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 만에 돌아보는 고국의 모습-
교촌마을
최근 경주에는 새롭게 떠오르는 한옥마을이 있다. 바로 경주 최부자 고택이 있는 ‘교촌마을’이다. 경주로 여행을 떠나면 많은 분이 첨성대와 계림등은 많이 찾지만, 교촌마을은 의외로 잘 모르는 분들이 많다. 사실 교촌마을은 첨성대와 계림에서 불과 5분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있는데도 말이다.
경주 교촌마을은 신라 신문왕 2년(682)에 한반도 최초의 국립대학인 국학이 있었던 곳으로, 이후 신라의 국학은 고려의 향학, 조선의 향교로 이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향교가 있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교동’, ‘교촌’, ‘교리’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동(洞), 촌(寸), 리(里)는 모두 마을의 의미를 가진 한자이기 때문에 다 같은 의미가 되는 것이다.
교촌마을이 유명해진 것은 가난한 이웃을 도우며,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던 경주 최부자의 고택이 있기 때문이다.
교촌마을 중심에는 99칸 저택이 있던 경주 최부자집이 있고, 그 앞쪽으로 옛 요석궁 자리에 지어진 큰 저택을 볼 수 있다.
마을에는 오래된 고택들이 여러 채 남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공개하지 않아서 내부를 볼 수는 없지만, 조선 시대 양반가를 중심으로 형성된 반촌마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조선 시대에도 경주를 찾는 유력인사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며, 주로 최 부자 집을 비롯하여 이곳에서 숙박하면서 경주를 여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 씨 고택을 둘러보다가 눈에 띄는 현판을 발견했다. 최씨 집안의 여섯 가지 행동지침인 육훈(六訓)과 여섯 가지 수신(修身)인 육연(六然)이 기록된 현판이었다.
육훈 중에서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고, 흉년 기에는 땅을 놀리지 말며, 주변 100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는 말이 참 와닿았다.
지금도 그런 행동은 쉽지 않을 일이기 때문이다.
경주 최부자 집안의 ‘육 훈’과 ‘육 언’은 그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 이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교촌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볼거리, 먹을거리 등이 많았다. 이곳에서도 한복 대여점이 있어, 예쁜 한복을 입은 연인과 아가씨들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한옥마을에서는 역시 한복이 특히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교리김밥’을 찾았다. ‘백종원의 3대천왕’과 각종 방송에 많이 소개되어 전국 3대 김밥집 중 하나로 알려진 곳이다.
교리김밥은 엄청난 달걀 지단이 압권이다. 밥보다 많은 달걀 지단 때문에 지꾸 먹게 되는데, 맛은 호불호가 있겠지만 약간 짭짤하고 고소한 맛 때문에 지꾸 먹게 되는 것이 묘한 중독성이 있는 듯했다.
경주 교촌마을을 다니다 보면 왠지 전주 한옥마을의 축소판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거리의 분위기가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전주 한옥마을에 비하면 경주 교촌마을의 규모는 작은 편이지만 인근에 첨성대, 월성, 계림 등 중요한 신라유적이 많이 분포하고 있어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참 많은 곳이다.
Sand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