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맛
그곳의 바람은 다르다. 바람의 맛이 다르다. 햇볕의 결이 다르다. 그곳은 원미산 기슭 내 사는 곳이다.
20여 년 전 경인전철이 개통되었을 적에 그곳으로 나갔다. 이른바 서울 탈출이다. 뻘건 진흙이 벗겨진 산의 생살이듯 군데군데 드러나 있는 산비탈의 체비지 몇 평을 샀다.
나의 숲그늘의 안주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평당 기천 원씩의 투자는 효과가 있어서 정서적 안정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몇 년 뒤 친구의 도움으로 집을 올릴 수 있었다. 자그마한 2층집.
뜨락은 넉넉히 잡았다. 담을 둘러 안마당으로 삼고 잔디를 깔고 담밑엔 돌을 이리저리 놓고 그 사이사이엔 꽃과 풀을 꽂았다. 감나무 대추나무 모과나무 그리고 늘푸른나무들도 심었다. 삼 년이 지나자 뜨락이 아늑해졌다. 한창 초록이 예쁠 때 이층에서 내려다보면 초록 호수처럼 안마당에 조용함이 괴었다. 거기 내 가슴을 내려놓아 포갠다고 생각하면, 난 무성 영화의 주인공이 된다. 혼자 무성 영화 시대의 표정을 짓고 흐뭇해 한다.
어떤 때엔 까치의 사색을 곁눈질로 보기도 한다. 집을 혼자 지키고 있다 보면 뜨락에 내려와 사색하는 까치를 보게 된다. 눈이 마주치면 날아갈까 해서 바로 보지 않고 곁눈질로 본다. 넉넉히 잡았다고 했지만 쌈지공원 크기의 한 뼘 뜨락이다. 이 흙덩이가 나의 소유라는 생각까지 하게 될 때엔 혼자 짓는 흐뭇한 표정에 입크기가 늘어난다.
바다에 뜬 작은 섬 하나를 사놓고 그것을 내 것이라고 우기며 흐뭇해하는 바보스러움에 못지 않은 것이다. 나무 울타리를 세월 담으로 여기며 그 안쪽의 공간을 내 것이라고 우기며 흐뭇해하는 바보스러움에 못지 않은 것이다. 나무 울타리를 세워 담으로 여기며 그 안쪽의 공간을 내 것이라고 여긴들 따지고 보면 허망한 것이 아니랴.
그러나 이 흐뭇함은 가슴을 채워주는 소유 개념으로 작용해 다른 것을 더 욕심내지 않게 해 준다. 내 땅에 내 집이 있다는 사실 하나로써 만족하고 다른 허욕이 비집고 들 틈을 남기지 않는 데 대해 오히려 자부심으로 여긴다.
동화처럼 살고 싶었다. 별이 초롱초롱 부딪치며 내리고, 나무들이 어깨를 비벼 바람을 만들며, 저녁이면 산이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곳에 따슨 불빛 머금은 집을 마련하고 싶었다. 보금자리라는 어감이 부드러운 한 마디를 피부로 느끼며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 꿈을 나무 심듯 심었던 것이다.
이제야 일요일 하루가 진정한 휴일이 되는 것은 진초록 잔디 뜨락에 등을 대고 누워 하늘을 이마에까지 끌어내릴 수 있기 때문이요, 손자들이 내옆에서 마음껏 구르는 꼴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작은 풀꽃이라 하여도 그것이 꽃이면 반드시 벌이 찾아오는 경이를 이 뜨락에 누워 보게 된다. 자연은 엄청난 신비를 아주 작게 실증한다. 이를 감지하는 것은 즐거움이다.
한 해에 한두 번 다 자란 아이들과 나이든 아내가 뜨락 한가운데 불을 피워 놓고 저녁상을 차린다. 그동안 힘들게 참아준 아이들에게 고맙다는 한 마디를 들려주기 위해서이다. 이런 고마움은 이곳에 와서 심은 나무가 키의 세배가 되도록 자란 모습을 바라보는 대견함에 비할 만하다.
나의 출생지는 지금 못 가는 땅인 황해도이다. 남들은 고향 나들이를 즐기나 실향민에게는 계절마다 오는 아쉬움이 있다. 어차피 고향 없는 삶으로 살아야 할 것이면 제2의 고향이라도 만드는 것이 낫지 않겠나 싶었다. 그래 원미산 다니는 길에 오면 가면 돌과 흙, 풀과 나뭇가지를 옮겨다 뜨락을 꾸몄으니, 이 일도 내 건강을 이만큼 버티게 한 한 가지라 싶다. 자연이 지닌 질서에 순응한다는 것은 바로 고마움을 늘이는 일이다.
울타리가 있고 박넝쿨을 올리고 새소리가 몰려오고 고추잠자리들이 군무를 추는 고향집 안마당이 그리웠다. 그래 고향만들기를 시도했던 것이다. 볕 고운 날 바글대는 개미들, 비 온 뒤 기어나오는 지렁이들, 나뭇잎에 흰똥을 뿌리는 새 떼들, 또 사는 곳을 비밀로 하는 개구리와 은빛 실의 공장을 품은 거미들까지 지금은 모두 낯익은 집안 식구들이다. 이들과 함께하는 한 외로울 수 있는가.
이런 것들과도 눈높이를 맞춰 마주하고 있노라면, 바람의 맛이 다른 것을 알게 되고 햇살 결이 고운 것도 눈으로 보게 된다. 지극히 멀고 높은 곳에서 밀려오는 숨결을 가슴으로 받아 안는 기쁨도 있다. 이럴때 나는 기도한다. 어릴 적 주일학교에서 '하느님은 당신의 모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들었다. 이 한 마디는 두고두고 떠올라서 '하느님은 사람 모습을 엄청나게 크게 지닌 존재'일 것이라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내가 하느님의 실재에 대해 오해를 갖게 된 원인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요즘 뜨락에서 책을 읽다 하느님은 안 계신 곳이 없다는 한 마디에 무릎을 친다. 어려서 내게 입력된, 어떤 모양으로 형상화된 하느님의 존재는 수정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느님이라는 지칭은 사람이 만든 낱말이요 명사일 뿐이다. 하느님은 사람이 생각해낼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미치지 아니하는 어떤 힘일 수 있다. 나는 내가 가꾼 뜨락의 질서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 어딘가에 숨어 있는 존재가 아님을 조용히 다짐한다. 내가 성실하면 내 집이 바로 하느님의 집이다.
- 유경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