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욕 수행을 하는 이유는 좋은 경계에 서기 위함도 내가 좋은 사람을 위해서도 나에게 호의적인 사람을 위해서도 아닙니다. 나에게 적대감을 가진 사람, 나에게 반감을 가진 인연을 어떻게 하면 선한 방향으로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해결책으로 인욕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인욕 수행은 어려운 과목의 숙제와 같습니다. 만약 내게 나쁜 의도나 적대감을 가진 사람이 없다면 교과목이 될 대상이 사라진 것으로 수업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가 됩니다. 이렇게 보면 나를 비난하고 모욕하여 나를 화나게 만드는 사람이 사람이 나의 인욕 수행의 원인이 되어 줍니다. 그의 존재를 통해 인욕을 성취하고 못하고는 전적으로 나의 문제입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에게 수행의 원인을 제공 한 그가 깨달음의 원인이 되는 성스러운 진리와 다름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마땅히 다르마니 진리와 같이 존경을 받음이 당연하지요.
선과 악, 화와 복은 둘이 아닌 하나로 늘 함께 하는 오누이나 친형제와 같은 것이라 누누이 강조해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기심과 자기 중심적인 사고 방식은 항상 하나를 둘로 나누고 맙니다. 자신에게 이득이 생기는 좋은 일이면 박수치고 좋아하며 환영하다가도 자신을 반대하고 공격하면 누구도 좋아하지 않지요. 그러나 수행의 문에 들어선 사람 특히 인욕 수행을 닦으려고 결심한 대승 수행자는 반드시 이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왜냐면 상대적인 경계도 넘지 못한 사람이 상대를 초월한 경지를 견뎌낸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지요.
우리들이 인욕수행 하게되는 주요원인 나쁜의도 가지고서 우릴공격 하는이들 그들있어 가능한행 실천수행 대상인데 그적들이 화를내며 반대하는 그자체가 나의인욕 수행원인 제공하기 위함인데 그러므로 수행자는 적의의도 적의행위 결국에는 성스러운 다르마와 어떤차별 없음으로 존중함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중생과 부처가 평등하다'는 가르침에는 '마음의 근원으로 보나 공덕의 근본으로 보나 중생의 복전이 부처님의 복전'이라는 깊은 뜻이 깃들어 있습니다. 부처가 되는 최고 이상의 목표에는 중생이라는 근원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가르침이지요. '부처 없는 중생은 없고 중생 없는 부처는 무의미하다'는 가르침처럼 중생과 부처는 서로 평등과 균형의 관계에 있습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배워 알고 환희심을 내어 기뻐할 줄 아는 인연 공덕이라야 완전한 부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둘 아님의 근원에 바탕한 보살 수행과 공덕 회향의 귀결처는 결국 부처지만 근원은 중생입니다. 따라서 모든 수행자가 부처 됨이 당연한 일이며 모든 중생 또한 부처가 되어야 함도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을 곧 회향과 근원의 만남이 일관되다 말합니다.
앞서 보편적 다르마인 진리에 귀의하고 공경하고 공양하는 일과 최상의 복전인 부처에게 귀의하고 공경 공양함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에서 '중생의 복전은 부처의 복전'이라는 평등무애의 근원을 잘 이해하고 믿는 사람은 수행의 포인트를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일관된 행동은 '평등에 근원을 둔 둘 아님의 원리'를 중요한 포인트로 삼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는 믿음과 이해라의 분명한 바탕 위에서 수행하면서 발생하는 시행 착오를 검증하고 확증하는 과정을 받드시 거칩니다. 이 과정은 관계와 관계속에서 아함부터 대승의 선까지 일관되게 이어지고 있어요. 아함이 개인의 성취를 중심으로 한다 해서 중생을 도외시 하지는 않듯 대승도 중생과 함께 함을 중심에 두되 충실한 개인적 성취를 바탕으로 합니다.
선이 그 핵심을 분명하게 한다면 어찌 개인의 성취만을 위하고 중생을 도외시한 가르침이며 수행일 수 있겠습니까? 만을 정녕 그렇다면 이는 진리가 아니요 불법도 아니며 불교라 할 수 없습니다. 세계사 모든 흐름 속에는 어떤 진리라도 일맥상통함이 있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상주의에 빠져 내가 잡고 있는 이 공부 방편만이 최고 최상이라는 사견을 고집하여 목소리 높이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