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두둑 후두둑
어렴풋이 들리는 빗소리에 눈이 떠졌다
어제밤 자기 전 화장실 갔다 올 때 들었던 그 빗소리다
머리 맡에 풀어 놓았던 손목시계도, 맞춰 논 시간이 다 되어 가는지 알람 소리를 낸다
눈을 부비며 시간을 보니 5시
벗어둔 바지를 챙겨 입으며 오늘부터 시작 될 그녀와의 만남이 초장부터 애를 태우겠구나
하는 생각에 동작이 굼떠진다
그녀를 알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저녁을 먹고 늘 하던 대로 인터넷바둑을 두는데, 그날따라 지성에 대한 바이오리듬이 안
좋은지 몇 수 두지도 않았는데 벌써 패색이 짙어 왔다
상대가 장고를 하는 사이 난 적을 두고 있는 몇 개의 까페에 뭔가 읽을 거리라도 있나
싶어 뒤적이는데, 아주 오래 전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있던 그녀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난 그 순간 소름이 돋을 정도의 전율을 느끼며 “그래 이거야 이거”를 외치며 그녀에 대한
탐문에 나섰고, 오늘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밖에 나와 보니 빗줄기는 그다지 굵지는 않았다
연어구이 외 몇 가지 반찬과 생바나나 한개가 접시의 반을 차지하는 반찬접시에 쌀밥과
된장국이 놓여진 식당에는 벌써 여러명이 나와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
대부분이 나처럼 그녀와의 만남에 대한 기대로 인한 것인지 긴 여정에 대한 피로 때문인지,
어제 밤 늦게까지 있었던 이번 만남의 멋진 성공을 위한 술자리가 가져다준 부담 때문인지
몇 사람은 잠을 제대로 못 잔 모습으로 자리들을 잡고 있다
대책없이 뎀벼드는 모기와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원망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아침식사
지만 하루 종일이 될지도 모를 비와의 싸움에 대비한 체력유지를 위해 부지런히 젓가락질을
해댄다
출발지인 고나시타이라(小梨平)산장은 그녀와 헤어져 다시 돌아 올 곳이기에 배낭에는
필요한 최소한의 짐만 넣고 나머지는 여행용 가방에 넣으라는 주선자의 말에도 혹시나
하여 이것저것 챙겨 넣는 바람에 배낭을 멘 어깨가 묵직하다
판초우의 형식으로 된 비옷을 걸쳐 입고 그 위에 배낭커버를 한 배낭을 둘러 메고 스틱을
짧게 뽑아 양손에 쥐고 곳곳에 빗물이 고여 있는, 고목으로 울창한 숲길을 한줄로 들어선다
몇 시간이 될지, 비는 계속 내릴지 얼마나 내릴지, 그렇게도 아름답다는 그녀 모습은 보게
될런지, 과연 이번 만남이 내게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 올런지, 여러가지 생각에 입까지
무거워진다
첫번째 만남의 장소까지 도착하는데 예상되는 시간이 11시간이다 보니 마음은 급하지만
길 옆으로는 자갈이 가득한 큰 내에는 제법 푸른빛이 도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고 왼편으로
는 산중턱에 걸린 비구름 자락 밑으로 백길이 넘을 만큼 높은 높이의 깍아지른 경사면
에서 제법 굵은 물줄기가 쏱아지는 실폭포는 마치 내가 보러 온 그녀 모습의 전부나 되는
것 처럼 자주자주 발길을 멈추게 한다
일렬로 줄을 지어 내려오는 이곳 사람들의 질서를 중시하는 모습들 또한 이채로운 풍경들로
에법 넓은 길에서도 올라오는 사람들을 위해 수십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제자리에 서서 올라
오는 사람들을 기다려 주는 것은 우리에게는 고마움을 넘어서 의아하기까지 한다
곳곳에 세워진 산장 또한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어 있음은 물론이고 물도 보충할 수 있고
숙박시설도 되어 있고 주변에는 텐트를 칠 수도 있게 마련되어 있다
우의를 입었지만 무거운 배낭과 빠른 걸음 덕에 옷은 땀으로 흥건하지만 산장에 도착하자
마자 다음 코스로 가기 위한 준비와 사진들을 찍느라고 바쁘다
어제 산장에 도착하기 바로 전에 크게 다칠 뻔한 일이 있었기에 혹시라도 사고가 나면
어쩌나 하는 마음으로 뭐든 조심하면서 그녀에게 조금씩 다가 간다
그러니까 어제, 나고야공항에 내려 전용버스로 타카야마시(高山市) 민속촌을 구경하고
희라유시(平陽市)까지 왔고 거기서 공원 버스로 환승하여 중부산악국립공원 가미코지(上高
地) 정거장에서 내렸다
정거장 부터 우리가 첫날밤을 묵을 고나시타이라(小梨平)산장까지는 배낭은 메고
여행용 가방은 끌면서 비 오는 비포장 길을 빠르게 걷다가 풀린 신발 끈을 밟아 넘어지면서
어깨를 심하게 다쳤기에 또 그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발걸음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게
된 것이다
하기야 운전기사의 제안으로 예상치도 않았던 타카야마(高山)시 민속촌을 구경하면서
저녁에 일행들과 한잔하려고 그 지방 민속주를 사서 배낭에 넣어 두었었는데 신발 끈을
밟고 넘어 질 때 술병끼리 부딪쳐 술병 하나가 깨져 버린 것이다
배낭 안은 쏱아진 술로 흥건히 젖어 버렸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에게 한국식으로 인사 치례는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서도 그래도 조심은 조심이라 한걸음 걸음에 신경
을 쓴다
가미코치(上高地,1505m)로부터 묘우진산장(明神,1550m), 도쿠사와산장(徳沢,1562m)
→요코오산장(横尾,1620m)까지는 길도 넓고 평탄 했으며 특별한 급경사가 없는 걷기 좋은 길이다
요오코산장 처마 밑에 배낭을 내려놓고 우의를 벗어 안에 물기를 닦아내고 스틱에 걸어
놓고는 산장 안으로 들어가 보니 좀 일찍 온 분들은 사진도 찍고 따듯한 커피로 몸도 데우
면서 첫 번째 산행 휴식처답게 여유를 즐기고 있다
비록 비는 제법 오지만 그리 마니 오는 것도 아니고 길도 평탄 하였기에 다들 웃는 얼굴로
산행의 고단함을 아직은 못 느끼는 것 같다
나도 자유시간과 영양갱으로 에너지를 보충한다
요오코산장부터 우리가 점심을 먹었던 야리사와롯지(槍沢1850m)산장까지 약 2.6km길은
약간 경사면에 있는 산길이다
길은 좁고 곳곳에 물이 고여 있는 길이라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나아 간다
이곳에 와서 놀란 것은 의외로 나이든 분들이 많으시다는 것이다
고히는 되었음직한 많은 분들이 단체로 떼지어 내려 온다
유심히 보지는 못하였으나 곱게 나이든 티가 나고, 여자분들도 제법 된다
우리나라는 이순이 되기 전에 벌써 산행을 그만두는 여자분들이 많은데 여기는 의외로 나이든
분들이 많다 그것도 여자분들이, 나이가 들어도 산행을 할 수 있도록 이제부터 라도
무리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며 “곤니찌와”를 연발한다
점심을 먹기로 한 야리사와롯지(槍沢1850m)산장에 도착하니 비기 제법 오는데 마땅히 밖에
앉아 도시락을 먹을 곳이 없다
배낭은 산장 밖 처마 밑에 내려놓고 도시락을 꺼내들고 하나둘 산장 안으로 들어간다
산장 안에는 우리나라처럼 나무로 된 마루가 있다
마루 끝에 죽 줄지어 앉아 주먹밥으로 된 도시락을 까먹는다
이제부터는 오르막이 계속 된다고 하니 목은 마르지만 주먹밥을 꼭꼭 씹어 먹으며 2끼식사
를 포함한 하룻밤 숙박료가 만엔이나 한다는 산장 내부를 둘러 본다
목욕탕도 있고 화장실도 내부에 차려져 있다
식사 후 100엔이나 하는 일회용컵에 타먹는 무인 커피를 한잔하고 다시 배낭을 추스르고
본격적인 산행에 들어 간다
여기의 길 표시는 우리나라처럼 리본을 단 게 아니라 바위나 돌에 하얀색으로 동그라미를
일정 간격으로 그려 놓아 길을 표시하고 있다
맨 처음 본 동그라미 표시는 직경이 1m는 되게 그려 놓은 것 같다
고산이라 나무가 없어 그리 했나보다 하는 생각도 들지만 결국 쓰레기가 되는 리본과 비교
했을 때 이지방의 특색에 맞게 여러 가지로 산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점심을 먹었던 야리사와롯지(槍沢1850m)산장에서 오늘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야리가다케산
장(槍ヶ岳山荘 3060m)까지는 나무가 없는 지역이다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한 땀과 빗물은 배낭 안은 물론 팬티까지 젖어들어 가고 있고 그렇게
도 믿었던 신발도 왼쪽 것은 밑에서부터 서서히 젖어 오고 있다
기온은 점점 더 낮아지고 경사면은 점점 더 가파라 진다
길은 완전히 굵은 마사 같은 잔돌로 된 길이거나 너덜이다
길 옆으로 흐르는 계곡물은 그 빠른 속도 만큼 큰 소리를 내면서 흘러 간다
간간히 만년설도 보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하얀 개당귀 꽃대가 즐비한 경사면도 있고 어떤
곳은 산딸기 나무가 군락을 지어 있다
길의 경사가 급하니 쉬어 쉬어 가면서, 맛은 쓰고 시큼하지만 그래도 약간 단맛이 나는
우리나라 것보다는 서너 배가 큰 산딸기를 한 움큼씩 따서 입에 털어 넣고 인상을 써대며
씹어 먹는다
산정상부에 가까워 오면서 비와 함께 안개가 앞을 가린다
선두로 올라가던 두 여자분은 능선을 넘었는지 안보이고 가이드 역시 뒤로 쳐져 있기에 길
을 가늠하지 못하겠다
산 정상부 중턱에 있는 길 옆 산장에 가니 산장이 텅 비어 있다
누구 없소 소리쳐 부르니 아가씨인지 아줌마인지 여자분이 나온다
더 높은 곳에 산장이 있다는데 어느쪽으로 가면 되나요 하고 어눌한 일본말에 눈짓손짓으로
물으니 왼편으로 가란다
산장을 나와 나온 산장 뒤쪽을 보니 능선에 이정표가 보이고 건물 같은 것이 어렴풋이 보인다
다왔구나 하는 생각에 몸도 가벼워지고 발걸음도 빨라지려는 데 뒤쪽에 쳐져 있던 일행이
그쪽이 아니라며 불러 세운다
길지 않은 알바였지만 가스로 가득 찬 이곳에서 가이드가 앞서서 일행은 가이드하지 않고
뒤에 쳐져 오는 것을 투덜대며 마지못해 일행을 따라가니 길의 경사가 급해지면서 그 위쪽
으로 또 다른 건물이 보인다
야리가다케산장(槍ヶ岳山荘)
해발 3060m에 있는 산장
600여명을 수용한다고 하니 우선 그 크기가 놀랍다
산장 바로 옆으로 월악네 영봉 모양 순전히 바위로 날카롭게 불쑥 솟아 오른 봉우리
그녀의 상징이기도 하고 3일 내내 우리의 사랑을 독차지할 3180m 높이의
야리가다케(槍ヶ岳)산이 있다
우리가 안개를 뚫고 산장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4시경
주변은 가스로 아무 것도 안 보인다
비와 땀으로 흠뻑 젖은 몸
마른 옷으로 갈아 입고 경주를 하듯 건조실로 달려 간다
제트엔진 모양 생긴 건조기에서 뻘건 화염이 쏱아져 나오는 좁고 긴 건조실은 그야 말로
아비규환이다
신발이며 옷을 보다 빨리 말리기 위해 일본사람이며 외국사람들까지 섞여 부딪치고 넘어지
고 안통하는 언어들까지 합세하여 화염 앞은 불의 지옥이다
겨우 겨우 옷고리를 찾아 바지를 걸고 신발을 매달아 건조기 앞쪽에 걸어 놓고도 혹시 타지
나 않을까 누가 집어 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 수시로 들락 날락 하다보니 저녁식사 시간이다
한쪽에서는 해 너머 가는 모습이 장관이라며 산장 앞 뜰로 들 나가는데
뒤쪽에서는 신고 나갈 쓰레빠가 없어 전전긍긍이다
창문을 열고 본 앞쪽 하늘에는 능선 위로 쫙 펼쳐진 구름 그 위로 뻘건 빛이 가득하다
순서를 기다려 쓰레빠를 얻어 신고 나가 본 산장 옆 조망대는 가히 장관이었다
바로 앞쪽으로는 초록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말끔한 산등성이 들이
더 멀리에는 흰구름이 자리를 편듯 반듯이 깔려 있고
석양의 지는 해는 그 위에 황금빛 칠을 하고 있다
서쪽에서 불어 오는 바람을 모르고 두둑치 못한 복장으로 급하게 나온 탓에 온 몸을 덜덜
떨어가며 연신 사진을 박아 대지만 그녀의 첫대면을 찍은 사진은 실물과 비교해 너무나
빈약하다
오늘의 수고와 내일 보게 될 그녀 모습등을 얘기하며 앉은 저녁식사 자리
좀 늦게 들어온 분이 “지금 석양빛이 너무 멋지다”는 말에 누군가 창문을 열어 젖친다
안개가 점점 더 걷히면서 식탁 옆 창문 너머로 석양의 장관이 펼쳐진다
젖은 신발을 최대한으로 말리면서 건조된 옷을 찾아 내일 산행을 대비한 배낭 정리를 마치
고 매끄러운 사다리를 타고 이층 침대로 향한다
너무 멋진 그녀의 향기에 취했는지 몇몇 사람은 식사를 못할 정도의 고통을 토로했고 나
또한 머리가 아프고 잠이 안온다
고산증세란다
비 속을 뚫고 올라오며 다시는 안 오리라
아무리 그녀가 아름다운들 오늘의 고통과 바꿀 수 있을까
내가 가려는 곳은 왜 이렇게 늘 비와 구름과 안개로 방해를 받을까
영월의 백덕네는 세 번을 가서야 겨우 그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백두네은 북파 서파 남파를 다 올라도 그 멋지다는 천지를 콧등 만큼 밖에 본 것이 없으니
그녀를 보기 위해 여기를 또 이 고생을 해가며 오란 말인가
배낭은 커버를 했는데도 비를 고스란히 맞은 것 처럼 속까지 젖어 버렸고
안 샌다고 그렇게도 믿었던 신발은 산행길 반 조금 넘어서면서 부터 젖어 버렸다
비록 실폭포와 용틀임하듯 구비쳐 흐르는 계곡 물이 간간히 맘을 다스려 주었지만
올라오는 내내 다시는 그녀을 찾지도 갈망하지도 않을 것임을 백번을 더 되네었을 텐데
이제까지의 모든 고통이 그 석양빛으로 가득했던 구름을 보는 순간에 사그러 들었던 말인가
내일은 어떨까?
난 이사람들과 잘 섞여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빨리 자야지 낼 힘이 안들텐데
옆에서는 벌써 코고는 소리가 들린다
내려 와 배낭에서 수면제를 찾아 먹고 다시 미끄럽기 그지없는 사다리를 타고 2층으로 올라 간다
“팔이 부러졌다”
“뭐라구요? 정말이에요?”
“팔이 부러졌어,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다가 미끄러지면서 팔이 부러졌어요”
머리가 띵한 가운데 또렸이 들리는 말이다
어제밤 수면제를 먹고 자기는 잤지만 밤새 고산증으로 머리가 띵해 숙면이 안된 상태에서
들려오는 말 자체가 의아할 정도로 믿기지 않는다
어떻게 갑자기 팔이 부러진단 말인가?
일행 중 입이 좀 가벼운 사람이로구나 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아침 일출을 본다고 야단 법석
인 가운데 들려오는 그 사람의 그리 절박하지 목소리는 스스로가 너무도 어의가 없어서
인지, 일출을 보겠다고 설쳐대는 사람들에게 미안해서 인지 그리 절박하게 외쳐 대지를
못한다
산행대장은 산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국청년을 찾으러 가고,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옷을 찾아 입느라고, 우리가 자고 있던 20명을 수용하는 방안은 갑자기 부산해 진다
다친 사람은 산장사무실로 안내받아 가고,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은 어둠 속으로 빠져
나가고 방안은 다시 조용해지면서 한번 더 잠을 청해 본다
눈이 매혹적으로 생긴 여자분이 어제 그 빗 속을 올라오면서
“저는 요, 어디를 가든 꼭 멋진 경치를 봐요”
‘제가 왔기 때문에 내일 분명히 멋진 그녀 모습을 볼 거에요“
하이톤의 목소리도 목소리지만 애교가 철철 넘치는 게 에법 남자들 좀 녹였을 거 같다
정말 그 여자분 말처럼 오늘은 그녀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기를 고대하며 커튼을 열어
젖히니 밖으로 부터는 여명의 새벽 빛이 쏱아져 들어 온다
아침식사를 하고, 다쳐 헬기로 후송될 사람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나서는 야리가다케산장
(槍ヶ岳山荘) 앞 뜰에는 야리가다케(槍ヶ岳)산 봉우리 좌우로 펼쳐지는 솜이불 같은 운무와
그녀의 플레어 치마자락 같은 산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야리가다케(槍ヶ岳)산 앞으로는
우리가 가야 할 오르락내리락하는 능선이 아침 햇살에 검은색으로 다가 온다
어제의 그 고통들은 바짝 마른 신발에 씻지도 못한 발을 밀어 넣으며 다 잊혀졌고
오늘 우리에게는 그저 감탄과 감사와 경이 만이 있을 뿐이다
오른쪽으로는 이름을 알 수 없지만 녹색과 흰색이 조화를 이루는 늠름한 자태의 그녀의
치맛자락 일부가 자리하고 있고 오른쪽으로는 날까로우면서도 아름답기 그지없는 장미꽃
같은 능선이 자리했다
어제 안개 속에 올라 오다가 알바를 했던 산장도 보이고 산딸기 가득했던 계곡도 보인다
운무가 배경이 되어 솥아 오른 그녀의 자태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초록색 새색시가 우리
앞에 다소 곳이 절을 하는 듯 “유쮸꾸시이(美) 데스네”다
말로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답다
뒤를 돌아 보면 지나온 능선길이 아침 햇빛에 반사되어 돋보기를 쓰고 보는듯이 선명하게
보이고 뒤따라 오는 사람들은 저 멀리 자그만 점으로 선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폰과 디지털 카메라로 번갈아 가며 그녀의 모습을 담아 보지만 너무 너무 초라하게
보여지는 사진 속에서의 그녀 모습에 성이 안차 큰 눈으로 다시 한번 그녀를 훑어 본다
야리가다케산장(槍ヶ岳山荘)으로부터 얼마 까지는 잔돌과 너덜지대였지만 그리 큰 경사가
없는 걷기가 괜찮은 완만한 능선길이다
약 8km의 길을 11시간 정도 걸려야 한다는 안내도가 이상하다 할 정도로 좋은 길의 연속
이라 콧노래도 에법 나올 만한데 아직도 서로 익숙하지 않은 일행 들이라 아직은 눈으로만
감상할 뿐이다
이런 아름다운 그녀가 우리나라에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도 나머지 생을 그녀 품에 안겨 살지 않겠나
어제처럼 그리 하루종일 비가 와도 또 오르고 오르지 않겠나
아마도 삶의 고달픈 부분도 없으리라
고통은 그녀의 품 안에서는 훅 불면 날아갈 한 점 먼지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사랑은 어느 누굴 사랑해도 이보다 더 깊고 애절하게 하지 않겠나
능선에 누워 하늘을 보고 싶고
능선서 굴러 저 밑 초록색 그녀의 깊은 계곡 속으로 숨어 들어가고 싶다
하늘을 마시고 싶고 그녀를 내 품 속에 집어 넣고 싶다
넉넉해진 마음은 같이 못한 이들에게 미안하고
같이 하는 모든 이들에게 소리쳐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싶다
사랑한다고
3000m의 고봉인 오오바미다케(大喰岳3101m)산,나카다케(中岳3084m)산을 지나 두 번째로 있는
미나미다케산장(南岳2980m)에 도착했다
가져온 초코렛으로 에너지를 보충하고 돌 위에 누워 초가을의 파란 하늘 속으로 빨려 들어가 본다
이제부터는 심한 너덜에 경사가 아주 심한 바위를 타야 하는 난코스가 있고 오늘의 하이
라이트인 기타호다카(北穂高)산장에 오르는 길이 남아 있다 한다
미나미다케산장(南岳2980m) 산장을 밑에 두고 올라서니 앞쪽으로 몇 개의 암봉이 보이고
그 뒤쪽으로 700m에 가깝다는 기타호다카(北穂高)산장에 오르는 암벽코스가 보인다
길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경사가 심한 암봉
높이 700m 거의 다가 암벽으로 되어 있다
기어 올라가야 할 것 같다
내리막이나 오르막에는 가끔은 쇠로된 사다리도 있지만 대부분 쇠사슬이 걸려 있다
내리막 길 중에 어떤길은 잔 너덜에 흙이 섞여 있어 잘못 디디면 무너져 내리는 위험한
구간도 있고 어떤길은 신불산 칼날능선 보다도 백배는 위험한 양 옆이 천길 직벽의 바위로
되어 있어 서서 가지를 못하고 바위에 걸터 앉아 넘어야만 하는 아주 아찔한 바위 능선도있다
걸음이 느린 여자분들을 살짝 살짝 제쳐가며 선두로 700m를 시작하는 안부에 선두로 도착했다
스틱을 접어 배낭에 꽃아 넣고 저기압으로 빵빵해진 초코파이를 한 개 뜯어 먹고 물을 한켠
들이키고는 쇠사슬로 이어진 암벽을 올라 슨다
밑으로는 천길 절벽이다
가끔 배낭이나 스틱이 바위에 부딪치며 몸의 중심이 흔들릴 때는 등 뒤로 진땀이 난다
거의 네발로 기다시피 암벽을 오른다
가뿐 숨을 몰아쉬며 조금씩 조금씩 올라 작은 암봉들을 넘어설 때 보여지는 경치는 올라오면서
겪는 두려운 생각이나 힘든 몸에 또 다른 용기와 힘을 준다
누군가 말처럼 “이 또한 지나 가리라”
힘듬도 두려움도 한발 한발 걷는 걸음에 지나쳐 가겠지만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 역시 그 한발 한발에 묻혀 질 것이다
영원하지 못한 사랑에 아쉬움을 느끼듯이, 아름다운 그녀 모습이 암봉 사이로 사라질
때마다 또 진한 아쉬움은 마음속에 남게 되고 또 다른 아름다움을 찾아 온힘을 다해
앞에 놓인 암봉을 넘는다
기타호다카(北穂高)산장
아마도 이보다 더 멋진 산장은 없을 것이다
발코니가 있는 난간 앞에 앉아 이제까지 지나온 능선을 더듬어 본다
야리가다케(槍ヶ岳)산으로 부터 이어지는 장엄한 능선
그 양 옆으로는 이어지는 경치는 아침에 봤던 그것과는 또 다르다
바로 옆 일본젊은이는 누웠다 앉았다를 반복하며 혼자서 그 멋과 아름다움에 빠져있다
젊은 친구가 그러는 걸 보니 부럽기 그지없다
왜 난 보다 젊었을 때 이런 멋을 몰랐을까
그 젊은이 흉내를 내볼 생각에 긴 벤치에 누워 유난히 파란 하늘을 보며 오수를 청해본다
가져간 신라면에 100엔을 주고 산 뜨거운 물을 붓고 기다렸다가 댓잎인지로 싼 주먹밥과
함께 점심을 먹고는 오늘의 마지막 코스인 카라사와다케(涸沢岳3106m)산까지 넉넉한
기분으로 밟아 간다
일행 모두 다 넉넉해진 듯 이야기가 오가고 콧노래도 나온다
젊은 일본 처자들에게서 초코렛을 받아 물고 “아나따와 도떼모 유쭈꾸시이 데스네”를,
앞뒤 간격이 벌어 진 틈을 타서는 만고강산을 불러 제끼기도 하면서..
오늘의 마지막 3000m급 봉우리인 카라사와다케(涸沢岳3106m)산에 도착하니 바로 밑에
우리가 그녀 품에서 2번째 밤을 새우게 될 빨간 지붕을 가진 작은 산장이 보인다
산장 주변에 쳐진 노란색과 초록색 비박용 텐트들은 산장의 운치를 더해준다
다 왔다는 마음에 정상목 한편으로 비켜 앉아 바로 밑으로 보이는 분지 같이 아담한 계곡과
오늘 우리가 지나온 능선을 바라 보면서 오늘의 감탄과 감사와 경이로움을 생각하며 시 한
수 읇어 보려 했으나, 이를 시샘이라도 하는지 하루 종일 보이지 않던 안개가 스멀스멀 계곡
밑에서 부터 치고 올라 온다
아름다움 풍경에 잠시 동안 잊고 있었던 피로와 한기가 한꺼번에 몰려온다
호타카산장(穂高山荘2996m)은 일본에서 세 번째로 높다는
오쿠호다카다케(奥穂高岳3190m)산이 바로 위에 있어 역시 만원이다
한국인이 씨끄러워 그랬을 거라든가 뭐라든가 하여간 우리는 유리창 틈 사이로 한기가
새어들어 오는 맨 끝 방을 배정 받았지만 그래도 손비데도 써보고 이틀만에 발도 닦았다
스파게티가 포함되 있는 저녁을 먹자 마자 안개가 가져다 준 찬공기에 꼼짝을 못하고
두툼한 솜이불에 담요까지 덮어 가며 또 하룻밤을 그녀 품에 안긴다
그제 아침보다는 덜하지만 관자놀이 쪽으로 머리가 아프다
줄서 아침을 먹고 식탁에 남아 있던 따듯한 오차물을 물병에 따라 넣다가 쪽바리 놈에게
한소리 당했다 돈을 주고 사지 왜 식사용으로 나온 물을 따라 가냐는 것일 것이다
바로 앞에 쪽바리도 있고 일행도 있는 앞에서 당하니 수치스럽기 그지없다
부끄러움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바로 산장 앞뜰로 나온다
어제 아침처럼 어린 솜털 같은 운무는 산등성 바로 밑에 진을 치고 그녀의 목선을 바쳐주는
새하얀 브라우스처럼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 한껏 치켜세워 준다
식당에서 있었던 부끄러운 일은 눈을 떠 그곳을 바라보는 순간 날아가 버린다
이제는 다시는 못볼 경치가 분명하기에 한참을 뜰앞 바람막이 돌담 위로 올라가
보고 또 보고 또 본다
아름답다
장엄하다
한마디로 죽인다
그 위로 새처럼 펄펄 날아 그 새하얀 솜털 같은 그녀 품안에 잠기고 싶다
태양은 서서히 그녀의 옷자락 위로 모습을 드러내고 바람은 그녀의 옷자락 끝을 잡고 춤을
추고 있다
다시 시작하는 경사면을 쳐올라 가니 잔 너덜의 연속이다
이젠 내려가는 길만 남았다는 가이드의 말에 머리 아픈 것도 사라지고 마지막이 될 순간
순간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또 남보다 조금 더 먼저 보기 위해 가이드 뒤를 바짝 붙는다
일본에 있는 26개의 3000m가 넘는 산 중에 세번째로 높다는
오쿠호다카다케(奥穂高岳3190m)산 정상에는 집 모양의 장남감 같은 아주 작은 신전이 세워져 있다
번갈아 가며 신전 옆에 까지 올라가 앉아 사진을 찍는다
역광인데다가 사진 찍으려는 사람이 많아 제대로 사진이 안된다
바로 옆 조금 낮은 곳에 주변 경관을 찍어 동판으로 만들어 놓은 봉우리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며 그녀의 마지막 자태에 넋을 잃는다
북동쪽으로는 우리가 시작한 야리가다케(槍ヶ岳)산이 보이고 이어지는 고봉들은 능선길을
끊었다 이었다를 반복하고 있고, 저 멀리 남동쪽으로 오늘 밤부터 올라 내일이면 정상에
스게 될 일본의 영봉이요 최고봉인 3776m의 후지산이 아주 희미하게 보인다
이제는 다시 못 볼 그녀, 일본의 북알프스
야리가다케(槍ヶ岳)산의 자태가 유럽의 알프스를 닮았다하여 붙여진 일본의 알프스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북알프스
그녀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내어 주었고
우리는 그녀의 아름답고 넓은 품 속에서 3일간 감탄과 감사와 경이를 느겼다
사랑은 아름다움에서 오는 것인가?
아름다운 것 모두는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삼일간의 그녀와의 사랑은 내게 무엇을 주었을까
비록 일본이지만
쓰나미가 훑고 가고 원자로가 녹아 내려 방사능으로 오염되고 있는 나라
서서희 군사력을 키워 세계의 군사대국으로 커져 가려는 욕심을 가진 나라
어느 나라도 흉내내지 못하는 질서를 가지고 있고
아직도 천황을 받들고 사는 나라
곳곳에 사무라이들을 동상으로 만들어 놓고 사는 나라
우리나라를 두 번이나 침략했던 나라
가진자들의 넉넉함이 보이는 나라
성문화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면서도
예수님 조차도 발을 넓게 못 붙이는 나라
우리에게는 언제나 숙적의 나라이지만
이렇게 사랑을 할 수 있는 경치를 가졌다는 사실은 부럽기 그지없다
그녀의 품을 떠나 내려서는 길 또한 그 경치가 멋지다
길 양 옆으로는 독수리 날개 같이 들쑥날쑥 능선이 펼쳐져 있고, 그 능선 밑으로 흘러 내리
는 너덜 지대는 색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인위적으로 내리 부은 듯 초록과 힌색이 어우러져
한폭의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남자불알 모양 두 개가 마주하고 달린 빨간열매는 여기가 성문화가 발달된 일본임을 말해주는
듯 하고, 계곡에 쓰러져 누운 한 아름이 넘는 고목들은 일본의 현재의 어려움을 보여 주는
듯 하면서도, 그 방치함을 보면 그들의 넉넉함이 엿보인다
긴 여정의 끝이 아쉬운지 일행이 무리지어 내려오는 아름드리 고목이 즐비한 내리막 숲길을
통과하는 동안 아무런 말들이 없다
그녀에게서 얻은 뭔가를 정리하고들 있겠지
3일간의 사랑
다시는 하지 못할 사랑
아마 또 다른 사랑이 내게 찾아 올지도 모르지만
이번 사랑만큼 깊고 넓게 진심으로 사랑해 본적은 없는 거 같다
당분간은 사랑을 찾아 헤메지는 않을 것이고
이번 가을 또한 예전처럼 나를 아프게는 하지 못할 것이다
사랑했었다!
북알프스 그녀를!
고속도로 휴게소 라면
다카야마시 민속촌
다카야마시 민속촌
다카야마시 민속촌
다카야마시 민속촌
가미코지 고나시타이라 산장 길
산행길 왼편의 실폭포
해발 1500m 계곡(?)
점심을 먹었던 산장 앞 이정표
점심 도시락
길표식
산딸기
야리다케산장에서 본 석양
저녁무렵 야리다케 서편 산자락들
야리가다케(槍ヶ岳 3180m)산
야리가다케(槍ヶ岳)산 에서 본 산장
앞에 보이는 산 정상에 기타호다카(北穂高)산장이 있음
기타호다카(北穂高)산장에서