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명 : 방송국 옆 동물병원
* 작가 : 이렌느 (
skyblue-sun@hanmail.net
)
* 출처 : 아름다운소설 (
http://cafe.daum.net/date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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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국 옆 동물병원 : 희수 번외 ]
"아, 이제 정말 쪽팔려서 동물병원도 못나가 보겠어."
두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울상을 짓는 다희 언니의 모습은 왠지 딱해 보이면서도… 얄미웠다. 쪽팔려서 동물병원도
못나가겠다는 사람이 휴대폰을 손에 꼭 쥐고 얼굴을 붉히는 이유가 뭔데!
…그랬다. 자칭 내 예비 형부인 유서준씨의 방송사고(?)로 인해 ANIMAL LOVE에 잠깐잠깐 얼굴을 비추면서도
방송국 옆 동물병원의 예쁘장한 수의사로 꽤나 인기를 누렸던 다희언니는 이제 취재진과 '그 소문의 윤다희'구경꾼으로
넘쳐나는 인파로 인해 동물병원에 나가기조차 어려웠던 것이다. 'ANIMAL LOVE PD 여자친구', '윤다희', 그리고
심지어 'PD 방송사고'까지! 새해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인기 검색어에 줄줄이 오르고 있었으니 알만 했다.
도하진, 유서준. 그 능구렁이 같은 인간들이 다희 언니와 나만 시상식에 못 오게 할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세상에 연예인도 아니고 PD라는 사람이 시상식 나가서 사랑고백에다 프로포즈를 하는 인간이 어딨단 말인가.
끊임없이 시도했던 프로포즈에 무디게 반응한 언니 탓도 있겠지만 아무리 그렇다쳐도 이건 분명히 상식밖의 일이었다.
집안 망신에 프로그램 망신! 이러니 내가 가만히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지!
"언니 뭐하고 있어?"
"응? 어어… 그냥…."
가게 문을 일찍 닫고 들어와 있으면서 왠일인지 TV도 켜지 않고 조용하다 했더니, 뭘 하냐는 나의 질문에 다희언니는
보고 있던 잡지책을 발개진 얼굴로 후다닥 닫았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빨간 딱지 붙은 책이라도 보는거 아니냐
싶겠지만 그 누구도 책의 표지가 너무도 하얀, 말 그래도 순백색이란 것을 안다면…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잡지 앞에
덮어도 가릴 수 없을만큼 커다란 글씨로 My Wedding이라고 써 있는 것을 안다면!! 그렇게 말하지 못했으리라.
"그거 또 형부가 일부러 잔뜩 놓고 간거지?"
"아니야… 얘는."
언니는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다. 아니라고 말하면서 가뜩이나 발간 얼굴을 더 물들여서 아예 신호등을 만들어
버릴건 또 뭐란 말인가. 그런 언니의 모습은 왠지 맘에 안들었다. 분명 유서준이라는 나날이 바보스러워지는 악마에게
걸려도 제대로 걸린것이 분명했다. 방송에서 프로포즈하고 그날부로 우리 집에 달려와서는 결혼관련 정보 및 잡지들과
반지 하나를 함처럼 가져온 걸 내가 뻔히 아는데 아니긴 무슨. 그 날 이후로도 다희언니가 결국 마지 못해 결혼을
OK하기까지 쌓인 결혼 잡지들과 박람회 티켓들이 그야말로 한박스다, 한박스.
"그렇게 좋아?"
"뭐가?"
"우리랑 20년 넘게, 30년 가까이 살던 집 떠나서 결혼하는게 그렇게 좋냐구. 적어도 난 싫어. 언니가 그렇게 웃으면서
우리 가족 떠날 생각 하는 것도 싫고, 형부도 마음에 안들어! 언니가 좋다면 좋은게 좋은거겠지. 근데 내 마음은
안그렇단말야! 멍청하게, 그리고 쪽팔리게 방송으로 프로포즈나 하는 사람이야. 거기다 방송국에서는 온갖 폼
다 재면서 얼마나 땍땍거리는지 언니도 알지? 그러면서 언니한테는 바보처럼 굴잖아!"
"윤희수!!"
"시집가! 가라구. 누가 가지말래? 그래도 난 적어도 좀 서운한 척이라도 해달라는거야! 언제부터 그렇게 유서준이란
사람말고 눈에 아무것도 안보이는 사람이 됐어?"
투정이었다. 어린애 같고, 말같지도 않은. 꼬맹이 윤수진도 죽었다 깨어나도 하지 않을.
그리고 그런 내 모습에 언니는 그동안 내가 어떤 투정을 해도 짓지 않았던 벙찐 표정을 지어보였다. 내가 싫어하는
언니의 표정…. 마치 화산 폭발하듯 터져버린 마음속의 말들을 내뱉고 나자 왠지 가슴이 답답해서 바람이 쐬고 싶었다.
나는 글을 쓸때 걸쳐 입곤 했던, 의자에 걸려있는 아우터 하나를 대충 걸쳐 입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내 이름을 다시
부르는 다희 언니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대로 아파트 계단을 내려와버렸다.
…… 최악이야, 윤희수.
* * *
"어이, 거기 앞에 앉아있는 시스콤!"
그네에 앉아 죄없는 흙만 발로 뒤적이던 나는,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목소리. 언제나 장난스럽고
걱정이란 없을것만 같은, 그래서 더 얄미운 그런 목소리의 주인공 ㅡ 도하진.
"다희언니가 또 연락했죠? 나 잡아오라고. 놀릴작정으로 온거면 관둬요."
"놀리긴 내가 왜놀려? 작은 위로의 말과 함께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나 전하려고 왔지."
"희망적인 이야기요?"
"응, 아주아주 희망적인 이야기. 궁금해?"
"… 뭔데요?"
"뭐긴 뭐야! 앞차가 떠났으니 이제 우리 차도 떠날 수 있게 됐단 거지. 이것보다 더 희망적인 얘기가 어딨어?"
"풋, 뭐라구요?"
어이없는 이야기에 난 나도모르게 그만 풋ㅡ 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떠나긴 뭘 떠나 이 사람이!
이 능구렁이 담넘어가듯 하는 인간 좀 보게!
"운전수가 떠날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요? 떡 줄 사람 생각도 안하는데 김칫국 마시기는."
"그럼 운전수 바꿔! 이제 내가 운전한다!"
"웃기시네. 운전대 절대 못넘겨요 난. 짜가 스파이 같은 남자를 뭘 믿고."
"야! 그말은 왜 또하냐?!"
'짜가 스파이'라는 내 말에 그는 얼굴을 붉히며 언성을 높였다. '짜가 스파이'라는 별명은 그가 제일 싫어하는 별명
중 하나였다. 하지만 사실인걸 뭐. 친구 위해 이 한몸 아낌없이 불사라는 짜.가.스.파.이 주제에. 쳇.
.
.
.
"알고보면 내 친구지만 서준이가 얼마나 좋은 녀석인데요. 남자인 내가 봐도 남자로써 진짜 멋진 놈이라니까요!"
"네, 맞아요. 누가 뭐래요?"
물론 처음부터 그의 인상이 그랬던 것도 아니고, 또 처음부터 내가 그의 말에 그렇게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사람이었
던 것도 아니었다. 그를 처음 만났던 것은 훨씬 전, 그저 신세대 가수들이 나오는 가요 프로그램을 맡는 같은 방송국
내의 PD로써였고, 난 시끄러운 촬영장을 뛰어다니며 일하는 그를 꽤 열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민아씨, 오늘 무대 최고였어!"
"고마워요, PD님!"
그리고 그는 열정적일 뿐만 아니라 넉살도 좋은 사람이었다. 방송국 내에서 종종 부딪히는 그는 언제나 넉살좋게
그를 향해 윙크를 날려대는 섹시 여가수들을 받아넘기고 있었고 그렇다 한들 나와는 별 상관 없는 일로 여겼다.
그가 갑작스레, 그리고 쓸데없이 나에게 접근하기 전까지는.
"대체 왜 맨날 저를 졸졸 따라다니시면서 괴롭히시는데요? 도하진 PD님 일 안하세요? 그리고 저도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니거든요? 써야 할 대본들이 수두룩 빵빵이라구요!"
"난 여자분 만나러 올때는 일같은건 다 해치워 버리고 오는게 철칙이거든요. 그러니까 희수씨는 나 신경 쓰지 말고
계속 하던 일 해요. 난 이렇게 여기 가만히 앉아 있을테니까.
"신경쓰인다구요! 왜 맨날 저희 프로그램 회의실에서 사시는건데요?"
"희수씨가 보고 싶으니까요."
그때 난…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그를 무시했어야 했다. 괜히 말을 걸 필요도, 프로그램 회의실에 찾아올 때마다
인사치레를 할 필요도 업었고, 사소한 것으로 그에게 열을 내서 그런 말을 듣고 할 말을 잃을 필요는…더더욱 없었다.
"어! 윤희수씨 얼굴 빨개졌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그에게 얼토당토않은 놀림을 받을 필요는 더더더더! 없었다. 지금 후회해 봐야 소용 없지만
그건 윤희수 인생 최대의… 아니, 두번째로 최대의 실수였다. 첫째는 유서준이란 남자를 다희 언니와 만나게 한 것,
그리고 둘째는 도하진이란 남자를 얼떨결에 내 인생에 들여놓게 된 것. 그리고 난 그 두가지 모두가 오로지 한사람,
'유서준'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는 걸, 그 때는 몰랐던 것이다.
"윤희수씨, 나랑 밥먹을래요?"
그 때 부터였을까. 우리 프로그램 회의일이 아닌 날에도 내가 회의실을 빌려 대본을 좀 쓸라치면 나타나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대는 그를 신경쓰게 된 것은. 나의 끊임없는 거부와 냉랭한 대답에도 그는 끈질겼고, 당당했으며
무엇보다 무식했다. 그리고 내가 결국 그의 낚시질에 걸려들었던건… 그래, 동정때문이었을 것이다. 동정때문이라
해두자.
"뭐 사줄건데요?"
"우와, 오늘은 '됐거든요?' 이거 안하네!"
"안사줄거면 관둬요."
"아니예요! 사준다니까! 뭐 먹고 싶은데?"
"… 방송국 앞에 있는 설렁탕 집 설렁탕이요. 그리고 왠만하면 존대말과 반말을 섞어 쓰는건 어떻게 좀 해주시죠?"
"OK, 설렁탕! 낙찰!"
그는 언제나 웃고 있었고, 유쾌했다. 가끔은 내 말을 무시하고 듣고 싶은 것만 들어서 날 곤란하게 하기도 했지만,
그런 그에게 나도 모르게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익숙해진다'라는건… 참 무서운 말이다. 난 그 사실을 언니를
통해 한번 배우고도 도하진이란 남자로 인해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넉살 때문인지
난 그에게 아주 급속도로… '익숙해졌다'.
[ 오늘은 하남시에서 유명한 쌈밥집! 어때요? - 하진 ]
그날도 프로그램 회의를 마치고 돌아나오는 길에 '쌈밥!'을 외쳐대는 그의 문자에 나는 픽하고 웃어버렸었다.
난 '매번 자기가 사면서, 돈이 그렇게 많나.'라고 입을 삐죽이면서도 못이기는 척 알겠다는 문자를 보내려고 핸드폰의
키를 두드리며 방송국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리고 난 듣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오히려 듣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아주 우연히 들어버리고 말았다. 도하진, 그남자와 달리 난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능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또 오늘은 우리 처제와 쌈밥을 드시러 가시겠다?"
"어. 그렇다니까."
"진짜 부럽다. 어떻게 하면 윤희수씨한테 그렇게 이쁘게 보이냐? 방법좀 알려주라. 윤희수씨는 나 대할때는
눈에 쌍심지 켜는거 너도 알지?"
"야,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윤희수씨랑 친해지려고 갖은 애를 썼는데! 이 형님 노력을
봐서라도 이제 빛을 볼 때가 된 거 아니냐? 어제 내가 사가라던 순대는… 사갔어? 희수씨가 좋아하는거."
"당연하지! 근데 두 세개 찍어먹다가 들어가더라니까."
"왜그러지? 나랑 갔을 때는 두접시도 먹더니. 윤희수씨는 먹는게 여자들 같지 않아서 좋아."
바보같은 남자들 같으니라고. 그런말은… 조금은 들리지 않게해도 좋았을텐데. 하얗게 변해버린 머릿속에서 그순간
머릿속을 맴도는 한줄기의 문구는 그것 뿐이었다. 나즈막하고 약한 욕설이 힘겹게 입밖으로 새어나오자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노와 배신감, 그리고 슬픔이… 내 마음을 넘어 온 몸 전체를 휘감기 시작했다. 알고 있었다.
그가 유PD의 친구 도하진이란걸, 그리고 가끔 서준의 칭찬을 해준다는건… 몰랐던 사실은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너무도 잔인하게 만나버린 진실은,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사실이란 존재는 그 때의 나에게는 무척이나
버거웠고 아팠다. 그리고 난 결국 부들부들 떨리던 손에 들려있던 핸드폰을 도하진, 그 인간을 향해 힘껏 던져버렸었다.
그 이후 약 2주동안 그의 얼굴에 시퍼런 멍을 만든, 그 핸드폰을. 핸드폰을 맞고, 나를 보았을 때 당황하던 그의
얼굴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희수야!"
"희수야 좋아하네. … 나쁜자식."
그리고 몇일동안은… 글이 써지지 않았다. 몇일동안 집에 틀어박혀 타게 된 잠수 아닌 잠수는 미리 써놓은 대본들의
바닥을 드러내게 했고 메인작가인 내가 회의에도 나가지 않자 구성작가들의 눈물섞인 전화가 빗발쳤다, 아니 빗발
쳤다고 한다. 적어도 나중에 듣게 된 이야기로는. 잠수기간동안 난 핸드폰에게 밥을 먹이지 않았고, 내가 그랬듯
핸드폰은 죽어있었다.
"희수야, 언니랑 얘기 좀 해."
"무슨 얘기."
"프로그램 회의에도 안나가고, 무슨 일 있어? 다들 니가 안나오니까 난리야. 서준씨는 물론이고 하진씨까지 다들
얼마나 걱정을 하는지 알아?"
"걱정은 무슨."
"대본은 왜 안쓰는거야?"
"안써져."
"뭐?"
"슬럼프인가봐… 그래, 슬럼프."
그랬다. 그건 슬럼프였다. 여느때보다는 조금 지독한. 무엇이 내가 글을 못 쓰게 하는지, 그 슬럼프의 원인을 난 알것도
같고 모를것도 같았지만 그마저 귀찮았다. 뭐때문에 힘든건지, 뭐가 날 상처준건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언니
에게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건데… 언니가 내 슬럼프의 원인을 추측해내기까지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늘 서준씨한테 다 들었어, 희수야. 하진씨도 서준씨도 다들 너무했어. 무슨 장난들을 그렇게 심하게 한대니?
내가 이 남자들을 그냥…."
언니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그냥 넘어가고 말았을 것을. 두 남자는 쓸데없는데서 어리석을만큼 솔직했다. 결국 언니는
두 남자들의 '질나쁜 장난'에 무척 화가나 버렸고 처음으로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한동안 만나지 않을 것을 선언해
버렸다. 그 말을 했을때 유PD의 표정이야 난 보지 못했지만 안봐도 불보듯 뻔했다. 그 처절한 모습은.
언니말이 맞았다. 그건 그저 아주 질이 나쁜… 장난일 뿐이었다. 자신에게 까칠하게 구는 처제에게 환심을 사기 위한
귀엽게 보자면 한없이 귀여운 두 남자의 계획이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난 이상하게도 그 장난에 수진이와 말다툼을
할 때 마냥 속좁게 굴고 있었고, 왠지… 내가 상처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기분이 미치도록 싫었다.
이 정도에 상처받는건, 윤희수가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처제, 아니 희수씨. 내가 진짜 잘못 했다니까. 다희가 나한테 얼마나 화내는지 알아?"
내가 방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유서준이란 남자의 모습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물론 그 모습이 나 때문이라기보다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 다희 언니 때문이었을거란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고, 다희언니를 만난 후 그가 더이상 예전의
아이스맨 유서준이 아니란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 낯선 모습은 왠지… 이상했다. 그리고 몇일 후 난 결국 그 모습을
다시 보고 싶지 않다는 듯 못이기는 척 방송국에 출퇴근을 하기 시작했다. '예전의 윤희수'가 되어.
"나랑 얘기 좀…"
"죄송해요, 도PD님. 제가 조금 바빠서요, 그럼 이만."
방송국에서 그는 종종 프로그램 회의가 끝날때까지 기다리기도 했고, 또 나를 향해 먼저 말을 걸어오기도 했지만 난
항상 똑같은 레퍼토리인 '바쁘다'라는 핑계로 그를 피했다. 싸늘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돌아설 때마다 왠지
울 것 같은 그의 표정이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했지만 신경쓰지 않으려 애썼다. 오히려 화난건 내 쪽인데
왜 자기가 그런 표정을 짓느냐고… 화를 냈다. 어쩌면 그렇게 난 도망치고 있었다. 그로부터. 그리고 잠시나마 그에게
'익숙해졌던' 나에게서.
그렇게 하루하루 흘러가는 불편한 나날들이 계속됐다. 접근, 무시, 그리고 접근, 또다시 무시. 쫓고 도망치는 사람처럼
도하진과 나의 줄다리기가 계속되던 어느날, 난 늦은 밤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액정에 뜨는 발신인은
분명 유서준PD. 난 잠을 깼다는 사실에 대한 짜증스러움에 아주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언니한테 걸려다 저한테 잘못건거…"
[ 윤희수씨! 난데…. ]
"뭐예요? 이시간에 저한테 전화거신 거예요?"
[ 지금 하진이랑 여기 아파트 밑에 와있는데 지금 잠깐… 야, 도하진! 너 정신차려!!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지금 어디예요?"
[ 유서준 이 나쁜자식아! 너 나 책임져!! ]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도하진, 그 남자의 목소리에 나는 누워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술을 마셨는지 약간
꼬여있는 발음에 칭얼거리는 목소리는 분명히 '유서준, 너 나 책임져' 라고 말하고 있었다. 잠옷 위에 그대로
아무렇게나 코트를 걸쳐 입으며 엘레베이터를 누르는데 머리가 아파왔다. 이 시간에 이 인간들이 남의 아파트단지에서
왜 깽판을 부리며 술주정인지 원.
"어떻게 된거예요? 둘이 얼마나 마셨길래 사람이 이지경이 돼요?"
내려가서 본 두 사람, 아니 한사람의 꼴은 상상 이상이었다.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는 벤치에 매달려 정신 못차리고
칭얼거리는 꼴이라니. 난 즉시 뒤통수를 한대 갈겨주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둘이 마시다니? 보면 모르겠어? 이 자식 혼자 마신 거라니까! 글쎄 이자식이 나보고…"
"야! 유서준!! 너 나 책임지랬지!!"
"보면 알겠지? 나보고 자기를 책임지래, 맙소사. 그래서 늦은시간에 미안한데… 내가 데려왔어. 내가 책임진답시고
할 수 있는 일은 이 자식 윤희수씨 앞에 끌어다 주는 것 밖에 없거든."
애처로운 표정으로 '딱 한번만'이라고 조르는 아이처럼 나를 바라보는 유PD의 눈빛에 나는 그만 그 자리에 굳어서
어이가 없다는 듯 두 사람을 바라봐야 했다. 대체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건지. 그리고 유서준, 그 남자는 끝끝내
나에게 답을 알려주지 않은채 도하진만을 내 무릎에 팽개치고 자신의 차 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이봐요, 도하진씨… 도PD님… 아 글쎄 일어나 보라니까요, 좀!"
"서준아아아… 윤희수씨가… 윤희수 그 여자가…"
"얼씨구! 내가 그 여자, 윤희수라니까요! 진짜 이남자가 보자보자 하니까!!"
귀에 대고 소리를 꽥 지르자 그는 그제서야 정신이 좀 드는지 깜짝 놀란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금전까지 침대삼아
누워있던 벤치에 제대로 앉았다. 그리고 난 그런 그를 향해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주고는 마지못해 옆의 자리에
걸터앉았다. 잠시 후 그는 이제 뭔가 상황 파악을 좀 해보려는 듯 두 눈을 깜박 거리며 주변을 두리번 거렸고 그러다
내 눈과 마주치자 믿을 수 없다는 듯 한 손으로 눈을 슥슥 비볐다.
"윤희수…?"
"그래요. 내가 바로 그 여자 윤희수거든요? 대체 무슨 일이예요? 지금 이 시간에 남의 집 앞에서…"
"윤희수!!"
마음에 가득 담아둔 잔소리의 반의 반도 늘어놓을 겨를도 없이 난 내 이름을 부르며 와락 달려드는 그의 돌발행동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을 쩍 벌려야 했다. 그가 나를 끌어안자…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나에게 매달리자, 알싸한
알콜향과 뜨거운 열기가 순식간에 밀려왔고 나는 취한 것이 옮기라도 한듯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왜이래요? 미쳤어요?"
"내가… 내가 잘못했어, 희수야. 훌쩍."
… 훌쩍?! 난 믿을 수 없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 보았다. 계속해서 훌쩍거리고 있는 그의 눈가에는 촉촉한
이슬들이 방울방울 맺혀있었고 난 그 모습에 안그래도 벌어진 입을 더 찢어져라 벌려야만 했다. 잠시 후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고 훌쩍이던 그는 다시 내 눈을 한번 쳐다보고는 맘 먹었다는 듯 소리내어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 시간에 여자한테 매달려서, 그것도 술에 취해 엉엉 우는 남자라니!
"왜이래요, 도하진씨! 진짜 미친거예요?"
"내가 잘못했어…."
"알았어요. 알았다니까! 그러니까 이거 먼저 놓고 말…"
"처음에는 진짜 서준이 도와주려고 윤희수씨한테 잘해준거 맞아. 그런데… 진짜 나중에는 아니었단 말이야!!
근데… 근데 유서준 그 자식 때문에 윤희수씨는 나랑 말도 안하고…"
흑흑거리며 말을 잇던 그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아이처럼 으아앙! 하고 목이 터져라 울어댔다. 새벽에 남들 잠 다
깨라고 미친듯 울어대는 남자를 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한 자세로 받아줘야 했고, 무엇보다
이루어 말할 수 없는 쪽팔림을 이를 악 물고 견뎌야 했다.
"시끄러워요! 뚝 못해요? 화를 낼 게 누군데? 울면 다 해결 되는 줄 알아요? 내가… 내가 맘 상한건 어쩔건데요?"
운다고 해서 그의 페이스에 그대로 말려들어갈 수는 없다는 생각에 나는 결국 쌓아뒀던 말을 그대로 털어놨다.
맘같아서는 '이 나쁜자식아, 꺼져버려!'라고 하고 싶었지만… 맘처럼 되지 않았다. 우는 그 남자 때문에 심란해진
마음 탓인지 왠지 서운한 마음만 북받쳐 올랐다.
"울면 뭐가 다 해결되는 줄 알아요? 내가 얼마나 속상했는데! 유서준씨 때문에 나한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데,
내가 기분이 좋겠냐구요! 그런줄도 모르고 도하진씨 친절에 넘어가려고 했던 내가 얼마나 바보같은 줄 아냐구요!
그냥 속으로 욕하고 끝내려고 했는데, 진짜 사람 쪼잔해 보이게 시리 이렇게 또 와서 귀찮게 하고!"
"미안하다니까…."
"시끄러워요! 사과할 필요 뭐가 있어요? 어차피 이전처럼 지내면 되잖아요. 난 나대로, 도하진씨는 도하진씨대로.
문제될게 하나도 없는데 왜 찾아와서 난리예요? 내가 무슨 도하진씨처럼 넉살 좋게 전의 일은 하나도 생각 안난다는 듯
다시 헤헤거릴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이전처럼 지내기 싫어!"
"하, 뭐라구요? 그럼 어쩌자구요? 쌩 깔래요, 나랑?"
"그거 말고!"
"그럼 뭐요?"
"애인하자!!"
.
.
.
그래,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이 남자도 방송 나가서 프로포즈한 유서준이란 남자보다 더하면 더했지 나을게 하나
없는 인간이었다. 이 도하진이란 남자는…그렇다. 그리고 우습게도 아직까지 난 그 남자와 쌩을 까기는 커녕 함께이고
그 역시 나와 함께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도하진이 그렇게 자랑해 마지 않는 '애인'사이다. 남사스러워서 원.
그렇게 얼떨결에 '쌩까는거 말고, 애인'이 되어버린 다음날, 술에 취해있었으면서도 그건 기억이 나는지 방송국 여기
저기 소문을 낸 이 남자 덕택에 방송국 사람들의 놀림 반 축하 반 속에 난 그대로 지구 밖으로 날아가고 싶었었다.
아, 이제야 확실히 생각이 난다. 모든게 다.
"뭐야. 위로해주러 온건 내 쪽인데, 왜 니가 날 그렇게 딱하다는 듯이 바라보냐?"
"에휴."
"뭐야, 그 한숨의 뜻은."
"아무것도 아니예요. 내가 도하진씨를 딱해하는 것 처럼 보여요? 난 내가 딱해서 그러는구만."
"왜, 다희씨가 시집간다니까 서운해서 그래?"
아… 그랬다. 그것도 생각이 났다. 난 시집가는 언니에게 괜시리 토라져서는 떽떽거리고 집 밖을 나온 참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이 남자가 달려왔고, 그리고…. 모르겠다. 정말 하나도 모르겠다.
"서준이 너무 미워하지마. 다희씨한테 정말 좋은 남편이 될거고, 희수 너한테도 그리고 수진이한테도 정말 좋은
형부가 될테니까."
"그런 것 쯤은… 나도 알아요."
그렇다. 나도 그정도는 알고 있다. 언니가 그만큼 사랑할 사람,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는거, 그리고 언니를 그만큼
사랑할 사람도 찾기 어려울거라는거. 그리고 무엇보다 나처럼 까칠한 처제한테 잘보여보려고 그렇게 안어울리게
애쓰는 사람도 다시는 없을거라는거. 그걸 다 알면서도 심술이 나는걸… 어쩔 수가 없을 뿐이었다, 나는.
"그래도 화가나는걸 어떡해요. 갑자기 하루 아침에 우리 언니를 뺏겨버리는 것 같다구 뭐. 그냥 좀 서운한거예요.
난 이렇게 서운한데 언니는 별로 서운해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이런 내 마음, 도하진씨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거예요."
"내가 모르긴 왜 몰라? 말했었나? 나한테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누님 한 분 계시다고. 나 그 누님 시집가실 때 시집가지
말라고 떼 쓰면서 누님 드레스에 매달려서 울었잖아. 누님도 지금까지 그때 자기 드레스 찢어지는 줄 알았다고 얼마나
놀리시는데. 진짜 지금은 완전히 아줌만데, 내가 그때 왜그랬나 몰라. 누나고 언니고, 다 그런 것 같아. 자기와 가깝다고
느꼈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다른 사람의 사랑하는 이가 되어버린다는건, 역시 썩 기분 좋은 일만은 아니지."
드레스에 대롱대롱 매달려 울어대는 도하진이라… 나는 문득 상상이 돼서 피식 웃어버렸다. 아, 정말 웃기게도
작은 몸의 도하진은 상상이 되는데 이보다 어린 시절 그의 얼굴이 상상이 안됀다! 완전 코미디네.
"그래도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언니가 훨씬 아까운 것 같아요. 우리 언니가 얼굴도 훨씬 이쁘지, 몸매도 이쁘지
무엇보다 성격도 좋잖아요!"
"글쎄, 그건 좀 생각을…"
"그리고 무엇보다 수의사니까, 직업도 확실하고 얼마나 좋아!"
"이봐, 윤희수양. 당신도 알잖아? 서준이도 나름 잘나가는 PD라고."
"그래도 우리언니는 '사'자 돌림이라구요!"
씩씩거리며 억지를 쓰는 나를 보고 그는 소리내어 웃어보이더니 이내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이럴 때 그의
모습은… 꽤나 어른스럽다. 나이차이 무시하고 화나면 그에게 반말에 이름까지 막불러대지만 그래봤자, 이럴때는
그가 확실히 나보다 어른이란걸 새삼 실감하게 된다.
"으이구, 우리 희수, 아직 이렇게 어려서 내가 고생이다. 언제 키워서 데려가냐? 이제 진짜 앞차도 떠났는데."
"글쎄요. 도하진씨 말대로 다 키워서 데리고 가려면… 막차 떠날 때 쯤이면 될지도 모르겠네요."
"막차? 막차면… 우리 꼬마아가씨 말하는거야? 으아악! 이 여자야, 지금 수진이가 몇살인데!"
"올해로 11살이죠."
"이건 말도 안돼! 난 내가 유서준보다 늦게 장가갈거라고 생각도 안해봤다고! 유서준 그 인간한테 처형소리 하는것도
열받아 죽겠는데, 막차 떠날때 데려가라고? 날 아주 홀아비로 늙혀 죽여라 죽여."
가슴을 탕탕치는 그를 바라보며 한참동안 배를 잡고 웃었다. 웃고나니, 뭔가 가슴에 응어리져 있던 것이 조금은
풀어진 기분이었다. 확실히 난… 아직 어리다. 언니가 시집가는데 싫은 소리를 하고, 언니가 우리 가족이 아닌
또다른, 자신만의 가족을 갖는 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할만큼.
하지만… 적어도 난, 이렇게 자라는거란걸 알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가는 것을 지켜보고,
그것을 축하해주는 만큼 나도 이렇게 좋은 사람을 만났으니… 주는만큼, 그리고 잃는만큼 다시 돌아오는 또다른
사랑을 적어도 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언니랑 형부… 결혼식 얼마 안남았죠?"
"아마 그럴걸."
"거기서 도하진씨가 축가 부르면, 막차보다는 빨리 떠나는걸 고려해보죠."
"뭐?! 야, 난 엄연히 사회라는 직책이 있다고! 사회보면서 축가까지 부르는, 그런 꼴사나운 인간이 어딨어?!"
"어딨긴요. 여깄죠."
* * *
"너무 예쁘다, 언니."
새하얀 웨딩드레스에 면사포를 쓴 언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였다. 눈이부셨고, 아름다웠다. 정말 너무
아름다워서 주책맞게 눈가에 습기가 차올랐다. 언니는 그런 나의 얼굴을 흰 장갑을 낀 손으로 어루만졌다.
언니의 따뜻한 손이 왠지 아쉽고 섭섭했다. 이제는 이 손으로 한 남자의 손을 잡고 살아간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언니없는 집은 역시 허전할거야."
"가까운데 뭘. 동물병원에도 니가 자주 놀러올거고, 또 방송국에서 볼거고. 여태까지 그랬듯이 우리 같이 있는 시간이
떨어져 있는 시간보다 훨씬 많을거야. 집에도 와서 자주 자고가."
"어이구. 내가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인 줄 알아? 형부한테 미움 살 일 있어?"
"역시 우리 처제는 센스가 만땅이라 좋다니까. 글 쓸때 나오는 센스가 따로 있는게 아니야."
이제는 익숙한, 아부가 철철 흘러내리는 목소리에 나는 가볍게 눈을 흘기며 뒤를 돌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언니와 동생의 마지막 인사까지 방해하러 납신 형부 유서준님과, 얄밉게 웃고 있는 도하진, 두 사람이 서있었다.
각각 턱시도와 양복을 차려입은 두 사람의 모습은, 드레스를 입은 언니보다는 못했지만 제법 나쁘지 않았다.
"이제 그렇게 아부하실 필요 없겠어요? 결혼도 하시니까."
"아부 아니라니까. 사람의 진심을 그렇게 무시하면 쓰나."
"말했지만, 우리 언니한테 잘하세요. 안그러면 나 진짜 가만 안있을테니까."
"알겠습니다, 처제마마!"
형부의 장난섞인 대답에 다희언니는 웃음을 터뜨렸다. 분명히 웃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웃고 있는 언니의 두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갔다. 정말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두 자매의 눈가가 좀처럼 마르지를 않는다.
"울지마. 좋은 날 울긴 왜 울어? 신부화장 지워지면 그거야말로 완전 호런거 알지? 그러니까 울지마."
"응. 알았어."
"이제 겨우 시작이잖아. 엄마랑 아빠 딸 시집보내면서도 입 찢어지시는 것 좀 봐라. 언니가 울면 엄마 아빠만 우스워
진다니까. 아마 딸 팔아넘기는 부모들로 보일걸?"
"풋. 그런가?"
"그럼. 언니… 언니 알지? 언니는 항상 나한테 있어 최고였어. 난 정말 언니가 좋았어.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거야."
"희수 너도… 좋은 동생이야."
"행복해 언니. 세상에서 제일로 행복해야해."
"너도… 너도 꼭 행복해져, 희수야."
행복해진다는건, 참 막연한 말이다. 아주 어렵지만 쉽고, 또 아주 복잡하지만 쉬운 말. 우리에게 있어 행복은 어떤걸까.
아직은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건 유서준이라는 한 남자에게 가는 언니가 웃고 있고, 웃는 언니는 행복해보이고,
또 그런 언니를 보는 나도… 웃고 있다는 사실. 우린 자신이 웃을 때,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웃고 있을때
그걸 '행복'이라고들 한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지금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다.
"언니들 준비 다했어? 시작하겠어!"
잠시 후 들러리를 한다고 꼭 자기들이 결혼이라도 하는 것 처럼 빼입은 한영이와 수진이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미니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녀석들은, 역시 귀여웠다. 이제 그래도 11살이라고 제법 어른인척 하는 수진이는
결혼식 전날 언니와 꼭 끌어안고 펑펑 울던 나에게 '고만좀 울어!'라며 핀잔을 주었다. 자기도 큰언니 시집간다고
한참이나 훌쩍거린 주제에.
"준비 다 됐어! 자, 신부님 입장하십니다!!"
* * *
"하루종일 정신 없었지?"
신혼여행을 떠난 언니 부부들을 마중하고 왠지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 털썩 주저앉아 있더 나의 눈 앞에 갑자기
캔커피 하나가 나타났다. 멋적게 웃으며 커피를 흔들어 보이던 그, 도하진은 어느새 내 옆에 따라 앉고 있었다.
암튼, 이 사람은 내가 조금만 울적해지려고 해도 틈을 안준다 틈을.
"축가 연습 조금밖에 안했죠? 무슨 남자가 노래를 그렇게 못한데?"
"못하긴 뭘 못해! 다들 잘했다고 칭찬하고 좋아해주더만."
"그게 칭찬하면서 좋아하는걸로 들렸어요? 사회보던 사람이 '잠시 후 축가가 있겠습니다' 하자마자 지가 나가서
마이크 잡고 있으니까 다들 웃겨서 웃은거지. 푸풉."
"야! 시킨게 누군데!!"
그는 갑자기 아까 일이 생각나 쪽팔린단 듯 얼굴을 붉히며 괜시리 화를 냈지만 난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여유롭게
캔커피를 땄다. 캔커피를 따고 올려다본 하늘은… 참 파랗고 예뻤다.
"우리 언니… 참 행복해 보였죠?"
"응. 서준이도 참 행복해 보였어."
"다행이예요. 두 사람이 행복해서."
"응… 그래서 말인데 윤희수."
"왜요?"
"우리도… 행복해지자."
"그래요. 까짓거 그러죠 뭐."
"진짜지?"
"아 진짜, 행복하자는데 또 왜이래요, 사람 무섭게."
퉁명스러운 나의 대답에 그는 씨익 웃어보이더니 그가 내 눈앞에 아까 캔커피를 내밀던 때 처럼 무덤덤하게 작은
케이스 하나를 내밀었다. 얼떨결에 그 케이스를 받아든 나는, 뚜껑을 열자 눈 앞에 반짝이고 있는 조그마한 것에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그렇게 한참동안 넋을 놓고 그것을 바라보던 나는 결국 가볍게 뚜껑을 닫았고, 닫혀진
케이스를 다시 그에게 내밀었다.
"아, 배고프다. 밥먹으러 가요 우리. 밥이나 먹게."
"지금 밥 얘기가 나와? 나 지금 프로포즈 한거야!"
"누가 뭐래요? 그래도 배가 고프다는거지. 난 축가부르면 막차 전에 가는걸 고려해보겠다고 했지 당장 차 출발하자고는
안했어요. 그러니까 밥이나 먹으러 가자구요. 그리고 남자가 무슨 이렇게 무드가 없어요? 이래뵈도 내가 작간데.
어느정도 기본적인 무드는 맞춰줘야 하는거 아닌가? 시시하게 이게 뭐래. 갑자기 반지하나 척. 자기가 장동건쯤
되면 몰라. 이렇게 프로포즈 하면 내가 예, 알겠습니다, 시집가죠, 할 줄 알았어요? 누구는 방송나가서 멋드러지게
프로포즈 하는 마당에."
"어어? 그 누구보고 미쳤다고 할때는 언제고?"
"미친건 미친거고, 부러운건 부러운거고. 아, 자꾸 말시키지말고 밥이나 먹어요 우리. 배고프다니까."
밥이나 먹으러가자며 그를 일으켜 세우려 낑낑거리자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어버리고는 모처럼 언니 결혼식
이라고 한껏 말아올린 내 머리를 헝클어 놓았다. 이게 몇시간동안 공을 들인 머린데!
"그래, 밥이나 먹으러가자. 뭐 먹을래? 이 근처에 청국장 맛있는집 있는데, 거기로 갈까?"
"누가 그런거 먹자 그랬나? 비싼거 사줘요. 언제는 나보고 여자처럼 안먹는다면서? 뭐 나는 여자처럼 먹을 줄 몰라서
안먹는 줄 아나?"
"야, 쪼잔하다. 그걸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어? 그건 윤희수가 다른 여자들처럼 내숭 안떨고 나랑 입맛 맞아서
좋다는 뜻이었는데! 뭐 싫다면 할 수 없지. 그럼 비~싼 프랑스 요리 먹으러 갑시다, 윤희수씨."
"프랑스… 요리요?"
"왜, 싫어?"
"음… 역시… 그래도 청국장이 낫겠어요."
할 수 없다는 듯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청국장'을 외치는 나를 향해 그는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 환하게 웃어보였다.
뭐 그래도 별 수 없지. 조금씩 감질맛나게 나오는 프랑스 요리를 기다리느니 구수한 청국장이 입맛에 맞으니.
그러니까 청국장도, 또 그리고 도하진도 내 취향인거 아니겠어?
나는 앞장서서 차 문을 여는 그에게 살짝 팔짱을 꼈다. 따뜻한 사람의 체온은 역시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그리고 난… 어쩌면 언니가 말했던 그 '행복'을 이 사람과 함께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느 작은 기대를 해본다.
나보다 나이도 많고, 또 가끔은 어이없게 아이처럼 엉엉거리며 울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주 가끔은 귀여운,
이 도하진이란 남자와 함께.
그러고보면… 이 '짜가 스파이'의 임무는 완벽한 성공이다. 그것도 기분나쁘지만 나, 윤희수란 여자까지 덤으로 얹어서.
MISSION SUCCESS!
[ 방송국 옆 동물병원 : 에필로그 ]
- And then…. ( 그리고 다시 1년 후. December . 2009 )
"언니, 우리 왔어."
어둑해진 12월의 저녁, 다희는 동물병원의 문을 닫기 위한 준비를 하다말고, 딸랑거리며 열리는 문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크리스마스를 기념한 거리의 조명들이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새어들어오기도 이전에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들을 확인한 다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녀가 그 누구보다 사랑했던,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느때와 같이 밝은 얼굴로 다희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대체 어떤 빌어먹을 회사가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일을 시키냐고, 대체."
퉁퉁 불은 얼굴로 투덜거리며 다희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서준을 향해 다희는 가볍게 눈을 흘겼고 서준은 그런
다희의 눈흘김을 확인하자마자 고개를 움츠렸다. 다희는 분명 서준의 '빌어먹을'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었고 그것은 다희가 요즘들어 몇번씩이나 주지시키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서준이 다희에게 '실수'라는 짧은말로
용서를 구하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하진이 다희에게 좀 더 혼나라는 듯 얄미운 한마디를 던졌다.
"쯧쯧. 넌 애를 둘씩이나 둔 아빠가 되가지고선 '빌어먹을'이 뭐냐, '빌어먹을'이? 안그렇습니까, 다희씨?"
"야, 도하진! 넌 또 다희씨가 뭐냐 다희씨가? 형수라고 불러라. 아니면 예비 처형이라고 부르던지.
그나저나 우리 봄이랑 여름이는 뭐하나?"
서준이 고개를 쭉 빼내고 주위를 두리번 거리자 다희는 진료실 옆의 작은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말을 하는 다희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가득히 걸려있었다.
"지금 다봉이랑 서봉이랑 놀다가 막 잠들었어요. 요즘 같아서는 여기가 육아소인지, 동물병원인지 구분이 안가요."
"그게 누구 탓이겠어. 다 능력좋은 형부 탓이지. 덕분에 우리도 여기까지 납셨잖아. 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왠일인지 아까부터 별말없이 따뜻한 커피만 들이키던 희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능력좋은 형부'란 말에 서준과
하진이 키득거렸고 다희는 금새 뽀얗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랬다. 서준과 다희는 신혼여행에서 재주도 좋게
일명 허니문베이비를 갖아 돌아온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허니문베이비'들'이었다. 말그대로 능력이
지나칠 만큼 좋았던 서준과 다희는 그 어렵다는 쌍둥이를 갖음으로써 남들이 두번에 할 일을 한번에 해치웠고
두 사람의 귀여운 남,여 쌍둥이의 이름을 봄, 그리고 여름이라 붙였던 것이다. 두 꼬마 아가들은 다희가 일하는
동물병원에서 종종 시간을 보내곤 했고, 오늘도 다봉이, 서봉이(다희가 후에 다봉이가 자신을 의미하는 거라는
사실을 알고 새로 마련해서 기른 강아지)와 함께 놀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었다.
"그렇게 말하면 섭하지 처제. 그래도 모처럼의 크리스마스인데 부부가 오붓하게 보내야하잖아?
게다가 그냥 크리스마스인가? 결혼하고 처음 제대로 맞는 크리스마스라구."
"그렇다고 애아빠란 사람이 애를 팽개치고 나가 놀아요?
"팽개치긴! 봄이랑 여름이를 너무 귀여워하는 이모한테 잠시 맡겨두는것 뿐이지. 거기다 이게 뭐 나좋자고 하는건가?
이렇게 해서 내가 하진이 녀석이랑 단 둘이 오붓하게 있을 공간을 마련해주잖아. 이게 다 누이좋고 매부좋고,
아니지. 형부좋고 처제좋고라니까. 안그래?"
눈을 찡긋해 보이며 입심 좋게 한바탕 늘어놓고는 자신의 어깨를 툭툭치는 서준을 희수는 그저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유서준이라는 남자를 알게됨으로써 세상에는 여자가 아줌마가 되는 것 보다 남자가 아저씨, 아니 정확히
말해서 유부남이 되는 것이 더 무섭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중이었다. 요즘의 서준은 분명 공처가이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봐서는 능구렁이, 그 자체였으니까.
"그런 말 같은 소리좀 그만하시고 가실거면 빨리 나가세요. 애들 깨겠어요."
"역시 우리랑 같이 있는것 보다는 하진이랑 둘이 있는게 좋은가보지?"
"형부!!"
희수가 소리를 빽 지르고서야 서준은 희수의 심사를 건드리는 일이 꽤나 즐겁다는 듯 킥킥거리며 코트를 집어들었다.
다희는 희수에게 장난 좀 그만치라며 서준을 향해 가늘게 눈을 뜬 것도 잠시, 금새 서준을 따라 나설 채비를 시작했다.
다희를 향해 어서 가자며 재촉하던 서준이 다희의 어깨를 감싸자 다희는 따스하게 웃어보였고, 그런 두사람을 팔짱을
낀 채 바라보던 희수는 못마땅한 듯 물었다.
"사람도 많은 이 크리스마스날 대체 어디가는건데요?"
"글쎄, 나야 뭐 유서준씨가 가자는데 가는거지. 지금 어디가는거예요 우리?"
희수와 다희의 물음에 두 눈을 둥글둥글 굴리던 서준은 아무말 없이 다희의 등을 떠밀어 문밖으로 내쫓았다. 자기가
하는 말을 다희는 듣지 말아야 한다는 듯이. 다희가 나가자마자 뒤따르던 서준은 다시 고개를 동물병원 안으로
밀어넣었고 어리둥절해 앉아있는 하진과 희수를 향해 단 한마디를 남긴채 사라져버렸다.
"가을이랑 겨울이 만들러 간다!"
"뭐라구요? 우리 언니를 죽이려고!! 돌아와 언니!!"
서준의 짓궃은 말에 열을 올리던 희수는 기어코 서준과 다희를 뒤따라 나갔고, 서준은 이미 그럴 걸 예상했다는 듯
먼저 문 밖에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다희를 차에 태워 달아나 버렸다.
허니문 베이비를 이제 막 나서, 아직 몸도 못 푼 사람한테 또 애를 갖으라니!
희수는 서준이 떠난 후에도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씩씩거렸고, 하진은 그런 희수를 바라보며 키득거렸다. 매일 진담
섞인 장난을 걸어대는 서준도 서준이지만 그 장난에 일일이 반응하며 화를 내는 희수도 재미있었다.
"아니,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난 화가 나 죽겠는데. 형부, 아니 유서준씨 저 남자는 우리 언닐 죽일 셈이라구요!"
"웃긴 걸 어떡해. 그리고 우리가 남의 가정 2세 계획에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잖아."
"그래도 봄이랑 여름이 한꺼번에 생긴지 얼마나 됐다고 가을이랑 겨울이를 만들겠다잖아요! 내가 이름 시리즈물로
지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분명히 봄, 여름, 가을, 겨울 다 채우고 말거라니까요!"
"그러게… 좀 알아보지 그랬어. 내가 볼적에는 사계절에서 끝나면 다행이다. 다음에는 진사오미로 십이지신이나,
갑을병정으로 안가면 다행이야."
"야, 도하진!!"
심드렁한 표정으로 별일 아니라는 듯 말을 이어가던 하진은 희수의 입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온 반말과 자신의 등을
강타하는 손바닥에 그제서야 정신이 든다는 듯 자세를 고쳐앉고는 정말 아프다는 듯 등을 문질러댔다. 희수와 사귀고
난 이후로 거의 매일같이 느끼는 사실이지만… 희수의 손은 매웠다.
"지금 남일이라고 그렇게 막 말할거예요? 우리언니가 무슨 애낳는 기계인가?"
"아… 아니, 말이 그렇다는거지. 그리고 솔직히 서준이가 다희씨가 임신하는걸 원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어, 몰랐어? 다희씨 방송나가고 나서 인기도 많아지고 동물병원에 찾아오는 남자들 늘어서 저자식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잖아. 오죽하면 방송국 안에다 동물병원 차려놓고 싶댄다. 애들도 보고 다희씨도 본다고. 간판도 '방송국 옆
동물병원'이 아니라 '유부녀의 동물병원'으로 하고 싶다나 뭐라나.'
"뭐라구요?!"
"황당해하지마. 나도 충분히 그 자식 정상이 아닌 것 같으니까. 어떻게 인간이 저렇게 순식간에 망가지냐? 제가
얼마후에 국장님 뒤 이을거 생각하면 끔찍하다니까. 아마 다희씨가 좋아하는 동물프로그램만 내보내는 동물
다큐채널이 되지 않을까 싶어. 그 때를 대비해서 다큐 촬영을 배워둬야 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암튼 유서준이나
나나 여자 하나때문에 참…."
"참 뭐요?"
하진의 넋두리를 듣고 있던 희수의 두 눈이 순식간에 세모꼴로 변했다. 하진은 그런 희수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채고
잠시 할 말을 잃은 채 희수를 바라보다가 침을 꼴딱 삼켰다. 윤희수 앞에서는 입조심만이 살길이란걸 잠시나마 망각한
결과였다.
"참 달라졌다고. 긍정적인 의미로."
금새 헤실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는 하진의 모습에 희수도 더이상 꼬투리를 잡지 않고 한번 봐주기로 마음먹었다.
희수는 '이번 한번만 봐준다'는 식의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하진을 향해 눈을 한번 깜박이고는 옆에 놓여 있던 노트북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들었다. 노트북의 전원을 켜는 희수의 모습에 눈이 휘둥그래진건 역시 하진이었다.
"뭐야? 설마 지금 이 황금같은 크리스마스에 일을 하겠다는거야?"
"크리스마스에는 일하지 말란 법도 있어요?"
"말이나 돼? 기껏 둘이있게 됐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둘이 아니라 저 안에서 자고 있는 봄이랑 여름이까지 넷이예요. 그리고 드라마 방영일 얼마 안남아서
대본쓰느라 정신 없다고 말했잖아요."
희수는 하진에게 어린애처럼 칭얼거리지 말라며 단단히 주의를 주고는 울상을 짓고있는 하진을 애써 모른척하며
바탕화면에 떠 있는 폴더 하나를 클릭했다. 클릭하자 마자 떠오르는 수많은 대본들은 근 1년간 희수가 심혈을 기울여
써 온 드라마 대본들이었다. 대본의 첫장 제목에 '방송국 옆 동물병원'이라는 작은 글씨가 곁에 있는 하진의 눈에도
들어왔다.
"이게 우리가 주인공이라는 그 새 드라마 대본이야?"
"왜 '우리'예요? 정확히 말하자면 주인공은 우리 언니고, 형부지."
"어쨌든 우리도 나오잖아. 햐, 진짜 신기하다니까. 빨리 방영 시작했으면 좋겠다."
들뜬 듯한 하진의 목소리에 희수는 퉁퉁 불은 목소리로 자기는 시간도 촉박하고 바빠 죽겠는데 속없는 소리를 한다며
다시 한번 하진에게 가벼운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수정을 위해 대본을 훑어내려가는 희수는 자신의 입가에 떠오르는
작은 미소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간 기회가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락프로그램 작가만 맡아왔던 희수가 처음으로
쓴 드라마였고 1년동안의 노력들이 곳곳에 배어있는 대본들을 바라보노라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 희수는 대본
안에서 이름만 바뀐 서준과 다희를 비롯한 그들의 이야기를 바라보며 파노라마처럼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그간의 일들을
떠올렸다. ANIMAL LOVE의 방송 시작부터 다희와 서준의 결혼까지. 아주 천천히 느긋하게, 그리고 빠르게 지나온
이야기들이 대본 곳곳에 스토리가 되고 그들의 흔적이 되어 남아있었다. 거의 완성된 대본을 보며 기뻐하는 희수의
모습을 눈치챈 하진이 옆에서 거들었다.
"그래도 서준이한테 조금은 고맙지? 드라마 데뷔를 한참이나 망설이던 작가 윤희수에게 소재를 제공했잖아."
"그건 형부 덕이 아니라 우리 언니 덕이라고요."
"서준이 덕이고, 다희씨 덕이고 또 우리 모두의 덕이지. 그러니까 우리 모두의 이야기잖아."
하진의 말에 희수는 빙긋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하나하나가 소중한 이야기,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없이 어떻게 이런이야기를 만들 수 있었으며 또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그런데 어떻게 이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 생각을 했어?"
"그냥… 나름대로 느낀바가 많아서요."
"뭐가?"
"지난 시간동안 두 사람을 보면서 많이 생각했어요. 아 저런게 사랑이구나, 저런게 행복이구나. 그동안 드라마나 영화,
그리고 소설에서 보던 거창하고 대단한 것이기 보다는 그냥 저렇게 서로를 원하고, 서로가 행복하기를 바라고, 그래서
함께 웃고… 그런거 말이예요. 그런게 사랑이고, 그만큼 소소하고 소박한 것들이 행복이고. 뭐 그냥 그런 생각들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 작고 따뜻한 것들을… 써보고 싶었달까."
작은 목소리로 이어지는 희수의 말들에 하진은 씨익 웃어보였다. 그건 꽤나 마음에 든다는, 하진의 표현중 하나라는걸
희수도 알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을리가 없었다. 이건 말 그대로 그들 모두의 이야기였으니까.
"그나저나 이게 먹힐지 모르겠네. 드라마제작국에서 드라마화한다고 하니까 대본을 넘기긴 하지만, 이게 드라마화할
거리가 되는지 모르겠다구요."
"걱정마. 이건 대박일테니까."
"피, 그걸 어떻게 알아요?"
"윤희수. 내가 우리도 행복해지자고 했던말… 기억해?"
뜬금없는 하진의 물음에 희수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함께 한 이후로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말 그대로 '함께
행복해지기'위해 노력해왔던 희수와 하진이었다. 희수도, 하진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다. 결혼하고 행복해하는
다희와 서준을 보며 더 그런 생각을 하게 된건 둘 중 어느 한쪽의 이야기만이 아니었을테니까. 그런 하진이 직접 말로
행복해지자ㅡ라고 이야기 했던건… 희수의 기억이 맞다면 딱 한번이었다. 서준과 다희가 결혼했던, 1년전의 그날.
희수는 그 날이 떠올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그 날 프로포즈 했는데 매몰차게 거절당한 것도 기억해?"
"또 누가 매몰차게 거절했다고 그래요? 제대로 된 프로포즈 할때까지 보류하자고 했던거지. 그 후로 프로포즈의 프자도
안꺼낸게 누군데 그래."
"그래서 말인데…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이 가요 프로 PD를 벗어날 수가 없을 것 같거든. 한마디로 서준이처럼
시상식에서 상을 탈 일도 별로 없을 것 같고, 방송으로 프로포즈하기도 힘들것 같다 이거지."
사뭇 심각한 하진의 말에 희수는 그만 풋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장난 반 진심 반으로 해본 말이었는데 이 남자는
아직도 그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나보다하는 생각이 들자 자기 눈 앞에 앉아있는 남자가 귀여워 참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능력있고 인정받는다해도 가요 프로그램 PD가 새삼스레 상 받을 일은 어느 시상식에서건 전무했다.
그야말로 어느날 갑자기 대통령 표창장쯤 받게 되면 몰라도. 그렇자면 설마 그것때문에 지난 1년동안 남몰래 맘고생
하며 프로포즈도 못했단 말인가?
"그래서요?"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내가 무진 애를 써도 그건 힘들 것 같고, 난 어떻게든 윤희수랑 행복해지고 싶어."
"난 지금도 충분히 행복한데?"
"누가 아니래! 하지만 내가 말하는 행복은 남의 2세 계획 걱정하지말고 우리 2세계획을 걱정하는, 그런거라고!
윤희수는 젊을지 몰라도 내 나이를 생각해 봐라, 내 나이를."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탕탕치며 평소 이야기하면 싫어하는 나이차까지 들먹이는 하진때문에 희수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프로포즈 전에 2세계획이라니! 얼굴에 철판을 깔았나!
"그래서요? 요지가 뭐냐구요."
"그래서 말인데… 이 드라마 대박나서 윤희수가 상 타면 내가 프로포즈 하는 대신 윤희수가 나한테 프로포즈 해 주면
안될까나?"
"하! 뭐라구요?!"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하진을 향해 희수는 기가 차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방송에서 여자인 나보고 프로포즈를 하라고?
말도 안돼! 차라리 저 남자랑 노처녀, 노총각으로 늙어죽고 말지! 그런 농담은 농담이라도 끔찍했다. 물론 하진 딴에야
많이 고민해서 생각해낸 수이겠지만.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말이 안될건 또 뭔가? 그렇게 싫어? 뭐 할 수 없지. 그게 정 싫으면… 그냥 내가 프로포즈 할 때 눈감고 받아주던가."
말을 마친 하진은 희수에게 작은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상자안에서 반짝이는 작고 둥근 것은 1년전에 보았던, 그리고
어쩌면 희수가 지난 1년동안 남몰래 기다려 왔을 바로 그것이었다. 반짝이는 은빛 반지에 그것을 바라보던 희수의
눈이 감동을 잠시 일렁이다가 그것을 담고 있는 상자에 꽂혔다. 분명 반지는 1년전에 봤던 그것이 분명한데 그것을 담고
있는 상자는 그 때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풉… 이게 뭐예요?"
희수는 그제서야 자신의 눈길을 끈, 그리고 여타 다른 반지 케이스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의 그 상자가 다름 아닌 TV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하진의 머쓱한 표정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고민을 하고 머리를 굴렸을지, 안봐도
뻔했다.
"이런식으로 TV에 나왔다고 우기시겠다?"
"비웃지마! 내가 이거 생각해내느라 얼마나 애먹었는데. 그래서… 결혼 할거야, 말거야?"
희수는 쑥스러워 청혼을 하다못해 윽박지르는 하진을 바라보며 웃어보였다. 입은 웃고 있는데 왠지 눈가가 축축했다.
왜 여자들은 사랑하는 남자의 입에서 결혼하자는 말을 들으면 눈물이 나는걸까. 생각해보면 다희도 그랬었던 것 같다고
희수는 생각했다. 그녀 역시 1년 전 서준이 프로포즈 하던 그 날, 웃고 황당해 하면서도…울고 있었다. 그리고 희수는
처음으로 왠지 그 이유를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넘쳐서…. '결혼하자'라는 그 한마디에 가슴이 벅찰
만큼, 그래서 주체 할 수 없을 만큼 사랑이 넘쳐서… 넘치고 넘쳐서 투명하고 맑은 것들이 눈에서 떨어져 나온다는 걸.
희수는 하진이 손에 들고 있는 상자를 받아들었다. TV에 나온 반지는… 예뻤다. 결혼하자고 말하는 그는 나이에 안맞게
귀여웠다.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희수는 하진에게 다가가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또다른 사랑을 시작하는
'결혼'이라는 소중한 말로 자신의 감정을 흘러 넘치게 한, 그의 입술에.
창 밖으로 흰 눈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반짝이는 거리의 전구들과 동물병원 안의 동물들 만이 소리를 죽여 두
사람을 바라보는 그런 밤이었다. 부끄러운 듯 빨간 불빛을 내는 전구와 모른 척 시침 뚝 때고 붙어 있는 병원의 간판이
환한 불을 밝히고 있었다. 하진과 희수가 수줍게 입을 맞춘 그곳, 봄과 여름이가 잠들어 있는 그곳, 어쩌면 내년 쯤
가을이와 겨울이도 잠들어 있을지 모르는 그곳… 그리고 다희와 서준이 처음 만나고 서로에게 다가갔던 그 곳.
'방송국 옆 동물병원'의 간판은 오늘도 그렇게…환한 불을 밝히고 있었다.
꺼지지 않는 그들의 사랑, 그리고 행복처럼.
* 작품명 : 방송국 옆 동물병원
* 작가 : 이렌느 (
skyblue-sun@hanmail.net
)
* 출처 : 아름다운소설 (
http://cafe.daum.net/date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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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렌느] 방송국 옆 동물병원 * 번외&에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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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7.04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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