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1일 주일 오후 예배 | 주일 오후 예배 찬송 경배찬송 – 시 9편 1,4,5 성경낭독 후 찬송 – 시 136편 5 (고정) 설교 후 찬송 – 시 36편 2,3 폐회찬송 – 시 105편 17,18 (고정) |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설교 | |
제31주일 | |
성경낭독 : 시 148; 히 2:10-18 본문 : 마 16:16-20 제목 : “천국문과 지옥문” |
제 31주일
83문 : 천국의 열쇠는 무엇입니까?
답 : 거룩한 복음의 강설과 교회의 권징인데,
이 두 가지를 통하여 믿는 자에게는 천국이 열리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닫힙니다.
84문 : 거룩한 복음의 강설을 통하여 어떻게 천국이 열리고 닫힙니까?
답 :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사람들이 참된 믿음으로 복음의 약속을 받아들일 때마다 참으로 그들의 모든 죄를 사하신다는 사실이 신자들 전체나 개개인에게 선포되고 공적으로 증언될 때 천국이 열립니다.
반대로 그들이 돌이키지 않는 한, 하나님의 진노와 영원한 정죄가 그들에게 머문다는 사실이 모든 믿지 않는 자와 외식하는 자에게 선포되고 공적으로 증언될 때 천국이 닫힙니다.
이러한 복음의 증언에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와 장차 올 세상에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85문 : 교회의 권징을 통해서 어떻게 천국이 닫히고 열립니까?
답 :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그리스도인의 이름을 가진 자가 교리나 생활에서 그리스도인답지 않을 경우, 먼저 형제로서 거듭 권고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오류나 악행에서 돌이키기를 거부한다면, 그 사실을 교회 곧 치리회에 보고해야 합니다.
그들이 교회의 권고를 듣고도 돌이키지 않으면 성례에 참여함을 금하여 성도의 사귐 밖에 두어야 하며 하나님께서도 친히 그들을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제외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참으로 돌이키기를 약속하고 증명한다면 그들을 그리스도의 지체와 교회의 회원으로 다시 받아들입니다.
천국문과 지옥문
주 예수 그리스도께 사랑받는 성도 여러분!
성찬에 대한 마지막 가르침인 30주일의 대답 부분에 보면 권징과 관련한 말씀에서 “천국의 열쇠를 사용한다”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오늘 31주일에 들어오면 “그러면 천국 열쇠란 건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습니다.
교리문답은 이것을 물음으로써 성찬에 관련된 모든 질문을 마치면서 2부를 끝마칩니다. 다음 32주일부터가 3부 ‘감사’의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2부 ‘구속’의 부분을 마치면서 “천국 열쇠”에 대한 가르침으로 맺고 있는 셈입니다. 구속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전체적으로 보여주는데, 그 그리스도의 사역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방편으로서 “열쇠”를 말씀하고 있는 셈입니다.
천국에 “열쇠”가 있다는 것은 비유법입니다. 이는 마치 천국에 ‘문’이 있고, 그 문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으며, 열쇠를 통해서 그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다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명백히 ‘그림 언어’이지만, 이런 그림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천국에 대해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예를 들면 천국에 ‘문’이 있고 ‘열쇠’가 있다는 것은 천국이 ‘아무렇게나 오픈된 공간’이 아님을 알려줍니다. 말하자면 천국은 “열쇠가 없으면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천국에 대하여 느슨한 태도를 갖지 못하게 만듭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으므로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불신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로, 누구든 죽고 나면 “좋은 데로 가셨겠지요”라고 위안을 위해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아무렇게나 말할 수 있는 곳이 아닌 것입니다. 천국에 “열쇠”가 있다는 것은 그 문이 ‘잠겨 있음’을 말합니다. 조건 없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아닙니다. 오직 열쇠가 있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즉 우리는 “천국에 열쇠가 있다”는 가르침을 통해서 ‘천국의 배타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무나 오시오~”는 불가능합니다.
2) 더불어 천국에 ‘문’이 있고 ‘열쇠’가 있다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는데 ‘어떤 방편이 필요함’을 알려줍니다. 말씀드린 대로 ‘문’이 있고 ‘열쇠’가 있다는 것은 그림 언어, 곧 비유법에 불과하지만 문으로 비유되는 무언가, 곧 거기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것이 있고, 여기에 덧붙여서 이 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도록 열 수 있는 무언가, 곧 방편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천국에 열쇠가 있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이 아무에게나 오픈된 공간이 아니며, 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는 무언가 방편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이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 전체의 가르침들을 통해서 이 “천국 열쇠”에 대한 내용을 듣도록 합시다. 새해의 첫 주일에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활짝 열린 천국의 문’을 경험케 되는 우리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하늘의 문
1. 벧엘과 바벨
“천국에 문이 있다”고 했을 때, 그리고 우리 말로 ‘천국’이란 ‘하나님의 나라’ 혹은 ‘하늘(들)의 나라’이기 때문에 이를 살려서 말하려면 하늘 혹은 하늘나라에 문이 있다고 했을 때, 성경에서 이를 제일 먼저 발견하게 되는 곳은 창세기 28장과 11장 말씀의 연장선상에서입니다.
창세기 28장에서 집을 떠난 야곱은 벧엘에서 한 돌을 취하여 베개를 삼고 잠이 듭니다. 그리고 그에게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하는 한 사다리”(12절)가 나타납니다.
이 장면을 보고 난 야곱은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라고 소리쳤습니다(17절). 그래서 이 장소를 원래 ‘루스’였던 지명에서 바꾸어 ‘벧엘’로 명명합니다(19절). 벧엘이라는 말은 ‘베이트 엘’, 곧 ‘하나님의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때 이 베이트 엘을 야곱이 설명한 것을 유의하여 보십시오. 야곱은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다”라고 하였는데, 우리말로 “전이요”라고 할 때의 이 단어가 히브리어로는 ‘바이트’, 곧 “집”입니다. 그러면 ‘벧엘’이라는 이름은 야곱이 소리친 앞부분을 설명한 것이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집이다!” 이렇게 말한 것이죠.
그러면 그 뒤에 말한 “하늘의 문이다”라는 말은 왜 한 것일까요? 이 말은 무엇을 염두에 두고 야곱이 외친 것일까요? 이 “하늘의 문”, 곧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로 말하자면 “천국 문”이 되겠죠? 이 “하늘의 문”이란 창세기 11장의 ‘바벨’을 겨냥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하늘로 열린 문과 사닥다리를 발견했을 때 야곱은 이렇게 외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지금 자신에게 보여주고 있는 이 환상적인 모습이 바로 “바벨 탑”에 대항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벨”이라는 말은 수메르어 ‘카딩길라’를 바빌로니아어 ‘밥 일리’로 번역한 것입니다(2013년 12월 22일 설교 참조). 이 ‘밥 일리’의 의미가 바로 “신의 문”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야곱은 바벨에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고
한편으로는 “여기가 하나님의 집이군요!”라고 외치면서
동시에 “여기가 하늘의 문이군요”, 곧 여기가 “바벨이로군요!”라고도 외친 것입니다.
야곱은 왜 거기에서 창세기 11장을 연상케 하는 ‘바벨’을 말했을까요?
바벨은 ‘이방인의 하늘 문’, 곧 ‘거짓 하늘 문’입니다. 창세기 11장에서 바벨탑을 쌓은 이들은 ‘하늘에 닿고자’ 하여 그 탑의 이름을 ‘하늘의 문이다’라는 뜻에서 ‘바벨’이라고 지었지만, 그들은 하늘에 닿지 못했습니다. 즉 ‘바벨’은 ‘하늘의 문’이라는 이름만 가진 ‘거짓 하늘의 문’인 셈입니다.
야곱의 이 외침은 ‘진짜 바벨’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진짜 하늘의 문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늘을 여셨을 때 거기 ‘베이트 엘’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닿기를 노력하지만 결코 하늘의 문에 도달할 수는 없었습니다. 참 ‘하늘의 문’은 벧엘에 있었습니다.
2. 이것의 의미
야곱이 보았던 ‘참 바벨’, 곧 ‘천국 문’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무엇을 알려주기 위하여 씌어진 것일까요? 창세기 28장의 벧엘 이야기는 그저 ‘야곱이라는 한 족장이 길을 가다가 겪었던 아주 흥미진진한 어떤 삶의 일화’ 같은 것입니까?
베이트 엘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알려주십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일련의 대화를 마칠 때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요 1:50-51).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찾아왔던 나다나엘에게 ‘야곱의 벧엘 사건’을 언급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야곱이 보았던 하늘과 땅 사이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 했던 장면을 말씀하실 때 ‘단어를 하나’ 바꾸어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8장에는 “사닥다리”였던 것을 “인자”로 바꿔 말씀하신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천사들은 “사닥다리를 통해” 하늘과 땅 사이를 오르락내리락 했는데,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중은 분명합니다. “사닥다리”가 “인자”라는 것이지요. 곧 하늘과 땅을 연결하시는 분은 “인자”셨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창세기의 야곱 이야기에서 만나게 되는 ‘벧엘과 바벨의 이야기’에서 ‘천국 문’과 관련된 중요한 힌트를 얻게 됩니다. 하늘에는 문이 있습니다. 비록 이 ‘천국 문’은 비유적으로 사용된 것이긴 하지만, 성경에서도, 또 이방 나라들에서도 즐겨 사용할 만큼 매우 익숙한 비유였습니다. 하늘에 닿을 수 있는 문이 있고, 이방 나라들은 이것을 자기들의 방식대로 접근하려 하나 잘 되지 않습니다. 오직 이 천국 문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으니, 바로 ‘인자이셨던 그리스도’, 바로 그분입니다.
우리는 ‘천국 문’에 대하여 중요한 주제를 캐치할 수 있습니다. 천국 문을 여는 진정한 열쇠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 있습니다.
지옥의 문
이제 두 번째 이야기로 가 봅시다.
두 번째 이야기는 삼손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둘째 이야기에서 ‘천국의 문’과 대비되는 ‘지옥의 문’, ‘음부의 문’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사기 16장의 앞부분에서 삼손은 블레셋의 도시 가사에서 한 기생의 집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가사의 사람들은 삼손을 죽일 계략을 세웁니다.
삿 16:2 혹이 가사 사람에게 고하여 가로되 삼손이 여기 왔다 하매 곧 그를 에워싸고 밤새도록 성문에 매복하고 밤새도록 종용히 하며 이르기를 새벽이 되거든 그를 죽이리라 하였더라.
그런데 그 다음 장면을 보면 삼손은 이 계략을 알아채고는 아주 황당한 행동을 합니다. 바로 그 다음 절에는 이 말씀이 나와 있는데, 사사기를 보면 여기에는 왜 삼손이 이런 행동을 했는지, 또 이 행동의 의미는 무엇인지, 이런 것에 대한 해설은 하나도 없고, 그저 이 행동을 했다는 사실만 기록되어 있고 곧바로 다음 내용으로 넘어가 버립니다. 그래서 성경을 그냥 읽기만 해서는 왜 삼손이 이런 일을 했는지를 알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삿 16:3 삼손이 밤중까지 누웠다가 그 밤중에 일어나 성문짝들과 두 설주와 빗장을 빼어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가니라
삼손은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위기에 있었습니다. 매복한 사람들이 있었고 “새벽이 되거든 그를 죽이리라”고 하였으니 분명히 철저한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삼손은 이런 계략을 알아챘으면 ‘몰래 도망쳤을’ 법도 한데, 도리어 커다란 소동을 일으킵니다. 성문짝들과 두 설주, 곧 문을 받치는 기둥과 빗장, 빗장은 문을 닫기 위해 가로로 거는 큰 가로바를 말합니다. 이것을 모두 빼서 어깨에 짊어지고 가사를 떠난 것입니다.
당연히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것들 중 하나조차도 제대로 들 수 없을 것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성이 아무리 작다 해도 성문의 크기가 얼마나 하겠습니까? 당장 부산에 있는 동래산성 같은 곳에만 가봐도 거기 성문 정도면 어마어마한 크기입니다. 그런 성문과, 또 그 뿐 아니라 성문의 설주들과 빗장들까지 모조리 짊어지고 간다? 이건 굉장한 일입니다.
분명히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 삼손은 ‘몰래 도망치지’ 않았을까요?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비록 성경에 해설이 되어있지 않더라도 당연히 ‘의미가 있는’ 행동임에 틀림없습니다.
게다가 삼손은 이것을 다 짊어지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까지 갑니다. 가사에서 헤브론 앞산 꼭대기까지는 약 60킬로미터 이상의 거리입니다. 심지어 이 길은 쉬임 없이 계속되는 언덕길입니다. 물통 하나 짊어지고 가기에도 대단히 힘들 길입니다. 그런데 이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무게였을 성문과 기둥, 빗장들을 짊어진 채 삼손은 굳이 거기까지 그 성문들을 짊어지고 갔습니다. 이유가 없을 수 없는 행동이지 않습니까?
삼손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는 두 가지 정도 키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성문”이라는 것이 ‘힘’, ‘세력’을 나타내는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성경에도 자주 나오지만, 구약 성경의 시대에 성문은 사회적, 행정적, 사업적 교섭과 종교 행사가 이루어지는 곳이었습니다. 시장도 거기 있었고 관공서도 거기 있었습니다. 유력한 자들이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성문은 ‘그 도시의 힘과 세력’을 상징하는 곳이었습니다.
둘째는 “헤브론”입니다. 헤브론은 다윗이 왕으로 등극했던 곳이며 실로의 성막이 파괴되고 솔로몬의 성전이 세워지기 전, 다윗이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기 전, 그러니까 삼손이 활동하고 있던 당시에는 ‘예배 중심지’였습니다. 그리고 삼손이 갖다 놓은 장소를 성경이 쓰고 있는 방식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헤브론 앞산 꼭대기”는 히브리어로는 ‘프네이 헤브론’, 곧 ‘헤브론의 얼굴 앞’, ‘헤브론의 면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배 중심지였던 헤브론의 면전에 성문과 기둥과 빗장을 갖다 놓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의 얼굴 앞에’, ‘하나님의 면전에’ 이 성문, 곧 블레셋의 힘과 세력의 상징이었던 성문을 모조리 뽑아 갖다 놓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삼손의 행동을 이 정도로 정리해 놓고 보면, 왜 삼손이 이런 행동을 했는지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됩니다. 창세기에 이런 계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 22: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시기에 이미 ‘훗날 오게 될 그 씨’는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을 주셨습니다. 나중에 여자의 후손이 오게 되면, 그 여자의 후손, 곧 메시야는 “대적의 성문을 차지할 것”, 곧 대적의 세력을 파괴할 것입니다. 삼손이 그 무거운 성문을 지고 ‘하나님의 얼굴 앞에’ 이것을 갖다 놓은 이유는 그가 이 ‘장차 올 씨’를 보여주는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대적의 성문을 차지한 사람입니다!
“성문”임을 생각하십시오. “대적의 성문”은 무슨 문이겠습니까? “음부의 문”, “지옥의 문”입니다. 문이 권세지요? 음부의 권세, 지옥의 권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천국의 열쇠”가 등장하는 마태복음 본문입니다.
마 16:18-19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내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태복음 16장의 이 말씀은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천국 열쇠를 주시겠다는 말씀 앞에 하신 말씀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은 무엇을 말씀하셨나요?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다.
여기 “음부의 권세”는 의역입니다. 헬라어 ‘퓔레’는 ‘문’입니다. “음부의 문”이죠. 우리가 방금 말했던 창세기 22장의 “대적의 성문”이요, 삼손이 짊어지고 갔던 “가사의 성문”입니다. 영어 성경은 많은 역본들이 “문”이라고 직역합니다. KJV도 ‘the gates of hell’이고 NIV도 ‘the gates of Hades’입니다. NASB도 ‘gates of Hades’이고 ESV도 ‘gates of hell’입니다.
우리는 삼손 이야기와 창세기 22장의 예언, 그리고 이것의 성취인 마태복음 16장 말씀을 통해서 분명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라고 하셨으니 두 세력은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문’, 곧 ‘천국의 문’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와 대립하고 싸우는 또 다른 문도 있습니다. 그것은 ‘지옥의 문’, ‘음부의 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올바르게 신앙고백을 하고난 후에 그를 통하여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때의 교회는 “음부의 문을 이기는 교회”인 것입니다.
열쇠의 주인께서 교회에 열쇠를 주시다
열쇠의 주인
이 천국의 문의 열쇠의 주인이 누구십니까?
요한계시록 3장 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계 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우리는 계시록 말씀을 통해서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가 누구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22장 22절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사 22:22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우리는 이런 말씀을 통해서 “열쇠의 주인”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게 됩니다. 천국 문을 열 수 있는 열쇠의 주인!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천국 문을 오직 그분만 여실 수 있으시고, 또 그래서 지옥의 문과 맞서 싸우시면서 “내 교회”를 세우셔서 그 교회가 그 지옥의 문에게 패배하지 않도록 이끄시는 분!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십니다.
계시록을 편지로 받았던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은 박해의 상황 속에서 편지를 받고 힘을 냈습니다. 이들이 온통 알아들을 수 없는 기묘한 묵시들과 이상한 기호들로 가득찬 서신을 받고서도 왜 ‘위로’를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 상징들 속에 들어 있는 메시지는 오직 그리스도만 천국 열쇠의 주인이시고, 그분 외에는 아무도 천국문을 열고 닫을 수가 없으며, 바로 그 열쇠의 주인께서 지금 백마를 타고 교회들을 위하여 싸우시고 계시므로, 그들은 결코 “음부의 문”, “지옥의 문”에 지지 않을 것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 “천국 문의 열쇠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오늘 마태복음 16장 말씀을 통해서 베드로에게, 그리고 베드로가 대표하고 있는 교회들에게 약속하십니다.
• 내가 천국 열쇠를 주인이다!
• 그런데 이 열쇠를 나는 너에게 주겠다!
• 천국의 문의 열쇠를 받은 교회는 주님께서 “내 교회”라고 하시며,
이 교회는 “음부의 권세”, 곧 ‘지옥의 문’이 이기지 못한다.
• 내가 천국 열쇠를 너희 교회에게 주었으므로, 이제 너희가 이 땅에서라도 그 열쇠를 사용하여 천국의 문을 열면 하늘에서도 그 문이 열릴 것이고, 그 문을 닫으면 하늘에서도 그 문이 닫힐 것이다.
교회가 받은 열쇠권
교회가 받은 열쇠권은 구체적으로는 무엇입니까? 교회는 무엇으로 싸우며, 무엇을 통해 천국을 열거나 혹은 닫습니까?
1)
마태복음 23장에는 산상수훈의 팔복에 대비되는 팔화가 있습니다.
이 중 첫째 화를 읽어드리겠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교회가 ‘무엇을 통해’ 천국문을 열고 닫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교회의 교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이 ‘거짓 진리’를 가르치는 ‘거짓 교사’였기 때문에 “독사의 자식들”, 곧 ‘뱀의 후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의 교사들이 한 일이 무엇으로 묘사되었나 하면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는다.
스스로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사람도 못 들어가게 한다
입니다. 즉 교회의 교사들이야말로 천국 문을 열고 닫는 방편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한 일이 무엇인가요? ‘거짓 가르침’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교회에 주신 천국의 열쇠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닫게 됩니다. 31주일에 나오는 ‘첫 번째 열쇠’는 “거룩한 복음 설교”입니다. 84문답은 이 “거룩한 복음 설교”를 통해서 교회는 사람들에게 천국의 문을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합니다.
2)
둘째 말씀은 마태복음 18장입니다.
마태복음 18장 18절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말씀이 오늘 본문과 마찬가지로 등장하는 곳입니다. 즉 18장 말씀은 16장 말씀과 똑같은 ‘천국의 열쇠’를 말씀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러면 “매고 푸는 일”은 언제 이루어집니까? 15절부터 17절까지의 결론이 18절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15절)
듣지 않거든 한 두사람이(16절)
그래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그래도 듣지 않거든 출교하라(17절)
“매고 푸는 일”은 그 다음에 나옵니다.
즉 두 번째 천국의 열쇠는 ‘권징’입니다. 교회는 권징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천국을 닫기도 하고 열기도 합니다. 이것은 85문답에 나와 있습니다.
정 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아듣기 쉬운 방식으로 ‘문’과 ‘열쇠’라는 비유를 사용하여 하나님 나라에 대해 알려 주셨습니다. 중요한 사실들을 기억합시다.
요약
1) 천국 문은 사람의 방식으로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사람이 들어가려는 하늘을 향한 문은 ‘바벨탑’을 만들 뿐입니다.
2) 주님께서는 이 천국 문의 모습을 자신에게 적용하심으로써 천국 문으로 들어가는 열쇠의 핵심이 주님 자신이심을 우리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다른 열쇠는 없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내려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천국 문의 열쇠는 없습니다.
3) 그리고 지옥 문이 존재합니다. 이 문은 세상의 문이요, 사탄의 문입니다. 지옥의 권능이요 사람을 삼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천국 문과 그 열쇠를 교회에게 주실 때 “내 교회는 지옥의 문에 지지 않는다”고 선언하셨습니다.
4) 이 일을 보여준 사람이 삼손입니다. 삼손은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그리스도였던 삼손은 대적의 문과 기둥과 빗장을 빼서 하나님 면전에 갖다 둡니다. 사탄의 문, 사탄의 권세는 실패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음부의 문은 천국의 문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5)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다윗의 열쇠의 주인이 오신 것입니다. 이 열쇠의 주인께서는 베드로가 대표하는 교회에 이 열쇠를 위양하셨습니다. 여전히 열쇠의 주인은 그리스도십니다. 하지만 그 권한을 위임받은 교회는 이제 주님이 주신 열쇠를 가지고 천국을 열고 닫을 수 있습니다.
6) 그리고 이 천국 열쇠가 이 땅에서 구체적으로 사용되는 방식은 ‘말씀 설교’와 ‘권징’입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고백처럼 말씀 설교와 권징만이 천국을 열고 닫습니다.
교회의 이 방편들에 순복함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청년이 이성 교제를 하거나 혼인을 하려 할 때 “교회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라고 말하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풍조가 지배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단지 ‘교회가 권위주의 사회이기 때문’입니까? 우리 교회 청년들은 ‘억압적 교회’에서 자라서 ‘권세를 가진 목사에게 항거하지 못하게 자랐기 때문’에, 그래서 ‘그 정도로 사적인 일도 허락을 받아야만 할 수 있게끔’ 된 것입니까?
물론 이런 교회들이 있습니다. 저도 이런 교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교회가 성도의 혼인을 통제하지만, 그것을 ‘권위주의적’으로 하는 교회들이 실제로 많이 있습니다. 내용은 그다지 따져보지 않고, 단지 목사가 명령하면 순종해야 한다고 믿는 교회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야말로 ‘구시대의 권위주의’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만약 이렇게 하는 교회가 있다면 그것은 얼마전 매스컴에 나와 떠들썩했던 이단적인 교회의 여자 목사가 자기보다 2-30살이 많은 노인의 뺨을 때리면서 욕을 하는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모습이라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이런 일들은 이와는 전혀 다릅니다. 왜냐하면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의 치리에 복종하는 것은 성도의 삶에 대하여 권세를 주신 주님께 대하여 ‘순종’이라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성도들은 집에 심방오는 것을 ‘싫어한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는 심방을 싫어하는 사람 자체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어떤 차이입니까? 한편은 자유분방하고 다른 한편은 구시대적 권위주의 속에 살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손에 쥐어주신 권세가 무엇인지, 권위주의를 반대해서 자란 현대 사회의 구성원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손에 천국의 열쇠를 쥐어주셨고, 그 교회를 통하여 이제 역사하시는데, 그 통치를 받아들일 때 ‘사람의 다스림’으로만 생각하니까 ‘순종’ 대신에 ‘자유의 침해’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천국의 열쇠를 주신 것은 성도들에게 직분자가 갑질을 하거나 무슨 명령을 하더라도 바싹 엎드려 기어야만 하는 굴종적 존재로 만들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천국의 열쇠를 교회에 주셨다는 사실 때문에, 땅의 손들로 치리하시는 주님께 순종합니다. 주께서 교회의 통치를 통하여 나를 다스리신다는 것에 대해 수긍하고 받아들입니다.
주께서 오늘도 교회를 통하여 나를 다스리심에 감사합시다.
그리고 ‘순종’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더욱 주님의 음성에 부합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