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있는 자리에서. 마3:1-12
https://www.youtube.com/watch?v=W8KqB3i0oko&t=2403s 이학권.
https://cafe.daum.net/rnjstlgur/9oZC/432 권시혁
마 3:1 그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3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4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5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오늘은 먼저 제가 영상을 하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Mr. Hollands Opus라고 하는 1995년에 나온 영화입니다.
1995년이 제가 첫 번째 목회에 개척한 해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 아! 목회가 무엇이라는 이미지가 제 가슴속에 새겨진 그런 영화입니다.
Mr. Hollands는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이에요. 그런데 조지 걸스윈을 굉장히 존경하고 요즘은 이제 클래식 음악에 대해서 관심이 없잖아요. 그런데도 자기도 위대한 음악가가 되고 싶은 소망을 가지신 분이에요.
그런데 이제 당장 먹고 살아야 되니까,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으로 재직하면서 내가 음악을 연습하고 훈련해야 되겠다. 그렇게 하면서 음악 교사가 됐습니다. 그런데 학교가 재정난만 생기면 음악 프로그램부터 자르려고 하는 거지요.
그리고 아들이 태어났는데 아들을 훌륭한 음악가로 기르고 싶은 게 Mr. Hollands의 소망인데 이 아이가 농아로 태어났어요. 귀가 들리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아들과 아내와의 갈등. 그다음에 음악 선생님으로 학교에 부임해서 첫 클라스 공부를 하는데 홀랜드 선생님이 그런 말을 합니다. “음악은 감정의 언어다.”
우리의 논리는 거짓이잖아요. 논리에는 진실이 없지요. 나에게 이익되게, 유리하게 펼치는 게 논리지요. 그런데 감정은 그럴 수 없지요. 슬픈데 기쁘다 이럴 수는 없지요.
그래서 음악이 감정의 언어이기 때문에 음악을 느낄 때 우리 존재에 정말로 필요한 본질 부분이 피어나게 된다.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그때가 1960년대요.
락엔롤이 Rock and roll, 판을 칠 때입니다. 특히 고등학생에는 Rock and roll, 외에는 음악이 없는 것처럼 그런 시대인데, 그 학생들에게 락엔롤을 즐겨하는 것은 너희가 느껴지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 아니냐?
그런데 클래식도 classical music 더 깊이 느껴진다. 사실은 이런 체험을 시키면서 교육해 나옵니다. 그것 때문에 학생들이 음악을 만나게 돼요. 음악은 악보가 아닙니다.
악보는 배울 수 있지만 음악을 배울 수가 없습니다. 지금 기독교는 성경을 가르치고 배워요. 필요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건 아무것도 아니지요. 이 말씀 속에 운행 역사하는 영을 느껴야 되는 거지. 그걸 인간 지식으로 가져서 무슨 좋은 일 한 적이 있습니까? 없지요.
그래서 학생들에게 음악을 만나고 체험해 주게 하는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진정한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정말 음악이 피어나면서 자기의 현상이나 조건에 사로잡혔던 학생들이 자기 자신이 피어나는 체험을 합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학생이 랭이라는 학생인데 클라리넷을 부는데 클라리넷의 어려운 부분을 못 불어내는 거예요. 거기만 가면 삑 소리가 나던지 불었어도 음악적인 흐름이 깨지든지 그래요.
얘가 막 대학 입시로 클라리넷을 신청해서 하는 것이니까. 안 되니까 엉엉 울기도 해요. 그 랭을 노트를 불려고 하지 말고 음악을 느껴라. 그래서 랭이 음악을 느끼는 순간에 자기가 노트를 플레이해야 된다는 것을 잊어버려요.
그리고 그 음악이 쫙 펼쳐져 나옵니다. 그게 랭이라는 여학생을 완전히 전환시키는 모멘트가 되지요. 이런 경험들이 풋볼 선수. 말썽꾸러기 학생들에게 일어나면서 이 음악이 학교에서는 학교를 학교 되게 하는
그런데 이제 30년 재직했는데 재정난이 와서 음악 프로그램을 다 없앴습니다. 30년 재직했으니까 은퇴하게 되었습니다. 은퇴를 하게 되니까 재학생 졸업생들이 다 모여서 시크릿 은퇴식 선물을 마련했어요.
그게 뭔고 하면 평생 자기가 음악가가 되려고 교향곡을 작곡했지만, 한 번도 연주된 적이 없지요. 그래서 홀랜드 선생님이 작곡한 교향곡을 자기들끼리 모여서 연습하고 마지막에 선생님이 지휘하도록 선물로 주는 음악 선물이 셧다운되는 음악 빈 교실. 30년 그곳에서 학생을 만나고 학생들 삶의 변화를 일으켰던 그 교실을 떠나는 장면으로 영상이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은 세례 요한의 본문입니다. 세례 요한의 본문은 하나님을 믿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본문입니다. 글자로는 모두가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못 만납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자만 이 본문이 무슨 얘기인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아들이 연구하는데 드디어 연구에 성공했어요. 그런데 연구에 성공한 소식을 듣는 모든 사람은 연구 결과가 나왔구나. 잘 됐다. 이러겠지요.
그렇지만 그 연구를 위해서 기도해 온 어머니는 연구 결과가 성공한 것뿐만 아니라, 이 연구 결과가 어떤 일을 이루어낼지 이것이 사람들에게 어떤 복이 될지. 이런 세계가 확 열려 나가는 거지요. 마치 그렇습니다.
마태는 복음서를 시작하자마자 42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역사를 쫙 적어내려 왔습니다. 그 모든 역사에 인간은 하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따르지 않은 결과가 뭡니까?
헤롯의 가짜 성전과 헤롯의 궁궐과 로마의 영화였습니다. 그것이 온 세상을 뒤덮었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그 세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소망도 그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저런 궁궐. 로마의 영화에 한 자리를 차지하는가? 온 세상이 그렇게 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무 일도 못 하셨던 게 아니고 하나님 역시 자기 생명의 역사가 흐르게 하셔서 드디어 때가 되매.
더 이상 하나님의 역사가 감추어지지 않는 이제는 어둠이 너무 짙어서 아무리 작은 별빛이라도 나타날 수밖에 없는 그런 시간이 도래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작은 불빛 로마에 비친 게 아니고, 유대 광야에 비친 작은 불빛 아래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낙타 털옷에 가죽 띠를 매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는, 성전과 궁궐과 로마에 영화와 완전히 대조되는 이 사람은 우연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사갸랴와 엘리사벳이라고 하는 제사장 가정에 태어났습니다.
제사장 가정에 태어났으면 제사장이지요. 제사장 시키면 잘 먹고 잘살지요. 그런데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뿐 아니라,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아들을 제사장으로 기르지 못하고 광야에 있는 에세네인의 공동체, 메뚜기와 석청을 먹는, 낙타 털옷을 입는 에세네 공동체에 보냈습니다.
그 부모로 말미암아, 이 한 남자가 어둠이 너무나 짙어진 시간에 한 빛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동시에 또 한쪽에는 요셉과 마리아라고 하는 역시 말씀을 듣는,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한 부부로 말미암아, 나사렛 예수의 탄생이 6개월 후에 이루어집니다.
이들은 광야에서 만나게 되며, 로마에 영화가, 그 거짓 그림자가 없는 이 하나님의 자리에서부터 하나님의 음성은 울려 퍼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와.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다릴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 소망을 가지고 삽니다. 돈도 벌고 출세도 하고 성공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것이지요. 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중심 소원은 아닙니다.
우리 중심에는 그보다 훨씬 깊은 소원이 들어있습니다. 나라는 한 사람의 존재가 깨끗하고 싶은, 맑고, 밝고 아름답고 싶은, 사랑하고, 용서하고 싶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주신 하나님 형상의 소망이 우리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멈추게 할 것이 없습니다. 그 어두운 시대에도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나옵니다.
조금 하늘 높이 들림. 받고 그 자리에서 지금 이 장면을 바라보면 역사가 주마등처럼 흐릅니다. 일만 년 전에 우리 인류는 농업 혁명과 동물을 가축화시키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인구 증가가 급속해졌습니다. 자! 농사를 지으면서 하루 잡거나 캐서 하루 먹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비축할 수 있는 잉여가 생겼습니다. 칼 막스가 키워드로 본 것인데 사실은 칼 막스 이전에 인류 역사가 키워드로 본 것이 여기 있습니다. 잉여.
이것은 사람만의 특징입니다. 어느 사자도 내일 먹으려고 오늘 토끼 한 마리라도 더 잡아두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잉여를 만들 수 있는 인간이 잉여가 생겼을 때가 언제입니까?
생존에서 생명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잉여가 있을 때 인간은 드디어 생존에 사로잡혔던 삶에서 생명 누리기로 나아갑니다. 잉여가 있을 때.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음악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야기가 나누어지기 시작하고 문화가 생기는 거지요.
이 잉여를 가지고 그렇게 서로 통하며 더불어 살았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인간은 생명을 모르고 에고밖에 없는 인간은 생존에서 더 생존으로 나갔습니다. 더 생존해서 뭣할 것입니까?
돈 더 있으면 하루에 여섯 끼 먹습니까? 비싼 옷 두 벌씩 입고 다니십니까? 우리 생각에 뭔가 조금 차이가 있을 것 같지만, 하나도 차이가 없을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어떤 차이도 없습니다.
잉여가 있으면 서로 평안하게 살면 좋을 텐데. 잉여가 생기면서부터 땅을 뺏기. 땅을 뺏어서 힘이 생기는 자는 계급화시켜서 나는 높고, 너는 낮고 이런 일들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BC 5,000년 때는 도시 국가가 생겼습니다. 이젠 지켜야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지키기는 그냥 지키기가 아니죠. 너를 없애야 내가 살아남는 거지요. 참혹한 유혈의 전쟁과 이 당시의 전쟁은 참혹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어떤 가치도 느끼지 못하는 그런 전쟁 했습니다. BC 2,250년에 사르곤이라는 사람이 최초에 아카드 제국을 이루었습니다.
이제는 피라미드가 필요합니다. 백성들이 볼 때 제국이 어떤 위험을 느낄 상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신화를 만듭니다. 민족이 탄생합니다. 민족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 안에 한 핏줄 아닙니까? 민족을 만들면서부터 우리 민족은 지켜야 되고 저쪽 민족은 죽여도 되는 것이지요.
인간 역사의 최고 우상은 민족입니다.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한국 사람 적혈구를 보면 태극기가 딱딱 찍혀 있고 일본 사람 적혈구를 보면 일장기가 찍혀 있지 않습니다.
체제 유지를 위해서 생긴 것이 법과 지식입니다. BC 18세기에 인류 최초의 법전인 함부라비 법전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이걸 칭송합니다. 훌륭한 업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질을 보시면 함부라비 법전이 내세우고 있는 것은 평등입니다. 모두가 평등하다는 거지요.
평등한데 평민이 귀족을 다쳤을 때와 귀족이 평민을 다쳤을 때는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그것이 평등이었습니다. 역사가 흘러서 AD 18세기에 미국 독립선언서가 이루어졌습니다.
온 세계 인류의 자랑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요소가 있지요. 그러나 미국 독립 선언서의 핵심도 평등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평등 속에 흑인 노예도 들어가 있었습니까? 안 들어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원주민들이 들어가 있었습니까? 안 들어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평등하지 않습니다. 생존 구조에서 평등과 진정한 사랑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역사를 정직하게 본다면 왜 우리 모두가 말씀으로 지식화된 성경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의 인격인 말씀으로 돌아가야 되지 않는가 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은 감춰지지 않는 것이지요. 그 지식과 능력을 취해서 이용한 것이 종교입니다. 이것이 사제들의 역사입니다.
이집트에서부터, 기독교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헬라에서 그 신전에서 시간 있으면 파르테논 신전에서 이루어진 사제들의 온갖 계교를 들으시면 참 안타깝고 답답하면서도 “역사는 바뀐 적이 없구나” 하는 것을 느끼실 거예요.
마태복음의 핵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종교인들을 향한 복음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향한 복음입니다. 그래서 이게 계속 나옵니다. 유대 종교의 2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독사의 새끼들아”라는 말이 반복해서 이어집니다.
나는 종교인들이 마땅히 들을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가지고 백성을 살리는 데 쓰지 않고 권력 옆에 붙어서 자기들의 이익을 챙긴 사람들이 당연히 들을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마태복음은 그렇게 말하지요. 너희가 천국 문을 막아서서, 너희도 안 들어가고 들어가려는 자도 못 들어가게 한다. 이게 진리를 지식과 권력의 시녀로 만든 사람들. 그 일에 열매입니다.
왜 그렇게 정말 험한 얘기를 하십니까?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얼마나 옳고 좋은 말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결코 살지 않아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그래서 마태복음은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요.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온다. 나무는 그 열매를 보아서 알 수 있다. 행함이 없는 자는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다.
이러한 얘기들이 마태복음 특징들은 전부 종교인을 향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더 겸비한 마음으로 마태복음의 메시지를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1,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말하지 말라.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는 말을 오늘 말로 바꾸면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다. 그 말입니다.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 그렇지 않습니까? 기독교인 하나 만드는데 무슨 문제가 됩니까? 그게 아니지요. 그게 아니지요.
유대인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가장 작은 자도 다른 나라에서는 귀족이다. 왜? 아브라함의 자손이니까. 할례를 받은 자는 결코 구원에서 떨어질 수 없다. 이게 유대인들의 가르침입니다. 기록된 가르침입니다. 2104
오늘 우리도 혹시 그렇게 속이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삶이 없는 구원. 있을 수 있나요? 그러면서 심판이 시작되었다. 심판이 시작되었다는 말은 인간이 마음대로 해서 어둠이 너무 짙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작은 빛, 하나님의 빛은 햇빛 같지 않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린 자가 만나게 됩니다. 중심에 진실이 있고, 자원하는 심령이 있을 때 만나는 겁니다.
이렇게 대중화시켜놓고, 들어주세요. 들어주세요. 그렇게 해서 말씀이 만나거나 들려지지 않습니다. 그러한 어두운 시간에 더 이상 하나님의 빛이 감춰질 수 없다는 겁니다. 이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나타나는 자체가 심판입니다. 그것을 영접하는 자는 구원이요. 그것을 버리는 자는 그 자체가 멸망입니다. 나누어집니다. 알곡은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웁니다.
나타나심. 자체가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성령과 불의 세례입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베푼다. 이제 하나님의 통치가, 그 빛이 나타나신다는 것을 너희에게 경고한다. 그런데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
성령이 무엇입니까? 성령이 아니면 하나님의 세계를 알지 못해요. 보지 못해요. 하나님의 통치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불은 뭐예요. 심판이지 않습니까? 에고의 세계, 에고의 소망이 끝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내가 그런 것을 바라고 살았다니, 온 세상은 망해도 나 하나 잘 먹고 잘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내가 했다니?
그 당연했던 생각이 갑자기 부끄러워집니다. 하나님이 임하면서부터 거짓에 사로잡혔던 내 모습을 보면서 내 속에 하나님이 주신 생명, 하나님의 형상에 소망이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살았던 터무니 없는 허상의 삶에 절망합니다. 새로운 소망이 피어나는 것이지요. 회개는 그래서 육으로 세상 살기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세상에, 현상 세계에 육으로 태어났습니다. 육으로 태어났으면 다 욕심으로 사는 거지요.
우리 중에 거기서 자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세계가 그렇게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만이 육으로 태어난 내가 단순히 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생명 본질, 영의 소원을 살고 피울 수 있는 가능성이 인간에게만 있습니다.
그리고 육의 정욕과 욕심에 종노릇 했던 그 내 삶에 내가 절망하는 그것은 뭐 대단한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서 있는 자리.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방향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조건과 상황입니다. 내 마음대로 바꿔지지도 않고, 바꿀 수도 없습니다. 바꿀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안 됩니다.
서 있는 자리를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서 있는 자리에서 방향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어디로 방향을 돌이켜요?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전에는 내 욕심 하나밖에 몰랐습니다.
온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지.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세워지는지? 뭐 그것은 별로 관심 없었습니다. 왜요? 내 욕망의 눈이 빠져 있어서. 그런데 비로소 말씀이 임하면서 동서남북을 바라봅니다.
어쩌면 이 땅에 이렇게 아픔이 많을까요, 왜 이렇게 아프고 괴로워하면서 살아야 할까요? 왜 이렇게 불평등할까요? 돈이 썩어서 제대로 쓸 수 없는 사람도 있는데 약이 없어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맑은 물 한번 제대로 마셔보지 못하는 어린아이로 죽는 숫자가 이유 없이 자기가 살던 거주지에서 쫓겨나서 국적도 소속도 없는 누구에 의해서, 무엇에 의해서도 보호받을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하늘에 별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나는 내 욕심만을 위해서 살기에는 너무 큰 존재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나는 내 욕심 하나 채우며 살기에는 너무나 아름답고 하나님의 신비가 있는 존재임을 보게 됩니다.
더 이상 내가 보던 자리만 바라볼 수 없는 터닝 어라운드. 그것이 회개입니다. 생각이 아닙니다. 존재 전체의 느낌입니다. 우리는 이때 세 가지에 절망하게 됩니다.
첫째 우리는 세상 권세를 숭배했습니다. 출세하고 싶고, 성공하고 싶고, 나쁜 것이 아니지요. 못 하면 하도 무시해대니까 이 세상이, 세상 권세는 뭐로 되어 있습니까? 돈으로 되어 있습니다. 돈을 숭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돈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지요. 필요한 것이고, 필요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돈을 숭배하게 되면서부터 모든 것이 떠나갑니다. 가족도 없습니다. 부부 사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상은 단절되어 있잖아요.
현상 속에 성도님하고 나하고는 단절되어 있잖아요.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하나님 안에서 같이 나왔잖아요. 어떻게 단절될 수 있어요. 이 현상의 거짓 속에서만 단절될 수 있고,
단절을 전제로 힘을 휘두르는 것이 돈이어서, 돈은 자기 자신과도 단절되게 합니다.
두 번째로 인간관계입니다. 육으로 태어난 인간에게는 인간관계가 전부입니다. 진짜로 내가 깨끗하냐? 참되고 복된 삶을 사느냐? 그런데 별로 관심이 없어요. 거짓으로 해서라도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나를 훌륭하다고 하면 그만 모든 게 다 된 것 같습니다.
내가 진실하고 정직해도 사람들이 나를 욕하면 또 절망하기 쉽습니다. 인간관계에 진실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가 거짓입니다. 나를 좋다고 합니까? 자기 기분이 좋다는 얘기예요. 나를 싫다고 합니까? 자기가 뭔가 마음이 안 좋다는 얘기예요.
옆에 한 번 물어보세요. 그렇습니까? 그 껍질을 못 벗어나다가 말씀이 임하면서부터 내가 소중해집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내 진실을 지키고 싶고요. 내가 나에게 진실되어짐이 나의 행복이 되어지고.
은과 금으로 살 수 없는 복됨과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에고의 거짓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에고라는 것은 가짜 나입니다. 거짓 자아입니다. 에고는 부정적인 자극에 쾌감을 느낍니다. 중독적이에요.
그러므로 에고로 사시면 모든 것을 스스로 부숩니다. 기억? 어느 것을 기억하세요? 남이 나에게 잘해준 것 기억하세요? 백번 잘해 주다가도 한 번 잘해 주지 않으면 그걸 평생 기억합니다. 왜요? 에고는 부정적인 것에 중독적이에요.
사람들의 평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부를 좋아하지, 진실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요. 예배 끝나고 저에게 이렇게 인사하시면 안 돼요. 오늘도 길었군요. 이러면 원수 되는 거요. 그게 잘못이라는 게 아닙니다.
그런 세상 속에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셨어요. 그렇게 열심히 살아요. 열심히 살게 하는 이유가 뭐예요? 열심히 살았는데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는 점점 거리가 생기는 거지요.
그래서 세상에 소망을 버리게 하는 것이지요. 삶도 남에게 이겨서 무엇을 하겠어요. 그런데 이 세상도 위너되는 게 모든 것이에요. 루즈되면 너무 힘드니까. 루즈 안 됐다고 행복합니까? 그런 건 아니잖아요.
무엇보다 이 에고는 고착성을 가지고 있어요. 제가 예화라는 것은 반복하게 되거든요. 제가 가장 많이 쓴 예화가 뭘까 이렇게 생각해 봤거든요.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 밑에서 자라난 딸은 알코올 중독자 남편을 만날 확률이 네 배나 커요. 새로운 것이네요.
에고는 새로운 것이 다 좋다고 머리로는 그러지만 싫어합니다. 내가 만들고 지켜온 세계 그게 강화되었으면 좋겠어요. 그게 다른 세계보다 잘 났으면 좋겠지만, 내가 새로워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워지는 순간 에고는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그래서 성경에는 무수하게 내가 너희를 새롭게 한다는 말씀이 나와요. 롬8:12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자유케 한다.
고후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치 않는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제가 좋아하는 몇몇 개 특별히 좋아하는 말씀 중 하나가 계시록 끝에 나오는 말씀 계21:5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제가 일생을 마감한 후에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나왔습니다. 없어지지 않습니다. 물리적으로도 질량 불변의 법칙, 에너지 불변의 법칙. 없어지지 않습니다. 형태가 변화될 뿐이지.
그런데 영원히 새롭지 않습니다. 그게 지옥입니다. 그게 지옥입니다. 하나님 안에 생명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날로 새로운 세계, 날로 새로운 신비. 날로 새로운 좋았더라를 경험하는 거지요. 놓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2. 인간이 태어난 유일한 목적은 거듭남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이 이렇게 살고 저렇게 살고 온갖 모형이 있지만, 모양은 달라도 목적은 하나입니다. 거듭남에 있습니다. 거듭남에 있습니다. 지나치지 않습니다. 거듭남은.
성경적으로 가장 정확한 말입니다. 우리는 현상 세계의 가장 정확하게 태어났습니다. 이 만물 중에서 육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영을 본질을 피워낼 수 있는 것은 우리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 남자의 후손으로 태어납니다. 육으로 태어나지요. 그런 우리가 여자의 후손,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생명이 잉태되고 피어나는 이것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권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기까지는, 거듭나기까지는 육이라는 것은 현상입니다. 현상. 현상은 있다가. 스러지면 그 존재했던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그렇잖아요? 장자가 나비의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자의 꿈을 꾸었는지 이쪽도 이다. 저쪽도 이다. 아닙니다. 그 자체는 현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생명으로 살지 못하면 딱 주님 앞에 설 때 보시면 일평생을 그렇게 종신토록 땀 흘려 수고했는데 불과 몇 분에 인생이 스스륵 지나갑니다. 본질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산 사람, 본질을 산 사람은 그 경험 하나하나가 영원합니다. 사랑이 경험이고 중심에 진실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걸 다르게 표현하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다 물리적 세계에 태어납니다. 이게 현상이지요. 물리적 세계, 물리적 세계 법이 있습니다. 만유인력의 법칙. 법이 있어요. 우리 중에 만유인력의 법에서 자유 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것도 자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만이 비물질적인 존재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있는 영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생명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이 본질 때문에 원리의 주인으로 살 수 있는 거지요.
지금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비행기 타면 날 수 없는 인간이 납니다. 왜? 물질적 원리를 내가 다스린 것입니다. 히터나 에어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 끝나면 자동차 타시지요. 다 마찬가지입니다.
저를 따라해 주십시오. 강물에 떠내려가지 말고, 노를 저어 자신의 목적지로 가라. 풍랑에 떠밀리지 말고 돛을 달아 꿈에 항구로 나아가라.
그렇습니다. 분명히 물질적인 존재로 현상 세계에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인 것을 누릴 때 우리는 이 세계에 종이 아니고 노예가 아니고, 그 법칙에서 자유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종이 아니고, 주인으로 하나님의 유업자로 살 수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 한글 번역은 좀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 나라 비유의 총 결론입니다. 많은 비유를 하셨지요. 이렇게 말합니다.
마13: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3653
영어 번역이 조금더 세밀합니다.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우리는 서기관, 말씀을 아는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하나님 나라로, 하나님 나라를 만난 말씀의 제자들, 그런 뜻입니다.
그 사람들은 마치 새것과 옛것을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 주인과 같으니라. 이 원리에, 우주적 물질적 법칙에 우리는 종노릇 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에도 오히려 우리가 그것을 다스려서 그 본질 세계의 신비와 풍성함을 마음껏 피워내는 존재입니다.
그 존재가 먹고사는 것 걱정할까요? 예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 존재는 항상 그렇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합니다. 무슨 종교적인 얘기 아닙니다. 이 숨겨진 하나님의 신비를 어떻게 하면 더 피워내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신비를 누릴 수 있을까?
그럼 비행기가 발명되어 얼마나 편리해졌습니까? 꼭 좋은 예화는 아닌데 마침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신비를 피워내는 사람은 그 기쁨으로 사는 것입니다. 무엇을 마실까? 입을까 먹을까? 그것으로 사는 삶을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에 삶. 거듭남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지금 한국교회는 그러지요. 성화를 가르치지 않아서 기독교는 평생을 살아도 성화가 없다 그래요.
제가 볼 때는 뭔가를 잘못 보고 있어요. 우리가 성화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은 우리에게서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것은 자동이에요. 자동.
자동이 아니면 열매라고 하면 안 되지요. 뭐의 열매입니까? 거듭나면 되는 것입니다. 육으로 살던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영이 피어나기 시작하면서부터 새로워지는 것이고, 더 깊고 풍성해지는 것이고 나를 만나는 모든 것에 복이 되는 것이고, 그런 것이 우리에게 이루어져 가는 거지요. 그걸 어떻게 우리가 만들어가요?
주의하십시오. 종교에는 역설이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종교를 허락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종교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가 끝이 아니죠? 우리에게 종교를 주신 것은 종교를 통해서 우리가 피어나야 되니까 종교를 주신 거지요.
3. 종교의 역설 PRADOX.
종교 섭리의 채널 | 에고의 적당히 | 바리새 |
말씀의 지식화 | 사두개 | |
종교에 신실 | 중심의 진실 | |
절망을 만남 | 자원의 심령 |
종교는 하나님의 섭리 채널입니다. 거기에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고로 종교 생활 하는 사람의 특징은 적당히 입니다. 헌신 없습니다. 중심의 진실 없습니다. 자원하는 심령 없습니다.
사정이 되는 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싶습니다. 그게 다 인간의 본능 속에 이미 들어있는 것이지요. 그 사람은 말씀을 만난 사람은 아닙니다. 말씀을 만나면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사랑을 만나 버리면, 적당히 사랑해 주고, 사랑하지만 적당히 내 스페이스를 유지해 주고. 이런 게 없어져 버리지요. 그것을 마태복음은 바리새와 사두개라고 합니다.
또 한 무리의 사람이 있습니다. 종교에 신실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한 종교를 중심에 진실로 자원함으로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종교를 완성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절망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그렇게까지 기도하고 그렇게까지 말씀을 묵상하고 등등등. 선행을 하고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고, 모든 비밀과 지식을 다 알고 깨달았는데도 나는 여전히, 여전히, 이 세상 것에 대해서 욕심을 부리고 있는 나를 피할 수 없어요.
그 절망을 만날 때, 로마서 7장 24절을 만날 때, 내가 원하는 바, 이렇게 신실함에도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절망을 만나면서 드디어 중심의 진실, 우리 안에 있던 하나님의 형상이, 그 풍성한 생수의 강이 비로소 솟아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고 싶습니다. 용서하고 싶습니다. 더 이상 욕심과 에고에 속아서, 내가 너보다는 잘나야 되는데, 내가 너보다 옳아야 되는 이런 허상이 거짓말 같습니다.
그렇게 살았을 리가 없지 싶습니다. 이 시대에 주의하십시오. 말씀을 만나지 않고 결혼했다고 하는 시대예요. 아니, 사람을 만나지 않았는데 그 사람에 대해서 듣고 배우고 뭐. 모든 지식을 갖고 있어요. 그거 결혼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려고 교회 나오는 이가 없는 시대입니다. 왜 믿어요? 교회 다니려고 믿어요. 이런 공동체가 필요하니까, 이런 인간관계가 필요하니까, 여기 사람들의 관계가 전부지,
4. 관계의 진위 여부.
예배 한번을 드려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깨어 있어야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까? 누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짜는 머리로 생각하지요. 이해로 끝납니다. 남의 자식 얘기는 머리로 이해하잖아요. 진짜는 가슴으로 느낍니다. 가슴으로 느끼면 붙들림 받지요.
우리 하나임 교회는 14년 즉,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시간이고 싶었습니다. 교회가 되고 싶어서.
인간이 만든 기독교 단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가 되고 싶어서.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싶어서.
1. 때가 찼지요. 우리가 만든 프로그램. 우리가 만든 이 훈련을 해 왔습니다. 12년째 되었을 때 하나님의 개입이 나타났지요. 말씀 만나기였습니다. 저는 그게 말씀 읽기인 줄 알았습니다.
우리는 그게 뭔지도 모르고 하는 사이에 하나님이 인도하셔서 말씀 만나기가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잔치 자리가 임했을 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눅14: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모두가 사양하여 나는 밭을 샀어. 나가 봐야 해.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어. 시험하러 가야 해. 나는 장가들었어. 여전히 세상에서 반복하던 일. 해도 안 해도 사실은 본질적인 차이가 아무것도 없는 그 일에 자칫하면 그대로 매달려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이 지구는 우리의 출발지도 아니고, 우리의 목적지도 아닙니다. 지구는 사실 우주 전체에 비하면 먼지 한 톨도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전부가 되는 순간에 우리는 이 작은 곳에서 서로 이기기, 땅따먹기, 이 작은 곳에서 잘나기.
그 작은 곳에 사로잡히니까 쉴새 없이 흔들립니다. 불안과 염려와 근심이 끊이지 않습니다. 수치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말씀을 만난 사람들은 생명의 자유를.
기쁨은 자유해야 기쁘지 않습니까? 자유하지 않은 기쁨은 기쁨이 될 수 없지요. 삶은 간단합니다. 나 자신은 기뻐하십시오. 기뻐하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꼭 돈 더 있어야 기뻐하시겠습니까? 꼭 자식이 출세해야 기뻐하시겠습니까? 기뻐하십시오.
못 덴 이웃이 있어도 이웃이 있다는 것은 없는 것보다 나은 것입니다. 이웃에게는 기쁨이 되어주십시오. 예. 에고의 복잡한 생각은 내려놓으십시오. 기쁨이 되어주면 되잖아요. 아내십니까? 남편의 기쁨이 되어주십시오. 남편이십니까? 아내에게 기쁨이 되어주십시오. 목회자입니까? 그다음 잘 모르겠어요.
기쁨이 된 적이 있어야 그 말을 하는데! 말해봐요. 목사를 통해서 기쁨이 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이렇게 공갈과 협박으로.
삶은 간단합니다. 속지 마십시오. 자기 자신이면 기쁨을 누리십시오. 얼마나 누릴 건가? 이웃에게는 기쁨이 되어 주십시오. 내가 좀 바보 같아져도, 못 난 것 같아도 기쁨이 되어주십시오. 그게 훨씬 높은 에너지 레벨입니다.
오늘 나눔은, 진정한 거듭남은 나의 노력, 나의 공로, 의 심지어 믿음까지도 내려놓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 세상의 통치 아래 있던 내가 그 소망에 절망하여서 하나님의 절망 아래.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에고를 내려놓고, 정말로 예수님을 내 삶과 존재의 주인으로 모시는 겁니다. 우리는 아직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함부로 고백하지 마십시오. 중심에 진실을 모아서 고백하십시오.
고백에는 놀라운 능력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말씀을 만날 때, 우리가 말씀에 붙들림 받습니다. 내가 이해한 말씀. 붙들림 받지 못해요. 그러나 내가 말씀을 만나면, 부딪히면 붙들림 받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어떤 자세로 말씀 만나기 훈련을 계속해야 될지를 서로 나누시는 친교의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첫댓글 서 있는 자리에서는 전체 녹취고요. 4중앙은 한시간에 사용할 수 있도록 요약한 것입니다.
오늘 댓글을 남기시면 포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 33편 가운데 30편을 완성해 두었습니다. 논문 사용 자료로 보관 중인데 약간은 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33편이 한 파일로 되어 있어서 드리려면 분할 작업이 또 필요하네요. 그냥 드리면 내가 편하지만 그럴 수는 없고요.
귀한 말씀 공유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나누시는 복된손길~너무감사합니다♡
은혜의 말씀 담아갑니다, 꾸벅♡
베푸신 은혜에 감격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아멘~^^ 네~^^ 목사님!!! 감사감사합니다.
항상 행복하시고 강건하시고 예수 충만하시기를 기도합니다. ~^^
샬롬 샬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