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자성어(四字成語) 임병식 rbs1144@daum.net 어떤 사건을 생각하면 연상되는 사자성어((四字成語)가 떠오른다. 그것은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는 말로, 한번 출가한 딸은 남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이 말이 생겨난 유래는 오리무중이다. 그 어디에도 밝혀놓은 출처는 없다. 대부분의 사자성어가 생겨난 연원이 전해지는 것과는 상반된다. 대개 보면 긴 말이 하나의 어절을 형성된 사자성어는 출처가 드러나고 있다. 모르고 지나치는 것은 무신경하거나 관심을 두지 않아서일 뿐이다. 그렇다면 ‘출가외인’의 출처가 드러나지 않는 건 왜 일까.그것은 어떤 말 못할 사정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흔히 출가외인은 당초에는 부모의 피를 받아 태어났지만 한번 결혼하면 자기 호적이 옮겨간 시댁의 자손번창과 부귀영화를 위해 살게 된다. 그래서일까. 출가를 한 사람은 자고로 차별을 받아왔다. 그런 박대를 받은 이 중에서 생각나는 분으로 서재필선생의 부인이 있다.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나자 선생은 제물포에 정박한 왜선으로 황급히 피했지만 부인은 그렇지 못했는데, 어린 딸을 대리고 친정집으로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그런데 문 앞에서 구박을 당하고 말았다. “ 출가외인이니 받아줄 수 없다.” 그 말을 듣고서 심정이 어떠했을까. 부인은 어린 딸을 잃고 말았다. 출처가 확실한 사자성어 중에 대표적인 것은 ‘우공이산(愚公移山)이다. 이것은 어리석인 영감이 산을 옮긴다는 말이다. 중국 태행산과 황옥산은 그 둘레가 사방 칠 백리로 기주의 남쪽 하양에 있는데, 나이 아흔이 된 우공(愚公)은 늘 그것이 답답했다. 산이 마주보이는 곳에 위치하여 어디를 가려면 반드시 그 산들을 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허참, 저놈의 산이 가로막혀서 불편해 죽겠구나.” 하루는 우공이 아들들을 불러 모와 산을 파서 옮기자고 논의를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부인이 가로막고 나섰다. “참 딱하기도 하우. 당신 재간으로는 작은 언덕하나도 허물기 어려운데 태형산이나 황옥산을 어떻게 옮긴단 말이요.” 우공이 말했다. “그것은 모르는 말씀이오. 산은 그대로 있지만 내가 못하면 자식이 하고 자식이 못하면 손자가 하면 될 것이 아니오.” 이 말은 나중에 무엇이든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꾸준히 하면 못 이룰 것이 없다는 예화로 널리 전해지고 있다. 한편 다른 것으로 ‘문경지교(刎頸之交)’라는 말도 있는데 이것은 두 사람 사이가 목을 베어도 될 만큼 가깝다는 뜻이다. 옛날 진나라에 인상여라는 상경과 연파라는 대장군이 있었다. 연파는 인상여의 벼슬이 높아진 것을 질투했다. 그래서 만나면 단단히 욕을 보이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이를 상경은 칭병을 구실삼아 마주하는 것을 기피했다. 비겁함을 보이자 주위 사람들이 모두 떠나자, 인상여가 말을 했다. “진나라가 조나라를 치지 못한 것은 연파장군과 내가 있기 때문인데, 두 호랑이가 싸우면 어느쪽이 죽거나 다칠 것인데 그러면 진나라가 바로 쳐들어 올것이 아니냐?” 그 말을 듣고 모두 수궁하여 떠난 사람은 다시 돌아오고 이 들은 형제의 의를 맺었다고 한다. 그것이 문경지교라는 말이 생겨나게 한 말이다. 그런데 출가외인만은 그와는 달리 출처가 분분명할 뿐 아니라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런데 나는 ‘이것이 그 근거가 아닐까’하는 평소에 생각하고 있는 것은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때는 14세기 말.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수하에게 죽임을 당한 정몽주선생은 한동안 개성근처에 묻혀있었다. 나중에 후손들은 고향인 영천으로 천장을 하기 위해 준비를 서둘렀다. 명정(銘旌)을 앞세우고 가는데 중간에 그만 돌개바람을 만났다. 그 바람에 명정이 멀리 날아가 버렸다. 하늘로 치솟은 그 명정은 한참 후에 어느 산등성이에 떨어졌다. 그곳은 바로 용인시 수지면 풍덕 천리. 그런데 가서보니 그곳은 천하의 명당자리로 보였다. 가족들은 입을 모아 그곳에 모시기로 하고 천광을 팠다. 한데 포은선생 증손녀가 그 이야기를 엿 들었다. 그녀는 그 자리를 욕심내어 밤새 물을 길러와 그곳에 퍼부었다. 이튿날 묘를 쓰기위해서 가보니 물이 고여 있는 것이 아닌가. 후손들은 물이 난 자리라고 생각하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건너편 산줄기에다 이장을 했다. 이때 증손녀는 친정에 찾아가 자기는 산이 없으니 나중에라도 물이 났던 자리는 자기가 쓰겠다며 허락을 받아 두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남편 이석형선생이 사망하자 그곳에 묻게 되었단다. 이 이야기는 지관들 사이에 널리 퍼진 이야기다. 이 두 곳은 모두 천하의 명당으로 후손들은 나중 발복하여 대대로 큰 인물들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꾀를 내어 천하의 명당을 얻은 것이다. 이만 하면 ‘출가외인’이란 말을 들을 들어도 싸지 않을까. 그런데 한편, 조선 명성황후는 출가외인의 몸으로도 친정에 어떻게든 도움이 되는 쪽으로 몰두를 하여 호자돌림 겸호 승호를 비롯하여 그 아래 영자돌림 영환 영준 등을 챙겨주기에 바빴으니 다소 예외라고 할까. 그렇긴 하더라도 출가외인이라는 말은 어딘가 모르게 좀 개운하지 못하는 구석이 있지 않는가 한다. (20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