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의 추억 2012.3.28
정태수 회장, 1997 년 외환위기를 촉발했던 한보그룹의 주인이었던 사람, 벌써 15 년 전의 일이니 역사 속의 인물이라 불러도 되리라.
오늘 문득 이 양반 생각이 난다.1960 년대부터 쉬지 않고 달려온 우리 경제의 급팽창이 이제 마무리되는 국면에서 그 마침표를 확실하게 찍어준 사람, 내 기억 속에 한보의 정태수란 사람은 이렇게 인상지어져 있다.
정태수 씨는 지금 우리 시야 밖으로 사라졌지만, 우리 사회에 그 양반만큼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도 드물 것이다. 우리 사회를 건강한 쪽보다는 그 반대, 병들게 하는데 있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렇기에 이 양반에 대해 더욱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정태수 씨는 여러 면에서 실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1923 년생인 정태수 씨는 진주농고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사실상 초등학교 졸업장이 학력의 전부라는 설도 있는 사람.
28 세부터 살부터 23 년간 세무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어느 날 찾아온 행운을 발판 삼아 재계에 彗星(혜성)같이 등장했다가 다시 流星(유성)처럼 홀연 사라져버린 인물.
세무공무원이었던 그는 어느 날 세금체납으로 경매에 나온 탄광을 알게 되었다.
별 밑천도 없었지만, 말단에서부터 세무공무원을 해온 바탕이 있었고, 또 나이도 50 줄에 접어들던 터라 어찌어찌 재주를 부려 그 탄광을 인수한 뒤 되파는 과정에서 상당한 이득을 보았다.
재미를 단단히 본 정태수 씨는 다시 몰리브덴 광산에 손을 대어 또 다시 황재를 했다. 이에 급기야 정식으로 사표를 내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1973 년 ‘반포 주공 아파트’가 준공되었는데 정태수 씨는 이에 아파트 사업이야말로 장차 떼돈을 벌 수 있는 아이템이라 확신했다. 그는 한보상사를 설립하고 아파트 건설시장에 뛰어들었다. 사실 대단한 선견지명이었다.
추억이 하나 떠오른다.
1974 년 말 지금의 입구정동 일대는 현대 건설의 부지 공사로 인해 황토흙 펄펄 날리는 커다란 공사판으로 변모했다. 당시 대학 1학년이었던 나는 그 해 겨울 어느 따뜻한 날, 우연히 서울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강남의 신사동에서 압구정동까지 친구와 산책삼아 걸었던 적이 있다.
이게 다 무슨 공사지?
현대가 여기에다 아파트를 짓는다던데.
왜 여기다 짓지? 시내에서 멀기도 하건만 누가 여기에 살려고 오기나 할까?
그건 모르겠어, 하여간 이상한 짓이야.
맞아, 사업하는 놈들은 다 미친놈들인 것 같아.
데모나 하고 최류탄 가스로 캑캑 대던 것이 세상관심의 전부였던 나는 친구와 대충 이런 얘기를 주고받았던 기억이 난다.
부지 매입할 돈만 있으면 나머지는 사실 자금이 별로 필요 없었다. 아파트 분양 광고를 내면 신청자가 쇄도했고 그 계약금만으로도 공사를 끌어갈 수 있었던 시절이다. (물론 말이야 쉽지만 대단한 묘기를 부려야 했음은 당연하다.)
정태수 씨는 세무공무원 출신이라 공무원의 심리를 꿰고 있었기에 그들을 상대로 뇌물을 먹이는데 있어 일류 선수였다. ‘로비의 鬼才(귀재)’라는 말까지 들었다.
사업이란 기본적으로 자기 자본 없이도 할 수 있다는 요령을 터득한 터에 공무원을 주물럭거리고 권력층에 접근하는데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일가견이 있었으니 이런 양반이 사업을 못할 까닭이 없었다.
이 두 가지 요령은 급변하고 급성장해온 70-90 년대 시절의 사업가에 있어 결여되어서는 결코 아니 되는 핵심 필살기였다.
사실 이런 요령은 학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가난했던 대한민국이 일어서는 과정에서 사회 저 밑바닥에서부터 함께 성장해온 역전의 용사만이 터득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하리라.
그런 정태수 회장에게 떼돈을 안긴 대표적인 사업이 강남구 대치동의 은마 아파트 사업이었다. 은마 아파트는 1979-1980년에 완공되어 입주를 마쳤고 그 과정에서 정태수 씨는 致富(치부)를 했다.
그리고 1983 년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경영난에 허덕이던 철강 공장을 인수한 것이 또 한 번의 대박이었다.
그 공장은 연간 생산능력이 60 만톤, 그런데 재고만 해도 60 만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인수하자마자 주춤하던 아파트 경기가 살아나면서 불과 두 어 달 만에 재고를 몽땅 팔아 떼돈을 벌었다.
행운은 계속 이어 지는 것 같았다.
1988 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는 주택 200 만호 건설을 공약했고 대선에 승리하자 당연히 주택건설이 다시 한 번 뜨겁게 불이 붙었다.
정 회장은 이를 기화로 서울 수서지구 택지조성을 무리하게 하는 바람에 정권과 공무원 기자 국회의원을 죄다 매수한 것이 1991 년 들통이 났던 것이다.
수서 비리 사건은 과연 ‘로비의 귀재’다운 솜씨였지만 슬슬 정태수 씨의 운세는 기울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1992 년 대선으로 등장한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는 이른바 ‘5공 심판’을 단행했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 대통령은 부정축재로 체포되었고 정태수 회장도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또 다시 기막힌 로비 솜씨를 발휘하여 김영삼 정부와도 거래를 트고 풀려난 그는 1995 년에 당진에 소형 봉강공장을 준공한 뒤 확장 작업에 들어갔으니 이것이 바로 한보철강이었다.
자금 여력이 없었지만 원래 사업은 돈 없이 한다는 신조를 가진 정 회장은 김영삼 정권 하에서도 엄청난 은행 대출을 이끌어내었다.
이로서 1997 년 1월 한보철강이 도산했을 때 대출총액은 제2금융권을 합쳐서 무려 6 조원에 달했다. 김영삼의 문민정부 역시 국가적인 사업을 한다는 외면적 명분과 함께 이면의 로비를 통해 꼼짝없이 걸려들었던 것이다.
거액의 대출이었으니 로비 자금 또한 거액이었을 것이다. 과연 어느 정도의 비자금이 정관계와 언론에 대한 로비 자금으로 뿌려졌는지는 지금까지도 정태수 씨만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재판장에 마스크와 휠체어를 타고 나타났던 정태수 씨의 모습만큼은 지금까지도 눈에 선연하다.
(뇌물을 받은 터라 가슴 졸이던 수많은 여야 정치인들과 공무원, 언론측 사람들은 마스크를 보고서 아 이 양반 절대 입을 열지 않겠다는 자세네 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고 아낌없이 기립박수를 쳤을 것이다.
1997 년 1월의 한보철강 도산을 시작으로 삼미특수강, 진로, 한신공영, 대농, 삼립식품 등의 재계 중위권 그룹들이 줄줄이 무너졌고 연말에는 급기야 외환위기로 이어졌다.
과거 전두환 노태우 정권 그리고 김영삼 정권에 이어 김대중 정권에 이르기까지 정관계와 기업 간의 온당치 못한 거래는 부단히 이어져왔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부터 현 이명박 정부에 이르러 대형 비리 사건이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액수는 줄어들었지만 동시에 권력의 분산과 함께 지방자치체로 옮겨가면서 더욱 널리 확산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한보그룹의 얘기는 우리 사회에 대단히 부정적인 악영향을 미쳤다.
그러면 여기서 한보 정태수 회장의 운세를 살펴봄으로써 정리를 하고자 한다.
1923년 8월 13일생이고 음력이다.
癸亥(계해)년 辛酉(신유)월 己亥(기해)일이다.
己土(기토)가 가을 추분 무렵에 나니 그 기세가 맹렬하다. 식신이 있고 또 癸水(계수) 財(재)가 年(연)에 있으니 머리회전이 빠르고 재주가 비상하며 勞力(노력)형으로서 치부할 운명임이 분명하다.
己卯(기묘)년이 입춘 바닥이니 1939 년과 1999 년이 바닥이다.
己酉(기유)년이 입추 기의 정점이니 1969 년이다.
1973 년 財運(재운)에 광산 사업으로 밑천을 마련했고, 1983 년 철강공장 인수로 더 큰 돈을 벌었다. 그리고 1993 년 재운부터는 모든 것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김영삼 정부 들어서면서 사실 모든 상황이 악화된 셈이었다. 이에 그는 대마불사를 외치며 엄청난 규모의 사업에 ‘올인’했으니 한보철강이었다.
그러나 운을 피할 수는 없는 법, 희대의 풍운아 정태수 회장 역시 1997 년 한보철강 도산으로 모든 것이 萬事休矣(만사휴의)로 돌아갔다. 당연히 그 역시 나름의 마음고생이 많았을 것이지만 지금은 중앙아시아의 어느 나라에서 그런대로 편히 지내고 있다고 한다.
사람들 눈에 정태수 씨가 부각되었던 때는 1990 년대였다. 그런데 그때 한보 그룹과 정태수의 운은 맹렬히 기울고 있었다.
소리 소문 없이 잘 나가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의 운세는 한창인 법이다. 하지만 요란하고 시끌한 法席(법석)이 벌어질 때 정도가 되면 이미 그 사람의 운세는 한창 기울고 있을 때라는 점. 이는 세상의 묘하고도 재미난 이치라 하겠다.
우리 경제가 요란하고도 어지럽게 급팽창해가고 있을 때 수많은 스캔들과 에피소드가 발생했다. 이에 한보 정태수 씨를 그 대표적인 사례로 꼽아 살펴 보았다.
[출처]<a href='http://www.hohodang.com/?bbs/view.php?id=free_style&no=785' target='_blank'>호호당 블로그</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