  

 


  프레시안 : 그럼 직접 겪은 미국의 문제는 무엇인가?


  한대수 : 전쟁하는 거 봐라. 저 놈들은 자기만 안다. 그들은 유럽도 관심 밖이다. 그런 점에서 유럽이나 일본 젊은이는 대단하다. 다른 사회나 문화를 편견이 없이 공부하고 이해하는 자세가 큰 힘이 될 것이다. 특히 일본 젊은이들은 티벳이나 부탄도 깊이 연구하고 직접 찾아간다. 우리 젊은이들도 이제 중산층 자녀만 되도 외국여행을 다니고 하는 것이 그런 기질을 보이는 것 같아 미래가 밝다고 본다.

  


*  우리 젊은이들은 인터넷으로 새롭게 히피운동을 하고 있다
  

 


  프레시안 :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어떤가?


  한대수 : 나는 아주 밝게 본다. 양호하다! 월드컵 응원과 촛불시위, 시민운동을 보면 히피의 정신과 다르지 않다. 마리화나하고 머리를 기르는 것이 히피의 본질이 아니다. 사랑과 평화 속에서 더불어 살며 감정에 솔직하고 자연을 아끼는 것이 히피다. 아까도 말 했지만 그런 의미에서 우리 젊은이들은 인터넷으로 새롭게 히피 운동을 하고 있다.
  


  우리 어른들은 이제 젊은이를 컨트롤하려고 하기 보다는 자신들이 아는 지식과 비밀을 다 전해 주고 ‘이젠 너희가 세상을 꾸려가라’고 한 후 지켜봐 줘야 한다. 새로운 세대가 놀 운동장을 만들어 줘야 한다. 진짜 선진국이라면 그래야 한다. 심지어 일본도 젊은이들 손을 들어 주고 ‘판’을 넘기고 있는 시대다.
  

 


  프레시안 : ‘행복의 나라’나 ‘바람과 나’를 만들던 70년대 문화계는 지금보다 소박하지만 더 행복했던 것으로 회고 하는 이들도 있다.


  한대수 : 실제로는 더 끔찍했다. 힘들고 어려웠고 배도 ‘진짜로’ 고팠다. 지금은 예술가들이 ‘진짜’로 배가 고프진 않는 것 같다. 물론 그런 것은 있었다. 군사정권이 하도 혹독한 때라 그 억압이 좋은 곡이나 연극이 나오게 한 원동력이 되긴 했다. 도저히 행복하지 않으니 ‘행복의 나라’를 찾고 싶었고 차라리 ‘바람’이 되고 싶었던 시절이었다.
  


*  립싱크는 없어져야 한다
  


  프레시안 : 립싱크에 대한 생각은?


  한대수 : 립싱크는 없어져야 한다. 방송의 립싱크가 음악과 아티스트를 죽인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라. 공연과 사운드의 발전이 없이 뭐가 될 수 있는가. 매년 PD나 음악인이 잡혀가는 나라가 또 있나? PD, 엔지니어, 연주자, 가수, 카메라 맨 까지 다 망하는 것이 립싱크다.
  

 

 


  프레시안 : 현재 우리 음반업계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한대수 : 우리나라 음반판매의 문제는 아프리카보다 못한 투명성이다. 아프리카가 문제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 최악이라는 뜻이다. 끔찍하다. 몇 장 팔렸는지 도저히 알 수도 없다. 우리나라 정치가 늘 사고 터지는 것을 보면 결국 돈 때문인데 그것보다 더 불투명한 곳이 음반시장이라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프레시안 : 대책을 음악인 입장에서 제시한다면?


  한대수 : 음반업자와 음악인의 사정을 이해하고 가운데 서서 조정할 중립적인 기구나 조직이 필요하다. 정부가 나서서 그런 일을 해야 한다.
  

 


* 음반시장은 생산에서 유통까지 유태계가 꽉 쥐고 있다
  

 


  프레시안 : 외국에서 한국 대중예술이 각광 받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한대수 : 산업적으로 보면 유태인들이 M&E(미디어&엔터네이먼트)산업의 유통을 쥐고 있어서 백인이거나 유태인이 아니면 그 안으로 들어가기 힘들다. 스필버그는 이미 영화에서 유명하고 가수 베니 메닐로우도 백인 같지만 실은 유태인이다. 백인처럼 보이는 유태인이나 백인에게 돈을 투자해 성공을 하는 것이다.
  

 


  음반시장은 생산에서 유통까지 유태계가 꽉 쥐고 있다. 음반회사가 5백만달러 이상 투자해 ‘록스타’를 만들면 거기에 대한 수익이 회사에 들어와야 한다. 아직 미국시장에서 아시아인은 3~4%정도다. 그러니 이익이 날 확률이 적다. 흑인들의 경우는 타고난 음악가 기질로 그 벽을 뚫은 것이다. 일본의 소니 같은 경우 시비에스(CBS)레코드나 컬럼비아 영화사를 가지고 있으니 그 저력이 좀 더 지나면 나올 것이다. 별도의 독자적인 음반유통망에 빌보드를 대적할 차트까지 갖추고 전엔 힘들다.
  

 


*  기자는 한 밤중에 다니는 ‘통행증’이 있었다
  

 


  프레시안 : 예전에 기자로 일하던 시절 추억을 말 한다면?


  한대수 : 통금이 있던 시절이라 기자는 한 밤중에 다니는 ‘통행증’이 있었다. (웃음) 그리고 ‘남의 실수를 통해 배워라’라는 러시아 속담이 기억나는 시절이다. 중간정도 사는 사람이 맨 아래 시장바닥에서 부터 저 위 장관실까지 직접 만나는 직업은 아마 지금도 기자뿐일 것이다. 다른 사람의 실수나 성공을 지켜보며 삶의 교훈을 얻었던 좋은 기회였다.
  

 


  프레시안 : 전직 '언론인' 입장에서 ‘노무현 정부’를 본다면?


  한대수 : 난 오랜 관찰을 하지 못해 노코멘트다. 이런 것은 있다. (뉴욕)타임스에 뭐 나온다고 다 믿고 그러지 마라. (미국은 우리와)이권이 대립하는 매체들이 대부분 이다. 이런 것은 있다. 노 대통령 이제 두 달이면... 청와대 화장실 위치나 알 시간인데 사람들이 너무 말도 많고 마구 흔들고 있다. 최소한 1년은 능력을 펼칠 시간을 줘야 하지 않나 싶다.
  

 


  프레시안 : 전공은 미국에서 ‘수의학’을 했다고 들었다.


  한대수 : 할아버지가 ‘전망이 밝다’며 시켰다. 으, 도저히 못하겠더라. 사실 우리집안이 친가나 외가나 직업을 보면 대부분 학자나 연구원들이다. 가족 중 유일한 ‘딴따라’다.(웃음) 결혼도 두 번하고 나이는 이제 할아버진데 아이도 아직 없다.
  


  * 내가 부른 노래들이 30년 후 어떤 평가를 받는지 한번 보자
  


  프레시안 : 후배 음악인들이 ‘왜 그런 안 팔리는 실험적인 음악만 하는지’ 물어달라고 했다.


  한대수 : 고호는 총으로 자살했다. 인정도 못 받고 처절했다. 그의 그림이 지금 가격이 2천2백만달러다. 음악가들도 보면 다들 처절하게 살았다. 내가 부른 노래들이 30년 후 어떤 평가를 받는지 한번 보자.(웃음)
  

 


  프레시안 : 자신의 주제가라고 할 수 있는 곡은?


  한대수 : 내 모든 곡들이 내 주제가다. 최근 노래 중엔 ‘침묵’이 들을 만 할 것 같다.
  

 


  프레시안 : 히트곡이 아닌 자신의 숨어 있는 곡 중에 추천을 한다면?


  한대수 : ‘헤드레스 맨’(머리 없는 남자)란 곡을 들어 보면 어떨까.
  

 


  프레시안 : ‘행복의 나라’의 가수로 ‘아침이슬’의 김민기씨에게 경쟁의식 같은 것은 없나?


  한대수 : 김민기씨는 이제 연극연출가다. 그리고 그는 뛰어난 예술가다. 나와 절대 라이벌이 아니다. 그냥 사람들이나 언론이 그렇게 보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음악이라는 것이 다른 예술도 마찬가지지만 서로 교류와 영향을 주고받는 가운데 발전을 하는 것이다. 군대가기 전에 몇 번 술을 같이 마셨고 내 노래를 취입하기도 했다.
  

 


*  절대 음악을 하지 마라!
  


  프레시안 : 이번 공연에 대해 팬들에게 말한다면?


  한대수 : 모두들 오픈 된 마음으로 가볍게 오셔서 즐기기 바란다. 이전 공연들이 거친 하드락에 가까운 음악이었다면 이번엔 재즈의 느낌이 강할 것 같다. 공연의 컨셉인 ‘눈물’은 슬픔과 전쟁의 비통한 눈물 뿐 아니라 기쁨에 순간에 나오는 눈물이기도 하다. 감정의 최고선이라는 뜻이다.
  

 


  프레시안 : 젊은 음악인에게 충고를 해 준다면?


  한대수 : 절대 음악을 하지 마라! 돈이나 명예 혹은 여자에게 인기를 얻고 싶어서라면 더욱 하지 마라. 그러면 성공해도 자살로 끝난다. 다 그렇게 갔다. 굶어 죽더라도 꼭 표현을 해야 할 것이 있으면 해라. 그래도 되도록이면 음악은 하지 마라.
  


  프레시안 : 자신의 삶이 대중에겐 반골이나 기인으로 보이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나?
  한대수 : 난 양호한 인간관계와 모두의 열린 마음을 위해 노력하는 음악가일 뿐이다. (웃음)
  


  손봉석/기자

-출처: [프레시안] 2003-04-15 오후 4:01:50     

 

 

 

  

[지식채널e- 호치민] 


 

 

말과행동이 언제나 일치했던, 정치가

일국의 수장보다는 평생 '호 아저씨'로 남고 싶어했던 정치가

뛰어난 군사 전략가이자, 외교관이었던 인물

 

유일하게 세계최강국을 이겨본 1人

 

이불변 응만변(以不變 應萬變)

내 안의 변하지 않는 원칙으로 만변하는 세상에 대응하자

 

민불신무립(民不信無立)

인민이 믿지 않는 다면 국가를 유지할 수 없다

 

정치가는 국민에게 항상 진실해야한다

 

혁명을 하고도 국민이 가난하고 불행하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어떤분과 너무나도 극명하게 대비되는 인물....

 

 

 

            [ 호치민(Ho Chi Minh, 胡志明)의 유언 ]

 

 

 

하나. 나의 무덤을 만들지 말고 화장하며, 동상을 만들지 말라.

매장하여 무덤을 만들면 인민들에게 폐를 끼칠것이며,

동상을 만들면 우상화되거나 신격화될 위험이 있다.

 

. 이 전쟁이 끝이나더라도 남월남의 누구에게라도 보복하지 말라.

모두가 한 시대에 살아남기 위하여 처신한 것이며,

모든 남월남의 인민들을 새로운 통일 베트남의 새 국민으로 새출발을 하자.

 

셋. 전쟁중에 전사한 군인들의 아내나 가족에게 국력을 다하여

성심성의껏 지원하고 돌봐줄것이며, 상이군인들 역시 국가가 최대한

우대하여라

 

 

1969년 사망한 호치민의 머리맡에는

생전에 애독했던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가 놓여 있습니다.

호치민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던 시절 다른 소지품은 못 챙겨도 목민심서

만큼은 꼭 챙겼을 정도로 목민심서를 아꼈습니다.

덕분에 목민심서는 베트남 공무원들의 지침서로 채택 되었습니다.

 

다산은 이 책을 통해 관리의 청빈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목민심서의 2장 '율기육조(律己六條)'에서는

 

“청렴은 관리의 본분이요, 갖가지 선행의 원천이자 모든 덕행의 근본이니

청렴하지 않고서는 목민관이 될수없다”

 

“자신이 쓰는 돈이 백성의 피와 땀으로 이뤄진것이란 사실 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

 

부를 탐하는 수장은 그 아랫사람들까지 물들여 하나같이 축재만을

 일삼게 되며,이는 곧 국민의 피를 빨아먹는 도적떼와 같은 존재이다 ”

 

목심심서를 자신의 몸처럼 아꼈던 호치민은 다산 정약용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했습니다.

 

호치민은 사망할 때

지팡이 하나와 옷 두벌, 목민심서를 비롯한 책 몇 권만을 유품으로 남겼습니다

 

 

                         [호치민]

 

 

호치민이라는 인물은 근대 사회의 중심적인 힘 두 가지를 반영하고 있다.

하나는 민족 독립에 대한 열망이며, 또 하나는 사회적, 경제적 평등이다.

그는 인간의 평등한 삶을 염원한다는 점에서 진지한 사회주의자였으며,

동시에 무엇보다도 민족 전체의 해방을 열망했다는 점에서 의심할

수 없는 민족주의자였다.

   

 

1883년 프랑스의 무력 침공으로 식민지가 된 이후 베트남은 프랑스의 가혹한

식민 통치 아래 철저하게 수탈당했고, 국가 경제의 자생력을 잃어 갔다.

 

1890년 프랑스 지배를 받던 베트남 상류층 명문가의 막내 아들로 출생.

그의 아버지는 핍박 받는 베트남 백성들을 위해 공무원 직을 사퇴하고

전국을 떠돌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집안은 몰락했지만 지적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유교 경전과 프랑스어를 배울 수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개혁적 성향을 본받아 프랑스의 가혹한 세금제에 저항하는 등

반체제 인사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프랑스 본토에

만연돼 있던 자유주의와 급진사상에 깊은 감화를 받았다.

 

1차 대전 후 유럽으로 건너간 베트남 인들은 그곳에 만연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혁명 사상에 감화를 받고 귀국해 베트남의 독립 운동을 이끌기

시작했다.

 

이들은 프랑스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지하에 숨어 들어 국민들을 계몽하며

게릴라와 테러 전을 수행한다. 인텔리와 청년 혁명가들이 주도한 이런

일련의 지하 독립운동은 이후 프랑스와 미국을 무찌르는 원동력이 된다.

 

호치민은 (그의 본명은 ‘Nguyen Ai Quo’라 함) 1911년 배 막노동꾼으로

취업해 프랑스로 건너간다. 파리에서 사진 보정 기술자로 일했고,

새로 창설된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한다. 이곳에서 체계적인 독학을 통해

방대한 지식을 터득했으며 혁명사상과 애국주의를 체득한다.

 

 

1919년 민족 자결주의를 발표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저지른 만행과 기본권 보장을 요구하는 요구서를

넘겨 주려다 실패하고 말았는데, 그는 여기서 서구 열강들이 결코 평화적으로

식민지를 넘겨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후 그는 동양의 공산 혁명가 중 가장 화려한 경력을 쌓기 시작한다.

세계 공산당 대회에서 제법 큰 발언권을 갖게 되었을 뿐 아니라,

소련으로 건너가 레닌 대학을 졸업하고 민족과 식민지 문제 연구소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이후 공산당의 비밀 요원으로 랑군과 캘커타 등지에서 활약하게 되면서

당시 그는 첩보전과 교란에 발군의 실력을 보였는데, 귀신 같은 변장과

잠적으로 수없이 많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으로 기록됐다.

 

1925년 민족 해방을 위한 투쟁을 위해선 먼저 지식인과 청년들을 대중 속에

보내야 한다고 판단한 그는 베트남 혁명 청년동지회를 결성한다.

 

그리고 1929년에는 홍콩에서 인도차이나 반도 공산당을 결성, 군대를 모으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베트남 독립 운동의 주도권은 호치민이 지도하는

공산당으로 넘어간다.

 

 

 

1940년 2차 대전이 발발한 뒤 일본군이 베트남으로 진군, 베트남을 지배하던

프랑스 정권을 격퇴한다. 초기 베트남 인들은 일본을 해방군으로 오인했으나,

호치민은 일본 역시 제국주의자들과 한패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베트남 독립전선을 조직, 일본군에 저항한다. 그러나 그의 게릴라 부대는

일본군에 패배를 거듭했다.

 

이때 호치민은 자신의 공산주의 노선을 변경한다.

지주의 재산을 몰수해 농민에게 분배하는 전형적인 공산 혁명이 아니라,

제국주의자와 매국노의 토지만 몰수해 빈농에게 배분하는 원칙을 세웠다.

 

그리고 그는 베트남의 기득권 및 지주층에게 이대로 식민지배가 계속되면

결국 베트남 인 모두가 공멸할 것이라는 논리를 전개했다.

이때부터 그의 게릴라 전술은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1945년 호치민은 패망해 가던 일본군을 베트남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마침내 독립을 선포한다. 그러나 독립의 기쁨도 잠시, 쫓겨났던 프랑스 군대가

질서 유지를 보조한다는 명분 아래 베트남을 재침략 한다.

 

1946년, 프랑스와의 결전을 앞두고 호치민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 1명이 죽을 때마다 베트남인 10명이 희생당할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들은 패배할 것이고 우리는 이길 것이다."

 

 

호치민의 말은 현실화 되었다. 프랑스는 2차 대전에서 맹위를 떨친 비행기,

장갑차, 대포등의 막강 화력을 몰고 왔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프랑스 군은

패색이 짙어 갔다. 호치민의 군대가 이미 거의 모든 민중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었다.

 

호치민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농민들은 게릴라 부대에게 식량을 가져다 주었고,

도시의 시민들은 프랑스 군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아무도 지지하지 않는

프랑스 군대는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1954년 베트남 군은 총반격을 개시, 디엔 비엔 후 전투에서 프랑스 군을

궤멸시키고 프랑스는 8년간의 전쟁 끝에 남부 베트남에 괴뢰 정부를 남긴

채 완전 철수 한다.

 

호치민은 이제 베트남 민중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다.

그는 굳은 결의로 베트남을 독립된 국가로 재건하려 했다.

 

그러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인도차이나 반도를 전략적 요충지로 여겼던

미국은 베트남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미국은 1955년 프랑스를 섬기고 있던 베트남의 꼭두각시 황제 바오 다이를

몰아 내고, 고 딘 디엠을 남 베트남의 대통령으로 삼아 새로운 남베트남

정권을 세운다. 그러나 딘 디엠의 남베트남 정권은 수많은 실정과 부정을

저질러 끊임없는 민중 봉기와 쿠데타를 겪어야 했고 붕괴 위기에 놓인다.

 

미국은 남베트남의 위기를 북베트남의 침략과 공작으로 규정,

"남베트남의 민주주의와 자결권을 수호하기 위해" 베트남 전을 일으킨다.

 

미국은 전쟁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베트남의 통킹만에 주둔하고 있던

미 구축함을 폭파시키고, 베트남 군의 어뢰에 맞아 침몰했다고 사건을

조작하기도 했다. (일명 “통킹만 사건”)

 

 

 

베트남 전에 참전한 미군 측 군대는 100만에 달했다.

이들은 베트남 전역을 쉴 사이 없이 폭격해 국토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이들이 베트남 전쟁에서 쏟아 부은 폭탄의 양은 900만 톤으로 이는

2차 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에서 사용한 전체 폭탄의 양보다 많았다.

 

그러나 호치민이 이끈 베트남 군은 굴하지 않았다. 그는 미국의 살육에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인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20년, 혹은 100년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끝내 이길 것이다."

 

 

호치민의 군대는 소련이 지원한 전쟁 무기와 전국민의 지지 기반으로

미군을 쉴 사이 없이 괴롭혔다. 프랑스 군대와 싸울 때 발휘되던 게릴라 전술은

힘을 더했다. 호치민의 군대의 정말 무서운 점은 포용력이었다.

 

이미 거의 모든 베트남 인들을 지지자로 만든 호치민은 미군 측에 붙어

자신들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동포마저도 포용했다.

 

호치민의 해방전선은 자신들의 포로가 된 이들까지 용서하고 설득해 결국엔

남베트남 군이 미군의 등에 총을 쏘게 하는 결과를 이끌어 낸다.

 

 

1969년 79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는 죽으면서 자신의 시체 때문에

한 뼘의 농지도 낭비할 수 없다며, 화장 시켜 작은 단지 안에

담아달라고 한다.

 

1973년 미국은 평화협정 체결 후 베트남에서 전면 철군한다.

그리고 호치민이 죽은 지 6년 뒤인 1975년, 그가 이끌던 군대는 사이공을

점령하고 괴뢰정부 남베트남을 궤멸시킨다. 이로써 완전한 베트남의

독립을 쟁취한다.

     

참조> 블로그

 

 

- 출처: '공돌이'(다음 '아고라')

 

 

 

 

 

 위대한 지도자,, 호 아저씨!

 

 

 우리에겐 충무공이 계셨다. 비록 그가 통치자는 아니지만, .....

 

호치민, 그는 어려운 시기에 태어났으나 지피지기를 위해 일찍 그들의 적국에서 배움을 했고 그것을 그 자신, 일신을 위해 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능력과 열정과 배움을 그들의 가장 낮은 기층 민중을 위해 썼고 한 점 남김 없는 빈 몸으로 돌아갔다

소박했고 자국민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청렴하게, 그러나 조국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마침내는 그의 적국사람들에게까지 경외의 대상이 된 이였다.

 

 

그러나, 나는 좌절하지 않는다. 우리도 언젠가는 저런 진정 위대한 지도자를 맞게 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련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상층과 하층, 이념의 좌우에 관계 없이 존경 받는 인물이 우리에게도 언젠가는 출현할 것임을 믿고 살아 보련다.

 

 

흔히들 베트남하면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베트남처녀랑 결혼하세요' 라는 문구부터 생각날것이다. 우리에겐 가까워보이기도하지만 멀리있고, 우호관계가 돈독해보이기도 하지만 한때는 서로 총을 겨누고 싸우던 사이였던 나라 베트남.

 

 

베트남은 우리나라 역사 못지않게 눈물겨운 투쟁의 역사로 유명했던 나라이다.

 

 

 한때 고대에서 19세기 말엽까지 중국의 침공으로 부터 자신들의 나라를 지키려했던 이 정글의 전사들, 19세기 말엽에 프랑스의 억압에도 굴하지 않은 민초들... 20세기 들어와서 최신예 전폭기와 헬리본 작전 대규모 물량전을 앞세운 미국에 굴하지 않고 볼품없는 칼라니쉬코프 소총 한자루를 들고 저항했던 전사들의 나라.

 

 

 

우리에게는 베트남전쟁 당시 월맹의 지도자로...베트남 국민들에게는 우리네 백범 김구선생님처럼 '호 아저씨'로 영원히 기억되고 있는 이 작은 베트남출신의 혁명가. 쿠바혁명의 체 게바라와 함께 영원히 세계인의 기억속에 혁명가로 남아있는 그, 

그의 이름은 '구엔 타트 탄 (Nguyen Tat Thanh)'

 

 

1890년 5월 8일에 중(中) 베트남의 게친주(州)의 중견 공무원이자, 농민출신 문학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 부친은 명망받던 중견 공무원이었지만, 프랑스 정부로 부터 민족주의자라는 이유로 자기가 앉아있는 자리에서 쫓겨났어야 했다. 단지 "이상한 생각을 한다'는 명목아래...

 

 

3남매중에 막내로 태어난 그는 청년 시절에 부친으로 부터 배운 민족주의를 여러 사람들에게 전파시켰다는 이유로 자신의 형과 누나와 함께 투옥되는 아픔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청년 시절 왜 같은 사람인데 자신과 같은 베트남 사람들은 프랑스인에게 억압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이러한 제국주의의 억압에서 자유로워질수 있을까, 라는 생각끝에 21살이 되던 1911년, 좀더 넓은 세상을 보기위해서 그는 영국행의 프랑스 유람선 견습요리사가 되어서 베트남을 떠났다. 대영제국의 수도인 런던에 도착한 그는 호텔 견습 요리사로 일하면서 아일랜드인들의 독립운동을 목격하고 그걸 바탕으로 아일랜드 독립을 포함한 다른 지역의 독립투쟁을 위해서 反 제국주의 비밀결사단체인 '해외노동자 연합(Overseas Workers' Association)'을 결성에 참여한다.

 

 

이 무렵 그는 미국을 방문해서 미국의 어두운 뒷면인 할렘가를 목격하고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 그곳에서 세탁소 종업원이나 정원사등으로 일하면서 생활하였다.

 

그후 그는 1919년 프랑스 사회당에 가입을 하고 같은해에 베르사유 조약에서 베트남대표로 출석해서 '베트남 인민의 8항목의 요구'를  제출 2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일약 그 이름이 알려지게되었다. 그리고 1920년에 그는 프랑스 사회당 투르대회에서 코민테른 지지파에 가담, 프랑스 공산당 창립 멤버 중에 하나가 되고, 이듬해 공산당의 지원으로 프랑스식민지인민연맹을 결성, 기관지 <르 파리아>를  발행-편집하게되었다. 이 무렵부터 그는 구엔 아이 쿡 (Nguyen Ai Quoc) 이라는 가명으로 反 식민지, 反 제국주의 색채의 기사를 기고하였다.

 

 

그러다가 1922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에 프랑스 대표로 참석, 모스크바에 2년 정도 머물면서 마르크스에 대해서 연구하고 레닌을 직접 만나게 되었다.

 

이어서 1925년 중국 광둥의 소련영사관 사무원 되어 모스크바로 떠났고 그 해에 중국 상하이에서 코민테른의 아시아 지역본부 책임자가 되었다. 그후 1930년에 코민테른의 의해서 권한을 부여받고 인도차이나공산당을 창립하게되었다. 이듬해에 홍콩에서 영국 관헌에게 체포되었으나, 석방 후 모스크바로 돌아갔다가, 1941년 베트남에 잠입,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중심으로 베트민(베트남독립동맹회)을 결성,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섰다.

 

 

1942-1943년에 중국 국민당 정부에 의해 체포-투옥 당한 무렵부터 호치민이라는 이름을 사용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인한 종전과 동시에 총봉기를 주도해서,  당시 親프랑스 괴뢰정권인 구엔왕조[국가수반-바오다이]를 전복시키고 정권을 탈취(8월 혁명)에 성공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정부 수석으로 취임한다. 1946년 퐁텐블로회의가 결렬되자 프랑스에 대한 항전을 직접지휘, 마침내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베트남은 오랜만에 제국주의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게되었다.

 

 

결국 1954년 제네바 협정으로 북도 17도선을 기준으로 비무장 지대를 선언하고 이어서 이듬해에 남-북 베트남 총선거로 통일된 베트남정권을 수립한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그런 독립의 기쁨도 잠시, 1955년 미합중국의 지지를 받고 고딘디엠이 독립국으로서의 베트남 공화국(월남정권)을 수립하고 스스로 취임하면서 베트남 독립의 꿈은 멀어지는듯했다.

 

결국 호치민은 다시한번 노구의 몸으로 무기를 들고 당시 최신예 무기로 무장한 미국에 단 한자루의 카라니쉬코프 자동소총을 들고 저항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69년 7월 8일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남부 베트남으로부터 첫 군대 철수 공고함으로써. 어느 정도 베트남전에서의 결실을 맺고 통일로 나아가려던 그 순간 1969년 9월 3일 80에 가까운 노구의 몸으로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평생을 자기의 조국 베트남의 독립과 혁명을 위해서 싸웠던 그....

마치 어떤 영웅소설의 주인공과도 같은 삶을 살아갔지만, 죽는 순간까지도 낡은 옷 한벌에 고무타이어를 잘라서 만든 샌들을 신고 다녔던 그 대기근 중에 절식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인민과 함께 아픔을 같이 했고 조국을 위해 죽어간 무명의 병사 무덤 앞에서 진정어린 눈물과 피의 댓가를 조국해방으로 갚으려 했던 이 영원한 베트남의 아버지요, 사심 없이 민족과 조국을 위해 자신을 다 바친 이다.

 

철저한 비폭력,무저항,불복종으로 조국을 독립시킨 간디보다는 적극적 항왜의 민족주의자 백범 선생과 더 어울린다할 베트남의 '아버지' '호 아저씨'이다. 그의 머리맡에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牧民心書가 놓여 있었다는데 올바른 관리로서의 소임을 잊지 않고자  하는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부정부패 하지 않는 관리의 모습을 베트남 관리도 본받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자신들 휘하의 장병과 부하들에게 가르쳤다 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죽을 때 자기 머리위에 목민심서를 놓으라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호치민 기념묘

(자신의 죽은 몸을 위해 땅 한 평도 쓰지 말기를 바랐으나 베트남 국민들은 그를 방부처리 하여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도록 기념묘를 세웠다. 혹자 김일성 아저씨도 그렇다고 강변할라. 저 왜소하고 소박하고 검소함이 지나쳐 남루한 모습을 보곤 그런 소리 안하겠지... ??  )

 

 

 

 

※《호치민-혁명과 애국의 길에서》

다니엘 에므리(성기완 옮김) / 시공사(1998)

 

75회 생일에 부쳐 - 미리 쓴 유언장 -

 

일찍이 중국 당나라의 위대한 시인인 두보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 했다. 올해 나는 일흔다섯이다. 아직 정신이 말짱하고 건강이 좋지만 나는 이미 그 '자고로 드문’사람들에 속한다. 내가 몇 달이나, 몇 년이나 더 살 것이며 당과 혁명과업에 얼마나 더 봉사할 수 있을 것인지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으랴. 그리하여 존경하는 카를 마르크스, 블라지미르 일리치 레닌, 그리고 먼저 간 우리 혁명 제위들을 만나러 갈 날에 대비하여 간단하게 몇 자 적는 것이니 모든 동포들과 당의 동지들은 놀라지 말 것이다.

 

‘먼저 당에 대해 말하겠다.’:

 

우리 당은 긴밀한 단합력과 노동자 계급과 민중, 조국에 대한 전적인 헌신 덕분에 창립 이래로 우리 민족을 단결시키고 조직하여 열과 성을 다해 그들을 투쟁으로 이끌었으며 승리에 승리를 거듭할 수 있게 했다. ‘하나됨’은 당과 민족의 지극히 고귀한 전통이다. 중앙위원회에서 하위세포에 이르는 모든 동지들은 당의 단합과 하나됨을 눈동자처럼 소중히 간직하자.

 

 

당차원에서 광범위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성실한 ‘자아비판과 비판’을 정기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단합과 하나됨을 굳건히 발전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중요한 것은, 모든 동지들의 유대는 동포애적 사랑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권력을 쥐고 있는 당이다. 당원 각자와 관료들 각자가 ‘혁명윤리’를 깊이 체화해야 하고, 근검절약과 청렴, 공명정대, 공정인 일에 헌신하는 등 진정한 모법을 보여야 한다. 당의 완벽한 순수성을 지켜야 하고 스스로 지도적 위치에 설 만한 격을 지녀야 하며 인민에 진정 충실한 공복이 되어야 한다. ‘노동청년단원과 우리 젊은이들’은 훌륭한 자질을 갖추었으며 모든 임무를 열성적으로 수행한다. 그들은 난관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우리당은 그들에게 ‘고양된 혁명적 윤리’를 차근차근 가르쳐 그들을 사회주의 건설의 ‘붉은’, 그리고 ‘숙련된’전수자로 양성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
장래의 혁명세대들을 육성하고 교육하는 일은 지극히 중요하고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산악지대와 평야에 사는 우리 노동자 인민들은 수세기 동안 수많은 고초를 견뎌왔다. 그들은 봉건제도와 식민지의 착취와 억압을 겪었으며 게다가 여러 해 동안 전쟁을 겪었다. 그럼에도 우리 민중은 언제나 영웅적 투쟁과 용기와 열성, 그리고 근면함으로 놀랄 만한 모범을 보여왔다. 그들은 당이 창립된 이래로 당을 따랐으며 늘 충성을 바쳐왔다. 당은 끊임없이 ‘민중의 삶의 수준을 높이고’ 경제와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훌륭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미국의 침략에 맞선 항쟁’은 아직 몇 년 더 지속될 것이다. 우리 동포는 아직 수많은 목숨과 재산의 희생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완전한 승리의 그날까지 침략자 미국에 항거해야 한다. ‘우리의 강, 우리의 산, 우리 국민들은 언제나 변치 않으리니, 양키를 무찔러 지금보다 열 배 더 아름다운 나라를 세우리라!’ 난관과 궁핍이 아무리 심하다 해도 우리민족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미제국주의자들은 틀림없이 줄행랑을 칠 것이다. 우리 조국은 분명 다시 통일될 것이다. 우리 북과 남의 동포들은 확실히 한 지붕 아래 모여 살 것이다. 우리나라는 영웅적인 전투를 통하여 두 거대한 제국주의자들(프랑스 제국주의자와 미제국주의자)을 무찌르고 민족 해방운동에 값진 기여를 한 작은 나라라는 빛나는 영광을 누릴 것이다.

 

 

-

‘내 개인적 문제에 관하여’:

내가 죽은 후에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내 시신은 화장해 달라. 나는 화장이 점차 일반화되기를 바란다. 위생상 좋고 땅도 절약되기 때문이다. 나중에 전기가 풍부해지면 ‘전기화장’도 할 수 있고, 여러모로 그게 더 나을 것이다. 재는 언덕에 뿌려 달라. 탐다오와 바비 근처에 좋은 언덕이 있는 듯하다. 재가 뿌려진 곳 위에는 단순하고 넓고 튼튼하며 통풍이 잘되는 집을 세워 방문객들을 쉬어가게 하는 것이 좋겠다.

 

 

언덕에 ‘짙푸른 나무 숲’을 꾸미도록 하라. 방문객마다 추모의 뜻으로 나무를 심는 것이다. 나무가 잘 자라려면 나무 하나하나에 수고를 들여야만 할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 나무들은 숲을 이룰 것이고, 그러면 경치가 더 좋아지고 농업에도 이로울 것이다. 만일 내가 나라가 통일되기 전에 죽게 되면 재의 일부를 남베트남 동지들에게 전해주라. 마지막으로 우리 인민 모두에게, 우리 당과 군인 모두에게, 내 조카와 사촌들,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에게 끝없는 애정을 보낸다. 또한 내 동지들과 친구들과 모든 나라의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에게도 형제로서 같은 축복을 보낸다.

내 마지막 희망은 우리 당과 인민 전체가 단단히 뭉쳐 평화 베트남, 통일된 독립 민주 베트남, 번영된 베트남을 건설하여 세계혁명에 값진 기여를 하는 날까지 모든 노력을 다하는 것이다.

                  

            

중앙위원회 제1서기 레 두안 입회하에 하노이.

                                                                1965년 5월 15일

                                                                                      호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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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마지막 혁명 전사 호치민, 현대와 전통, 두 문화의 중간에서 스스로 깨우친 자, 그는 1911년 프랑스의 압제하에 있던 인도차이나를 떠나 30년 동안 지하운동과 망명생활을 거듭한 후 통킹의 국경을 넘어 베트남으로 들어온다. 때마침 강대국의 식민지 경영은 2차대전의 시련을 견디지 못했고, 그가 조직한 베트남 독립동맹은 민족해방을 위한 정치적 연하전선을 이루어냈다. 그리고 불타는 인도차이나, 20세기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전쟁이 끝나고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이 탄생되었다.”

                                                                                            - 본문 中에서

 

<더 알기- ‘MBC스페셜-리더십 시리즈’ 제 3부 ‘호찌민, 코끼리를 이긴 호랑이’>

 

 

호치민 박물관

 

 

 

이야기 하나


호치민은 미국과의 전쟁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유능한 젊은이들을 선발해서 세계 각국으로 유학을 보낸다. ‘엄청나게 추운’ [조선]으로 유학을 떠나는 비엔 선생(1965년 호치민 유학생으로 북한에 유학을 옴)에게 베트남 정부가 해 준 것은 입고 갈 옷 한 벌, 구두 한 켤레,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아, 호치민의 말씀이 있었다.

 


 

‘우리 정부가 어려워서 너희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지만, 너희들은 지금 전쟁으로 고통 받으며 죽어가는 인민들에게 크나큰 빚을 지는 것이다. 반드시 그 빚을 갚아야 한다. 이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할 것은 자명한 일이지만 시간이 좀 걸릴 것이며, 그 과정에서 조국의 많은 인재들이 희생될 것이고 너희들의 부모 형제들도 죽어갈 것이다. 조국을 대신해서 이 아저씨가 너희들에게 받아 두아야 할 약속이 하나 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학업을 마치기 전에 돌아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승리한 다음 너희들은 전쟁으로 파괴된 조국의 강산을 과거보다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 아름답게 재건해야 한다. 너희들은 공부하는  것이 전투다.

 


 

숙식은 조선정부가 제공해주었지만 겨울의 혹한을 난방이 되지 않는 기숙사에서 견뎌야 했다. 아직 전후 복구 작업으로 사정이 어렵던 조선 정부는 열대지방에서 유학 온 학생들을 위해 특별한 배려를 할 여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도무지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이었다. 60킬로가 넘는 몸무게는 45킬로로 줄었고 살기 위해 맨밥을 억지로 목구멍에 퍼넣고 냉수를 들이 붓고 삼켰다. 목구멍에 밥알이 걸려서 토하고 나면 눈물이 저절로 주르르 흘렀다. 전선이 아닌 곳에선 죽는 것도 조국의 인민에 대한 배반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돌아가고 싶었지만 호 아저씨와의 약속을 어길 수는 없었다.

 

 

 

 

이야기 둘

내일신문 2005-06-14

 

청렴의 리더십’ 실천한 역사의 스승
호치민, 다산의 ‘목민심서’ 탐독 … ‘백성’에 대한 책임감 교류

실용?개혁 논쟁 뛰어넘는 실사구시형 지도자의 전형


 

 

 “다산과 호치민은 공통점이 많다”고 말한다.

 

◆권력만 추구하고 책임지지 않는 정치풍토에 경종= 그는 ‘백성’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처지와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강한 책임감을 실천한 사람이 다산과 호치민이라고 평했다.

 

다산의 ‘목민심서’는 ‘백성을 보살펴 주고 보호해 주며 편안하게 돌봐 준다’는 뜻의 ‘목민’과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기에 마음만 있는 책’이라는 ‘심서’를 합쳐 만든 이름이다.

 

 

‘깨우치는 자’란 의미로 지은 호치민(胡志明)은 평소 ‘목민심서’를 정독했고 그의 무덤에도 놓여 있다고 한다.

 

xxxx xx는 “두 사람이 목민심서를 통해 만나게 된 것은 백성과 역사에 대한 책임감의 교류”라고 해석했다.

 

유배생활 속에서도 백성에 대한 책임감과 아픔을 드러내며 ‘심서’를 지은 다산과 중국 국민당에 체포, 투옥되어서도 자신의 역할을 ‘깨우치는 자’로 규정하고 이름을 바꾼 호치민의 일화는 권력만을 추구하고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우리 정치풍토에서 추구해야 할 모범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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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을 통한 정치력과 리더십= 다산과 호치민은 청렴의 대명사라는 점에서도 닮았다. 다산은 “부임할 때 빈수레를 가지고 가지마라” “재임 중에 집을 고치거나 짓지마라”고 말했다.

 

 

다산 연구소 박석무 이사장은 ‘목민심서’의 핵심으로 두 번째 편의 두 번째 조항인 ‘청심’을 꼽았다. 이에 따르면 공직자 청렴의 최상급은 ‘봉급이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으며, 먹다가 남은 것은 역시 가지고 집에 돌아가지 않으며, 벼슬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에는 한 필의 말로 조촐하게 가는 것’이라고 했다. 다산 역시 암행어사 등 벼슬에 나가있을 때 청렴을 실천했다.

 

호치민에게 있어 청렴은 정치력과 국민적 신뢰와 리더십의 원천이었다.

 

 

그는 평생 허름한 농민복을 입고 초라한 집에 살았다. 베트남 국민들은 국가원수인 그를 ‘호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의 청렴의 리더십은 베트남 뿐 아니라 적대국인 미국에서도 경외의 대상이 됐다.

 

 


◆실용이 아닌 실사구시 = ‘허를 버리고 실을 찾으며 실을 찾으면서도 그 중에서 가장 옳은 것만을 구해야 한다’는 다산의 철학은 호치민에게도 이어진다. 그는 이념적 엄격함이 아니라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사구시형 지도자였다는 것. 호치민에게 있어서 국제공산주의는 베트남의 통일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고 맑스-레닌주의는 민족해방이론에 사용되는 한 정당했다는 게 김 특보의 생각이다.

 

Nguyen Sinh Cung

 


(Minh, Ho 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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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09.22 09:38

    첫댓글 재밌고 좋은글 감사합니다~
    얼마전 베트남 다녀왔는데
    그곳엔 아직도 호치민이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ㅎ

  • 14.09.22 10:31

    고맙습니다~!^^

  • 14.09.22 14:27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정치인이 울나라엔 있는지 다시 돌아볼일이다.
    국민을 위한 부강한나라........호치민은 민족주의자이지 결코 공산주의나 독재정치를 한 사람이 아니다.
    긴글 잘읽었습니다.나도 월남으로 파병갈뻔했는데.......

  • 14.09.22 17:19

    감사합니다....전쟁이 다 끝난뒤 남베트남을 보복하지 말아라..다들 한시대를 살아남기 위해 애쓴 사람들이란 구절이 지극히 타당하다고 다가오는군요.

  • 14.09.25 00:06

    우리에겐 노짱이~ 지켜주지못해 미안하고 천안함병사들과 세월호 학생들에게도 너무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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