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새해가 밝은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세월은 너무나 빠르다. 유수같이 흐른다. 아무도 막을 이가 없다. 흐름에 순응할 뿐이다. 귀한 세월을 잘 활용할 뿐이다. 주어진 하루하루를 보람되게, 당차게. 여유있게, 신나게 살아갈 뿐이다.
오늘 아침은 날씨가 차가운데도 가을 날씨처럼 하늘은 흠 하나 없고 티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하다. 우리 선생님들의 삶이 이러했으면 참 좋겠다. 운동장에는 인조잔디를 깔기 위해 여섯 분의 전문가님들이 추위와 싸워가면서 분주하게 일하고 계신다. 이분들의 노력과 정성이 학생들과 선생님들에게 행복과 기쁨을 주리라 생각하니 정말 보람된 삶을 살아가는 분임을 깨닫게 된다.
누구에겐가 기쁨을 주고 행복을 주는 것은 보람된 일이다. 그러기에 교직이라는 것은 정말 고귀한 직이 아닐 수 없다. 학생들에게 꿈과 비전을 심어주고 장래에 빛을 비추어주는 역할을 하니 힘이 들어도 견딜 만하다.
선생님들은 방학이 없다. 방과후 수업을 해야 하고, 근무조를 서야 하고, 연수를 받아야 하고, 맡은 업무를 처리해야 하고, 방과후 수업을 위한 교재를 연구해야 하고, 학생들의 생활지도를 해야 하고, 상담을 해야 하고…. 평소와 다름이 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자기의 할 일을 잘 감당하고 있다. 내일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수고하시는 선생님들이야말로 진정한 지도자란 생각도 해본다.
새해 들어 처음으로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명심보감 ‘성심편 하’를 펼쳐보았다. 첫눈에 들어온 것이 “悶人之凶(민인지흉)하고 樂人之善(낙인지선)하며 濟人之急(제인지급)하고 救人之危(구인지위)니라”였다. ‘남의 흉한 것을 민망히 여기고, 남의 착한 것을 즐겁게 여기며, 남의 급한 것을 건지고, 남의 위태함을 구하여야 하느니라’는 말씀이었다.
각 문장마다 공통적으로 나오는 말이 人(인)이다. 여기서 人이란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타인 즉 ‘남’을 말한다. 이 글을 읽고서 떠오는 말이 ‘배려’였다. 남에 대한 배려라는 말이 떠올랐다. 배려가 없이는 남을 위한다고 할 수 없다. 보통 사람들은 모든 기준을 ‘자기’에게 둔다. ‘자기’를 표준으로 삼아서 남을 비판하고 남을 흉보고 남을 비난한다. 자신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 남을 비난하고,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남을 공격하고, 자기의 편함을 위해 남을 비방한다.
새해에는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남의 중심에서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 같다. 그래야 화를 참을 수 있고 남을 미워하지 않으며 자신을 잘 다스려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남의 흉한 것을 보면 남을 흉보기 전에 자신의 흉한 것을 찾을 수 있어야 하고 남의 좋지 않은 것을 보면 슬퍼할 줄 아는 마음이 있어야 하며 남의 흉한 것을 보면 마음 아파하면서 동정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다. 이러한 마음이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고 넓은 마음이고 부드러운 마음이 아닐까 싶다.
남의 착한 것을 보면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말고 칭찬하며 자기가 착한 일을 하는 것처럼, 자기 가족이 착한 일을 하는 것처럼 즐거워하는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아닐까 싶다. 남의 급한 것을 보면 외면하지 말고 건져주며, 남의 위태함을 보면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것이 바로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다 싶다.
무슨 일이든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이해하고 너그럽게 대해야 하겠다. 학생들을 대할 때에, 선생님을 대할 때에도, 학부모님을 대할 때에도 그러한 마음을 가지면 좀 더 여유가 생기고 일을 원만하게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남’ 하면 떠오르는 말이 원망이다. 툭하면 남을 원망한다. 자기를 되돌아보지 않는다. ‘자기 집 두레박줄이 짧은 것을 탓하지 않고, 남의 집 우물 깊은 것만 탓하는도다’ 깊이 새길 말이다. 남을 배려하고 남을 탓하지 않는 마음으로 새해를 시작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국교육신문 : 2013-01-07 오후 1:40:00
e-리포터문곤섭울산외국어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의 마음가짐 (116)
공사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가르치는 선생님들과 공부하는 학생들에겐 큰 장애물이다. 그래도 극복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오직 참는 것이다. 참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다. 공사가 끝나면 아름다운 운동장이 완성될 것이기에 미래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면서 참아야 하겠다.
매사가 그러하다 싶다. 가르치는 것도 힘들고 배우는 것도 힘들다. 서서 가르치는 것도 힘들고 앉아서 공부하는 것도 힘들다. 그래도 오직 참고 견뎌야 한다. 그래야 미래가 있게 된다. 희망이 있게 된다. 참지 못하면 그것이 모두 스트레스가 된다. 병이 된다. 건강에 해롭다. 참는 것이 약이다. 참는 것이 영양제다. 참고 또 참고, 또 참아야 한다. 日忍又日忍이다. 그래야 이롭다.
아침에는 명심보감 ‘성심편 하’를 펼쳐보았다. 첫눈에 들어온 것이 “悶人之凶(민인지흉)하고 樂人之善(낙인지선)하며 濟人之急(제인지급)하고 救人之危(구인지위)니라”였다. ‘남의 흉한 것을 민망히 여기고, 남의 착한 것을 즐겁게 여기며, 남의 급한 것을 건지고, 남의 위태함을 구하여야 하느니라’는 말씀이었다. 남을 배려하고 남을 탓하지 않는 마음이 넓은 마음임을 깨우쳐 주었다.
오후에는 역시 명심보감 ‘성심편 하’를 읽었다. 남에 대한 아름다운 글귀가 눈에 계속 들어온다. 보통 때는 들어오지 않더니 오늘은 다르다. 고종황제 어제에도 남에 대한 배려, 남을 위하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한 점의 불티도 능히 만경의 숲을 태우고, 짧은 반 마디 그릇된 말이 평생의 덕을 허물어뜨린다.”고 말씀하고 있다.
남을 위하는 방법의 하나가 ‘말조심’이다. 함부로 내뱉는 말이 상대를 얼마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모른다. 잠을 자지 못하게 만들고 밥맛이 뚝 떨어지게 하고 화가 치밀어오게 만든다. 말은 불과 같다. 조그만 불씨 하나가 온 산을 태운다. 한 점의 불티가 집을 태우고 사람을 태운다. 보잘것없는 불씨가 자신을 망치고 가정을 망치고 남을 망치고 자연을 망친다. 말도 마찬가지다. 한 점의 불티가 만경의 숲을 태우듯이 그릇된 말 한 마디가 온 마음을 태운다. 새까맣게 만든다. 불조심하듯이 말조심하는 것이 남을 배려하는 방법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남을 위하는 방법의 하나가 ‘손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다. 손해는 물질적 손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물질 이상의 손해를 입히는 것이다. 도저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것이 바로 손해를 끼치는 것이다. 시멘트의 발자국을 평생 지울 수 없듯이 마음판에 새겨진 상처는 평생 지울 수 없다. 그러기에 손해를 끼치지 않도록 해야 하겠다. 손해를 끼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남을 미워하고 탐내고 시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고종황제 어제에 “미워하고 탐내고 시기해서 남에게 손해를 끼친다면 마침내 10년의 편안함도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남을 미워하고 탐내고 시기해서 손해를 끼치면 10년의 편안함이 아니라 1년 아니, 하루의 편안함도 없게 된다. 남을 미워하고 탐내고 시기하면 그날부터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어 하루도 편안하게 잘 수가 없다. 그러기에 남을 미워하고 탐내고 시기해서 손해를 끼치는 일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하겠다.
우리들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다. 특히 학생들에게 말조심해야 하고 마음에 상처를 남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강절소 선생님은 “내가 남을 해롭게 하면 이것이 화(禍)”라고 하셨다. 내가 하는 일이 복이 되어야지 화가 되면 안 된다. “남이 나를 해롭게 하면 이것이 복이니라”라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남이 나를 해롭게 하면 그게 화(禍)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남을 해롭게 하면 화를 입지만 남으로부터 해를 받으면 순간은 손해일 것 같아도 인(忍)이라는 덕목을 쌓게 되어 자신에게 복이 되는 것이다. 강절소 선생님은 일찍부터 이것을 깨달은 것 같다. 우리 선생님들은 학생들이나 동료 선생님들에게 해를 주지 않기 위해 ‘말조심’하고 ‘상처’를 남기지 않는 새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한국교육신문: 2013-01-08 오전 11:12:00
선생님의 마음가짐 (117)
送舊迎新(송구영신)은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뜻이다. 송구영신과 함께 새해 사용하는 사자성어는 謹賀新年(근하신년)이다. ‘삼가 새해를 축하드립니다.’라는 뜻이다. 새해 모든 교육가족은 물론 교육에 관심을 두는 모두가 새해는 만복이 깃들기를 소망한다.
‘送舊迎新(송구영신)의 구(舊)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온갖 더러운 것을 말한다. 악한 생각, 더러운 생각, 추한 생각을 말한다. 나아가 악한 습관, 더러운 습관, 추한 습관을 말한다. 이런 것들은 보내야 할 것들이다. 비워야 할 것들이다.
송(送)은 얼마나 좋은 행동인지 모른다. 어떤 것은 아쉽지만 내보내야 한다.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다. 어떤 것은 아깝지만 버려야 한다. 어떤 것은 귀하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버려야 한다. 새것을 담을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다. 비움이 없이는 채울 수가 없다. 더러운 것을 비우지 않고 새것을 그 위에 채우면 순환이 안 되어 고장이 나고 만다.
순환이 정말 중요하다. 피의 순환이 없으면 삶이 고장 난다. 공기의 순환이 없으면 건강이 고장 난다. 음식물의 섭취와 배설의 순환이 없으면 생명이 길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속에 있는 더러운 것을 밖으로 내보낸다. 그리고 좋은 것들은 입을 통해 다 받아들인다. 내보내고 맞이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매일 에너지를 얻고 삶을 영위해 나간다.
신(新)은 온갖 좋은 것을 말한다. 참된 생각, 사랑스러운 것, 덕이 있고 칭찬할 만한 생각을 말한다. 나아가 참된 행동, 사랑스러운 행동, 덕이 있고 칭찬할 만한 행동을 말한다. 옛것을 버리지 못하면 새것을 채울 공간이 없어진다. 그러기에 옛것은 미련도 없이 다 버려야 한다. 사람들은 숨을 내쉴 때는 더러운 것은 다 내본다. 숨을 들이쉴 때는 온갖 좋은 것은 들이마신다. 그렇게 함으로 활력소를 얻게 된다.
영(迎)도 얼마나 좋은 행동인지 모른다. 맞이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맞이하는 것은 손님을 맞이하고 귀한 분을 맞이하고 좋은 것을 받아들이고 싱싱한 것을 받아들이는 행위를 말한다. 더럽고 추하고 악한 것은 본인은 잘 모른다. 옆의 사람이 잘 안다. 다른 사람이 잘 안다. 관계되는 사람이 잘 안다. 그래서 그분들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분들의 귀한 말씀이 바로 충고다.
명심보감 성심편하에 보면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무가 먹줄을 좇으면 곧고, 사람이 충고함을 받아들이면 거룩하게 되느니라”고 하셨다. 먹줄이 곧 충고다. 나무가 먹줄을 좇으면 곧게 된다. 사람이 충고를 받아들이면 바르게 된다.
충고가 바로 산소이고 충고가 바로 음식이다. 충고를 받아들일 줄 모르면 ‘송구’가 안 된다. 헛구호에 그치고 만다. 충고를 받아들일 줄 알면 ‘영신’이 된다. 새로운 사람이 된다. 변화가 된다. 살 길이 열린다. 충고를 받아들일 줄 알면 혈액순환이 잘 되고 호흡이 잘 되며 소화가 잘 되는 것과 같이 건강한 삶이 된다.
충고는 쓰다. 하지만 충고는 행함에 이롭다. 살 길이다. 행동에 유익하다.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忠言(충언)은 逆於耳(역어이)나 而利於行(이이어행)이라” 충언은 귀에 거슬리나 행함에는 이롭다. 충고가 귀에 거슬린다. 그렇지만 멀리하면 안 된다. 자신을 위한 길이다. 양약은 입에 쓰나 몸에는 이롭다. 마찬가지다. 충고를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 필요하다. 빈 그릇이 요구된다. 빈 그릇은 속에 찬 더러운 것을 다 들어내는 것이다.
장원시에 이르기를 “나라가 바르면 하늘도 순할 것이요, 벼슬아치가 바르고 깨끗하면 온 백성이 저절로 편안하느니라”고 하였다. 나라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르면 하늘도 순하고 자연도 순하게 된다. 벼슬아치 특히 지도자가 바르고 깨끗하면 온 백성이 저절로 편안하게 된다. 우리 선생님들은 나라의 한 백성이요, 학생들을 가르치는 지도자다. 그러기에 바르고 깨끗하게 되기 위해서는 충고를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