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김용옥은 대만에서 유학한 경력이 있더군요.
2004년 강의입니다. (2004년은 대만에서 내성인 민진당 천수이벤 총통이 간신히 재집권에 성공한 해입니다.)
400년간 완전히 독립된 국가를 가져보지 못한 나라가 대만이라네요.
영상 2개합해서 약 25분 분량입니다.
아래 글은 참고로 올렸습니다. 출처: 다음카페 중국상해화동경기대동문회
대만 천수이볜 전 총통의 정치 굴곡
성시일, 한림대학교 중국학과 조교수 2008년 12월 1일
천수이볜 정권의 탄생 배경 - 대만 민족주의
2000년 3월, 국공내전에 패한 국민당이 대만에서 정권을 수립한 이후 최초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돌이켜보면 대만의 역사가 그리 간단치 않다. 대륙의 중국에서는 자신의 일개 성으로 간주하지만 대만에서는 이에 대한 이해가 복잡하다. 대륙을 떠난 지 얼마 안되는 국민당 입장에서는 대륙은 언제가 돌아가야 땅이며 통일의 대상이지만, 명나라 말기에 이전한 대만인들은 대만은 단지 대만 그 자체라고 인식하고 있다. 대만의 민족주의에 대한 연구 중에 대만의 민족주의가 시작된 것은 일본에 의한 점령시기라고 기술한 논문이 있다. 기원전에 이주한 원주민은 폴리네시안계이고, 대륙에서 간간히 인구이동이 있었지만 대규모로 이동하는 경우는 대륙에 큰 혼란이 있을 때였다. 대표적인 것이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정권이 교체되던 시기였다. 이 때 이주한 중국인들은 1945년 당시 500만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일본 통치기간 동안 이들은 일본국민의 국적을 가지게 되었지만, 소수의 일본인들이 대부분의 권리를 장악하고 대만에 있는 사람들이 차별을 받자 이들은 ‘대만인’이라는 동질성을 자각하게 되고 대륙에 있는 중국인과 동류의식을 갖게 된다. 그러나 대륙에서 패배한 국민당이 대만으로 이동하면서 대만인이 갖는 ‘한족’의 동질성은 산산조각이 된다. 대만인들은 동족의 이동을 환영하였지만 국민당은 대만을 일본화 된 식민지인으로 인식할 뿐 대만의 문화와 역사의 특수성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국민당은 대만인을 피지배대상으로 인식할 뿐이었고, 대만인은 입장에서는 일본에서 단지 중국으로 지배정권이 바뀌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외성인과 내성인의 갈등이 극대화 된 것은 1947년 2월 28일에 촉발된 2․28 사건이다. 많은 대만인들이 이 사건 이후 해외로 망명하고 대만독립운동을 조직했다. 결국 대만의 민족주의는 국민당, 외성인에 대한 저항이 근저가 된다고 하겠다. 장개석, 장경국 총통에 이르는 독재정치 속에서 많은 대만독립 인사들이 탄압․제거되었고 주요 관직과 이권은 외성인이 장악하게 되었다. 1987년 계엄령 해제 이후 본성인의 목소리가 커져갔고, 국민당 입장에서도 이들의 불만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대만 태생인 리덩후이 총통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 총통은 대만인의 아이덴티티를 정립해 나갔다. 대만의 ‘중화민국’을 주권국가로 인정하는 모든 사람은 ‘신 대만인’으로 호칭했다. 이러한 ‘신 대만인’ 이라는 인식은 총통 선거에서 주요 후보자가 하나같이 대만인의 주체성과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대만사회의 주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대만의 아들(臺灣之子)’로 선거 구호를 외친 천수이볜 후보는 내성인 유권자 80%의 표를 끌어모아 총통이 되었다.
2000년 3월 총통 취임부터 2008년 11월 구속될 때까지 천수이볜 전 총통의 정치 굴곡을 기사를 참조해 정리했다.
원전 건설 중단, 탄핵 위기 - 2000년 10월
천수이볜 총통은 선거활동 기간 중에 환경오염을 이유로, 4번째 원전 건설 백지화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당시 30% 이상 진행된 이 발전소 건설을 백지화할 경우 이미 진행된 공사비와 건설 중단에 따른 배상금 등을 합쳐 약 1,000억 대만달러(약 3조5,000억원)의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추산되었다. 때문에 야당이자 제1당인 국민당은 원전 건설 백지화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다. 국민당을 비롯한 야권은 천 총통이 원전 건설공사 중단을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은 입법원의 기능을 침해한 것이라면서 총통소환제를 통해 천 총통 탄핵을 추진하였다. 천 총통은 입법원의 사전 동의를 구하지 않고 핵발전소 건설공사 중단결정을 내린 데 대해 사과했으나 야권은 총통 탄핵안 강행처리 방침을 굽히지 않았다.
민진당의 총선 승리 - 2001년 12월
여당인 민진당이 12월 1일 실시된 입법원 선거에서 대승하여 반세기 동안 유지된 입법원의 국민당 지배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또한 천 총통이 정국운영을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또한 리덩후이 전 국민당 및 국가 총통이 국민당을 탈당하여 창당한 대만단결연맹이 13석을 차지하여 민진당의 우호세력으로 등장하였다. 함께 치러진 자치단체장 선거에서도 국민당과 같은 9개 현(縣) 및 시(市)를 차지하는 성과를 얻어 천 총통이 구상해 온 '대만안정연맹' 등 대대적인 정계개편 구상이 추진력을 얻게 됐다.
국민당의 입법원장 선거 승리 - 2002년 2월
2001년 12월1일 치러진 총선에서 민진당에 제1당 자리를 내준 국민당이 1일 치러진 입법원장 및 부원장 선거에서 승리, 의회를 장악하게 됨에 따라 국내 정치 안정을 통한 경제난 탈출과 양안관계 개선을 목표로 했던 천 총통의 원활한 정국 운영이 쉽지 않게 됐다. 그러나 신임 입법원장인 왕진핑이 리 전 총통의 측근이기 때문에 그리 비관적이지는 않았다. 왕 입법원장은 "여야 균형적인 역할"을 약속하였기 때문에 천 총통의 입장이 꼭 불리해 보이지는 않았다. 민진당은 12.1 총선에서 제1당이 되었고 리덩후이 총통의 대만단결연맹 및 국민당, 친민당 내 대만 출신의원들의 부분적인 협력도 예상되었기 때문에 국민당의 입법원장 선거 승리가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천수이볜의 재선 성공 - 2004년 3월
천수이볜 대만 총통이 3월 20일 실시된 총통선거에서 롄잔 국민당 후보를 간발의 표차로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천 총통은 선거 전날인 19일 타이난 유세 중 저격되었는데, 이 사건이 재선에 영향을 미쳤다고 할 만큼 자작극이 의심되었다. 또한 야당들로부터 '불공정 선거'로 비난받는 등 재선의 기쁨보다는 큰 정치적인 부담을 안고 재선 정부를 이끌게 되었다. 더군다나 야당이 당선무효 소송을 냈기 때문에 법원 결정에 따라서는 당락이 바뀔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선거과정에서 한층 부각된 ◇ 경제 및 사회 불안 심화 ◇ 양안관계 악화 등 대만과 천 정권을 둘러싼 환경악화를 어떻게 돌파할지 주목되었다.
민진당의 총선 패배 - 2004년 12월
12월 11일에 치러진 대만 제6대 입법위원 선거 결과가 야권인 국민당의 승리로 끝나 천 총통의 대만 독립 추진에 제동이 걸리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렵게 국정을 이끌고 있는 천 총통에게 악재로 작용하게 되었다. 천 총통은 지난 3월의 총통 선거에서 표심을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대만 주체성'을 강조하며 '대만 국명으로 유엔 가입', '재외공관 명칭을 대만으로 개칭'이라는 등 자극적인 의제를 선점해가며 의회 과반을 확신했으나 예상 밖의 결과를 얻었다. 반면 총통선거 패배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인상을 줘 유권자들의 실망을 샀던 야권은 선거기간 중 참신한 의제도 못 내놓고 여권의 공격에 반격다운 반격도 하지 못했으나 신중한 선거 전략으로 의회 과반을 유지, 차기 대권을 노릴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천 총통은 선거 패배에도 불구, 대선의 선거 공약인 대만 독립 정책을 계속 공론화하면서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개혁세력 국민대표대회선거 압승 - 2005년 5월
5월 14일 치러진 대만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대표대회 선거에서 민진당을 비롯한 개정지지 정당들이 압도적 지지를 얻어 대만 헌법 개정을 순조롭게 이끌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또 롄잔 국민당 주석 등 야당 지도자들의 잇단 중국 방문 이후 궁지에 몰렸던 천수이볜 대만 총통이 다시 힘을 얻게 됐다. 선거결과에 고무된 천수이볜 총통은 15일 “헌법개정에 대한 다수의 지지는 민주주의와 개혁, 그리고 대만의 승리”라며 “1, 2단계 개정을 거쳐 오는 2008년 대만 실정에 맞는 새 헌법이 탄생될 것”이라고 말했다. 예상 밖의 낙승으로 업무 수행에 탄력을 받게 된 천 총통은 양안관계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새 구상을 내놓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 선거결과는 대만독립 지지정당인 민진당과 대만단결연맹의 녹색진영이 지난해 입법원 선거에서 다수를 점한 국민당과 친민당의 청색진영보다 앞선 것이다. 이 선거에서 선출된 300명으로 구성된 국민대표대회는 ◇ 입법위원 정원 감축(225석에서 113석으로) ◇ 입법위원 임기 4년으로 연장 ◇ 단일 선거구 2표제 실시 ◇ 국민대표대회 폐지 ◇ 대법관의 총통·부총통 탄핵 심리 등 헌법 개정안에 대한 승인 여부를 결정하게 되었다.
국가통일위원회 해체와 국가통일 강령 폐지, 탄핵 위기 - 2006년 2월
천수이볜 총통이 대만 독립에 저해가 되는 국가통일위원회와 국가통일강령을 사실상 폐지하면서 양안사이의 긴장이 고조되고, 제1야당인 국민당을 비롯한 친민당등 범국민당 계열 야당들이 천 총통의 탄핵을 추진하겠다고 나서면서 대만정국이 큰 혼란에 빠졌다. 대만 국가안보회의는 이날 회의를 열어 천 총통이 주장해온 국가통일위원회와 국가통일강령의 운용을 정지시키기로 했다. 이 조치는 천 총통이 강조해 온 대만 독립 절차를 구체화한 것으로 헌법 개정을 통한 대만 독립을 추진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국가통일위원회는 국민당 집권 시절인 1990년 설치돼, 중국이 주장하는 “중국과 대만은 하나다.”란 ‘하나의 중국 원칙’을 받아들여 양안 관계개선의 물꼬를 트는 기반이 됐다. 제1야당인 국민당과 친민당 등 범국민당 계열 야당들이 천 총통에게 ‘극단적 행동’을 자제하라고 촉구하고 탄핵과 국민투표를 통한 철폐 결정을 뒤집을 수 있다고 경고하는 등 전면투쟁 결의를 밝혔다. 그러나 탄핵안이 가결되려면 전체 225명의 입법위원 가운데 3분의 2 찬성을 얻어야 하지만, 125석의 야당으로서는 역부족이다.
친인척 비리, 탄핵 발의와 부결 - 2006년 6월
천 총통 퇴진 정국은 사위 자오가 대만토지개발공사의 내부 정보로 1,790만 대만달러(5억여원)를 투자하여 8배의 부당이득을 챙겨 구속된 사건이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4개 회사의 고문을 맡아 한달에 1,300만원 이상을 받은 자오의 부친, 경영권 분쟁 당사자로부터 상품권을 받고 주식투기 의혹을 받는 총통의 부인 우수전등 천 총통 일가가 ‘비리 가족’으로 몰리고 있었다. 국민의 43%는 천 총통의 하야를 지지하고, 천 총통 지지율은 10%대로 곤두박질치면서 국정운영이 불가능한 파국으로 치달았다. 정국 돌파용으로 남발되는 대 중국 강경책과 그로 인한 대미 외교 실패, 민생 경제 악화 등의 실정도 크게 작용했다. 대만 입법원은 국민당과 친민당 두 야당이 대만 헌정 사상 처음으로 발의, 상정한 총통 파면안에 대해 6월 27일 오전 표결을 진행했으나 찬성 119표, 무효 14표로 파면안 부결을 선언했다. 이로써 대만 헌정 사상 첫 국민소환 대상 총통이 될 위기에 몰렸던 천 총통은 다시 한번 난국을 탈출했다.
퇴진 요구 100만명 시위 - 2006년 9월
천수이볜의 총통 퇴진을 촉구하는 시위 군중 100만명이 9월 15일 밤 총통부를 포함한 타이베이시 중심가를 포위하는 대대적인 가두행진을 전개했다. 가두시위는 천 총통의 정치적 동지였던 스밍더(施明德) 전 민진당 주석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더욱 크다.
천수이볜 총통 부인 기소, 탄핵 위기 - 2006년 11월
대만 검찰은 한 달여간 진행해 온 총통부의 외교기금 운용에 대한 조사 끝에 우 여사와 천 총통의 전직 보좌관 3명을 횡령, 문서위조, 위증 등의 혐의로 11월 3일기소했다. 검찰 대변인은 같은 혐의로 천 총통도 기소할 수 있는 충분한 증거를 확보했으나 국가원수의 면책특권에 따라 현재로서는 기소가 불가능하지만, 퇴임 후에는 기소될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고 밝혔다. 문서위조 혐의로 기소한 뒤 천 총통에 대한 각계의 사임 압박이 한층 강화되고 있다. 야당 국민당과 친민당은 조만간 천 총통에 대한 파면안을 입법원에 제출할 계획이다. 그러나 11월 24일 천수이볜 총통 주민소환 투표 실시 법안에 대한 표결이 무산되었다.
민진당의 총선 패배 - 2008년 1월
이 선거에서 국민당은 113석 중 81석을 얻었다. 친민당 등 동맹 정당의 의석(5석)을 합하면 86석. 총통 탄핵은 물론 개헌안 통과를 위한 의석(전체 4분의 3인 85석)을 확보했다. 국민당의 입법원 장악은 1993년 이후 15년 만이다. 천수이볜 총통이 직접 유세장을 누볐던 민진당은 27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86년 창당 후 22년 만에 최악이다. 민진당은 수도인 타이베이시에서 전멸한 것은 물론 천총통의 정치적 기반이며 전통적인 표밭인 남부 지방에서도 절반(22석 가운데 11석)을 국민당에 내줬다. 민진당의 선거 참패는 천 총통이 지난 8년 집권 기간 동안 경제와 민생 문제는 챙기지 않은 채 대만 독립을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중국과의 갈등을 고조시킨 것에 유권자들이 불만을 표시한 것으로 분석된다. 집권층의 부정·부패도 악재였다. 천 총통 아내와 사위가 비리 혐의로 수사를 받거나 측근들이 구속된 데 대한 민의 심판이라는 풀이다.
민진당의 총통선거 패배 - 2008년 3월
3월 22일 대만 총통 선거에서 마잉주(馬英九) 국민당 후보가 셰창팅(謝長廷) 민진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이로써 50여년간 대만을 통치해오다 2000년 민진당 천 총통에게 정권을 내줬던 국민당은 8년 만에 정권을 탈환하게 됐다. 국민당은 지난 1월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데 이어 총통 선거에서도 승리함으로써 강력한 여대야소를 바탕으로 입법과 행정에서 확고한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대만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최종 개표 결과 마 후보는 765만8224표를 확보, 58.4%의 득표율로 544만5239표(41.6%)를 얻은 셰 후보를 16.8% 포인트 차이로 제치고 승리했다. 득표 격차는 모두 221만표로 지난 2004년 3만표 가량의 표차로 천수이볜 총통이 당선된 것과 비교하면 국민당의 압승이다. 투표율은 76.3%로 최종 집계되었다. 이같은 결과는 경제실정과 부정부패, 끊임없는 정쟁, 독립노선에 따른 양안 갈등 등 천 정권에 대한 염증을 반영한 것이라고 현지 언론들은 분석하고 있다. 마 후보는 양안 공동시장 공약 등 양안 경제협력을 통한 대만의 경제회생과 '633플랜(성장률 6%, 국민소득 3만 달러, 실업률 3% 이하 달성)' 등을 핵심 공약으로 제시하면서 경기침체에 불만을 느끼고 있는 중산층·서민층의 표심을 붙잡았다.
천수이볜 전 총통 구속 - 2008년 11월
천수이볜 전 대만총통이 11월 12일 구속 수감되면서 대만 정국에 파란이 예상되었다. 전직 총통이 구속되기는 대만 역사상 처음 있는 일로 야당인 민진당이 이번 사건을 ‘정치 탄압’으로 규정, 대규모 장외집회를 계획하는 등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대만 타이베이 지방법원은 천 전 총통의 정부 공금 유용 및 해외 돈세탁 혐의를 받아들여 이날 오전 구속 영장을 발부했다고 중앙통신사 등 대만 언론들이 보도했다. 타이베이지법 대변인은 “천 전 총통 사무실의 경리책임자 천전후이, 총통부 마융청 전 부비서장 등의 진술과 은행 환전, 송금 영수증, 토지사용 문서 등의 증거자료를 통해 혐의 정황을 파악했다”며 “증거인멸과 위증 우려가 있어 구속한다”고 발표했다. 앞서 검찰은 11일 직위남용 및 뇌물수수, 공유재산 불법전용, 돈세탁 등 5가지 죄목으로 천 전 총통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천 전 총통은 자신의 구속은 대만 독립세력을 약화시키려는 마잉주 정권의 정치탄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대만의 아들’로 당선된 천수이볜 전 총통의 몰락은 개인의 부패와 무능력이 가장 큰 요인이지만, 대만 민족주의에 대한 회의가 아닐까 하는 의문은 시간이 지난 후에 풀릴 것 같다. |
첫댓글 일본식민지가 무려 50년...
이거 보니 답답해지네요. 한당도 싫고 민당도 싫고... 지금도 답답하지만.. 2년 뒤도 그다지... 나이질 거 같지 않은... 걸출한 지도자가 정말 한분 나왔으면 좋겠네요. 정말...
제일 중요한것이 정치개혁인데.. 자신의 죄를 자신이 심판하는 법조인이란것과 같은 이치...
현 우리나라 정치인중에 스스로 자기 밥그릇문제를 정리할 정도의 애국자가 있을까 싶네요.. 그래서 더 한숨이..
그래도 민당도 싫어도! 그래도 그나마 나은 당을 선택해야겠죠... 이상과는 거리있는 현실이니....
친일인 이유가 있었네요.. 중국하고 엮는것도 그만 둬야 할듯.. 어차피 중국땅이 역사적으로 아니였으니..
좋은 자료.. 잘보고 가요^^
도덕성........
이런데도 우리 역사를 너무 모르니..........
이런이유가 있었군요. 감사합니다^^
잘보고 갑니다
잘보고 갑니다
대만을 평정한 사람이 일본혼혈 해적이예요.
정성공(鄭成功, 콕싱아, Koxinga)의 어머니가 일본인이라고 하더군요.
너무 좋은 글이네요
조회수 댓글수 추천수 그리고 좋은글들을 공지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회원님들의 소중한글을 모두다 공지로 지정하고 다들 오랫동안 볼수있게 하면 좋겠지만
정자게의 특성상 기본공지글이 너무 많아지면 그것도 보기 안좋을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공지에서 금방 내리게 됨을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부득이하게 본인의 글이 공지해제 되면 그만큼 더좋은 글이 생겼다 생각하시고
앞으로도 좋은글 부탁드립니다
바쁘신분들은 하편 6분부터라도 보세요..^^;;;
좋은글 잘봤습니다.. 감사..감사..
힘이 없으면 개무시당한다라는 도올의 말은 정말 새겨들어야 함
도올님은 진짜 모르는게 없으신거 같아요. 하버드 박사학위 받은분 맞죠? 대단하심
표현력도 좋으시네요. "포루투갈 애들이 지나가다가 고구마같이 생긴 섬"
대만 별명 예감... 고구마(sweet potato, 番薯)...
고구시마 아닐까요? ㅋㅋㅋㅋ
도올님의 마지막 표현중에, 주변 국가들처럼 강대국이 못될 지언정,
그들이 깔볼수 없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듣고 생각난건데,
노무현 대통령의 국방비젼이 그렇지 않았나요?
공군 해군의 현대화를 이룸으로써, 주적 북한만을 상대할수 있는 육방부에서
예상치 못한 주변국과의 마찰에도, 함부로 건들수 없는 나라.
이기진 못해도, 상대국에 한방을 먹일수 있는 군사력을 생각하던것이 노무현 정권에서의 국방비젼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글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