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주말마다 오름에 다니면서, 오름 산행 후기로 작성했던 내용입니다.
1984년도 국군의날 행사부대는 33대대였습니다. 우리 32대대에서도 약 60여명이 참가했었기에 그 내용을 여기 올려봅니다.
저는 82년도 10월 경부터 6중대 2소대장으로 근무했던 '이봉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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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리 입구 4거리에서 따래비오름으로 가는 농로 진입로에서 차량 석 대는 좌회전 농로를 따라 앞에 가고 차량 두 대는 미처 따라가지 못하여 성읍리 방향으로 한참 진행한 후에 다시 돌아오는 황당한 일이 있었다. 맨 앞의 선도 차량을 운전했던 내가 너무 빨리 가버려 발생했던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었다.
차후 교훈으로 삼고자 이 사건의 원인을 분석해보면, 그 발단은 내 차 안에 있던 '해병전우회' 신문 한 장에서부터 출발한다. "이 신문 구독료 냄수과?"(강태화 - 해병 423기), "아, 난 3만원 내쪄."(김중식 - 해병 ROTC 8기), "난 내본 적 어신디."(이봉길 - 해간 67기) 이 때부터 세 명이 타고 있던 차 안에서 전형적인 해병대 전우들간의 대화가 이어졌다.
"형님은 어디 근무해수과?"(강태화), "난 32대대에 근무했져"(이봉길), "난 72대대에 이서수다"(강태화), "너 경허민 소대장 중에 전흥수라고 귀 꼬부라진 우리 동기 몰르쿠냐?"(이봉길), "몰르쿠다"(강태화)... 이런 대화 와중에 해병대전우회 사무총장 하시는 분이 당시 33대대장을 하셨던 강신길 장군임을 상기한 내가 그때 그시절의 경험담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때가 1984년 여름이었다. 당시는 '국군의 날' 행사를 3, 4년 주기로 서울 도심에서 시가행진을 하는 '대행사'로 하곤 했었는데, 그 해가 바로 그런 때였다. 여의도광장에서 기념식하면서 열병, 분열을 하고 서울역에서부터 동대문까지 시가행진을 했다. 10월 1일 행사를 위해 각 군에서 7월 경에 행사부대를 정해서 8월부터 한달간 자체적으로 훈련하고 9월 한달은 전 군이 성남비행장에 집결해서 훈련했는데, 우리 해병대에서는 제1해병사단 3연대 3대대, 즉 33대대를 행사부대로 선정했다.
나는 32대대 정보장교를 하고 있을 때라, 어느날 아침 참모회의 시에 박충조 대대장께서 작전장교 유승호(후임 박이용), 5중대장 박호철(정해석), 6중대장 김기남(손경승), 7중대장 박홍서(한갑순), 작전보좌관 이상훈, 군수장교 남대현 등 좌중을 둘러보고,'정보장교(이봉길), 요새 바쁜 일 있나?' 하시기에 '없습니다' 했더니 '그러면 33대대에 가서 국군의 날 행사에 다녀오라' 하시어 약 2개월 간 33대대로 갔었다. 그때 우리 3연대 2대대에는 대통령 행사 경비 임무를 수행했던 '99부대' 임무가 있어서, 사단에서나 연대에서 우선적으로 병력을 뽑을 수 있었기에 2대대 병력들은 대체로 키가 크고 1, 3대대 병력은 키가 작아서 33대대만으로 행사부대를 편성하기가 어려워 우리 2대대에서 일부 병력을 빌려주었던 것이다. 당시 정보장교로서 '先行情報, 完璧保安'을 복무방침으로 정하고 근무하던 중에 대대장님의 명을 받들어 60여 명을 인솔하여 33대대에 갔던 것이다.
행사부대 훈련의 주안점은 '위풍당당한 자세가 나오는가?', '분열, 시가행진 시에 오와 열 대각선은 정확하게 맞는가?', '부동자세는 완벽한가?' 등이었다. 포항비행장에서 한달간 자체훈련에 돌입하여 우선 가슴펴고 히프 집어넣어 일자 걸음걸이 연습부터 개인과 조 그리고 열 훈련으로 시작해서, 비행장 바닥에 일정 간격으로 그어진 콘크리트 타설선을 10보라인으로 삼아 부대원 전체의 보폭을 똑같이 만드는 훈련을 계속 반복했다. 보폭이 똑 같아야 처음 정열한 그대로 행진하는 동안에도 오와 열 그리고 대검선, 철모선, 어깨선, 수통선에서 5도, 15도. 30도 45도, 60도 75도 대각선이 선명하게 나오는 일정한 대형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보폭 훈련이 매우 중요했다.
그리고 간간이 2시간 정도 부동자세 연습을 했는데, '부대- 차렷' 구령 후 부대장 훈시와 참모들 만담 등을 들으면서 '움직이는 것은 워카 속의 발가락 뿐이요, 흐르는 것은 이마에 땀방울 뿐이다'하면서 실제 행사 시간 1시간의 2배인 2시간을 죽은듯이 꼼짝 않고 버티는 훈련을 했다. 이런 훈련의 결과, 8월 말에 점검차 왔던 전 군 통할 행사부대장인 육군 중장으로부터 약 40분 정도 훈시를 하던 말미에 자기가 전 부대를 돌아다녀 봤고 사관학교 생도들도 다 보았지만 해병대만큼 부동자세가 완벽한 부대는 처음 보았다는 칭송을 들을 수 있었다.
8월의 자체훈련을 마치고 성남비행장으로 이동하여 9월 한달간 전 군 합동훈련에 들어갔다. 성남비행장의 훈련분위기는 9월말 경의 전체 평가를 의식하여 각 군간의 경쟁심리가 기본적으로 작용하고 해병대, 공수부대, 특공여단, UDT와 같은 독립부대들간의 경쟁도 매우 치열했다. 약 2주 정도 열병과 분열 행진의 자체 마무리 훈련을 한 후 나머지 기간 동안 실제 행사와 동일하게 부대를 배치 정열하여 국민의례, 훈포장, 훈시, 열병, 분열 등 국군의 날 기념식 진행 전 과정을 예행 연습했다.
우리 해병대가 처음 성남비행장에서 분열 행진을 해보니 이상하게 대형이 흔들거려 이거 큰 일 났다 싶었는데, 원인을 찾아보니 포항비행장과 성남비행장의 10보라인 간격이 틀린 것으로 밝혀졌다. 훈련된 보폭으로 나가는 부대원과 10보 라인을 의식하는 부대원과의 차이였는데, 말이 필요 없는 우리 해병대의 비장의 카드 '하룻밤 사이 푸닥거리- 빠따'로 해결하고, 그 다음날부터 오전 오후에 한번씩 분열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고 전 군에 시범을 보여주면서 시간을 보냈다. 결과적으로 국군의 날 행사부대 전 군 평가에서 최우수부대로 선정됨으로써 창군이래 계속되어 온 항상 1등하는 해병대의 전통을 우리도 이어갈 수 있어 가슴 뿌듯했다. 부대장 강신길 중령의 Pinpoint Accuracy(바늘 끝과 같은 정확성) 철학에 따라 전 부대원이 혼연일체가 되어 이뤄낸 값진 결과였다.
여의도광장의 기념식, 서울 도심에서의 시가행진 - 지금도 그때의 긴장감과 자부심 그리고 감동이 생생하다. 해병대를 대표하여 뭔가를 보여주자고 일치단결해 최선을 다했던 600여명의 젊은 해병들, 그들의 열정이 자랑스럽다. 다른 군과 달리 팔이 허공에 올라 갔을 때 한번 틀어주는 동작으로 반짝 반짝거리던 해병대, 기념식의 하이라이트 '분열' 시에 경례 구호 '충성'을 양성모음 '창쌍'으로 바꿔서 앞에 가는 부대들이 '충- 성', '충- 성'하며 평범하게 지나가던 중 우리는 '우로- 봐'에 '창- 쌍-', 짱 하면서 본부석 천장을 들썩이게 해 전두환 대통령 포함 내외귀빈들이 깜짝 놀라 '저 부대가 어디야?', '해병대입니다', '아, 역시'하게 했던 해병대, 그 때의 '1984년도 국군의 날 행사부대'도 우리 해병대의 군기와 위용을 마음껏 뽐냈다."
이런 대화를 하면서 따래비오름에 가다보니 감정이 업(up)되어서 뒤에 차가 잘 따라붙었는지 확인도 못하고, 차량 두 대를 잃어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했던 것이다. 앞으로 해병대끼리만은 같은 차에 태우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