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창작론
장순희
이태준의 단편에 드러난 근대에 대한 문제의식, 과 주제의식에 대해 서술하시오
Ⅰ. 서 론
이태준의 소설 세계를 역사적으로 충실하게 재현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탐구해야 할 논제들이 거의 모두 망라되어 있는 셈이다. 단편 양식의 우세라는 특수한 현상을 반봉건적 사회 속에서 자신의 근대성 혹은 주체성을 지키려던 근대적 개인의 존재 조건에 기인한 것이라고 보며, 그 이론적 표현을 김동인의 기술론에서 이태준의 문장론에 이르는 단편소설론에 대한 검토를 통해 정리하고 있다. 한국 근대소설에서 단편 양식이 우세한 원인이 반(半)봉건적 사회와 근대적 개인의 간극에 있다는 주장은 러시아의 경우 그와 비슷한 사정이 있었지만 장편소설이 우세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무리한 사회학적 추론처럼 들리며, 결국 일본 사소설 발생론을 다소 안이하게 번안한 결과라고 생각될 여지가 있다. 하지만 어쨌든 단편작가로서의 이태준을 의미 있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이론적 맥락을 파고들었으며, 이태준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소설 연구 전체에 대해서도 극히 중요한 논점을 제기하고 발전시켰다는 것은 특기할 필요가 있다.
이태준의 소설은 우리 민족이 일제 침략으로 말미암아 민족말살정책을 일본이 폈을 때 문학인들은 그들의 압제 속에서도 문학의 독특한 성격을 형성하였다. 비참한 현실 앞에서 직설적인 것보다는 비유적으로 우회적인 쪽으로 돌리거나 창작과 기교에 몰두하였다.
소설의 경우 순수소설, 농촌소설. 새태소설, 모더니즘소설, 풍자소설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일제에서 벗어나는 길이 우리의 자주적인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소 양대국에 의한 것이었고 여러 정치단체가 생겨나 문단도 좌.우익계열의 수만은 단체가 결성되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도 이태준의 작품활동은 당대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구인회를 결성하여 순수문학을 제창하였고, 문장지의 편집인으로서 활동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월북하여 그의 작품은 남한에서 금기시되어왔으며 현대문학의 미아가 되었다. 그런 1988년7월19일 납북작가들의 해금조치이후 이태준은 단편소설의 완성자로서 평가를 부여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태준의 행적은 월북작가라는 수식어가 이태준을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난처함을 던져 주었다.
이태준은 순수문학의 기수, 단편문학의 완성자라고 한다. 이태준은 반영으로서의 문학이 아닌 기교로서의 문학에 능하였으며 그는 사회 혹은 역사에 대한 관심보다는 작품의 완성도에 더 주력했다고 볼수있다
작품 오몽녀
가람 출판사 이태준의 단편전집에서
작품 「오몽녀」는 이태준의 처녀 작품으로 1925년 조선문단 (朝鮮文壇) 7월호에 다음과 같은 광고문이 게재도기도 하였다.
特高
李泰俊氏의小說「五夢女」는 當選되엇스나 事情에 의하야 發表치 못하옵는 바 적자의 現住所를 通知하여주소서
이것으로 미루어 생각하면 이태준 오몽녀가 당선돠었는데 사정에 의해서 발표지 못한 것을 알수가 있다. 결국 이작품은 시대일보 에 1925년 7월 13일 발표되었다. 특히 이 작룸에 대해서는 조선문단 합평회에서 극찬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오몽녀 전문
가난하다는 것은 비단 오몽녀에 국한된것이 아니고 지참봉 (池參奉)에게도 금돌 이에게도 두루 해당된다. 그러나 어디 까지나 적빈의 인물은 오몽녀이다.
그는 부업으로 점도치고 푸닥거리도하고 , 하지만원악작은 곳이라 , 전과 푸닥거리가만치 못하고 객주를 한 대야 철도선달도 아닌드메 국경이라 보행객이 만하야 한달에오육인에지나지 못한다.
그러니 눈먼 지참봉이 알가난배잉로살것은 사실이다. 식구는 단둘 인데 그는 사십이 넘은이 지참봉과 갓스물에에 나는 오몽녀라는 계집이다.
누구나 오몽녀는 지참보의 딸인줄 안다.그러나 기실은 총각으로 늙어온 지참봉이아홉살된 오몽녀를 삼십오원에 사다가 처를 삼으려고 갈러온것이다.
지참봉은 알간나뱅이이지만 그러나 지참봉에게 35원에 팔려온 오몽녀에 대해선 더 이상 이렇쿵저렇쿵 이야기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금돌이의 경우도 간난하긴 하지만 오몽녀나 지참봉보다는 훨씬 나은 편이다. 이 작품에 오몽녀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인믈로서 방순사와 남순사 가 등장하는데 이들은 주재소에 다니는 공무원이기 때문에 가난하지는 않다. 서수라 하면 함경북도 청진 웅기를 다지나 제일 끝에 붙어 있는 항구이다.
이 서수라에서 십리쯤 북으로 나가면 두만강가요 동해변 인곳에 삼가리라는 40 여호에 불과한 작은 거리가 있다. 이 간난한 마을은 맨 윗머리 객줒비에서 벌서 5, 6년 전부터 혼레는 했는지 않했는지 이웃 사람들도 모르건만 지참봉과오몽녀는 부부와 같은 생활을 해오고 있다.
이처럼 단둘이 살기 때문에 지참봉은 오몽녀를 끔찍이 사라하건만 오몽녀는 앞길이 꽃같은 젊은 계집이요 함께 사라갈 남편이 아버지 같은 늙은 소경이기에 불만이 대단하다.
오몽녀는 좋은 반찬이 생기더라도 보지 못하는 남편을 먹이는 법이 없고 저만 먹으면서도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지 지참봉은 북어처럼 말라 얼굴에 개기름이 쭈르르 흐르는데 오몽녀는 낫살이 차갈수록 살이 오르고 둥그스름한 얼굴은 허여멀겋고 두 빰에 늘 혈색이 배어 있었다. 미인이라기보다 복스럽게 생긴 얼굴이어서 이 조그만 두얼굴에 일색인체하고 꼬리치기엔 넉넉하였다.
게다가 오몽녀는 빈한속에서 눈먼 남편을 돈이든 음식이든 늘 속이는 버릇이 있었기 때눈에 나의 것을 감추고 훔치는데 이골이 나 있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파월 중순 무렵의 어느 날인가가 오몽녀의 생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입쌀되나 사고 미역오리나 뜯어온 다음 어두워졌음으로 생선이나 장만하기 위해 바닷가로 가서 아무도 없는 고기잡이배 속으로 들어갔다. 오몽녀는 생선이나 백합이 먹고 싶을 때마다 언제나 이 배에서 훔쳐갔다. 이 배주인은 금돌이라는 총각인데 종일 잡은 생선을 그 이튼날 아침에 팔것 남겨두고 그날 저녁에 팔것을 지고 나갔다가 밤이 깊어서야 배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오몽녀는 오늘 밤에도 마을 턱 놓고 생선을 바구니에 주워 담고 있는데 배가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러 번 도둑을 맞은 걸 알게 된 금돌이가 지키고 있다가 오몽녀임을 발견하고 큰 보폐나 얻은 듯이 좋아서 우선 배를 밀어 놓고 노를 젓기 시작한 것이다. 오몽녀는 눈이 뚱그래지면서 어쩔줄 몰랐다. 소리도 못 지르고 뛰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어스름한 달밤에 금돌이와 오몽녀를 실은 배는 물에서 보이지 않을 만큼 나와서 닻을 내렸다.
金 “ 앙이! 아즈망시덤등”?
五“......”
金“놀래 쥐마십겅이 , 어찌할쉬잇슴등”?
五夢女는 얼른(顔色)을 곧치고생긋 웃어주엇다.. 그리고
五 “생원(生員)에 어찌겟슴둥, 배르대랑이”
金乭이는 싱글실글 웃우면서 五夢의 겨트로닥어서드니 , 부르르 떨리는 손을 오몽녀의 엇개우에올려노트니 한손으로는 얇은구름속에 잇는달을가르친다. 그러나 오몽녀는 邊하려하지도안코 오히려 約束이나한 연인을 만나것가티그가 하라는대로머리를들어흐릿한海上月色
을살펴보앗다. 그리고는 나즉한 목소리로
五 “배르 대랑이, 배르대구는무슨노릇이못될게잇슴등, 이왕지새에”
그러나 그배는 음즉이지 않핫다.
두어시간뒤에야슬며시음즉이어무엇테와다핫다.
오몽녀는 금돌이를 만나고 온뒤부터는 지참봉에 대한불만이 점점 더 강해졌다.
그녀는 생일이 10여 일 지난 뒤에 바구니를 끼고 나가서 한밤중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그 다음부터 오몽녀는 심심하면 이웃집을 말다니 듯하였다. 지참봉이가 점쳐서 돈이나 생기면 그 돈을 훔쳐서 술을 사가지고 금돌이에게로 간다.
이곳은 국경이라 무장단과 아편, 호주(胡酒), 담배 밀수입자들 까탈에 경관이 객주집을 단속이 엄하다. 객이 들었는데도 객보 (客報)를 내지 않으면 영업정지는 물론이요, 주인은 구금되어거나 벌금을 물어야 한다. 지참봉네 집에는 객이들면 씌어진 객보를 가지고 오몽녀가 주재소를 드나들었다. 그런데 남순사란 자는 오몽녀에게 다른생각을 품고 있었다.
마침 지참봉네 집에 저녁을 사먹은 나그네가 있었으나 객보가 없었음을 알게 된 남순사는 오몽녀를 유치장에 넣었다가 숙질실로 옮겼다. 소장 모르게 특별대우를 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 전에 오몽녀는 이 방에서 방순사에게 욕본 일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 숙직실은이 오몽녀에게는 두 번째인 셈이다. 허영심 같은 호기심이 일어난 오몽녀는 그 일을 생각하면서 남순사도 틀림없이 그럴 것이라고 짐작했다. 이튼 날 오몽녀는 그 방에서 나왔다. 바른손엔 1원짜리 두장이 쥐어져 있었다.
그 뒤 어느 날 밤 , 술이 얼큰하게 취한 남순사와 오몽녀가 지참봉네 골방에서 수작을 끝내고 방문을 열고 나오다가 지참봉에게 들켰다.
남순사는 지전 몇 장을 그의 손에 쥐어주고 위기를 모면했다. 그 뒤부터는 지참봉은 오몽녀가 금돌이한테 가고 없을 때도 남순사에게 간줄 알았다.
오몽녀가 주재소 숙직실에서 나오는 것을 본 금돌이는 입쌀 , 간장, 장작, 물, 쟁개비 [ 작은냄비] 따위를 배 안에 실었다. 금돌이는 다음날 오몽녀를 배에 싣고 무인도로 떠났다.
지참봉은 오몽녀가 나간 지 나흗날 밤에 남순사를 불러 마지막 담판을 하듯이 날 뛰었다.
남순사는 오몽녀를 사흘 안에 찾겠다고 장담하고서 주재소로 갔다. 그는 밀수범에게서 압수한 호주 한병과 아편을 떼어가지고 지참봉네 집으로 돌아가서 지참봉에게 이것을 먹이여 죽게 하고 마치 자살한 것처럼 식칼로 그의 목 여러 군데 서투르게 찔렀다.
오몽녀는 금돌이와 아무도 없는 외딴 섬에서 20여 일 동안 유쾌한 생활을 보냈다 나는 새 밖에도 아무도 보는 이 없는 이 섬의 윤락한 탕녀 오몽녀에게는 다시 없는 이상촌이요 낙원이였다. 날도 추워지고 양식도 떨어지고 해서 이들은 해삼위로 도망가 살기로 약속하고 일단 삼가리로 돌아왔다. 지참봉이가 죽은 사실을 알게 된 오몽녀는 하늘에 오른 것처럼 기뻐하였다. 남순사는 오몽녀가 왔다는 말을 듣고 부리나케 찾아갔다.
南 “ 앙이 !어듸매갓습대! 영갬이상새난줄모르구, 앙이기가차지!”
五 “ 잘 죽엇지비! 방진(地名) 으갓나(다)가알쿠왓당이”
南 “ 방진으로무섭에”? 영감상으 求하러 갓덤둥? 히히 ....
五 “그나그내 , 샘쓰지안습등? 南순새잇는데, 무쉼에영감생이또일이잇슴등? 흥!이제는
나두巡香宅이꼬마!“
이에 남순사는지참봉이 죽은 원인이 오몽녀 당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위협하였다.
타락한 창녀와 똑 같은 오몽녀는 속으로 딴 배포를 차려 놓고 남순사의 귀에 무어라고 한참 속살거리고 갈갈 웃었다. 남순사도 다라 웃었다. 자기 딴은 집이나 하나 장만하고 첩살림을 차리는 것처럼 기뻤다. 그런데 밤이 깊었다. 오몽녀와 금돌이는 남순사가 장만해놓은 이부자리, 가마솥, 의복가지 등, 모든 동산을 다 배에 싣고 해삼위로 영원히 떠났다.
시대일보 1925. 7.13일
작품: 오몽녀는 가난과 난잡한 성행위가 주요 부분을 차지하지만 오몽녀의 무지몽매가 그것을 원동력이 되어 남을 속일 뿐만 아니라 남의 물건을 훔치기도 한다. 말 하지면 도덕관이랄까 윤리 관념이 붕괴되었다고 하기보다도 처음부터 그런 관념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한 행동도 책임지지 않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옹몽녀에게서는 자기가 관계한 모든 남자들을 서로서로 비교해서 마지막으로 금돌이를 택하는 능력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다.
작품 오몽녀에 대한 나의 견해
작품 오놈녀를 읽으면서 김동리의 감자를 생각했다.
간난 때문에 그는 열다섯 살 나는 해에 동네 홀아비에게 팔십 원에 팔려서 시집이라는 것을 갔다. 그의 새서방(영감이라는 편이 적당할까)이라는 사람은 그보다 이십 년이나 위로서, 원래 아버지의 시대에는 상당한 농민으로서 밭도 몇 마지기가 있었으나, 그의 대로 내려오면서는 하나 둘 줄기 시작하여, 마지막에 복녀를 산 팔십 원이 그의 마지막 재산이었다. 그는 극도로 게으른 사람이었다.
오몽녀와 감자의 봉녀 두 여자 간난 때문에 난잡한 성생활을 하지만 오몽녀와 봉녀는 다른다. 봉녀는 왕성방에게 돈을 받고 성을 주지만 성생활을 함으로서 그것이 사랑으로 변해간다는 점과 아무 사랑도 책임감도 없이 여러남자들과 임시방편으로 성을 파는 오몽녀와는 다르다.
일말에 오몽녀는 윤리, 책임감 도덕관년 은 일체 없지만 감자의봉녀는 도덕내지 책임감은 형성되어있다. 그것은 자라날 때 받은 교육 때문이다.
이태준 작품 전반 모두가 이런 오몽녀처럼 간난을 바탕으로 쓰여진 작품으로 「 달 밤 , 밤길, 꽃나무를 심어놓고, 어떤 젊은, 어미 기생 산월이 」가 간난 때문에 쓰여진 성생활을 다른 작품으로 그 시대의 반영 아닌가 싶다. 일제시대 민족문화 말 살 정책에 저항하는 작품으로 여겨진다.
2. 본 론
이태준이 단편에서 이룩한 예술적 성취는 단지 미문(美文)이 보여주는 기교나 서정적인 분위기라기보다는 그것에 기반한 선명한 인물상의 창조에서 기인한다.1) 최재서의 평가대로 ‘인생의 그늘 속에 움직이는 희미한 존재들’을 선명한 인간상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것이 이태준 단편의 탁월함이라면 우리는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나버린 ‘불우한 족속들’의 면모를 살펴봄으로써 이태준 소설의 본령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태준의 소설을 읽어 본 사람들은 그가 만들어낸 많은 개성적 인물들과 다양한 인물들 속에서 발견되는 한결같음을 기억할 것이다. 궁색한 복덕방에 앉아서 화려했던 과거를 쓸쓸히 회상하며 늙어가는 세 노인네나 우국지정을 간직하고 있으나 마땅히 갈 곳 없어 떠돌아다니는 불우노인, 고마움의 표시로 과수원에서 훔쳐온 포도송이를 들고 정신없이 대문에 들어서는 어리숙하고 순박한 황수건 등 이태준의 인물들은 오랫동안 독자에게 애잔함을 남긴다. 많은 사람들이 뛰어난 단편작가로서의 이태준의 면모를 그가 창조해낸 인물들에서 찾고 있는 것은 가장 ‘상허(尙虛)다운 소설’을 만드는 것이 바로 ‘상허다운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이태준은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난 ‘불우한 인물들’이 겪어야 하는 삶의 비애를 생생하게 그려 보인 작가이다. 이태준 소설에 등장하는 ‘불우한 인물들’은 ‘근대’ 혹은 ‘도시’에 존재하지만, 그 안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이러한 괴리나 어긋남으로 인해 더욱 불우한 인물들이다.
3. 결 론
이태준은 1930년대 서구 추수적인 근대화의 과정에 있으면서 그것의 황폐함을 인식한 작가였다. 속악해지는 세상, 순박하고 천진한 인물들의 본성이 오히려 그들을 불행하게 하는 ‘근대’에 대한 이태준의 부정적 인식은 근대에 부적응적인 모자라는 인물들에 대한 연민이나 변해가는 문화나 풍속에 대한 비판, 낡은 것들에 대한 애정,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순수성의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나타난다. 그의 상고주의나 땅에 대한 집착은 근대에 대한 반성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과거’를 돌아본다는 것은 결코 ‘미래’에 대한 전망을 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근대의 급변하는 현실 속에서 그것에 대해 회의해본다는 것은 중요한 포즈이다.
4. 이태준의 연보
이태준
호 상허(尙虛)·상허당주인(尙虛堂主人). 강원도 철원(鐵原)에서 출생하였다. 휘문고보를 나와 일본 조치[上智]대학에 수학하였으며, 《시대일보(時代日報)》에 《오몽녀(五夢女)》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다.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하였고, 이후 이화여전 강사,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학예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1930년대부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였으며, 《가마귀》 《달밤》 《복덕방》 등의 단편소설은 인물과 성격의 차분한 내관적(內觀的) 묘사로 토착적인 생활을 부각시켜, 완결된 구성법과 함께 한국현대 소설의 기법적인 바탕을 이룩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작중 인물들은 회의적·감상적·패배적 성격으로 부각되어 작품 전체가 허무와 서정에 깊이 침윤되었지만, 때로는 그 속에서 현실과 밀착된 시대정신에의 추구를 지향하기도 했다.
《문장(文章)》지를 주관하다가 8·15광복 직전 철원에서 칩거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포섭되어 활약하다가 월북하였다. 그의 단편 《해방전후(解放前後)》(1946)에서 이러한 문학적 변모를 확인할 수 있다. 작품에는 앞에 든 것 외에 소설집 《구원(久遠)의 여상(女像)》 《딸 삼형제》 《사상(思想)》 《해방전후》 등이 있으며, 문장론 《문장강화(文章講話)》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