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번 지도는 트로이의 목마로 유명한 차낙칼레 지역이고, 2번 지도는 목화의 성처럼 하얀 절벽으로 유명한 파묵칼레와 그 남쪽 지역이고, 3번 지도는 이즈밀과 북쪽의 마니사와 버가모 왕국이 있던 곳의 지도들입니다.
에베소 (에페스, 에페수스), 셀축
이즈밀-아이든 고속도로가 생긴 이후로 셀축은 더욱 더 이즈밀에 가까워지게 되었다. 셀축에서는 터키에서 가장 큰 고대 도시 에베소를 볼 수가 있다. 고속도로에서 나와서 셀축에 가는 중에 짧은 길이긴 하지만 많은 휴게소를 볼 수가 있는데, 여름철엔 고속버스들도 잠시 쉬어 가는 휴게소가 많이 있다. 왜냐면 에게의 더위에는 휴식이 반드시 필요할지 모르겠다. 휴식 장소중 가장 유명한 곳은 야듬챠우쉬, 와란과 파묵칼레 휴게소도 있다.
휴게소의 가장 유명한 것은 아이란(요구르트로 만든 음료)과 함께 춉시시(양고기를 작은 덩이로 썰어서 대나무 꼬챙이에 껴서 불에 구운 요리)가 유명하다. 만약 렌터카로 터키를 여행한다면 아무 주유소에서라도 아니면 휴게소라도 차를 샤워 시킬 수 있을 것이다. 샤워란 표현을 쓴 이유는 자동차를 위한 샤워기가 하루종일 물을 뿜고 있기 때문에 자동차를 물밑에 대기만 하면 세차 끝. 이것이 에게에서만 볼 수 있는 자동차 샤워. 샤워기 밑에 있다 보면 더위가 가실 거다. 돈? 물론 어디서건 공짜.
수백년 수 천년 동안 사람들의 수고로 만들어진 에베소를 구경하시려면 많은 시간을 할애하길. 왜냐하면 볼게 너무 많아서....도시는 셀축 참륵 국도의 서쪽 ,현재 육지로 남아 있는 반도의 위에 세워진다. 기원전 20세기 성벽으로 삥 둘러 사인 상태에서 아야 술룩 언덕 위에 세워진 것을 발굴 작업을 통해 알 수 있다. 히타이트의 설형 문자 기록에 의하면 이 거주 지역은 아르자와 왕조의 수도인 아파사스일 것이다. 사도 요한 교회 앞의 메케네 무덤은 기원전 20세기 후반에 외부로부터 이주민이 왔다는 흔적일 것이다.
또한 전설에 의하면 에페스를 제일 먼저 건설한 사람들은 흑해에 살던 아마존 여인족이라 한다. 그 때가 바로 지금으로부터 약 5000년 전이다. 아마존 여인족은 아마존 강에 살지 않았다. 그들은 흑해에 살고 있었다. 오늘날의 스타디움 근방에 정착한 이오니아인들의 리더는 그리스의 코드로스왕의 아들 안드로클로스였다. 원주민과 융합한 이오니아인들은 쉽게 에페스의 주도권을 잡았으리라. 페르시아에 점령당한 후 또, 나중에 알렉산더 대왕사후에 대왕의 가정교사였던 리시마코스는 현재의 뷸뷸산과 파니이르산의 중간 부분으로 도시를 옮기고 주위 산에 산성을 쌓는다.
오늘날 관광하는 고대 도시는 기원전 3세기와 기원후 6세기 사이의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사도 요한과 성모 마리아가 이 도시에 온 것 그리고, 요한 계시록, 또한 사도 바울의 방문으로 인해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된다. 6세기에 아야술룩 언덕에 사도 요한 교회가 지어짐으로 인해서 도시화는 이 교회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항구에 진흙이 참으로 해서 항구를 못쓰게 되자 도시의 상업 활동은 네오폴리스라 불리던 지금의 쿠샤다스로 옮겨가게 된다.
아이든오울루(터키인 부족 국가)가 1304년 이곳을 점령하고,1426년 이 후로 오스만투르크의 영토가 된다. 이렇게 길고, 화려하고, 또한 고난의 역사의 흔적을 보실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수천 년의 모험의 목격자가 되시길... 자 역사의 여행으로...!!! 먼저 터키의 부유한 박물관 중에 하나인 에페스 박물관을 방문하자 그리고 나서 지금의 셀축시 중심지의 유적, 그리고 아야술룩부터 시작하자.
고고학 박물관
셀축에 있는 박물관은 터키에서 가장 중요한, 가장 방문객이 많은 박물관 중에 하나이다. 아야술룩과 에페스에서 발굴한 유물을 전시한 박물관에서는 고대 도시를 여행할 때 그 자리에서 못 보실 많은 유물을 보게 될 거다. 고대 도시에 연관된 이미지를 풍부히 하려면 반드시 시간을 할애해야 할 곳이다...
나중에 보게 될 고대 에베소와 아야술룩 언덕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전시가 되어 있다. 특히 아르테미스 여신상이 눈길을 끄는데, 하나는 AD1C 남은 하나는 AD 2C의 것이다. 이 에페스는 여자들의 도시라 할 수 있는데, 키벨레로부터 시작해서 아르테미스, 지금은 성모 마리아로 이어지는 여자들을 섬기는 도시 전통을 가지고 있다 할 수 있다.
아야술룩 언덕, 사도 요한 무덤 교회
셀축시 중심지로부터 걸어서 올라갈 수 있을 정도 거리의 아야술룩 언덕에 셀축칼레 (셀축 성)가 자리잡고 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사도 요한이 이곳에서 살다가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도 요한 무덤이 있는 곳에 4세기경 교회가 만들어진다. 지금 볼 수 있는 교회는 6 세기 때유스티니안 황제에 의해 만들어 졌다.
에게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였던 사도 요한 무덤 교회는 6개의 돔과 130m의 길이 십자가 모형의 설계, 또 대리석의 일부는 무너진 아르테미스 (아데미) 신전에서 가져 왔다고 한다. 문 입구를 장식하던 트로이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조각은 여기서 훔쳐져서 영국 런던의 WOBBURN ABBEY교회에 있다. 묘지실의 대리석 석관도 성물로 여겨진다. 묘지에서 나온 먼지는 현지인 들에게 만나로 여겨져서 병을 치료하는데 사용됐다고 한다.
교회의 정원에서 아르테미스 신전과 이사베이 모스크, 에게해를 포함하는 파노라마가 장관이다. 교회 앞에 있는 성벽은 초기 기독교 시대 때 에페스 고대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스타디움의 돌로 만들어 졌다.
언덕 밑의 이사베이 모스크는(1375년) 셀축 터키의 석조 예술의 좋은 한 예이다. 셀축 시대 때의 투루베 (무덤) 도시 안에서 보실 수 있다. 도시 안에서 볼 수 있는 수로는 비잔틴 시대의 것이다.
아르테미스 신전
아르테미스 신전은 고대 7대 불가사이 중의 하나이다. 고대에 아르테미스 여신은 추앙을 받았고, 덕분에 에페스에는 많은 성지 순례 객들이 방문을 했다. AUGUST 한 달은 성스러운 날들로 인정되었고 종교적인 행사가 치러졌다. 첫 번째 사원은 BC 6C 경에 이오니아 방식으로 건축이 됐는데 사원 양쪽은 두 줄로 앞과 뒤쪽은 세 줄로 기둥이 세워졌다.
총 127개의 기둥은 높이가 19m 였고, 36개의 기둥은 조각이 세겨져 있었다. BC 356년 한 정신병자가 이름을 남기기 위해 사원에 불을 질렀고 같은 날 밤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태어났다. 훗날 그가 여기를 방문해서 사원을 지워 주겠다고 하자, 에페스인들은 이것을 거부하는데 이유인즉 신이 다른 신의 신전을 짓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신전은 BC4C 에 같은 장소에 세워진다. AD 5C에 기독교가 공인되고 나서 파가니즘에 대한 승리를 자축하는 폭도들에 의해 파괴됐다. 지금은 127개의 기둥 중 단 하나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하나의 기둥은 1972년에 여러 개의 돌을 모아 원래의 높이 대로 세워졌다.
성모 마리아의 집
고대 에페스의 위쪽을 문을 지나쳐서 산으로 차로 한참을 올라가다 보면 에페스를 더욱 유명하게 하는 장소에 도착하게 되는데, 그곳이 성모 마리아의 집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돌보게 된다. 사도 요한과 성모마리아는 AD42에서 AD48년 사이에 에베소로 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가 어디서 죽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독일의 수녀 안네 캐더린은 꿈속에서 본 것을 책으로 쓰게 된다. 안네 캐더린은 1884년에 죽었다. 그 후 발굴 조사단은 캐더린의 책에 근거해서 발굴 작업을 펴다가 AD 6C 경으로 추정되는 옛날 집을 발견한다. 그 집의 기초는 AD 1C경의 것으로 밝혀졌다. 안네 캐더린은 단 한번도 에페소를 방문한 적이 없었다.
이 장소는 공식적으로 로마 교황청에 의해 성지로 선포되었고, 교황 6세는 1967년 이곳을 방문한 바 있다. 반면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이곳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곳은 기독교인 뿐만이 아니라 이슬람교도에게도 중요한 장소로 많은 방문객들이 찾고 있다.
매년 8월 15일에 벌어지는 성모 마리아 추도 예배는 1800년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별도로 매일 07시에 그리고 일요일 10.30에 예배가 있으며 여기에는 카톨릭 교황청에서 파송된 신부님과 수녀 님들이 계신다. 성모 마리아의 집 입구에 들어서자 마자 상점들이 있고 몇 미터를 가면 세례를 받던 장소가 있고 좀 더 가다 보면 여러 나라 말로된 안내판을 볼 수가 있는데 물론 자랑스러운 한글도 보실 수 있을 거다.
더 지나가면 작은 집이나 오는데, 이것이 작은 교회이다. 오늘날 볼 수 있는 작은 예배당은 새로 재 건축한 것이다. 방의 분홍색 대리석 밑으로 지하수가 나오는데 이것이 성수로 알려져 있다. 이 성수는 밖에서 계단을 통해서 밑으로 내려가다 보면 수도가 나오는데 이 수도에서 바로 그 성수 나온다. 전에는 나무에다 소망을 적어 넣었었는데 지금은 벽에다 게시판을 만들었다. 한번 소망을 적어 넣어 보시길....
고대 도시
자 이제 고대 도시를 돌아보자. 이 고대 도시는 입구는 두 개가 있는데 성모 마리아의 집을 갈 때 지나쳤던 그 입구를 통하는 것이 훨씬 힘이 덜 들리라. 또한 여름철엔 무척 덥다, 아니 뜨겁다는 말이 적당하리라. 필자는 오랜 가이드 경험에 미루어 여름철엔 반드시 작은 물병을 소지하기를 권한다. 또한 터키 여행 전체에서 마찬가지겠지만 화장실 볼일을 미리 봐두기 바란다. 썬그러스, 모자도 있지 말기를... 또한 편안한 신발과 복장도 아울러서.... 이제 준비가 됐으면 고대 도시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다.
위쪽 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으로 VARIUS의 목욕탕이 있다. 이것은 AD 2C의 로마 목욕탕이다. 그 옆으로 STATE AGORA(시장)이 있다. 이 시장은 BC27-AD 14년에 AUGUSTUS 황제 때 재 건축됐는데 정부의 공식적인 장소였다. 이 시장의 바로 옆에는 바실리카를 볼 수 있다. 지금은 기둥만 남아 있다. 또 바로 그 옆에는 오데이온을 볼 수 있는데 쉽게 이야기하면 뮤직 홀이다. 각종 공연뿐만이 아니라 귀족들의 회의가 벌어졌었다. 오데이온에는 약 14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다.
이오데이온은 원래 지붕이 있었는데 지금은 볼 수가 없다. 이오데온을 지나 서쪽으로 가면 기둥들이 있는 정원이 나오는데 여기가 바로 시청이다(PRYTANEION).
시청을 오른 쪽에 끼고 아래로 더 내려 가 보자. 좀 더 내려가면 MEMMIUS의 기념탑을 볼 수 있다. 여기에는 로마의 독재자 술라가 BC 1C 에베소를 점령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었다. 이것은 가이우스의 아들이자 손자인 의해 건립됐다. 또 왼쪽으로는 AD 2C의 것인데 AD 3C 재 건축된 POLIO FOUNTAIN(소위 물탱크)이 있다. 여기에 물은 수로를 통해서 와서 수도관을 거쳐서 여기까지 왔다. 여기에는 많은 조각들이 발견이 됐는데 지금은 에페스 고고학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폴리오 파운틴의 바로 옆에는 커다란 사원이 하나 있는데 이것이 사람들에게는 도미티안 사원으로 알려져 있다. 에베소 인들은 많은 건물과 사원을 건축했는데 이것은 도미티안 황제의 명령에 따라서 AD 1C 에 건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의 조사에 윗면 TITUS의 사원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그 이유는 도미티우스가 암살되면서 그의 이름이 있는 모든 건물들이 파괴되었고 나중에는 도미티안 사원이 티투스의 사원으로 바꾸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도시의 아래로 내려가 보자. 바로 두 개의 기둥을 볼 수가 있는데 이것이 헤라클레스의 문이다. 사자의 가죽을 입은 헤라클레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두 기둥 사이가 좁은 이유는 동쪽 문으로부터 온 수레들이 들어갈 수 없게 하기 위해 서이다. 헤라클레스의 문으로부터 CELSUS 도서관까지의 거리를 CURETES 거리라 한다. 이 거리의 중간 정도에 트라이안 황제의 분수가 있다. 이 분수는 AD 2C에 에베소인들이 트라이안 황제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층으로 만들어 졌었는데 지금은 트라이안 황제 조각상의 발부분만 볼 수 있다.
그 앞으로는 비탈에 세워진 집들을 볼 수가 있는데 부유 층들이 살던 집들이다. 많은 집들이 3층으로 되어 있다. 이 집들은 AD 1C에서 AD 7C사이에 사용되었다. 이 집들의 바닥에는 아름다운 모자이크가 장식이 돼 있다. 지금은 일부를 볼 수가 있는데 별도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집들의 앞 쪽에는 화장실과 목욕탕을 볼 수가 있는데 목욕탕은 스콜라스티카 목욕탕이라 한다. 이 목욕탕은 AD2C 건축이 됐는데, AD5C에 복원됐다. 당시의 부유한 크리스천 여자인 스콜라스티카의 이름이 붙여졌다. 이 목욕탕은 L자 형태로 안에는 탈의실, 냉탕, 온탕, 열탕이 갖춰져 있다.
이 목욕탕의 옆에는 하드리안 황제의 신전이 있다. 이 건물은 AD 2C에 지어졌고 AD 4세기 복원되었다. 사원의 앞에는 행운의 여신 티케의 조각이 있다. 그 옆에는 안드로클로스의 전설이 조각으로 새겨져 있다. 안드로클로스는 에페스로 떠나기 전에 신전에 가서 신탁을 하는데 신탁의 내용인즉 멧돼지와 물고기가 있는 곳에 도시를 건설하라는 내용이다. 안드로클로스와 그 일행이 이곳에 와서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물고기를 잡아 요리를 하는데 물고기가 숲으로 튀었다. 물고기를 줏으로 가는데 그곳에서 멧돼지가 뛰쳐 나왔다 한다. 신탁대로 되었기 때문에 바로 이곳에 도시를 건설했다 한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화장실과 브로델 ( 소위 창녀촌)도 목욕탕의 부속 건물로 알려져 있다.
이 창녀 촌의 앞에는 셀수스 도서관이 있는데 가이우스 유리우스 아킬라가 그의 아버지 셀수스를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 한국의 몇몇 책자에는 이 도서관을 두란노 서원으로 쓰고 있는데 글쎄 생각해 볼일이다. 왜냐면 이 건물은 AD 3C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 건물보다도 적어도 일 백년전 사람이니까 말이 안되잖아???. 건물의 입구 옆에는 8개의 조각상이 있는데 두 개씩 같은 조각이다. 이 조각은 각각이 지혜, 지식, 지능, 덕망을 의미한다. 오리지널은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박물관에 있고 이것은 복제품이다.
도서관의 바로 왼쪽에는 아고라(시장)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는데 이 문은 마자우스와 미트리다테스의 문이다.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아내 리비아, 그의 딸 율리아, 사위 아그립파를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아고라는 길이가 110m로 지붕이 없다. 이 시장에서는 각지에서 온 물건들 뿐만이 아니라 노예들도 거래가 됐다. 도서관에서 북쪽으로 극장까지의 거리를 대리석 도로라 부른다. 원래는 아르테미스(아데미) 여신의 신전까지 길이 나 있었다고 한다.
대리석 길을 가다가 왼쪽으로 바닥에 뭔가를 보게 될 거다. 여기에는 항상 사람들이 모여 있다. 여기서 제각각 가이드마다 자기에 맞는 이야기를 선보일 것이다. 웃을 수 있는 시간이다. 내용인즉 아름다운 여자가 사랑을 나누고 싶으면 브로텔 ,그러니까 창녀 촌으로 오라고 유혹하는 세계 최초의 광고라고 할 수 있다. 글쎄 최초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에베소는 항구도시였기 때문에 선원들에게는 대단한 유혹이었을 것이다. 자 이제 극장에 들어서자. 이렇게 큰 극장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수용 인원이 24,000명이니까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아주 자연적인 음향 시설이 잘 갖춰져 있는데 무대에 해당되는 앞부분이 무너진걸 감안하면 얼마나 잘 지어졌는지 알 수 있는 일이다. 이 반원형의 극장은 BC 3C에 지어졌는데 로마 시대때 (AD 1C) 확장되었다. 이 극장이 사도 바울이 봉변을 당할 뻔한 곳인데 당시 에페소에는 아르테미스 신의 조각을 은으로 만든 은 수공업자들이 많았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오면서 그들의 생계에 타격을 받게 되자 DEMETERIUS라고 하는 은세공 업자와 그의 추종자가 사도 바울과 제자들을 공격하는 사건이 벌어 졌는데 그 역사의 현장이다. 극장에서 나오면 항구까지 펼쳐지는 도로가 있는데 그 도로를 아카디안 도로라 한다. 길이 530m이다. 이 도로를 옆에 끼고 길을 나서다 보면 아름드리 소나무가 가로수로 심어져 있는 거리가 나오는데 항상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이제 고대 에페소 여행도 막바지다. 출구까지 걸어가다가 왼쪽에 샛길로 계속 걸어가면은 AD 4C에 지어진 성모 마리아 교회가 나온다.여기서 그 유명한 종교회의가 열렸다. 마리아의 교회 앞에는 종교 지도자들이 살던 숙소가 있다.
비엔나의 에베소 박물관
에베소의 첫 발굴 작업은 1895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왕은 술탄 압둘하밋 이었는데, 유물들은 그 당시 비엔나로 가져가게 되었다. 1907년 새로 제정된 법에 의해 유물들을 반출할 수 없게 막았다. 비엔나 에페스 박물관에는 초기 발굴 작업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볼 수 있다.
큐축 멘데레스강(CAYSTER)
이 강의 길이는 175km이다 보즈다아(산)에서 발원해 에게해로 흘러간다. 이 강물이 토사를 실어다가 에베소 항구의 바닥을 채워 쓸 수 없게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에베소의 여행을 마쳤다.
이즈밀 (스미르나: 요한 계시록의 일곱 교회 중 하나인 서머나)
이즈밀은 거의 삼백만의 인구를 갖은 터키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다. 이 도시는 매년 가을 국제 무역 박람회가 열리는 아주 중요한 상업 중심지이며 항구 도시이다. 이즈밀은 수 백년 동안 역동적인 상업 항구 도시였으며, 다양한 종류의 농산물, 특히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향기가 짙은 담배와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포도와 말린 무화과와 올리브 기름 수출지로 유명하다.
에게 해에 산재해 있는 많은 다른 역사적인 지역과 연관이 있으며, 풍부한 역사와 전략적인 위치에 소재해 있는 이 도시는 터키에서의 당신의 관광을 훨씬 흥미있게 만들어 준다. 잊지 마시라. 터키에서 가장 미인이 사는 곳을 꼽으라면 이즈밀을 주저하지 않고 꼽을 것이다.
호머의 고향인 이즈밀에 최초로 정착한 부족은 기원전 3000년 아마존 여인 족이라 한다. 기원전 2000년 말까지 수 백년 동안 이 지역을 지배했던 히타이트 인들의 통치는 이오니아 인들의 도착과 함께 끝이 나면서 12개의 이오니아 도시 국가 연맹에 포함되어 스미르나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즈미르는 초기 기독교의 활동적인 교회였다. 서머나의 감독 폴리갑의 순교로 유명하며 시내에 있는 폴리갑 교회는 성지 순례시 방문되는 곳이다.
빠른 도시화의 영향으로 이 도시의 고대 건축물들이 대단히 많이 파손되었다. 파고스 산 위의 생채 (카디피 칼레)는 헬레니즘 시대에 지어 졌으며, 이 곳에서 도시 전체와 이즈밀 해안의 만까지 볼 수 있다. 비잔틴과 오스만 시대에 걸쳐서 몇 번의 변혁이 있었던 이 곳은 과거의 오리지널 건물들의 자취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고고학 박물관은 도시 주변의 많은 유적지에서 발견된 고대의 귀중한 동상들을 비롯하여 다양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코낙 광장에 있는 시계탑은 도시의 상징이다. 그리고 샤드르반 사원이 있는 큘튜르(푸아르) 공원은 이즈밀의 자랑거리이며 가볼 만한 곳이다. 알산작과 코르돈 지역도 방문할 가치가 있다.
베르가마의 명성은 해외에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터키 내에서는 베르가마 주민들이 보여준 유로 골드라는 금광회사에 항의해서 벌인 시위로 유명하다.
바다에 접해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터키에서의 유명한 관광 명소 중 하나이다. 베르가마를 유명하게 만들 것은 두말할 필요없이 베르가마 왕국의 유적지 들일 것이다. 베르가마는 베르가마 (페르가몬) 왕국의 수도였다.
페르가몬은 150년 동안 헬레니즘 문명의 꽃을 피웠던 소아시아의 중심 도시였다. 이 도시에서 첫 번째 발굴 작업은 1878년과 1886년 사이에 벌어졌다. 이 발굴 작업에서 발굴된 제우스 신전과 그 밖의 유물들을 베를린에 가져가서 지금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제 역사의 도시를 관광하자. 먼저 방문할 곳을 4곳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박물관을 보고, 그사이에 배가 고프다면 박물관 앞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수 있다. 좋은 음식점들이 많이 있다. 둘째는 아크로 폴리스를 방문하자. 셋째는 아크로 폴리스 앞에 있는 크즐 아우루 ( 붉은 정원)에 방문하기를 마지막으로 아스클레피온을 돌아보기를.....
페르가몬의 역사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 (BC 323년) 이후 알렉산더 대왕의 가정교사이자 장군이었던 리시마쿠스가 에게해 지역을 차지한다. 리시마쿠스는 페르가몬을 자신의 보물 창고로 사용했는데 이곳에는 금 9,000 달란트와 기타 보물들이 보관되고 있었다고 한다.
리시마쿠스가 죽자 이 보물을 차지하는 행운을 필라테리우스가 차지하는데, 그는 이곳에 아타리드 왕조를 세운다. 그후 페르가몬은 헬레니즘 왕국의 수도가 되며 번성한다. 아타루스 1세와 유메네스 2세 때 왕국은 전성기를 누린다. 이 시대에 페르가몬은 셀레우코스 왕조에 대항하여 로마와 동맹을 맺었고, 영토도 지중해에까지 이르게 된다. 한때 페르가몬은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성경의 안디옥),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비견되는 도시로 성장한다.
마지막 왕 아타루스 3세는 유언으로 왕국을 로마에 양도한다 (BC 133). 그 이후로 페르가몬은 쇠락의 길을 걸으며 오늘날까지 다시는 옛 영광을 찾지 못한다.
페르가몬은 아랍족의 침입을 받았고, 비잔틴의 영토가 되었고 AD 14C 에는 터키인의 손에 들어 갔다.?/b>은 초대 기독교 사회에 중대한 역할을 했는데 페르가몬에 대해서는 요한 계시록의 7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등장한다.
아크로 폴리스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애초에 이곳에 걸어가는 꿈은 접어 두시길... 도시 중심부에서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 오를수록 전경은 아주 좋아진다. 제일 꼭대기까지 오르면 그곳에 주차장이 있고 바로 앞에 입구가 있다. 입구를 들어서자 마자 왼쪽으로 보이는 것이 아타로스1세와 유메네스 2세의 헤론 (신성한 지역)이다. 헤론 앞의 것들은 가게들이었다. 그 앞을 지나면 제우스 신전터가 나오는 데 지금은 불행히도 소나무 3그루만 있다. 이 신전을 보려면 할 수 없이 베를린에 갈 수밖에 없다.
제우스신전을 돌아서 오른 쪽으로 가면 극장이 나온다. 이 극장은 10,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극장의 제일 밑의 오른쪽 방면으로 디오니소스의 신전을 볼 수 있다. 극장에서 좀 더 위로 올라 가면 하드리안 황제에 의해 건설된 트라이안 황제의 신전 (AD 2C)을 볼 수 있다. 이 두 황제는 신으로 숭배 받았다. 이 트라이안 신전은 대리석으로 건축이 되었는데 얼마 남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주 웅장하다. 참고로 이곳에는 예전에 조각학교가 있었다.또한 신전 옆에는 페르가몬의 그 유명한 도서관을 볼 수 가있다. 지금은 흔적만 남았지만...
이 도서관은 유메네스 2세에 의해 세워졌는 데, 약 200,000 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었다. 이 도서관은 당시에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서관이었다. 훗날 안토니우스가 결혼 선물로 클레오파트라에게 그 많은 책을 선물로 주었다. 여기에서 재미 있는 일화는 페르가몬 도서관의 놀랄만한 성장에 당황한 이집트는 (당시 최대의 도서관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는 데 장서가 500,000권으로 추정된다.) 당시에 종이로 사용되던 파피루스의 금수 조치를 취한다. 궁하면 통한다고 이때 페르가몬에서 발명한 것이 바로 유명한 양피지이다.
크즐 아우루 (붉은 정원)
아크로 폴리스로 올라가기 전에 왼쪽 편에 보이는 커다란 건물이 크즐 아우루이다. AD 2C에 건설됐으며, 이집트 신들을 숭배했던 곳이고, 훗날 교회로 바뀌어서 사용된다. 붉은 벽돌로 지어져 있고, 넓은 정원이 있어서 크즐 아우루로 불린다.
아스클레피온
아스클레피온은 치료의 신 아스클레피우스의 이름을 딴 병원이었다. 이와 비슷한 것이 그리스의 에피다우로스에 있다. 이곳은 BC 4C에 세워졌지만 절정에 달한 것은 로마 시대 때였다.
아스클레피우스는 아폴로와 데살로니카의 공주 콜로니스의 아들이었다. 그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죽자 아폴로는 그를 키론에 맡긴다. 키론은 아스클레피우스에게 의술을 가르친다. 그는 성장하면서 대단한 의술을 갖게 돼서 죽은 삶까지 살리게 된다. 이에 화가 난 죽음을 다스리는 하데스가 제우스에게 불평을 털어 놓는다. 이에 제우스는 번개로 그를 죽인다.
이 치료센터가 사용했던 기술은 현대 의학에서 사용하는 자연 치료요법과 아주 흡사하다. 환자에게 적당한 운동과 명상, 음악 감상, 독서, 그리고 꿀, 샘물, 약재를 이용한 치료를 했으며 자기암시 효과도 사용했다. 입구에는 "신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죽음은 이곳에 들어 갈수 없다."라고 쓰여있다. 아스클레피우스의 상징은 뱀인데 이곳에서도 뱀의 조각상을 볼 수 있다. 뱀이 허물을 벗는 것이 사람 눈에는 부활하는 것으로 비춰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군의관들의 마크는 뱀으로 되어있다.
갈렌(AD 129-199)
히포크라테스 이후의 최대의 의학자 갈렌은 페르가몬에서 태어났다. 그가 완성한 인체 해부에 대한 지식은 그후로 1400년동안 의사들의 교본이 되었다. 그가 살아 있을 당시 그는 오히려 철학자로써 명성이 높았다. 아스클레피온이 있는 페르가몬에서의 위대한 의학자 갈렌의 탄생은 역사의 필연일 것이다.
이상으로 페르가몬의 관광을 끝냈다.
사르디스 (성경의 사데)
고대 리디아의 수도였던 사르디스는 기념비 적인 건물과 지역적인 중요성으로 인해 터키에서 가장 흥미있는 유적지 중의 하나로 꼽힌다. 고고학과 신화의 전문가들이 잘 알고 있는 이름들이 바로 사르디스와 관련이 있다. 고대 황금의 강인 팍톨루스와 부를 의미하는 크로수스 등. 크로수스는 역사상 최초로 동전을 주조한 인물이다.
사르디스의 유적지는 살리힐리에서 가까운 사르트 차이 (팍툴루스) 강 옆에 있으며 이즈미르에서 72 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사르디스에 사람들이 처음 정착한 것은 기원전 2천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나 도시가 중요성을 띠게 된 것은 리디아 인들이 이 곳을 수도로 정한 기원전 7세기부터이다. 기게스 왕부터 시작하여, 사르디스는 기원전 6세기크로수스의 통치 때 가장 전성기를 누렸다. 알렉산더 대왕이 기원전 334년에 이곳을 얻었고 나중에 로마의 영토가 되었다. 소아시아에 있는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중의 하나이다.
유적지
이 곳은 도로에 의해 두 부분으로 나뉜다. 주량으로 된 길은 도로의 북쪽으로 연결된다. 종합 체육관과 유대 정착의 산물인 유대 회당은 길을 따라 이어져 있는 상점 바로 뒤에 있다. 유대 회당 옆에는 로마 목욕탕이 있고 길 아래쪽에는 헬레니즘 극장과 스타디움 터가 있다. 도로 남쪽으로는 이오니아 스타일로 지어진 가장 아름다운 신전 중의 하나인 기원전 3세기에 지어진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다.
신전 옆에는 기원전 3세기 안티오쿠스 3세의 통치 때 만들어진 대리석 탑과 재단으로 사용된 거대한 돌덩이가 있다.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살리힐리 평야 서쪽에 위치한 굘마르마라 지역 근처의 사르디스 네크로폴리스와 바로 옆에 있는 리디아 왕의 고분도 볼 만하다. 이 지역은 빈테페라 불리며, 역시 요한 계시록 일곱교회 중의 하나인 두아디라로 차를 타고 가면서 볼 수 있다.
프리네
쿠샤다스 남쪽에 위치한 딜렉 반도에 있는 국립 공원도 볼 만하다. 공원의 해변에서 에게해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길...쇼케 마을을 지나면 거대한 평야가 나오는데, 이 평야는 민더 (맨데레스) 강물로 관개를 한다. 과거에는 라트모스 만으로 알려졌던 이 곳은 강물이 운반하는 충적토로 인해 수 백년에 걸쳐서 퇴적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이 평야 북쪽의 언덕에는 그리스 시대에 지어진 가장 흥미 있는 지역 중의 하나인 고대 도시 프리네의 유적이 있다. 가장 훌륭한 도시 계획이 적용된 이 지역은 (모든 거리가 오른쪽으로 교차한다) 도시 계획자 히포다모스가 설계한 것이다. 이 도시는 바다의 침니 현상으로 인한 교통 및 수송 문제와 말라리아 전염병으로 인해 12세기 후반에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언덕 위로는 훌륭한 석공 예술을 보여주는 도시의 성벽이 있다.
헬레니즘 극장, 아테네 신전과 잘 보존된 극장 건물은 로마 시대 때 상당히 많은 부분이 개조되었다. 그러나 헬레니즘 극장의 기본적인 모든 특징은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무대 건물 옆에 있는 비잔틴 교회를 지나면 아테네 신전이 있다. 이오니아 양식으로 지어진 이 신전은 고대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유명한 할리카르나소스 영묘 (마솔로움)를 지은 건축가 피테오스의 걸작이다. 아래쪽으로 주량 현관, 아고라, 그리고 고대 항구로 가는 도로의 양 옆으로 일반 주택들의 자취가 남아 있다.
돌아오는 길에 아랫길로 가면 시청이었던 프리타네이온과 도시와 행정 중심지였던 볼레우테리온이 나온다. 사각으로 디자인된 볼레우테리온은 대단히 잘 보존되어 있으며 기둥 받침대들도 특별한 관심을 끈다. 거리 맞은 편에는 도리아 양식으로 지어진 소규모의 제우스 신전이 있다. 위 체육관과 아래 체육관, 그리고 네미테르 신전은 보존 상태가 좋지 않다
라오디케아, 파묵칼레, 히에라폴리스, 데니즐리
데니즈리
데니즈리는 데니즈리주의 주도이다. 인구 약 이십만의 도시로 터키 최대의 섬유 공업 지대이다. 이 지역은 터키에서 가장 품질 좋은 목화 산지이기도 하다. 바다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데니즈리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이유는 이 지역의 풍부한 수자원 대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유명한 파묵칼레와 라오디기아를 방문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되는 도시가 바로 데니즈리이다.
이 도시의 중심에서는 수탉의 동상을 볼 수 있는데 이 지역의 상징이기도 하다.
라오디케아 (성경의 라오디기아)
데니즈리에서 파묵칼레로 5km 가다가 왼쪽으로 들어가면 라오디케아가 나온다. 라오디케아는 한때 아나톨리아의 가장 중요한 도시 중에 하나였다.
이 도시는 기원전 2세기경에 셀레우코스 왕조에 의해 세워졌다. 이 이름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 안티오쿠스 2세의 부인의 이름에서 나왔다.
나중에 라오디기아는 페르가몬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라오디기아는 요한 계시록에서 언급되는 일곱 교회 중 하나이다. 초대 교회가 융성했다. 이 도시는 AD 5C 경에 커다란 지진의 피해를 입으면서 인근의 데니즐리로 사람들이 이주했다.
오늘날 라오디케아에는 스타디움, 물 저장 탑, 체육관, 오데온(실내 극장), 님파니움(분수), 그리고 헬리니즘식 대형 극장과 로마 식의 극장이 남아 있다.
파묵칼레 (목화성)
파묵칼레는 온천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오늘날도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 온천을 찾고 있다.
뭐니 뭐니 해서 관광객들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하얀 절벽일 것이다. 그래서 목화성이라는 이름이 어울릴지 모르겠다.
수만 년을 두고 온천 물이 넘치면서 온천 물 속에 있는 칼슘이 응고해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아주 많이 파손되었으나 지금은 그래도 많이 보존된 편이다. 맨발로 하얀 바위 위를 걸어 볼 수 있다.
파묵칼레에서 가까운 곳에는 크르므즈 (빨강)수 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온천물 속의 철성분이 공중에 나오면서 산화되어서 붉은 색을 띄게 되었다.
히에라폴리스는 페르가몬 왕국의 유메네스 2세에 의해 세워졌는데, 페르가뭄의 전설적인 건설자 텔레푸스의 부인의 이름이다. 히에라는 은총이라는 뜻이다. 페르가몬이 로마의 영토가 되면서 히에라폴리스도 로마의 영토가 되었다.
기원 후 17년 큰 지진으로 파괴되었다가 2-3세기경에 전성기를 이룬다. 아울러 이곳의 토착민이던 유태인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지게 된다. 예수님의 12제자중 하나인 사도 빌립이 이곳에서 순교했다. 그의 추모 무덤은 성 바깥의 산 등성이에 있다.
오늘날 우리가 관광하는 히에라폴리스는 많은 지진을 겪은 고대 도시이다.
히에라폴리스에 들어서면 바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바로 네크로폴리스 (무덤)이다. 약 1,200개의 무덤이 다양한 형태로 늘어서 있다.
고대 도시 중앙에는 히에라폴리스 박물관이 있는데 그곳은 로마의 목욕탕이었다.또 이곳에는 플로토니움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유독성 일산화탄소가 나온다 .
예전부터 이곳에 제물을 바쳤다 한다. 또한 극장이 있는데 AD 2C 때의 것으로 극장 무대 쪽에는 디오니소스의 생애가 조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극장은 약 20,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극장은 아주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밀레투스 (성경의 밀레도)
프리네를 떠나 남쪽으로 계속 가다 보면 평야를 지나서 왼쪽으로 빛나는 극장 건물을 보게 된다. 이 도로는 이 지역에서 가장 매력적인 지역 중의 하나였던 밀레투스로 가는 길이며, 이 도시에서 역사가인 헤카테우스, 탈레스, 그리고 자연 철학가들인 아낙시메네스와 아낙시만데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다. 밀레투스의 역사는 청동기 시대 중반 (약 기원전 16세기 경)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이 당시의 생활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미케네 항아리만이 초기 정착 자들이 크레테 사람들이었다는 단서를 제공한다. 그러나 호머는 이 지역에서 최초로 정착한 사람들은 카리아 인들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레투스는 이오니아 인들이 살던 주요 도시 중 하나이며 이 지역의 다른 식민지들과 같이, 그 당시 활발했던 무역 소득으로 부유한 생활을 했다.
페르시아 침략기간에 밀레투스는 페르시아 통치에 반대해서 일어난 이오니아 동맹에서 주된 역할을 했다. 기원전 5세기 중반 때 이 도시는 잘 짜여진 도시계획으로 재 건설되었다. 밀레투스는 로마 시대 때 전성기를 누렸으나, 비잔틴 시대에 항구의 첨식 현상으로 중요성을 잃었으며 역사의 장에서 사라져 갔다.
유적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극장 건물이며 고고학에 거의 관심이 없는 사람일 지라도 이 극장에는 칭찬을 마다하지 않는다. AD 2세기에 세워진 이 건물은 보존이 잘 되어 있다.
1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 극장은 뛰어난 건축물이다. 극장 건물과 근처에 있는 파우스티나 목욕탕을 지나면 15세기에 지어진 알리아스 베이 사원이 나온다.
이 건물은 초기 오스만 건축의 좋은 본보기이며 석공술은 대단히 훌륭하다.
고대 도시 유적지를 관광하다 보면 밀 저장소와, 아고라의 기념문, 시청, 체육관, 항구 기념비와 게이트, 그리고 신성한 텔피니온 등이 다른 유적지와 함께 섞여 있다.
발굴 때 발견된 기타 유물들은 입구 근처에 있는 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마르마리스
이 도시는 안락한 숙박 시설과 아름다운 해변을 갖추고 있어서 이 곳을 찾는 방문객들이 대단히 많다. 마을 한 가운데 있는 중세의 성과 성안에 있는 수 백년된 전통 가옥들은 그림 같은 전경을 선사한다. 도시중심지에서 2 킬로미터 떨어진 아사르테페의 유적지는 가 볼만 하다. 여전히 좋은 상태로 있는 헬레니즘 성벽은 확실히 볼 가치가 있다.
크니도스 고대 도시는 닷차 반도의 끝에 있다. 이 곳은 국도나 배로 갈 수있다. 보드룸에서 크니도스까지 가는 배를 이용할 수도 있다. 이제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서 계속 가다 보면 훌륭한 휴양지인 쿄이제이즈 마을에 도달하게 되는데, 근처에 같은 이름의 호수가 있다. 지난 몇 년간 외국인 관광객의 수가 많이 늘었으나, 이 쿄이제이즈는 항상 내국인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있는 곳이었다. 이 호수는 주위에서 일어나는 빠른 도시화 현상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깨끗하다.
쿄이제이즈의 주민들은 아주 친절하며 마을은 평화롭고 즐거운 휴가를 보내기에 이상적이다. 웅장한 리시아 무덤으로 잘 알려진 카우노스의 고대 도시도 가볼만하며 이 곳에는 보트를 타고 갈 수 있다.
바위를 깎아서만든 무덤들, 잘 보존된 극장, 그리고 도시의 균형 잡힌 배치 형태는 카우노스를 대단히 매력적인 장소로 만든다.
쿠샤다스(새들의 섬)
쿠샤다스는 옛날 고대 에페스 항구가 흙으로 메워지자 항구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쿠사다스는 터키에서 가장 유명한 휴양도시가 되었다. 17세기에 지어진 대상 무역인들을 위한 숙소인 카라반 사라이와 바닷가에 있는 성채는 아주 아름답다. 성채를 꼭 들려보길... 쿠샤다스에서 일박을 하고 에게해의 정취에 빠져 보는 것도 낭만적이지 않을까...
갈리폴리 (겔리볼루)
한 세대가 물 속에 빠져 죽은 장소...차낙칼레 전투.... 1915년 3월에 역사적으로 가장 강력했던 군대가 세계 1차 대전의 용감한 연합군들에 의해서도 끝내는 패배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은...오늘날 이 반도는 공동묘지와 전쟁 박물관,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기억들로 가득 찼으며, 현대 역사의 끔찍한 기억의 현장으로 남아 있다. 만일 차낙칼레에 간다면 이 역사적인 장소를 꼭 방문해 보시라.
페티예 (월루 데니즈)
텔메소스 해안선을 따라 좀 더 동쪽으로 가면 가파른 산맥으로 둘러싸인 뛰어난 아름다음을 자랑하는 페티예에 이르게 된다. 페티예 도시는 터키에서 가장 잘 만들어진 휴양지 중의 하나이다. 페티예 및 그 주위의 섬들을 포함한 주변을 가장 잘 보는 방법은 배를 타고 돌아보는 것이다.
고대 리시아의 잘 알려진 항구 도시인 텔메소스는 이 지역에서 가장 불 만한 곳이다. 마을 동쪽 언덕에 위치한 유명한 아민타스의 무덤과 비잔틴 성벽의 폐허지는 확실히 방문할 만하다. 폐티예에서 가까운 곳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 중의 하나인 사해 (월루데니즈)가 있는데, 사해라 불리는 이유는 바다가 너무도 잔잔하기 때문이다.
디디마 (디딤)
떠나서 남쪽으로 가다 보면 먼 거리에서부터 거대한 이오니아양식의 기둥이 보인다.
이 기둥들은 아폴론 신전의 것들이다.이 것은 가장 큰 디프테로스 (2줄 의 기둥으로 둘러싸인 형태) 양식으로된 디디마이온 또는 아폴로 신전이라고 불린다. 에페스와 사모스에서 있었던 신전 파괴 기간을 거친 이후에 가장 좋은 상태로 남아 있는 거대한 신전이다.
신성한 우물 위에 세워진 이 고대 신전은 가로가 100미터, 세로가 50미터이다. 신전의 건축은 후에 기독교가 국교로 정해지면서 완성되지 못한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이 아폴론 신전은 이오니아 건축의 걸작이다. 특히 대리석 위에 새겨진 독특한 부조물은 더욱 뛰어나며, 특히 건축된 이래로 2천년이 지났지만 변질의 표시가 거의 보이지 않는 잘 보존된 갤러리는 놀랄 만하다.
부루사
부르사는 에디르네 이전의 오스만 제국의 수도였다. 오늘날은 인구 백 오십만이 사는 도시이며 끊임없이 발전하는 산업과 상업의 중심지이다. 이 도시의 뛰어난 볼거리들은 당신을 하루종일 지치지 않게 하며 하루를 더 머물고 싶게 만든다.
무라디예
무라디예 묘지는 오스만 술탄과 왕자들의 마지막 휴식처이며, 이들은 묘지 안의 플라타나스 나무 그늘 아래에 있는 무덤에 매장되었다. 아름다운 묘지 옆에 있는 15세기에 지어진 무라디예 사원도 볼 만하다. 오토만 제국의 창시자인 오르한과 오스만 베이의 영묘와 부르사의 정복자인 오르한 베이의 영묘가 도시가 훤히 보이는 테라스에 위치하고 있다. 지붕이 있는 시장(카팔르 챨시)과 비단 시장 (코자한) 옆의, 상업 중심지에 위치한 울루 모스크는 과도기에 있던 오스만 건축의 가장 뛰어난 예 중의 하나이다. 실내 분수와 아름다운 설교단 (목공술의 걸작)으로 유명한 이 사원은 고전적인 건물로 여겨진다.
녹색의 사원 (그린 모스크)
술탄 메흐멧 1세의 통치 때 세워진 이 사원과 영묘는 실내장식에 사용된 녹색 때문에 녹색 사원으로 명명되었다. 술탄의 무덤은 아름다운 청 녹색 타일로 장식된 "녹색 무덤”이라 불리는 영묘 안에 있다. 술탄 메흐멧 1세는 15세기에 몽고족의 (타메르레인의 지휘 하에)파괴적인 침략 후에 오스만 터키의 권위를 재 확립한 왕이다.
그래서 그는 오스만 제국의 제 2의 설립자로 간주된다. 녹색 무덤의 문에 사용된 훌륭한 목공 술과 독특한 내부 장식은(특히 타일) 15세기 전문가들의 대단히 높은 수준을 반영해 준다. 영묘 맞은 편의 녹색 사원은 부르사의 보석으로 알려져 있으며, 인상적인 대리석 기술과 이국적으로 장식된 건물의 앞부분 등은 초기 오스만 건축의 걸작으로 여겨진다.
다른 볼만한 장소
역사적인 베데스텐에 있는 코자한(비단 시장)과 지붕이 있는 시장은 부르사의 또 다른 볼거리이다. 이 시장을 방문한 후에는 터키에서 한 푼도 쓰지 않겠다고 결심한 당신의 생각은 바뀌게 될 것이다. 만일 시간이 더 있다면 체키르게에 있는 유명한 터키 목욕탕에 가서 마사지의 전문가 (남자 마사지사는 탤락, 여자는 나티르라고 불린다.) 에게 당신을 맡기시라. 이 곳을 떠날 때 당신은 "내 평생에 이렇게 깨끗해 본 적이 없었어" 라는 말을 하게 될 것이다. 일드름 베야짓 사원, 에미르 술탄과 오르한 사원은 도시의 또 다른 볼 거리이다.
보드룸
보드룸에 대한 설명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무척 망설였다. 역사부터, 아니면, 유흥업소부터, 아니면 바다로부터,...
생각하지마. 너도 네가 왔던 것처럼 너도 여길 떠나게 될 거야.
너보다 먼저 사람들도 그랬는 걸.
온갖 추억을 보드룸에 두고 떠났는 걸...
유명한 보드룸의 시인 할리카르나소스 발륵츠의 말이다.
보드룸은 터키에서 터키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터키인들에게 가장 좋은 장소는 안탈리아도, 쿠샤다스도 아닌 보드룸일 것이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왜들 그렇게 보드룸을 좋아하는 지...아무튼 보드룸은 터키인들의 마음의 휴양지라는 것을 밝혀두고 말을 시작할까 한다.
보드룸은 단지 태양, 바다, 또 휘황찬란한 밤거리만 유명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보드룸의 모험은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1000년 경 도리아인들에 의해 오늘날의 성이 있는 곳에 건설되었다고 하고 있다. 그 당시 성이 있는 곳은 섬이었다고 한다.
할리카르나소스(보드룸의 옛 이름)의 가장 화려한 시기는 기원전 4세기경이었다. 여기를 카리아의 수도로 만든 마소로스가 24년간 왕위에 있었던 시기부터 시작한다. 세계 7대 불가사이로 여기는, 지금은 겨우 기초만 찾아볼 수 있는 마소로움의 건축을 시작했다.
그가 죽고나서 그의 부인이자 남매인 아르테미시아가 그 건축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도 완성을 못하고 죽자 당시의 예술가들이 마솔로움의 완성을 보았다. 그래서 지금도 능묘, 추념 묘지를 마소로움이라고 하는데 바로 마소로스 왕에서 나왔다
36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이오니아 방식의 신전, 그 위로 24개의 계단, 제일 위에 전차를 타고 있는 마소로스, 또 아르테미시아의 조각으로 이어진 42m 높이의 경이적인 건축물이 세상에 등장했다. 동상과 조각들은 오늘날 대영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물론 훔쳐 간 것은 아니다. 다만 오스만 터키 술탄의 허가에 의해 가져갔을 뿐...
여기 잊지 말고 넘어갈 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알 수 있는 역사 지식을 우리에게 전해 준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가 바로 할리카르나소스 태생이라는 것을 밝혀 둔다.
그후 이곳은 페르시아, 알렉산더 대왕, 리시마코스, 프토레마이오스(이집트), 페르가몬 왕국의 손을 거쳐 로마의 영토가 되었다. 기원후 4세기경 할리카르니소스는 철학의 중심지 였다고 한다. 그후 성 요한 기사단이 차지했다가 그 유명한 로도스 전투 이후로 오스만투르크(술탄 슐레이만)의 영토가 되었다. 보드룸의 옛 도시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지금은 옛 유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역시 무조건 방문해야 하는 곳은 성 요한 기사단이 세운 베드로 성일 것이다. 지진에 의해 무너진 마솔로움의 돌들을 이용해 성의 기초를 만들었다고 한다. 성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영국, 스페인 성탑들이 세워져 있다. 성은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수중에서 발굴된 유물들도 전시되고 있다. 성을 거닐면서 옛 성 요한 기사단의 향취에 빠져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성안에는 각종 유리로 만들어진 유물, 동전, 갑옷, 기사단의 깃발 등이 전시가 되어 있다. 성은 나중에 감옥으로도 사용되었다.
마지막으로 크루즈투어에 대해 이야기 해보면 보드룸을 빼고 크루즈는 생각할 수 없다. 모든 크루즈는 보드룸에서 시작하거나 보드룸을 거치지 않고는 이루어 진다는 사실이다. 긴 크루즈에 참가하지는 못할 지라고 잠깐이나마 시간을 내서 에게의 맑은 바다를 감상해 보는 것은 어떨지...
아소스
레스보스 섬 맞은 편에 에게해의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 세워진 아소스는 히타이트 왕 투탈리아 4세(기원전 8세기)때 처음으로 고대 도시가 형성되었다. 도리아 인들의 정착지 , 기원전 6세기에 지어진 아테나 신전, 도시의 성벽과 고대 항구가 볼 만하다. 이 곳은 차낙칼레의 남쪽이나 북쪽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잠깐 들러 볼 만한 곳이다.
아프로디시아스
아프로디시아스는 고대 카리아의 가장 중요한 정착지이며 상당히 부유한 공동체 사회였다. 현재까지도 대단히 잘 보존되어 있는 고대 유물들은 이 곳을 찾는 방문객들로부터 찬사를 받고 있다. 이 곳에 사람들이 최초로 정착한 때는 청동기 시대(기원전 3OO0년)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도시는 로마 시대 때 전성기를 누렸다. 아나툴리아에 만연했던 대모신 숭배의 강한 영향으로 이 곳도 제우스 신 숭배보다는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를 더 숭배했다. (에페스에서의 아르테미스 여신 숭배처럼). 그리고 아프로디테 여신은 도시의 수호신으로 추앙 받았고, 도시 이름도 그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기독교 시대로 접어들면서 비잔틴 제국은 도시의 이름을 스타브로폴리스 (십자가의 도시)라고 개명했는데, 이것은 아프로디테 여신 숭배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기원전 1세기에 지어진 이오니아 양식의 아프로디테 신전은 비잔틴에 의해 교회로 전환되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형이 여전히 잘 보존되어 있다. 신전으로 가는 기념문인 트라필론은 로마 건축의 걸작이다. 잘 보존된 대리석 극장, 아고라, 그리고 거대한 스타디움은 반드시 봐야 할 것들이다. 발굴 때 발견된 중요한 유물들은 이 유적지 입구에 있는 작은 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그러나 기타 중요한 유물들과 새로이 발견되는 많은 유물들이 박물관의 협소함 때문에 박물관 밖 정원에 보관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