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목개가 있는 자매마을 방풍림속으로 떠난 숲 기행
난생 처음 숲 기행을 떠난다고 하니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에이!. 거짓말 하지마”라고 하겠지만 숲 기행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달고는 처음이 아닌가 한다.
어떤 협회나 단체를 통한 숲 기행이 처음이라는 것이지 나 혼자 뚜벅뚜벅 떠나는 숲 기행이라든지 그냥 좋은 사람과 훌쩍 떠나는 숲 기행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성격상 단체로 떠나는 여행은 각자 숲을 느끼는 방향이 다른데 내 자신이 숲과 동화되는 것을 방해하고 단체를 위해 시공간으로 구속되고 통제되기 때문에 진정한 숲 속의 여유를 즐길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 하나로 단체로 떠나는 숲 기행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신체적인 약점인 멀미로 인해 기대 반 우려 반으로 사도(沙島) 숲 기행에 승차하기 위해 “혹시!. 자리가 비면”이라는 애매모호한 표현을 시작으로 그동안 온라인상에서만 활동해 오던 숲과문화학교 숲 기행에 합류하게 되었으나 사도로 떠나는 발걸음은 마냥 신나지도 않았고 다만 내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다는 생각으로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겨우 물만 챙기고 점심도 준비하지 못한 체 여수를 향해 떠났다.
여수에 도착하여 백야도에 있는 항구로 이동하는 시작부터 숲과문화학교의 숲 기행은 시작되었다.
(숲과문화학교 교장 강영란선생의 작품)
자매마을 방풍림을 찾아가는 길목에 있는 화양고등학교 앞에서 일행을 기다리기 위해 잠시 정차하고 있는 시간에 오래되어 보이는 나무들 사이로 고인돌과 감목관(監牧官) 선정비가 있어 살펴보니 조선시대 말 목장을 관리 감독한 감목관(監牧官)의 이름과 미쳐 읽을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많은 글들이 비석과 고인돌 덮개돌에 음각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감목관(監牧官)은 지방에 주재하는 종6품의 벼슬로(보통 1개의 목장에서 암말 100필, 숫말 15필 정도를 관리) 여러 개의 목장을 관리 감독하는 벼슬이 감목관(監牧官)이다.
조선시대 국가에서 세운 국립목장은 병조의 외청(外聽)격인 사복시(司僕寺)의 감독을 받는 기관으로 임금이 타는 말 또는 소나 말을 기르는 일을 담당했으며 성종 때 완성된 사복시에는 정(正), 부정(副正), 첨정(僉正), 판관(判官), 주부(主簿), 안기(安驥), 조기(調驥), 이기(理驥), 마의(馬醫), 조교(調敎)로 구성된 관직을 갖은 관리들이 목장을 관리하였다.
1개의 목장에는 보통 4명이 100~115마리의 말을 나누어 관리하고 있는 이들을 목자 또는 목부라고 하고 신분은 노비와 같아서 감목관의 횡포에 시달려만 했다고 한다.
이곳의곡화목장(백야곶 목장)의 정확한 설치시기는 알 수가 없으나 세종16년 12월에 병조의 보고에 의하면 함평 해제목장, 나주 압해목장, 진도 부지산장, 흥양현 도양목장등이 세종10년(1421년)에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 시기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본다.
근처에 있는 곡화목장은 쌍봉 소호바닷가에서 창무마을을 거쳐 오천마을까지 “만리성”이라 불리는 “곡화목장분계성”을 쌓아 화양반도를 목장으로 삼아 군마를 조달하는 역할을 했다.
“곡화목장분계성”을 쌓을 때는 근처 지역의 사람들이 동원되어 쌓았다는 중요한 흔적으로는 성돌에 새겨진 “보성”이나 “흥양”이란 글씨로 짐작하고도 남는다.
근처에 여러개의 목장이 있어 관리하는 감목관으로 돌산만호나 순천부사가 겸임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화양고등학교 감목관비에 새겨진 감목관의 이름과 대조를 해보면 일치하는 기록이 보이지 않아 감목관을 따로 파견 한 것 같다고 한다.
이곳에는 원래 감목관비가 15기가 있었으나 2기만 원래의 것이고 3개는 근대에 기록을 바탕으로 다시 세웠다고 한다.
고인돌무덤과 감목관선정비가 있는 화동마을은 동학농민운동의 생채기가 그대로 있는 곳으로 동학농민군의 대장이 화동사람으로 관군과 싸우다 패하고 포로로 잡혀 화동농협분소 자리에서 화형에 처해졌으며 부대장은 장구도목(밀물과 썰물이 드나드는 깊은 물 길)에 수장되었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이곳의 동학농민운동은 종교적, 정치적과 더불어 전라좌수영과 영호도회소간의 군사적 역학관계, 순천부와 좌수영 주민과의 대립, 화동민과 돌산 둔전민과 대립, 화양면 곡화목장 감목관의 착취에 대한 반감이 원인이라고 한다.
화양고등학교 앞의 고인돌 군과 어울려 있는 감목관선정비의 심한 훼손도 곡화목장 감목관의 수탈과 착취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가 있다고 한다.
방풍림이 있는 자매마을 북쪽의 동성산(同姓山)에 있는 동성바위(형제바위)에서 동학농민군과 관군이 치열하게 싸우다 동학농민군이 패하자 시신을 수습하여 무덤을 만들었는데 그 독담불(돌무덤)은 그때 전사한 농민군의 무덤이라고 전(傳) 한다.
(숲과문화학교 교장 강영란선생의 작품)
화동마을을 떠나자마자 빗등과 속등에 펼쳐진 아름다운 곡선미를 자랑하는 비탈진 곳의 계단식으로 된 좁고 긴 논다랑이에서 초여름을 준비하는 농민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양파를 수확하고 있었다.
자치재(?)를 내려서자마자 마치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자매마을 해안가에 즐비한 줄나무의 방풍림이 멀리 위용을 드러내자 조망권이 확보된 자치재(?)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나의 10배 줌으로는 거대한 방풍림을 아름답게 담을 수가 없어 가장 좋은 사진기인 눈에 담아 뇌에 저장하기로 하고 주변을 살펴보니 근처 자그마한 밭에 심어져 있는 호밀이 보였다.
옛 추억하며 당시 국민학교 시절에 학교의 뒷산을 넘어오는 밭에 심어져 있던 호밀밭에서 주인 몰래 숨바꼭질을 했는데 철없던 시절의 못 말리는 개구쟁이들의 놀이가 아니었나를 생각해 본다.
서이산을 넘어 이목마을로 떨어지는 어깨 너머로 이영산 자락을 훔치고 고봉산을 비껴 흐르듯 빗등을 타고 내려온 산자락을 지나 자매(自梅)마을의 쌈지공원에 도착하여 마을 유래를 찾아보니 뒷산에 자생하는 매화나무가 많아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옛날에 부르던 이름은 순 우리말 이름으로 “잘미”라고 하는데 산의 옛말인 “자”와 산 아랫마을을 뜻하는 “자뫼”가 변해 잘미로 변했다고 한다.
잘미 마을로 고개를 넘기 전의 고개 안쪽의 마을 이름이 “자치내”인데 “자치내”는 “자의내” 란 뜻이 변화된 말로 산 안쪽에 있는 마을이나 산으로 둘러싸인 안쪽의 마을이란 뜻이라고 한다.
언제부터 자매(自梅)마을로 부르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기록에 의하면 한자표기를 하면서 순수한 우리 땅 이름이 많이 없어지고 터무니없는 한자로 변해 버렸다고 한다.
모정이 있는 쌈지공원에서 바라보는 방풍림은 여느 마을의 방풍림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주거하는 집들이 방풍림 사이를 비집고 있는 것이 달랐으며 방풍림 뒤편에 마을도 없을 뿐 만 아니라 농사를 지을 만한 토지도 넓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매(自梅)마을에 방풍림이 있게 된 이유를 이곳이 해변이면서 산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방풍림 뒤에 있는 넓지 않은 논과 밭이 옛날에는 매우 중요한 곡식을 생산 할 수 있는 기반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715B8394DC8A37709)
(자매마을 방풍림 속 내 풍경)
방풍림(防風林)은 큰 바람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고자 마을 주변에 심은 나무들을 보통 말하는데 자매(自梅) 마을을 바람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하거나 비보림의 역할도 아닌 농사를 위한 방풍림이거나 마을 앞에 넓게 펼쳐진 장수만 갯벌(들목개)이 있고 들목개가 황금어장이라는 안내자의 설명에서 보면 마을 앞에 포장길이 생기기 이전에도 이곳이 해변(갯가)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증명이라도 해 주듯 방풍림이 심어져 있는 곳은 크기가 비슷한 몽돌로 이루어진 해변의 가장자리였다는 것을 유추해보면 이곳은 방풍림이자 어부림이었을 가능성이 높았으나 자료를 찾을 수가 없었고 숲 속 틈새 틈새 자리한 자매마을의 집들은 이곳에 길이 생기면서 들어섰을 것으로 보인다.
자매마을의 방풍림은 해풍과 바람에 날려 오는 염분의 비산을 막기 위한 본래의 기능과 더불어 길게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을 통해 안정된 정서를 더 해주고 있으며, 주요 식생으로는 참나무류(갈참나무)400그루, 200년 된 느티나무 90그루를 비롯하여 폭나무, 푸조나무, 모감주나무, 말채나무, 덜꿩나무, 느티나무, 서어나무, 팽나무, 느릅나무, 후박나무, 동백나무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나무와 큰꽃으아리, 둥굴레, 왕둥굴레, 둥굴레아재비, 골무꽃, 염주괴불주머니, 개별꽃, 괴불주머니, 야생화 된 마늘, 파, 부추를 비롯하여 상층식생은 물론 하층식생도 매우 좋았고 개구리가 사방으로 뛰어 다니는 숲 다운 숲을 만나 오랫동안 가슴이 뛰었다.
방풍림의 앞에 넓게 펼쳐진 갯벌이 장수만 갯벌로 생태계가 온전하게 보존되어 방풍림과 어울린 갯벌체험은 물론 방풍림 뒤쪽의 자치내 빗등에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다랑이 논밭에서 농사체험도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 동학농민운동의 역사도 함께하며 봉수대가 있어 멀리는 고흥과 가막만, 여자만, 돌산은 물론 여수시가지까지 조망 할 수 있으며, 해안선의 비경을 볼 수 있고 봉화산자락 진등에 있는 장등해수욕장과 일몰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이목마을을 뒤로하고 우리일행은 물과 바람이 돌과 바위를 수 억 년을 조물조물 빚어낸 절대비경의 사도(沙島)로 향했다.
(*.여수시청 관광 자료일부를 인용하였고 일부 지명이 정확하지 않은데 틀린 곳이 있으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 “여수 사도 가는 길”을 "들목개가 있는 자매마을 방풍림속으로 떠난 숲 기행" 뒤편으로 끌어오면 숲과문화학교의 숲 기행이 완성된다.)
첫댓글 상부 첫번째와 두번째 사진은 숲과문화학교장 강영란선생의 것을 잠시 빌려 왔는데 어쩌지요. 아직
반성문 쓰는 심정으로 댓글을.....내 유년의 꿈이 서린 이곳에 대해 난 아는게 너무 없구나.
손들고 회초리 맞을 준비까지 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범위내에서 틀린곳은 없는듯하고
"자치재"는 그 아래 설명했듯이 어렸을적 "자치내재"로 불리웠습니다.
괜찮습니다. 사용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시 더 깊게 답사 하리라 생각하고 사흘 정도를 지난번 갔던 곳들을 다시 찬찬히 둘러볼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분도 다시 찾아봐야겠고, 선생님과 나눈 이야기 속의 빗돌들,,,, 세세히 둘러봐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수 식구들도 더욱 느리고 여유로운 길 함께 하길 기대리면서요.
여수지기선생님과 산들바람선생님의 고향이 가까운 것 같군요. 좋은 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내셔서 ..... 옛날 언젠가 "국활나무"를 물으셨던 선생님이신지요.(?)
90년도 초까지 자치내 산전과 산량골 산전 주변 산에 초분이 더러 있었습니다, 시제때 산길을 걷다보면 더러 만날수 있었습니다
금오도 비렁길에는 "초분"이 있다고 되어 있더군요. 아!. 자차내 근처에도 근래에까지는 초분이 있었군요. 사실 어떤 자료에서 초분이 있다는 이야기를 보고 잔뜩 기대를 했었는데 ....좀 아쉽드라고요. 그래서 기억이 나실련지 모르지만 "장사도"에는 초분이 있냐고 물었던 것이었습니다. 장사도를 왠지 사람들이 꺼리는 섬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혹시 그곳의 땅이 사람 살기에 부적합하여 장사를 지내는 땅으로 사용되지 않았나 생각했고요. 그래서 더 장사도에 가 보고 싶었으나 단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