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10년 한국기업의 빛과 그림자
1. 大馬不死의 종언 10년 前 ‘새판짜기’ 시련 회오리
‘설마, 설마’ 하던 대우그룹의 패망은 이렇게 서막을 올렸습니다. 대우의 몰락은 IMF 이후 10년 재계의 부침사를 말없이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대마불사(大馬不死) 신화’의 종언은 재계 판도를 현대, 삼성, LG, 대우 등의 4강 체제에서 삼성의 독주체제로 뒤바꿔 놓았습니다.
업종별 1위 기업들이 ‘그들만의 리그’를 펼치게 된 것도 외환위기가 산통 끝에 낳은 결과물입니다. ‘수익양극화’의 그늘은 한국호(號)의 무거운 짐이 됐습니다.
별들이 지다
구조조정의 칼날이 본격적으로 기업들을 옥죄기 시작한 것은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채권은행단과 정부는 틈만 나면 기업 살생(殺生)작업을 벌였고,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정부의 압박에 못 이겨 7대 자율구조조정(빅딜) 최종안을 발표하는 등 긴박하게 움직였습니다.
IMF 전후로 한보철강을 비롯해 삼미, 진로, 대농, 기아, 해태, 뉴코아, 쌍용, 한보, 동아, 고합, 우성, 벽산, 아남, 나산 등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 수 있던 주요 그룹들이 무너졌습니다. IMF 이전까지만 해도 재계를 호령했던 대우와 현대의 와해는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하는 그룹으로 기억되고 있을 뿐입니다.
1996년 말 자산규모 35조4,660억원에 달했던 대우그룹은 맥없이 뿔뿔이 흩어져 난민신세로 전락했습니다. 1996년 말 시가총액 1조8,653억원으로 시가총액 5위를 달리던 대우중공업은 2001년 대우종합기계와 대우조선해양으로 산산조각 났으며, 2005년 1월 대우종합기계는 두산중공업의 품으로 들어갔습니다.
현대그룹은 1999년 정점을 향해 치달았습니다. 1996년 4월 말 53조597억원의 자산규모를 1999년엔 88조8,060억원으로 불리며 대기업집단 순위 1위 독주를 이어갔습니다. 故
하지만 현대그룹은 조금씩 쇠락하고 있었습니다. IMF로 촉발된 유동성 위기는 현대그룹을 자유로이 놔두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2000년에는 ‘왕자의 난’까지 겹쳤으며, 현대차가 친족 분리된 끝에 2001년 4월 당시 자산규모는 53조6,320억원으로 쪼그라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길고 긴 현대수난사의 출발점에 불과했습니다. 하이닉스반도체는 2001년 반도체 불황까지 겹치면서 워크아웃에 들어갔고, 대북사업은 계속해서 현대를 옥죄었습니다. 2003년 검찰수사를 받던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은 ‘투신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현대사의 불운에 방점을 찍으려 했습니다. 현재 현대상선과 현대아산만이 나 홀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 현대그룹의 영광을 기억하고 있을 뿐입니다. 현대그룹은 올해로 창립 60주년을 맞았으나 그룹의 모태인 현대건설은 현대가 아닌 채권단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삼성공화국 대한민국을 호령하다
서슬 퍼런 구조조정의 칼날과 정부의 ‘빅딜’ 압박은 재계의 판도마저 뒤바꿔 놓았습니다. IMF 이전까지만 해도 현대, 삼성, LG, 대우 등이 좌우하던 재계는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대변하듯 삼성독주체제로 새 판을 짰습니다. IMF 10년사를 들여다보면 ‘상전벽해(桑田碧海)’,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입니다.
대우그룹과 전자-자동차 빅딜이 무산된 삼성은 1999년 6월 삼성자동차의 법정관리를 전격 선언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자동차를 털어낸 삼성은 오히려 가뿐했습니다. 삼성전자를 포함한 59개 계열사의 자산총액은 115조5,700억원(2005년 기준)으로, 한 해 국가예산(134조원)보다 많습니다.
현대그룹에서 떨어져 나온 현대차그룹도 뜀박질했습니다. 계열 분리 당시 36조1,360억원에 그쳤던 자산은 62조2,350억원으로 불어났습니다. 삼성과 한국전력에 이어 재계 순위 3위에 올라 과거 현대그룹이 재계를 호령했던 것처럼 ‘재계의 안방마님’으로 등극했습니다. 2006년에는 계열사 현대제철이 일관제철소 건설에 돌입해 정몽구 회장은 故
올해로 60주년을 맞은 LG는 상대적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1999년에는 LG반도체를 현대에 빼앗기는 불운을 겪기도 했습니다. 지난 2004년에는 구 씨와 허 씨가 오랜 세월의 동업에 마침표를 찍어 각자의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최근에 와서는 계열 분리로 몸집이 줄어든데다 설상가상 LG필립스LGD 등 계열사의 매출감소까지 겹쳐 예전의 사세를 찾아볼 수 없게 됐습니다.
그들만의 리그, 그리고 양극화의 그늘
10년 전 빚에 허덕이며 제 살 길을 찾는 데에 급급했던 기업들은 뼈를 깎는 산후통 끝에 체질 변화에 성공했습니다. IMF 당시 396.3%에 달했던 기업들의 부채비율이 2005년에는 86%로 대폭 낮아졌고, 현금유보율은 평균 609.34%에 달하고 있습니다. 과거 기업들의 창고를 가득 채웠던 빚이 현금으로 바뀐 것입니다.
‘빅딜’과 기업들의 체질개선으로 반도체, 휴대폰, 자동차, 철강, 조선 등은 한국경제의 젖줄로 급부상했습니다. 빚을 내고,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았던 대한민국의 이미지는 이제 ‘Made in Korea’, ‘Thank You, Korea’에 자리를 내주고 있습니다.
1위 기업의 독주 역시, IMF 10년이 빚어낸 작품입니다. IMF 이전 대기업집단 순위에서 1위를 차지했던 현대와 2위 삼성의 자산총액 차이는 불과 1조9,460억원에 그쳤습니다. 하지만 현재 삼성은 2위에 오른 한국전력보다 12조9,920억원이나 몸무게가 더 나갑니다. 사실상 재계 2위에 오른 현대차그룹과는 무려 53조6,890억원으로 벌어져 ‘삼성 천하’를 실감하게 하고 있습니다.
업종별로도 ‘1위 신드롬’이 한국경제를 강타하고 있습니다. 업종별 1위 기업들이 ‘그들만의 리그’를 펼치고 있고, 후발주자들은 마이너리그에서 생존을 담보로 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자연스레 기업 간 수익양극화 현상은 한국경제의 그늘이 되고 있습니다.
2006년 3/4분기 경상이익률이 20%를 웃도는 고수익 업체 비중은 6.7%로 계속해서 높아진 반면, 상장·등록 제조업체 3곳 중 한 곳 꼴로 여전히 경상적자에서 허덕였다는 사실은 양극화 현상의 단면일 뿐입니다.
2. ‘고난의 폭풍’ 뚫고 10년 後 强國 코리아 주역으로
“2001년 2월 남편의 해고통지서를 받아들고 참 많이 오열했습니다. 4차로 도로를 사이에 두고 보이는 사내 풍경을 마주할 수 없어 지방으로 내려갔습니다. 매스컴에서 접하는 대우차 소식은 가끔 저희 부부의 마음을 추억으로 데려다 주기도 했는데, 이제 추억이 아닌 현실로 다시 대우 가족이 되었습니다. 신랑의 기억 속에 나를 저버린 회사가 아닌, 나를 다시 품어준 회사로 기억되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GM대우 복직자의 부인 -
옛 대우차의 화려한 명성도 부활했습니다. ‘GM대우’라는 이름으로 간판은 바뀌었지만, 5년 만에 튼튼하고 믿음직한 기업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대우 계열사의 화려한 비상
GM대우의 해고노동자 복직조치는 옛 대우계열사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대우는 1998년 8월, 그룹해체선언과 함께 34개 계열사 중 12개사가 워크아웃 절차에 들어갔습니다.
그룹해체와 함께 워크아웃을 시작한 대우차는 2002년 4월 GM에 인수됐습니다. GM대우로 이름을 바꾼 첫 해에 1,306억원 당기순손실을 기록한 것을 비롯해 2004년까지 내리 적자를 냈지만, GM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한 수출이 빛을 발하며 출범 3년 만에 흑자전환에 성공했습니다. 2006년 10월에는 GM의 소형차 플랫폼 개발센터로 지정됐습니다. GM대우의 초대 사장으로 해고노동자 복직까지 이뤄낸 닉 라일리 前 사장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 사장으로 승진하는 개인적 영광까지 얻었습니다.
한 때 그룹부실의 핵심으로 지목됐던 대우인터내셔널도 우량기업으로 거듭났습니다. ㈜대우에서 분할될 당시 940%에 달했던 부채비율이 100%대 초반으로 떨어졌고, 2005년까지 4년 연속 흑자를 지속했습니다. 자원개발사업이라는 새로운 성장축과 교보생명 지분(24%) 가치가 부각되면서 이제는 매각시기를 저울질하며 새 주인을 ‘고르고’ 있습니다.
대우조선해양은 2011년 年 매출 15조원, 영업이익률 10%를 목표로 뛰고 있는 조선업계 최고 우량기업입니다. 채권단의 출자전환, 원가절감을 위한 자산매각, 무분규 단체협상 타결 등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통해 2001년 8월 워크아웃 졸업에 성공했습니다. 2001년 업계 최고이익을 달성했으며, 2002년 4월에는 현대중공업(A-) 등 경쟁사보다 높은 회사채 신용등급 ‘A’를 획득하기도 했습니다.
하이닉스, ‘눈물의 회생기’
1999년 10월, 하이닉스반도체의 전신인 현대전자는 사실상 정부의 강제 ‘빅딜 정책’에 따라 LG반도체와 전격 합병합니다. 하지만 합병으로 생긴 부채만 15조원인데다 곧바로 세계 반도체 불황까지 겹치면서 하이닉스는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외환위기 당시 발행한 회사채 만기까지 몰리면서 하이닉스의 목을 옥죄었습니다. 결국 2001년 10월 하이닉스반도체는 합병 2년 만에 수술대에 오릅니다. 채권금융기관 공동관리에 들어가고 채권단의 가혹한 채무재조정이 시작됐습니다. 경쟁사였던 미국의 마이크론, 독일의 인피니온이 헐값에 인수하려는 시도만 수 차례. 하지만 이사회에서 해외매각은 부결됐습니다. 당시 외신은 이를 ‘하이닉스 스스로 내린 사망선고’라고 혹독하게 비판했습니다.
이후 하이닉스는 ‘독자 생존’을 선언하며 뼈를 깎는 자구노력에 들어갔습니다. 반도체를 제외한 ‘LCD(현대 하이디스)-통신(현대 큐리텔)-비메모리반도체(매그나칩)’ 등을 모두 팔아치웠습니다. 임금은 4년간 동결됐습니다. 임원 숫자는 30%가 줄었습니다. 인건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직원들은 2001년부터 수 차례의 자원 무급휴직을 했습니다. 2만4,000명이던 직원 수는 현재 1만2,000명으로 절반이 줄었습니다.
하지만 더욱 암울한 것은 어두운 미래였습니다. 반도체업의 특성상 적기투자가 생명이지만, 새로운 장비에 투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고민에 고민이 거듭됐습니다. 하이닉스는 결국 구닥다리나 다름없는 기존 장비를 200% 활용해 신기술에 적용하는 ‘블루칩 프로젝트’라는 공정 제조기술 개발에 들어갔습니다. ‘미친 짓이다’는 싸늘한 시선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냉소는 직원들로 하여금 ‘한 번 해보자’는 오기와 전의를 불러일으켰습니다. 퇴근도 포기했습니다. 공장에 야전침대를 깔고 숙식을 해결하며 일에만 전념했습니다. 배수진을 친 사투가 계속된 지 1년 여 뒤 하이닉스 직원들은 결국 250나노 공정에 쓰이는 장비로 120나노 D램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은 또 있었습니다. 반도체 경기가 살아나 수요는 늘었지만 새로운 공장을 지을 돈이 없었습니다. 직원들은 다시 힘을 모아 기존 200mm 웨이퍼공장(M5)을 고쳐 300mm 웨이퍼를 만드는 M10 공장으로 업그레이드시켰습니다. 생산라인에 문제가 생길까 봐 직원들은 24시간 대기하며 불량률을 최소화해 양산에 성공했습니다.
이 같은 노력으로 하이닉스는 2003년 3분기부터 영업이익을 달성했고 이후 매출 및 영업이익이 크게 증대되면서 재무구조도 한층 견실해졌습니다. 지난 2005년 7월, 하이닉스는 눈물의 축하파티를 벌였습니다. 당초 2006년 말로 예정된 채권단 관리를 1년 6개월이나 앞당겨 종료시킨 것입니다.
대출이자도 내지 못해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미운 오리새끼’ 하이닉스는 이렇게 전직원들의 피눈물과 회생의지를 자양분으로 ‘화려한 백조’로 부활했습니다.
영욕의 세월을 견뎌 낸 건설업계
외환위기 당시 고금리, 부동산가격 폭락 등은 부채비율이 높은 건설업계에 치명타를 가했습니다. 하도급업체나 중소건설업체는 물론 대기업 계열까지 심각한 유동성 위기를 맞으며 벼랑 끝까지 몰렸습니다. 하지만 이들 중 상당수가 뼈 아픈 구조조정을 통해 정상화에 성공해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특히 현대건설 등 대기업 계열 건설사는 인수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재계 순위가 뒤바뀔 정도의 초대형 인수·합병(M&A) 매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대우건설이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 금호아시아나그룹을 새 주인으로 맞이한데 이어 현대건설도 주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2001년 워크아웃에 들어간 이후 故
1999년 3월 워크아웃에 들어간 쌍용건설도 조직과 인력을 50% 이상 줄이는 강도높은 구조조정을 단행했습니다. 2001년 ‘경희궁의 아침’ 분양 성공을 회생의 발판으로 삼아 2003년 경상이익 557억원으로 흑자전환에 성공했고, 2004년 드디어 워크아웃을 졸업했습니다. 2006년 초에는 인도 고속도로 5개 공구 발주에서 4개 공구를 단독 수주하는데 성공해 ‘해외건설명가’로서 옛 명성을 되찾고 있습니다.
중견건설사 중에는 일성건설, 한신공영, 극동건설 등이 법정관리에서 벗어났고, 경남기업, 남광토건, 벽산건설 등도 워크아웃을 졸업했습니다.
위기를 극복한 또 다른 영광의 주역들
대기업과 중견기업을 막론하고 외환위기 당시 존폐 위기까지 처했다가 회생에 성공, 글로벌 시대의 새로운 주역으로 거듭난 사례는 부지기수입니다.
SK네트웍스(舊 SK글로벌)는 외환위기에 이어 2003년 3월 대규모 분식회계 사건까지 터지면서 그룹을 위기로 내몬 주인공이었습니다. 같은 해 9월 청산유예를 조건으로 워크아웃에 들어간 이 회사는 그러나 경영정상화 계획을 모범적으로 이행해 빠른 정상화에 성공했습니다. 2005년 영업이익 3,559억원을 기록하면서 채권단과 약속한 목표치를 3년 연속 초과 달성했고, 상사 뿐만 아니라 정보통신, 에너지 판매 등 탄탄한 사업구조를 갖춰 다른 종합상사로부터 부러움을 살 정도입니다.
대한통운 역시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주인공입니다. IMF 당시 母기업이던 동아건설 지급보증으로 동반부도가 나면서 법정관리에 들어간 이 회사는 이제 금호, STX, 골드만삭스 등 쟁쟁한 기업들이 지분경쟁을 벌일 정도로 매력적인 기업으로 변모했습니다.
3. 활짝 열린 CEO시대
세계 경영신화를 만들었던
외환위기는 재계에 이른바 ‘CEO(최고경영자) 전성시대’를 낳았습니다. 오너 중심의 총수경영이 뒤로 물러나고 전문경영인들이 전면에 부각됐습니다. 재계 수장들의 잇따른 교체 속에 CEO 품귀현상까지 나타나면서 ‘CEO 시장’도 형성됐습니다. ‘스타 CEO, CEO 주가’라는 신조어들도 외환위기 이후 본격 등장했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최대의 히트상품이 CEO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습니다. 특히 글로벌 기준에 맞춘 선진경영제도가 정착되면서 전문경영인을 중심으로 한 ‘자율경영’이 재계 화두로 제시됐습니다. 소유-경영 분리, 사외이사제도, 주주가치우선 등 미국식 지배구조가 기업들의 이상적 모델로 자리잡으면서 과거 ‘총수 중심의 1인 지배체제’는 설 자리를 잃었습니다. 대신 능력과 실적으로 무장한 CEO들이 곳곳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CEO 전성시대’를 만들었습니다.
사라진 황제경영, 떠오른 전문경영
총수 중심의 황제경영은 IMF 외환위기를 불러온 주범으로 지목됐습니다. 정보를 독점한 채 진행된 황제경영은 외환위기 이전 기업 성장과정에서는 주목받았습니다. 하지만 IMF를 거치면서 불투명하고 불합리한 경영의 대명사로 떠올랐습니다. 이후 이른바 오너로 불리는 소유경영인들은 그룹이 쓰러지면서 하나 둘씩 뒤안길로 사라졌고, 전문경영인들이 그 자리를 메웠습니다. 살아남은 소유경영인들의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전문경영인과 콤비를 이루는 ‘오너+전문경영인’ 시스템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식 전문경영인 체제가 유립식 가족경영체제보다 낫다는 사회적 인식이 확산되면서 전문경영인들은 더욱 부각됐습니다.
외환위기 이전에도 전문경영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능력보다는 그룹 총수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거나 대외적 관계를 위한 얼굴마담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IMF를 거치면서 전문경영인의 질적 업그레이드가 이뤄진 것입니다.
강우란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소위 능력없는 소유경영인이 많이 바뀌었다”면서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전권을 휘두르던 소유경영자들이 물러나고 전문성을 갖춘 전문경영인을 대거 기용하기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강 연구원은 “스톡옵션 등 전문경영인들에 대한 보상시스템 등도 정착됐다”고 덧붙였습니다.
CEO부상은 실적 중심의 성과경영을 낳았습니다. 경영성적에 따라 CEO에 대한 냉혹한 평가가 이뤄졌고 이는 곧 인사로 이어졌습니다. 신현한 연세대 경영학부 교수가 1993~2002년의 비금융상장사 4,792개사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외환위기 이전인 1994~1996년의 CEO 교체비율은 16.9~18.3%에 그쳤으나 1997~2001년에는 21.4~24.2%로 크게 늘어났습니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기업들이 목표를 외형성장보다 성과에 두면서 나타난 현상이라는 게 신 교수의 분석입니다.
복수 CEO 전성시대
전문경영인이 부각되면서 한 기업에 대표이사가 여러 명 있는 ‘복수 CEO시대’가 탄생했습니다. 기업이 커지면서 총수나 CEO 한 명이 사업을 모두 관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업을 넓힐 때마다 해당 분야의 전문경영인을 잇따라 영입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삼성전자가 대표적입니다. 삼성전자의 분기보고서에는
POSCO는 2006년 2월 각 부문장들이 모든 권한을 갖고 집행하는 책임부문제를 도입하면서
삼성경제연구소가 1986~2004년 증권거래소 상장사 자료를 분석해 만든 ‘한국 CEO 시스템의 변화’ 보고서에 따르면 519개사 대상 조사기업 중 절반(49.4%) 가량이 두 명 이상의 CEO 시스템으로 운영됐습니다. 기업당 평균 CEO수는 1.6명이었습니다. 2002년 당시 복수대표이사 체제를 갖춘 회사는 전체 669개 상장사의 37.9%인 254개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큰 변화입니다. 이는 외환위기 이후 오너와 전문경영인이 함께 일하는 ‘소유+전문 CEO’ 형태의 기업비중이 커지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게 연구소의 분석입니다.
특히 최근 들어 그룹마다 자율경영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실무형 ‘부회장’을 두는 곳도 많습니다. 신속하고 효율적인 의사결정구조로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겠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삼성, LG, SK, 금호아시아나, 동부 등 대부분의 대기업들은 그룹 내 각 계열별로 총괄하는 부회장을 두고 자율경영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사라진 연공서열주의, 성과주의 정착
CEO시대가 정착되면서 자연스럽게 기업문화도 성과 중심으로 급속히 전환됐습니다. 나눠먹기 식이나 나이 순대로 승진하는 연공서열주의는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삼성, 현대차, SK, LG 등 재계 인사에서 업적 중심의 발탁인사는 빼놓지 않고 등장합니다. 과장급 팀장이 부장과 차장을 팀원으로 거느리는 경우는 이제 흔한 일이 됐습니다.
삼성전자는 2000년부터 연말실적에 따라 PS(초과이익분배금)를 나눠줍니다. 같은 삼성전자라고 하더라도 반도체와 휴대폰 등 총괄별 실적에 따라 받는 금액이 다릅니다. 이 때문에 연봉 역시 천차만별입니다.
LG전자는 ‘타겟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2005년 LG전자는 1년 안에 1조원 짜리 프로젝트를 달성하면 30억원을 주겠다는 목표를 던져 이를 달성한 팀에 인센티브를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볼 수 없던 모습이었습니다. 아울러 LG전자는 성과에 따라 매년 하위 5%의 인력을 퇴출시킵니다.
성과를 우선으로 하면서 외환위기를 계기로 직원들의 가치관 역시 많이 바뀌었습니다. 재계 관계자는 “외환위기 이후 다른 직원들과 더불어 업적을 내는 집단주의보다는 인센티브와 승진 기준이 되는 성과 달성을 위한 개인주의가 확산됐다”고 말했습니다.
4. 막내린 ‘구조본 시대’
실제 공정거래위원회는 책임경영과 투명경영을 위해 구조본의 활동과 경비조달, 경비사용내역, 계열사 간 비용분담계약까지 의무적으로 공개하는 방안을 추진했습니다.
1998년
삼성은 2006년 2월 ‘2·7 개혁안’을 발표하며 계열사별 자율경영을 위해 구조본을 전략기획실로 바꾸고 관련 조직을 축소했습니다. LG그룹은 2003년 지주회사 체제로 출범하면서 자연스럽게 구조본이 ㈜LG로 바뀌었습니다. ㈜LG는 그룹 사업전략과 CEO인사 등을 주로 관리합니다. 법인이어서 회사법 적용까지 받습니다. 올해 SK 또한 기존의 SK를 ㈜SK와 SK에너지로 분할하여 지주회사체제를 출범하였습니다. 애초에 구조본이 없던 현대자동차는 기획조정실을 통해 그룹의 중장기 사업계획과 미래비전을 그리고 있습니다.
구조본이 모두 사라졌지만 그 역할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강조되고 있습니다. 계열사간 중복투자방지와 장기비전제시 등 그룹 경쟁력 강화를 위한 중간조직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입니다. 때문에 구조본이 전략기획실, 기획조정질 등으로 옷만 갈아입었다는 비판도 나옵니다. 재계 관계자는 이에 대해 “기업들이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구조본이 어느 정도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며 지금도 투자조정 등 역할은 여전히 유효하다”면서 “자율경영제체 아래서도 다른 형태의 총괄조정기구는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5. 실종된 기업가 정신
“기업이나 업종 특성 구분 없이 부채비율을 일률적으로 재단하는 것은 문제다.” “투자를 위축시킨다.” 정부의 이 같은 가이드라인은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키지만 우리 기업들의 경영패턴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습니다.
총수의 감(感)과 차입에 의존하던 투자패턴은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오히려 막대한 현금을 쌓아두고 돌다리를 여러 차례 두드려 본 뒤에야 투자에 나서는 경영패턴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부채비율 200%의 마방진(魔方陣)
10년 前 IMF 외환위기 당시의 살벌한 분위기를 경험한 현직 기업인들에게 10년 前에 비해 지금 무엇이 달라졌는가라고 물으면 경영 트렌드가 성장에서 안정으로, 도전에서 관리로, 감각에서 숫자의 시대로 변했다는 말들을 합니다.
과거에는 총수의 리더십과 감각에 따라 저돌적으로 나섰지만 지금은 소액의 투자를 하더라도 재무담당부서와 이사회가 먼저 성공가능성을 따져보고, 회사가 보유한 은행 잔액도 뒤져본 뒤, 경쟁사의 움직임까지 면밀히 분석해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이익이 많이 남는 기업들도 일단 투자를 하기보다는 곳간에 곡식을 채울 수 있는 만큼 채워 놓고 보자는 식입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과학적이라는 표현이 맞습니다.
하지만 IMF 위기 이후 은행들의 생사가 숫자 8(BIS기준 자기자본비율)에 따라 결정됐고, 부실기업으로 낙인 찍혀 시장에서 퇴출되느냐 마느냐가 200(부채비율)이라는 총합으로 정해지는 마방진(자연수를 정사각형 모양으로 나열하여 가로, 세로, 대각선으로 배열된 각각의 수의 합이 전부 같아지게 만드는 게임)의 틀 속에 기업가와 기업들을 가뒀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최근 투자감소, 현금과다보유, 기업가 정신 실종, 역동성 부족 등 IMF 외환위기 이후 나타난 기업경영 트렌드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목소리가 점차 커지면서 1998년 당시 퇴출기업기준을 200%로 제한했던 점을 원죄로 지적하는 견해도 적지 않습니다.
한 대기업 고위 관계자는 “BIS 8%나 부채비율 200%는 사실 아무런 근거가 없었는데도 당시 정부가 기업들에 획일적 준수를 지나치게 강조한 측면이 있었다”면서 “당시는 이를 따르지 않으면 회사 망하는 줄 알았다”고 회고했습니다.
사라지는 기업가 정신
최근 외환위기 이후 나타난 여러 부작용 중에서 근본적인 원인으로 지적되는 현상은 우리 기업과 기업가들에게서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 또는 ‘기업가 정신(Enterpreneurship)’이 사라졌다는 점입니다.
과거에는 타고난 동물적 감각을 무기로 운동장을 헤집는 스포츠맨처럼 우리 기업인들에게는 야성적 충동, 또는 기업가 정신이 있어서 무한대의 영토확장을 꿈꿨지만 이제는 위험한 곳은 절대 가지 않는 보수적 습관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대한민국 산업은 경쟁적인 기업가 정신을 바탕으로 1950년대 섬유, 1960년대 건설 및 전자, 1970년대 중공업, 1980년대 자동차, 1990년대 반도체 등의 신시장에 뛰어들어 전세계적으로 높은 경쟁력을 갖추게 됐습니다.
반면 IMF 외환위기 이후에는 이전 성공 작품들을 조심스레 키우거나 답보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습니다. 이제 기업가 정신의 상실은 투자위축 -> 고용 축소 -> 소비 위축 -> 국가경제의 성장잠재력 하락 등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기업들의 현금보유량 또한 늘어나면서 수많은 헤지펀드의 타겟이 되고 있습니다.
지난 2006년 9월말 현재 581개 상장기업이 보유한 현금성 자산의 규모는 무려 64조원으로 IMF 이전인 1996년말 약 20조원에 비해 3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이러다 보니 우리나라 상장 제조기업의 부채비율은 79.8%(2006년 9월말)로서 미국의 130.4%(2006년 6월말), 일본의 124.1%(2006년 6월말) 등에 비해 60% 수준에 놓여 있습니다.
현금보유량이 지나치게 늘어났다는 것은 인간으로 치자면 비만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못 먹어서 너무 마른 게 문제였다면 이젠 현금을 과다 섭취해 하루 빨리 다이어트를 하고 균형 잡힌 몸매로 만들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외환위기 이후 우리 기업들은 도전적 정신을 갖더라도 현실성을 충분히 검토하는 바람직한 좋은 습관이 생겼다”면서 “정부가 외환위기 이후 실종된 기업가정신을 다시 살리고 싶다면 기업들에 투자하라고 말로만 외칠 게 아니라 기업들이 불확실성을 극복하고 마음 놓고 투자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6. CFO, ‘경영의 브레인’으로
외환위기는 국내 경제계에 최고재무관리자(CFO, Chief Financial Officer)란 ‘생소한’ 용어를 히트시켰습니다. 재무관리 선진국인 미국에서는 이미 CFO가 사실상 증시상장기업들의 의무보유직이었지만 기업 오너가 회사 돈을 떡 주무르듯 했던 적지 않은 한국기업들에겐 CFO는 그야말로 외계인의 용어였던 셈입니다.
그다지 먼 얘기도 아닙니다. 불과 4~5년 전만 해도 대한민국에서 손꼽는 굴지의 기업도 CFO라는 직위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헤지펀드의 공격이 증가하고 잇따른 분식회계사건으로 재무관리의 중요성도 커지면서 우리 기업들은 하나, 둘 CFO라는 자리를 마련하게 됩니다.
최근 한국CFO협회가 국내 증시에 상장된 약 1,700개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400여 개 기업만이 CFO를 임명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나머지 기업들 중 상당수는 비교적 고위직 임원을 통해 재무를 맡기거나 직급이 낮은 직원을 공시담당자로 두고 있는 것으로도 조사됐습니다. 그렇다고 이들 400여 개 기업이 사전적 의미의 CFO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CFO로 임명은 했지만 사실 엄밀히 따지면 반쪽 CFO가 적지 않습니다.
CFO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미국 재무인협회(AFP)에 따르면 CFO는 재무분야(Treasureship)와 통제분야(Controllership)를 총괄해 담당하는 최고임원으로 정의됩니다. 여기서 재무분야는 기업금융, 자금조달, 투자, IR을 담당하는 것을 말하는데 반해 통제분야는 예산·사업계획 수립, 경영정보시스템 관리, 내부통제를 담당하는 보다 고차원의 임무입니다. 내부통제를 하려면 적어도 CEO나 오너와 대등한 지위가 보장돼 이들을 견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져야 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기업 대부분은 아직도 CFO가 공시를 책임지거나 재무업무만 담당하는 임원쯤으로 축소 해석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CEO와 오너의 부당한 경영활동에 맞설 힘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한계점도 지적되는 것입니다. 우리 기업들이 CFO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신데렐라’ CFO의 탄생도 잇따르는 것은 분명합니다. 사장으로 승진해 CEO로 변신하거나 대내외에서 사회적 신망을 두텁게 받는 경우입니다.
국내 기업 중에서도 기업지배구조가 비교적 좋은 회사에 근무한 덕분에 나름대로 CFO로서의 자기 역할을 소신있게 할 수 있었다는 게 이들에 대한 업계의 공통된 평가입니다. 한국 CFO협회의 임우돈 사무총장은 “아직도 CFO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독립된 권한도 부여하지 않는 기업들이 대부분이지만 외환위기 전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낄 만하다”면서 “선진국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CFO이 존재가치는 더욱 커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7. 붕괴된 경제 국경
삼성토탈의 중국 담당 업무를 하는 L차장은 매주 월요일 아침 비행기를 타고 중국으로 출근합니다. L차장은 100여 개나 되는 중국 내 거래처 관리 담당으로 서울 본사 소속입니다. 그러나 월요일 아침 중국 베이징 등으로 출근한 뒤, 토요일이면 집으로 퇴근합니다.
SK㈜에 근무하는 K부장은 글로벌이라는 단어를 절감합니다. K부장은 “엘리베이터를 타면 내가 한국에 있는지, 외국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한쪽에서는 중국어, 다른 한쪽에서는 영어가 들려와 동료와 우리말로 대화하려면 왠지 쑥스럽다”고 말합니다.
대기업 사무실 주변에서 김치찌개를 먹는 외국인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닙니다. 외환위기 10년은 기업들의 DNA마저 바꿔놓고 있습니다.
사라진 경제 국경
현대·기아차 그룹은 현재 중국, 인도, 미국 등에 3개 신규 생산라인을 건설 중입니다. 올 3월에 공사를 마무리한 슬로바키아 공장이 본격 가동에 들어감으로써 현대·기아차 그룹의 해외생산능력은 연 130만 대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글로벌 자동차 메이커로 도약하게 된 것입니다.
산업자원부에 따르면 국내 기업들의 해외 직접투자는 61억 달러(신고기준) 수준이었으나, 2006년에는 125억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이미 제품 별로 해외생산능력이 국내생산능력을 넘어선 분야가 많습니다. 고용인원도 해외가 국내를 넘어섰습니다. 외환위기 전인 1990년 중반만 해도 엄두도 내지 못한 변화가 국내기업들에 찾아온 것입니다.
LG전자 가전제품의 경쟁상대는 더 이상 삼성전자가 아닙니다. 글로벌 가전 메이커입니다. 최근 미국의 모 일간지가 입사시험 상식문제로 LG를 출제한 것은 다국적기업의 반열에 오른 국내기업들의 위상을 대변해주는 것입니다.
외국기업들의 국내진출도 활발해졌습니다. 대형 인수·합병(M&A)를 통해 국내기업을 삼키며 한국경제의 확고한 한 축으로 자리잡았습니다. GM대우, 르노삼성이라는 혼혈 브랜드도 더 이상 낯설지 않습니다. 휴대전화 등 첨단 정보기술(IT) 업종에서는 한국시장이 글로벌 테스트 마켓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산자부에 따르면 외국인 국내직접투자액은 1996년 32억 달러 선에서 2006년에는 112억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외국인 지분이 50%를 넘는 외국인 투자기업 수도 지난 1996년 3,375개에서 2005년에는 1만4,936개로 4배 이상으로 늘었습니다.
시스템도 글로벌
IMF 위기는 기업들의 소프트웨어도 바꿔놓았습니다. IMF 위기를 겪으면서 지배구조나 회계제도 투명성이 크게 호전됐습니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근접했다는 평가가 내·외부에서 나왔습니다.
POSCO는 지배구조 우수기업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IMF 위기가 닥친 1997년 POSCO는 국내 대기업 가운데 처음으로 사외이사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국내 기업에서 사외이사는 말 그대로 그냥 ‘자리’였습니다. POSCO는 이후 1998년에 최고경영자(CEO) 중심 체제를 갖췄고, 2000년에는 이사회 중심 경영을 도입해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 즈음에 사외이사는 이사회 멤버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습니다. 더 나아가 POSCO는 2006년 이사회 의장과 CEO를 분리하고, 사외이사 중에서 이사회 의장을 선임해 신선한 충격을 줬습니다.
POSCO처럼 이사회 중심 경영에 적극적인 곳은 삼성과 SK입니다. 역시 시발점은 IMF 위기였습니다. 지배구조를 개선하라는 내·외부의 압력은 사외이사제 도입을 골자로 한 이사회 중심경영으로 이어졌습니다. 삼성은 2006년 금융계열사를 중심으로 이사회 의장과 CEO를 분리하는 방안도 도입했습니다. 조만간 비(非) 금융 계열사로도 이어질지 주목됩니다. 하지만 상장 계열사는 물론 비상장 계열사까지 이사회 내 사외이사 비중이 70%에 달해 외부견제를 상당 부분 수용하고 있습니다.
지배구조 선진화의 또 다른 축은 지주사 체제 전환입니다. ‘모범생’은 LG입니다. 적잖은 비용부담을 무릅쓰고 지주사 체제 전환에 나선 LG는 국내 기업 최초로 2003년에 지주사 전환을 마무리해 화제가 됐습니다. 지주사 체제는 부당내부거래 억제, 출자구조 단순화, 문어발식 사업 확장 억제 등의 효과를 나타냈습니다. 출자총액제한제 등 각종 규제에서도 자유롭습니다. LG의 지주사 ㈜LG와 하위계열사들의 주가가 재평가받은 이유입니다. SK 또한 올해 ㈜SK와 SK에너지의 분할을 통해 지주사 체제 전환을 완성했습니다. LG 이후 많은 기업이 지주사 체제 전환을 모색 중입니다. 한화, 두산, 금호, 아시아나, 코오롱, 대상 등이 후보군입니다.
회계제도 선진화도 급진전됐습니다. 공정공시제, 증권집단소송제 등 회계 투명성을 유인하는 제도가 속속 도입됐습니다. 정부는 분식회계에 대해 자진신고 시 사면을 해주는 인센티브를 실행해 기업 스스로 회계 투명성을 제고하도록 했습니다. SK글로벌(現 SK네트웍스) 분식회계로 혼쭐이 났던 SK그룹은 2006년 중순 ‘IR(투자설명회)’ 뿐만 아니라 ‘ER(임직원 대상 설명회)’도 도입하는 등 회계선진화에 앞장 서고 있습니다.
설 자리 잃은 ‘순혈주의’
LG전자는 최근 국내외 인사제도를 통일시키는 작업을 완료했습니다. 국내외 직원 등을 차별하지 않고 평가, 보상, 채용 등 동등한 조건에서 평가하고 키워가겠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외환위기 이후 국내 본사 인력을 우대하던 순혈주의는 기업에서 사라졌습니다. ‘우물안 개구리’에 안주하던 기업들이 전세계로 뻗어가면서 순수 외국인을 임원으로 채용하는가 하면, 현지인들을 적극 인재로 키워가고 있습니다.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은 인재수혈의 영역을 세계로 넓혀 대학으로, 기업으로 뛰어다니느라 분주합니다.
삼성전자는 올해 임원인사에서 정보통신총괄 소속 중국 마케팅 담당인 주효양 상무보와 중국법인 마케팅 담당인 왕통 상무보를 각각 상무로 승진시켰습니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 본사에는 디지털미디어총괄 마케팅팀 소속의 데이빗 스틸 상무와 함께 외국인 상무가 3명으로 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