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애국계몽사상가(愛國啓蒙思想家)의 유교관 - 근대적 변혁을 위한 진통(2) 개화사상은 기본적으로 개혁사상이지만 동시에 국가체제를 통해 사회개혁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한말의 역사적 상황이 더욱 격심한 외침의 위협에 노출되고 조선정부의 무기력함에 따라 국가체제에 기대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대중의 계몽을 통한 국민의식을 결집을 도모하고, 이를 기반으로 당시의 적극적 위협세력인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고 사회개혁을 추진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애국계몽운동’이라 일컬어지는 이 운동의 기본성격은 ‘항일애국운동’이라 할 수 있지만, 이와 더불어 국민계몽을 위한 ‘개혁사상’으로서의 문제의식을 명확하게 지니고 있다. 애국계몽운동의 발단은 1898년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가 결성되는 데서 찾을 수 있으며, 이 시기에 「황성신문(皇城新聞)」과 「제국신문(帝國新聞)」이 발간되었던 것도 이 운동의 깃발을 확실히 보여 주는 사건이라 하겠다. 이 운동의 전개과정은 1905년에서 1910년에 가장 활발한 모습을 보여 주는데, 그 중요한 과제는 신교육구국운동이요, 언론계몽운동이요, 국학운동이요, 민족종교운동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또한 그 대표적 단체로서는 윤치호를 대표로 하는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안창호 · 양기탁이 중심이 된 신민회(新民會), 남궁억의 대한협회(大韓協會)를 비롯하여, 서우학회(西友學會),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등을 들 수 있다. 애국계몽사상은 개화사상에서 소홀히 하였던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 가는 것이었고, 대중의 의식을 계몽하고 결집시키기 위해 종교운동의 측면을 지니고 있으며, 여기에 유교에 대한 종교적 인식이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애국계몽사상가들의 개혁의식은 유교전통에 대한 예리한 비판적 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유교의 대중적 의식기반을 외면할 만큼 추상적 개혁론자가 아니라 현실인식을 지녔기 때문에 유교에 대한 비판의식과 동시에 유교개혁의 대책을 제시하거나 유교개혁을 통한 새로운 조직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애국계몽사상가로 활동하던 이기(李沂, 해학 海鶴, 1848-1909)의 경우를 보면 그의 생애에서 도학의 학문기반으로부터 개화사상을 거쳐 애국계몽사상으로 나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그는 1891년 「천주육변(天主六辨)」을 지어 프랑스 신부 로베르(A.P. Robert)와 교리논변을 벌였던 사실은 여전히 도학적 척사론의 의식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1894년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에 가담할 기회를 찾고 있는 사실에서 그는 이미 변혁을 추구하는 입장으로 전환하고 있으며, 1895년 어윤중(魚允中)에게 토지개혁안으로 「전제망언(田制妄言)」을 제시하였던 것은 개화사상가로서 구체적 방책을 제시할 만큼 전문지식을 계발하고 있었음을 말한다. 그 후 양지아문(量地衙門)의 양지위원(量地委員)이 되어 토지측량을 기획하였으며, 1905년 일본에 건너갔다 돌아온 뒤로 1906년 한성사범학교 교관이 되고, ‘대한자강회’에 가입하면서 애국계몽사상가로 성격을 정립하였다. 이듬해 나인영(羅寅永) 등과 을사오적암살미수사건에 관련되어 진도에 유배되기도 하였고, 그 후 ‘호남학회’에서 활동하였으며, 1909년 나인영 · 오기호 · 김교헌 · 김윤식 등과 ‘단군교(檀君敎)’를 창립하였던 것은 민족종교운동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기는 「일부벽파(一斧劈破)」에서 구학의 폐단으로 사대주의, 한문 숭상, 문호 구별을 들고 이것들을 타파하려는 확고한 의지를 밝히고 있다. 나아가 그의 신학론에서는 ‘신학’이란 바로 ‘시무(時務)’라 규정하며, 그의 신학 체계는 정치학 · 법학을 사(士)의 학문으로, 농상학(農桑學) · 종식학(種植學)을 농민의 학문으로, 상무학(商務學)을 상인의 학문으로, 화학 · 기계학을 공인(工人)의 학문으로 구별하고, 국가학 · 가정학 · 병학(兵學)을 공통 학문으로 제시한다. 그는 『대학』의 ‘신민(新民)’ 개념을 해석하면서 신민이 『대학』의 제일의(第一義)요, ‘명덕(明德)’은 신민의 도구(제구, 諸具)며, ‘지선(至善)’은 신민의 범위(한계)라 하고, ‘신민’을 통해 이 · 목을 열고, 심 · 지를 소통하게 하여야 할 것을 역설한다. 이것은 『대학』에 대한 애국계몽사상가의 독특한 해석으로 그 입장을 잘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중국 역사의 순환과정을 요 · 순의 ‘공화정(共和政)’에서 하(夏) · 은(殷) · 주(周)의 ‘입헌정(立憲政)’을 거쳐 진(秦) 이후로 ‘전제정(專制政)’을 해 왔으며, 따라서 이제는 다시 ‘공화정’으로 돌아가는 순환과정에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그는 유교 경전을 애국계몽사상의 이론으로 재해석하는 유교개혁사상가로서의 성격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