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08 설악산 3박 4일 느림의 미학
8일 월요일. 코로나 바이러스로 너 댓 달 두문불출 하다보니 집을 떠나고 싶은 욕구가 긴박했다. 수도권 확진자가 여전히 줄지 않지만 떠나기로 했다.
이른 점심을 먹고 3시간 걸려 설악산 입구 켄싱턴 호텔에 도착했다. 현관문에서 열을 재더니 실내에선 마스크를 쓰고 다니라 했다. 인터넷으로 조식 포함 3박을 예약한 방에 들어가니 시야가 산으로 막힌 방이었다. 돈을 보태면 반대편 웅장한 설악산이 보이는 방으로 옮길 수도 있겠으나 조식 뷔페식당의 전망이 좋을 것이라 단념했다. 짐을 놓고 내일 산행을 대비해서 속초 해안가 식당에서 생대구지리를 먹었다.
9일 화요일. 2층 조식 뷔페 식당은 자주색 계통 벽지와 안락의자, 특히 왕실의 초상화 사진으로써 영국식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우아한 드레스 대신 모두 편안한 바지 차림이었다. 주눅 들지 않아 좋긴 한데 고상함을 잃은 아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통유리 너머로 잔디밭과 울창한 숲은 차분한 눈요기였다. 앞이 막힌 방을 생각하면 줄창 바라보고 있어야 되는데 긴 산행을 위하여 먹는데 더 열중했다. 두 세 번 왕복하며 빵과 요구르트, 달걀 후라이와 치즈, 커피와 차, 등으로 든든히 배를 채웠다.
그리고 출발했다. 이른 아침 맑은 공기와 적절히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우리만의 공원인 듯 걷는 그 맛이란! 코로나 방역으로 애쓰는 사람들이 잠깐 떠올랐으나 떨쳐버리고 울랄라 했다.
설악산은 신흥사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울산바위이고 왼쪽으로 가면 비선대를 거쳐 대청봉으로 가는 길이다. 그가 울산바위를 가자고 했다. 무작정 따라나선 이가 무슨 이견이 있단 말인가. 하명을 따르는 여필종부 부창부수의 미덕을 발휘할 좋은 기회였다.
그의 속도가 아주 완만했다. 나무 팻말 설명을 읽고 사진을 찍어도 따라가기 어렵지않은 거리에서 자주 기다리고 있었다. 쫓는 눈치가 아니었다. 속 편히 내 보폭으로 걸어가며 팻말에서 배운 줄기 껍질 무늬로 소나무와 참나무를 구별하려고 애썼다. 쉽지 않은 과제였다.
소나무 줄기는 생선이나 뱀의 얇은 비늘과 소철의 두껍고 거친 표피가 합성된 것 같았다. 우둘두둘한 밑동의 커다랗고 규칙적인 비늘 무늬가 위로 가면서 점점 작아지고 얇아져 밋밋한 줄기가 되는 듯했다.
한편 참나무의 영어명(Chinese Cork Oak)이 시사하듯 참나무는 불규칙한 세로 무늬의 콜크가 깊은 골을 형성하고 있는 나무였다. 콜크의 두께에 따라 다른 이름의 참나무인 것 같으나 도시 식별이 안 되었다. 가장 쉽게 졸참나무는 구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큰 키의 몸통에 비해 잎과 열매가 작아 붙여진 이름이었다. 재미난 설명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고로쇠나무는 단풍가족이라든가, 근육질의 서어나무와 매끈한 피부의 사람주나무, 신발 깔창에 적합한 신갈나무, 하얀 배꽃인데 열매가 팥처럼 작은 팥배나무 등이다.
흔들바위까지 1시간 이상 걸은 후 경사가 꽤 되는 길이 계속되었다. 그가 헉헉거리며 멈춘 곳이 바로 내가 숨 돌릴 필요성을 느낀 곳이었다. 이런 부창부수가!
딱히 꼭대기까지 갈 생각이 없었던 등반이었고 땀나는 더운 날씨에 몇 번 헐떡거려 보니 정상까지 목숨 걸고 갈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남은 거리 0.4m 라는 팻말의 400m가 나의 오기를 자극했다. 해도 길겠다 5분 마다 쉬어 간들 어떠하리!
울산바위 정상까지 잘 정비된 철재테크 계단을 아파트 계단 오르듯 죽 올라가는 것으로 충분했지만 몇 번을 쉬었는지 모른다. 설악산 입구에서부터 총 4시간 가량 소요된 것이다. 일반인의 2배 시간이 걸린 것이다. 돌멩이 흙길이었다면 이루지 못했을 등반이었다. 500밀리 생수 2병도 다 마시고 사탕은 물론, 피로회복제로 서울서 챙겨온 바나나 3, 사과 1, 삶은 달걀 2개도 그 사이 다 먹었다. 얼마나 높이 올랐길래 그렇게 힘들었나 찾아보니 세계 최고층 건물, 두바이의 버즈 칼리파(Burj Khalifa, 829.8 m)보다 더 높았다(873m).
둘레 4km, 6봉으로 형성된 울산바위 꼭대기는 그늘이 전혀 없었다. 불쑥 튀어나온 바위 밑 아주 좁은 그늘에 몇 명이 자리잡고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퍼드러질 생각을 접고 하산하기 시작했다. 세 번째 정상 정복이라 미련없었다.
내려오는 길에서 본 흔들바위는 상대적으로 아주 작은 구슬이었다. 주위 평평한 바위에 몇 사람이 누어 있었다. 그가 먼저 자리를 잡더니 쓰러지듯 누었다. 나도 옆 바위에 바나나 쌌던 뽁뽁이 비닐을 접어 엉덩이에 대고 작은 배낭을 베개 삼아 베고 모자로 해를 가리고 눈을 감으니 이런 행복이! 산행 도중 누워 잠시 비몽사몽에 빠지다니. 느림의 미학이 아니고 무엇인가! 따지고 보면 30분 정도도 안 되는데 그걸 실행하지 못하고 살다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물소리를 들으며 계곡을 따라가다 이왕이면 후들거리는 다리와 화끈거리는 발을 차가운 계곡물에 담그면 최상일 것 같았다. 그가 동의했다. 이런 환상적 궁합이! 코로나 덕에 지나가는 인적이 어찌나 드문지 남의 시선이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온통 우리 세상이었던 것이다. 무릎까지 바지를 걷어올리고 땀으로 끈끈한 양말을 벗고 흐르는 물에 담긴 발은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했다. 날아갈 듯 산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앉았다 일어서니 초창기 로봇처럼 어기적어기적 걸을 수 밖에 없었다. 내리막길이 더 힘들었다. 무릎 관절 근육이 늘어났는지 굽힐 때마다 통증이 느껴졌다. 허벅지도 장단지도 근육이 분리된 듯 땡겼다. 철제 인공 무릎 위아래로 몹시 딱딱한 서어나무 몽둥이가 박힌 다리가 연상되었다.
그가 그렇게 느림의 미학을 실천한 이유가 쉬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덥고 땀이 나고 심장박동이 벅차고 다리 힘이 빠지고 발이 아프고 등등 극에 달한 육체적 고통 때문인 줄 몰랐다. 몇 달간의 집콕과 쌓인 연세가 그렇게 약해진 체력으로 나타날 줄이야. 내가 없었더라면 중도 하차 했을 거라 그가 말했다. 그의 늙음이 슬프다는 생각보다는 확실한 존재감이 은근 기분 좋았다. 언제 또 완주할지 의심스럽지만 무리한 등산이 잘 마무리되어서 다행이었다.
예약에 포함된 공짜 음료수 티켓을 사용하려고 9층 바에 올라갔다. 커피 쥬스 티의 3종류 중 오렌지 쥬스를 택했더니 품절이라 해서 사과쥬스를 주문했다. 테라스 식탁에 앉으니 설악산 정기가 몸에 스미는 듯, 설상가상 너무 단 쥬스에 구매한 생맥주를 섞어 마시니 금상첨화였다.
지난번 먹었던 생선찜 식당에 가니 재료가 바닥나 문을 닫았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2차 후보지로 청국장 집을 찾아 갔더니 그곳은 낮에만 하는 것 같다고 옆 노천 참회장수가 일러 주었다. 코로나 여파가 아니고 무엇이랴. 5.5Kg 들이 긴 자루의 참외를 사고 그가 추천한 근처 식당에서 황태구이를 먹었다.
피곤해서 중간에 깨어도 곧 잠들터이다. 두려움 없이 잠자리에 드는 즐거움도 오랜만에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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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운동하지 않은 시간들이 이렇구나..
나도 요즈음 다른 무릎이 아픈듯해서 걱정이 되긴하는데..
집에서라도 열심히 걷고 있지.
그런데 둘의 마음은 하나의 마음이 되었네...
듣기 좋은 소리이네..
골이 더 깊어 지난 세월이 더 만만치 않아 보이는 굴 참나무와 느릅나무는 알고 보니
달라 보인다..ㅎㅎ
오 ~ 울산바위 잘 갔다왔네.
아주 힘들지는 않았나부네. 이렇게 사진도 찍어가며 ㅎㅎ
사람이 없으니 정말 그대만의 공원이었네.
내가 지난가을에 올라갔었어.
내평생에 이제 또 오르기는 힘들다면서 ㅋㅋ
경위 대단하네~ 정말 좋네~
사진 기술도 어쩜~ 대단해~
미미도 지난 가을에? 단풍이랑 상상만 해도 멋져~
경위의 해외여행 기행문을 못 봐 아쉬웠는데 이런 행운이 있네요.
언제 가도 좋은 곳 3곳을 뽑는다면 나는 설악, 제주, 경주였는데
생생한 글솜씨 덕에 경위가 숨이 찰 때는 같이 차면서 정상까지 다녀왔네요.
고마워요. 경위!
한 가지 흠이 있다면 두 분 사진도 실었더라면 금금상첨화였을 듯!
삼박 사일의 여행담 잘 보고 있습니다.
그 ~~~ 옛날에 울산바위 올라갈 때
난 중간에 앉아 기다리고 우리탱만
정상까지 다녀왔는데...
그때부터 난 등산체질이 못 됐나봐.
늘 미소띤 얼굴로 부창부수하는 경위님!!
존경스럽습니다.
맞어 ~~
경위는 복덩이!
산행을 다녀온 느낌이야.
잔잔하게, 자세하게 설명 해 주어서 같이 갔다 온 기분이고,
나도 2마일 걸을때 나무 숲도 있고 언덕을 오르 내리며 탱 이 여러 코스를 바꿔가며 걸어.
한적한곳에서의 자유로움도 느껴 봤어.
설악산은 아주 오래전에 갔다 온 곳이라 사진도 반겼어.
와 드디어 경위가 설악산 다녀왔구나....사람들 많지 않아서 경치 구경하기는 더 좋았을거 같네
경위덕분에 멋지게 찍은 사진으로 나도 설악산 잘 다녀온 기분이야...
보통 사람의 두배 걸려서라도 올라갔다 왔다는게 대단해...나 같으면 못갔을 거 같애...
이곳에 살면서도 모르던 소나무와 참나무 이야기랑 경위덕분에 많이 배우네. 사진도 정말 시원하게 잘 찍었고.
와
설악산, 가고 싶어 ~~~!!!!
경위 산행을 내가 같이 다녀온듯..
같이 숨이 차다가, 베낭을 베고 누울때면 나도 느껴지는 그 행복감 이라니.... ㅎㅎㅎ
내가 너무나 글에 몰입을 했는가봐유.
와 ~
나도 가고 싶네
언제 울산바위에 올랐나 아득하네
경위 잘 했수
그리고 이렇게 남겨줘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