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9세기, 전남 완도에 설치한 장보고의 청해진!~
일본 교토에 남아있는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적산선원(赤山禪院).
일본 천태종의 시조를 모신 곳이다.
그곳엔 활을 든 한 신라인이 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사람들은 그를 장보고라 부른다.
장보고의 영정은 중국 산둥반도 룽청(榮成)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곳의 옛이름은 적산법화원.
9세기 이 법화원을 중심으로 일어나
동아시아 일대를 호령했던 장보고를 중국인들은 이런 모습으로 남겨두었다.
그리고 완도 청해진까지 천 년이 넘도록 장보고의 이름은 3국에 살았다.
해상왕 장보고!
그의 위력은 어떤 것이었을까?
"장보고!
그의 이름앞에는 반드시 따라다니는 몇 가지 수식어가 있습니다.
청해진대사, 혹은 해상왕, 무역왕이라는 이름들입니다.
9세기,
장보고는 중국 당나라와 일본, 신라를 상대로
국제무역을 주도하며 해상을 장악한 인물입니다.
그 때문인지 3국의 정사에 모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고대사를 다룬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청해진 설치에서 장보고의 죽음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또 당나라의 역사서 <신당서(新唐書)>에는
장보고의 이름과 함께 그의 중국에서의 활동이 나오구요,
그리고 일본의 정사인 <속일본후기(續日本後記)>에는
민간인으로 유일하게 일본까지 와서 정식 무역활동을 벌인 장보고의 자취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기록들만 보더라도 장보고는 분명 우리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범국제적 인물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장보고는 어떻게 이런 무역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일까요?
오늘 역사스페셜은
그 100회를 맞이해 해상왕 장보고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역사스페셜은 그동안 가상 스튜디오를 이용해 우리 역사상 감춰졌던 진실,
또 우리가 외면했던 역사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숱한 역사이야기들을 전달해왔습니다.
역사는 과거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유용한 교훈을 남겨주기 때문입니다.
100회를 맞아 해상왕 장보고를 돌아보는 일도 그런 점에서 의미있는 작업이 될 것입니다.
828년, 당시 장보고는 신라에서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특별한 제안을 합니다.
바로 서남해안 작은 섬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많고 많은 섬 중에 왜 완도였을까요?
청해진을 설치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었을까요?
우선 장보고가 설치한 청해진을 먼저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청해진이 세워진 곳은 지금의 전남 완도 일대.
서남해안에 위치한 완도는 지금도 물길이 복잡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주변에 크고 작은 섬들이 있고 암초들이 많아 물길을 모르면 항해가 어려울 지경이다.
그러나 물길을 아는 사람에게는 천혜의 요새가 된다.
"고금도, 약산도, 신지도가 자연 방파제 구실을 합니다."
더우기 이곳은 중국으로 가는 배와 일본으로 향하는 배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이다.
"동쪽으로 가면 일본으로 가고,
반대로 가면 달도를 지나서 서해안으로 가는 길목입니다.
또 북쪽으로 가면 강진으로 가는 사통 활달한 중심지입니다."
- 김정호 전남 문화재위원
일본으로 가는 길목,
바로 이것이 장보고가
산둥반도와 경기만을 잇는 최단거리 항로 대신
완도, 즉 청해진을 택한 이유였다.
현재 장보고의 유적이 가장 많이 발굴되는 곳은
완도와 장도라는 작은 섬이다.
장도 주변 해안가에는
잘려진 나무 밑둥 200여 개가 줄지어 박혀 있다.
지름 10센치미터, 현재 남은 높이는 30센치미터 내외,
그러나 전문가들은 실제 높이가 1미터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원목과 장보고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
"안쪽 언덕 땅의 유실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보이구요,
그 다음에 이 시설물을 이용해서
당시 이 부두에 들어온 화물들을 운반하는데도 활용하는 구조물로 쓰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 최근영 박사, 한국 사학회 회장
해안가의 원목을 복원해보면 바로 이런 모습이다.
그것은 수십 척의 배가 드나들었을 청해진 해안가 부두시설이었다.
장도에선 섬 전체를 둘러싼 토성도 발굴되었다.
둘레가 758미터,
89년부터 발굴 중인 이 토성은
세 개의 치와 토성 가운데 높은 고대, 즉 관측소까지 갖추고 있다.
바다의 상황을 관측하고 배의 움직임을 점검하는 초소와 같은 시설이다.
"북쪽이라든지 남쪽이라든지 서쪽이라든지 동쪽이라든지 여기선 다 관측이 가능합니다.
섬에서 가장 위치가 좋은 곳에서 관측을 하는 것입니다."
- 윤근일, 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
성안으로 들어가면 곳곳에 건물을 세웠던 주춧돌을 확인할 수 있다.
성을 지키던 군사시설이었을까?
그러나 토성에서 발굴된 수많은 기와 파편들이 일반적인 군사시설은 아니었음을 짐작케 한다.
발굴된 기와의 문양들이 당시 경주의 귀족들이 사용했던 것과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단히 중요한 건물이었음이 분명하다.
지난해 발굴팀은 우물도 찾아냈다.
물이 귀한 성안에서 이 정도 우물이라면 200~300명은 거뜬히 생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토성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현재까지 발굴 결과를 토대로 장도의 토성을 복원해보았다.
성벽엔 주변 지역을 관측할 치와 고대가 마련되어 있었고, 군사시설이 들어섰다.
성 내부엔 제사를 지내는 사당도 세워졌다.
항해를 나선 배들의 무사귀환을 비는 제사가 이곳에서 거행되었을 것이다.
또한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나 볼 수 있었던 화려하고 거대한 건물도 들어섰다.
삼국으로 뻗어나갈 국제무역 업무가 바로 이곳에서 이뤄졌을 것이다.
장도의 토성은
천혜의 입지조건을 바탕으로 굳건하게 건설된
해상왕 장보고의 전초기지였다.
장보고의 유적은 비단 장도에만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장도와 인접한 완도 장좌리 대야리 일대.
이곳엔 '장(場)터'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읍터도 아니고
완도 중심부도 아닌 해안가에 왠 장터일까?
그러나 지도에도 실릴 정도로 장터는 오래된 지명이다.
향토사학자들은 이곳이 바로 장보고 당시 상인들이 몰려들었던 장소로 보고 있다.
이곳을 장보고의 유적지로 보는 또 다른 이유는
건물 곳곳에서 발굴되는 기와와 건물 흔적들 때문이다.
장터에 세워진 건물, 그렇다면 그곳은 상인들이 머물렀던 객관이 분명하다.
장좌리 옆에 죽청리에서도 장보고 유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감옥이 있던 자리 옥(獄)터.
사람들은 이곳을 장보고의 군사시설이 있던 곳이라 부르고 있다.
"그 옥터가 지금 같으면 형무소 역할을 하는 곳인데
해적들을 잡아다가 가둬두는 곳이다 그렇게 구전되고 있습니다."
- 김희문, 완도문화원장
또한 죽청리 해안가엔 넓은 들판 한들(大平)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군사들을 훈련시킬 연방장으로 충분히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토성의 일부가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죽천리에도 성이 있었던 것일까?
현재 발굴된 유적만으론 청해진의 정확한 규모와 시설을 확인할 수 없다.
따라서 학계 전문가들과 더불어 당시 상황을 추정해보기로 했다.
전문가들은
장도와 장좌리, 죽청리 일대를
모두 청해진으로 보고 복원도를 완성했다.
장좌리 일대에는
상인들을 위한 객관이 마련되었다.
귀한 손님들을 위한 영빈관 또한 자리잡았다.
당나라와 신라, 일본 배들이 드나들었던 청해진.
이곳엔 물품 구입을 위해 상담과 거래가 이루어지는 거대한 국제무역센타가 세워졌다.
이 무역센타는 여러 부속건물이 포함된 웅장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다양하고 편리한 시설에다가 안전한 보호장치까지,
9세기 사람들과 무역선이 모여들던 이곳은 당대 최고의 국제무역항이었다.
2. 당, 신라, 일본, 3국의 자유무역인!
장보고는 이슬람물품까지 취급했다!~
"청해진, 이곳에는 각국의 무역사절이 묵을 수 있는 영빈관에서
또 많은 일반상인들이 묵을 수 있는 객관,
그리고 많은 배들이 안전하게 접안할 수 있는 부두시설과
이들의 안전항해를 보장하는 군사시설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남해 작은섬 완도에 이처럼 대규모의 시설을 갖췄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장보고는 처음부터 청해진이라는 이 국제무역센타를 통해
당나라와 신라, 그리고 일본을 연결하는 동아시아 전역의 국제무역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당시 장보고에게 주어된 직위는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신라 흥덕왕은 청해진대사에 임명함으로서 완도에서 그의 활동을 인정해주었습니다.
신라로부터 대사라는 특별한 지위를 확보한 장보고는
청해진을 설치한 후 그의 무역활동은 본격적으로 진행이 됩니다."
동아시아 3국을 상대로 무역을 했던 장보고는 과연 어떤 물건을 취급했을까?
일본 나라시에 있는 정창원.
이곳은 고대 천황의 애장품 3천점이 소장돼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특별히 장보고가 활동하기 100여 년전,
8세기에 일본과 신라의 교역 상황을 알 수 있는 문서도 있다.
당시 일본의 5위 이상의 관품들은 물품들을 구입하기 위해
이런 신청 서류들을 신라에 보냈던 것이다.
"일본 귀족들이 신라 제품을 일상생활에서 사용한 이유는
그만한 품질의 물건을 당시 일본이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 오가타, 정창원보존정리실장
이 책은 8세기 신라가 자체 생산가능한 옷감의 샘플들을 모아 보낸 책이다.
당시 신라의 비단은 일본귀족들에게 인기상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신라는 당나라의 제품들, 즉 각종 보석과 그릇, 자기들을 사들여와 중개무역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9세기에 들어서면 이러한 사정들은 달라진다.
"8세기 후반 신라와 일본간에는 국가간의 공적관계가 매우 약해져서
해안을 중심으로 신라 상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등장한 것이 9세기 중반 장보고의 청해진이다.
청해진은 해상질서를 바로잡아 동아시아 삼각무역을 재구축하는 역할을 했다."
- 하마다, 큐슈대학 문학부 교수
국교가 단절된 상태에서 장보고의 무역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9세기 일본의 대외 교역장 코오로칸 발굴현장.
외국사신을 접대하던 영빈관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도 발굴현장에선 곳곳에서 자기 파편들이 발견되고 있다.
현재까지 총 80만 점이 나왔다.
일본학계에선 이 자기들을 장보고가 가져왔다고 보고 있다.
그 시대 신라자기는 물론,
당대 최고 자기였던 당나라 자기를 가져올 이는 장보고 뿐이라는 것이다.
"장보고 등이 최초로 이곳에 와서 장사를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곳은 중국이나 신라 도자기가 많이 유입됐다.
장보고 등이 당나라에 신라방을 만들어서 그 부근에서 중계무역을 하다가
제일 먼저 이곳에 중국 도자기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 이케자키, 후쿠오카시 코오로칸 발굴과장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일본의 정사인 <속일본후기>에 남아있다.
국가간의 무역이 금지되어있는 상황임에도
일본정부는 유독 장보고만은 허락해주었던 것이다.
일본정부의 장보고에 대한 신뢰는 무척 대단해서
장보고는 일본을 상대로 신용거래까지 했다.
"지쿠젠의 귀족이
장보고가 가져오는 당나라 화물을 사려고
상품대금을 미리주고 교역을 했다."
- 속일본후기 권10
"장보고의 국제적인 상거래가 이익이 된다는 것을
확신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어느 한 나라의 일방적인 이익이 아니라,
당나라에도, 페르시아에도, 일본과 신라정부에도 이익이 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특진이 부여된 게 아니냐 봅니다."
- 김성훈 교수, 중앙대 산업경제학과
일본으로써는 당대 최고의 물품을 가져다주는 장보고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코오로칸에서 발굴된 이슬람자기 역시 장보고가 가져온 것일까?
9세기는 바야흐로 동양과 서양의 교류가 본격화되는 시기이다.
실크로드를 따라온 상인들은 장안까지,
바다를 통해온 상인들은 중국 남부 양주에 도착해 있었다.
장강 하류에 위치해있는 양저우, 즉 양주(揚州)는
'양주천하제일'이라는 뜻의 '양일'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풍요로움과 문화적 다양성을 누리던 곳이다.
9세기 이전부터 이슬람상인들이 모여들던 이곳엔
지금도 오래된 이슬람상인들의 무덤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슬람상인들은 양주가 최종귀착지였다.
이들은 여기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그때 이들이 가져온 서역물품을 신라와 일본까지 전달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서역을 통해 당나라까지 가져온 서역의 많은 물품들이 있습니다.
그 물품들을 신라로 옮기고, 신라는 다시 중개무역을 통해서 일본열도로 팔고,
반대로 일본열도에서 생산하는 물품들은 다시 신라가 중개무역을 해서 당나라의 북쪽과 남쪽에 팔았습니다.
여기서 생기는 막대한 무역 이익,
그것을 바로 우리 재당신라인과 본국신라인을 조직적으로 만든
'장보고선단'이 관리했던 것이지요."
- 윤명철, 동국대 사학과 교수
장보고가
이슬람 물품을 취급했음을
<삼국사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834년,
신라 흥덕왕은 호화로운 외래품의 사용을 금지하는 교서를 내린다.
"진골여인은 금(은)실 자수나 공작 꼬리, 비취털 목도리의 사용을 금하며
빗에는 슬슬(에머랄드 종류)이나 대모(거북 가죽)를 박은 것의 사용을 금하고
수레에는 침향과 자단 등 동남아산 나무의 사용을 금한다."
- 삼국사기 834년 잡지 색복조
이 외래품이라는 것은 그 산지와 종류가 무척 다양하다.
멀리 인도네시아산 공작의 털이나
컴보디아산 비취털로 만든 목도리,
러시아산지의 보석 슬슬에다,
동남아산의 향기나는 나무 침향과 자단도 금지품목에 들어갔다.
당시는 국가의 엄격한 관리에 의해 무역이 이루어졌던 조공무역의 시대.
그런데 이렇게 국가에서 금지령을 내려야 할 정도로 외래품이 쏟아져 들어온 것은 '장보고 때문'이었다.
그는 국가의 제약을 받지 않는 '최초의 자유무역인'이었던 것이다.
"무역하는 장소가 많이 넓혀졌고,
그것은 교류하는 물품이 증가하고 활발해졌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조공무역의 틀이 무너지고
일반무역이 이루어지는데 큰공헌이 되었다 이렇게 생각됩니다.
- 김문경, 숭실대 사학과 명예교수
장보고는 당나라나 일본에서는 물론,
신라에서조차 국가조직과 별도로 움직이던 독립무역상단이었다.
이 장보고의 등장으로
동아시아의 3국의 무역은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진행된다.
3. 당대 최고 도자기, 중국 월주요 자기파편!
장보고는 무역뿐만 아니라 직접 생산도 했다!~
"물건값을 미리주고라도 장보고의 무역품을 사고자했던 일본사람들,
또한 신라의 귀족들은 장보고선단이 전해주는 이국의 화려한 물품들을 앞다투어 구입하고자 했습니다.
소비자의 욕구를 정확히 파악하는 장보고를 무역왕이라고 부르는 첫번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단순히 무역인으로서만이 아닌 장보고의 새로운 면모가 속속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금 보시는 이것은 중국 월주요 자기 파편입니다.
자기 아래 굽모양이 이렇게 둥글다고 해서 일명 해무리굽이라고 부르는 당대 최고의 자기입니다.
자, 원래의 모양으로 복원을 해봤습니다.
당시 부르는 게 값인 이 월주요 자기는 장보고선단의 중요한 교역품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장보고는 이 자기를 당나라에서 구입해 신라와 일본에 파는데 그치지 않고
좀더 큰이윤을 남기기 위해 직접 생산까지 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신라, 당나라, 일본, 삼국의 무역 현장에서 파악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중국 닝보(寧波), 영파시 서북쪽에 위치한 상림호.
이곳은 당나라때 유명한 자기생산지였다.
지금도 그때 자기를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건 당대 자기가 아니다.
바로 여기 있다. 이것이다. 이것이 가장 대표적인 해무리굽 자기다.
한국에서 만든 건 해무리굽이 이것보다 작다.
이것이 당나라 자기다."
- 임사민, 닝보시 문물고고학 연구소 교수
상림호 일대에서 생산되는 월주요 자기는
아랫쪽에 둥근 원형의 굽이 있는 청자로 9세기 최고 교역품이었다.
상림호 주변 60여 개에 달하는 가마터는
월주요자기의 생산규모를 짐작케 한다.
신라는 물론,
이슬람상인들까지 탐내었던 물품이었지만
당나라외에는 만들 수 없었던 자기.
자기는
당나라의 독점생산품목이었던 것이다.
이 월주요 자기는 동아시아 3국에서 모두 발굴되고 있다.
일본의 대외무역 창구인 코오로칸에서도 월주요 자기가 나왔다.
한국의 장도에서 발굴된 자기 역시 월주요 자기 파편이었다.
장보고가 가져온 것이다.
"장보고가 중국에서 완도로 도자기를 가져다 교역을 했음을 의미한다.
장보고가 가져간 자기를 연구한 결과 이 제품들이 중국 상림호의 자기란 것을 알게 됐다.
이 제품들은 중국 명주에서 운반된 것이다."
- 임사민, 닝보시 문물고고학연구소 소장
그런데 최근 중국 양주시 일대에서 주목할만한 발굴이 진행되었다.
당나라 나성을 발굴하던 중 신라자기가 함께 출토된 것이다.
그 기형은 해무리굽으로 월주요를 닮아있지만
안료와 유약에서 차이를 보이는 신라자기였다.
"중국의 양저우 지방에서 신라청자가 발견됐다.
출토된 지점도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곳이다.
한국에서도 이 일에 관심을 갖고 발굴을 시작해
양주외 다른 곳에서도 신라청자를 발굴해 냈다."
- 주지앙, 양저우대학교 고고학과 교수
당나라 성터에서 발굴된 신라청자.
최근 이 자기는 장보고선단의 관리 아래
청해진 근처에서 생산되었다고 주장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을 뒷바침하고 있는 것은
완도옆 강진의 수많은 자기터들이다.
강진가마는
9세기에 도기의 전단계인 자기생산지로 알려진 곳이다.
그런데 이 가마터 근처에서
중국의 월주요 자기를 닮은 자기 파편들이 발견된다.
해무리굽 자기들이 이곳에서 생산되었다는 증거들이다.
완도 주변 생산지로는 해남도 손꼽힌다.
무려 60여 개가 넘는 대형가마터에서 쉽사리 발견되는 것 또한 해무리굽 자기 파편들이다.
그렇다면 해남과 강진 자기 파편과 월주요는 얼마나 닮아있는가?
겉모습만으론 거의 구분이 불가능하다.
굽는 방식까지 같아 흙에 구운 흔적이 남아있는 것도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중국에서 만드는 방법이 이쪽 해남에 직접 유입이 되었다는 증거가 된다고 봅니다.
왜 그러냐면 기형이라든지 굽는 방법 같은 경우는
기술자가 직접 왔다든지, 사람을 보내 배워왔다든지 하지 않으면
그와 똑같은 상황이 여기에서 일어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 변남주, 목포대학 도자기연구 박사과정
그렇다면 왜 해남과 강진의 가마가 생산지로 선정되었던 것일까?
월주요의 해무리굽 자기는
9세기 중반부터 생산량이 줄어 10세기가 되면 완전히 사라진다.
따라서 해남과 강진의 자기 역시 9세기에 생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때는 바로 장보고의 활동시기였다.
"장보고가 동북아 해상무역의 왕자다.
그때 청자 수요가 많이 늘어났습니다.
처음에는 중국을 통해 수입해서 일본으로 가져가고
장도를 통해 우리나라에도 들어왔을 것 입니다.
근데 거기에 그치지 않고
청자의 수요가 많으니까
우리가 만들어도 충분히 수익이 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겠지요.
그래서 장도 가까이 해남과 강진에서
월주의 장인을 데려다가 직접 만들어서 그것이 널리 퍼진거죠."
- 정양모, 경기대학교 석좌교수 전(前) 국립중앙박물관장
해남과 강진은 완도 청해진에서 뱃길로 바로 연결되는 지역이다.
장보고는 이 배후 도시에서 당대 최고 교역품이었던 자기의 생산을 직접 시도했던 것이다.
"월주청자의 영향을 받아 만들었지만
그것이야말로 신라말 고려사람들의 취향이라든지 생활습관, 음식구조에 따라 바뀌는 것이죠.
거기서 차차 발전되면서 비색청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형도 고려자기로 변하고 모양도 바뀌어서 소위 상감이란 것이 만들어지는거죠."
- 정양모, 경기대학교 석좌교수 전(前) 국립중앙박물관장
강진 일대의 가마는 우리 청자의 생산지로 알려진 곳이다.
이 청자기술을 바탕으로 화려한 고려청자가 탄생한다.
단순히 무역을 하는데 그치지 않고
부가가치가 높은 생산품은 직접 생산해보겠다는 장보고의 시도가
결국 고려청자를 탄생시킨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4. 엔닌의 구법순례길!
장보고선단은 우수한 장비와 인력과 정보망까지 갖춘 종합상사!~
"해상왕 장보고의 두번째 성공비결은 바로 이것입니다.
월주요를 가져다 일본에 파는 것보다
우리나라에서 직접 만들면 더욱 싸게 공급할 수 있다고 판단한 장보고가
제조기술을 배워 직접 자기를 만듭니다.
그리고 당나라와 일본에 역수출을 하는 것입니다.
경제인으로서 장보고의 철저한 상인정신은
우리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인 고려청자를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된 것입니다.
자, 그럼 이제 구체적으로 장보고의 무역을 가능케 했던 그 힘의 비밀들을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대량의 자기를 생산하고 운반하려면 우선 대단위의 인력이 필요하고 정보도 필요하고
또 운반시스템 역시 정교하고 대규모여야 합니다.
무역거점은 청해진, 당시는 휴대폰도 팩스도 비행기도 없었던 9세기였습니다.
장보고선단의 활약상을 보겠습니다."
장보고선단의 무역활동을 짐작케 하는 책이
일본 쿄토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일본 천태종의 시조 엔닌대사가
당나라를 순례하고 적은 <입당구법순례행기>가 바로 그 책이다.
엔닌이 당나라를 여행하던 시기는 바로 장보고가 활동하던 시기,
따라서 이 책은 장보고 당대의 기록이다.
순례 중 목격한 장보고선단의 활동에 관련된 내용이 20% 이상 차지한다.
엔닌의 구법순례를 가능케 한 인물이 바로 장보고였던 것이다.
엔닌이 당나라로 가는 배에 오른 것은 838년,
청해진이 설치된 지 10년이 지난 때였다.
출발하면서부터 엔닌은 장보고의 도움을 기대하고 있었다.
당시 장관급에 해당하는 일본 태수의 추천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지쿠젠 태수가 장보고 대사에게 보내는 추천장을 가지고 길을 떠났다."
- 엔닌일기 840년 2/17
중국 회안시(옛 초주) 운하변.
그러나 그의 여행은 시작부터 순탄치 못했다.
당나라의 여행 허가를 얻지못해 도착하자마자 귀국선을 구해야 했다.
그때 일본으로 가는 엔닌 일행에게 9척의 배와 60명의 항해사를 구해준 것은
초주의 신라인집단, 바로 장보고선단이었다.
"항구에 매여있는 9척의 배를 동원한다,
지금 부산항에서도 대항해가 가능한 선박 9척을 일시에 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 일 것입니다.
물론 항구에 선박이 몇백 척, 몇천 척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시에 부산항에서 9척의 배로 항해 해나가자 한다는 것은
적어도 몇 달 전부터 수배하여 구해지는 것이지 일시에 구해지지 않을 겁니다."
- 최재수 교수, 한국 해양대학교
우수한 성능의 배와 잘 훈련된 선원들을 언제든 동원할 수 있었던 장보고선단.
그렇다면 무역에 있어 기본요소는 갖춘 편이다.
그 장보고의 도움으로 귀국선편은 마련했지만
엔닌은 그대로 순례여행을 접을 수는 없었다.
망설이던 그에게 하나의 정보가 입수된다.
첫번째 정보는 장보고가 난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장보고가 난을 일으켜 신라의 정정이 불안하니, 신라 연안 항해를 하지말라는 정보를 들음"
- 839년 4월 2일 엔닌일기.
그로부터 18일후 두번째 정보가 전해진다.
장보고의 난이 성공했다는 것이다.
"장보고가 난을 일으켰고,
그가 지원한 왕자가 왕위에 올랐다(김우징, 신라 45대 신무왕)는 정보를 들음."
- 839년 4월 20일 엔닌일기
그 정보가 입수된 지 4일.
이번에는 당나라가 신라로 보내는 공식사절단이 떠났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당의 황제가 신라왕자에게 왕위를 내리기위해
신라로 보낼 사신을 정하고 배를 마련했으며 경비도 하사하였다는 정보를 들음."
- 839년 4월 24일 엔닌일기
그 소식을 전해준 것은 작은배를 타고온 소천포의 신라인.
당나라를 여행하는 엔닌이 신라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
이토록 빠르고 정확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지금도 중국의 항구도시 양주엔 배를 타고 다니며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의 정보전달 수단은 휴대폰.
"정보를 얻기 위해 전화를 걸어 상황 파악을 한다.
가고자 했던 곳의 상황이 안 좋으면 즉각 다른 쪽으로 목표를 옮긴다.
상황이 좋으면 양주로 그렇지 않으면 젠장으로 이런 식이다.
지나는 배를 통해 서로 서로 정보를 주고 받기도 한다."
- 첸윈, 해파리 상인
통신기기가 없던 9세기.
운하는 물산이 운송되는 물류창고이자 정보가 모여들고 전달되는 유일한 장소이다.
이를 파악한 장보고선단은 운하 주변에 정보를 수집하고 전달하는 정보기지를 구축해냈던 것이다.
"당시 신라선단 자체가 조직화 되어 있었습니다.
이 운하를 다니던 선박이나 운하에서 교류되는 상품을 파는 상인들이 아주 조직화가 되어 있어서
어느 곳에 가면 어떤 물건이 생산 판매되는지, 어느 곳에 가면 값이 싸고 비싼 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
수시로 정보교환이 이루어지고, 또 정보교환을 바탕으로 여러곳에 가서 장사를 하고 물건을 수집해오기도 하면서
교역이 적절히 이루어진거다 이렇게 생각됩니다."
- 김문경 교수, 숭실대 사학과 명예교수
장보고선단의 위력을 확인한 엔닌의 구법여행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그 여행은 당나라의 수도 장안과 천태산에까지 이르며 9년간 계속 된다.
일본을 떠나온 지 4년이 지난 842년,
엔닌은 수도 장안에서 초주장보고선단을 통해 일본에서 보내온 돈을 받는다.
금융업무까지 이루어졌던 것이다.
"일본에서 보내온 체재비 금 24냥이 신라인 통역관 유신언의 집에 보관돼 있다."
- 엔닌일기 843년
"그것이 이루어진 것이 언제냐면 엔닌이 장안에 있으면서 구법여행을 계속 하고 있을 때입니다.
일본의 수도가 교토 아닙니까, 교토에서 하카다항까지도 상당한 거리이고, 거기서 다시 황해를 통해 초주까지,
초주에서 다시 장안까지 가는 이러한 정보네트워크를 통해서 송금까지 이루어졌다는 것은
어느정도 실효성이 구축되어 있지 않다면 불가능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 최재수 교수, 한국 해양대
847년 모든 일정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엔닌은 장보고선단의 도움을 받는다.
"등주에서 귀국선편 마련이 어렵자, 명주에 귀국선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길을 떠남."
- 847년 윤 3월 12일
"초주에 도착하여 신라방에 들어가니, 명주 배는 이미 떠나고 없다는 정보가 들려옴."
- 847년 6월 5일
엔닌일기엔 그가 귀국선을 마련한 내용이 자세히 기록된다.
등주에 도착한 엔닌은 명주에 배가 있다고 들어 급히 명주로 향했지만 곧 그 배는 취소됐다.
그러자 이번엔 명주보다 가까운 노산에 배가 있다는 정보가 전달된다.
"귀국선편이 노산에 도착했다는 정보를 듣고 그곳으로 떠남" - 847년 6월 9일.
등주에서 명주까지는 자동차로 달려도 일주일 거리.
그러나 장보고선단은 9세기 이미 정보네트워크와 같은 빠른 정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장보고선단은 선박과 인력은 물론 정보와 금융까지 장악한 일종의 종합상사와도 같았다.
5. 8~9세기 신라의 기근, 해적 출몰, 정치 불안정!~
조국을 등진 재당신라인들의 신라방은 장보고선단의 동력이었다!~
"등주와 명주 사이는 3천 리 길.
걸어서 간다면 3~4개월이 걸리는데
어떻게 장보고선단은 단 며칠 사이에 정보를 얻을 수 있었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자, 그 엄청난 활동을 가능케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엔닌일기에는 정보를 가지고 온 신라인은 작은배를 타고 왔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해안과 운하변에 널리 퍼져 살고 있던 신라인들이 장보고의 정보망이 되어주었던 것입니다.
'신라인 90인이 음식을 구하러 중국 절동에 갔다'는 내용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8세기에서 9세기에 이르면서 극심한 가뭄과 기근,
그리고 신라사회의 골품제도를 견디지 못한 숱한 신라인들이 당나라행 배에 올랐다고 합니다."
중국역사책인 <가경적성지>에는
황암에 신라인 집단거주지가 있다고 전해진다.
그곳은 백수항이라고 불렸다고 전해진다.
"황암현의 동쪽1리 되는 곳에 신라방이 있다." - <가경적성지>
"백수항이라는 곳을 아십니까?"
"백수항은 바로 이 골목이다. 이쪽이다."
황익, 즉 황암 시내 한복판 마을은 지금도 백수항이라는 지명을 그대로 쓰고 있다.
이 골목이 바로 신라방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신라인들은 이곳에 집단적으로 모여 살았던 것일까?
"여기서 똑바로 가면 항구가 나온다.
임강 교강과도 가깝다.
저쪽으로 가면 내륙과 연결되고 또 바다로 나갈 수 있다."
- 양구쳉, 절강성 공예미술학회 상임이사
백수항에서 멀지않는 곳에 황해로 나가는 항구가 있다.
신라인들이 들어온 곳, 신라서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바다가 바라보이는 곳에 신라인들의 또 다른 마을 통원방이 있었다.
작은 산 너머론 중국 내륙으로 가는 강이 흐른다.
"이 강이 임강이다.
지금은 간조기이지만 물이 들면 포구가 넓다.
신라인이나 일본인들의 배는 모두 이곳으로 들어왔다.
또 여기서 출항도 했다."
- 고씽 띵, 린하이 현립박물관 자료정리실장
또한 통원방 뒷편 마을 끝부분의 작은 산은 지금도 신라산으로 통한다.
신라인들의 무덤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지금 어느 것이 옛 신라인들의 무덤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천 년이 흐르는 동안 무덤의 주인이 수없이 바뀌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라인들은 바다가 보이는 이 산에 무덤을 만들었다.
고국을 등졌지만 죽어서라도 고국 신라를 바라보고 싶었던 것이다.
황암지역 뿐아니라 중국의 신라방은 대부분 황해 연안에 자리잡고 있다.
더우기 그곳은 중국 내륙으로 흐르는 강이 흐르는 교통의 요충지들이다.
물산이 모여들고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는 교통의 요지에 모여살면서
신라인들이 배를 이용한 각종 업무에 종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곧 당나라 국내 무역업이었다.
"가장 경제성이 뛰어난 곳에 몰릴 수밖에 없고, 당시 그런 곳은 운하변입니다.
그 중에서도 초주나 연수현이라고 하는 곳이 운하변의 요충지였습니다."
- 김문경 교수, 숭실대 사학과 명예교수
당나라 최대 물산지였던 추저우, 즉 초주(楚州).
지금도 초주운하엔 중국 전역으로 물건을 실어나르는 숱한 배들이 움직이고 있다.
초주의 신라방 역시 당나라 최대 규모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초주시는 그 옛신라방 복원을 준비 중이다.
이 신라방은 당나라가 임명한 지방관리,
즉 총관에 의해 운영되는 조직이었지만 완전한 자치권을 부여받은 조직이었다.
엔닌이 신라방에서 당나라 여행허가증을 얻어내거나 배와 선원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 그 증거다.
외국인조직 신라방이 이런 자치권을 부여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당나라의 개방정책 때문이었다.
당나라는 10년간 세금을 면제해주면서까지 이들을 지원했다.
엔닌은 그의 일기에 숙성촌에서 만난 신라인을 특별히 기록해놨다.
1,200년 전 기록에 나오는 숙성촌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엔닌이 전하는 대로 그 숙성촌엔 거대한 염전이 펼쳐져 있었다.
엔닌은 이곳에서 소금을 운반하던 신라인의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신라인들은 지역 특산품의 생산과 운반에도 깊이 관여하였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이 소금은 저기서 생산한다. 차로 여기에 운반한다.
이 소금은 한국으로 수출된다. 한국 김장 때 사용될 소금이다."
- 조쓰리, 예원강 염전조합생산과장
초주운하엔 지금도 천 년전 엔닌일기에서처럼 수십 척의 소금배가 꼬리를 물고 지나간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때 소금배는 장보고선단이었다는 것.
"소금실은 배 2~30척이 꼬리를 물고 지나간다." - 엔닌일기
흩어져 있던 제당신라인들을 하나로 통합해낸 장보고.
바로 그것이 장보고의 국제무역을 가능케 한 힘이었다.
6. 장보고, 그는 어떤 인물인가?
"해상왕 장보고 뒤에는 뛰어난 제당신라인 그룹이 있었습니다.
특산물의 생산과 물류를 장악하고, 또 기동성을 바탕으로 정보를 교환하는
제당신라인들이 없었다면 장보고는 아마도 그렇게 성공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제당신라인을 그렇게 단합시킨 장보고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삼국사기는 그를 해도인(海島人),
삼국유사에서는 그를 측미(側微)하다고 표현해놓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분이 미천한 섬사람이란 뜻입니다.
아마도 장보고는 서남해안에서 태어나 가난과 신분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당나라로 건너간 인물로 보입니다.
그런 장보고는 40대 가량 되면 제당신라인들을 조직화해 하나의 커다란 무역선단을 만들어냅니다.
더구나 장보고의 무역네트워크는 당나라에 그치지 않고 일본에까지 구축되기 시작합니다."
장보고의 당나라 거점이었던 산둥반도의 츠산포(赤山浦-적산포).
이곳에서 배를 띄우면 만하루만에 한반도 서해안에 닿을 정도로 당나라와 한반도의 최단거리에 위치한 곳이다.
현재 이곳엔 장보고기념탑도 세워져 있다.
그러나 장보고는 지금보다 당대에 더 유명했다.
당나라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는 두목이 그의 <번천문집>에 '장보고편'을 따로 만들었을 정도다.
두목은 장보고를 소상히 다루며 그를 칭송했다.
그렇다면 장보고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어려서 당나라에 건너온 장보고는 30세가 될 무렵 당나라 군대인 무령군 소장의 직위에 오른다.
당나라의 관리가 될 정도로 무예가 뛰어났던 것이다.
"당시 당나라는 중앙정부와 지방세력간의 대립관계에 있었던 번진(절도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지방과 중앙간의 싸움이 계속 되고 있었으므로 많은 유능한 군인이 필요했습니다.
잘 알려진 이야깁니다만 이때 장보고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그런 무예가 뛰어났으므로
당에서 꼭 필요한 그런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 김문경 교수, 숭실대 사학과 명예교수
군대를 나와 적산포에 절을 세우면서부터
장보고는 제당신라인의 리더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엔닌일기에는 법화원에 신라인들이 모여 신라어를 사용했다고 전한다.
이곳이 신라인들의 정신적 구심점임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겨울 법화경 강의때 250명이 참가했다.
신라의 말과 음으로 하는데 남녀노소 모두 신라인 뿐이다."
- 엔닌일기 839년 11/16
이렇게 장보고가 지은 절은 단순한 절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500석의 쌀을 생산하는 독립기구로써 제당신라인들의 행정업무를 대행해주기도 했다.
"쌀 500석을 수확하는 장전이 있다." - 엔닌일기 839년 6/7
이곳은 신라로 가는 정부사절단이 머무는 마치 외교공관과도 같았다.
바로 장보고의 거점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장보고의 교관선 2척이 들어왔다.
장보고가 파견한 대당매물사 최훈이 찾아왔다."
- 엔닌일기 839년 6/27~28
"장보고라는 특출한 인물,
그 당시 당나라로부터 준자치권을 부여받은 인물밑에 통합됨으로써,
제당신라인들 자신들의 권리와 이익이 도모될 뿐만 아니라
상업과 교통의 모든 특권을 유지할 수 있었고,
또 장보고라는 걸출한 인물의 포용력과 리더싶이
바로 백제, 고구려, 신라의 유망민들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 김성훈 교수, 중앙대 산업경제학과
법화원을 중심으로 제당신라인들을 통합, 조직하고
당나라로부터 전폭적인 신뢰를 구축한 장보고는
마침내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국제무역에 뛰어든다.
그때 그가 내세운 이유는 해적소탕,
신라인을 노예로 잡아가거나 어업을 방해하던 해적을 소탕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황해 연안을 따라 대당 무역업을 하던 신라인들의 상업을 확장시키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때 장보고의 사업을 확장시킨 사람들은 일본의 신라인들이었다.
당시 재일신라인들의 활약은 엔닌대사가 세운 절 연력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엔닌의 일기엔 일본을 출발한 배는 신라의 배였고, 신라인이 운항을 맡고 있었다.
통역 역시 신라인이었다.
신라인들이 당나라로 건너갔던 것처럼 일본으로 건너온 신라인들은
당시 일본의 중요한 무역인력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장보고를 우두머리로 해서 그때까지 소규모로 지엽적으로 이뤄지고 있던
당과 신라, 신라와 일본의 무역이 보다 두터워지고 대규모화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장보고는 9세기 전반 혼란하던 동아시아 교역권을 제구축하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 하마다, 일본 큐슈대학 문학부 교수
9세기 동아시아 3국에 흩어져 있던 신라인들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조직한 장보고.
이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국제무역을 실현시켰던 장보고의 무역전략은
분명 시대를 앞서간 도전이었고 성공이었다.
"장보고가 동아시아의 해상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재당신라인 그리고 재일신라인들을 하나로 결집해내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육상과 바다를 통해 동으로 동으로 움직이던 상인들은
이곳 당나라의 장안과 양주가 최종 기착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동서교역로의 마지막을 이어준 이가 바로 장보고입니다.
장보고선단에 의해 서역에서 온 물품들은
산둥반도를 거쳐서 신라의 경주, 그리고 일본에까지 전해질 수 있었고
또 신라의 물품들은 서역으로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이 청해진은 바로 세계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당나라와 일본에 흩어져 살고 있었던 신라인들을 조직화시켰고
또 거대한 국제세력으로 키워낸 장보고.
시대를 읽어내는 안목과 그것을 실현시킨 그의 추진력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 유인촌의 역사스페셜(모두 복된 나날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