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학산(鶴山) 금광평(金光坪)<完>
<11> 강릉단오제(江陵端午祭)
관노가면희 / 강릉농악 / 씨름대회 / 수리취떡 / 국사성황(범일국사)
우리나라는 각 지역에서 매년 음력 5월 초닷새면 단오제가 열리는데 강릉단오제는 천년단오(千年端午)로 일컫는 우리나라 최고의 단오제로, 정부에서 ‘강릉 단오’를 1967년에 ‘중요 무형문화재 13호’로 지정하였고, 2005년 11월 25일에는 ‘유네스코 세계인류구전 및 무형문화유산걸작(UNESCO 世界人類口傳 및 無形文化遺産傑作)’으로 지정받았다.
이 강릉단오제의 주신(主神)이 바로 학산(鶴山)에서 출생한 범일국사(梵日國師)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보통 단오제가 하루에 끝나지만, 강릉단오제는 5일간 성황리에 펼쳐지는데 볼거리는 물론, 먹거리도 너무도 다양하여 매년 엄청난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단오제가 열리는 장소는 남대천변에 우뚝 솟은 남산공원 아래 모래사장인데, 주변이 지금은 아파트단지로 변한 곳도 있지만 예전 학산에서 내려오다 안땔골로 빠지지 말고 또깝재 쪽으로 더 내려오면 현 경포중학교 옆을 지나 내려오게 된다.
이 언덕 위에 질긴 댕댕이풀이 무성하여 댕댕이꿈(꾸미)이라 부르던 오솔길이 있었고, 따라 내려오다 보면 갑자기 절벽이 되는데 흙베리라고 했다. 그 밑에 작은 못(池/새발소)도 있었고, 이 주변까지 제법 넓은 개천변 모래밭인데도 단오가 열리면 온통 사람들이 몰려들어 비켜설 수가 없을 정도로 북적거렸다.
속초, 사천, 주문진, 안인, 옥계 등 주변 동해안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물론, 대관령 넘어 진부(珍富), 속사(束沙), 봉평(蓬坪) 등지에서도 대관령을 걸어넘어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학산을 비롯한 주변의 마을들은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과 강아지들이 마을을 지키고 젊은이들은 몽땅 단오장으로 몰리니 마을이 온통 텅텅 비곤 했다.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지만 내 젊은시절, 강릉단오(端午)의 행사와 세시풍속(歲時風俗)을 잠시 짚어보면,
가장 중심으로 치는 것이 단오굿이고, 그 밖에 관노가면희(官奴假面戱), 전국장사씨름대회, 그네뛰기대회, 국궁(國弓)대회, 농악경연대회, 학생백일장과 한시(漢詩) 경연대회, 말광대(曲馬團), 써커스공연, 마술(魔術)쇼 등이 있었고, 농상(강릉농고, 강릉상고) 축구정기전도 열렸다.
단오굿은 국사성황(범일국사), 대관령산신(김유신장군), 국사여서낭(경방댁) 세 신을 모시는 굿인데 일반적으로 대굿이 12거리로 끝나지만 강릉단오굿은 5일간 30거리가 넘었다. 가장 재미있는 대목은 당그매기 굿!
관노가면희(官奴假面戱)는 강릉부 관아 관노(官奴)들의 애환을 담은 탈춤(假面戱)이다.
전국장사씨름대회는 그야말로 전국에서 씨름꾼들이 모여드는 씨름대회로 처음에는 꼬맹이들의 씨름으로 시작하여 이기면 공책을 나누어주고 본경기가 시작되어 우승하면 상품이 황소 1마리였다.
그네뛰기대회는 발 받침에 끈을 매달고 멀리(높이) 올라가는 길이를 측정하여 등위를 매기는데 1등 상품은 2돈짜리 금반지였다. 우리 막내 누님도 죽기 살기로 마을에서 연습했는데 3등으로 빨랫비누 2장....
국궁(國弓)대회도 열렸는데 나는 얼핏 멀리서 바라만 보았던 기억이 난다.
가장 인기가 있었던 종목 중 하나가 농악(農樂)경연대회로, 당시 거의 마을마다 농악대가 있었다.
강릉농악은 타지역 농악과 쇳소리(풍물가락)도 달랐지만 공연내용은 완전히 강릉 고유의 내용이었다.
다른 지역은 주로 춤사위, 12발 상모 등 공연 위주지만 강릉농악은 농사의 전 과정을 표현했다.
처음 씨 뿌리기부터 시작하여 김매기, 추수하고 탈곡하는 장면, 그리고 마지막에는 뱃놀이하는 장면 등이다.
학생백일장과 어른들 한시(漢詩) 경연대회는 경포호 누각인 경포대(鏡浦臺) 앞의 작은 뜰에서 열렸는데 나는 백일장에 나가 입상은 못했지만 한복을 차려입은 어르신들이 붓으로 한시(漢詩)을 써내려가던 장면이 신기했다.
농상축구정기전은 당시 강릉농고(農高/현 中央高)와 강릉상고(商高/현 第一高)의 축구시합으로 그야말로 영원한 라이벌이었는데 화려한 응원전은 고사하고, 이기기 위해 죽기 살기였고 끝난 후 항상 싸움이 벌어졌다.
그 싸움질을 일반 시민들은 응당 그러러니 여기고 누구 하나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없었는데 언제인가 강릉시장이 농상축구 정기전을 중단하여 주민들이 너무나 서운해하던 기억이 새롭다. 나중 주문진수산고(注文津水産高)를 합쳐 삼파전(三巴戰)으로 부활한다.
지금은 전국에서 사라졌지만 말광대(曲馬團)의 공연이 신기했다. 말 등에 올라 신기한 몸동작을 보이는 쇼(Show)인데 달리는 말 위에서 물구나무서기, 한사람이 다른 사람 어깨 위에 올라앉아 달리기, 버나를 돌리며 말달리기 등등 너무나 신기했다. 마술쇼는 신기한 마술(魔術)인지, 요술(妖術)인지 공연.
서커스(Circus/원형경기장) 공연도 비슷했는데 스토리(Story)가 가미(加味)된 신기한 공연으로, 언제였던가 해외 서커스단이 와서 공연하던 기억도 있다. 아참, 남사당패도 참가하여 줄타기, 버나돌리기, 재담 등을 공연도 했다.
그 밖에 창포(菖蒲)물에 머리 감기, 단오부채 만들기 등도 재미있었고, 가지가지 먹거리도 많았다.
먹거리 중 수리취떡(車輪餠)이 유명했는데 쑥의 일종인 구설초(狗舌草/일명 솜방망이)를 쌀가루와 섞어 쪄내서 둥그런 떡을 빚고 수레바퀴 모양의 문양을 찍은 떡(쑥떡)이다. 사람이 소곤거리면 쑥덕공론...
<쑥떡쑥떡 뒷공론(空論)>
◯ 논 밭 전지(田地) 쓸 만한 건 신작로(新作路)되고 / 지집년(계집년) 쓸 만한 건 양갈보 되네
◯ 망덕봉(望德峰) 꼭대기에 실안개 돌고 / 우리 님은 언제 돌아와 배구눌(둘이 마주보고 타는 그네) 뛰나
- 내가 어릴 때 부르던 금광평 아라리
학산 본동(1리)에서 금광리로 오는 길이 우마차(牛馬車)가 다니도록 넓게 직선으로 뚫렸고, 신작로(新作路)라고 했다.
당시(일제시대) 어떤 이들은 귀한 밭을 메꾸어 쓸데없는 길(新作路)은 왜 만드냐고 불평을 털어놓기도 했다.
학산에서 금광리로 오는 신작로는 우리 마을 아랫녘 봉화재(烽火峙)에서 갈려 칠성암(七星庵)으로 가는 신작로도 훤히 뚫려 우리 집 앞을 지나갔는데 이 길은 항상 불공을 드리러 가는 여인들의 행렬이 이어지던 곳이었다.
내가 고향을 떠난 후 동해안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칠성지 바로 밑에 남강릉IC가 들어서면서 고향을 갈 때 강릉 시내까지 내려가지 않고 곧바로 남강릉IC로 차를 돌려나오면 바로 내 고향 금광평이 된다.
그러니 그렇게도 척박하고 가난하던 시골 마을 금광평은 교통의 요지로 바뀐 셈인가?
예전, 봉화재 신작로 옆에는 6.25 후 고아원(孤兒院)도 있었는데 4명의 내 구정(邱井)학교 동기들도 있었다.
현재 내가 살던 마을 금광평(金光坪)은 광명(光明)마을로 이름이 바뀌었고 살기 좋은 동네로 꼽힌다고 한다.
내가 초등학교(邱井初)에 다닐 때 신작로를 따라가다가 서지골(鼠池谷)을 지나 학교까지 제법 멀었고, 형편이 어려워 중학 진학은 포기했었는데 마침 강릉농고 안에 관동중학교가 생기면서 학교장 추천을 받으면 입학금을 면제받을 수 있어 중학 진학이 이루어 졌지만 학교 가는 길이 너무나 멀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먼저 담산리(長峴/茅山) 골짜기를 내려가노라면 한참봉댁과 남찰방댁이 있었다. 장현저수지 아래 장현초(長峴/茅山) 앞을 지나 모산봉(母山峰)을 끼고도는 장현(長峴/모래)고개를 넘노라면 골짜기 아래로 모전(茅田)마을도 보인다. 모산봉 아래쪽은 어리미(幼山/어린뫼) 마을이다.
고개를 올라 조금 가면 왼편으로 안땔골로 빠지게 되는데 그쪽으로 가지않고 계속 가서 도깝재로 가던지 노가니골로 내려가서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면 도깝재 끝부분에서 만나게 된다. 또다시 한참을 내려가서 강릉중학교 앞을 지나 월대산(月帶山)을 바라보며 걷다보면 우리 관동중학교인데 강릉농고 안의 가장 정면 건물이 우리 관동중이었다.
교문 한쪽에는 강릉농업고등학교(江陵農業高等學校), 다른 쪽은 관동중학교(關東中學校)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도깝재(도깨비 고개)
거리로 따지면 30리 정도 되지 않았나 생각되는데 이 먼 길을 3년 동안 걸어다녔으니....
고등학교 때는 장현고개에서 안땔(內月/안달/현 노암동 內谷) 골로 빠지면 시계 바위가 있었고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면 거기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늘레집이 있었다. 건너편 산줄기의 끝부분에 차돌바우라는 조그만 돌바위가 있고 그 바위 밑에 샘이 있었는데 너무나 맑고 상큼한 맛이 나는 샘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부근으로 도로가 뻥 뚫렸고, 논을 메꾸어 주택가로 조성되어 그곳이 어디였는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게 변하였다. 다행히 강릉고등학교는 강릉 객사문(客舍門)을 지나 조금 올라가면 있었으니 훨씬 가까웠다.
2020년, 강릉으로 가는 고속열차 KTX(Korean Train eXpress) 직행노선(直行路線)이 개설되면서 지금은 강릉까지 2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예전에는 청량리에서 출발하여 경부선을 타고 가다가 경북 영주(榮州)에서 갈아타야 했는데 옛날 영동선(嶺東線)을 타면 청량리에서 강릉까지 11시간 30분이나 걸렸다.
1967년, 강릉고를 졸업하고 대학입시로 서울로 올라올 때 새벽에 강릉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면 대관령(大關嶺)을 넘어와 진부(珍富)에서 아침을 먹고 문재, 전재를 넘어 오후 늦게야 마장동 버스종점에 도착했다.
2020년 KTX가 개설되어 운행되면서 금광평 아래 덕현리 쪽에 열차 기지창(基地廠)도 생겼다.
<뽀나쓰/ 서지골 이야기>
언젠가 오전에 나무를 한 짐 해다놓고 시간이 좀 있길래 어머이 보고 '어머이, 서지골에 가서 미꾸라지 잡아올께~'
'사람들이 맨날 잡으러 댕기는데 머이 있겠나? 그래, 한 번 가봐라~ 혹시나~~'
서지골은 집에서 꽤 멀었는데 쳇구멍이 큰 체와 주전자를 들고 덜렁덜렁 갔더니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윗논에서 아랫논으로 물이 떨어지는 물꼬를 봤더니 물방개와 거머리가 돌아다니고 미꾸라지는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그래도 우쨋거나~, 한 쪽 구석에 체를 대고 발로 휘저어 체로 몰아넣은 다음 들어 올리는데~~~
와그르르~~~ 손가락만한 미꾸라지가 여나문 마리나 들어있다. 몇 번 훑었더니 금세 한 주전자 그득이다.
장딴지에 붙은 거머리를 떼어내고 휘파람을 불며 히히낙락 집으로 돌아왔다.
집앞 도랑가에 세숫대야를 놓고 미꾸라지를 쏟은 다음 왼손에 체를 들고 오른손으로 소금을 한 주먹 집어 미꾸라지 위에 뿌리고는 재빨리 체로 덮어야 한다. 와다다닥~~ 미꾸라지가 날뛰는데 조금 지나면 축 늘어져 흐느적 흐느적...
그리고 입으로 진흙을 토해낸다. 그러면 체를 벗기고 소금을 더 뿌린다음 두손으로 빡빡 물질러서 끈적거리는 것을 깨끗이 씻어낸다. 언젠가 앞집에서 추어탕 끓인 것을 한 대접 가지고 온 적이 있었는데 진흙냄새 때문에 먹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 살아계실때 서지골로 미꾸라지 잡으러 간 적이 있는데 아버지께서 산초, 초피... 또 다른 무엇인지 향이 독한 나뭇가지들을 한 묶음 들고 오시더니 도랑가에 앉아 돌멩이로 짓찧어 물로 흘려 보낸다. 조금 있었더니 갑자기 미꾸라지들이 물위로 머리를 쳐들고 여기저기서 입을 뻐끔뻐끔.... 나는 그냥 히히낙락 주워 담기만 하면 됐다.
그러다 갑자기 시커먼 뱀 같은게 보여 나는 기겁을 했는데 아버지께서 벌떡 일어서시더니 곧바로 잡았는데....
바로 뱀장어(長魚/Eel)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